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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목치)
부산광역시 동구 정보
◈ 동구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부산포왜관, 부산·경남 3·1운동의 진원지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부산의 대 선각자 박기종(朴琪淙), 의열단원 박재혁 / ◈ 내 고장의 문화유산 - 부산진지성, 정공단, 부산진지성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부산포왜관
부산은 신라, 고려를 이어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왜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우리나라 남해안을 침략하여 노략질과 약탈, 방화, 살인 등 비행을 저질렀다. 이들을 왜구라 했다. 이들이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 주고 이들의 약탈행위 등을 다스리기 위해 태종 7년(1407) 조선정부에서 부산포(1407∼1592)와 제포(현 진해시의 웅천) 두 곳으로 정하여 문을 열어 주었다. 왜관이란 일본(주로 대마도) 사람이 그쪽 물건을 가져와서 팔고 이쪽 물건을 사가는 오늘날의 무역거래처였다. 이 왜관이 부산에서 처음 선 자리는 오늘날의 범일동의 자성대 서북쪽이었다. 부산포왜관은 임진왜란으로 없어지고, 임란 이후 절영도(현 영도)에 임시 왜관이 한동안 섰다가, 두모포(현 동구청 부근)로 옮겨지고, 1678년에는 오늘날의 용두산 부근(초량왜관이라고 했음)에 옮겨져 1876년의 개항 때까지 198년 동안 존속했다.
 
◈ 부산·경남 3·1운동의 진원지
부산진 일신여학교(동래여고의 전신)는 1895년 10월 15일 호주 선교단에 의해 좌천동에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로부터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니 우리 민족과 일본제국주의 간에는 대립과 항쟁이 치열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교육받고 자란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에서 선도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오전 9시경 고등과 학생 김응수, 송명진, 김반수 등 11명과 교사 주경애, 박시연은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문을 뛰쳐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는 옥중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신여학교는 20일 동안 휴교령이 내려졌고, 4월 1일에야 개학을 하였다. 이후 학생들의 항일 독립의지는 졸업식 거부로 이어졌다.
 
일신여학교의 여학생들은 모두가 16세 전후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고, 또 이들이 일제의 침략세력이 가장 깊이 뿌리박은 부산에서 용감히 시위항쟁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3·1운동사에 있어 다른 지방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또 그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산진 일신여학교 여학생 의거는 당시 경상남도에 3·1운동의 첫 화살을 던지게 되어 그후 경남 각지에서 만세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부산의 대 선각자 박기종(朴琪淙)
1839년 좌천동에서 태어나 일찍 실학에 뜻을 두어 상술과 일본어를 배웠다. 1876년 개항한 뒤 수신사 일행의 역관이 되어 일본의 앞선 문물을 보고는 자본주의 개념을 배웠으며, 얼마 동안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1886년 10월 부산항 경무관으로 임명되어 부산에 근무하면서 선각자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1895년 개성학교를 열어 후진 양성을 하며 상무소를 설립, 이 고장의 상업발전을 꾀하였다. 1898년 5월 뜻을 모아 부하철도 회사를 세웠으며, 1899년 대한철도회사를 세우고, 1902년에는 영남지선(마감-삼랑진)철도 회사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후학들의 학업의 길을 연 교육가요, 철도회사를 운영한 사업가이자 민족정신을 고양한 선각자로 빛나고 있다.
 
◈ 의열단원 박재혁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 1920년 8월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김원봉으로부터 군자금 3백원을 받아 수많은 애국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하고, 동년 9월 상순에 중국고서로 짐을 꾸리고 그 밑바닥에 폭탄을 감추어 상해를 떠나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1920년 9월 14일 하오 2시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터트렸다. 의거 후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다시 상고하니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로 형이 확정됐다.
 
대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과 폭탄 상처로 폐병까지 발병한지라 하도 고통이 심하므로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인 1921년 5월 1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기념물
 
◈ 부산진지성 - 제7호, 범일동 590-5
 
◈ 정공단 - 제10호, 좌천동 473, 474
 
◈ 부산진지성 - 서문성곽 우주석 제19호, 범일동 321-29
 
 
■ 비지정문화재
 
◈ 영가대 기념비 - 범일2동 254-6
 
◈ 범천 증산성 - 좌천4동
 
◈ 부산진 매축기념비 - 동부경찰서내
 
◈ 구봉산 봉수대 - 초량4동 구봉산
 
◈ 정발장군 동상 - 초량3동 중앙로변
 
◈ 윤흥신공 석상 - 초량3동 중앙로변
 
◈ 최영장군 사당 - 자성대 공원내
 
◈ 만공단 - 자성대 공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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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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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