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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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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회군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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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6. 22:16) 
◈ 이성계 회군로 - 1
이성계의 황산대첩 회군로를 찾아 - 헬리콥터를 타고 성수산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산세를 발견하게 된다.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치달아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 나아가고 있다. 남동방향으로는 지사면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맥이 통하고 서남쪽으로는 임실의 두만산을 휘어 감다가 강진의 백년산과 덕치면의 회문산으로 뻗어 나아갔다.
이성계 회군로
 
이성계李成桂 황산대첩黃山大捷 천명天命으로 여겨
 
 
이성계의 황산대첩 회군로를 찾아
 
헬리콥터를 타고 성수산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산세를 발견하게 된다.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치달아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 나아가고 있다. 남동방향으로는 지사면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맥이 통하고 서남쪽으로는 임실의 두만산을 휘어 감다가 강진의 백년산과 덕치면의 회문산으로 뻗어 나아갔다.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진안 마이산을 거쳐 조라치(鳥羅峙)에 이르는데 이곳은 금강, 만경강, 섬진강 셋의 분수령이다.
 
그런데 신라의 대선사(大禪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전국의 많은 산을 두고 하필이면 왜 이곳 성수산을 찾아 그 주봉아래 암자를 지었을까.? 도선(道詵)이야말로 우리나라 풍수지리계의 태두(泰斗)이자 대가(大家)였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풍수지리상의 길지(吉地)는 항시 큰 뜻을 품은 영웅호걸들은 관심을 두게 마련이었다.
 
일찍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 환희담(歡喜潭)에서 기도를 드린 뒤 고려 창업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역시 젊은 시절 이곳에서 무학 대사를 만나 상서로운 꿈에 대하여 시원스레 해몽을 듣고 그의 인도로 500일 기도를 드린 뒤 왕건이 목욕을 하였다는 환희담에서 목욕재개하고 홀연히 이상한 길조를 얻어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는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씨를 작은 바위에 각자(刻字)를 하였다. 삼청(三淸)이란 공기도 맑고, 물도 맑고, 정신(氣)도 맑다고 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들이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항상 떠나지 않고 맴돌았으나 고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남원 운봉의 황산벌에서 왜군(倭軍)인“아지발도”군(軍)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해진 이성계는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으로 무학 대사를 그리며 조선개국의 꿈 성수만세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팔공산 도선암(현 성수산 상이암)을 찾았다.
 
 
호남은 조선개국의 발판이었다.
 
북으로는 강을 경계로 대륙과 연결 지어져 있고 남으로는 해협을 끼고 일본열도와 인접해 있는 우리 한반도는 그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에 항상 “사대교린”을 표방하며 그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자존을 세우며 끊임없이 성장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륙의 절반을 휩쓸며 호기 당당하게 살아온 고구려의 옛 전통을 이어받아 국호까지도 “고려”라고 불렀던 그 시대에 있어서의 우리 민족의 형편은 어떠하였던가.?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이 39년간의 몽고 침략으로 사실상 고려는 한때에 저들의 부마국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왜구의 끊임없는 발호로 말미암아 한반도 전체는 크나큰 몸살을 앓고 있어서 국세는 날로 피폐일로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고려조가 청산되고 새로운 조선조가 개국되기 12년 전 있었던 “아지발토”의 침략은 가뜩이나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고려조가 망하느냐 다시 일어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이때에 이를 최무선이 왜구를 맞아 화약무기를 써서 크게 무찌른 진포대첩에 연이어 내륙 깊숙이 쳐들어온 왜구를 운봉황산에서 맞아 일망타진하였던 황산대첩은 오천년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자존의 자랑이 아닐 수 없으며 기진맥진한 고려조가 청산되고 새로운 아침의 나라 조선개국의 발판이 되었다.
 
 
왜구는 쌀농사가 잘되는 호남 침략을 목표로 하였다.
 
어찌하여 왜구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때때로 반도 조선을 괴롭혀 왔던가.? 그 까닭은 물론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의 생존이 있기 때문에 코밑에 가로 놓인 포도청을 달래기 위해 조선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식량부족에서 오는 쌀이었기 때문에 왜국침략의 최대 목적은 쌀 도둑질이요 그 도둑질의대상지는 언제나 저들과도 거리상 가깝고 쌀농사가 가장 성한 곡창 호남일 수밖에 없었다. 도둑들이 즐기는 마당은 곧 주인에게도 귀중한 마당일 수밖에 없었으니 농업이 주산이었던 그 때에만 볼지라도 호남이 휘청거리면 민족 생존이 휘청거리고 호남이 풍성하면 민족 전체가 탈 없이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로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도 없다”는 충무공의 말은 하필 저 임진왜란 당시의 속사정만을 나타낸 말로 받아 들리기 보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왜구의 호남침공을 운봉 황산에서 때려잡은 그 날의 그 큰 승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던 고려의 사직을 누란의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의 승리였으며 나아가 호남을 조선국의 발상지로 끌어 올릴 수밖에 없었던 주요 발판이었다. 물론 하나의 전쟁이 승리로 장식 되려면 그 원인 중에는 상대를 앞지를만한 유리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인데 그 기본적 조건을 간추려 보면 천시가 옳아야 하고 지리가 맞아야 하고 인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 세 가지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명장 이성계가 지녔던 이 세 가지 조건은 각각 어떠하였던가? 첫째 남정북벌로 튼튼하게 단련된 백전필승의 노련한 지략과 지모는 허술할 만한 흠집을 이미 다 털어버린 나머지였기 때문에 자칭 소년장수라고 뽐내며 거만을 떠는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르기에 이미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해도 좋다. 게다가 우선 “명산은 명장과 같고 대천은 정병과 같다.” 는 말처럼 명산 지리산과 거산 덕유산의 맥이 바짝 닿아 고원위의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인월 ― 운봉간의 목 황산에 자리 잡고 겁 없이 달려드는 왜구를 유인 할대로 유인하여 놓은 그 솜씨가 벌써 지리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전백승을 거두는 법이다. 그렇기로 밝은 쪽에 적을 두고 우리는 어둠속에 가려 있다면 이미 그 싸움은 결판난 싸움이나 다름이 없고 팔뚝 힘에 바람 힘을 보태어 화살을 쏘아대면 그 화살은 “흥”소리를 내며 사반공배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했던가? 고원 위에 뜬 달빛을 끌어다가 적을 비치면 그 날의 도둑떼들은 낱낱이 헤아리며 죽였으니 그래서 오늘날 그 날의 격전지를 인월(引月)리라 하고 팔랑재 바람 구멍사이로 불어오는 센바람을 끌어다가 화살에 힘을 붙여 그 때 그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을 여지없이 무찔렀기로 지금도 인풍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흘러간 역사에 가설을 둘 수 없다 하지만은 만약 그 때 그날의 소년장수 아지발토에게 당시 어느 고려장수의 주장대로 저들이 원하는 국토의 일부를 그대로 내주었더라면 그들은 반듯이 호남을 원했을 것이요. 만약 호남을 그들에게 내주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딴에 우리 국토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모양이요. 백두대간은 그 척추요 지리산은 단전이며 예부터 우리 호남천지 53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대로 삶에 불가결한 먹이를 생산하는 보배로운 곡창 호남을 저들에게 내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도둑떼 아기장수를 달래기 위한 말이었다 할지라도 너무나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꿈속에서라도 그런 민족자존을 해치는 말은 아예 탓할 가치조차 없는 망언 중에 망언이다.
 
잔뜩 푸르렀던 지리산도 이제는 늦가을 첫눈으로 머리가 희고 달마다 고원 운봉에는 의례히 보름달이 완연하게 밝으며 팔랑재 구멍사이로 여전히 저 동해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겨울로 접어들수록 세차게 불어온다.
 
가뜩이나 그 때 그 쌀 도둑떼들이 이 땅에 쳐들어와 우리네 재산을 마구 사르고 우리네 목숨을 제멋대로 빼앗던 되게 버르장머리 없던 그 만행의 슬픔이 황산대첩의 기쁨으로 상쇄 된지 만 630년이 된 오늘에 다시 그 날을 기리고 그 뜻을 되새기는 참다운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역사는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그 거울에 비춰가며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지어가야 할 필요가 있기에 우리는 항상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이며 같은 역사 중에서도 그 역사의 진실을 실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가로 놓여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과거 일제에 의해 저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축소 왜곡시키기도 하고 또는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인멸시키기에 급급하였다는 점이 너무나도 컷 다는 점이다.
 
승전을 자랑하는 대첩비를 폭파한 것이 그 중요한 실 예이며 황산대첩으로 인해 얻어진 우리의 지명을 낱낱이 바꿔버린 것이 또 하나의 예이고 오늘날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국사 대사전에 까지도 황산대첩에 대한 풀이는 너무나도 축조 설명되어 있는 것이 또한 일제 잔재가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부끄러운 한 예이다.
 
 
황산대첩 후 회군로를 정리하다.
 
아무튼 황산대첩에 대한 뜻을 설명하는 과정에 진군로(進軍路)는 설명을 생략하고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관련내용과 회군로(回軍路)에 대한 것 중 임실과 관련 있는 사항들만을 모아서 정리하고자 한다.
 
장수에서 인월로 가는 지름길은 번암을 거쳐 가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왜구들의 동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모르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리라.”며 “자세히는 몰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척후의 보고를 세밀히 분석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지 급한 마음에 저들을 빨리 소탕해 버릴 요량으로 지름길만을 택하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왜구의 음흉한 전략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으로 자칫 만용이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여러 정황을 분석하는 한편 저들의 호언장담에서 그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과연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려는 것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저들이 호언장담하는 이면에는 진군의 목표가 다른데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성계는 갑자기 눈에 별이 쏟아지며 가슴이 확 트이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 도 그럴 것이 애시당초 저들이 쳐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곡창 호남을 샅샅이 누비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식량을 약탈해 가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미 함양에서 잔뜩 당당해질 대로 당당해진 기세를 슬그머니 접어 남원에서 광주로 갈 리가 없는 것 아닌가. 기운이 꽉 차면 누구나 교만해지고 기운이 빠지면 누구나 인색스러운 법이며 말 타면 경마 잡고 싶은 것이 사람마다 지닌 속성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왜구들은 남원을 놓아두고 인월에서 곧장 전주를 향해 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측 군사들로 하여금 곧장 전주를 향해 떠날 채비를 갖추게 하면서 교만한 왜구를 일망타진할 작전을 세웠다.
 
즉 인월에서 전주로 가는 지름길은 남원 산동 목동에서 고개를 넘어 보절을 통과해야 하는데 보절로 접어들면 일단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이곳이야말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아 싸우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지역이다. 이성계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장수에서부터 일부 군사를 이곳으로 보내 함미산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여서 이제는 전 주력 부대가 선발대와 합류해 왜구를 소탕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때 쌓았던 함미성의 흔적이 지명까지 남아있고 진을 쳤던 터도 진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진기리는 본래 진기리(陣基里)로 불렀던 것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슬며시 진기리(眞基里)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니 조선 종자를 왜놈들의 종자로 바꾼 이른바 창씨개명만을 욕할게 아니지 않은가. 아니라 다를까 산서 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보절 진기리에 도착하자 마침 왜구들이 횃불을 밝힌 채 산동의 목동 고개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도 자신의 판단이 맞아 떨어졌을 때에 느끼는 희열이란 마치 수도자가 많은 고생 끝에 어느 날 문득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얻는 법열과도 다를 바 없으리라. 더욱이 다른 길을 타고 산동의 목동고개 넘어 까지 귀신도 모르게 우리 군사를 보내 잠자코 숨어 있다가 왜구들이 다 넘어 왔다 싶으면 나팔을 불라고 단단히 일러둔 일까지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시켜 보면 당시 이성계가 느꼈던 기쁨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되는 바 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껄이며 점점 왜구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난데없이 이성계는 큰 소리를 명령하기를 “횃불을 밝히라”고 소리쳤고 횃불잡이 군사들은 명령대로 미리 준비했던 횃불을 일제히 밝히니 당황한 왜구들은 기겁하여 반사적으로 오던 길로 너나없이 몸을 돌려 헐레벌떡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왜구들은 허겁지겁 달아나다.
 
이와 같이 왜구들이 작살 맞은 뱀이 달아나듯 전후좌우 살필 틈도 없이 횃불을 든 채 한참 달아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저 고개 마루에서 ‘뛰--’하는 소라나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아나는 왜구들인지라 어느 곳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는 꼴이 실로 가히 볼만한 눈요기꺼리였다. 마치 독안에 든 쥐가 힘써 빠져나갈 구멍을 애써 찾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이 횃불아래서 연출되는 동안 대부분의 왜구들은 맞아죽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왜구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 돌아간 왜구들은 횃불에 비친 우리 군사들의 진지를 보고 그대로 아지발도에게 알려 끝내 왜구의 전주 침공 루트를 포기 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은 사생결단하고 달아나는 왜구를 쫓다 다녔던 소리나팔을 잃게 되는데 날이 밝아서야 다시 찾게 됐다. 이런 일로 인해 산동의 목동에서 보절의 진기리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을 ‘잃었던 나팔을 다시 찾은 곳’이라는 뜻에서 지금까지『구라치』라 불러오고 있다.
 
 
帝王峰에서의 天祭를 지내다.
 
전주침공을 위해 구라치를 넘어오던 왜의 척후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진기리에서 박살낸 이성계는 몇 명 살아남지 않은 적의 줄행랑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곧장 발길을 남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번 전투를 위해 개경으로부터 천리를 행군해 오는 동안 왜구에게 당한 우리 백성의 시체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였던 그 참혹스러운 광경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일단 우리 군사의 환영을 받고난 뒤에 그동안 왜구와 싸웠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장차 왜구소탕을 위한 작전에 들어가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이 “왜구들은 운봉황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기로 공격에 어려움이 많으니 다시 남원으로 진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 옳다.”고 입을 모았다. 일찍이 사근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호통 치듯 말하기를 “왜구토벌을 목적으로 천리 길을 달려온 군사가 왜구를 찾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거늘 왜구를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일인가? 여러 장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 한 치의 착오 없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시요. 내일 아침 우리는 여원 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 하겠소” 라고 하였다.
 
 
길 할미 만난 女院峙
 
아침이 밝아오자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승전을 기원하는 맹세를 겸한 조찬을 서둘러 끝내고 왜구가 진치고 있는 황산을 향해 부랴부랴 잔뜩 낀 아침 안개를 헤치며 행군의 길을 떠났다.
 
운봉은 실로 호남의 지붕이라 불러오는 높은 고원이며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자며 반드시 평지에서 고원으로 접어드는 고개 하나가 있는데 이 고개를 지금까지 여원치라 불러오고 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고개 거의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짙은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심히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어떤 할미(道姑)가 나타나 말하기를 “지금 급한 대로 곧장 운봉으로 발길을 옮기지 말고 반드시 저 산으로 올라가 일주일 동안 천재님께 치성을 드린 뒤에 진군하시오. 그래야만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이길 수 있소.
 
그리고 텅 빈 사창(社倉)에 진을 치지 말고 말은 그 아래 후미진 곳이 숨기고 약간 사창을 비껴 그 옆에 군사들을 먹일 솥을 걸고 곧장 산봉우리에 올라 황산 골짜기에 숨어있는 왜놈들의 동정을 잘 살펴가며 있는 힘을 다해 싸우시오. 그래야만 저들을 물리칠 지리를 얻게 될 것이요. 또 아무리 힘센 군사라 할지라도 민심을 얻어야 이길 수 있고 더욱이 교만하고 무자비한 왜놈들을 맞상대하여 쳐부수는 데는 반드시 백성들의 인심을 얻는 일이 첫째이니 부디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정당하게 왜놈 소탕할 일만 차근차근 하시오. 그래야 하늘이 도와서도 이기고, 산신이 돌봐서도 이길 것이요.” 라 하고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자욱했던 안개도 활짝 걷히고 드디어 눈부시게 밝은 아침 햇살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럼 이 노파는 누구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노파는 본디 함양에 살았던 미모 단정한 여인이었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삼아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자결한 ‘원귀의 화신’이었다 일러오고 있다.
 
즉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一婦怨이면 五月飛霜이라)고 왜구에게 당한 사무치는 원한을 갚기 위해 그녀는 때에 길 할미가 되어 새벽안개 속에 쌓인 채 이성계 앞에 나타나 왜구소탕의 비결을 낱낱이 알려준 것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지금까지 남원에서 운봉을 넘는 고개를 女院峙라 부르게 되었고, 노파가 가르쳐 준대로 왜구와 맞서 싸울 때에 군사들을 먹일 솥을 걸었던 곳을 鼎峰, 말을 매었던 곳을 軍馬洞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七日間 天祭모신 帝王峰
 
여원치 정상에 올라가 일단 진을 치고 북쪽을 바라보니 약 3킬로 지점에 마치 투구를 쓴 모양과 같이 괴이한 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예로부터 고남 산이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뒤에 이성계는 그 산으로 올라가 곧장 동서 두 군데에 각각 천하대장군 한 쌍을 마을 어귀에 세우도록 하여 온갖 잡귀를 몰아내었으니 이때에 잠시 군사를 머물렀던 여원치 옆에 후미진 곳을 지금도 병모동(兵募洞)이라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해발 850미터에 달하는 고남산 정상에 올라 석축으로 천제 단을 쌓도록 하고, 인근 마을 한복판 바위틈에서 천연으로 솟아나는 정화수를 떠다가 7일 동안 밤낮으로 정성껏 천제님께 치성을 드리며 지리산 신을 비롯한 팔도명산의 여러 산신까지도 불러 모아 전승을 비는 기원제를 정성껏 올렸다. 이로부터 고남산을 帝王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밤에는 수천개비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불과 오륙 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왜구들에게 위압을 가했으며 한편 척후를 적진으로 밀파시켜 왜구들의 일동일정을 낱낱이 살펴오도록 하고, 황산 서북쪽에 군사를 보내 고개 마루에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 아차하면 석전을 할 계획도 세우고, 휘하의 중군을 비밀히 움직여 인원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좁은 계곡에 매복토록 하는 등 철저히 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켰기로 지금도 중군리(中軍里)라는 이름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결코 전투는 예상 할 수 없었다. 이성계 휘하의 군사는 고려군과 여진족을 합쳐 편성한 병력이 1천여 명에 불과한데 비하여 왜구의 숫자는 거의 열배에 가까운 대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제를 마친 바로 그날 밤 이성계는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용인 즉 황산 서북쪽 고개 마루에 쌓아 둔 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장군님!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왜구에게 희롱 당하여 왼쪽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여인이 길 할미로 나타나 장군님께 칠일칠성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지체하지 마옵시고 내일 당장 출정하소서.”
 
그 이튿날 간밤에 있었던 꿈을 기이하게 여긴 이성계는 새벽녘에 참모들을 집합시켜 당일의 일진을 보았다. 어느 때와 같이 이두란을 시켜 백보 앞에 투구를 놓아두고 유엽전 3개를 뽑아 쏘아보니 백발백중이었다. 매우 만족스런 결과였다. 그래 제왕봉 천제 단에서 장차 진칠 곳을 바라보니 마치 비단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듯하여 정봉과 제왕봉 사이를 장교동(長橋洞)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때에 훤한 앞길을 예견한 이성계 스스로가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荒山에서의 격전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칠일동안 천제을 마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친 곳은 황산 줄기의 나지막한 정봉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며 황산의 남쪽은 제법 넓은 냇물이 흘러 나가는 좁은 계곡이 있고 북쪽으로는 아영의 사창과 인풍리를 지나 함양으로 통하는 울도치가 보인다. 그리고 사창리 마을 앞 해발 500여미터 앞에는 황산에서 뻗어 내린 아담스런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왜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한 눈 안에 그대로 들어와 적정을 훤히 관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동쪽으로는 풍천이 흐르고 그 양옆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는데, 산 아래 남쪽으로는 낮은 평지와 늪지대가 있으며 이 평지와 왜구의 진지와의 사이에는 낮은 야산줄기가 황산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세를 유심히 살펴본 이성계는 틀림없이 왜구들이 이 야산과 험준한 산속에 매복하고 있으면서 우리 군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서 이성계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나 마냥 왜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일, 일단 왜구들의 동정을 정확히 살피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향해 싸움을 걸기로 결단을 내렸다.
 
 
바람 불어 준 곳 引風里
 
그러나 아무리 급한 상황이더라도 왜구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군사인지라 무모하게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우선 몇 명의 장수들로 하여금 일부 군사를 이끌고 풍천이 흐르는 왼편의 평지를 향해 슬그머니 공격을 시도해보도록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군사들은 반격해 오는 왜구에게 번번이 싸움다운 싸움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퇴각해 왔고, 이른 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해는 벌써 정오를 반나절도 훨씬 넘었다.
 
더구나 바람마저 때 아닌 동풍이 불어 닥쳐 우리 군사들이 싸우기에 심히 불리해짐으로써 야산에 매복한 왜구만 움직일 뿐 막상 황산아래 숨어있는 왜구의 주력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정봉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 잘못 이었던가?
 
그렇다면 앞서 ‘여원치에서 길 할미가 일러준 작전은 오히려 저들의 간사한 속임수였던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급기야 이성계는 하늘을 우러러 ‘제발 하늘이여! 저 팔랑 치에서 불어대는 바람을 돌이켜 이제 우리의 화살이 힘차게 왜구의 가슴을 찌를 수 있도록 도와 주옵 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이성계가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난 잠시 후 일진광풍이 팔랑 치에서 힘차게 불어오더니 그 바람이 아영의 야산을 흔들어 놓을 듯 몰아치고 난 뒤에 급기야 방향을 바꾸어 왜구들이 매복해 있는 곳으로 불어 닥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본 이성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측 험한 길을 택해 매복하고 있는 왜구를 유인한 뒤 곧장 북을 울려 쏟아져 나오는 적을 향해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처럼 이성계 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그동안 매복해 움직이지 않던 왜구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추측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성계는 이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우전 20발과 유엽전 50발을 쏘아 일단 쏟아져 나오는 왜구들을 주춤거리게 하면서 마침 휘몰아치는 바람을 등지고 비오 듯 화살을 퍼부어댔다.
 
이렇게 되자 광풍에 힘을 얻은 화살은 왜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리면서 우리 군사 앞에 그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그러나 왜구들도 만만찮아 물러서지 않고 세 차례나 기습을 감행해왔다. 이처럼 왜구의 기습은 집요한 것이었다.
 
급기야 벌어진 황산천의 대혈투, 피아간에 얽혀 진흙에 뒤범벅되어 벌인 이 격전에서 끝내 일어선 자는 정작 우리 군사들뿐이었다.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아! 중과부적으로 어렵게만 여겨왔던 이번의 싸움이었는데 천사에 따른 지세의 힘이 이처럼 클 줄이야. 남정북벌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백전노장 이성계로서도 처음 실감한 일이었다.
 
남원시 동면 황산 아래 자리한 이 마을은 그래서 당시 전투에서 우리 군에 절대 유리한 바람을 줄어준 곳이라는 뜻에서 인풍리라는 이름이 붙게 됐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달을 끌어온 곳 引月里
 
인풍리 싸움에서 대패한 왜구들이 다시 산위로 물러가 웅거한 채 요새만 굳게 지키고 있자 이성계는 우리 군사들을 풀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휘하 이대중등 10여명의 군사를 독려하여 왜구들을 사정없이 올려 쳤으나 사력을 다해 대항하는 왜구에게 오히려 쫓겨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실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그 까닭은 이미 해는 서산에 기울어 날마저 어두워진데다 어떤 기발한 새 작전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성계는 다시 ‘천재님이시여! 어서 동천에 달이 뜰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며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한다는 말처럼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구를 섬멸해야 할 판에 날이 저물어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이성계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았던가. 대낮같이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게 아닌가.
 
하늘은 섬 도둑떼 보다는 우리의 고려를 우리의 이성계를 도운 것이다. 이성계는 동녘에서 동그랗게 달이 돋자 군사를 정돈하고 진격나팔을 불어 총돌격을 명하니 우리 군사들은 일시에 산 정상으로 기어올라 적진으로 치달았다. 피아간 백병전이 치열해지자 이성계는 아군을 진두지휘 하면서 진격을 독려했다. 이때 적장 하나가 창을 겨눈 채 이성계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장수 이두란이 큰소리로 “영공은 뒤를 살피시요”하고 큰소리치며 말을 달렸으나 이성계는 알아듣지 못했다. 미쳐 손을 쓸 틈도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명궁 이두란은 급히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드는 적장의 목을 명중시켰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의연히 싸움에 몰두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며 다시 말을 갈아타기를 여러번 급기야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꽂히기도 했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박힌 화살을 뽑아 팽개치며 더욱 세차게 왜구들을 쳐 나갔다. 숫자상으로도 월등히 우세한 왜구들이 이성계를 두어 겹으로 포위하여 위기일발의 어려움에 처했으니 이성계는 휘하 기병과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 자리에서 적 8명을 베어 죽이니 왜구들도 더 이상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이성계의 기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장수들 역시 지쳐있기는 왜구와 다름없이 승패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풍부한 지략과 용기로 용장다운 기백을 높이 떨치면서 결국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
 
인월(引月)은 이처럼 때에 달이 올라 우리의 작전을 도왔던 관계로 전투가 이만큼이라도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로부터 달이 올라왔던 황산의 동쪽을 引月里라 불러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황산에서의 대첩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 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 기필코 이겨야 하는 왜구와의 싸움을 목전에 둔 황산벌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한 정적이 흐르면서 병사들의 긴장은 높아가건만 우리측이나 왜구측은 피아간에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다. 이때 천지를 흔들 듯한 이성계의 포효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싸우다가 적에게 죽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자는 나를 따르라”며 이성계가 비호같이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겁을 먹고 있던 우리측 군사들은 이성계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에 감동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용기백배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구의 사기도 만만치는 않았다. 나이 겨우 십오륙세 되는 소년 장수 아지발도는 백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빠르고 날쌔기가 나르는 호랑이와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아지발도의 창을 막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阿只拔都 잡은 피바위
 
백전노장 이성계는 그동안 갖가지 전투를 통해 얻은 경험에 비추어서 이번 황산 전투는 분명히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아지발도를 사로잡아 잘 달래면 좋은 인재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성계의 내심을 들은 장수 이두란은 “아지발도를 생포하려면 우리 군사의 희생이 너무 클 것이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그냥 죽일 것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이두란의 이러한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전신을 투구와 갑옷으로 감싼 아지발도는 날래고 용맹해 활을 쏘아 죽일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잠시 생각하는 뜻 하더니 이두란에게 “그러면 내가 화살로 투구를 쏠터이니 투구가 땅에 떨어지거든 그대가 곧 저놈의 목을 쏘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내달리며 아지발도의 투구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이성계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 꼭대기 한 가운데를 명중 시켰다. 화살에 맞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이 떨어지면서 투구가 갸우뚱하자 놀란 그는 투구를 황급히 고쳐 쓰려고 했다. 이두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지발도의 목을 향해 살을 날렸다. 이두란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목을 정확히 뚤었다.
 
펄펄 날든 아지발도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시뻘건 피를 쏟으면서 백마에서 곤두박질쳐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북을 울려 총공격을 명령했다.
 
사기충천한 우리군사들은 북소리를 천둥처럼 울리면서 우르르 달아나는 왜구들을 닥치는대로 쳐나갔다. 마치 수만마리의 황소떼가 울어대는 것처럼 처참히 울며 달아나는 왜구들.
 
실로 교만할 대로 교만했던 저들의 침략이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죽은 왜구는 우리 군사의 거의 10배나 됐고, 덕둔산과 지리산 쪽으로 달아나 살아난 왜구는 겨우 70여명에 불과했다.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는 황천을 가득차게 흘러 7일간이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1,600여필의 말과 산더미 만큼의 병기와 수급을 노획했다. 생포된 왜장들은 잔뜩 겁을 먹은채 이성계 앞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대첩. 이것이 바로 고려의 사직을 보전함과 동시에 교만한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이성계의 황산대첩이었다. 이 치열한 전투 당시 강처럼 피가 넘쳐흘렀던 황천 가상자리 넓은 바위는 지금도 피를 머금은 채「피바위」라는 이름을 달고 말없이 그 자리에 박혀있다.
 
피 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帝王峰 아래의 權布里
 
황산벌 싸움에서 도원수 이성계를 제외하고 공이가장 큰 사람은 외방출신의 이두란 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외방출신의 처명에 대하여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처명은 이성계가 1369년 12월 요동을 정벌할 때 사로잡은 장수로 처형하지 않고 살려 주었다. 이두란은 이성계의 관대한 처분에 깊이 감사한 나머지 그는 항상 이성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는데, 이번 싸움에서도 목숨을 바쳐 싸움으로써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아지발도 또한 용감무쌍한 소년장수였다. 그는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두려움을 몰랐다. 아지발도에게는 출정하기 전부터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다. 예지가 뛰어났던 그의 애첩은 아지발도의 고려 출정을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아지발도는 다리를 붙잡고 말리는 애첩의 간청을 물리치고 끝내 출정길에 나섰다. 이에 애첩은 통곡을 하면서 “정 이번 출정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면 저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 부디 고려에 가시거든 제발 황산이라는 곳에 진을 치지 마옵소서, 장군님께서 크게 불리한 곳입니다.”고 신신당부했다. 이러한 애첩의 부탁을 성가시게 여긴 아지발도는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뽑아 애첩의 목을 쳐 죽이고 자신만만하게 고려 출정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전투의 승리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바로 한 전투를 이끄는 주장의 교만과 자중에서 그 성패의 갈림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원치에서 만난 길할미의 지시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이성계는 승리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애첩의 지극한 간청을 잊은 아지발도는 스스로 이역만리의 객귀가 되었던 셈이다. 정도전은 이 대첩의 원인을 제천봉의 천제로 상징하여 제천봉을 태조봉(太祖峰)이라 불렀고, 이 곳의 기운을 얻어 널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봉 아래 마을 이름도 권포리(權布里)라 불러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불려오고 있다. 또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마친 그 이듬해에 황산에 들려 당시의 대첩은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8원수 4종사라 하여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이를 어휘각이라 하여 황산대첩비지 서쪽모퉁이에 전해져 오는데 다만 일정 말에 일본인들이 뭉겨버린 그 정확한 명단을 해독할 길이 없음이 아쉽다.
 
 
勝利로 이끈 세 가지 조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예부터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것으로 일러져 오고 있다. 첫째 때가 맞아야 한다는 天時요, 둘째는 피아간에 있어서 보다 작전수행에 유리한 지세를 재빨리 차지해야 한다는 地利며, 셋째는 핀 주먹보다는 꽉 쥔 주먹이 힘을 지니 듯 일치단결된 군사력이어야 한다는 人和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측의 10배나 되는 엄청난 왜구를 통쾌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남정북벌을 통해 탁월한 지략과 용기를 쌓은 백전노장 이성계의 뛰어난 전술 감각 이 세가지 조건을 두루 갖출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 승리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용계리에서 울어준 초저녁 닭의 울음을 신호로 전주로 통하는 길을 구라치에서 막은 슬기, 天時, 격전에서 앞서 서두르지 않고 고남 산에 들러 하늘에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림으로서 얻은 단결력, 人和력, 그리고 또 “험한 고지에 웅거한 왜구를 치기에는 벅차니 그들이 그 곳을 빠져 나오기를 기다려 치자”는 배극렴의 제언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곳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며 이미 왜구는 독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는 판단아래 바람을 잡고 달빛을 끌었던 전술전략地利등이 모두 위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준 것들이었다.
 
 
위엄 과시한 太基里 말무덤
 
그런데도 이성계의 용기와 지략을 미처 몰랐던 휘하의 군사들은 처음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출정을 몹시 두려워했던 나머지 전투에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마다 이성계는 탁월한 용인술을 발휘하여 휘하 군사들을 덕으로 감화시키기도 했고, 또한 덕화만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무예를 과시하며 장수로서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하나의 예가 산동면 태기리에 있는 말무덤 이야기이다.
 
즉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출정에 앞서 활을 쏘았는데 그의 말이 화살을 따라 잡지 못하자 이성계는 자신의 말을 단칼에 목베어 죽였다. 그러나 말을 죽인 뒤에야 화살이 뒤늦게 날아와 떨어졌다, 그러나 이성계는 말을 죽인 것을 깊이 뉘위치고 후히 장사 지내주었다. 또 전쟁터에서의 민폐는 곧 군사의 교만이며, 군사의 교만은 자칫 패전의 주요 원인이 된다. 때문에 이성계는 이를 극히 경계하여 추호도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엄히 군율로 단속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동국전사)권3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행군에서 군사들은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꿨는데 때에 이성계는 군사들에게 “대는 나무보다 가벼워 널리 운반하기에 편하다. 그러나 역시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우리가 거지고 온 물건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묵은 물건을 잃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탄복하여 모두 대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성계는 때와 장소, 또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도 정확한 판단으로 군사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대동단결 다짐한 斧節里
 
흔히 명산은 병장과 같고 대천은 정병과 같다(名山如名將 大川似精兵)는 말이 있다. 이 말대로 끊임없는 외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우리네 땅을 묵묵히 우리네 땅으로 고스란히 지켜준 것은 바로 말없는 푸른 산이요, 유유히 흐르는 냇물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왜냐하면 지리산이 크게 한쪽을 막아주었고, 그 줄기에서 뻗은 크고 작은 뫼들이 겁 없이 달려든 왜구를 중간 중간에서 그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용장 이성계는 용기백배하여 일당백의 힘으로 그 속에 든 섬 도둑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지나쳐서는 안될 특기할 만한 사실은 왜장 아지발도가 죽자 완전히 사기를 잃은 왜구들이 우왕좌왕하며 아비규환의 형상으로 허겁지겁 살길을 찾아 각자 도망하는 모양을 본 이성계가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싸움을 그쳐라, 예로부터 싸울 뜻을 잃고 각자 도생의 길을 찾아 도망치는 적을 모조리 죽이는 일은 마땅히 취할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는 점과 군사를 독려할 때에는 매섭게 몰아쳤으나 승리를 얻은 후 논공행상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이 관여하지 않고 조정의 지분을 맡겼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이성계의 인품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남원으로의 개선 도중 여원치를 넘을 무렵 앞서 전투에서 겁에 질려 뒷전에서 목숨을 아꼈던 군사들이 자청해 이성계에게 처벌해 줄것을 원했는데도 그는 이는 모두 용서해 주었었다. 여원치를 막 넘은 재밑에 있는 이 마을은 그래서 전쟁뒤에는 으레히 장수가 행해야할 노공행상을 거두었던 곳, 곧 이성계가 부절(斧節, 또는 儀仗)을 거둔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 부절리(斧節里)라는 지명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東忠里와 王亭里 萬福寺
 
전쟁이란 그 원인이나 명분이 어떻건 간에 피아간의 다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의 손실일 뿐이며, 그 중 가장 큰 손실은 뭐니 뭐니 해도 인명을 잃는 일이다
 
때문에 ‘一將功成萬祮骨’이라는 옛말처럼 전혀 인명의 손실이 없는 승리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용감한 군졸들의 충정없이 우연히 장군에게 안겨지는 영광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 전쟁의 특성에 빛춰 볼 때 격전에서 살아남은 군졸을 이끌고 개선하는 장수로서는 당연히 살아남은 군졸들에게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너그러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곧 이미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모의 정이 마음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개선의 기쁨은 곧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보다 결코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황산대첩을 가능케 한 충의로운 희생은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였던가?
 
물론 사근역 전투에서 희생당한 박수경이나 배언의 죽음도 그중 하나였고, 그보다는 이진에서 사로잡아 자신의 그림자가 된 장수 處明(이두란)의 희생이 더욱 큰 것이었으나, 겁에 질려 주저했던 배극렴 휘하의 군졸보다는 남원에서 단지 의를 위해 따라 나선 이름 모를 군졸들의 희생이 승전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해서 황산전투 당시 가장 많은 청년들이 의병으로 지원했던 곳을 東忠里, 개선의 기쁨과 희생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동시에 느끼며 전투에서 얻은 상처와 피곤을 풀었던 곳을 王亭里라 이름지어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다.
 
다만 이성계가 머물렀던 남원 왕정동엔 만복사라는 99칸의 절이 있었는데,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며 싸우는 군사들과는 달리 승려들은 그저 한가로히 지내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국의 병장 이성계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저 같은 불교에서는 더 이상 호국정신은 기대 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조선 개국 후 이뤄졌던 억불숭유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대목이다.
 
 
李成桂의 黃山大捷은 天命으로 여기다.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이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이곳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는 이성계로서도 승패를 쉽사리 예측할 수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행여나 왜구가 연거푸 실수라도 저질러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같은 기대를 신념으로 굳혀가며 차분히 전투에 임해온 결과 급기야 일당백의 성과를 이루어 황산대첩이라는 크나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 비몽사몽간에 여원치에서 나타난 길 할미의 지시가 그대로 적중한 것과 둘째 그에 앞서서 이미 개성을 떠나 남하해 오는 도중 장단에 이르렀을 때 대낮인데도 흰 무지개가 나타난 길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가의 길흉이나 나라의 흥망성쇠도 모두 이미 하늘이 정한일이라는 것이다. 대첩을 거둔 후 이성계가 취한 태도에서도 그러한 이성계의 믿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투에서의 공과도 묻지 않고 다만 조정의 지분으로 맡겨 마음을 비울대로 비워버린 것은 이번의 승리만큼은 틀림없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그런 노력을 가능케 한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 하늘 요천수 맑은 물을 바라보며 개선해 들어오는 자신을 열광적으로 환영해주는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듣고 한껏 기쁜 것도 하늘의 뜻이며 기린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만복사를 바라보며 치솟은 당간지주, 장엄한 가람, 그리고 그사이를 한가롭게 왕래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저 같은 불교로는 호국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한심스런 생각을 넘어 격한 분노심 마저 치솟는 까닭도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이성계는 열광적인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뒤로 두고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할 판인데도 그길로 무학 대사를 만났던 팔공산 도선암을 찾았다.
 
무학 대사 찾아 道詵菴으로 가다.
 
개선장군 이성계의 행렬은 여덟 장수와 네 종사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황산대첩을 전후해 그가 탔던 여덟 필의 헌걸산` 명마들이 뒤를 따랐다. 붉고 푸른 각종 깃발을 휘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안고 풍악을 울리며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개선 길은 위엄이 넘쳤다. 높은 구름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르는 새매 같은 황운골, 목이 길며 갈기가 유난히 푸르르 기린 같은 유린정, 바람을 앞지르듯 빠른 검정 가마귀 같은 추풍오, 번개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멧돼지 같은 발전 저, 그리고 모든 동물의 가장 잘생긴 부분을 모아 놓아 자색 용 같은 용 등자가 앞서고 그 뒤에 목과 네다리에 하얀 서릿발을 띤 백마 응상백을 탄 이성계의 당당한 위풍 게다가 수천 수백의 군사들이 풍악에 맞춰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며 이룬 장사지에 높은 산과 깊은 물을 가르며 지나는 모양은 가히 일대 장관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국토임과 동시에 또한 말없이 우리 백성을 돌보고 우리네 목숨을 묵묵히 지켜준 산과 들은 더 없는 명장이며 정명이 아닐 진데 저 높은 지리산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성계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들을 기지로 헤치며 왜구를 섬멸한 그 곳들을 바라보며 장엄한 개선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함을 뒤로하고 무학대사 찾아 도선암道詵庵 行
 
지사면只沙面 영천寧川은 작은 내라며 현계玄溪로 지명 바꿔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을 찾아
 
 
아! 천명天命 일 뿐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이곳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는 이성계로서도 승패를 쉽사리 예측 할 수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행여나 왜구가 연거푸 실수라도 저질러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꼭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그 같은 기대를 신념으로 굳혀가며 차분히 전투에 임해 온 결과 급기야 일당백의 성과를 이루어 <황산대첩>이라는 크나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 비몽사몽간에 여원치에서 나타나 길할미의 지시가 그대로 적중한 것과 둘째, 그에 앞서서 이미 개성을 떠나 남하해 오는 도중 장단에 이르렀을 때에 대낮인데도 흰 무지개가 나타나 길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의 길흉이나 나라의 흥망성쇄도 모두 이미 하늘이 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대첩을 거둔 후 이성계가 취한 태도에서 그러한 이성계의 믿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만 조정의 지분으로 맡겨 마음을 비울대로 비워버린 것은 이번의 승리만큼은 틀림없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그런 노력을 가능케 한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 하늘
 
요천수 맑은 물을 바라보며 개선해 돌아오는 자신을 열광적으로 환영해 주는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듣고 한껏 기쁜 것도 하늘의 뜻이며 기린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만복사萬福寺를 바라보며 치솟은 당간지주, 장엄한 가람, 그리고 그 사이를 한가롭게 왕래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저 같은 불교로는 호국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심스런 생각을 넘어 격한 분노심 마저 치솟는 까닭도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무학대사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이성계는 열광적인 남원백성들의 환호성을 뒤로 두고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할 판인데도 그 길로 무학대사를 만났던 팔공산 도선암을 찾았다.
 
 
응상백凝霜白이 건넌 가무내
 
개선장군 이성계의 행렬은 여덟 장수와 네 종사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황산대첩을 전후해 그가 탔던 여덟 필의 헌걸산 명마들이 뒤따랐다. 붉고 푸른 각종 깃발을 휘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얻고 풍악을 울리며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개선 길은 위엄이 넘쳤다.
 
높은 구름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르는 새매 같은 황운골, 목이 길며 갈기가 유난히 푸르르 기린 같은 유린정, 바람을 앞지르듯 빠른 검정 가마귀 같은 추풍오, 번개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멧돼지 같은 발전저, 그리고 모든 동물의 가장 잘 생긴 부분을 모아 놓아 자색용 같은 용등자가 앞서고 그 뒤에 목과 네다리에 하얀 서릿발을 띤 백마 응상백凝霜白을 탄 이성계의 당당한 위풍, 게다가 수천 수백의 군사들이 풍악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룬 장사지에 높은 산과 깊은 물을 가르며 지나는 모양은 가히 일대 장관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국토임과 동시에 또한 말없이 우리 백성을 돌보고 우리네 목숨을 묵묵히 지켜준 산과 들은 더 없는 명장이며 정명이 아닐 진데 저 높은 지리산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성계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들을 기지로 헤치며 왜구를 섬멸한 그 곳들을 바라보며 장엄한 개선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팔공산 도선암을 향해 가면서 이성계의 개선군은 마침 남원과 임실의 경계를 두고 흐르는 영천(寧川:임실군 지사면 계산리)을 건너게 되었다. 행군의 맨 앞에서 그동안의 감회에 젖어있던 이성계는 한 장수에게 그 천의 이름을 물었다. 장수는 이곳이 영천(寧川)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이름과는 달리 그 규모가 작은 냇물이니 川자를 溪 자로 고쳐 가무네 즉 현계(玄溪)라 부르도록 했다. 여기서 밝힐 일은 왜 寧川을 굳이 玄溪라고 고쳐 불렀던가 하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곧 溪는 川을 이루는 작은 흐름이라. 적을 물리치는데 소용되는 요새지로써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만약 가무내를 영천이라고 그대로 부르면 뒷날 다만 지명만을 믿고 이를 요새로 여긴 나머지 자칫 낭패가 뒤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임실군 지사면의 현계는 그래서 그때 고쳐진 이름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정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룻밤 묵었던 관기리館基里
 
이성계의 개선 군이 가무내를 건널 무렵엔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져 어두워져 갔으나 도선암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더구나 앞에는 큰 고개가 가로막혀 그날은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머물며 하루의 노독을 풀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 후 좌, 우를 살펴보니 오직 첩첩산중 고개 밑에 제법 큰 마을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성계 군은 그곳을 찾아 일단 하루의 노독을 풀기로 했다. 이성계는 또한 행군으로 잔뜩 지친 말에게도 준비했던 꼴을 먹이도록 명령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가 특히 말에 대한 신경을 썼던 것은 전투와 행군에서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전에 무학 대사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때에 사람이 귀하고 말은 사람보다는 천하기로 마굿간에 불이 났다는 전갈을 듣고 사람의 안부만을 물었다던 공자의 옛 일은 다만 인간을 소홀이 여기던 그 시절에 인간 사랑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 한마디를 음미하며 사람의 중요성을 새삼 깊이 느낀 이성계는 그 집에서 하루의 노독을 말끔히 풀 수가 있었다. 이처럼 무학 대사와 만났던 지난날의 팔공산 도선암을 찾기 하루 전 단잠을 잤던 마을을 이후로 館基(지사면 관기리) 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학대사 그리며 ‘아침재’ 넘어
 
왕방리 짙은 안개 속 길 찾느라 우왕좌왕, 이성계李成桂 반나절 고생 끝 도선암道詵庵 입구 당도, 이곳에서 황산까지 수 천리나 된다 하여 수천리數千里 지명 얻어
 
 
아침에 넘은 아침재
 
산골마을 관기리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성계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군사들을 독려해 팔공산 도선암을 찾아 길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어제 밤의 편안한 휴식으로 장병들의 피로와 노독은 거의 풀린 듯싶었고 더욱 반가운 일은 원수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장졸 간에 지켜야할 예의 이상의 그 어떤 깊은 신뢰를 퍼부어 주는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자신이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지자 이 시점에서 자신이 팔공산 도선암을 애써 찾는 이유를 여러 군사들에게 장광설로 자세한 설명까지 하지 않더라도 대강 귀띔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그러나 이를 즉시 말하지 않고 망설이는 참에 마침 길을 안내하던 비장이 “합하” 오늘의 행군은 마땅히 저 고개를 만마관萬馬關을 거쳐 전라 감영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아니다. 내 개선의 영광을 안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지나쳐서는 아니 될 곳이 있으니 그곳이 곧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이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않은 도선암 팔공산으로 가자” 라고 대답했다. 군사들은 이 말이 의아해 하면서도 도원수의 명령이라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어 지체 없이 불각지차로 떠오는 해를 바라보며 관기리 마을 뒤에 있는 재를 넘어 팔공산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따라서 도선암으로 향하여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이성계가 아침에 넘어서 아침재(조치:朝峙)라고 불러 지금까지 이름이 변하지 않고 있다.
 
 
안개 속에 길 찾아 헤맨 왕방리(枉訪里)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팔공산 도선암은 신라 말에 도선(道詵)에 의하여 창건된 고찰이기는 하나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작은 암자여서 수행하는 스님도 이름을 피해 혼자서 독불공을 하거나 은밀한 기도처로 삼아오던 터였기에 당시로써는 쉽사리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장병 중 누구를 앞 세워도 쉽게 찾을 수 없을뿐더러 또 섣불리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낮 모를 백성을 앞세워 찾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다만 팔공산 도선암을 팔공산에 있으리라는 가능만으로 도선암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아침재를 넘어서자 마침 안개가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성계 일행은 이처럼 짙은 안개에 묻혀 자취를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도선암을 찾느라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자비로운 무학 대사의 얼굴을 그리며 장사진을 이끌고 그저 전에 본 듯한 계곡 길만을 따라 올랐다. 그때 이성계의 앞에 어슴푸레 무엇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안개를 헤치며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뿔사!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애써서 찾던 도선암이 아니고 무학 대사의 모습이었다.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든 이성계가 안개를 조금 더 젖이고 앞을 주시해 보니 그것은 무학 대사의 모습이 아니고 낮 익은 군사들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안개가 제법 걷히자 이런 순간적인 일들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성계는 그때서야 자신이 여태껏 안개 속에서 무학 대사만을 그리며 헤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짙은 안개 속에서 가늠만으로 도선암을 찾으러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 운심불지처雲心不知處를 여러 번 반복하며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팔공산 도선암을 찾다가 산만 한 바퀴 돈 채 한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그 곳을 그르칠枉에 찾을 訪자를 붙여 왕방枉訪:지금의 왕방리 임실군任實郡 성수면聖壽面 왕방리枉訪里라 지금도 불러지고 있다. 오봉제가 축조되어 옛 마을이 물속에 잠기고 산 위쪽으로 옮겨 작고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생 끝에 수천리(數千里) 찾아 지명 얻어
 
이성계는 안개 속에서 헤매었던 왕방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실 묻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다는 말은 오직 탁 트인 길을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는 사람, 즉 도를 한사람만이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내놓을 말이라는 점을 익히 깨달았다. 그는 이런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심심산중에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기어이 도선암을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고 영문을 모르는 휘하 장졸들은 그저 원수의 뜻이라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를 수 없이 그대로 따를 뿐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휘하의 군졸들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팔공산 도선암은 고려의 태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팔공산이란 이름은 이미 도참을 제대로 공부하여 알만 한 사람에게는 다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만 원수가 이처럼 애써 찾는 정확한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졸들은 섣불리 이를 알아차린 듯한 태도를 취할 수도 없었던지라 너나없이 그저 뒤만 따를 뿐이었다. 하늘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는데 땅은 아직도 여름기운이 가시지 않아 일어나는 안개는 밤부터 서서히 일어났다가 새벽까지 짙게 깔려 있다가 차츰 해가 중천으로 오르면 어김없이 걷혀지는 법이다. 때에 반나절이 지나 태양이 은빛을 발하는 시점에서 그 빛을 타고 다시 도선암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일행들은 그 날 오후 새참 때 쯤 도선암 입구에 이르렀다. 비로소 이성계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부하 장수를 향해 “황산에서 여기가지가 몇 리나 될꼬?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장수하나가 엉겁결에 ”수천리(數千里)나 되는 듯 하옵니다.“ 라고 대담을 했다. 수천리는 이때부터 불러왔는데 오늘날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적고 있으니 아마 멀다는 뜻을 피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어 이해는 되나 그래도 애당초로 돌아가 역사 따라 지명 따라 그대로 적는 것도 또한 무방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향토】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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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