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헌공(李庭憲公)의 혼령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에 부산에 첨사(僉使)가 부임만 하면 어쩐 일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급사의 변을 당했다. 계속 이런 일이 생기자 누구도 부산첨사가 되기를 꺼렸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구성( 城)을 정성(整城)하여 자성대로 본성(本城)을 옮기게 했는데, 구성지를 팔 때 동문못 속에서 수많은 해골이 나왔다. 그래서 이 해골을 모아 자성대 밑에다 묻었다. 그랬더니 하루 저녁에 이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의 꿈에 위엄있게 갑옷을 입은 장수가 나타나 하는 말이 “나는 영천 조방장 이정헌이다. 임란 때 부산진성에서 정발 장군과 함께 부산진을 지키다 전사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나의 공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어 섭섭하기가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서러운 사정을 호소하려고 역대 부산첨사의 꿈에 나타났더니 모두가 말도 하기 전에 죽어버리기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말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뒷날부터 이 마을에 갑자기 병이 유행되어 급사자가 하루에 40여 명씩 생겼다고 한다. 이에 꿈을 꾼 노인이 이상하게 여겨 동래부사에게 꿈꾼 이야기를 하였더니 당시의 부사 박명한공(朴明漢公)은 즉시 이정헌의 공로를 상소하여 좌승지의 관직을 내리게 하고 몸소 이곳에 와서 기치(旗幟)를 갖추고 군고(軍鼓)를 울리며 제사를 크게 지내어 이정헌의 혼령을 위로했더니 그 후로부터는 무사하였다고 한다.
도시화한 지역이지만 전통적인 마을신앙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당산이다. 종교단체는 개신교 49개 교회에 130명의 교직자, 천주교 4개 성당에 20명의 교직자, 불교 45개 사찰에 103명의 교직자가 있다. 특히 초량교회는 1893년에 설립된 부산 최초의 교회이다.
◈ 이별의 부산정거장 지금은 부산역이 동구 초량동 1187-1에 위치하고 있으나,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있던 곳은 현재 중앙동 부산경남 본부세관이 있는 맞은편 부산역 소화물을 취급하고 있는 곳이다. 중앙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여 임시정부가 되었던 시절 당시에는 전국 각처에서 경부선의 열차 위에 몸을 싣고 부산역에 도착하였을 때의 서러움을 달랬던 곳으로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 부산진시장 부산진시장은 동구 범일동 290번지에 위치한 부산최대 재래시장의 하나로 이곳에 조선시대 때 부산진(釜山鎭)이 있었다 하여 시장 이름을 부산진시장이라 하였다. 현재 2,000여 명의 상인이 종사하고 있다. 한복감·의류·포목·피복·기성복·양복·양장지·침구·신발·폐백·병풍·생활한복 등이다. 특히 혼수전문 의류도매 활성화시장으로 명성이 높다. 부산권 뿐만 아니라 경남권의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등 고객의 만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1997년도에 냉난방 및 환기시설 설비, 화장실 등을 현대화하였다.
◈ 초량의 텍사스 거리 동구 초량동 부산역 앞 큰길인 중앙로 맞은편 화교학교를 중심으로 중국영사관이 있던 자리로 구한말에는 청관(淸館)이라 했다. 중앙동의 용두산 주위는 왜관이 있었는데 비해 초량동에는 중국조계지(中國租界地)가 되어 왜관에 대칭되는 말로 청관이라 한 것이다. 그 청관이 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한 이곳을 지금은 ‘텍사스 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은 1884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텍사스 거리는 주한 UN군과 외국인의 유흥가로, 1950년 중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찬란한 조명과 요란한 미국식 대중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이 흥청거렸다. 그러나 한때 부산의 관문인 부산역 주위에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흥가가 있다는 것이 부산의 치욕이라 하여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던 가운데 홍등가로서의 빛은 식어갔고,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관광상품거래의 명소로 바뀌어 갔다.
1990년대에 들어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자 러시아의 선원과 보따리 장수들이 이곳을 찾아 상가가 성업을 이루었다. 텍사스 거리는 청국인에서 미국인, 외국선원,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인들 등 여러 외국인들을 거치며 상가로, 환락가로, 지금은 관광상품의 명소로 거리의 역할을 바꾸어가고 있다.
◈ 범일동 귀금속거리 범일동 지하철역에서 하차하여 자유시장과 평화시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남산약국 입구에서 중앙시장에 이르는 이면도로 양쪽으로 귀금속도매상가, 귀금속유통조합 등 크고 작은 시계점과 귀금속가게 450여 개가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도소매는 물론 예물시계나 외국의 유명 브랜드제품 등 값비싼 시계와 반지, 목걸이 등을 구입하려는 알뜰한 중산층들이 주로 이용하는 귀금속 도매전문 거리로 세이코 손목시계의 경우 정가에서 40∼50% 정도 싸게 살 수 있고, 순금은 10%, 보석류는 30∼40% 정도 저렴하다. 돌반지는 시중서 구입하는 것보다 10% 정도에 싸게 구입할 수 있다.
◈ 가구거리와 자개골목 동구의 범일동 간선도로 양쪽의 가구거리는 1950년대부터 형성된, 부산시내 가구점의 발상지대라 할 만하다. 2백여 곳에 가까운 점포가 성업 중이며 점포마다 직영공장을 가지고 있는 등 점포 나름의 특징이 있어 고객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있다. 범일동의 농방(가구)거리와 좌천동의 자개골목은 바늘과 실의 관계요, 이와 입술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농장을 만드는 농장공예는 범일동에서 일어나고 자개농과 자개장식구에 박을 자개를 갈고 닦는 조각공예는 좌천동에서 번창하여 서로를 돕게 되었다. 자개농, 자개경대, 자개함지, 자개항아리, 자개상자, 자개필통들이 한국의 특산물이 된 데에는 이 좌천동 자개골목이 큰 역할을 하였다.
외국 관광객들은 이 자개가 박힌 소품을 좋아하여 관광상품으로 인기가 많다. 전복 껍데기인 패각 따위로 만드는 자개공업은 한 공장에 10명 이내인 가내공업이지만 공예원들이 자개를 갈고 닦는 것은 공장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전문성을 가져 그 기법과 기술을 달리한다. 봉황새, 공작새 같은 새를 잘 갈아내는 집이 있고, 꽃이나 나무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 있고, 글자를 잘 가는 집이 있어 수요자는 그 전문성을 따라 그 공장에 제작을 의뢰하거나 자기 취향에 맞는 자개농을 구입하기도 한다. 이 자개제품은 범일동의 농방(가구)거리에서만 판매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판매되고 있어 통영칠기에 견줄 만한 부산의 자랑거리이다. 자개의 재료도 국내산이 아니고, 수입품으로 품질과 빛깔이 좋은 넓고 큰 것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