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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전쟁과 풍도해전(楓島海戰) 2
인천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한 도시이다. 개항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각국의 조계지에 공동묘지를 조성해 ‘청국의지(淸國義地)’ 중국인 묘지와 일본인 묘지가 조성되었다. 일본 제국 해군묘지의 사각뿔 모양의 묘비는 1900년대 초반에 일본인 거류민들의 시가지 확장 과정에서 의정부 찬정을 지낸 이하영(李夏榮) 소유지 등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016년 인천대학교 박진한 교수는 《인천학연구》에 발표한 〈인천의 일본인 묘지 부지 이전과 일본인 시가지 확장 과정〉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본 정부는 1910년 조선 강제 병탄 이전까지 대한제국으로부터 해군묘지, 육군묘지, 신 공동묘지에 이르기까지 세 곳에 묘지를 인가받아 전체 면적이 18,550여 평에 이르렀다.”
만주철도와 경의선(사진:위키백과)
1895년 1월 19일, 일본 제국 해군은 산둥반도 웨이하이에 있는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며 본격적인 대륙 침탈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에 맞서는 러시아 제국은 1896년 시베리아철도를 만주를 지나 불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기 위해 청나라와 협상하여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을 획득했다.
다롄에서 하얼빈 및 長春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지선의 철도 부설권까지 요구해 1898년에 부설권을 확보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이 등장하여 동북아 정세가 크게 요동치자, 장차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미리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제국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전쟁 장기화로 인한 부담이 커져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평화 제안에 응했다. 미국이 개입하여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하여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 해군 조선소에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사진:위키백과)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일 양국 군대는 랴오둥반도를 제외한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 준수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 제국은 일본 측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조건으로 뤼순과 다렌 지역을 조차하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권리를 양도했다, 또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남부를 할양하고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어업권을 일본 제국에 양도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되어 대한제국의 입지가 좁아졌다. 일본은 1905년 11월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공로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은 국민에게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많은 배상금을 받아 낼 수 있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이 길어져 전비 부담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워져 증세를 시행해 국민에게 큰 부담을 강요했다. 일본 제국 국민은 생활고에 빠지면서도 배상금으로 생활고에서 벗어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며 고통을 참아냈다.
도쿄 히비야공원 시민 집회(사진:위키백과)
1905년 9월 5일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일·러 강화조약(講和條約) 반대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러일전쟁 보상에 대한 불만을 가진 청년노동자 수만 명이 집결하였다. 히비야공원은 천황이 거주하는 황거(皇居)와 정부 청사들이 모여있는 지역으로 이날 일본 민중의 정치 참여가 처음 시작되었다. 집회 도중 경찰이 집회 현장을 갑자기 포위 억압하기 시작했다. 국민대회 참여자들은 예상했던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좌절했다.
시위 군중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격분해 ‘일·러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찬성하는 보도를 낸 관청 신문인 국민신문사에 침입해 직원들과 난투극을 벌이고 윤전기 2대를 파괴했다. 이어 내무대신 관저와 공공시설인 파출소, 경찰서 등을 습격하고 불을 질러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히비야 방화 사건(日比谷焼打事件)‘으로 사회적 혼란이 크게 발생하자, 1905년 9월 6일 긴급 칙령(칙령 제205호)에 따른 행정계엄 형태로 계엄을 선포하여 도쿄와 주변 지역에 행정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도쿄에 계엄령이 내려져 통제가 강화되자, 조약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분노와 시위는 지방 대도시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9월 7일에는 고베, 9월 12일에는 요코하마 등 주요 항구 및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폭동과 치안 마비 사태가 잇따라 발생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11월 29일 계엄령을 해제했다. 당시 폭동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으며 2천 명 이상이 검거되어 87명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7인의 교수회’의 가나이 노부유키, 데라오 도루, 도미즈 히로유키 등 지식인들은 “러시아제국이 30억 엔을 배상하고 연해주 및 캄차카반도까지 모두 일본에 넘겨야 한다.”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계속 시민들을 선동했다. 일부 시위자들은 미국 대사관과 미국 교회들을 습격하여 돌을 던지거나 불을 지르며 미국인들에게 테러를 저질렀다.
1905년 10월 22일 연합 함대의 도쿄 개선 풍경(사진:위키백과)
일본 제국은 1905년(메이지 38년) 10월경, 일본 도쿄의 신바시역(新橋駅)을 비롯하여 니혼바시, 아사쿠사 등 도쿄 주요 거리에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아치형 개선문을 세웠다. 나무나 석고 등으로 만든 구조물에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와 일장기로 장식했다. 일본 제국 연합 함대의 도쿄 개선 행사를 앞두고 가을비가 며칠째 이어졌다. 10월 21일 밤에도 멈추지 않았다. 10월 22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하늘이 서서히 맑게 개었다. 가게마다 장식된 국기와 군함 깃발이 펄럭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장관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10월 22일 요코하마 항에 입항하고, 함대 지휘관들은 도쿄로 귀환해 전승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환대를 받았다. 환영나온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 대장(사진:위키백과)
1905년 12월 9일, 도쿄 신바시(新橋駅) 광장은 만주 전선 등에서 복귀하는 군인을 환영나온 군중들로 가득했다. 역 앞 광장에서 凱旋(개선) 행사가 개최되어 일본 제국 육군 제1군 사령관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 1844~1923) 대장과 참모들이 탄 마차와 기마병들이 행진했다. 개선문은 영구적인 건축물이 아니어서 축하 행사가 끝난 뒤 모두 철거되었다.
도쿄 신바시(新橋駅) 광장 만주군 총사령부 퍼레이드(사진:위키백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상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자, 일부 군인들은 “유능한 군인들이 능력을 다해 승리한 전쟁을 부패한 정치인들이 재벌과 함께 파벌 싸움이나 벌여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니,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였다. 당시 일본의 민심은 상당히 격양되어 폭동이 수습되고 군인 환영 행사가 개최되었지만,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반발이 그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가쓰라 다로(桂太郎) 내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원을 받은 군벌(번벌) 내각으로 1901년부터 1913년까지 총 3차례에 걸쳐 구성되었다.
가쓰라 다로 1차 내각(1901. 6. 2 ~ 1906. 1. 7)은 영일동맹(1902년)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대한제국과 제1차 한일협약(1904년) 및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체결했다. 가쓰라 다로 내각은 전쟁 기간 중 108만 8996명의 군인을 전쟁에 동원해, 전사자 8만7360명, 부상자가 38만1313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외교 협상이 미진하여 1906년 1월 내각은 총사퇴하고,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들어섰다.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의 뒤를 이어 출범한 제2차 가쓰라 내각(1908. 7. 14 ~ 1911. 8. 30)은 1910년에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단행했으며, 철도 국유화 정책과 함께 일본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한 대역사건을 일으켰다.
제3차 가쓰라 내각(1912. 12. 21 ~ 1913. 2. 20)은 메이지 천황 사망 후 다이쇼 시대 초기에 성립한 내각으로 야당과 국민의 거센 벌족 타파, 헌정 옹호 구호에 부딪혀 내각 불신의 결의안이 제출되자 단명으로 총사퇴했다.
1900년대 초 한성 거리와 도랑(사진:로버트 네프 컬렉션)
조선의 기후는 1755년부터 1910년까지 16번에 걸친 가뭄과 연속적인 흉년으로 농민들의 생계가 파탄났다. 비가 매년 30%밖에 안 내려 극흉년(極凶年)이 든 해가 많았고, 지방관들은 피해가 커 보고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조선왕조 현종 경신대기근(1670~1671) 때는 이상 기후와 전염병이 발생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1892년과 1893년에는 극심한 연속 가뭄이 들어 농사를 완전히 망쳐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흙이나 나무 껍질로 연명했다.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流民)이 전국을 뒤덮었다. 기록적인 흉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세계적인 콜레라가 제5차~6차 발병과 맞물려 전국 개항장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 선박과 상인들을 통해 콜레라균이 한반도 내부로 빠르게 확산되어,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에서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전염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실제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조선인들은 이 무서운 전염병을 마치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듯한 고통을 준다고 하여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가 몇 시간 만에 극심한 탈수로 사망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며 조정에 개혁안을 제출했지만, 외세의 개입으로 실천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적 위기를 자초했다.
1894년 풍도해전 당시 풍도 섬 주민들은 한밤중 바다에서 강렬한 섬광을 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바다 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시신이 떠올라 풍도로 밀려왔다. 섬 주민들은 바닷가에서 참혹한 수병 시신을 수습해 후망산(胡望山, 後望山, 176m)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원혼(冤魂)을 달랬다. 섬 주민은 매년 명절이 돌아오면 이 무덤들을 찾아가 술 한 잔씩 부어주었다. 한편, 일본 해군은 풍도 후망산에 깃발을 꽂고 전승비를 세웠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동해에는 독도, 서해에는 풍도를 차지해야 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풍도가 군사적 중요한 요충지였다.
스테판 마카로프 사령관(사진:위키백과)
스테판 마카로프(1849~1904.4.13.)는 1899년부터 1904년 초까지 크론슈타트 항구 총사령관 겸 주지사를 역임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은 1904년 2월 1일 마카로프를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스테판 마카로프는 2월 24일에 포르트 아르투르에 도착하였다. 그는 뤼순(旅順) 공방전 당시 참전은 안하고,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다. 뤼순 공방전이 한참이던 4월 13일, 전함이 뤼순 항구로 귀환하던 중 우현으로 돌다가 일본 해군이 전날 몰래 설치한 기뢰와 접촉하여 폭침당해 마카로프 사령관, 종군화가 바실리 베레샤긴, 군종신부 알렉세이 라옙스키를 포함한 약 620~650명이 전사했다. 뒤따르던 러시아 군함들이 신속하게 구조에 나서 80명의 승조원을 구조하였다.
러시아제국 전함 페트로파 블롭스크(사진:위키백과)
일본 제국 해군은 1904년 5월 28일 러일전쟁이 분수령이 된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한 후, 매년 이날을 ‘해군기념일’로 지정해 기념식을 열어 승리를 자축했다. 1929년 5월에 진해 제황산공원에 34.85m ‘일본해전기념탑’을 제막했다. 이어 1931년 5월 27일에는 거제 송진포초등학교에 전승비를 세웠다. 진해요항사령부는 1935년 8월 23일에 거제 사등면 창호리 취도(吹島)에 높이 4.5m 전함 포탄 모형기념비를 콘크리트로 만들어 세웠다. 취도는 원래 큰 섬이었으나 일본 제국 해군이 취도를 러시아 제국 발트 함대로 상정하고 매일같이 포함 사격 훈련을 시행하여 섬 전체 면적 98%가 사라지고 2%만 남았다. 풍도 후망산 전승비는 훗날 풍도마을 주민들에 의해 뽑혀 사라졌다.
취도(吹島)기념비(사진:통영신문)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한국학전공 양주정 선생은 〈동아시아에서 청일전쟁의 기념 방식에 대한 비교연구〉 논문을 제출하여 2025년 7월 국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필자는 이 논문과 참고문헌을 조사하며 청일전쟁에 대한 학자들의 깊이있는 다양한 견해를 알게 되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근식 명예교수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동북아센터장을 할 때 “19세기 후반기부터 한국사가 세계사의 일부로 여겨져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갑오중일전쟁이란 명칭 대신 ‘동북아시아전쟁’이란 거시적 개념화가 요구된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전쟁은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둘러싼 국제적 논쟁과 맞물려 하나의 동심원 속에 농민혁명과 지역전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청일전쟁의 전개(사진:동북아재단)
경기도 안산시는 풍도해전 제125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5월에 안산어촌민속박물관에서 ‘풍도해전 그날’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전쟁의 아픈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다. 안산도시공사는 풍도해전의 지명 복원운동 등 역사 재조명사업을 벌여 2020년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3종에 풍도해전이 수록하게 하고, 안산어촌민속박물관에 설치한 3D홀로그램을 통해 풍도해전 관련 영상을 송출해 풍도해전의 생생한 현장감도 전달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 답사팀은 2023년 4월 6일 풍도를 답사하려고 출발했지만, 짙은 안개로 오후 1시까지 대기하다 출항이 취소되어 풍도행을 취소했다가 며칠 후 풍도를 방문해 주민들과 인터뷰하여 2023년 5월호 뉴스레터에 풍도 방문 기사를 올렸다.
‘풍도해전 그날’ 특별전시회(사진:안산도시공사)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한 중국과 일본은 130여 년 전에 있었던 풍도해전의 역사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군사적으로 발흥하면서 ‘갑오전쟁박물관’을 건립하고 풍도 전투와 청일전쟁의 치욕을 인민들에게 알리며, 강한 전력을 유지했던 북양함대가 당시 서태후를 비롯한 지도층의 부정부패로 인해 대포알이 부족해 막강한 전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패한 사례를 반면교사로 소개했다.
전범 국가인 일본은 각급 교과서에 풍도 전투를 소개하고 가르치고 있다. 최근 국제질서는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과 이란 중동전쟁 등 신 냉전적 질서가 뚜렷해지고 있다. 일본의 방위예산은 한국의 방위예산보다 2배나 더 많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복합경쟁의 시대에 일본의 재무장은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더 가속화하고 안보 악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국제정치에서 우방과 적국의 개념 변화는 국가 간 안보전략의 변화로 이어지며 역내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어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풍도 해전지 전경(사진:안산도시공사)
고대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같은 지역이 반복되는 침공 사례를 볼 수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661년에 14만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고는 돌아갈 때 평택당진항 입구에 있는 풍도에 잠시 머물렀다 서해를 건너갔다. 역사의 섬 풍도는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오랜 기간 잊혀졌다. 풍도는 대부도에서 약 24km 떨어진 섬으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매일 아침 9시 30분에 배가 출항해 대부도를 거쳐 정오 무렵에 풍도에 도착한다. 필자는 풍도를 여러 번 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날씨가 안 좋아 방문하지 못했다. 올해는 풍도 북쪽의 붉은 바위 북배(北背)를 반드시 찾아갈 볼 생각이다.
풍도 해전지와 붉은 바위 북배(사진:동북아역사재단)
필자는 지난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분과회의에서 한반도 해역을 전쟁이 없는 ‘평화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에 동북아시아전쟁과 풍도해전(楓島海戰) 관련 글을 집필하면서, 풍도 후망산 공동묘지에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안내표시판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나아가 이국땅에서 외롭게 스러져간 청나라 수병(水兵)들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수륙재(水陸齋)를 봉행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