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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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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024년 1월 27일
30. 강진의 도요지와 옹기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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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2024.01.27. 18:16) 
◈ 30. 강진의 도요지와 옹기요지
강진의 도요지·옹기요지
 
2016년 3월부터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정밀 지표조사가 진행되었다. 군산대학교 박물관이 임실문화원과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여름이 시작되기 이전에 1차 현지조사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계획으로 종래에 학계에 보고된 도요지의 현황을 참고하여 조사가 진행되었다. 또한 새로운 도요지를 찾는 부분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현재까지의 현지조사와 추가조사를 통해 밝혀진 결과에 따라 강진면의 도요지의 현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도자문화의 전개과정과 우수성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백제 때 지명을 지금도 쓰고 있는 곳이 임실군이다. 어찌 보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통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백제의 지명을 지키겠다는 임실사람들의 강한 자긍심의 발로이다. 동시에 씨앗이(任) 튼실하게 영그는(實) 동네라는 지명 속 의미처럼 일찍부터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데 빼어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줄곧 거점지역을 이루었고, 삼국시대 때는 가야와 백제문화가 공존하였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내륙교통로가 교차하는 임실 월평리 산성은 내륙교통망의 허브로서 조선시대까지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임실군의 자연환경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 낸 것이 임실군의 도요지이다.
 
임실군의 도요지는 임실군 도자문화의 전개과정과 그 역사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생산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행정 구역상으로 임실군에 속하였다. 진안 도통리에서 생산된 초기청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이 임실 진구사지이다. 후백제 때 임실의 발전상을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진안 도통리는 벽돌가마에서 흙가마로 바뀌고 오직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그런데 936년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가 갑자기 침체기에 빠진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다기(茶器)와 제기(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의 왕실과 전주로의 유통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안 도통리는 후백제의 최첨단 국가산업단지로 추정된다.
 
이 무렵 진안 도통리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거나 고려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고 고려의 지방 통치제도 정비에 따른 해상교통로의 발달로 진안 도통리 장인집단이 고창, 부안 등 서해안으로 이동하였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 이후 진안고원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이주 혹은 이동함에 따라 마침내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가 문을 닫았다.
 
반면에 부안 유천리 에서는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 상감청자와 비색청자를 생산하였다.
전북 부안과 전남 강진에서 만든 천하제일의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는 고려 말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맡는다. 고려의 대몽항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부안, 강진의 청자문화가 쇠퇴한다. 이 무렵 임실군을 중심으로 진안군과 순창군, 남원시 일대에서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왜구의 잦은 침입과 극심한 피해로 가마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당시 최고의 도공들이 안전한 내륙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임실 구담 도요지 북쪽 구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당시 장인집단의 이주를 고고학적으로 방증해 준다.
부안 유천리를 운영하였던 최고의 도공들이 호남정맥의 가는정이와 마치, 구절재를 넘어 전북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것 같다.
 
후백제 수도 전주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진안 도통리를 가려면 호남정맥 마치를 넘었는데, 마치는 본래 왕의 길, 즉 후백제 견훤왕이 넘던 고개로 추정된다.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회봉리,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백운면 반송리에서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함께 섞여있는데, 모두 호남정맥 마치를 넘던 내륙교통로와 관련이 깊은 도요지들이다. 11세기 이른 시기 진안 도통리를 떠났던 장인집단이 고려 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동진강 하구 부안군 계화면 염창산 부근에 가야포가 있다. 삼국시대 때 국제 교역항으로 운봉가야 및 장수가야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서해의 거점포구로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포까지 가려면 대부분 호남정맥 가는정이를 이용하였다. 호남정맥 구절재도 동진강과 섬진강유역을 곧장 이어주던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던 큰 고갯길이다. 고려시대 부안 일대에서 청자문화를 꽃피웠던 장인집단이 호남정맥 가는정이, 구절재를 넘어 임실군과 순창군, 남원시 일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죽계리 도요지와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도요지가 이를 방증해 준다.
 
원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임실 학정리 도요지는 상품의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순백자, 옹기가 폭 넓게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서쪽 구역에서 순백자와 옹기가 서로 붙은 상태로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본래 사구실 마을로 불리던 학정마을은 도요지의 분포 범위가 동서길이 700m에 달한다. 전북지역 내 분청사기 도요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현지조사 때 학정마을 입구에서 가마의 벽체로 민가의 담장을 두른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조사단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임실 학정리 도요지를 중심으로 도요지가 밀집 분포된 것은 백자와 분청사기의 원료인 백토 혹은 백석의 산지와 관련이 깊다. 임실군의 백토와 장인들의 지혜가 하나로 합쳐져 명품의 순백자와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임실군 분청사기 도요지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는다. 아직은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이유를 단정할 수 없지만 정유재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정유재란 때 분청사기를 만들던 최고의 도공들이 포로로 잡혀갔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아무튼 임실군 분청사기 도요지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그 이후 한 세기 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선 후기의 백자 가마터가 다시 문을 열었던 것 같다.
 
 

 
강진면의 도요지 현황
 
필봉마을 도요지
 
강진면 필봉리 하중방마을 서북쪽 사기점 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 상단부 하필제 위쪽에 필봉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종래에는 하필제 아래쪽에 필봉리 도요지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 강진면 필봉리 도요지 현황도
 
현지조사를 통해 그 위치가 얼마간 옮겨졌다. 하필제 위쪽이 천혜의 자연 분지형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일대의 동남쪽 기슭 하단부에 자기편과 도침, 소토 등이 폭 넓게 산재되어 있다. 필봉산(580m)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하필제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중심으로 동북쪽 200m 구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래 전에 조성된 일부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임야지대로 가마처럼 약간 볼록하게 솟은 지형이 남아있을 정도로 유적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 일대는 나무와 물이 풍부하고 백토 산지가 부근에 위치하여 고려 말과 조선 초 도요지가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현지조사 때 조선 초기에 유행한 분청사기 편과 백자편이 함께 수습되었는데, 자기류는 기형이 정교하고 소성상태도 양호하여 대부분 상품으로 평가된다. 자기편 못지않게 상당량의 도침도 흩어져 있는데, 도침은 대분 원판형으로 그 높이가 5cm 내외이다.
 
 
학석마을 도요지 A
 
강진면 학석리 하율치 마을 북쪽에 강진면과 운암면 경계를 이루는 율치 마을이 있는데, 이 고개는 섬진강유역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남북방향 교통로가 통과하는 곳이다. 율치 마을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율치제로 흘러드는데, 율치제 제방에서 동남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학석리 도요지 A가 있다. 하율치마을 북쪽 섬진교회 부근 밭으로 상당한 깊이로
 
▲ 강진면 학석리 도요지 A 현황도
 
제토작업이 이루어져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학석마을 도요지 B
 
▲ 강진면 학석리 도요지 B 현황도
 
강진면 학석리 내동마을 북쪽에 학석리 도요지 B가 있다. 강진면과 운암면 경계 산봉우리 남쪽 기슭 말단부로 내동마을에서 상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서쪽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일대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지만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내동마을과 그 주변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현지조사에서 분청사기편과 백자편, 옹기편이 수습되었다. 내동마을에서 서남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구릉지에 백토 산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학석리 일대에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도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목마을 도요지
 
▲ 강진면 부흥리 도요지 및 옹기요지 현황도
 
강진면 부흥리 배남실마을 동북쪽 달군이 골이 있는데 강진면과 청웅면 경계에 백련산(754m)이 있으며 이 산봉우리에서 비교적 험준한 산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렸다. 이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갈라진 여러 갈래의 산자락이 거의 U자형으로 휘감은 달군이골에 부흥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현지조사 때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임실군 강진면 부흥리 배남실마을 동북쪽 골짜기로 30번 국도에서 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졌는데, 오래전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현지조사 때 조선 후기 백자편이 밭에서 일부 수습되었지만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이목마을 옹기요지
 
강진면 부흥리 배나무실 마을 서남쪽 백련산(754m)에서 강진면 소재지까지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 동남쪽 기슭에 임실 부흥리 이목마을 옹기요지가 있다. 임실군 강진면 부흥리 배나무실 마을에서 갈담리 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일부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이 옹기요지를 중심으로 남쪽에 30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는데, 국도 남쪽에는 갈담천을 따라 들이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다. 청웅 분지에서 발원해 줄곧 서쪽으로 흐르는 갈담 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남쪽 기슭으로 지형이 완만하고 흙이 좋아 옹기요지가 들어설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민묘 구역 주변에 불 먹은 흙과 가마의 벽채 편과, 옹기편이 집중적으로 쌓여 있어 본래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조사 때 기종이 다양한 옹기편과 가마의 벽채편이 수습되었다.
 
 
부흥마을 옹기요지
 
부흥마을 동북간에 있는 가추래기 샘에서 100m지점에 위치한다. 1960년대 초반까지 옹기를 굽던 터로 지금도 옹기편이 지표면에서 볼수 있다. 옹기제조에 필요한 진흙은 백련리 소래터에서 조달하여 썼다고 한다.
 
 
용수리 가리점 제철유적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 가리점마을에서 큰길(섬진강쪽) 쪽으로 300여m 지점이며 큰길에서는 마을 쪽으로 700여m지점에 옛날에 너벙바위가 있어 너벙바위 골이라 부르는 곳에 제철유적지가 있다. 임실군 강진면과 순창군 구림면 경계에 장군봉(780m)이 있는데, 이 산봉우리 북쪽 골짜기를 사적골 이라고 부르는데 장군봉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줄곧 동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가리점마을을 지나 30호 국도에서 섬진강 본류로 흘러든다. 사적골 아래에 가리점마을이 있는데 제철 유적지는 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중간지점으로 도로를 개설하면서 땅속에 묻어져 흔적을 볼 수 없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김만수(79세)씨의 증언으로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만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옛날 포장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작은 소로 길로 되어있었는데 너벙바위가 있는 지역의 논둑과 길 사이에 많은 쇠똥(슬러그)이 있어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리점이라는 마을 이름도 제철유적과 관련하여 붙혀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 강진면 용수리 너벙바우 제철유적 현황도
 
 
용수리 쇠종골 제철유적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 배나무골마을 남쪽을 쇠종골이라 부른다. 회문산(830m) 동남쪽에 있는 곳이 쇠종골 골짜기이다. 회문산 자연휴양림 반대편 골짜기로 임실군과 순창군 경계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계속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배나무골 마을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현지조사 때 배나무골 마을 부근 쇠종골 입구 골짜기에서 소량의 슬래그가 수습되었는데, 임실 용수리 백운마을 입구에서 동남쪽으로 2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쇠종골 중단부에 제철유적이 들어설 정도로 상당히 넓은 지형이 형성되어, 이 일대에 슬래그와 관련된 제철유적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쇠종골 지명도 제철유적에서 유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원고 최성미
 
▲ 강진면 용수리 쇠종골 제철유적 현황도
 
 
학석리 백토산지
 
강진면 학석리 산 238-3번지 내동마을 가락 부지골 서쪽 능선의 말단부가 학석리 백토산지에 해당된다. 즉 필봉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지류의 최말단부이다. 학석리 백토산지는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확인된 유적으로 현재에도 백토가 생산되고 있고 마을 주민들이 민가의 벽에 직접 백토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학석리 백토산지의 북서쪽으로는 학석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도요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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