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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7〉
아프리카 말리 내전 중 발생한 팀북투의 고서적(필사본) 구출 작전은 인류 문화유산을 지켜낸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13세기~16세기 서아프리카의 황금기를 이끈 말리 제국의 중심지 팀북투(Timbuktu)는 천문학, 수학, 의학, 이슬람 법학 등을 기록한 수십만 권의 희귀 고문서가 보관된 지식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2012년 말리 내전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 알카에다 연계 이슬람 반군이 팀북투를 점령하면서 이 지역의 귀중한 고문서들을 ‘샤리아 법(Shariah)’에 어긋나는 ‘이교도의 저술’로 규정하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샤리아(Shariah)는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종교 율법이자, 무슬림의 일상과 삶 전체를 이끄는 행동 규범 체계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Quran)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 그리고 학자들의 합의인 이즈마(Ijma)를 바탕으로 하며 아랍어로 ‘물을 향하는 분명하고 잘 다져진 길’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 법을 엄격하게 규정해 절도죄 시 손을 자르는 형벌(하드)을 시행하고 여성의 복장 및 이동 자유 제한, 이자 금지, 타 종교에 대한 엄격함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 언론을 통해 인권 침해 및 성차별 논란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팀부크투의 도서관(사진:위키백과)
2013년 1월, 프랑스군과 말리 정부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던 반군은 수만 권의 고서적을 소장한 공식 도서관인 ‘아흐메드 바바 연구소’에서 고문서를 꺼내 불을 질렀다. 방화에서 4,000여 점의 귀중한 문서가 소실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전체 고문서가 완전히 잿더미가 될 뻔한 상황에서 고문서 보관소의 큐레이터들과 지역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모두 나서 위대한 팀부크투의 도서관 구출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슬람 반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물 중 아홉 개의 영묘와 한 개의 모스크 문을 파괴했다. 도서관 큐레이터 아벨드 카더 하이다라(Abdel Kader Haidara, 1964~ )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서 유물들을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해 용감한 자원봉사자 및 현지 배달원들로 구성된 비밀 팀을 조직해 팀부크투 도서관(The Library Rescuers of Timbuktu)에 있는 책들을 극단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밀수하듯이 도시 밖으로 밀반출하기 시작했다.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Abdel Kader Haidara) 박사(사진:위키백과)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는 어린 시절부터 말리 북부 팀북투의 유서 깊은 지역 중 하나인 상코레에 있는 집에 수천 권이나 되는 책들에 둘러싸여 자라며 오래된 책들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중 책의 일부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책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하이다라(마마)는 1897년 프랑스 통치 초기에 니제르(Niger) 강변의 밤바(Bamba) 마을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학문을 익히고 밤바에 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희귀한 필사본을 다량 수집해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고, 아프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차드, 수단, 이집트에서 필사본을 가져왔다. 그는 젊은 시절 수단 백나일강과 청나일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여행한 후 팀북투에 정착하여 전통학교를 세운 이슬람 학자로 많은 원고를 수집하여 1967년 유네스코가 이 지역의 풍부한 문학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아흐메드 바바 고등 이슬람 연구소’에 기증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헛간을 뒤져 가족 소장품 중에서 책 한 권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17세기 초 이슬람 법학 논문, 영양 양피지에 쓰인 13세기 코란, 손바닥만 한 크기에 물고기 가죽에 쓰인 다른 성서 같은 것들이었다.
1981년, 아버지 마마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하이디라는 17살이었지만, 전통에 따라 가족 서재를 물려받아 관리하였다. 그의 가문은 16세기부터 원고를 수집했다. 집안 대대로 전통이 서재에 가장 관심 있는 사람이 원고를 관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원고를 오래 보존하고 팔지 않게 되었다. 가족의 규칙은 명확했다. 원고를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팔거나 절대 버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물려받은 책을 활용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딴 ‘마마 하이다라 기념 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아흐메드 바바 연구소의 소장 무함마드 주베어는 당시 17세였던 압델 카데르 하이라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수석 수집관이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하이다라는 경영학 공부를 하고 싶어 그에게 관심 없다고 말하며 “저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싶어요,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소장은 청년을 계속 쫓아다니며 “이것은 당신의 일이며, 이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당신에게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지적 전통의 수호자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 박사 소장 도서(사진:PANOS-REA)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는 처음에 맡겨진 일이 내키지 않았지만, 몇 달간의 독촉 끝에 자신의 사업 계획을 접고 보존 기술부터 개별 작품의 금전적 가치 평가 방법까지 모든 것을 차근차근 배우며 집중적인 훈련을 시작해 이 일에 푹 빠져들었다. 바바 연구소 소장은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 임무는 니제르강이 굽이치는 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숨겨진 필사본을 찾아내고, 필요하면 금전을 지불하고 소유자들을 설득해 필사본을 연구소에 기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까다롭고 힘든 임무였다. 그는 팀북투의 모든 가정집 문을 두드렸다. 그는 원고를 숨겨두지 말고 꺼내오도록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이 아주 강했다. 프랑스의 약탈이 한 세기 동안 이어진 후, 많은 가정이 너무 불안해해서 그 문제에 대해 논의조차 거부했다. 명문가들은 이 책들이 지닌 귀중한 보물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탐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외부인과의 접촉을 철저히 막았다. 의심의 눈초리가 심했다. 구매 또는 협상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아버지가 예전에 한 것처럼 낙타나 당나귀를 타고 사하라 사막을 누볐다. 니제르강을 따라 모터식 통나무배를 타고 졸리바강을 따라 캠프를 옮겨 다니며 외딴 마을의 추장들과 가족 사서들을 방문해 지루한 협상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환대는 차갑기도 하고, 때로는 따스하기도 했다. 그들은 “원고는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그것들로 뭘 하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원고를 팀북투로 데려가고 싶어요, 그곳에 잘 보관할 센터가 있어요. 그곳에서 그것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며 상태를 잘 유지할 거예요. 그들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함께 보고 나눌 수 있도록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설득의 기술이 잘 통하지 않았을 때는 “많은 책이 물 피해와 흰개미로부터 피해를 본다.”라고 지적하며 끔찍한 방치로 인해 생기는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는 돈이 가득 든 여행 가방을 들고 다니며, 그 돈을 아낌없이 써서 모스크와 학교를 짓고, 수집가들과 마을 족장들을 위해 소, 낙타, 염소를 사서 제공했다. 그는 항상 겸손하고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어 주민들과 잘 어울리고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실적이 좋았다. 거의 끊임없는 여행 10년 만에 하이다라는 아흐메드 바바 연구소의 원고 컬렉션을 2만 점이 넘는 작품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오래된 문서에 대한 열정이 있어 원고를 손에 쥐면 어루만지듯 소중히 다루었다. 원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연인을 바라보듯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 박사(사진:유네스코)
1993년, 고된 여행에 지쳐 가족 도서관(마마 하이다라 기념 도서관) 서재 관리만 전념하기 위해 아흐메드 바바 연구소를 사직했다. 3년 후, 리비아 정부로부터 고문서 매입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이것은 위대한 민족 말리의 유산으로 판매용이 절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리비아 정부 제안을 거부했다. 그 직후에 하버드대학의 게이츠 교수가 아프리카에 관한 TV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하러 팀북투에 들렸다. 하이다라는 게이츠 교수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게이츠 교수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이 책들을 손에 쥐고 있었어요. 어릴 적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를 읽을 때부터, 그들은 기껏해야 전설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라고 감동하여 떨면서 말했다. 게이츠 교수는 하이다라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이 다채로운 사람은 사치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매우 박식했다.”라고 인터뷰를 하였다.
1996년,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는 다른 개인 서재(도서관) 소유주들과 함께 이슬람 문화 보호 및 홍보를 위한 필사본 보존 및 진흥협회(Savama-DCI, Safeguarding and Promoting Manuscripts for the Defense of Islamic Culture)를 설립하여 필사본 목록을 작성하고 현대적인 보존 환경을 제공하는 데 힘썼다. 이 해에 미국 포드 재단은 DCI 재단에 60만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는 이 기금으로 팀북투에 두 개의 새로운 도서관 알-왕가리와 알리맘 벤 에사우이티를 건립하고, 자신의 도서관을 개보수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수십 개의 다른 도서관들이 생겨났다. 게이츠 교수는 이후 앤드류 멜론 재단으로부터 보조금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덕분에 하이다라는 가족 도서를 계속 찾아 도서관을 세울 수 있었다.
2012년 4월, 지하디스트들이 팀북투 도시를 장악했을 때, 하이다라 박사는 지하디스트들의 속성을 잘 알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고 조심했다. 그는 일하며 도서관을 열어 두었다. 거리를 배회하는 차가운 눈빛에 수염 난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든 지하디스트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들과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으며, 나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급진파가 곧 확고한 권력을 잡고 반드시 소중한 원고들을 노릴 것이라고 확신해 신속하게 원고들을 숨겨야 했다. 점령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수도 바마코로 몰래 반출을 결심했다.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기에 매우 대담한 작전이 필요했다. 당시 이 책들은 도시 전역 45개 도서관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하이다라가 건립을 도운 도서관이었다. 이 책들은 엄격한 이슬람관과 편협함, 그리고 근대성과 합리성을 혐오하는 무장 세력들이 파괴하고자 했던 이성적 담론과 지적 탐구 전통을 상징했다.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 박사(사진:History Vault)
지하디스트들의 장악이 시작된 지 한 달쯤 지나, 하이다라와 그의 조카 투레는 팀북투 시장에 나가 금속 칸틴(트렁크)를 모두 사들여 마마 하이다라와 도시 곳곳의 다른 도서관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팀북투에서 모든 것을 산 후, 더 남쪽 시장에서 더 많은 트렁크를 사들였다. 그런데 보관할 트렁크가 떨어지자, 그들은 금속 기름통을 사서 강가 마을인 몽티의 장인에게 가져가 장인이 그것들을 두드려 상자로 만들게 했다.
하이다라, 투레, 몇몇 자원봉사자들은 잠긴 문 뒤에서 원고들을 2,400개의 트렁크에 조용히 밀어 넣었다. 지하디스트들이 모든 전력을 차단해서 종종 손전등으로 작업했다. 매일 저녁, 조심스럽게 가족들이 수 세기 동안 간직해 온 깨지기 쉬운 보물들을 트렁크에 가득 채웠다. 하이다라는 5월에 팀북투를 떠나 바마코로 미리 도피했다. 이는 모금 캠페인을 조율하고 지하디스트 위협을 알리려던 말리의 유네스코 대표단을 사전에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런 관심이 팀북투의 점령자들에게 이 필사본들의 가치를 알리는 계기가 될까 봐 정말 두려웠다. 그는 말리의 유네스코 대표단에게 “지금은 그냥 침묵해야 해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것들에 대해 말하지 마세요.”라고 강하게 말했다. 유네스코 담당자는 “알겠어요, 맞아요. 그대로 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곧 협조했다.
고문서 운반 차량(사진:Abdel Kader Haidara)
7월까지 그들은 팀북투 도서관에 있던 35만 점의 원고를 도시 곳곳에 있는 도서관 소유자 친척들이 소유한 안전한 보관소로 모두 옮기는 데 성공했다. 하이다라의 아내 카디자와 여섯 자녀, 그중 조산아로 태어나 서거나 말할 수 없는 아들을 포함한 가족이 두 달 후 수도 바마코에서 그와 합류했다.
고문서 운반 카누(사진:Abdel Kader Haidara)
8월 초, 첫 번째 호송대가 트렁크에 금속 트렁크를 가득 실은 차량으로 도시를 떠나 1,000km 떨어진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매일 한두 대, 어떤 때는 세 대의 차량과 때로는 카누가 수천 장의 양피지를 싣고 출발했다. 팀원들은 다양하게 영리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고서적을 철제 상자에 넣어 채소 운반용 상자, 과일 상자, 쌀자루 밑에 몰래 숨겼다. 그들은 당나귀 수레, 오토바이, 4x4 SUV 차량, 니제르강의 낚시하는 작은 카누를 이용해 반군이 점령된 도시에서 706km(439마일) 떨어진 정부군이 지키는 수도 바마코까지 문서들을 운반했다. 이들은 반군의 검문을 피하려고 한 번에 두세 개의 상자만 실었다.
9월이 되자 소식은 점점 암울해졌다. 살라피스트들이 트리폴리 근처의 도서관을 불태우고 수백 권의 원고를 파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팀북투의 급진파들은 도시의 존경받는 수피 성인들의 무덤을 파괴하기 위해 곡괭이, 삽, 철퇴 등을 동원해 무덤을 부수는 잔혹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팀북투 수피 성인 무덤 파괴(사진:BBC)
‘333 성인의 도시’로 불리는 팀북투(Timbuktu)는 14~16세기 이슬람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1988년 징가레베르(Djingareyber), 산코레, 시디 야히아(Sidi Yahia) 등 3개의 거대한 진흙 모스크와 수많은 영묘(성인들의 무덤)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지 주민들은 오랜 세월을 수피교 성인들의 묘소를 찾아 기도했다.
그러나 엄격한 살라피즘(순수 이슬람 근본주의, 종교적 근본주의)을 따르던 알카에다 연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안사르 딘(Ansar Dine) 대원들은 이러한 성인 숭배 관습을 우상 숭배(블라스페미)이자 반이슬람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진흙 벽돌 묘소(마우솔레움, Mausoleum)를 잔인하게 파괴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야만적인 이 사건을 ‘문화유산 파괴’로 보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소했다.
하이다라 박사는 무장단체 세력들이 더 강해지고 자신감을 얻은 듯 북부 말리 전역의 검문소를 모두 철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팀북투의 도서관 비밀요원들에게 “팀북투의 은신처에 있는 70만 권의 원고를 신속하게 바마코로 옮기라.”라는 긴급한 명령을 내렸다.
국제형사재판소(ICC)(사진:KBS)
이슬람 전통주의 무장단체들이 모두 물러간 이후, 2015년 유네스코와 현지 석공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파괴되었던 14개의 마우솔레움(진흙 벽돌 묘소)은 전통 방식 그대로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2016년, 팀북투의 묘소 파괴를 직접 지휘한 무장 단체 간부 아흐마드 알 파키 알 마흐디(Ahmad al-Faqi al-Mahdi)는 국제형사재판소(ICC)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는 징역 9년 형을 선고받았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인류의 공동 문화유산을 고의로 파괴한 이 행위를 단순한 기물 파손이 아닌 전쟁범죄로 규정해 인류 역사상 중요한 법적 선례를 남겼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