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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 14〉
조선 황해도 서흥 출신의 명나라 환관 윤봉(尹鳳)은 영락제의 신임을 얻은 이후 다섯 명의 황제를 모셨다. 그는 명 황실에서 상선감(尚膳监), 좌소감(左少监)를 거쳐 태감에 자리까지 올랐다. 윤봉은 영락 4년에 조선에 파견되어 궁중 시종과 노래 및 춤을 잘 추는 소녀들을 선발하고, 해동청 물자를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금강산 표훈사(사진:나무위키)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 사행길에 오르면 금강산을 구경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환관 창성(昌盛)과 백언(白彦)은 조선에서 나온 원접사에게 특별 요청해 금강산을 구경하러 떠났다. 이때 윤봉이 흥인문에서 이들을 배웅하고 영접했다. 사신들은 금강산 표훈사에서 유숙하고 산에 올라 동해의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원문】 《세종실록》 36권, 1427년 5월 21일 「昌盛、白彦至金剛山, 宿表訓寺, 登山望海, 遊覽諸寺, 留三日, 供佛飯僧。」
조선왕조 세종은 사신 윤봉을 통해 명나라에 많은 서적을 요청했다. 선덕제는 이에 화답하여 《오경(五經)》, 《사서(四書)》,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하사했다.
세조대왕 진영(1458년 畵記, 해인사성보박물관 소장)(사진:불교중앙박물관)
명나라 사신 윤봉은 나이 71세인 1456년(세조 2, 경태 7)에 조선왕조 세조의 즉위를 승인하는 황제의 조칙과 고명(誥命)을 받들고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5개월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당시 세조는 조선왕조 정통성 확보와 왕위 승인을 도운 명나라 사신들에게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 이후 중국 기록에는 윤봉이 천순(天順) 원년(1457년) 이후의 행적이 남아 있지 않고, 80여 생의 천수를 누리다가 명에서 병사했다고 기록했다. 윤봉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를 원활하게 조율하고 조선의 여러 정치적 현안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도 했지만, 끝없는 탐욕으로 막대한 물화를 요구해 조선에 큰 폐해를 입혔다. 그의 행적은 《명실록(明實錄)》이나 《명사》 〈조선열전〉 등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환관 윤봉은 명나라 사신으로 태종 代에 3회(1406년, 1407년, 1409년), 세종 代에 8회(1425년, 1426년, 1427년, 1428년, 1429년, 1430년, 1431년, 1432년), 문종 代에 1회(1450년), 세조 代에 1회(1456년) 조선을 사신으로 방문했다. 조선왕조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도착한 당일에 태평관(太平館)에서 임금이 하마연을 베풀었고, 이튿날에는 익일연(翼日宴), 닷새째 되는 날에 온짐연(溫斟宴), 사신이 떠나는 날에 전별연(錢別宴)인 상마연(上馬宴)을 베풀어 치하했다.
《명대환관사료장편(明代宦官史料長篇)》(사진:由凤凰出版社)
중국 고대 역사에서 환관은 종종 국정에 종종 개입하였다. 《주례(周禮)》의 〈천관(天官)〉 편에 따르면, 환관 제도는 서주(西周) 시대부터 존재했다. 당시 환관의 지위는 매우 낮아 내정(內廷)의 질서와 기강을 유지하고 황제의 식사나 신변 시중과 같은 일상적인 일을 하며, 제사나 연회 등의 행사를 보조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러나 환관들은 군주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면서 자연스럽게 군주와 친해져 이후 국정에 개입하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明史》 권304~305 〈환관전(宦官傳)〉에는 명나라 국정을 담당했던 35명의 중요 환관이 수록되어있다.
〈환관전(宦官傳)〉 환관 일(宦官一, 권304)에 13명(정화, 김영, 왕진, 曹吉祥, 회은, 왕직, 양방, 하정, 이광, 장종, 유근, 장영, 곡대용)이 수록되었다. 〈환관전(宦官傳)〉 환관 이(宦官二, 권305)에는 총 21명(주요 단독전 14명 + 괄호 안의 부전 인물 7명)이 수록되어있다. 환관은 이방, 풍보, 장경, 진증(부전: 진봉, 고회, 양영, 양종), 사구, 왕안, 위충현, 왕체건(부전: 이영정 등), 최문승, 장이헌, 고기잠, 왕승은, 방정화이다.
《명사(明史)》 〈환관전(宦官傳)〉에 많은 인물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 5명을 선정해 조사했다.왕진(王振)은 명 영종(英宗) 시기의 태감(太监)으로 권력을 남용해 정사를 어지럽히고 1449년 영종이 몽골 에센 타이시의 군대에 붙잡히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变)’을 초래한 권관(權官)이다. 왕진이 전쟁터에서 죽자, 왕진 휘하의 차오지샹(曹吉祥, 조길상)이 권력을 잡고 1452년에는 수도 방위군인 경영(京營)의 감독 업무를 맡았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환관 기구인 24아문(二十四衙門) 중 하나인 사설감(司設監)의 태감(太監) 자리에 올랐다. 그는 훗날 장군 석형(石亨), 수보(首輔) 대학사 쉬유전(徐有貞)과 공모하여 군대를 이끌고 영종(英宗)을 복위시키는 정변을 주도했다. 천순(天順) 연간 초기에 명나라 수도 방위의 핵심인 3대영(三大營)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461년 양아들 차오친(曹欽)이 반란을 일으키자, 차오지샹은 영종이 꾸민 계략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결국 신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인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해 처형되었다.
왕진(王振)(사진:위키백과)
두 번째 인물은 환관 왕직(汪直)이다. 그의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요족(瑤族)으로 명나라 시기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 광시성(廣西省) 다텅샤(大藤峡) 출신이다. 명나라는 세 차례 군대를 파견해 봉기를 진압했다. 왕직은 반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와 내시가 되었다. 어려서 궁에 들어와 헌종이 총애하던 만귀비(萬貴妃)의 거처에서 일하며 총애를 받았다. 그는 영리하고 계책이 많아 명 헌종(성화제)의 총애를 받아 어마감태감(御马监太监)으로 승진하고, 황제 직속 기관 특무기구인 서창(西厂, 西廠)을 성화 13년(1477년)에 설립하고 치밀한 수완과 뛰어난 처세 능력으로 초대 제독에 올라 권세가 막강했다. 그는 동창과 금의위를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서창은 전국을 무대로 활동했으며, 조정의 고위 대신들조차 왕직 앞에서는 절을 해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당시 민간에서는 “천하가 오직 왕 태감(왕직)만을 안다.”라는 풍자가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지나친 무고와 전횡으로 관료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성화 14년부터 여러 차례 요동(遼東)과 대동(大同)으로 가서 전투에 참여하고 적을 물리치며 오랫동안 변방에 주둔했다. 성화 19년에 헌종의 총애가 식으면서 난징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한인(閑人)으로 강등되었으나 평안히 생을 마쳤다.
《성화 14년》 드라마는 48부작으로 제작되어 2020년 방영되었다. 이 작품에서 류야오위안이 연기한 왕즈는 서창 제독이자 어마감태감으로, 기민하고 총명하며 선과 악을 함께 지닌 입체적인 캐릭터로 큰 인기를 얻었다.
《성화 14년》(사진:抖音百科)
세 번째 인물은 환관 유근(刘瑾, 1451~1510)이다. 그는 다른 환관 7명과 함께 팔호(八虎) 패를 이뤄 무종(武宗, 正德帝)에게 오락용 동물, 가희, 투사를 진헌하고 황제를 미복(微服)으로 출행하게 하여 마음껏 놀게 하였다. 그는 황제 결재를 자기 뜻대로 고치고, 권세를 휘두르며 전횡하고 거만했다. 1510년 유근이 황제의 옥새와 황궁 출입용 아패(牙牌) 500매를 수장하고, 옥대와 용포를 소유한 것이 발각되었다. 그가 권세를 잡고 축적한 황금이 24만 덩이(5만 7800냥)에 달해 정덕제는 유근을 하옥하고 능지처참 형에 처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유근은 3,357번의 칼질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권력을 독점했지만, 국사에서 적폐를 지적하고 고쳤으며, 많은 개혁을 수행하여 사람들은 그를 ‘서 있는 천자(立着的天子)’라고 불렀다.
환관 유근(刘瑾, 1451~1510)(사진:抖音百科)
네 번째 인물은 환관 위충현(魏忠贤, 1568~1627)이다. 그는 하북성(河北省) 숙녕(肅寧)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글을 배우지 못해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겨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다. 일찍 결혼해 처와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건달 생활로 음주와 도박으로 빚을 많이 졌다. 그는 비록 무예에 뛰어나고 활을 잘 다루지만,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초라한 신세로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자 22세에 스스로 거세하고 이진충(李進忠)이란 이름으로 황궁에 입궁했다. 궁에 들어온 날부터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해 하루에도 수십 통의 똥지게를 날랐다. 그는 희종(熹宗, 재위 1620~1627)의 유모인 객씨(客氏)에게 아부하며 접근해 금방 태감 눈에 들어 중용되었다.
1620년, 만력제(神宗, 萬曆帝, 재위 1572~1620)가 붕어하고 제14대 황제 태창제(光宗, 泰昌帝)가 등극했는데, 즉위 29일 만에 세상을 떠나 환관 위충현이 극진하게 모시던 주유교(朱由校)가 16살에 제15대 황제로 즉위했다. 천계제는 유모 객씨를 봉성부인(奉聖夫人)으로 봉호를 내리고, 관례를 벗어나 황궁에 계속 머물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릴 때 자기를 돌 보아준 환관이진충에게 위씨 성을 주고 현명한 충신이란 뜻의 ‘충현’이란 이름을 지어주며 사례감(司礼监)에서 일하게 했다. 황제는 매일 목공(木工) 제작에 열중해 신하들은 황제를 목공황제라 불렀다. 1621년에 위충현에게 병필태감(秉筆太監) 직위를 부여했다. 54세의 위충현은 비밀경찰조직인 동창제독(东厂提督)이 되어 조정을 장악하고 거대한 환관 세력을 결성하고는 길을 갈 때 사람들에게 ‘구천세(九千岁)’, ‘구천구백세’라 부르게 하며 어린 황제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환관 3,000명이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환관 위충현(魏忠贤, 1568~1627) 청동상(사진:抖音百科)
1626년, 절강순무 반여정(潘汝禎)이 위충현에게 아부하며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을 짓기 시작해 곧 유행처럼 번져 전국 40여 곳에서 사당이 세워졌다. 이때 사당에는 목상(木像)을 침향(沈香)으로 조성하고, 조각상 뱃속은 온갖 금옥주보(金玉珠寶)로 채웠으며. 매일 상식(上食)과 제사인 향사(饗祀)의 격식을 왕공(王公)과 똑같이 하였다.
한편 위충현은 자신을 반대하는 동림당(東林黨) 신료들을 대거 삭탈관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1627년, 향년 23세의 천계제(天啓帝, 주유교, 1605~1627, 재위 1620~1627)가 갑자기 병으로 붕어해, 동생인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 주검상, 1611~1644, 재위 1627~1644)가 즉위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이 모두 나서 환관 위충현을 탄핵해 숭정제는 그해 겨울에 위충현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태어나 황실의 고향인 안후이성 봉양(鳳陽)으로 유배를 보냈다.
위충현은 황제의 비밀경찰인 금의위(錦衣衛)가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급히 도망하려고 했지만, 허베이성(河北省) 헝수이시(衡水市)에 위치한 부성(阜城)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의종 숭정제는 간악한 환관으로 천계제 재위 시절 전횡을 부린 위충현의 시신을 천 번을 베고 만 번을 난도질하는 천참만륙(千斬萬戮) 극형을 내려 처단했다.
명나라 조정의 권력 암투와 환관 위충현(魏忠贤)이 등장하여 금의위, 동창 등을 다룬 역사 정치극 및 무협 드라마로는 대명천하(大明天下, 2006), 강산풍우정(江山风雨情, 2005), 명말풍운(明末风云, 2005), 영웅, 천누신검(英雄, 天怒神剑, 2002), 명주유룡(明珠游龙, 2023, 30집)이 있어 대명천하(大明天下)와 古代宮庭大劇 명주유룡(明珠游龙)을 감상했다.
산시(陝西)성 위린(榆林)시 신명루(新明樓)(사진:나무위키)
2002년, 중국 산시(陝西)성 문화재 전문가들이 위린(榆林) 지역 박물관 소장품을 감정하던 중, 위린 구시가지 인근 신명루(新明樓)에 보관되어 있던 청동상 하나를 발견했다. 전문가들이 고증한 결과 이 청동상은 명나라 시대의 권력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청동상으로 높이 205cm로, 발톱이 네 개 달린 상상 속의 동물 망(蟒)이 새겨진 비단 예복(蟒袍, 망포)을 입고 있었다.
미간에는 부처님을 연상시키는 백호(白毫)가 있고 수염 없이 말끔한 얼굴을 한 모습이었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당시 연수(延綏) 순무였던 주동몽(朱童蒙)이 이곳에 진남사(鎭南祠)를 건립하고 위중현을 위한 생사당으로 삼았다. 이후 위중현이 실각하면서 전국 각지의 사당들은 버려지고 조각상이 없어졌지만, 이곳은 변방으로 주민들은 영험이 있는 옥황대제(玉皇大帝)로 여겨 향을 피워 숭배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