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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용성지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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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용성지편 (2012)
◈ 남원 『용성지』에서 본 임실
남원(南原)의 행정구역과 임실(任實) / 남원의 군명(郡名)은 대방(帶方), 고룡(古龍), 용성(龍城)이라 한다. 동쪽으로 30리 떨어져서는 운봉현계(雲峰縣界)에 이르게 되며, 110리 떨어져서는 안음현계 (安陰縣界)에 이르게 된다.
목   차
[숨기기]
 

1. 남원(南原)의 행정구역과 임실(任實)

남원의 군명(郡名)은 대방(帶方), 고룡(古龍), 용성(龍城)이라 한다. 동쪽으로 30리 떨어져서는 운봉현계(雲峰縣界)에 이르게 되며, 110리 떨어져서는 안음현계 (安陰縣界)에 이르게 된다. 남쪽으로는 50리 떨어져서는 구례현계(求禮縣界)에 이르게 되고 33리 떨어져 곡성현계(谷城縣界)에 이르게 된다. 서쪽으로 37리 떨어 져서는 순창군계(淳昌郡界)에 이르게 되고, 62리 떨어져서는 옥과현계(玉果縣界) 에 이르게 되고, 북쪽으로 70리 떨어져서는 임실현계(任實縣界)에 이르게 된다. 남원의 동쪽 끝과 서쪽 끝 사이의 거리는 172리이고, 남쪽 끝과 북쪽 끝 사이의 거리는 120리이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655리이고 7일 반 정도 걸린다.
 
남원의 坊은 번암과 추동 그리고 산동리에 목동이, 수지에 초리가 합해서 방을 이루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48방이었으나 용성지를 발간할 당시에는 45坊으로 줄 었다. 남원의 장흥리, 만복리, 서봉리, 통한리는 남원읍의 4방이다.
 
또한 남원은 동면(東面), 서면(西面), 남면(南面), 북면(北面)으로 나누어지는데 임실로 편입된 지역은 서면(西面)에 속했던 아산(阿山)방의 45마을, 돌고개(乭古介)방의 50마을, 말천(末川)방의 40마을과 북면(北面)에 속한 둔덕(屯德)방의 30 마을, 오지(梧枝)방의 50마을, 지사(只沙)방의 50마을이 고종 32년(1895) 임실로 편입되었다.
 
 

2. 『용성지(龍城誌)』에 나타난 임실 산천(山川)

이산(狸山)은 말천(末川)과 돌고개(乭古介)의 경계에 있으며 대암(臺巖)과 모 석(帽石)이 있다. 멸치(滅峙)는 말천방(末川坊)에 있다. 거령천(居寧川)은 거령현 (居寧縣)의 개현(介峴)에서 출발하여 오수역(獒樹驛)의 동남쪽에 이르러 임실현 (任實縣)의 평당원천(坪塘院川)과 합류하여 오수(獒樹)로부터 흘러 둔덕(屯德) 에 이르고 또 율천(栗川)과 함께 오천(鰲川)과 합하여 서남(西南)으로 흐르다가 순창군의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
 
삼계(三溪)는 둔덕방(屯德坊)에 있다. 거령천(居寧川)에서 흐르다가 율천(栗川)과 오천(鼇川)의 세 냇물이 합쳐져 서쪽 삼계석문(三磎石門) 앞으로 흘러 삼계 면을 적시고 적성진(赤城津)으로 들어간다.
 
 

3. 성씨(姓氏)의 분포

성씨(姓氏)들을 보면 거령(居寧)의 경우 백(白)·황(黃)·한(韓)·이(李)·장(張)씨가 많이 살았다.
 
 

4. 누정(樓亭)

 

4.1. 광제정(光霽亭)

광제정 전경
 
아산방(阿山坊)에 있다. 날개가 그렇게 누에의 머리와 같고 양쪽에서 흐르는 물이 고리처럼 합쳐져 참으로 기승처(奇勝處)라 할 것이다. 그 아래에 큰 작살이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그것을 이름하여 일 컫기를 ‘녹두전(菉豆箭)’이라 한다. 정자 의 주인은 고인이 된 양돈(楊墩)이다. 이 정자의 밖으로 돌아서 가게 되면 외손자 장준(張浚)의 집이 있다. 김인후(金麟厚)가 시 한 수를 지었는데
 
梅堂偶世想餘音 亭在山高與水深 雨歇芳林淸潤色 烟消靜夜見明心
三杯酒裡看天地 一局碁中送古今 鞍馬昔年秋崍晩 可憐奔走失登臨
 
매화 집에서 만난 세상 여음을 생각하고
산 높고 물 깊은 곳에 정자 있네
비갠 뒤 꽃, 수풀은 윤색이 맑고
연기 걷힌 고요한 밤에는 밝은 마음을 보네
석 잔 술 가운데 하늘과 땅이 보이고
한 판 바둑에서 혜와 이제를 보내네
왕년에 말안장으로 가을 산골 저물었더니
가련코나 바쁘다고 올라 다다름을 잃었구나.
 
장경세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峨洋何必要知音 晩向臨亭托契深 半夜好風扠雨脚 一天晴月紅心煙
橫小店分朝暮山 山帶輕嵐閱古今 十里松蛮長在欠 不堪扶杖獨登臨
 
높은 산 큰 바다는 벗을 필요치 않나니
늦게 정자에 다다라도 깊이 맺고자 하네
한밤중 좋은 바람은 비다리를 들었고
한 하늘 갠 달은 강 마음의 연기로다.
가로질러 나눈 곳은 저문산의 아침이고
산은 가벼이 남기로 띄를 둘러 예와 이제를 알겠네
십 리 소나무 개오동은 길게 늘어 있고
의지한 지팡이는 견디지 못해 혼자 오르네.
 
 

4.2. 만취정(晩翠亭)

만취정 전경
 
아산방에 있다. 정자의 주인은 참의(參議) 김위(金偉)이다. 중원 내각제칙 태복 사방 장리사무소경겸 사경국정자(中原內閣制勅 太僕寺房 掌理事務小卿兼 司經局正字) 쌍동(雙桐) 서계신(徐繼申)이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에 글씨를 써 편액(扁額)을 하고 아울러 전서(篆書)도 썼다. 주인 김위(金偉)는 시 한 수를 지었는데
 
卜築菟裘棠水湄 宦情從此薄於絲 世間榮辱渾閒事 只信吾天不自欺
 
검쳐 은거지를 세우니 물가엔 산앵도요
벼슬살이 근성이 이에 다르니 명주실보다 가볍구나
세상의 영예와 욕됨은 한가한 일에 섞어버리고
다만 나의 운명을 믿고 스스로 속이지 않으리라.
 
라고 하였으며 또
 
春晩丘園麗景暄 萬村桃李落紛紛 蒼然老髯雙松樹 雪後知心獨有君
 
봄 저무는 동산 언덕에는 따스한 빛이 곱고
온 마을엔 복숭아와 오얏이 어지러이 흩날리네
푸르른 노인의 구레나룻 같은 소나무 두 그루 있어
눈 온 뒤 마음을 알지니 홀로 군자 되었네.
 
이라 하였다.
 
정념(丁焰)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溪到懸崖便作潭 平鋪一畝水天吝 非無勝致幽亭飾 故取貞操晩翠酣
是實菟裘君固有 誰煩句漏陸辭忝 我今身歷臺中遍 不比諸公信筆談
 
낭떠러지 시내에 이르러 못을 만들었는데
펑퍼짐한 한 이장엔 하늘이 물을 아꼈네
훌륭한 경치있어 숨은 정자를 장식하고
옛 정조를 지녀 푸르름을 즐기네
이곳이 정작 은거지라 그대 있음이 확실하니
누가 번뇌의 글귀로 어지럽혀 이 언덕의 말을 하는가.
나는 지금 다니다가 누대 가운데 미쳐있어
여러 벼슬아치와 견줄 데 없어 붓에 의지하여 말하노라.
 
이라 하였다.
 
 

4.3. 단구대(丹丘臺)

단구대 암각서
 
삼계(三溪)의 내 입구 위에 있다. 삼계는 둔덕(屯德)의 별호(別號)이다. 세 개의 시내가 합해져 둔덕으로 흐르기 때문에 삼계(三溪)라 부른다. 단구대(丹丘臺)의 아래 땅 이름을 자단(紫丹)이라 하는데 왼쪽과 오른쪽의 돌 색깔이 모두 자색(紫色)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자단구대의 한쪽은 붉은 벽으로 세워져 있 으며, 백여 척(百餘尺)이나 되는데 자연적으로 높은 대(臺)가 이루어져 수십 사람 들이 앉을 수 있다. 단구대 아래에는 단구(丹丘)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삭녕(朔寧) 최유지(崔攸之)의 필적(筆跡) 이다. 이 땅 뒤에는 적성(赤城)이 있고, 앞에는 대 천대(對天臺)가 있으며, 동쪽에는 방장(方丈)이 읍(揖)을 하고 서쪽에는 동산(銅山)이 고(告)하고 있어 참으로 하나의 선경(仙境)이 아닐 수 없다.
 
대(臺)의 위아래에는 총석(叢石)이 벌려 있다. 대의 서쪽은 낭떠러지로 석문(石門)이 특별히 서 있는데 이를 삼계석문(三磎石門)이라고 부르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쌍계석문(雙磎石門)의 글자를 얻어 모방한 것으로, 글자가 새겨진 석면(石面)의 글자가 커서 마치 서까래와 같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 어른들께서는 향산(香山)의 옛일을 모방하여 나이 60세 이상의 노인 9명으로 모임을 만들었는데 즉 장제(張㫼), 한빈(韓賓), 하득도(河得道), 한유(韓瑜), 장서(張曙), 장선(張暶), 하만리(河萬里), 최휘지(崔徽之), 최유지(崔攸之) 등이다. 이들은 생신이나 가절(佳節)이 되 면 술잔과 소반을 제공하고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그 사이에 술을 마시면서 흥겹 게 시를 읊는다. 이때 모든 가정의 자제(子弟)들은 그 옆에서 지팡이와 신발을 신는 일을 도와드리고 그에 따른다. 멀고 가까이에서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 또한 일소(一少)인 참봉 이문규(李文規)가 같이 참여하였다는 되어있다.
 
오주(鰲洲) 崔徽之는 한 수 의 시를 지었는데
 
萬吉三溪洞 天敎石作門 孤雲四大字 留與護仙源
 
태곳적부터 삼계동 있어
하늘이 가르쳐 돌로 문을 지었네
외로운 구름(고운 : 최치원)은 네 큰 글자인가
머물러 신선의 무릉도원 얻었네
 
참봉 이문규(李文規)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如椽四字翠巖間 風雨空山不受苔 千載孤雲留手迹 幾時華表鶴歸來
 
둥근 써가래 같은 네 글자 푸른 바위 사이로
비바람 부는 민산 이끼도 끼지 않았네
천 년의 외로운 구름이 머물러 손수 썼는가.
어느 때 묘문에 학이 돌아올까.
 
 

4.4. 포취정(抱翠亭)

지사방 주암(舟巖)의 동쪽에 있다. 정자의 주인은 최위지(崔緯地)이다.
 
정염(丁焰)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梅見淨友春傳夏 黃菊蒼筠秋與冬 生意循環崔可見 倚闌冥會興無窮
 
맑은 벗과 매화를 보니 여름은 봄을 전하고
노란 국화 푸른 대나무는 가을과 겨울이네
순환하는 삶의 뜻을 최선비에서 보노니
난간에 의지하여 깨달으니 끝없이 일어나네.
 
 

4.5. 용두정(龍頭亭)

지사방 옥산(玉山) 동쪽에 있다. 이대유(李大㽕)가 시 한 수를 지었는데
 
岸花汀草媚東風 盡屬高丘一望中 隨意盃盤眞氣味 不愁天際夕陽紅
 
언덕의 꽃 물가의 풀은 동풍에 아첨하고
높은 언덕에 다 맡기고 한없이 바라보노라
술잔과 쟁반이 둥근 뜻은 참맛의 기분인데
근심없는 하늘가엔 노을이 붉네
 
정염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病翁猶不避和風 偶坐良朋酒一中 興罷歸來分月色 哀顏回得少年紅
 
쇠약한 늙은이 오로지 화창한 바람 안고
좋은 벗과 술잔 놓고 마주 앉았네
흥이 파하고 돌아올 땐 달빛도 따라오고
슬픈 얼굴로 돌아와선 소년의 홍안 얻었네.
 
 

4.6. 지우정(止偶亭)

진전방(眞田坊)에 있는데 이대유(李大㽕)가 살고있는 곳의 동쪽 모퉁이에 있다. 정염이 쓴 기(記)가 이 정자에 있다.
 
 

4.7. 회붕정(會朋亭)

진전방에 있는데 이대유와 박비암(朴秘巖)이 친구들과 함께 모여 강론한 것을 익히던 곳이다.
 
 

4.8. 불고정(不孤亭)

진전방에 있는데 곧 처사(處士) 장복겸(張復謙)이 쌓은 곳으로 산의 이름이 고 산(孤山)으로 정자의 이름을 불고(不孤)라 하였다고 하는데 동파도인(東坡道人) 이 유도산불고(有道山不孤)라 한 말의 뜻에서 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가 파괴되어 다시 시내(溪)를 쌓아 옛터에 집을 짓고 옥경헌(玉鏡軒)이라 편액하였다. 거기에 서(序)가있다. 주인 장복겸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棠花飄落點淸潭 波底游魚競出吝 咀嚼休嫌淡無味 曲針猶勝餌香甘
 
산앵도화 바람에 저 맑은 못을 물들이고
물결 아래 노는 고기 나가기를 꺼리네
꺼리김 없이 씹어보나 맛없이 담박하니
굽은 바늘이라도 단 음식보다 낫겠네
 
이라 하였다.
 
한림(翰林) 최치옹(崔致翁)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引水堂前作小潭 一般淸意這中吝 非魚誰識魚之樂 此老元嫌世餌甘
 
집 앞에 물을 끌어 작은 못 만들고
온통 맑은 뜻이 가운데 아껴두리
물고기 아닌 바엔 그 즐거움을 누가 알리요
이 늙은이는 원래 세속의 단 음식 싫어한다네.
 
이라 하였다.
 
 

4.9. 탁영정(濯纓亭)

아산방 내촌 시냇가 위에 있다. 정자의 주인은 전대효(全大孝)인데 지금은 훼철되고 없다.
 
 

4.10. 노노정(努努亭)

체리암 위 산 머리에 있다.
 
 

5. 서원(書院)

 

5.1. 영천서원(寧川書院)

영천서원 전경
 
남원부의 북쪽 지사방(只沙坊)에 있다. 만력(萬曆) 기미년(己未年)에 창건하였으며, 4현(賢)을 봉안(奉安)하였다.
 
4현은 사제당(思齊堂) 안 선생(安先生) 휘(諱) 처순(處順), 정 선생(丁先生) 諱 환(煥), 유헌(游軒) 정 선생 (丁先生) 휘 황(熿), 활계(活溪) 이 선 생(李先生) 대유(大㽕)이다. 숙종 12 년(병인)에 사액(賜額)되었다. 사우(祠宇) 3칸, 신문(神門) 1칸, 동서 협문(夾門) 각 1칸, 전사고(典祀庫) 2칸, 동재(東齋) 3칸, 서재(西齋) 3칸, 강당 5칸 인데 동쪽과 서쪽에 방이 있다. 유사방(有司房) 4칸, 고사(庫舍) 5칸, 마구(馬廐) 2칸, 대문 1칸, 동서 협문 각각 1칸이다.
 
祭器로는 유보구개(鍮簠具盖) 4개, 유작(鍮爵) 12개, 작대(爵臺) 12개, 향로(香爐) 4개, 향합(香榼) 4개, 생갑(牲匣) 4개, 변(邊) 16개, 두(豆) 16개, 폐비(幣篚) 4개가 있다.
 
제복(祭服)으로는 삼령(三領)이 있다.
 
서책(書冊)에는 가어(家語) 4권, 주자절요(朱子節要) 12권, 예기 12권, 고려사 (高麗史) 72권, 주례(周禮) 7권이 있다.
 
전답으로는 6石, 1두락지, 6결, 83부, 5속이 있다.
 
원임(院任)으로는 원장(院長) 1인, 장의 1인, 유사 2인, 고직 1명, 장무 1명이 있다. 노비는 노가 17명, 비가 17명이 있다.
 
 
사액제문(賜額祭文)은
 
歲次 丙寅 五月甲申朔二十三日丙午
國王 遣臣 禮曹佐郞都處享 論祭于全羅道南原府
故判官 安處順
都事 丁煥
舍人 丁熿
佐郞 李大㽕 之靈
 
士貴篤行 學本踐實 世競騖華 鮮有其質 緬維通判 行遵古訓
根性孝友 是爲基本 志養之敬 致哀之禮 感通神明 二連同軌
策名楊庭 金馬石渠 麗澤文正 君子得輿 士林禍煽 同被噎媚
超然高擧 不挫不汚 悼道愍世 絶意榮路 德茂位細 用不克究
有猗丁氏 行峻而淸 孝謹馴性 剛方直聲 治臣制事 斬斬有截
登朝不顯 遭制毁歿 華質長潛 餘微未沫 亦越中舍 寔其賢季
學醇行修 實資乃兄 屢揚臺閣 蔚有盛名 遇事謇謇 益彈忱誠
早習春秋 深究微旨 立朝風儀 根據大義 遘時危疑 群奸搆禍
忠良騈首 桁揚罟獲 遂竄絶海 危機日迫 怡然若命 玩心經籍
厲玉蓁蓁 卒岉于謫 不待百年 冤洗官復 曰惟員外 卓行可儀
系出名儒 學源賢師 篤孝出天 悉循禮則 克有其本 充積孚達
蘊道婆娑 樂彼衡泌 幽貞화潔 炯炯雲月 闇然而章 屢膺旌弓
名高德純 蕩然流風 中宣盛際 儒學彬彬 躬行善士 有玆數臣
昭焯在人 永爲表式 瞻彼湖邑 有司翼翼 揭虔幷享 儷義齊光
抱于累懻 祀典未遑 衿紳聳慕 㣆久㣆新 封章請額 千里呌閽
玆遣儀卽 寵頒華扁 不味者存 庶歆禮奠 이라 한다.
 
春秋祝文
 
사제당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學道受人 遭時不淑 旣明且哲 孝思維則 純德懿行 播在鄕里 是崇是長 香火千祀
 
회산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經綸其志 瑚璉其器 誰之不如 伊閼膴仕 正直方剛 無斁於人 於千百年 享有精禋
 
유현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大往小來 君子道逍 氷炭難客 受玦于潮 才惟經濟 奈時之屯 夷考其道 功在斯文
 
활계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素履而往 朱緩方來 樂只君子 其德不回 維持斯道 儀式後學 千秋血廟 俎豆是格
 
 

5.2. 고룡서원(古龍書院)

남원부의 서쪽 기지방(機池坊)에 있다. 만력(萬曆) 기묘(己卯)년에 창건하였다. 옥계(玉溪) 노 선생(盧先生) 휘(諱) 진(禛)을 봉안하였다. 함양의 당주서원(溏洲書院)이 이미 사액(賜額)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서원은 곧 사액되지 못하였다. 이 서원은 사우(祠宇) 3칸, 신문(神門) 1칸, 동협문(東挾門) 1칸, 전사청(典祀廳) 3칸 동재(東齋) 3칸, 서재(西齋) 3칸, 강당(講堂) 7칸, 유사방(有司房) 3칸, 고사(庫舍) 3칸, 대문 1칸이다.
 
제기(祭器)로는 유보구개(鍮簠具盖) 1개, 鍮簋具盖1개, 유작(鍮爵) 3개, 변(籩)4개, 두(豆) 4개, 준(罇) 2개, 유작(鍮勺) 1개, 촉대(燭臺) 1쌍, 유향로(鍮香爐) 1개, 향합(香榼) 1개, 생갑(牲匣) 1개, 작대(爵臺) 1개, 폐비(幣篚) 1개, 축연구갑 (祝硯具匣) 1개 부(釜) 2좌, 정(鼎) 5좌가 있다. 제복(祭服)으로는 1령(領)이 있다. 원임(院任)으로는 원장 1인, 장의 1인, 유사 2인, 고지1명, 장무 1명이 있다. 노비로는 노(奴)가 2구(口), 비(婢)가 1구가 있다.
 
전답으로는 5석과 낙결(落結) 80부가 있다. 서책으로는 노씨 족보 1권, 문집 3권, 예기 17권, 맹자정문 1권이 있다. 춘추(春秋)의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知學之宗 迪仁之實 式觀其生 聿薰其德
 
 

5.3. 현주사우(玄州柌宇)

현주서원 편액
 
보의 복쪽 50리 지사방(只沙坊)에 있다. 숙종 30년 갑신(甲申)에 창건하였다. 고려(高麗) 시중(侍中) 이 선생 (李先生) 휘 능간(凌幹)과 본조 (本朝) 목사(牧使) 만헌(晩軒) 정 선생(丁先生) 휘 염(焰)을 봉안하였다. 제기(祭器)와 당우(堂宇)는 다른 서원(書院)에 의 거하는 바 이제 다 기록할 수는 없다.
 
 

5.4. 구북창(舊北倉)

부의 북쪽 50리 지사방(只沙坊)에 있다. 부사 최덕지(崔德之)가 창건하였다. 도청 2칸, 북고(北庫) 9칸, 남고(南庫) 9칸이다. 감관 1인, 색리 1인, 고직(庫直) 1명, 사령(使令) 2명이 있다.
 
 

5.5. 운교참(雲橋站)

부의 서쪽 15리 시라산(時羅山) 남쪽에 있다. 중주원(中洲院)으로부터 한번 쉬 는 거리이고, 오수역(獒樹驛)으로부터 한번 쉬는 거리이다. 과거에는 별성(別星) 으로 유사시(有事時)에는 이곳 참으로부터 나아간다.
 
 

5.6. 오수와 김개인(獒樹와金蓋仁)

김개인(金盖仁)은 거령현(居寧縣) 사람이다.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매우 어여삐 여겼다. 일찍이 하루는 밖으로 나아갔는데 개 역시 그를 따라 나섰다. 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 주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들판에 불이 일어나 장차 그 불이 그에게 미치게 되었다. 개는 이에 옆에 냇가로 가서 몸에 물을 적셔 왔다 갔다 하면서 고리(環)와 같이 둘러쌓아 우거진 풀에 물을 적셔 습기가 있게 하였다. 그러다가 개는 불길에 쓰러져 기진(氣盡)하여 죽었다. 개인이 잠에서 깨어나 개를 보니 개의 그와 같은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에 대한 슬픔을 쏟아 노래로 지어 부르고 봉분을 지어 장사를 지내고 지팡이를 꽂아 표식을 하였다. 그 후 지팡이가 자라서 나무를 이루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 땅의 이름을 오수(獒樹)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악부(樂府) 가운데 견분곡(犬墳曲)이란 것이 있는 데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6. 교량(橋梁)

 

6.1. 광영정교(光靈亭橋)

부의 서쪽 아산방(阿山坊)에 있다.
 
 

6.2. 서창교(西倉橋)

부의 서쪽 45리 영계방(靈溪坊)에 있다.
 
 

6.3. 율천교(栗川橋)

부의 북쪽 30리 적과방(迪果坊)에 있다.
 
 

6.4. 오수교(獒樹橋)

부의 북쪽 50리 덕고방(德古坊)에 있다.
 
 

6.5. 삼계교(三溪橋)

부의 북쪽 30리 둔덕방에 있다.
 
 
 

7. 시장(市場)

 

7.1. 오수장(獒樹場)

매월 초2일, 12일, 22일과 초7일, 17일, 27일 장이 선다.
 
 

7.2. 아산장(阿山場)

아산방에 있다. 매월 초3일, 13일, 23일과 초8일, 18일 28일 장이 선다.
 
 

8. 사찰(寺刹)

 

8.1. 해월암(海月菴)

해월암 전경(구 건물)
 
오지방(吾枝坊)의 오수역 서쪽에 있다.
 
 

8.2. 원통암(圓通菴)

아산방(阿山坊)의 노산 아래에 있다.
 
 

8.3. 천태암(天台菴)

둔덕방 단구대의 남쪽 풍악(楓嶽)의 북쪽에 있으나 지금은 폐철되고 없다.
 
 

9. 고적(古跡)

 

9.1. 거령폐현(居寧廢縣)

거(居)는 한편 거(巨)로부터 지어진 것이다. 본래는 백제 거사물현(居斯勿縣)이며, 신라 때에 청웅현(靑雄縣)으로 고쳐 임실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고쳐 지금의 이름으로 오다가 남원에 속하게 되었다. 별호(別號)는 영성(寧城)이며 남원부의 동북쪽 50리에 있다.
 
 

9.2. 거리향(居利鄕)

거령현 동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성여이(城餘伊)’라 부른다.
 
 

9.3. 체리암(滯離岩)

삼계(三溪)의 위 오수(獒樹)의 아래에 있다. 사람들이 사대부(士大夫)가 되어 서울로 가는 자는 이곳에서 전별(餞別)을 하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 다. 그 아래에는 다리(橋)가 있는데 이름하여 소혼(消魂)이라고 한다.
 
감사(監司) 최옹(崔顒)의 시에 의하면
 
陽坡新草細草抽 駄病關河客路脩 山外碧峯春雨晴 更從河處望松湫
 
볕 언덕 새 풀은 묵은 잡풀 뽑아내고
병을 탄관하는 손님의 길을 닦았구나.
산 밖 푸른 봉우리엔 봄비가 개었는데
다시 어느 곳으로 가야 선산 바라볼 수가 있을까.
 
 

9.4. 주암(舟巖)

지사방(只沙坊) 주암촌(舟巖村) 앞에 있다. 큰 돌이 밭 가운데에 누워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배(舟)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부사(府使) 최덕지가 이곳 의 좋은 터를 잡아 살았던 관계로 그의 자손들이 여기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지금은 방계리라고 부른다.
 
 

9.5. 시락전(矢落田)

지사 방에 있다. 최영 장군이 일찍이 치마대 위에서 활로 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잃어버렸는데 농부(農夫)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왔다. 화살 이 떨어진 곳은 쏘는 곳으로부터 10리 거리에 있었다. 뒷사람들이 그 밭의 이름을 시락(矢落)이라 불렀던 것이다.
 
 

10. 선정비(善政碑)

○ 순찰사민성징간숙선정비(巡察使閔聖徵簡肅善政碑)
○ 순찰사원두표선정비(巡察使元斗杓善政碑)
○ 순찰사장만선정비(巡察使張晩善政碑)
 
이상 세 개의 비석은 모두 獒樹驛 안에 있다. 지금은 오수 원동산에 보존되고 있다.
 
 

11. 산성(山城)

 

11.1. 적성(赤城)

적성산성 전경
 
둔덕방 단구대 뒤에 있다. 옛날의 첩 (堞) 터가 있는데 어느 때 축조되었는지 는 알 수 없다. 그 아래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속칭 ‘강 석량(羗石梁)’이라 한다.
 
 

12. 총묘(塚墓)

 

12.1. 안처순(安處順) 묘(墓)

흑성방(黑城坊) 풍수암(風樹巖)에 있다.
 
 

12.2. 심승경(沈承慶) 묘

대곡방(大谷坊) 양시즉동(梁侍卽洞) 입구에 있다. 고려(高麗) 때의 벼슬이 의정부사(議政府事)에 이르 렀으며, 풍산심씨(豊山沈氏)의 시조(始祖)이다.
 
 

12.3. 김기(金璣) 묘

김기 신도비
 
말천(末川) 대촌(大村) 앞에 있다. 신도비가 있는데 성세창(成世昌)이 기(記)를 하고 김노(金魯)가 서(書)를 하였다.
 
 

12.4. 김준걸(金俊傑) 묘

아산방 사항치(砂項峙)에 있다.
 
 

12.5. 최준원(崔濬源) 묘

최준원 묘비
 
돌고개방(乭古介坊) 탑전(榻田)에 있다.
 
 

12.6. 최상중(崔尙重) 묘

노적봉 아래 구선동(九仙洞)에 있다.
 
 

12.7. 최기옹(崔綺翁) 묘

돌고개방(乭古介坊) 탑전(榻田)에 있다.
 
 

12.8. 청양현부인김씨(靑陽縣婦人金氏) 묘

오지(吾枝) 광동(廣洞)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한종손(韓終孫)의 부인이다.
 
 

12.9. 한복(韓輻) 묘

한복 묘비
 
오지 광동 북록(北麓)에 있다.
 
 

12.10. 한유량(韓有良) 묘

교룡산(蛟龍山) 아래 대정촌(大井村) 뒤에 있다. 곧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외할아버지이다.
 
 

12.11. 이 혼(李 渾) 묘

둔덕리 출신으로 풍악(楓岳) 서록(西麓) 죽방사(竹房寺) 뒤에 있다.
 
 

12.12. 이경윤(李慶胤) 묘

둔덕 용정동(龍井洞)에 있다.
 
 

12.13. 김복흥(金復興) 묘

둔덕리 출신으로 말천(末川) 분토동(粉土洞)에 있다.
 
 

13. 제언(堤堰)

 

13.1. 대야지방축(大也旨防築)

둔덕방(屯德坊)에 있다. 둘레가 1,332척 3촌이고, 길이가 340척 1촌이며, 너비가 6척 3초이다. 안쪽 높이는 12척 7촌이고, 바깥쪽 높이는 17척이다.
 
 

14. 역원(驛院)

 

14.1. 오수역(獒樹驛)

부(府)의 북쪽 40리에 있다. 찰방(察訪)이 있으며, 본도(本道)의 11개역이 이에 속한다. 11개역은 창활(昌活), 동도(東道), 응령(應嶺), 인월(引月), 잔수(潺水), 지신(知申), 양율(良栗), 낙수(洛水), 덕양(德陽), 익신(益申), 섬거(蟾居)이다. 察訪은 1인이 있다.
 
오수역에는 객관방(客館房) 2칸, 말루(抹樓) 3칸, 원사(院舍) 7칸(누와 방이 있 다.) 찰방관사(察訪館舍) 33칸이 있다. 본(本) 부(府)의 네 개에 짝하는 화역(火驛)이다. 원래는 3등으로 말[馬] 27필이 있었다.
 
동도역(東道驛)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응령역(應領驛)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창활역(昌活驛) : 창활 수풀이 있는 곳에 있다.
안신역(安信驛)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이규보의 시를 보면
 
烏原侵午出 獒樹片時留 閒鹿眠深草 幽禽沿淺溝
山供滿目畵 風送一襟秋 再入帶方國 天敎飽勝遊
 
오원으로 들어갔다가 정오에 떠나
오수역에 잠시 머무르다.
한가로운 사슴은 풀 속에 잠들었고
깊은 산에 사는 새는 얕은 물가에서 미역을 감는다.
산은 눈에 가득 화폭을 펼쳐 놓은 듯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가을을 알린다.
나는 다시 남원으로 가리니
하늘이 교시한 그 풍치에 마음껏 취하리.
 
참판(參判) 노숙동(盧叔仝)의 시를 보면
 
月出天邊水暎樓 庚公淸興更悠悠 驛前忽見埋獒樹 却起征人戀主愁
 
달이 뜨니 하늘가 물 비치는 누각인데
경공과 맑은 흥은 더욱 유유하구나.
역 앞에서 문득 나무 아래 개를 묻었다는 것을 보니
도리어 여행하는 사람으로 주인을 사모했던 수심을 일으킨다.
 
라 하였다.
 
 

14.2. 오수찰방관안(獒樹察訪官案)

정습(丁 習) : 정통(正統) 기미년(1439) 7월에 부임하였다.
박거인(朴居仁)
김효행(金孝行) : 기미년(1439) 12월에 부임하였다.
최 림(崔 霖) : 신유년(1441) 7월에 부임하였다.
박 명(朴 明) : 계해년(1443)에 부임하였다.
한은귀(韓銀貴) : 을축년(1445)에 부임하였다.
박유산(朴有産) : 정묘년(1447)에 부임하였다.
홍자명(洪自明) : 무진년(1448)에 부임하였다.
서 민(徐 敏) : 경태(景泰) 신미년(1451)에 부임하였다.
방유정(方有定) : 임신년(1452)에 부임하였다.
정 습(丁 習) : 계유년(1453)에 부임하였다.
송은정(宋殷鼎) : 병자년(1456)에 부임하였다.
김자겸(金自兼) : 정축년((1457)에 부임하였다.
 
 

14.3. 찰방(察訪)

설성림(설성림) : 천순(天順) 정축년(1457)에 부임하였다.
김비아(金畀我( : 기묘년(1459)에 부임하였다.
김중서(金仲舒) : 신사년(1461)에 부임하였다.
김극유(金克忸) : 계미년(1463)에 부임하였다.
최효천(崔孝川) : 成化 을유년(1465)에 부임하였다.
이징전(李澄全) : 정해년(1467 )에 부임하였다.
권 이(權 邇) : 무자년(1468)에 부임하였다.
박성지(朴成之) : 기축년(1469)에 부임하였다.
옥 순(玉 淳) : 신묘년(1471)에 부임하였다.
김석동(金石童) : 임진년(1472)에 부임하였다.
안속생(安續生) : 병신년(1476)에 부임하였다.
민 오(閔 晤) : 신축년(1481)에 부임하였다.
정 절(鄭 節) : 갑진년(1484)에 부임하였다. 정미년 8월 관청에서 죽었다.
곽득형(郭得亨) : 정미년(1487)에 부임하였다.
문숙손(文叔孫) : 계축년(1493)에 부임하였다.
최한문(崔漢文) : 무오년(1498)에 부임하였다. 경신년 7월 관청에서 죽었다.
배숙후(裵叔厚) : 경신년(1500)에 부임하였다. 임술녕 5월 관청에서 죽었다.
우 현(禹 賢) : 임술년(1502)에 부임하였다. 갑자년 11월 관청에서 죽었다.
양 보(梁 普) : 갑자년(1504)에 부임하였다.
최한석(崔漢石) : 正德 기사년(1509)에 부임하였다.
조철석(趙鐵石) : 계유년(1513)에 부임하였다.
홍안세(洪安世) : 병자년(1516)에 부임하였다.
조숙규(趙淑珪) : 경진년(1520)에 부임하였다.
이인건(李仁健) : 임오년(1522)에 부임하였다. 을유년(1525) 4월 관청에서 죽었다.
이 아(李 莪) : 을유년(1525)에 부임하였다.
남세정(南世禎) : 기축년(1529)에 부임하였다.
박 건(朴 謇) : 을미년(1535)에 부임하였다.
윤광한(尹光漢) : 정유년(1537)에 부임하였다.
여공단(呂公端) : 기해년(1539)에 부임하였다. 신축년 정월 관청에서 죽었다.
이 질(李 礩) : 신축년(1541)에 부임하였다.
이원경(李元慶) : 병오년(1546)에 부임하였다.
김 원(金 元) : 기유년(1549)에 부임하였다.
강 율(姜 凓) : 임자년(1552)에 부임하였다.
이경운(李慶雲) : 정사년(1557)에 부임하였다.
원계관(元繼寬) : 임술년(1562)에 부임하였다.
고덕부(高德苻) : 隆慶 정묘년(1567)에 부임하였다.
성 두(成 斗) : 경오년(1570)에 부임하였다.
김광열(金光烈) : 경오년(1570)에 부임하였다.
정 지(丁 至) : 임신년(1572)에 부임하였다.
유 한(柳 垾) : 萬曆 경진년(1580)에 부임하였다.
정사억(鄭思億) : 임오년(1582)에 부임하였다.
김종무(金宗武) : 계미년(1583)에 부임하였다.
남경성(南景星) : 기축년(1589)에 부임하였다.
이방보(李邦輔) : 신묘년(1591)에 부임하였다.
나덕원(羅德元) : 갑오년(1594)에 부임하였다.
강복성(康復誠) : 갑오년(1594)에 부임하였다.
권수기(權守己) : 을미년(1595)에 부임하였다.
이극부(李克扶) : 무술년(1598)에 부임하였다.
기 란(奇 蘭) : 경자년(1600)에 부임하였다.
노수눌(盧守訥) : 을사년(1605)에 부임하였다.
정 양(鄭 暘) : 무신년(1608)에 부임하였다.
남 수(南 遂) : 기유년(1609)에 부임하였다.
허홍재(許洪材) : 갑인년(1614)에 부임하였다.
남 변(南 抃) : 을묘년(1615)에 부임하였다.
이 첨(李 籤) : 기미년1619()에 부임하였다.
송희건(宋希建) : 계해년(1623)에 부임하였다.
조시중(趙時中) : 계해년(1623)에 부임하였다.
유 즙(柳 楫) : 갑자년(1624)에 부임하였다.
안방준(安邦俊) : 을축년(1625)에 부임하였다.
권 주(權 霔) : 병인년(1626)에 부임하였다.
장종한(張從漢) : 정묘년(1627)에 부임하였다.
노극복(盧克復) : 정묘년(1627)에 부임하였다.
이 번(李 蕃) : 정묘년(1627)에 부임하였다.
강재산(姜在山) : 崇禎 무진년(1628)에 부임하였다.
조송년(趙松年) : 을사년(1629)에 부임하였다. 오수 원동산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있다.
김광택(金光澤) : 신미년(1631)에 부임하였다.
안중행(安重行) : 신사년(1641)에 부임하였다.
김진원(金震遠) : 계미년(1643)에 부임하였다.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기 있다. 3년 동안 정치를 함에 천추의 덕을 남겼다.(爲政三載遺德千秋)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양복(李陽復) : 병술년(1646)에 부임하였다.
최유지(崔攸之) : 경인년(1650)에 부임하였다. 오수 원동산에 인자청덕선정비(仁慈淸德善政碑)가 철비로 있었다.
김지성(金之聲) : 신묘년(1651) 6월에 부임하였다.
곽 급(郭 岌) : 신묘년(1651)에 부임하였다.
박창문(朴昌文) : 갑오년(1654)에 부임하였다.
이 제(李 濟) : 병신년(1656)에 부임하였다.
이운림(李雲林) : 기해년(1659)에 부임하였다.
오명설(吳命說) : 경자년(1660)에 부임하였다.
손 단(孫 湍) : 임인년(1662)에 부임하였다.
유송제(柳松濟) : 계묘년(1663)에 부임하였다.
장우일(張遇一) : 갑진년(1664)에 부임하였다.
이순선(李循先) : 병오년(1666)에 부임하였다.
안영석(安永錫) : 무신년(1668)에 부임하였다. 경술년(1670) 윤 2월 관청에서 죽었다.
배정휘(裵正徽) : 갑인년(1674)에 부임하였다.
이태룡(李台龍) : 을묘년(1675)에 부임하였다.
김덕제(金德濟) : 무오년(1678)에 부임하였다.
김덕항(金德恒) : 신유년(1681)에 부임하였다.
유수윤(柳壽崙) : 임술년(1682)에 부임하였다.
박익무(朴益茂) : 갑자년(1684)에 부임하였다.
유상진(柳尙軫) : 정묘년(1687)에 부임하였다.
나만성(羅晩成) : 기사년(1689)에 부임하였다.
김 전(金 戩) : 기사년(1689)에 부임하였다.
송우룡(宋遇龍) : 경오년(1690)에 부임하였다.
송태기(宋泰基) : 신미년(1691)에 부임하였다.
손만중(孫萬重) : 갑술년(1694)에 부임하였다.
이정상(李鼎相) : 병자년(1696)에 부임하였다.
박 경(朴 璟) : 기묘년(1699)에 부임하였다.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에 유혜선정비가 있다.
송정렴(宋挺溓) : 경신년(1700)에 부임하였다.
 
 

15. 인물(人物)

 

15.1. 고려시대

이능간(李凌幹)
이능간 신도비
 
고려시대 인물 이능간(李凌幹)은 거령현(居寧縣)사람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자신의 총 희(寵姬)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는 별실(別室)에 두고 감히 가까이 하지 않으므로 임금은 그의 뜻 을 기특하게 여겼다. 또 임금을 따라 원나라에 있 을 때 임금이 토번(吐蕃)으로 귀양을 가자 이능간 은 역졸을 시켜 그곳 임금에게 금을 바쳐 임금과 임금의 호종신(扈從臣)의 옹색함을 면케 하였다. 임금께서 죽게 되자 관을 받들어 우리나라로 통곡을 하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러 지방을 돌아 귀국하였는데 애를 써가며 부지런히 일을 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원나라는 일찍이 고려에 성(省)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능간은 원의 황제에 게 주청하여 중지케 하였다.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15.2. 조선시대

최수웅(崔秀雄)
삭녕인으로 영의정 호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의 손자이고 참의(參議) 영인 (永潾)의 아들이다. 좌통례(左通禮)가 증직되었다. 낙남(落南)하여 둔덕(屯德)에 서 살았다.
 
최덕지(崔德之)
이효공(李孝恭)과 함께 부사(府使)를 하였다. 최덕지의 호(號)는 연촌(烟村) 또 는 존양당(存養堂)이며, 완산(完山)인이다.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고, 일찍이 이 부의 부사로 있으면서 옛 북창(北倉)을 창건하였으며, 舟巖에 터를 잡아 자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文宗 2년 용퇴(勇退)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영상(領相) 최항(崔恒)이 전별(餞別)하는 시를 썼는데
 
始終忠直荷思綸 籍甚名高動搢紳 夬夬危機知足客 紛紛要路折腰人
無何鄕裡忘塵慮 存養堂中葆性眞 太史明朝應有奏 壽星還與小微隣
 
라 지었다. 성삼문(成三問) 등 6臣과 함께 역시 그를 보내는 시가 있다. 서원이 영암과 전주에 배향되어 있다.
 
심구령(沈龜齡)
호는 병담(屛潭)이다. 금안택촌(金岸宅村)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본조(本朝 : 조선)에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의 직첩을 받았으며, 풍산군(豊山君)에 봉(封) 해졌다. 시호(諡號)는 정양(靖襄)으로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김대장(金大壯)
부제학(副提學)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자손이 그로 말미암아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최여달(崔汝達)
최여달 신도비
 
만육(晩六) 양(瀁)의 손자이다. 벼슬이 현감에 이 르렀다. 참판이 증직되었다. 자손들이 그로 말미암 아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김 기(金 璣)
제숙공(齊肅公) 균(稛)의 현손이다. 벼슬이 현감 에 이르렀다. 우참찬(右參贊)에 증직되었다.
 
심언통(沈彦通)
호는 농와(聾窩)이다. 정양공(靖襄公) 구령(龜齡)의 5대손이다. 학행(學行)이 세상에 드러나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이 제수되었다. 기묘사화로 징계되었다가 남원에 은둔(隱遁)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안처순(安處順)
자(字)는 순지(順之)이고, 호는 사제당(思齊堂)이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이자 전적(典籍) 기(璣)의 아들이다. 사마 문과(司馬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 이 홍문관(弘文館博士)에 이르렀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서 영천서원(寧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영천서원에 그의 행적이 있다.
 
정 환(丁 煥)
자(字)는 용회(用晦)이고, 호는 회산(檜山)이다. 감역(監役) 세명(世明)의 아들 로 사마 문과(司馬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이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덕행(德行) 으로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천서원에 그의 행적이 있다.
 
정 황(丁 熿)
자(字)는 계회(季晦)이고, 호는 유헌(游軒)이다. 감역(監役) 세명(世明)의 아들로 탁 문과(擢 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덕행(德行)으로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천서원에 그의 행적이 있다.
 
노 진(盧 禛)
자는 자응(子膺)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다. 신고당(信古堂) 우명(友明)의 아들 이다. 사마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덕 행으로 고룡서원(古龍書院)과 함양의 당주서원(溏洲書院)에 각각 배향되었다. 고룡서원과 당주서원에 그 행적이 있다.
 
정 염(丁 焰)
자(字)는 군회(君晦)이고, 호는 만헌(晩軒)이다. 참의를 증직받은 종석(終碩)의 아들이다. 사마 문과(司馬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그의 뛰어난 문장과 행의(行誼)가 한 나라에 널리 알려졌으며, 시와 문장이 현저한 바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이대유(李大㽕)
자(字)는 경인(景引)이고, 호는 활계(活溪)이다. 진사 종윤(悰胤)의 아들로 익재(益齎)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덕행으로써 천거되어 좌랑(佐郞)이 제수되었다.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최상중(崔尙重)
자(字)는 여후(汝厚)이고 호는 미능재(未能齋)이다. 영의정 시호 문정공(文靖公) 항(恒)의 6대손이자 승지를 증직받은 영(潁)의 아들이다. 사마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며, 덕행으로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노봉서원 에 그 행적이 있다.
 
최 연(崔 葕)
자(字)는 유장(孺長)이고 호는 성만(星灣)이다. 미능재(未能齋) 상중(尙重)의 아들이다. 일찍이 연꽃가 계수나무를 꺾었으며 삼사(三司)에 등용되어 그의 재능 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부정을 바로잡 기도 하였다. 때에 나아가고 물러나고 멀리하고 가까이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그의 덕망에 따랐다.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렀다.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최 온(崔 薀)
자(字)는 휘숙(輝叔)이고, 호는 폄재(砭齋)이다. 미능재 상중의 아들이다. 덕행 으로서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노봉서원에 그의 행적이 있다.
 
이상형(李尙馨)
선조 18년(1585)에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지금의 오수면 둔덕리(당시 남원부 둔덕방)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덕선(德先)이고,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다. 춘성 정(春城正) 담손(聃孫)의 현손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사마 문과에 급제한 뒤 인조 3년(1625)에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하여 가주서(假注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 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화의(和議)를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 였다. 그는 그 뒤 집의(執義)를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다. 경사(經史)에 능통하였 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인조 23년(1645)에 죽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요계서원(蓼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천묵재유고(天黙齋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옥당(玉堂 : 홍문관의 별칭이다.)에 있으면서 동료(同僚)가 대방의 형승 (形勝)에 대하여 물으면 아래 글로써 대답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이어 마디마디 감상(感想)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芳草萋萋六十里 녹음방초가 60리에 걸쳐 우거지고
眼對頭流千萬峯 눈은 두류산 천만의 봉우리를 대한다.
 
라고 하였다.
 
김복흥(金復興)
자(字)는 경언(景言)이고, 호는 계곡(溪谷)이다. 좌의정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승주(承주)의 6대손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조성(早成)하였으며, 효성이 출천하였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모두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으며, 육행(六行)을 다하였다. 시마(媤麻) 복은 함께 부엌에 서 보냈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글을 보고 신동(神童)이라 칭찬하 였으며, 당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은 그를 한번 보고 지기(知己)로서 허락하였다. 만헌(晩軒) 정염(丁焰)은 얼컫기를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기질이 아름다우며, 우둔하거나 졸열함을 스스로 채찍질하였다고 하였다.’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㽕) 는 또 일컫기를 ‘그는 성품이 후덕스럽고, 기의 품수가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는 마음이 고상하고 알고자 하는 것을 취미로 여겨 바르지 않음이 없었다.
 
최휘지(崔徽之)
자(字)는 자금(子琴)이고 호는 오주(鰲洲)이다. 좌윤(左尹) 연(葕)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익위(翊衛)에 이르렀다. 덕행으로서 노봉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최유지(崔攸之)
자(字)는 자유(子有)이고 호는 간호(艮湖)이다. 폄재(砭齋) 온(薀)의 아들이다.
그는 당시 세상에서 유행(儒行)이 가장 독실하였으며 더욱이 역리(易理)에 밝았다. 그는 일찍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효종(孝宗) 때 그의 이와 같은 소문이 퍼져 대궐 안에 머물면서 혼천의를 만들라는 명(命)을 받기도 하였다. 일 찍이 사마문과(司馬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그는 벼슬 길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알았으며 물러가는 것을 쉽게 생각하였다. 때에 사람 들은 그를 흠모하고 찬탄하였다. 한때 종유(宗儒)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 고 중시(重視)하였다.
 
유동연(柳東淵)
자(字)는 정숙(靜淑)이고, 호는 남간(南磵)이다. 처사(處士) 호(灝)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강명(剛明)하고, 지조(志操)가 바르고 곧았다. 경전(經典)을 연구 궁리하되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자 하였으며, 참다운 앎을 실천코자 하였다. 정 치(精緻)하고, 깊이 있게 사고하는 데 조예가 있었다. 안으로는 가정에 효우(孝友) 가 현저하였고, 밖으로는 인의(仁義)로 친구에 믿음이 있었다. 향당과 시골 사람 들은 그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함에 따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그의 엄준(嚴峻) 함에는 감히 의(義)가 아닌 것을 덧붙일 수가 없어 사람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 그는 책을 읽고, 도(道)를 한가로운 가운데에서 구하고 아홉 가지 화초(花草)를 심어 놓고 매일 스스로 즐겼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일컬어 구우당(九友堂)이라 하였다. 경인년(庚寅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그의 행의(行誼)로써 사 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문재(李文載)
자(字)는 자원(子遠)이고 호는 석동(石洞)이다. 그는 교리(校理) 상형(尙馨)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도와 우애를 뛰어나게 하였으며, 어버이가 병환으로 자리에 눞게 되자 일찌감치 변을 맛보아 구환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문하(門下)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김 선생은 그에게 더욱 깊이 공부할 것을 권장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유행(儒行)으로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받고 잠깐 취하였다가 곧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배우기 위해 참다운 앎을 실천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것을 주로 하였다. 뒤늦게 역학(易學)을 연구하였 는데 뜻을 지극히 하여 연마(硏磨) 정진(精進)하였다.
 
이이순(李以恂)
자(字)는 희지(凞之)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다. 활계(活溪) 대유(大㽕)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였으며, 가업(家業)을 이어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문장을 잘 썼으며, 과거 시험을 보지 않은 채 지우정(止隅亭) 아래에 집을 짓고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자오(自娛)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칭하여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하였다.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에게 나아가 예를 (禮)를 묻기도 하였는데, 사계 선생은 그를 ‘남주고사(南州高士)’라 불렀다.
 
허 증(許 燈(등))
자(字)는 화중(和仲)이다. 집의(執義)가 증직된 사익(思益)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고매하고, 지기(志氣)가 정숙(整肅)하였으며,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 여 당대 사람들의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칭하여 열두 가지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일찍이 과거 시험을 포기한 채 수풀이 어우러진 아래에서 공적과 명예를 끊고 자적(自適)하면서 스스로 호하기를 ‘서호처사(西湖處士)’라 하였다. 그의 문사(文辭)와 필법(筆法)이 당대에 널리 알려졌다. 송(松)·죽(竹)·매(梅)· 월(月) 네 가지에 관한 시가 있어 전해오고 있다.
 
김성진(金聲振)
자(字)는 이원(而遠)이다. 좌참찬(左參贊)이 증직된 기(璣)의 후손이다. 용모와 마음이 모두 옛 사람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장자(長者)의 풍채가 있었다. 성품 이 맑고 트여 자유분방하였다. 생산(生産)하는 일이 아니고서는 문사(文詞)를 초월 하였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우관(郵官)이 제수되었으나 벗어버렸다. 더욱 이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고 취하는 데에는 뜻이 없었으며, 시(詩)와 술로 시내(溪) 와 산을 오가며 분수에 맞게 자연을 즐겼다. 나이 팔십이 되어 명(命)을 마쳤다.
 
유 호(柳 灝)
자(字)는 중원(仲遠)이고, 호는 뇌계(磊溪)이다. 수찬(修撰) 옥(沃)의 증손이다.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입신출세(立身出世)를 구하지 않았다. 한때 유 명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다.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이 그 의 묘(墓)에 제(題)하여 이르기를 ‘부모와 형제를 잘 섬기고 몸소 집안의 법도를 윤택하게 꾸미고, 배고픔도 잊은 채 거궁수약(居窮守約)하는 것을 즐겼으며, 이름 을 숨긴 채 자취를 없애려 문짝에 진흙을 발랐지만 손자와 같은 아들을 구슬처럼 여겼다.’고 하였다.
 
이국형(李國馨)
자(字)는 덕장(德章)이고, 호는 내성재(內省齎)이다. 동지(同知) 화(嘩)의 아들 이다. 기질이 엄숙하고 굳세고 정직하였으며, 그렇게 재주와 지혜가 돌출하여 장 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들어가면 가정을 엄숙하게 하였고, 나가게 되면 향당 에서 존경을 받았다. 문장 역시 울연(蔚然)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과거에 들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조정이 어지럽고 윤리가 썩은 날에 당하여서는 극언(極言)으 로 상소코자 초고를 이미 완성하였으나 어머님께서 만류한 바 있어 그 결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부터는 과거 공부를 폐지할 것을 결심 하고 문밖 출입을 스스로 막은 채 오직 후학들에게 만 문을 열어 공부를 가르쳤다. 시골에서 삶을 마치 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이문규(李文規)
자(字)는 성칙(聖則)이고, 호는 풍거(楓渠)이다. 처사(處士) 국형(國馨)의 아들이자 제간당(在澗堂) 김화(金澕)의 외손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진하고 외모(外貌)가 위연(偉然)하였다. 배운 것이 넓고 듣은 것이 많았다. 그는 규율에 맞는 행동을 하였으 며,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생산성이 있는 일은 하지 이문규 묘비 않았으며, 시와 술로 스스로를 즐겼다. 일찍이 사마 시에 합격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이 되었다.
 
김원구(金元矩)
자(字)는 자방(子方)이다. 참찬(參贊) 기(璣)의 후손이다. 처사(處士) 영진(英振)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지조(志操)가 굳어 변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금운(襟韻)이 있었고, 그의 시(詩) 짓는 솜씨는 한때 널리 알려졌 으며, 실수로 과장(科場)에 나아갔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찍이 풍애(楓崖)의 위에 띠집 한 칸을 짓고 시를 읊으며 즐기다 삶을 마쳤다.
 
정 견(丁 涀)
자는 여활(汝活)이다. 만헌(晩軒) 염(焰)의 증손이다. 몸소 실천하면서 효제(孝悌)의 행동을 돈독히 하였다. 그는 『심경석의서록(心經釋疑序錄)』을 저술하였는 데 많은 사람들에게 암송하여 전해졌다. 그의 호는 육졸(六拙)이다.
 
한정오(韓正吾)
자(字)는 여중(汝中)이다. 진사(進士)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미(純美)하고, 의지 가 돈독하였으며, 배움에 힘썼다. 그가 시가(詩歌)를 저술한 바 많은 내용이 세상 에 행해졌다. 손수 두 그루의 괴목나무를 심고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지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호(號)하기를 ‘이안(怡顔)’이라 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시매 지극히 애통해 하였으며, 아버지의 묘소 옆에 움집을 지어 ‘영요(詠蓼)’라 편액하고 오래도록 사모하는 뜻을 가진 채 살다가 삶을 마쳤다.
 
장복겸(張復謙)
도승지(都承旨)를 증직받은 건(健)의 증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온순하고 지조가 고결하였으며, 이미 규율에 맞게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 시험 준비 공부를 하는 것을 업신여기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기면서 세상일을 내버 려두었다. 문 밖에 고산(孤山)이 있었는데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불고(不孤)’라 편액하고, 자기의 호를 ‘고산거사(孤山居士)’라 하였다.
 
 

16. 효자(孝子)

임옥산(林玉山)
부모를 섬기되 지극한 효도로써 하였다. 어머니께서 병이 들자 일찍이 분뇨를 맛보아 오랜 삶을 살게 하였으나 오래 살지는 못하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하였다. 6년이 지난 뒤에 도 조석(朝夕) 삭망전(朔望奠)을 폐하지 않았다. 이 일이 널리 알려졌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정려의 은전이 내려졌으며, 그에게는 선전관(宣傳官)이 특별 제 수되었다.
 
이 욱(李 昱)
춘성정(春城正) 담손(聃孫)의 증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도로써 하 고, 제사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다.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흙을 직접 짊 어지는 등 장례를 치르렀으며, 3년 동안 미음만 먹으니 사람들은 모두 다 그를 탄복하였다.
 
채몽화(蔡夢華)
그는 희심(希深)의 아들이다. 효성(孝誠)이 출천(出天)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그는 양친(兩親)께서 늙으시고 가정이 빈곤한 것을 걱정하였으며, 날마다 소나무 를 베어다 어머님의 방적(紡績)을 도왔다. 그는 매일 중대산(中臺山)에 들어가 서리(霜雪)를 피하지 못한 채 상수리를 주워다 쌀로 바꾸어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 였다. 부모의 상(喪)을 다하여서는 슬픔을 거둔 채 제도를 뛰어넘어 상례와 장례 의 전(奠)과 제(祭)를 자신의 성의(誠意)를 다하여 치르었다. 매 기일(忌日)을 당 하여서는 그 달이 끝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사실이 향중 (鄕中)의 장노(長老)들을 통하여 관청에서는 여러 차례 듣게 되었다.
 
채몽필(蔡夢弼)
그는 고려조의 평장사(平章事) 송년(松年)의 후손이다. 그는 부모를 섬김에 효 성(孝誠)을 다하였으며, 형제에 대해서는 지극한 우예(友愛)를 하였다. 아버님께 서 가르침에 ‘효염(孝廉)’ 두 글자를 써주셨는데, 그는 평생 동안 그것을 옷에 차고 다녔다. 그는 성격이 술(酒)을 좋아하였으나 부모님의 훈계(訓戒)에 따라 죽을 때까지 마시지 않았다. 그의 아들도 그러하였으니 역시 순수한 효도로써 가문이 드러났다. 그러나 집은 가난하였다. 그는 음식의 맛을 보아가면서 부모를 섬겼다. 향리(鄕里)의 사람들은 그의 효행에 감탄 흠모(欽慕)하였는데 관청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여러 차례 들었다.
 
이문주(李文冑)
그는 도사(都事) 유형(惟馨)의 아들이다. 타고난 품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하여 행동을 함에 힘썼으며, 효제(孝悌)로써 마음을 세웠다. 부모님 섬기기를 위주(爲主)로 하여 부모 봉양에 의지(意志)와 물건(物件)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다 지켰으며, 기년(期年) 에 이르기까지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았으며, 3년을 마침에 질(絰)과 대(帶)를 벗 지 아니하였다. 한때 주위의 장로(長老)들은 ‘북쪽에는 이(李文冑), 남쪽에는 진 (陳)이라 아울러 칭하였는데, 진은 곧 처사(處士) 극순(陳克純)이다. 사람들은 그 가 원대(遠大)한 그릇이 되기를 바랐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죽었다.
 
이중엽(李重曄)
그는 본 남원부의 향리(鄕吏)이다. 고려 시중(侍中) 이능간(李凌幹)의 후손이다. 그는 효성이 뛰어났는데 부모를 섬김에 사랑과 정성을 함께 다하였다. 무릇 친척의 상을 당하였을 때도 스스로 기한(期限) 동안 상복을 입어 시마(緦麻)에 이를 때까지 행동을 드물게 하고 그 기한을 마쳤다. 주위의 어른들이 조정에 그와 같은 사실을 글로 써 보냈는데 조정에서는 그에게 특별히 면역(免役)과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지금 살아있다.
 
장 전(張 恮)
그는 처사(處士) 복겸(復謙)의 아들이다. 그는 문장과 행동에 뛰어남이 있었다. 가계(家計)를 검약(儉約)하게 꾸려 나갔으며 어버이를 봉양함에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고 일찍이 영양이 있고 맛있는 것이 아니면 드리지를 않았다. 아우와 조카 들을 교도(敎導)하는 데 힘썼으며 역시 성정을 다하여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부모님의 나이 90이 되어 회혼례(回婚禮)를 지냈는데 화기(和氣)와 융화(融和)을 즐거움이 있었다. 이것은 세상에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17. 열녀(烈女)

이 씨(李 氏)
그녀는 사인(士人) 안희도(安希道)의 아내이자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 적 (迪)의 5대 손녀이다. 그녀는 남편이 질병을 앓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구환을 하였 고 해가 바뀌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질병이 위독하여지자 남편의 푸른 띠를 몰 래 품속에 넣어두고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남편을 따라 죽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그녀는 남편의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패도(佩刀)로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고자 여러 번 하였다. 그러나 여자와 아우가 되어서 깨달은 바 삶을 구한다 는 것을 한탄하였지만 살아서 빈염(殯殮)을 한 뒤 자결(自決)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람이 되어서 그쳐야할 바는 의탁해 놓은 딸아이의 울부짖음뿐만 아니라 아우로 하여금 업고 뒤뜰에서 놀게 한 것이다. 그는 가슴속에 품고 있던 남편의 푸른 띠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9세이었다. 강희(康熙) 병오(丙午)에 이 일로 정려가 내렸고 효종(孝宗) 7년(1666) 병오(丙午)에 정려가 세워졌다.
 
최 씨(崔 氏)
그녀는 교리(敎理) 호(號) 미능재(未能齋) 상중(尙重)의 따님으로 생원(生員) 노문(盧脗)의 아내이자 지평(持平) 형하(亨夏)의 어머니이시다. 그녀는 깊은 정절 (貞節)의 행동이 천성적(天性的)으로 뛰어났다. 남편이 죽게 되자 그때 7남매가 모두 어릴 때였는데 장남이 겨우 16세이었다. 참으로 삼천지교(三遷之敎)를 하여 야 하였는데 모두 재목(材木)으로 이루었으며 제사를 받들어 모시거나 빈객(賓客)을 접대해야할 때도 지극한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일찍이 그의 오라버니 승지(承旨) 온(薀)으로부터 글을 배울 때 곁에서 한번 들음이 있으면 늙음에 이르 기까지 잃어버리지를 않았으며 고금(古今)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그리고 예 문가(禮文家)들의 설(說)은 통효(通曉)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찍이 사람들이 도 (道)에 관하여 설한 것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면 나이가 늙어서도 진서(眞書) 삼국지(三國志) 선화연의(宣和演義) 등의 책들을 취하여 읽었다. 그리고 모든 자 녀들이 옆에 그녀를 모시고 항상 고요한 가운데 공경(恭敬)하였는데 마치 엄격한 스승을 모신 것과 같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여자 가운데 군자(君子)’라 불렀다. 아들 형서(亨敍)와 손자 염(焰)과 식(湜)은 세상에서 효자라 불렀다.
 
이 씨(李 氏)
그녀는 사인 이훤(李暄)의 아내이자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 적(迪)의 4대손 이다. 그녀는 타고난 성품과 행실이 곧고 정성과 공경함이 뛰어났다. 부모를 섬김 에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으며 군자(君子)에 거슬리는 적이 없었다. 그녀의 나이 21세에 남편이 백천군(白川郡)에서 죽었다는 부음(訃音)이 오자 그녀는 높은 누 정(樓亭)에 올라 몇 발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 죽고자 하였으나 남은 세월을 생각 하여 다시 살아 천 리(千里)를 분상(奔喪)하였으며 5년 동안 무덤을 지키면서 아 침저녁으로 전(奠)과 제(祭)를 한 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그 뒤 난리(亂離)가 나 남원으로 돌아와 시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의 가족들을 예로 써 모시고 남편이 일찍이 손수 종이로 천대(韆帶)를 만들 때에 남편을 도와 그녀의 손이 광택이 나고 오히려 새롭게 되었으며 항상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푸른 띠에는 향주머니(香囊)가 있었는데 그 띠에 달린 주머니에는 무엇인가 가득 하였으며 주머니는 상자(箱子)에 가득하였다. 때때로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낮 이면 곡(哭)을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눈물이 흘러서 오히려 고름처럼 되었으며 피눈물이 멀리 흘렀다. 마침내 그녀의 몸에는 옷이 깨끗하지 못하였고 고기를 먹지 않아 죽음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천대를 함께 묻어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지금 시골 마을에서 효열(孝烈)을 말하게 되면 반듯이 이(李) 씨를 일컬었다.
 
 

18. 충신(忠臣)

안 영(安 瑛)
자는 원서(元瑞), 호는 청계(淸溪), 사제당(思齊堂) 처순(處順)의 증손이고, 사 과(司果) 선국(善國)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로 말미암아 일어나 는 분을 스스로 분발하여 백의(白衣)로써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그해 7월 경명과 더불어 금산(錦山)에서 함께 절사하였다. 그 뒤 을미(乙未)에 특명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증직되었다. 조 정에서 좌승지(左丞旨)를 더하여 증직하였으며, 정충사에 배향케 하였다.
 
이상길(李尙吉)
자는 사좌(士佐)이고, 호는 만사(晩沙)이다. 탁문과(擢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 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숭정(崇情) 병자(丙子)년에 난강도(難江都)에 부임하 였는데, 익년(翌年) 정월 성(城)이 함락되자 순절(殉節)하였다.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특명에 의해 본 부(本府) 태산(台山) 옛 거주지에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나무로 된 비(碑)가 있는데, 그를 노래 하여 일컫기를
 
금탕실수철기비도(金湯失守鐵騎飛渡) 일발고성묘모전도(一髮孤城廟貌顚倒)
필마부난공독하위(匹馬赴難公獨何爲) 홍모일척시사여귀(鴻毛一擲視死如歸)
충존순국의저사생(忠存殉國義著舍生) 류방천재불후자명(流芳千載不朽者名)
 
이라 하였다.
 
 

19. 문과(文科)

최언수(崔彦粹)
문정공(文靖公) 항(恒)의 현손이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준원(濬源)의 아들이다. 사마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최 옹(崔 顒)
언수(彦粹)의 아들이다. 사마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호는 남강(南岡)이다.
 
최 정(崔 頲)
언수의 아들이다. 사마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최치옹(崔致翁)
익위(翊衛) 휘지(徽之)의 아들이다. 문장이 탁월(卓越)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등제하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의 예(藝)를 칭송하니 한주(翰注)로 삼았다. 벼 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호는 수춘자(收春子)라 한다.
 
허 항(許 恒)
사익(思益)의 아들이다. 진사 시험을 거쳐 탁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부사를 역임 하였다. 그에게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다. 호는 고산(孤山)이다.
 
이대윤(李大胤)
춘성정(春城正) 담손(聃孫)의 손자이다. 사마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김 위(金 偉)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김경여(金慶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김원립(金元立)
능주 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김재현(金載顯)
목사(牧使) 원립(元立)의 손자로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한 복(韓 輻)
청성군(淸城君)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사마 문과를 거쳐 탁문과(擢文科)에 장 원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승지에 이르렀다. 때에 중국 명(明)나라의 사신(使臣) 이 우리나라에 왔다. 그때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이름이 있는 사람을 뽑아 사신을 접대케 하였는데, 복(輹)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이 함께 뽑혔다.
 
김 준(金 嶟)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손자이다. 벼슬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정지년(鄭知年)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한필성(韓弼聖)
현감을 역임하였다.
 
최 반(崔 潘)
참판(參判) 여달(汝達 )의 아들이자 만육(晩六)의 증손자이다. 벼슬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최연손(崔連孫)
직제학 덕지(德之)의 증손자이다. 일찍이 회시(會試)에 응시하였다가 발표하는 방(榜)을 보지 않고 귀가(歸家)하였다. 감사(監司)가 순행(巡行)을 하다 우연히 그것을 듣고 그를 찾고자 하는 방(榜)과 소문(所聞)을 내고자 하였다. 부(府)로 들어온 감사는 도착하자마자 곧 새로 진사(進士)가 된 사람들을 불러들이라고 초 치(招致)하고 나아가 일컫기를 ‘그대는 진사가 되었는데 장원은 방을 붙인 그날 장원한 사람이 없어 불가(不可)하였으므로 금일(今日)에 반드시 (장원을) 발표할 것이니 가급적(可及的) 그 발표를 기다릴 것이다. 그대의 행위를 다스림이 어려움 이 있을 것을 생각하여 관대(官帶)와 노자(路資)를 이미 영(營) 가운데에서 준비 토록 명령하였으니 그대는 속히 위로 갈 것을 바라노라.’고 하였다. 드디어 역말 (驛馬)에 올라타고 가게 되어 영화(榮華)를 일세(一世) 동안 누렸다. 머지않아 탁 문과(擢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최 순(崔 珣)
대사간(大司諫) 반(潘)의 아들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최계옹(崔啓翁)
익위(翊衛) 휘지(徽之)의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등제한 뒤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한영휘(韓永鰴)
부사(府使) 두유(斗愈)의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등제한 뒤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20. 음사(蔭仕)

양대박(梁大撲)
의(艤)의 아들이다. 문장과 절행(節行)이 있고 부모가 죽음에 이르자 자기의 손 가락을 잘라 피를 먹게 하였으며,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사람 들은 그를 효자(孝子)라 불렀다. 일찍이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었다. 명(明)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과 슬계달(膝季達)과 함께 시(詩)를 써준 것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義)를 내세워 왜적을 토벌하다 적들을 붙잡아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에게 공조참의(工曹參議)가 증직되었다. 뒤에 그의 청계집(淸溪集)이 간행되었다.
 
최준원(崔濬源)
영의정(領議政) 항(恒)의 증손자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좌승지에 증직되었 다.
 
최 적(崔 頔)
정언(正言) 언수(彦粹)의 아들이다. 생원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으며 목천 현감을 지냈다.
 
최익지(崔翼之)
부사 보(葆)의 아들이다. 생원으로 별좌를 역임하였다.
 
김이권(金以權)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춘성정(春城正) 이담손(李聃孫)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자이다.
 
이 엽(李 曄)
정랑(正郞) 대윤의 아들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벼슬이 동지 겸 부총관(同知兼副摠管)에 이르렀다. 그가 죽자 임금으로부터 제문(祭文)이 내려 졌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증직되었다.
 
이유형(李惟馨)
동지(同知) 엽(曄)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벼슬이 의금부 도사에 이르 렀다.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일찍이 변(便:똥) 을 맛보아 달고 쓴 것으로 어머니의 병이 좋고 나쁨을 점쳤다고 한다.
 
장 환(張 喚)
효행이 출중하고, 문장이 뛰어나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원종공신으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한양오(韓養吾)
일찍이 과거 시험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면서는 경서(經書)에 밝아 이름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등제하지는 못하였으나 뒤늦게 광릉 참봉(光陵參奉)이 제수되었다.
 
김사걸(金士傑)
현령을 역임하였다.
 
김준걸(金俊傑)
판관을 역임하였다.
 
김원중(金元重)
동지(同知)을 역임하였다.
 
김광후(金光厚)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김 위(金 瑋)
직장을 역임하였다.
 
한 희(韓 曦)
군수를 역임하였다.
 
한 석(韓 晳)
부사를 역임하였다.
 
한 축(韓 軸)
승지 복(輹)의 형이다.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한경생(韓慶生)
복(輹)의 손자이다.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한유량(韓有良)
경생의 아들이다. 군수(郡守)를 역임하였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한두유(韓斗愈)
유량의 아들이다. 생원으로 부사를 역임하였다.
 
한제유(韓濟愈)
유량의 아들이다. 생원으로 참봉을 역임하였다.
 
한기유(韓起愈)
유량의 아들이다. 생원으로 군수를 역임하였다.
 
정연방(丁衍邦)
산호군(上護軍)으로 시중(侍中) 이능간(李凌幹)의 딸과 혼인하여 이곳으로 왔다.
 
최언준(崔彦浚)
참판 순(珣)의 아들이다. 생원으로 현감을 역임하였다.
 
김유경(金裕慶)
생원으로 직장을 역임하였다.
 
최시옹(崔是翁)
익위(翊衛) 휘지(徽之)의 아들이다. 유현(儒賢)들의 천거에 의해 교관(교관)을 역임하였다.
 
 

21. 무사(武仕)

한효공(韓孝恭)
훈련원의 정7품 벼슬로 훈련참군(訓練參軍)을 역임하였다.
 
한응룡(韓應龍)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과(武科)로 등제하여 부사를 역임하였다.
 
최상건(崔尙謇)
정언(正言) 언수(彦粹)의 손자이다. 벼슬이 부장(部將)에 이르렀다.
 
최 보(崔 葆)
사간 상중(尙重)의 아들이다. 부사로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다.
 
최용지(崔容之)
정언(正言) 언수(彦粹)의 4대손이다.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낙안군수를 역임 하였다. 낙안에 선정비가 있다.
 
채종형(蔡從亨)
만호를 역임하였다.
 
채석견(蔡石堅)
종형의 아들이다. 현감을 역임하였다.
 
채세무(蔡世務)
석견의 아들이다.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채희징(蔡希澄)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최 전(崔 湔)
참판 여달(汝達)의 아들이다. 병사를 역임하였다.
 
최담령(崔聃齡)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을 추종하였다. 덕령이 무고(誣告)로 체포되어 형을 받게 되었을 때 최담령의 고변(告辨)이 없이는 못하 도록 주청(奏請)하였다.
 
최달효(崔達孝)
언준(彦浚)의 아들이다.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최위지(崔緯地)
직장 제운의 아들이다. 현감을 역임하였다.
 
최계창(崔啓昌)
현감 위지의 손자이다. 부사로 당상관이 되었으며 원종공신이다.
 
 

22. 공장(工 匠)

지장(紙匠) 3명, 묵장(墨匠) 1명, 야장(冶匠) 5명, 도자장(刀子匠) 1명, 쇄옥장 (鎖玉匠) 1명, 선자장(扇子匠) 4명, 유물장(油物匠) 1명, 도침장(擣砧匠) 1명, 목 수장(木手匠) 10명, 각자(刻字) 8명, 경사기장(京沙器匠) 22명.
 
옛날 사기점(砂器店)이 아산방(阿山坊) 응역(應役)에 있었다. 이어 흉년이 들어 드물게 흩어지고 망하더니 약간 명만이 그 일을 어렵게 유지하다가 한때 모두 도주해버려 부사 여익제(呂翼齊)가 상사(上司)로부터 책임을 물어 구속되기도 하 였는데 각 방(坊)에 나누어 정해주고 방의 책임자들을 초치하여 급히 받들 것을 명령하였으나 아직도 이미 지은 죄를 면할 것을 도모할 노비들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그 방 산천의 이름으로 창조하여 만들어 드릴 것을 초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릇을 굽는 가마와 이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수습하여 비록 하소연을 하기도 하였지만 모이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규례를 만들었으나 읍민 들의 원망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향토】 용성지편 (2012)
• 남원 『용성지』에서 본 임실
• 용성지에 수록된 기문(記文) - 任實篇
(2018.08.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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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