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후, 뉴욕타임즈는 ‘둔화하는 경기, 북핵 위협 증가, 공세적인 중국 사이에서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한국은 불확실성의 시대로 빠졌다’고 꼬집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치상황에서 중국의 본격적인 사드 보복인 ‘한국행 부정기 항공편 중단 조치’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지난해 9월부터 중국의 사드 보복은 더욱 확산되었다. 지난 2015년 9월 중국 전승절 70주년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한 시진평의 의도를 무색케 할 정도다.
이와 같은 중국의 사드 보복은 손익을 치밀하게 계산한 전략이다. 즉 한국 내 반(反)사드 여론의 고조 효과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8일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 6명의 중국 방문은 국론의 분열을 가시화한 셈이다. 최근 중국 사드 담당 부국장인 전하이(陳海)가 우리 외교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방한하여 정·재계 인사들을 접촉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우리 외통부가 묵인하였다.
미일의 정상회담에 이어 중국의 사드 보복은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도전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외교부와 국가안보회의(NSC)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과거 이들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일선에 나간 외교관들의 상대국과의 외교전은 총칼만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치열한 전쟁 상태다.
10여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창이던 2004년 우리 정부의 대응 전략은 ‘중국 눈치 보기’였다. 즉 그해 8월 방한한 중국 외교부 부부장 우다웨이(武大偉)의 발언이 당시 NSC 차장이었던 이종석 전 장관의 지난해 1월 회고록에서 밝혀졌다. 당시 우다웨이는 “한국이 간도가 ‘조선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였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우다웨이는 우리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5개항의 한·중 구두 양해’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이 합의의 핵심 내용은 ‘학술교류와 정치화 방지’였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없는 굴욕적인 합의였다.
두 달 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반기문 외통부장관은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무효이며, 다만 간도영유권 문제는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국제법상 해당 조약이 무효이면 당사국에게 무효를 통보하는 것이 위정자의 임무다. 광복 70년 만에 나온 정부의 ‘간도협약 무효론’이다. 그러나 당시 반기문 장관은 ‘간도협약의 무효’를 통보하지 않았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이 1941년 이전 체결한 모든 조약이 무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간도협약’만의 효력을 우리 정부가 유지시키고 있다. 더구나 간도협약의 무효를 통보하지 않은 행위는 헌법 66조 2항인 ‘영토보전의 책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법적 심판이 필요하다.
역대 정부의 외교관들의 처신을 보면, 문득 한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구 노릇을 한 박제순이 떠오른다. 박제순은 두 차례 외부대신을 했고,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며 을사7적이다. 이 조약 체결의 공으로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듬해 1906년 11월18일에 이토 통감의 사주를 받은 박제순은 간도문제의 외교교섭을 요청하는 공문을 일본 통감인 이토에게 보냈다. 이후 이토는 간도문제에 개입하였으며, 일본은 불법으로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었다.
우리 정부의 외교 관료들은 이와 같은 이소사대(以小事大)의 전통을 아직도 잇고 있는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