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6〉
황제 만사 무사(Mansa Musa)는 상업과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인 팀북투(Timbuktu)를 영토로 편입하고 모스크, 도서관, 교육기관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해 팀북투는 서아프리카에서 유례없는 문화적, 지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팀북투 도시는 학문과 책의 도시여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학자들을 끌어들였고, 중세 시대의 위대한 학문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말리 제국은 이 도시를 문화와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당시 황제는 단순하게 부유한 왕이 아니라 문명을 건설한 인물로 상코레대학교(Sankoré Madrasah) 등을 후원했다.
제9대 황제 만사 무사의 카이로 행진(사진:나무위키)
상코레대학교의 모태가 된 상코레 모스크(Mosque)는 서기 988~989년경 팀북투의 수석 재판관이었던 알카디 아키브 이븐 마흐무드(Al-Qadi Aqib ibn Mahmud)의 지시로 처음 주춧돌을 놓았다. 이때 팀북투의 한 부유한 말린케(Mandinka) 여성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의 학문 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324년 무렵 팀북투를 지배하게 된 말리 제국의 황제 만사 무사(Mansa Musa)는 메카 순례를 마친 후 상코레 대학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증축했다. 그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저명한 이슬람 학자와 교수들을 초빙해 왔다. 이때부터 상코레 대학에는 본격적으로 수만 명의 학생이 모여드는 대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이슬람 세계와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고대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천문학, 철학, 수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이후 15~16세기 송가이 제국의 아스키아 모하메드(Askia Mohamed) 통치기에 상코레대학교는 최고 전성기를 맞이해 전교생이 2만 5,000명에 달했으며, 400,000점의 수필 원고와 도서를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운영했다. 상코레 대학교는 모스크의 마당이나 학자들의 개인 저택에서 독립적인 학파(마드라사) 형태로 운영되는 독특한 교육 체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1591년 톤디비 전투 이후 쇄락했다.
상코레대학교(Sankoré Madrasah)(사진:나무위키)
황제 무사의 가장 눈에 띄는 유산 중 하나는 안달루시아 출신 건축가 아부 이샤크 알 사헬리 의 도움으로 1327년 지어진 영혼을 위한 건축 징 게레베르 모스크이다. 황제는 건축가에게 약 200kg의 금으로 건축비를 지불했다. 이슬람 종교학자들은 만사 무사를 물질적 부와 문화적 비전을 탁월하게 융합한 인물로 높게 평가했다. 그는 당대의 다른 통치자들과 달리 세상에서 가장 값진 금은 ‘지식’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아랍 역사가들은 말리의 황제 만사 무사가 메카를 다녀간 지 약 10여 년 후,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왕조의 고위 관료들과 목격자들을 인터뷰하여 많은 기록을 남겼다.
알 우마리(Al-Umari)의 《지적 시야의 통로들》은 이 사건의 가장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하는 문헌이다. 그는 카이로의 에미르(총독)였던 ‘이븐 아미르 하집’의 증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말리의 왕 만사 무사가 오기 전에 카이로에서 금 1 미스칼(mithqal, 약 4.25g)은 은화 25 디르함(dirham)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막대한 금을 뿌리고 간 뒤 금값은 폭락했고, 지금까지도 22 디르함 이하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 현상은 그가 다녀간 후 약 12년 동안 지속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진넨 모스크(사진:나무위키)
중세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가, 사상가. 정치가인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은 튀니스에서 태어나 1349년경 북아프리카를 휩쓴 흑사병으로 17세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는 1375년, 북아프리카와 안달루시아의 여러 경쟁 왕조를 오가며 약 20년을 보낸 끝에, 정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알제리 인근의 외딴 요새 칼라트 이븐 살라마(Qal'at Ibn Salama)로 물러나 약 3~4년간 머물며 책도 없이 대부분 기억에 의존해 《무깟디마》(역사서설)를 집필했다. 그는 이후 카이로로 이주해 법학자로 살며 맘루크 조정에서 1384년부터 죽을 때까지 수석 판관을 여섯 차례 역임하였다. 이븐 할둔은 말리 황제 만사 무사의 순례 규모와 그가 동반한 수행원들이 카이로와 메카 시장에 미친 엄청난 파급력을 역사서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슬람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 10디나르 지폐(사진:위키피디아)
알 마크리지(Al-Maqrizi, 1364~1442)는 맘루크(노예 출신 군인) 왕조 시대의 중세 이집트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로 1324년~1325년 사이 이집트 카이로 통화 시장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급격하게 변동하며 발생한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화폐사 기록으로 자세하게 남겼다.
세계지도 카탈루냐 아틀라스의 말리 황제(사진:위키피디아)
1375년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인 카탈루냐 아틀라스(Catalan Atlas)에는 서아프리카 말리 제국의 위치에 왕관을 쓰고 황금 지팡이를 들고 한손에 거대한 황금 덩어리를 손에 쥔 만사 무사의 모습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말리 팀북투 도서관의 고서적(사진:T160K)
서아프리카 말리 제국 팀북투 도서관의 상세한 모습이 유럽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스페인 남부의 나스르 왕조(그라나다 지역, 1492년 멸망)의 부유한 검량사 무어인의 아들로 태어나 출생 직후 스페인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모로코 페스(Fez)로 이주해 성장한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 1494~1554)가 이슬람과 기독교를 오가며 활동하다 저술한 《아프리카 지리지》 덕분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알 하산 이븐 무함마드 알 와잔 알 파시(al-Hasan ibn Muhammad al-Wazzan al-Fasi)이다. 그는 모로코 페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1501년 외교관인 숙부와 함께 아프리카 전역으로 여행을 다니다 송가이 제국(Songhai Empire) 팀북투(Timbuktu)에 정착했다. 1517년 페스의 술탄 무하마드 2세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이스탄불, 로제타, 카이로, 아스완, 메카를 여행했다. 그는 위대한 지리학자이다
1518년 아프리카 순례를 마치고 튀니지로 귀향하던 중 크레타에 가까운 제르바 섬 근처에서 스페인 사략선의 공격을 받아 기독교 해적(corsair)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가는 불운을 맞았다. 그러나 포로가 너무 박식하여 교황 레오 10세에게 선물로 바쳐져 로마 산탄젤로성 감옥에 갇혔다. 노예는 바티칸으로 불려가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를 알현했다. 레오 10세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예술과 지식을 겸비한 사람은 우리 사이에서 언제나 환영받는 존재입니다. 그대는 하인이 아니라 보호자로서 대우받을 것입니다.”라고 위로하며 그의 학식에 감명받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1520년 그는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라틴어로 ‘요하네스 레오(Johannes Leo)’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박식한 여행가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다 아프리카를 여행한 경험과 지식을 이탈리아어로 된 책으로 쓰라고 권유했다. 교황은 여행가에게 존중과 수용의 의미를 담아 자신의 가문 이름인 ‘레오 데 메디치(Leo de’ Medici)‘를 부여해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사진:위키피디아)
그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로마에 9년간 억류되어 로마에서 책을 저술하고 4년간 이탈리아반도 곳곳을 여행하고, 볼로냐에 머무는 동안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의학 사전(단어집)을 집필했다.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세계를 누빈 지리학자로 아랍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도 능통했지만, 다시 이탈리아어를 익히고 아랍어를 가르치며 유럽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가 1526년 로마로 돌아와 아프리카의 지리 원고를 완성했다. 이 책의 이탈리어판은 1550년 베네치아 출판사에서 《아프리카 지리지(Description of Africa)》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북아프리카와 나일 유역의 지리, 문화, 사회상을 담은 기념비적인 역작은 출간 즉시 유럽 전역으로 번역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인기가 있어 5쇄를 하고 1556년 프랑스판과 라틴어판이 출간되고 1600년 영어판이 출간됐다. 많은 사람이 책에 나오는 황금의 말리 제국 팀북투 도서관에 호기심을 느꼈다. 《아프리카 지리지》는 근대 아프리카 탐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유럽에서 아프리카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널리 인용되었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 영감을 주었다.
이후 지리학자 레오 아프리카누스와 《아프리카 지리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그가 방문한 지역을 재검증하고 그의 생애와 행적을 조사하는 학자가 많이 생겼다.
이탈리아의 지리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Giovanni Battista Ramusio)는 방대한 여행기를 저술했는데 《항해와 여행(Delle navigationi et viaggi)》(1550년 초판) 책 1권에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지리지》를 포함시켰다. 소련의 저명한 동양학자이자 아랍학자인 크라치초프스키(Крачковский)는 아랍 지리 문학의 역사를 총망라한 기념비적인 저작 《تاريخ الأدب الجغرافي العربي(아랍 지리 문학의 역사)》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문학적·지리학적 가치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미국의 저명한 미시사학자인 나탈리 제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는 미시사 명저 《트릭스터 트래블(Trickster Travels: A Sixteenth-Century Muslim Between Worlds)》(2006)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삶을 추적하고 연구하여 저술했다.
프랑스의 석학으로 동양학자이며 지리학자인 기욤 포스텔(Guillaume Postel)은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지도 제작과 아랍어 문헌을 집중 연구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이슬람권 연구자인 프랑수아 푸용(François Pouillon)과 독일의 디트리히 라우헨베르거(Dietrich Rauchenberger)를 비롯한 근현대 유럽 학자들은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와 지리학자들을 연구하며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핵심 인물로 다루었다.
Leo Africanus, 《Description of Africa》 1556(사진:노스웨스턴 대학교, Clare Britt)
일부 학자들은 하산 알 와잔(레오 아프리카누스, Leo Africanus)의 출생일을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1483년 또는 1488년으로 추정했다. 그는 중세, 르네상스의 탄생, 안달루시아에서 무슬림 세력의 종식, 이 지역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의 추방, 그리고 종교재판을 목격하며 역사적 사건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살았다. 이 시기는 또한 주요 지리적 발견이 시작된 시기로 안달루시아와의 이별과 페스로의 이주라는 고통도 겪었다. 그는 나스르 왕조와 제국의 흥망성쇠를 목격하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모로코의 알 와타시 왕조의 마지막 시기를 지켜봤다. 오스만 제국이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을 보았다. 종교 철학자인 그는 또한 가톨릭 교회의 투쟁, 마르틴 루터(1482-1546)와 개신교의 확장, 그리고 프랑스 왕이 오스만 제국과 맺은 동맹과 프랑스 교황 레오 10세가 남쪽에서 오스만 이슬람의 침략을 두려워한 점도 주목했다.
그는 여러 철학자, 지리학자, 여행자들과 함께하며 다양한 세계를 경험한 학자였다. 바티칸에 있는 알 카라위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모스크와 교회를 하나로 모았고 메카로 순례를 떠났으며, 무슬림이 많은 남부 지중해 지역과 북부 비무슬림 지역 모두에 거주했고 무슬림 여성과 결혼했다. 이런 이유로 전설에 가까운 인물로 여겨졌고, 일부 동양학자들은 그의 생애와 저작, 필사본의 신뢰성, 특히 8판이 나온 그의 저서 《Description of Africa》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책은 노스웨스턴 대학교(일리노이주 에반스턴) 멜빌 J. 허스코비츠 아프리카학 도서관(Melville J. Herskovits Library of African Studies), 소장 번호 916 L576.2)에 소장되어 있다. 모로코 사람들은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세계의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모로코 출신 인물로 여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