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부흥운동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전지역에서 백제부흥(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663년 400척의 병선(兵船)에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고토(故土)에 도착하였고, 당나라는 신라를 지원하기 위하여 170척의 병선에 7천명 군사를 이끌고 역시 백제 고토에 도착하여 격전이 전개되었는데 지금까지는 그 격전지가 금강 입구로 추정되어 왔으나 금강입구가 아니고 본군(당진군) 석문면, 고대면, 아산만 해안이라는 새 학설이 제기되었다. 그 기록은 이미 1916년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보물·고적조사 자료」에 명기되어 있고 유적은 고대면 대촌리에 있다.
◈ 오페르트 도굴사건(남연군묘 도굴사건) 조선 고종 5년(1868)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기선 차이나호(680t급)에 소증기선 그레타호(60t급)와 100여명을 싣고 당시 홍주목 신평현(현 당진군 신평면) 행담도에 정박했다. 얼마후 밀물에 수십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그레타호를 타고 삽교천을 통하여 구만포(예산, 고덕, 구만)에 상륙, 가야동(예산, 고덕, 상가) 남연군묘(대원군 부친묘)에 도착하여 도굴하려다 실패하자 퇴거했다.
◈ 합덕농민운동 홍주목 합덕현 신남면 창리(현 합덕읍 합덕리)에 거주하던 이정규(전 전라도 병사, 덕산군수)가 합덕방죽(연호)일부를 사유화하고, 연호의 수세(水稅) 강제징수 획책, 농민착취가 극심하여 연호 몽리지역 6개 마을(합덕, 도, 옥금, 대합덕, 점원, 신석리) 농민 800여 명이 고종 30년(1893) 12월 그믐(음) 홍주목사에게 진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정규가 농민 800여 명을 전원 학살하라는 지시에 흥분한 농민들이 그날 밤 이정규의 주택에 방화한 의거이다. 이는 동학혁명보다도 2개월 반이나 앞선 농민항쟁이다.
◈ 소난지도 150의병 투쟁 1905년 을사조약, 고종의 강제 퇴위, 한국군 강제해산에 격분한 홍일초가 지휘하는 150명의 의병들이 석문면 소난지도에 상륙한 일본군 1개 소대와의 격전 중 전멸 당했으니 때는 1908년 2월 12일(음)이었다. 1982년 8월 15일 석문중학교에서 묘소를 정화하고 의총비를 건립해, 매년 추모제를 거행한다.
◈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 1919년 4월 4일 면장 이인정이 주축이 되어 남주원, 송재만 등 600여명이 궐기한 항일 독립만세 운동으로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정미면 천의리까지 시위를 전개하여 거의 모두 구속, 수감되어 옥고를 치룬 본군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만세운동이다. 1972년에 128명의 추모비와 만세운동 참가자 578명의 사당 창의사가 건립되었고 1995년엔 정미면 천의리에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매년 4월 4일에 기념식과 기념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 김대건(1821∼1846) 한국 최초의 신부 영세명은 앙드레.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탄생하였는데 그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최초의 근대 유학생, 최초의 나침반 사용자로서 5개국어(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한국어)에 능통한 어학자였다. 아편 전쟁 후 남경(난징)조약 체결시 프랑스 대표 통역관으로 참석하였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6년 앞선 1845년 프랑스어로 표기된 「조선전도」란 지도를 제작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배부했고, 서양 근대 문물을 조국에 소개하여 한국의 근대화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 성인 103위의 으뜸이다.
◈ 김찬영(金瓚泳, 1889∼1973) 애국지사, 법조인. 호는 심농, 본관은 연안, 송악면 월곡리 출생. 고향에서 한문 수학 후 서울 법관 양성소 졸업. 대한제국 영동지원 판사로 임용되어 근무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항거, 법복을 벗고 재야 변호사로 국내외 동포 애국지사의 변호에 앞장섰다. 8·15광복 후 검찰총장, 대법관, 헌법심사위원, 법전 편찬위원 역임. 1954년 정년 퇴임 후 성균관 부관장,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와 곽재우 기념사업회 고문, 대한변호사회 회장, 충남향우회 회장, 5월 동지회 회장 역임. 묘소가 천안시 삼룡동에 있다.
◈ 이괄의 난을 평정한 남이흥(南以興, 1576∼1627)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 호는 성은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포도대장, 충청·경상도 병사, 귀성부사, 안주목사, 평안도 병사가 되었다. 그 후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1등 공신이 됐다. 인조 5년 (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병사로 영변부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안주성에서 후금(청) 군대와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안주성에서 자폭하고 말았다. 대호지면 도리리에는 그의 묘소와 정려(충신문)와 신도비와 유물관인 모충관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매년 9월 대호지면 도리리에서 충장공 남이흥장군 숭모제가 거행되고 있다.
◈ 맹사성(孟思誠 1360∼1438) 고려말 조선초 명상(名相), 호는 고불, 본관은 신창, 최영 장군의 손자 사위. 충청도 한산에서 살다가 아산군 배방면으로 이사하여 거주함. 권근의 문인. 고려우왕 때 문과 급제, 조선 건국 후 이곳 면천지군사(군수)를 지냈으며, 예조판서, 호조판서, 충청도 감사, 공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오군도진무, 좌의정, 영춘추관사를 역임하고, 팔도지리지 찬진, 청백리에 녹선, 시호는 문정. 면천지군사(군수) 재임시 그 은택이 백성에게 미친바 있어 백성들이 그를 칭송한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 실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소설가, 호는 연암, 본관은 반남. 실학자 홍대용에게서 서양 신학문 수학, 정조 때 박명원 진하사를 따라 청나라 사람들의 이용후생 생활을 목격한 후 실학에 뜻을 두었다. 60세에 이곳 면천군수로 부임했다. 그 후 양양부사 승진.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 그의 『열하일기』는 청의 실학사상을 잘 소개함. 허생전, 호질, 양반전 등 10편의 한문소설은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됨.
◈ 고려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 고려 태조 때의 무장(武將), 면천복씨의 시조, 처음 이름은 사귀, 또는 사괴, 태봉(후고구려)의 마군장군으로 있다가 궁예가 민심을 잃게 되자 태조 1년(918) 신숭겸, 배현경, 홍유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우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환선길의 반란을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도록 했고, 임춘길의 모반을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움. 그후 태사(太師)에 추증되고, 태조 묘정(사당)에 배향되었고 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딸이 심었다는 면천 은행나무가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고 그와 관련된 두견주가 민속주로 전국에 시판되고 있다. 그의 제단이 순성면 양유리에 있다.
◈ 상록수의 저자 심훈(沈熏, 1901∼1936) 소설가, 시인, 영화인으로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 호는 해풍인데 서울시 노량진동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했다. 그 후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23년 귀국하여 연극, 영화, 소설 등의 집필에 몰두했다. 그 뒤 1926년 한국 최초의 영화 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는데 1932년 본군(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집필에 전념, 『상록수』를 써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소설에 당선되었고,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에 감격하여 「오.오. 조선의 남아여」란 즉흥시를 호외에 쓴 것이 마지막 글이다. 1976년 7월 당진읍 남산에는 그의 기념시비 상록탑이 건립되었고 애국시 「그날이 오면」 전문이 조각되어 있다. 매년 가을 당진에서는 「상록문화제」가 거행되고 있다.
◈ 대학자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여산, 호는 구봉, 현승, 신분이 미천하였으므로 관계(官界)에 나가지 못했으나 당대 학자, 정치인들과 교유하여 그 폭이 매우 넓었고 시와 문장에 능하여 당시 8대 문장가의 1인이었다. 특히 예학(禮學)의 대가, 성리학의 태두로서 명성이 대단했고 그의 문인들이 김장생, 김집 부자를 비롯하여 많이 배출되었다. 고향은 경기도 고양시 인데 안당의 화 관계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본군 송산면 매곡리에 사는 친구인 김진려에게서 살다가 작고했는데 사헌부 지평(持平)의 증직과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묘소와 비석과 사당(입한재)이 당진읍 원당리에 있으며 매년 10월 제향이 시행되고 있다.
◈ 청백리 이안눌(李安訥, 1571∼1637) 조선의 문신, 시인, 호는 동악, 본관은 덕수. 선조 32년 문과 급제후 예조·이조 정랑, 동래·담양 부사, 경주 부윤, 숭문원 동부승지, 예조참의, 강화부윤, 예조참판, 예조판서, 공청도(충청도)감사 역임. 청백리에 녹선. 선조 때 시인 권필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당의 이태백에 비유되었다. 좌찬성에 추증, 면천군(현 송산면 명산리)의 향현사(동악서원)와 담양의 귀산서원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혜. △ 저서 『동악집』 △ 묘소·신도비 - 정미면 사관리.
◈ 왜군을 격파한 이양원(李陽元, 1533∼1592) 조선의 문신, 호는 노저·남파, 본관은 전주. 이황(퇴계)의 문인. 문과 급제 후 종계변무사 서장관, 평안·충청·경기도 감사, 형조판서, 대제학, 대사헌, 광국3등공신, 한산 부원군, 우의정 역임. 임진왜란 당시 유도대장으로서 부원수 신각, 함경도 병사 이혼의 군사와 합세하여 해유치에서 왜군을 격파 대승하여 영의정에 승진함. 의주에 몽진중인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문을 듣고 통탄하여 단식 8일만에 절명함. 시문에 능했고 시호는 문헌이다. 묘소가 대호지면 송전리에 있으며 1999년 문헌공 이양원 영의정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 언론인 이종린(李鍾麟,1881∼1950) 독립투사, 정치가, 언론인으로 호는 황산, 도호는 보암, 본관은 성주인데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에서 출생하여 정미면 승산리에서 성장했다. 향리에서 한학 수학 후 1908년에 성균관 박사, 그후 대한협회 회보 편집, 대한민보 주필, 천도교회 월보 창간, 조선독립신문 발행, 천도교월보 사장, 개벽사 사장, 조선 기근 구제회 위원장, 조선기자 대회 대표 위원, 중앙실비 진료원 이사장, 전조선 수해 구제회 위원장,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 신간회 집행 위원장,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및 탄압 성토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당함. 그 뒤 천도교 통일 기성회 위원장, 중앙위원회 대표, 천도교 대종사장, 천도교 교령, 8·15광복후 대한민국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 헌법기초위원 전형위원, 교통체신 위원장, 제2대 국회의원 재선, 6·25동란 당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옥중 발병돼 출감 직후 작고함. 196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웅변가, 단편소설가로서 그의 유고 일부가 손자(동초)에 의해 황산집으로 발간되었다. 정미면 승산리에 그의 묘소와 묘비와 고택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이행(李荇, 1478∼1534) 조선의 문신, 호는 용재, 청학도인, 창택어수, 본관은 덕수, 문과급제 후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 좌승지, 도승지, 대사헌 역임. 조광조 등 신진 사류의 배척으로 첨지 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고향(현 송산면)으로 낙향함. 그 후 다시 이조판서, 우의정,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찬당상, 좌의정 역임. 권신 김안로의 전횡을 논박하다 도리어 판중추부사로 좌천, 평안도 함종에 유배 사망. 시호는 문정(문헌). △저서 『용재집』 △묘소 - 송산면 도문리 능안. 그가 심었다는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7호)가 송산면 삼월리에 있음.
◈ 의병장 정주원(鄭周源 1868∼1925) 항일의병장, 호는 송운, 본관은 연일로 고대면 용두리에서 출생 성장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군대의 강제해산 등 국권이 동요될 때 항일의병 투쟁이 거국적으로 일어나자 1907년 8월 39세의 나이로 당시 경기도 죽산군 원산면 하수리에 있다가 자진 의병에 투신, 150여명의 의병을 규합 의병대장이 되어 당년 9월 이후 경기도 죽산, 양지 2개군을 순회하며 의병을 규합한 결과 무려 900여명이 운집했다. 그는 의병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1908년 7월까지 경기도 안성, 죽산, 양지, 수하, 용인, 풍도, 충청도 당진, 서산, 면천군 전지역에서 일본군과의 항일 의병전을 전개했으나 해미군 적서촌(현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위장된 일본군에게 체포당하였다. 그 후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 종신유형, 징역 3년 선고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었다. 그후 송악면 가학리에서 살다가 57세를 일기로 경기도 평택군 오성면 숙성리에서 작고했다. 건국 후 대한민국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향토사학자 홍석표의 주선으로 지난 1984년 11월 묘소 정화와 기념비(의병장 정주원 숭의비) 제막식을 묘소 현장(송악면 가학리)에서 거행했다.
■ 보물
◈ 안국사지 - 석불입상 제100호, 정미면 수당리
◈ 안국사지 석탑 - 제101호, 정미현 수당리
◈ 영탑사 금동 삼존 불상 - 제409호, 면천면 성하리 560
◈ 산암사 금동 좌불상 - 제987호, 송악면 가교리
■ 천연기념물
◈ 송산 회화나무 - 제317호, 송산면 삼월리
■ 중요무형문화재
◈ 기지시 줄다리기 - 제75호, 송악면 기지시리
◈ 면천 두견주 - 제86-나, 면천면 성상리
■ 중요민속자료
◈ 남이흥장군 유품 - 제21호, 대호지면 도리리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영랑사 대웅전 - 제15호, 고대면 진관리
◈ 이만유 장군 유품 - 제84호, 신평면 거산리
◈ 영탑사 약사여래상 - 제111호, 면천면 성하리
■ 기념물
◈ 남이흥장군묘 일원 - 제52호, 대호지면 도리리
◈ 합덕제 - 제70호, 합덕읍 합덕리
◈ 면천 은행나무 - 제82호, 면천면 성상리
◈ 면천읍성 - 제91호, 면천면 성상리
◈ 필경사 - 제107호, 송악면 부곡리
◈ 당진 향교 - 제140호, 당진읍 읍내리
◈ 면천 향교 - 제141호, 면천면 성상리
■ 문화재자료
◈ 영탑사 7층석탑 - 제216호, 면천면 성하리
◈ 채운포 석교비 - 제217호, 당진읍 채운리
◈ 영탑사 범종 - 제219호, 면천면 성하리
◈ 영랑사 범종 - 제221호, 고대면 진관리
◈ 한음선생 영정 - 제298호, 송악면 금곡리
◈ 이의무 신도비 - 제313호, 송산면 도문리
◈ 한갑동 가옥 - 제330호, 우강면 원치리 145-2
※ 이밖에도 향토유적(면천군자정 등 9건)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