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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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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23년 12월 26일
이성계 회군로 - 2
about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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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6. 22:28) 
◈ 이성계 회군로 - 2
천년千年 세월 풍파 견디어낸 ‘환희담歡喜潭’ / 고려태조 왕건이 목욕 후 왕기를 얻은 기쁨을 새긴 환희담에서 / 조선태조 이성계도 목욕 제계 / 신라 헌강왕 원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고찰古刹 / 李成桂 꿈 해몽한 무학대사와 인연 맺은 곳
이성계 회군로
 
 
천년千年 세월 풍파 견디어낸 ‘환희담歡喜潭’
 
고려태조 왕건이 목욕 후 왕기를 얻은 기쁨을 새긴 환희담에서
조선태조 이성계도 목욕 제계
 
신라 헌강왕 원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고찰古刹
李成桂 꿈 해몽한 무학대사와 인연 맺은 곳
 
 
짙은 안개 속에서의 방황 끝에 애써서 찾은 팔공산 도선암의 입구 수천리에서 굳이 또 깊은 계곡을 따라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가.
 
첫째, 팔공산은 해동천지 여러 산중에서 十二대 명산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장안산 줄기로써 장수와 임실을 경계 짓고 있는 호남정맥의 웅산임과 동시에 예로부터 삼한천지를 번갈라 다스린 새 왕조의 창업주에게 거듭하여 여덟 번이나 왕기를 내려 줄 천하의 명산이라 일러온 산으로 실제 고려태조도 도선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목욕재개에 왕기를 얻어 고려왕조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 산 중턱에 자리한 아담한 도선암은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참의 대가인 도선이 창건한 고찰로 이미 이성계 자신이 젊었을 적에 이 암자에서 이승 무학 대사를 만나 상서로운 꿈에 대하여 시원스런 해몽을 얻고 백일치성을 드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초 태조3년(1394)에 기록되어진 성수산 상이암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내용의 대략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건이 목욕했던 환희담歡喜潭
 
신라 말에 도선 국사가 중국으로 건너가 도참풍수의 대가인 일행 선사 밑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스승으로부터 “불교가 장차 해동海東에서 성하리라.”는 예언과 함께 “7년 뒤에 열어보고 곧 비밀리에 王씨댁에 이를 전해주어라.”는 말씀을 듣고 돌아왔다. 그 후 스승과의 약속대로 도선 국사는 송도에 사는 왕륭을 찾아 이 참서를 전하며, 그에게 당부하기를 “명년에 반듯이 귀한 옥동자를 얻을 것이니 그 아들이 자라면 이 글을 전수하라.” 하였다. 도선국사의 말대로 왕륭은 이듬해에 아들을 얻었는데 이가 곧 뒷날 고려태조 왕건이었다. 왕건이 청년이 된 어느 날 임실 팔공산 봉우리에 오른 도선은 왕건에게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이 산이어 주봉이 빼어나니 천자가 가히 만조백관의 조화를 받는 형상이요. 어린 봉우리가 좌우로 아름답게 뻗혔으니 여러 신하가 머리를 숙이고 하례하는 모습이로다.” 하며 크게 칭찬하고 또 “산 이름이 팔공八公이라 여덟 성만이 차차 나타날 것이며 이산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산이 망하면 나라도 또한 망하리라. 이제 왕공은 여덟 성인의 비롯이니 이 산에 의지하여 정성껏 기도를 올리면 장차 큰일을 이룰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이후 도선 국사는 왕건을 위해 암자를 일으켰고 왕건은 도선 국사의 지시대로 이 산에 의지하여 백일기도를 정성껏 올렸으나 아무런 증험이 없자 다시 3일 동안 치성을 정성껏 올린 뒤에 암자 앞의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동자가 못가에서서 목욕하는 왕건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지라. 왕건이 그 동자를 향해 ”동자는 대관절 누구인데 이 같은 첩첩산중에 들어 하필 목욕하는 나를 그토록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하고 예사롭게 물었다. 그러자 그 동자가 하는 말이 “제성을 굳이 말하자면 부처인데 부처는 본래 성은 없는 것이며, 살기도 아무도 모르는 저 높은 곳에 삽니다.” 라고 하더니 문득 층암절벽 위로 올라가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하늘이 한 땅을 지었는데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도다. 한 땅을 몸에 지니고 태어났으니 아무리 지우고자 할지라도 지워지지 않으리로다. (天造一土無形無體 土塗身欲不)洗涤) 노래를 마친 뒤에 그 동자는 문득 사라져 버렸고 그 같은 노래 소리를 들은 왕건은 가사 중에 “土”라 하는 말이 곧 임금 王자가 써 있다는 사실을 찬양한 내용이라 짐작하고 크게 기뻐하며 못 가에 있는 큰 돌에 이 사실을 찬양한 내용이라 짐작하고 크게 기뻐하며, 못 가에 있는 이 사실을 남기기 위해 환희담歡喜潭 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두었다.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 골짜기 상이암 바로아래 계곡 조그마한 바위에 새겨진 이 세 글자는 수백 년 동안 풍마우세風磨雨洗를 거친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오늘날에도 그대로 알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매우 흥미롭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해몽解夢 얻은 도선암道詵庵
 
조선태조朝鮮太祖 李成桂도 젊었을 적에 팔공산 근처 어느 외딴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기이한 꿈을 꾸고 부근에 해몽을 잘 하기로 소문난 노파를 찾아가 꿈 해몽을 부탁했다. 그러자 노파는 꿈 해몽대신 “여기서 멀지 아니한 산 밑에 도사님이 계시니 친히 찾아가서 물어 보시오” 하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이성계는 노파의 지시대로 산길을 헤치고 암자를 찾아가니 스님이 있기로 정중히 예를 올리고 꿈 이야기를 한 후 해몽을 부탁하니 다음과 같이 꿈 해몽을 하여 주었다.
 
첫째 일천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닭이 천이면 봉이 하나라고 여러 사람들 중에 고귀하다는 뜻이요.
 
둘째 다듬이소리가 난 것은 많은 사람이 장차 호응해 주리라는 뜻이요.
 
셋째 꽃이 떨어진 것은 반듯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넷째 거울이 깨지고 몸이 부서진 것은 팔도에 이름을 떨치리라는 뜻이요.
 
다섯째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왕이 되리라는 뜻이요.
 
여섯째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장차 용상에 오른다는 뜻이다. 라고 풀더니 한참동안 물끄러미 이성계를 쳐다본 뒤에 말을 이어 당부하기를 “그러나 이는 천기를 얻은 꿈이라 두고두고 삼가하고 삼가 할 것이나 이제 지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공께서는 이 산을 의지하여 정성껏 치성을 올리고 말없이 때를 기다리시지요” 라고 하였다.
 
이처럼 기이한 이성계의 꿈을 거침없이 풀이해준 스님은 바로 뒷날 태조를 도와 조선창업에 많은 공을 세운 바로 무학 대사였다.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바로 고려 공민왕 초기로 무학이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해 일시 은둔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니 왜구 아지발도 군을 물리치고 더욱 의기양야해진 이성계가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그리운 무학대사를 찾듯 애써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려高麗, 조선태조朝鮮太祖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
 
천상天上에서 울려 퍼진 ‘성수만세聖壽萬歲’
삼창 새나라 태동 암시
 
《삼청동三淸洞》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하늘도 맑은氣淸 환희담 주변
《성수산聖壽山》성수만세‘聖壽萬歲’외침소리들렸다하여 八空山지명고쳐 불러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을 찾아
 
도선암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성계는‘일천一千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상像이요 장안 만호가 일제히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는 산오속응山嗚俗應의 세勢이며 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결結과 자연自然의 운運, 거울이 깨진 것은 명진서해名振西海의 성聲,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국조창업의國朝創業의( )를 뜻하며 또한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용비어천龍飛御天의 명命이라고 해몽해준 무학대사의 자비스런 모습을 떠 올렸다. 그 꿈이 익어가는 오늘 천하 대 원수가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팔공산 도선암 八空山 道詵庵을 찾는 이성계의 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상쾌하고도 가뿐했다. “산은 어디에 감출 것이요? 산은 산 속에 감춰들 수밖에 없고 먼 항해를 앞둔 배는 다만 깊숙한 골짜기에 감춰두어야 하오”라고 일러준 뒤 “하늘이 장차 좋은 때를 줄 것이나 만사는 오지 유비무한이오, 장차 삼한의 너른 강토를 새롭게 추슬러 갈 강한 힘을 기르고 얻자면 이만한 골짜기도 없소.”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넌지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던 무학대사의 얼굴, 그 얼굴이 새삼 더욱 그리워지는 까닭은 다만 도선암이 가까워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山·수水·기氣 맑은 삼청동三淸洞
 
태조太祖 이래로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 라 하지 않았던가. 산이 높으면 반드시 물이 맑을 수밖에 없고 골이 깊으면 물의 흐름이 길 수밖에 없기로 팔공산八空山을 두고 동쪽은 산고수장山高水長이오, 서쪽은 운심수청雲深水淸의 운수雲水가 아닌가. 산은 언제나 땅을 사방으로 가르지만 물은 항상 사방의 것을 하나로 모아 끊임없이 흐른다. 이는 저절로 흐르고 가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또한 우주안의 무한한 기운이 역연히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산은 솟고 물은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이 무한한 자연의 호연지기를 내 몸속에 축적하여 솟을 자리에서는 한없이 솟고 자취 없이 흘러야 할 자리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힘을 내 몸속에 함축해 두자는 것이 지난날의 내 꿈이 아니던가. 이성계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자신이 실제 꾸었던 꿈들이 되살아나면서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는 다짐이 그의 가슴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結果自然의 운運을 타고 났고 용비어천龍飛御天의 명을 받을 群鷄一鶴의 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기운이 없으면 그것은 허상일 뿐이요, 명진서해名振西海의 성聲과 산오속응山嗚俗應의 세勢를 지녔을지라도 다시 하늘로부터 이미 얻어진 성세를 곱게 비춰주는 빛이 없다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그의 뇌리腦裡에는 지난날 백일치성을 마치고 환희담에서 목욕하던 그때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왠지 온 몸에 충만한 상쾌함에 이끌려 신선이 된 기분으로 ‘산도 맑고 물도 맑고 하늘마저 맑구나’ 하며 외쳤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천상의 소리 ‘성수만세聖壽萬歲’
 
이성계는 그때 강렬하게 느꼈던 그 상쾌한 기분을 山淸,水淸,氣淸이라 하여 삼청이라 했고 하늘 바라 뵈기로 아늑한 못 환희담歡喜潭 주위를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삼청동이라 명명하였고 성큼 코앞에 다가선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옛날 그가 젊은 시절 무학대사를 만났던 때에 그 아늑한 터전에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오색구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감돌았던 기억이 역력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런 기억을 되살리며 환희담歡喜潭 앞에 이르자 이날도 역시 안개 걷힌 말끔한 하늘아래 지난날 자신이 치성을 마치고 정성껏 쌓았던 돌무더기가 이름 모를 들꽃에 쌓인 채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본 후 땅을 굽어보았다. 그때였다. 유난히도 맑은 가을하늘에 오색구름이 팔공산 전체를 덮더니 그 가운데서 한줄기 영롱한 빛이 뻗히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본 이성계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랴. 그러나 사계四季는 어김없이 순환하고 만물은 때를 따라 영고성쇄를 반복 하나니”라며 무한한 기쁨을 속으로 안고 한걸음에 도선암에 올랐다. 그러자 난데없이 오색구름이 갈라지면서 더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아! 성수만세! 성수만세! 대명천지 해동 땅에 높고 귀한 성수만세!~”
 
역력히 귓가에 울려오는 이 소리는 그가 젊었던 시절 가냘프게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그 울림은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광풍에 흔들려 ‘쨍그렁 쨍그렁’ 하며 울리는 듯 심히 요란하고도 역력하였다.
 
순간 그는 “아! 저 빛! 이른 아침도 아닌데 꼭두새벽에 어둠을 가르는 저 밝은 새벽 빛! 하며 문득 조명早明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리는데 언뜻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에 장차 새벽빛을 비치리라”는 새로운 다짐이 가슴에 불현 듯 박혀왔다. 이런 연유로 태조 이성계는 등극한 바로 그때에 ‘삼청동三淸洞’ 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는데 지금까지 이 글씨는 어필각에 각자로 모셔져 있다. 동시에 八空山을 聖壽山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의 그 자세한 전말이 성수산 상이암 사적기에 적혀 있는데 여기에 그 일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이암사적기
 
신라新羅 僧 도선道詵이 고려태조 왕건과 함께 운수雲水(임실지방의 옛 이름)의 팔공산에 이르러 대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올리고 못에 들어 목욕을 하였는데 때에 부처의 영험을 얻어 기쁜 마음으로 이 못을 환희담이라 하여 돌에 새겼고 암자의 이름도 도선암道詵庵이라 하여 도선이 창건한 것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태조 고황제高皇帝께서도 기이한 꿈을 꾸고 이 암자에 있는 승僧 무학을 찾아서 해몽하고 그의 인도引道로 이 산에서 기도하고 또 못에서 목욕하였는데 홀연히 이상한 길조를 얻어 삼청동이라는 각자를 하였다. 또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태조가 보위에 오르자 팔공산을 성수산이라 하고 도선암을 상이암이라 불렀다. 진실로 상上의 귀에 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산에는 고려태조高麗太祖와 조선태조朝鮮太祖가 머물렀던 곳인 즉 일초일목一草一木도 차마 벨 수 없으며 하물며 돌 위에 새긴 각자가 일월과 더불어 다투며 휘황하고 또 산 이름과 암자 이름으로 그 사적이 소상히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니 지금도 두 대왕이 계신 듯 하다. 그러니 어찌 숙연한 공경심이 일어나지 않으리오.
 
 
이성계 천명 게시 받은 마이산 찾아
 
산도 맑고, 물도 맑고, 기도 맑은 성수산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이미 기도의 영험을 얻었고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는 하늘로부터 분명히 성수만세라는 천명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개국 이듬해에 이곳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뒷사람들은 바른 돌에 어필을 새기고 상이암(도선암)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어필각에 대한 역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첫 번째 원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식민사학자들의 몰상식한 소치라는 점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시대를 조금만 올라가 보면 고적 선양에 대한 열정이 곧 자주 독립의 긍지라 여긴 한말에 있어서는 태조대왕의 사직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같은 객관적 흔적은 바로 어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인 달사들의 방명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상이암 골짜기를 살며시 빠져나와 개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청동의 환희담과 상이암, 그리고 자신이 지난 날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상이암 뒤의 기도터를 둘러본 이성계는 성수만세의 감응을 마음속 깊이 새긴 채 개선 길을 곧장 용출산(마이산)으로 향했다. 용출산湧出山은 그가 소년시절 꿈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곳, 따라서 그는 그 꿈이 새 왕조창업의 게시임을 굳게 믿어왔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할 시점이 가까워 왔음을 분명히 느낌에 따라 서둘러 용출산湧出山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성계의 개선군은 상이암 골짜기를 빠져나와 용출산湧出山이 있는 진안 쪽을 향해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상이암에서 진안으로 가려면 반듯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임실과 진안을 경계 짓는 곳으로 앞서 소개한 아침재 보다는 훨씬 높은 고개이다. 개선 군이 고개 마루에 다달았을 무렵 이성계는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옆에서 동행하는 포은 정몽주에게 “옛말에 山重水復疑無路 라더니 호남에는 평야 뿐 아니라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있고 첩첩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포은 정몽주는 맞장구를 치듯 “그야 유음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라하였으니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 곳에 한 마을이 있겠지요” 라는 말로 이성계가 건네준 은근한 정을 글귀로 되받았다. 그러나 언감생심 넌지시 건너는 포은의 안색은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역했고 그러한 태도를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태속 깊숙히 담겨져 있었던 뜻을 은연중 내뱉었던 포은은 뒤늦게 이를 후회 했으나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그처럼 어색스러움을 상대방에게 보이고 나니 약간은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포은의 그러한 계면쩍은 감정을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쳐 주었다. 이성계로서는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따르는 천군만마가 장사진을 이룬 채 산골을 가득 메워 나아가고 있는데 성수만세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가득하고, 이미 소년시절에 받았던 금척이 역력히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한 포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것을 덮게 해준 것이었다.
 
또한 이성계와 정몽주가 행군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던 임실과 진안 사이의 고개를 후에 사람들은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고개라는 이성계의 말을 본떠 “垈雲峙”라 불렀는데 그 후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속칭 대운이재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성계가 대운이 재에서 포은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갈증을 참으며 행군을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리에는 불현 듯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길이 나 있는 바에야 어찌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야 어찌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이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은 밝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만 산수간山水間에 흩어져 있는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내 천명天命을 이루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전주일보에 연재된 「역사따라 지명따라 」제하의 황안웅 선생의 글 중에서 팔공산 상이암에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그 중에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며 잃어버린 지명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역사란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여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주인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듯이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의례히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이곳 상이암에 관련된 역사의 흔적 흔적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고 연구 해 본적도 없다는 사실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일예로 태조 이성계가 잠시 이곳 도선암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로 등극 후 팔공산을 성수산으로, 도선암을 상이암으로 부르게 하고 조선개국 이듬해에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다 하며 따라서 뒷사람들은 이 글씨를 바른 돌에 새기고 어필(御筆) 비를 보존하여 오다가 상이암 경내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어필을 몇 년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하도록 신청을 한 바 있으나 당시 문화재 위원들은 정확한 검증도 없이 어필이 아니라고 부결시켜 버렸다하여 아쉬움으로만 남아있다. 삼청동(三淸洞)이란 글씨가 어필이 아니라면 삼청동 글씨를 새기고 어필각을 세운 주체가 전주이씨 종친들이란 사실과 민중들이 그동안 어필이라고 불러 전해오고 있었다면 당시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내버려 두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며 뒤집어서 당시 임금과 관련된 용어를 서민들이 마음대로 사용했을 때는 조정에서 그냥두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삼청동 비는 태조 이성계의 친필이라는 사실로 전해오고 있었으니 이번 조사를 통해 황산대첩 진군로(進軍路)와 회군로(回軍路) 등을 통해 상이암사적기 등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삼청동 어필은 심도 있게 연구하여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추진하여 임실지역의 자존심을 세워야 할 것이다. -상이암 사적지-
 
 
용출湧出 마이산馬耳山을 찾아
 
산도 맑고 물도 맑고 기도도 맑은 성수산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이미 기도의 영험을 얻었고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는 하늘로부터 분명히 ‘성수만세’라는 천명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개국 이듬해에 이곳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뒤 사람들은 바른 돌에 어필을 새기고 상이암(도선암)어필각을 지어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어필각에 대한 역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의도적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첫 번째 원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식민사학자들의 몰상식의 소치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시대를 조금만 올라가면 고적선양에 대한 열정이 곧 자주독립의 긍지라 여긴 한말에 있어서는 태조대왕의 사직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같은 객관적 흔적은 바로 어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인달사들의 방명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상이암 골짜기를 살며시 빠져나와 개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확연히 알 수 있다.
 
 
대운치와 어수정 垈雲峙와 御水井
 
삼청동의 환희담과 상이암 그리고 자신이 지난날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상이암 뒤의 기도터를 들러본 이성계는 ‘성수만세’의 감응을 마음속 깊이 새긴 채 개선 길을 곧장 湧出山(지금의馬耳山)으로 향했다. 용출산은 그가 소년시절 꿈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곳 따라서 그는 그 꿈이 새 왕조 창업의 게시임을 굳게 믿어왔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할 시점이 가까워 있음을 분명히 느낌에 따라 서둘러 용출산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성계의 개선군은 상이암 골짜기를 빠져나와 용출산이 있는 진안 쪽을 향해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상이암에서 진안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임실과 진안을 경계 짓는 곳으로 앞서 소개한 아침재 보다는 훨씬 높은 고개다 개선군이 고갯마루에 다 달았을 무렵 이성계는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옆에서 동행하는 포은 정몽주에게 “山重水復疑無路(산중수복의무로)옛말에 호남에는 평야뿐이 아니라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잇고 첩첩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포은이 맞장구를 치듯 “그야말로 柳暗花明又一村이라 하였으니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곳에 한마을이 있겠지요.” 라는 말로 이성계가 건네준 은근한 정을 글귀로 되받았다. 그러나 언감생심 넌지시 건너는 포은의 안색은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러한 태도를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태 속 깊숙이 당겨져 있었던 뜻을 은연중 내뱉었던 포은이 말을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그처럼 어색스러움을 상대방에게 보이고 나니 약간은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포은의 그러한 계면쩍은 감정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쳐주었다. 이성계로서는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따르는 천군만마가 장사진을 이룬 채 산골을 가득 메워 나가고 있는데 성수만세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가득하고 이미 소년시절에 받았던 금척이 역력히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한 포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것을 덮게 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그 순간부터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 그러다 방금 다시 시작한 행군을 곧 바로 멈추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어서 그는 갈증을 참으며 얼마쯤 행군을 계속하다가 용출산 가까운 산 밑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샘물을 찾아 물을 마셨다. 이때에 이성계가 마셨다는 샘물이 이른바 어수정 御水井(진안읍 은천리)이다. 지금도 진안읍 은천리 마을 앞 숲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유래는 아는 이는 드물고 다만 메워져 가는 웅덩이로 방치되어 잇을 뿐이다. 무상한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성계와 포은이 행군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던 임실진안 사이의 고개를 뒷사람들은 구름이 항상 더 잡고 있는 고개라는 이성계의 말을 본떠 대운치垈雲峙라 불렀는데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속칭‘대운이재’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충신 구한 구신리 忠臣 求한 求臣里
 
이성계가 대운재에서 포은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갈증을 참으며 행군을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리에는 불현 듯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길이 나 있는 바에야 어찌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 어찌 나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히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은 밝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만 산수간山水間에 흩어져 잇는 저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낸 천명을 이루는 일이다. 神人으로부터 금척을 받은 꿈이 하늘이 나에게 천명을 은근히 보여준 것이라면 하늘로부터 내 귓속에 밝혀준 성수만세의 소리는 나에게 천명을 은근히 알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인사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기 보다는 이제 나의 꿈과 하늘의 소리를 통해 보여준 천명의 암시와 천명의 게시를 실현시킬 구체적인 노력을 수행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성계는 순간 고개 밑 첫 마을을 가리키며 넌지시 포은에게 “인걸은 지령이라 했소, 그래 이 같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충신을 구해 쓰러져가는 나라를 함께 일으켰으면 오죽이나 좋겠소” 라며 말을 건넸다. 이 말에 포은은 안색이 갑자기 변하면서 당황하는 모습으로 한참이나 대답을 못한 채 말을 몰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충신을 구한다는 말은 임금이 외에는 누구도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인데도 이성계의 입에서 그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속셈을 그는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포은은 여기서 어떤 대꾸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 같은 포은의 태도를 본 이성계도 태연 현할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포은이야말로 신진학자로 개혁적인 사상을 지닌 진취적이 이물이며 외교적 능력도 뛰어난 보기 드문 인재였기 때문에 무관인 자신에게는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 후로부터 임실성수를 넘어 진안백운으로 넘어 고개 밑 첫 마을을 오늘까지 구신리求臣里라 불러오고 있으니 이 또한 매우 흥미로운 이름으로 여겨진다.
 
 
天命되새기며 성대한 개선산지
湧出(馬耳)山을 찾아
 
용출산 바로 밑에 있는 샘물로(御水井)로 심한 갈증을 풀어버린 이성계는 이 샘물의 근원이 곧 용출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엄하게 솟은 용출산을 다시금 바라보며 용출산 제일봉 아래에서 자신이 젊었을 시절에 정성껏 기도를 올렸던 일과 은빛처럼 맑은 물을 지성껏 하늘에 바쳤던 생각을 펼치게 되었다. 아- 섯다산! 이 산처럼 우뚝 솟은 산이 어디에 또 있으랴 그래서 삼한 이래로 이 산을 섯다산(西多山)이라 불렀던 게지 그렇다면 저처럼 산이 우뚝 솟아 푸른 하늘을 뚫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산은 그저 솟은 것이 아니다. 오직 솟을만한 힘이 있기 때문에 저처럼 항산 푸른 하늘을 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솟을 대로 힘차게 솟은 저 산을 이름 하여 용출산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아 ! 나무광대원만대다라니(南無廣大園滿大多羅尼)! 이미 삼한 강토 전체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蔗那佛, 대자연불大自然佛) 바에야 이 용출산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수미산須彌山(베레스트)을 닮은 (안습박갈라安濕縛竭拏의 말귀처럼 생긴 산으로 세계를 얽고 있는 구신중의 하나로) 부처의 최고 가르침인 화엄일승법이 주야로 솟아나는 광대원만대다라니 화엄도량華嚴道場이 아닌가. 그래서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도 출가 직후에 이 산 암굴(古金堀)에 들어 수행 끝에 이미 도를 이루어 왕사가 되었고 원효의 스승인 보덕화상의 제자 무상과 김취도 이 산에 古金堀들어 정진 끝에 열반묘리를 얻었던 게 아닌가.
 
 
용출산의 은수샘(湧出山의銀水泉)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행차길이 용출산골 으슥한 곳에 이르자 이성계는 또 포은 정몽주를 향해 “용출산은 삼한 이래로 해동의 명산이라 일러오지요. 이 산중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광대봉廣大峰이라 이르고 저편 너머 끝에는 다라니 절이 있소 그리고 또 용출산 두 봉우리 사이를 화엄굴이라 하오, 그러니 광대원만대다라니 화엄도량이 아니겠소, 일찍이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도 이 산 암굴에 들어 도를 얻었다. 일러오지요” 하며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이가 따라온 손님에게 안내하듯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또 설명하는 중에 “용출산 동봉화엄굴 아래에 단 샘이 있소, 그런데 그 샘물이 은빛처럼 맑기로 젊어서 내가 이 산에 들어 기도를 드릴 때에 그 샘 이름을 은수샘銀水泉이라 불렀다오.” 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러나 포은은 이성계의 자세한 설명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갈 길만을 함께 나아갔고 이미 포은의 마음을 알아차린 이성계는 포은의 태도가 어떠든 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마음을 비운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이처럼 어수정의 물로 갈증을 푼 뒤 용출산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대화가 다시 화엄굴 아래 은수천에 까지 이르자 이성계 휘하의 선두는 하늘만이 빤히 바라 뵈는 제법 평평한 동천洞天에 이르게 되었고 이곳에 이르러 일단 군사를 멈추게 한 뒤에 자신의 옛일을 되새기며 비로소 아지발도를 물리친 개선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이성계가 젊었을 때에 큰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올리면서 사용했던 용출산 동봉아래의 맑은 샘을 두고 은수천銀水泉이라 불렀는데 이 단 샘은 지금 은수사 대 법고 밑에 남아 모처럼 산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의 갈증을 달래주는 이름 모를 샘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막상 은수銀水라는 샘 이름은 ‘은수사’라는 사찰 이름으로만 남아 있으니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이동천주필대馬耳東天駐㻫臺
 
거대한 암석이 울을 지은 하늘 뵈기 동천에 든 이성계는 휘하장병들에게 일단 장막을 치고 음식을 장만하도록 하도록 권하는 한편 흥겨운 풍악을 울려 모든 군사들에게 잔뜩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돋구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쁨이 절정에 달한 틈에 자신은 자신의 팔준마 중에 가장 아끼는 상제마霜蹄馬를 타고 동천암벽에 올라 눈앞에 마주한 용출산 두 봉우리를 바라보며 지난날에 자신이 이 산에서 얻었던 꿈을 연상하며 무심코 다음과 같이 혼자 중얼거렸다. “음, 그때에 바로 저 동쪽 봉우리 밑에서 비몽사몽간 꿈을 꾸었지 봉우리에 둘러져 있었던 오색구름이 걷히더니 신인이 나타나 나에게 금척을 건네 보이며 이르시기를 ‘장차 이 금척으로 삼한강토를 척량토록 하라. 경시중 홍방은 청백하기는 하나 늙었고 최삼사 영은 정직하기는 하나 너무나 어리석도다, 그런데 그대는 장차 문무를 겸비하고 덕망과 지식도 훌륭하여 백성의 바램도 크게 이를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 금척으로 삼한강토를 척량토록 하라’ 하며 분명히 금척을 나에게 건네주었지.” 하고 자문자답하며 시원스럽게 솟은 두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어인일인가. 눈앞에 마주한 용출봉이 갑자기 오색구름으로 덥혔다가 서서히 걷히더니 갑자기 그 속에서 거대한 금척의 다발이 번득 비쳐왔다. 순간 너무나도 휘황찬란한 금빛이 눈을 꼭 찌르듯 비쳐왔기 때문에 이를 본 이성계는 도저히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만에야 겨우 눈을 뜬 이성계는 뇌리를 스치는 어떤 영감에 이끌리어 상제마를 탄 채 조용히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天馬東來勞己窮 천마가 동에서 오다가 힘이 다해
霜蹄未莎蹶送中 상제마 도중에서 지쳐 쓰러졌네
涓人賣骨遺其耳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겨
化作雙峰屹半空 두 봉우리 그대로 하늘을 뚫는 듯
 
 
이상과 같이 때에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 들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던 곳은 마이동천의 주필대로 각각 마이동천주필대馬耳東天駐㻫臺라는 각자가 암벽에 남아 있어 옛일의 자취를 잘 전해왔다. 그런데 여기에 1925년 이후 이와 같은 사적에 근거하여 국조이신 단군, 조선조의 태조, 태종, 고종, 등 4위 향족조40위, 한말의병독립투사34위를 모신 대한이산묘가 건립되어 토왜개선討倭凱旋의 사적을 실답게 비춰주고 있으니 매우 다행스런 일이요. 최근에는 주필대 밑 묘정 동편에 위에 적은 태조고황제(이성계)의 詩碑까지 세워져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매우 흐뭇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朝鮮왕조 창업 주도한 역사의 현장
 
湧出(馬耳)山을 찾아
용출산湧出山을 동금산東金山으로
 
 
이성계 꿈에 神人 금척을 받고 천명 내린 것 확신
개국 후 궁중무용으로 제작, 국가 행사 때 공연,
84년 이후 매년 진안 군민의 날에 재연
 
 
天馬가 東에서 오다가 힘이 다하여 그 상제마霜蹄馬가 도중에서 지친 채 이 용출산湧出山에 쓰러져 있구나,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겼더니 그 두 귀가 용출해 두 봉우리로 화하여 하늘을 뚫고 있구나. 라는 詩는 이성계가 용출산주필대 큰 바위 위에서 말을 탄 채 읊었던 시로 전해진다. 시를 읊고 난 순간 이성계는 젊은 시절에 꾼 꿈에서 神人으로부터 받았던 금척이 두 봉우리에서 묶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완연히 보면서 그는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러자 이성계는 당장 그 자리에서 용출산을 동금산東金山이라 명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金尺과 東金의 뜻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예부터 金은 불변을 상징하며 자尺은 만물을 가늠하는 유일한 도구로 여겨왔다. 따라서 하늘이 새삼스레 金尺을 내렸다는 것은 변하지 않은 새로운 자尺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 새 왕조를 세우라는 천명의 계시라는 의미다. 여기에 五行을 덧붙여 보면 이성계는 木에 해당된다. 때문에 금척金尺을 받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일으키는 木에 해당된다. 때문에 금척을 받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일으키는 대역사를 차질 없이 전개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극목金克木의 원리에 따라 金을 묶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긴 후 북악산 밑에 세워진 景福宮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남산을 목멱산木覓山이라 고쳐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속설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미 조선 개국 이전에 나라 안의 땅 이름 중 金자가 든 것은 모두 바꾸기로 작정하고 우선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바꿔 부르려고 했으나 워낙 빗발치는 여론을 감내치 못해 포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용출산을 동금산으로 고쳐 부르도록 한 것은 서울 南山을 木覓山이라 바꾼 것과 같이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봉래산으로 바꾸지 못한 한을 속금으로 가름하여 삭혀낸 것이라 이를 수 있다. 아무튼 속금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 창업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이름으로 금척과도 무관한 이름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개국 이등 해 (1393년) 7월에 삼봉 정도전에 의해 올려 진 궁중정재 제1호 몽금척夢金尺이 속금束金에 얽힌 천명수수설(天命授授說)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나라의 경사 때마다 왕을 비롯한 문무백관 앞에서 어김없이 공연되었던 몽금척이 어떤 형식으로 꾸며져 있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궁중정재宮中呈才 제1호 - 몽금척夢金尺
 
조용한 아침에 오색찬란한 상서로운 구름이 열리는 장면에서부터 춤은 시작된다. 무녀舞女들이 음악에 맞춰 차례로 등장하면 몽금척의 내용이 적힌 족자를 든 사람과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나란히 춤을 추면서 조금 앞으로 나와 서고 음악이 그치면 다음과 같은 구호를 합창한다. 정고한 부록의 영이함을 받들어 성덕의 형용을 미화 하도다. 바라건데 너그러이 받아들여서 잔치를 미덥게 하소서,
 
구호가 끝나면 은은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일정한 형식으로 춤을 추는 무녀들의 배열이 장중하게 전개도다가 금척을 받은 사람과 황개를 든 사람이 함께 나와 서면 음악이 그친다. 이때 금척을 든 사람이 다음과 같은 치어致語를 한다. “금척을 꿈꾼 것은 천명을 받으려는 상서이옵니다. 태조께서 왕 위에 오르시기 전 꿈에 神人이 금척을 받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말하기를 경시중은 정직 하나 어리석도다, 하시면서 태조에게 이르기를 문무를 겸하고 지덕을 갖춘 그대에게 인심이 돌아가리라 하고는 곧 금척을 주었습니다” 이같은 치어가 끝나면 다시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며 한참동안 회무가 이뤄지다가 다시 처음대열의 상태로 돌아가 임금에게 헌수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즐거움이 극치에 이르기 전에 빨리 경계하는 마음을 품어 천명을 길이 보존하시옵소서” 하는 하직 인사를 하는 것으로 모든 정재는 끝을 맺는다.
 
 
최고대동장最高大動章 - 금척장金尺章
 
주로 궁중의녀 40명으로 구성된 이 몽금척은 조선조 오배년 동안 천명에 입각한 속금의 뜻을 일깨우고 항상 “천명을 길이 보존하옵소서” 하는 활로 끝을 맺으면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기리는 최고의 예술로 기림을 받았다. 그렇다면 다만 이 같은 무용과 이태조 자신만의 속금사과 관계가 있던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부왕의 창업을 곁에서 성실하게 도운 제2대 정종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산에서 무예를 익혔다. 사실이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제3대 태종이 즉의 한지 13년(1413년)이 되던 해에 임실에서 꿩 사냥을 하다는 핑계로 남행하여 친히 속금산 밑에 이른 후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대한이산묘지>에 기록되어 있는 계룡천도鷄龍遷都의 가부를 속금산신에게 물었다는 내용은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말에 일어난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인해 종래의 공신제도가 폐지되고 훈장제도로 바꿔질 때 고종황제는 금척대훈장을 나라의 최고 훈장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외에도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나라 형편은 피폐일로로 치닫게 된데다 외척의 발호는 극에 달해 왕권이 몹시도 흔들리던 순조 때에는 조선조 발상의 근본지인
 
전주 덕진에 금극목을 재 다짐하는 승금정勝金亭을 세워 정자가 준공되던 날 호남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 백일장이 열렸던 일도 속금사과 결코 무관한 일은 이날 것이다. 아무튼 그저 섯으니 섯다산이오. 그 솟은 기운이 밤낮으로 넘쳐나니 용출산이며 금척을 받아 금을 묶고 나라를 세웠으니 속금산 생긴 모양이 흡사 말귀라도 같으니 마이산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속금은 어디가고 다만 마이라는 이름만 남았으니 아무리 역사 따라 지명도 바뀐다지만 모양만 남기고
 
 
朝鮮王朝 무궁한 발전念願
 
용출산을 찾아
帝王三代가 찾은 산
 
용출산이 속금산으로 바뀐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금극목金克木의 원리에 따라 조선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는 도참적 성격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다시 “산의 사면四面은 온 돌이 깍은 듯 높고 돛대처럼 우뚝 솟아 철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낸다. <山之四面 前石( )立然如초四時佳景>는 <태조묘악가太祖廟樂歌>에서도 확인된다.
 
또 金尺을 받은 사적과 束金의 역사가 얽혀있는 산이 바로 용출산이기 때문에 조선조2대 임금인 정종이 등극이전에 이 산에 들어 무예를 연마 했다는 대목이 택리지에 나타나 있고 이어 3대 太宗이 임실현 들녘의 꿩사냥을 핑계로 남행하였을 때에 이 산 밑에 까지 이르러 예관을 보내 馬耳山神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 34권>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들, 다시 말하면 조선개국을 전후해 역대제왕이 모두 이 속금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왕 이하 많은 다라들의 심방이 끊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익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며 그 좋은 실례를 점필재, 김종직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찾을 수 있다.
 
 
偶蒙重瞳顧우몽중동고
佳命傳萬祀주명전만사
中原赤有之중원적유지
名實尙相疑명실상상의
 
우연히 두 번이나
임금님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토록 전해지리
 
중원 땅에도 또한
이 같은 이름이 있으니
명실이 서로 비슷하도다.
 
 
太宗 束金山서 祭올려 鷄龍천도 쐐기 ...馬耳山 命名
金尺大動章, 天命증명... 역사 따라 무수한 별호 붙여져
 
太宗이 이름 한 馬耳山
 
태종13년(1413년) 9월에 있었던 왕의 진무 겸 사냥은 임실순행이 주목적이었다는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아무래도 향토사를 무시하는 통례적인 해석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대게 국왕의 의례적인 원지 순행은 농사철이 아닌 12월에 행해졌던 것들이 통례였다.
 
그러나 조영무 등 많은 측신들이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농사철에 남행을 결행하게 된 뜻은 아무래도 그 목적이 단순히 임실지방에서의 꿩 사냥이었다고는 이해할 수는 없다. 특히 태종은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는 궁중정재인 몽금척과 수보록의 가치를 겉으로는 비하 시키는 체 하면서도 한편 꿈의 현장인 속금산을 찾아 비로소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는데 다만 제사를 올린 그 배경에는 그 당시까지에도 무시 할 수 없는 계룡천도의 여론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말 할 것도 없이 속금에 얽힌 도참적 사실을 내심 신봉한 나머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결정을 바로 이 산에서 얻어내려고 했던 의도였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추론을 여실히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태종 자신이 남행하는 길에 명산대첩에 들러 제사를 지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데 성종 대에 이룩된 <동국여지승람>에는 馬耳山을 찾아 제사를 올렸다는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다는 점이다.
 
이와 동시에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시를 그대로 받들어 湧出山, 束金山을 다시 馬耳山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太宗의 남행 사실이 결코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익히 이해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좋은 증거이다. 아무튼 이후로 마이산에는 맣은 시인묵객들의 내방으로 인해 철따라 다른 고운 이름이 붙여지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봄에는 온 산하가 푸른데 오직 그 속에 산이 돛대처럼 솟았으니 ‘돛대봉’, 여름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수목이 제법 울창하여 마치 용 뿔을 연상케 하니 ‘용각봉’, 가을에는 용각에 단풍이 들어 흡사 쫑긋한 말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비치니 ‘마이봉’, 겨울에는 백설이 만건곤한데 유독 눈을 젖힌 채 붓끝처럼 검게 솟았으니 ‘문필봉’이라 일렀다.
 
 
속금산에 탑중중束金山에 塔重重
 
명인에게는 많은 별호가 따라 붙듯이 명산에는 많은 별명이 내려져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 따라 많은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문 것은 오늘의 현실이요, 알만한 이는 더 이상 알려들지 않으니 큰일이다. 섯으니 섯다산이요, 솟는 듯 기운이 넘치니 용출산이요, 금극목의 원리대로 이 산에 금 기운을 몽땅 묶었으니 속금산이며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겼으니 마이산이라는 지명은 예사로운 이름이 아니요. 이 같은 이름의 변천이 곧 이 사의 역사다. 그러니 역사와 지명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딴에 ‘속금’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조선왕조 창업에 얽힌 도참설에서 연유된 이름이며 이같이 왕조창업에 관계된 천명설에 대해서는 극히 신성시하였기로 조선왕조 오백년간에는 섣불리 그 지부를 놀란 한다거나 경솔하게 어떤 관련 사실을 공표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망국의 와중에서 도참에 관련된 천명사실은 ‘금척대훈장’으로 은연중에 여실히 나타났고 이미 이백년 전 진안에 살았던 선비 담락당 하립은 속금산 속에 탑들이 중중하다(束金山에 塔重重)는 칠언시를 지었기로 함경도 부춘산으로 귀양 보내졌던 일도 있었다. 고금 천하에 아무 군데에 갔더니 탑들이 많더라는 말을 하였다고 해서 귀양 보내졌다면 누구나 그 귀를 의심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의 말씀 따라 왼 종일 신선 찾아 산속을 헤맨 한 시인 전혀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던 진짜 처사가 많은 탑을 보고 많다고 했는데 이것이 귀양 갈 일이었다면 오직 상식을 뛰어넘는 그 어떤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귀양을 보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탑도 탑 나름이지 속금산속의 탑을 중중하다 하였으니 이는 분명코 도참에 관련된 천기를 만천하에 누설한 천기누설죄 바로 필화筆禍였던 셈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마이산속에 있는 많은 탑의 유래는 속금이라는 단어를 제쳐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의 속금산 속의 탑은 어떤가? 한마디로 어느 한 개인의 노력에 의해 축조된 20세기 초유의 불탑이라는 식으로 둔갑되어 있고 버젓이 지방사적35호로 지정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의 기림을 받고 있으니 역사에 대한 왜곡치고는 걸작이요, 무지치고는 너무나 심하다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잊혀진 역사 따라 잃어진 지명을 찾자는 우리의 노력이 숨 쉬는 한 지금의 마이산 탑은 오직 속금산속의 탑이었을 뿐이다.
 
 
민족자존의 정기어린 명산
 
智異山
智異山과 木子得國說
 
과거 전통사회에 있어서 한 왕조의 창업에 관한 도참은 아마 절대 필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용출산(마이산)이나 팔공산(성수산)만이 도참에 관련된 명산이었던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조 창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나머지 도참으로 등장되고 있는 곳으로 서울 목멱산(남산)이나 개성의 송악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 많이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남녘의 최대 명산인 지리산을 빼놓을 수 없다. 즉 이미 젊었을 시절에 왕기를 받았기로 성수만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은 성수산, 천상의 시인으로부터 금척을 하사받아 새로운 문물을 짜도록 허락받고 금극목의 원리에 따라 금 기운을 묶어버린 곳은 속금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지리산은 도참상 조선왕조 발상에 어떤 몫을 하였던 남녘의 명산이라고 불러오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木子得國說이 흘러나온 곳이 곧 지리산 석굴이었다 하니 그 내용인즉 ‘지리산 석굴의 석벽에서 이승 한 사람이 돼지를 탄 이씨가 다시 삼한의 땅을 경계 지을 것이다. 이라는 글이 적힌 참서를 얻어 이성계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木子는 틀림없이 이성계를 말한 것이고 돼지는 곧 돼지띠를 띤 사람을 말하니 돼지를 탄 李氏는 분명코 乙亥生 李成桂일뿐이라는 것이며 이를 도울 자는 오직 조준趙浚과 배극렴裵克廉 그리고 三峯鄭道傳이라는 암시도 얻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말들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매우 관련이 깊은 도참설로 오늘날 그 진위여부를 따지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운봉의 황산대첩으로 이성계가 비로소 중앙정계에 크나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고 대첩을 이룬 10년 후 고려를 뒤엎는 위화도회군도 가능했을 것이었기로 조선왕조창업의 도참에 지리산이 등장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 그래서 조선조 창업과 더불어 몽금척과 같이 등장된 궁중정재의 또 하나가 한 수보록(受寶錄)이니 이에 대한 형식과 내용을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궁중정재 제2호-수보록 宮中呈才 第2號-受寶籙
 
악관이 음악을 연주하고 행사를 알리는 박수를 치면 수보록의 내용이 적힌 족자를 든 사람과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나란히 줄을 지어 춤추며 조금 앞으로 나아서고 구호를 읊는다.
 
하늘이 내린 부록의 상서를 받아/ 대오의 영묘함과 장원함을 열다/ 온 백성은 모두 기뻐하며/ 곧 축하를 올리는도다/ 박을 치면 일정한 형식에 의해 춤을 추다가 다시 다음과 같은 치어致語를 한다. ‘보록을 받은 것은 이서를 얻은 것입니다.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 속에서 이서를 얻어다가 드린 후 임진년(1392년)에 그 말이 징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록을 지었습니다. 박을 치면 다시 일정한 형식에 따라 6대 18인이 춤추다가 음악에 따라 다음과 같은 수록사를 부른다.
 
저 높다란 산이여/ 석벽이 하늘과 가즈런한데/ 그 석벽을 깨트려서 / 이상한 글을 얻었도다./ 굳세고 용감한 목자가/ 때를 타고 일어나거니/ 그를 도울 자는 누구인가./ 덕망을 갖춘 조준과 / 배극렴 같은 군자가/ 금성으로부터 올 것이요/ 정도전이 도와 이루리로다./ 새로 도읍을 정하여/ 왕위 팔백년을 전하리/ 우리가 우러러 받았으니/ 오직 이 보록이로다.
 
이에 박을 치면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다가 음악에 맞춰 다시6대 18인으로 돌아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읊는 것을 마지막으로 춤을 접는다.
 
구곡을 연주하여 이뤄짐을 고하고/ 천세를 빌어 영원함 기하도다/ 다행히 태평한 날을 만나서/ 감히 즐거운 마을을 펴도다/ 이 빛난 자리를 하직하니/ 곧 편안히 쉬시길 바라도다.
 
 
의사방과 창의동맹길성지 義士坊과 倡義同盟吉城地
 
이상과 같이 용출산에서 금척을 꿈꾸어 천명을 얻었고 성수산에서 성수만세의 소리를 똑똑히 들어 자신에게 내려진 천명을 확인하였고 다시 용출산을 찾아 금을 묶어 새 왕조 창업의 의지를 굳혔으며 나아가 또 지리산 석벽에서 木子得國의 참서를 얻었다는 도참설은 무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호남이야말로 조선왕조발상의 근본이며 허약한 고려정권을 뒤엎고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된 역사적 계기는 곧 운봉에서의 황산대첩에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유한반만년 이레 단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얼토당토 않는 계약을 앞세워 잠식해오는 일제의 무모한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호남창의동맹지의 최초 결성지가 다름 아닌 속금산이었다는 점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옥구에서 해남까지 호남53향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의병봉기를 마치 멸치잡이 저인망이 바다 밑을 휩쓸 듯 일본 헌병대가 호남대토벌작전을 감행하여 무자비한 살 상극을 벌렸을 때에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우리의 의로운 선비들이 쫒기고 쫒긴 나머지 한 둘 모여들어 와신상담의 한을 익혔던 곳이 바로 지리산 석벽 밑 의사방義士坊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성계에 의해 창업된 조선왕조는 비록 대륙 밑에 붙은 자은 나라로 위화도회군이라는 일대 사건을 계기로 이룩된 나라지만 사대교리의 입장에서 항상 민족자존의 뿌리는 ‘황산대첩’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제에 맞선 의병동맹도 속금의 뜻이 어린 곳을 찾아 모였고 저들을 피해 국권회복의 뜻을 익힐 자리도 찾았을 것이다.
 
 
朝鮮태동 알리는 잔치 터
 
이성계장군 황산대첩 승리로 벼랑 끝 고려사작 구원
시조 이한공서부터 목조까지.... 전이씨 옛터
오목대에서 일가 모여 ‘대풍가’ 불러 새 왕조 탄생 암시
 
전주오목대 全州梧木臺
 
속금산束金山에서 곧바로 금산을 거쳐 개경으로 향하여 반드시 우왕에게 황산대첩의 전말을 소상히 보고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당시 도원수 이성계는 방향을 바꿔 자시의 고향인 전주에 들러 李氏종친들을 오목대에 불러놓고 거창한 개선자치를 벌리게 된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것인가? 물론 자신의 전공戰功을 우왕에게 보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천명에의 확신이 깊었기로 우왕을 찾아 그 동안의 전말을 알리는 공식적 의례보다는 오히려 장차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구하는 것이 급하며 나아가 그 같은 인재는 일단 관향에서 자연스럽게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게다가 전주는 장군수와 호운석에 얽힌 목조의 옛 사직(5대조 이안사의 옛집)이 있었으니 완산지에 전해오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목조가 어렸을 때에 아이들과 발산 기슭 아래에서 폭우를 만나게 되자 바위 아래에 피신하고 있었는데 큰 호랑이가 앞에서 으르렁 거리는지라 목조가 어린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호랑이는 사람을 물지 아니하고 다만 한 사람만 해칠 것이니 옷을 벗어 던지어 시험해 보자”고 했다. 이에 어린 아이들은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제일 많으니 그대 먼저 옷을 벗어 던져 시험해 볼 수밖에 없다” 했다. 그랬더니 호랑이가 덥석 받아 무는지라 여러 아이들이 목조를 끌어 내렸더니 호랑이는 달아나버리고 갑자기 벼랑이 무너지는 바람에 여러 아이들은 그대로 깔려 죽고 오직 목조만이 살아남았다. 또 발산 남쪽 자만동에는 장군수라는 나무가 있었다. 목조가 어릴 적에 아이들과 노닌 곳이다. 그는 여러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 큰 나무 아래에서 진법을 익힌 곳이니 때에 이 나무를 장군수라 했다. 비록 나무는 없어졌으나 그 터는 그대로 있다.
 
 
대풍가와 망경대 大風歌와 望景臺
 
슬치(임실과 완주의 경계)에서 발원한 전주천이 승암산을 돌아 흐르는 바로 그 언저리에 호운석에 얽힌 설화가 감돌아 있고 그 위로 오동나무 숲이 빽빽했던 발산의 작은 봉우리에는 오목대梧木臺가 있다. 이 근지는 조선발상의 두 과정을 알리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으며 각각 고종 광무4년(1900년)에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와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각이 있다. 망국의 와중에서 고종 자신이 일본을 이겨야 할 까닭과 조선발상의 터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로 새삼스럽게 시대를 건너뛰어 세운 역사의 표적물이다. 즉 오목대는 황산대첩 이후 개선자치를 벌렸던 곳이요. 또 하나는 시조 이한공 이래 목조 이안사에 이르기까지 전주이씨의 옛 터가 바로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기념비다. 전해오는 바에 의해 따르면 이성계는 이 오목대에 일가들을 모아 놓고 개선잔치를 하는데 한참 술자리가 질펀하게 벌어지고 모든 이들의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자치의 절정에 그는 한고조가 천하통일의 이상을 노래로 불렀던 대풍가大豊歌를 자신만만하게 불렀다 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풍가大豊歌
 
큰 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날리며 오르도다.
위력이 천하에 떨침이여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어찌 용맹스런 자를 얻어
천지사방을 지킬꼬.
 
 
참으로 자신만만한 일이기도 하였다. 거침없이 취흥을 벌여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를 부른 뜻은 틀림없이 자신을 은근히 한고조로 비하고 장차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뜻으로 노래로 좌중에게 비친 것이다. 한편 이 노래를 듣다 못한 포은 정몽주는 때에 말을 달려 전주천을 거쳐 남고산 망경대에 올라 멀리 개경을 바라보며 비분강개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 한 수의 시로 읊었는데 이 시는 지금까지도 당시 석벽에 새겨져 전해오고 있다.
 
천길 바위머리 돌길 비껴/ 올라서니 이 맘 잡을 길 없네/ 청산은 부여국을 다짐했건만/ 황엽만 백제성에 흩날리네/ 가을바람에 내 맘은 괴롭고/ 백년호기는 이제 다 틀렸네/ 하늘가에 해는 저물고/ 뜬 구름이 합쳐지는 이때 /고개 돌려 속절없이 바라만 볼 뿐이네.
 
 
황산전우년작 完山戰于年祚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던 고려의 사직을 황산의 한 싸움에서 구한 이성계는 전주 오목대에 이르러 재삼 조선개국을 결심하였고 이에 뜻을 달리한 포은 정몽주는 망경대에 올라 뜬 구름 합쳐지는 이때를 오직 고개 돌려 속절없이 바라 볼 뿐이라 하였다. 흔히 고려 충절을 말 할 때에는 만수산 두문동을 든다. 그러나 선죽교에 혈흔이 비쳐지기 이전에 이미 전주망경대가 있었고 태종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의연히 ‘혼백가魂魄歌’로 화답 할 수 있었던 포은의 기개는 벌써 망경시(望景詩)에 의연히 어리어 있음도 알아야 한다. 한 대에 좌중에서 젊은 이성계가 ‘석자 칼머리에 사직을 평안케 하리라.(三尺劍頭安社?) 하니 모든 이들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오직 노장 최영만이 분연히 일어나 ’한 가닥 발 체 끝으로 건곤을 인정하리라 末定乾坤?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어찌 두 별들의 글자랑에 불과하리.
 
아무래도 이성계는 석자 칼머리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리라는 안사(5대조의 힘)에 이 전주 오목대에서 얻었기 때문에 아니었을까.
 
 
전북은 조선개국의 발상지
 
 
황산대첩에 얽힌 대소지명 40여 곳
경기전 등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
유적지 문화관광지로 개발 서둘러야
 
 
황산대첩 길을 마치며
 
역사는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여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주이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드시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의례히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그동안 황산대첩과 관련된 지명을 찾아 소개한 것만도 꽤나 많다. 좁은 길을 넓히고 지나간 ‘새벼리’(진안정천)를 비롯하여 구사를 훈련시켰던 습진번덕(장수)과 새벽 닭 울음을 신호로 출정 길에 나설 수 있었던 용계리(장수), 그리고 밤중에 나팔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구라치’(남원보절) 등 황산을 향해 나섰던 진군 길은 지금도 역력하지만 역사의 흐름 따라 까마득히 잊혀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뿐인가. 길 할미의 안내로 호랑이가 물어갈 위기에서도 정신을 차려 오직 인화단결로 수많은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여산신(女山神)의 설화가 여원치(남원이백)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아있고 달빛과 바람을 끌어 분기탱천의 기세로 일당백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대첩의 격전지에 각각 인월리(남원인월)와 인풍리(남원아영)가 있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 물 샐 틈 없이 적재적소에 군사를 배치했었다는 중군리(남원산내)와 교만하기 그지없고 포악무도하기 싸기 없던 아지발도를 치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는 피바위(남원인월)가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그러나 막상 대첩을 기념하는 옛 빗돌은 일제의 폭파로 파손된 채 한 때에 우리의 슬펐던 역사가 있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었다는 이른바 ’동무덤과 서무덤‘으 저들에 의해 터무니없는 한자 이름으로 바꿔져 버리고 말았다.
 
승리의 기쁨을 안고 개선하던 그 길에는 어떤 이름이 자국으로 남아 있는가? 배불숭유를 결심하게 된 동기로 알려진 승방 천여간의 만복사는 옛터로 남아 있으나 다만 동네 이름은 왕정리로 남아 있고 무학을 만났던 팔공산을 찾다가 안개 속에 한 나절을 헤매었다는 당시의 설화는 왕방리(임실성수)라는 지명 속에 녹혀져 있다. 이처럼 황산대첩에 얽힌 대소 지명들은 대략 40여 곳에 흩어져 있다.
 
 
천명 받아 세운 조선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길을 열어주며 선악을 밝혀주는 가장 큰 거울이다. 그렇기로 흔히 하늘을 믿어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뤄주는 것은 오직 하늘이라 하였다. 인간만사 크고 작은 일들이 다 그렇거늘 하물며 한나라를 여는 막중한 일이 어찌 천명이 아니랴.
 
허공에서 터진 ‘성수만세’소리가 귓속에 역력히 꽂혔던 것도 천명이요. 꿈에 금척을 받았던 일도 불변하는 새 자로 새 나라를 새롭게 열라는 천명의 계시였으니 이런 천명을 얻고 어찌 목성의 번영을 위해 속금하지 않으랴. 농본주의를 표방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있어서의 호남이야말로 계란으로 치면 노른자위만큼이나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풍요로운 호남을 다만 곡창호남으로 여길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 대접을 적당히 해야 할 필요가 잇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려 이후 차령 이남의 땅으로 인재등용에 많은 제한을 두었으나 조선개국과 더불어 약간 그런 제한은 풀어지는 듯 했더니 끝내 소망대로 이뤄지지는 않았고 비보裨補가 다만 속금으로 바꾸어져 버린 감이 다분하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황산의 정인지의 싯귀 처럼 조선개국의 상서는 아지발도를 꼼짝 못하도록 가두어 놓은 지리산의 덕택이요. 백성들의 신망도 두텁고 문무도 겸비한 이성계에게 금척을 내려준 속금산의 도움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이 개국 된 그 이듬해에 삼봉정도전은 몽금척과 수보록을 각각 궁중정재1호와 수보록을 2호로 바쳐 올렸으니 이미 이때부터 오백년 국운이 다하고 어둠을 지나 민주사회 지방자치시대가 되면 궁중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정재(呈才)를 너희가 계발하여 문화상품화 시키라고 물려준 셈이다. 용케도 저주에는 도립국악원이 있으니 조선이 망한 백 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이르러 어찌 하필 경기전, 오목대, 망경대, 이목대, 풍남문 등만을 손꼽아 전주야말로 호남의 제일로 53향을 호령하였던 전라감영이라 이를 것인가.
 
숱한 내우외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형문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도 물론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문화재는 그 유형을 유형답게 만든 무형의 뿌리가 있는 법이다.
 
 
국난극복의 표본
 
누구나 21c를 앞두고 무한경쟁 시대니 문화경쟁 시대니 국제화 시대니 지방자치 시대니 하면서 제각기 신통한 점을 친다. 그렇지만 막상 이런 시대를 맞아 반드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화상품을 개발 발전시킬 생각에 이르러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일본이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 하면서 외국의 예는 마치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인 냥 낱낱이 꿰고 이들을 닮은 것만이 선진하는 길인 양 떠들어 대는 자가 많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들을 그대로 답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따라도 좋은 부분이 있고 따라서는 안 될 부분도 있고 또 저들에게는 도저히 없는 우리의 보물도 있는 법이다.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역사의 축적이 짧은 나라는 그 나름대로 흔적이 있고 문화적 특질의 본류가 우리였던 민족자존마저 저버린 채 무조건 남을 따르는 일은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적어도 조선개국의 상서를 열게 된 바탕에는 왜적을 이겼던 자랑스런 역사가 있음을 높이 받들어 항상 민족자존의 긍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뻔하다. 태조이성계의 진영을 모신 경기전이 연중행사만 치루는 적막강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으로 생명력 있게 이어 가려면 많은 탈바꿈이 필요한데 그 하나의 좋은 아이디어로 ‘몽금척’이나 수보록 같은 궁중정재의 정기공연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다. 그리하여 경기전, 오목대, 망경대, 이목대, 조경단, 등과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이미지로 옛 도시 저주를 가꾸는 것도 바람직하다. 게다가 년 간 수십만이 찾는 마이산과 연계하여 개발하여도 좋다. 그저 산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름의 역사가 숨어 있고 그 역사의 숨결 속에 실은 우리의 버젓한 얼굴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역사 따라 생긴 지명만 해도 그렇다. 몸 어딘가에 남다른 점이 있기에 점순이요, 삼월에 낳았으니 그 이름이 다만 삼월이라는 식으로 임금이 물을 마셨으니 어수정이요. 안개에 속아 길을 잘못 들었으니 왕방리요. 이런 역사 따라 생긴 자랑스런 지명이 있는 곳에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할 일 아니겠는가?
 
 
이성계 회군로 대운재에서 정몽주대화
 
정몽주 1337 ~ 1392(공양왕). 고려 말 학자이며 정치가다.
 
황산대첩에서 크게 승리를 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이암에 들러 대운재를 넘어 가면서 이성계는 정몽주에게 말을 건냈다. 옛말에 산중수복의무라 하더니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있고 첩첩 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 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니
 
정몽주는 그야 “柳暗花明又一村유암화명우일촌이지요,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곳에 한 마을이 있겠지요”. 했다. 이성계는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나 있는 길이거늘 어찌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야 어찌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히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이 밝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만 산천에 흩어져 있는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내 천명을 이루는 것이다. 했다. 그때부터 정몽주는 이성계의 걸림돌이었다. 진안 마이산을 들러 전주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하고 대권에 꿈을 밝힌다.
 
 
오목대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친 뒤 돌아가는 길에 조상들의 고향인 전주에 와서 오목대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호기 있게 “세상을 평정 하고 싶다” 라는 시를 읇었다. 이성계는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으며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종친들 앞에서 은근히 밝힌다.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읊은 시 대풍가
 
풍운속을 일어섰나 위세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수그려 우러러 맞네.
 
정몽주가 개성 쪽을 보면서 절을 하고 이제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었구나 하면서 한숨을 쉬던 곳이 바로 오목대이다. 대풍가를 통해 이성계는 흉중에 묻어두었던 천하제패의 꿈을 은연중 드러냈다. 이에 정몽주가 격분한 마음에 한달음에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북쪽 개경을 바라보며 그 심정을 노래로 읊었으니 지금도 만경대에 그 시가 새겨져 있다.
 
천길 된 바윗 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어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이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이목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가 살았던 곳이다.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 제3장에도 나타나 있다. 정도전, 조준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신진 사대부와 3은(포은, 목은, 야은)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의 온건 신진사대부가 있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사대부들은 이성계와 연대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고 했고 온건 사대부들은 고려라는 바탕위에서 개혁을 시행하면 된다 라고 주장했다. 위화도 회군 2차 정벌 이후 최영 일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잡는다. 이방원(후일 태종)이 잔칫날 정몽주를 불러 하여가를 부르며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게 되고 여기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고려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들어 낸 것이다. 이에 이방원은 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쳐 죽인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일이 있으랴
【향토】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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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