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평당산과 당산제 거제동 800번지에 위치한 거평 당산 제당(祭堂) 안에는 주산신위(主山身位) 위패가 중앙에 나란히 두 개 모셔져 있고 그밖에 제대(祭臺) 위에 촛대, 향로 등 다수의 제구가 있다.
제일과 시간은 음력 정월보름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이며 제관은 제일(祭日) 20일 전에 거평씨족회(文, 梁, 宋, 尹씨 성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회의를 거쳐 선정한다.
◈ 배산 산제당 사당 안에는 검은 돌에 ‘배미산신령 대성전(盃美山神靈大聖殿)’이라 쓴 위패가 놓여 있고 왼쪽 벽면에는 ‘산운각(山雲閣)’이라 음각한 목판을 걸었다. 잔뫼산(배산을 잔뫼산이라함) 보존회 회원 중에서 한 명을 제관으로 선정하여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저녁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낸다.
◈ 신리당산제(新里 堂山祭) 연산 2동 신리경로당 경내에 있다. 제단에는 ‘南無OO師堂山不降紙位’라는 위패글씨가 있다. 당제는 음력 8월 14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치른다.
◈ 남문구 동래부로 사람과 우마가 출입하는 주문(主門)인 남문이 있다. 남문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해서 남문구라고 했는데 지금의 부산교육대학교 주변일대이다.
◈ 황새알(한새알, 鶴卵) 터 법원과 검찰청 신축지 근처의 해발 46m의 십자산 일대는 옛날에 숲과 습지대였는데 황새와 학이 날아들어 산란을 해서 십자산 일대에 알이 흔했다고 한다.
◈ 홰바지(炬店) 부산진에서 매월 4·9·14·19·24·29일 열리는 장날에 동래쪽 사람들이 남문구를 통해 출발해서 밤 늦게 귀가할 때 가족들이 싸리나 갈대 등을 묶어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마중할 때 기다리는 지점이다.
◈ 물만골 황령산 두산자락 쪽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하여 물만골이라 하였다.
◈ 채봉터(草墳터) 옛날에는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고 깨끗한 인골만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패하기 쉬운 피육(皮肉)을 제거하는 육탈장(肉脫葬) 기간을 3년간 두었는데 이 육탈장 기간을 일차장 또는 초장(初葬)·초빈(初殯)이라 하며, 무덤을 초분(初墳)이라 하는데 지금의 연산 9동 토곡주공아파트 주변이 바로 초분터였다고 한다.
◈ 톳고개(토곡) 연산 9동 토곡주공아파트 입구에서 망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 주위 야산에 토끼가 많이 서식하여 이른 아침 해뜰 무렵이면 멀리 장산(동쪽)을 바라보면서 많은 토끼들이 왕토끼를 따라 다리를 들고 있었다고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토끼 토(兎)’에 ‘고개 곡(谷)’을 써서 토곡이라 하고 이를 톳고개라 발음한다.
◈ 마하사에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팥죽 500여 년 전 어느 해 동지 전날, 화덕에 불씨가 꺼져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부엌에 나가보니 화덕에 불씨가 살아 있었다. 마침 동짓날이라 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리려 갔더니 오른쪽 3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황령산 봉수꾼이 말하기를 며칠 전 눈보라치던 밤에 상좌아이가 불씨를 구하러 왔기에 애처로워 보여 팥죽을 먹이고 불씨를 주어 보냈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그제서야 나한전의 나한이 타심통을 발휘하여 신족통으로 멀고 험한 황령산에 가서 불씨를 구해다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마하사 참새를 쫓아 준 나한 어느해 마하사에 참새떼가 몰려와 곡식을 쪼아먹어 피해가 커 나한전에 가서 참새떼를 몰아내 달라고 기원했더니 참새 한마리가 죽어 뜰에 떨어진 후로는 참새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 마하사의 소리나지 않는 금구(金口) 1860년대 해령(海嶺)스님이 개금(改金) 번와(燔瓦) 불사를 마치고 회향시에 금구를 치니 4주야로 소리가 나지 않았고, 1910년에도 해봉(海峯)스님이 개금과 탱화불사를 마치고 역시 회향시에 금구를 쳤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는 16나한이 나한전의 불사가 자금이 없어 개분(改粉)과 탱화 신작(新作)을 미루는 것을 촉구하는 의미로 신통력을 발휘하여 금구를 쳐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놀란 승도들이 목욕재계하고 16나한전의 불사를 약속하자 금구 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 명당 화지산(和池山)과 동래사조 정문도(鄭文道) 묘터 고려초기 동래 정씨 정문도와 그의 아들 정목(鄭穆)과 후에 정목의 장인이 된 고익공(高益恭)간의 이야기이다. 어느날 고익공이 화지산의 풍수를 보고 탄복하면서도 “좋기는 하나…” 라고 하면서 그 사유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고익공이 개성의 중앙 관직으로 올라가고 정문도도 유명을 달리하자 아들 정목이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고 개경으로 상경하여 고익공을 만나 이 사실을 알리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정목을 집에서 내쫓았다. 이는 그곳에 산소를 쓰면 역적이 배출된다는 사실을 정목이 알지 못하고 부친의 산소를 썼기 때문에 고익공이 그렇게 한 것이다. 허나 고익공이 한참 생각한후 다시 정목을 불러 묘소를 쓰는 과정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밝히도록 하자, 정목이 “부친을 화지산에 묻을 때 호랑이가 걸터앉아 울었던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 생각되어 그곳에 묻고 그 다음날 동생과 같이 묘소에 가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묘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기에 다시 목관을 묻고 밤에도 감시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 3경에 이르자 도깨비 같은 괴물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나무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두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울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 밤중에 웬 사람이냐”라고 말을 하면서 사연을 물었다. 이에 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더니 노인은 “그것은 도깨비의 장난임에 틀림없네. 도깨비 눈에는 보리짚이 금빛으로 보인다고 하니 보리짚으로 목관을 잘 싸두게”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날이 새자 두 형제는 보리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 밤이 되어 무덤 주위에 숨어 보았더니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리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 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또 “묘소를 쓴 그 해 여름 어느날 뇌성벼락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를 산산히 부숴 버렸다”고 하자 고익공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어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동래 정씨 가문의 화근이 없어졌제”라고 하면서 정목을 거두어 과거시험에 합격시켜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 이후 부산의 동래 정씨가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는 바로 정목의 손자이다.
◈ 거울바위(鏡岩) 지금의 배산 동북쪽에 거울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문둥병을 앓아 얼굴이 험악했던 어떤 총각이 거울같이 생긴 미끈한 바위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자 너무 험상궂은 자기얼굴을 비관하여 그 거울바위를 깨뜨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