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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4.28. 09:40 (2026.04.28. 09:40)

대남 남기 점령하고 북부 식민지와 캄보디아 보호국, 라오스 분열된 루앙프라방과 태국 메콩강 영토 확보...1898년 청 광저우만 조차, 인도차이나 연방 구축

 
코친차이나 & 메콩강 탐험대
프랑스 제국은 大南 응우엔 왕조에서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박해받자, 피에르 루이 샤를 리골 드 제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1807–1873) 제독을 大南 중부에 파견하여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1858년 9월 1일 투란(다낭)을 점령하였다.
코친차이나 & 메콩강 탐험대
 
 
프랑스 제국은 大南 응우엔 왕조에서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박해받자, 피에르 루이 샤를 리골 드 제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1807–1873) 제독을 大南 중부에 파견하여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1858년 9월 1일 투란(다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大南의 끈질긴 저항과 풍토병으로 장기전에 돌입하여 전략을 변경하여 1859년 2월 17일에 남부 자딘(사이공)을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大南의 요충지에서 승리하고 1861년 강화 조건을 응우옌 왕조에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비엔호아를 점령하고 군사 행동으로 군함을 후에로 파견했다.
 
샤를 리골 드 제누이 해군 장관(사진:위키백과)
 
大南 투득 황제는 항복하고 판타인전(Phan Thanh Giản)과 럼주이 히엡(Lâm Duy Hiệp)을 사이공에 파견해 프랑스 제국 대표 루이 아돌프 보나르(Louis Adolphe Bonard)와 에스파냐 대표 카를로스 팔란카(Carlos Palanca)를 만나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1863년 4월 16일, 후에 황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에서 조약 비준서에 최종 서명하여 조약이 확정되었다.
 
후에 황성 오문(사진:위키백과)
 
1867년 프랑스 제국은 大南 남기(南圻)를 모두 점령하고 이 지역을 코친차이나(Cochin China, 1862~1949)로 명명해 통치했다. 프랑스 제국의 통치 방식은 아주 교묘해 大南 남부 3주는 할양받고, 중부는 응우옌 왕조를 존속시켜 저항을 최소화하며, 북부는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 제국은 캄보디아 왕국을 보호국으로, 란쌍 왕국(라오스)이 분열되어 생긴 루앙프라방을 1893년 점령하고, 시암(태국)에 군함을 보내 메콩강 동쪽 영토를 얻고 청나라 광저우만을 1898년 조차해 거대한 인도차이나 연방을 만들었다.
 
코친차이나(Cochin China)(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제국은 코친차이나를 거점으로 인도차이나반도와 중국 남부 윈난(雲南)을 연결하려는 계획을 오래전에 수립했다.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윈난성에 도착할 것이라 믿어 1866년 에르네스테 두다르 데 라그레(Ernest Doudard de Lagrée, 1823~1868) 중령을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조직해 쟈딘(사이공)을 출발해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메콩강 탐험대(사진:위키피디아)
 
육군 장교의 아들인 프랑수아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1873)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856년 브레스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훈련을 마친 후 해군 소위로 임관해 브라질 수역과 태평양에서 근무했다. 이후 1860년 淸國으로 파견되는 프랑스 원정군에 합류했다. 1861년에는 레오나르 샤르네르(Léonard Victor Charner) 제독 휘하에 있었다.
 
그는 스페인 연합군과 함께 남부 大南 방어선인 끼호아 대돈을 1861년 2월 24일 공격하여 요새를 함락하는 전공을 세웠다.
 
프랑수아 가르니에(사진:위키백과)
 
1863년 가르니에는 코친차이나 행정부에 합류하여 사이공의 인근 상업도시 촐론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응우옌 왕조의 관리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제국의 세력 확장과 메콩강 탐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상업적 이익을 강력히 옹호하며 메콩강 탐험 계획을 제안했다.
 
1866년 6월 5일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 해군 중령을 중심으로 한 메콩강 탐험대가 도전에 나섰지만, 넓은 강이 거대한 폭포로 막혀 어떤 크기의 배도 항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탐험대는 고난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영토를 지도화하는 업적을 달성하는 데 만족했다. 1868년 6월경 대장이 윈난에서 병마로 쓰러져 가르니에가 지휘권을 잡았다.
 
메콩강-라오스(사진:위키피디아)
 
메콩강 탐험대가 모은 곤충 컬렉션은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원정대는 윈난의 대리(大理), 곤명(昆明)을 거쳐 양쯔강을 따라 상하이에 들렀다가 2년 후 1868년 사이공으로 돌아왔다.
 
응우옌 왕조는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며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1867년경에는 태평천국의 난 이후 흑기군(黑旗軍) 세력이 베트남 북부로 유입되어 프랑스군과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탐험가 장 드퓌(1828~1912)(사진:위키백과)
 
프랑스 탐험가 장 드퓌(Jean Dupuis)는 생 쥐스트 라 팡디에(Saint-Just-la-Pendue)에서 태어나 론 지방의 타라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1858년, 상인으로 이집트를 여행한 뒤 淸國으로 건너가 윈난의 전설적 왕국과 지리적 잠재력에 매혹되었다.
 
1871년에는 하노이와 하이퐁을 흐르는 홍강(紅江)을 탐험하며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 남부 지역을 처음 알게 되고 서구 사회에 알렸다. 1873년, 뒤퓌는 응우옌 왕조와 무기 거래 및 통행권을 두고 분쟁을 빚었다. 그는 홍강이 윈난성 대리와도 연결되고, 수운으로 활용하기도 용이(容易)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코친차이나 총독에게 보고했다. 총독이 홍강을 개척하라고 승인하여, 그는 응우엔 왕조에 홍강 개방을 요구했다. 탐험가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881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들랄랑드-게리노상을 수상했으며, 1912년 모나코에서 생을 마감했다.
 
홍강(사진:하노이 관광청)
 
인도차이나반도 북부의 홍강은 길이가 1,149km로 세계에서 26번째로 긴 강이다. 이 강은 510km가 베트남 북부를 관통한다. 이 강은 홍하(Hong Ha, 紅河), 까이(Cai)강, 니하(Nhi Ha)강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홍수가 운반하는 많은 양의 붉은 퇴적물이 물을 붉은색으로 변색시키기 때문이다. 중국 윈난에서 발원하여 베트남 북부를 지나 통킹만으로 흘러가는 홍강은 농업과 어업에 젖줄로 강의 토사는 농지에 필수적인 영양분을 제공하고, 해안 삼각주 지역을 넓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선문화 동고(銅鼓)(사진:궁인창)
 
홍강 삼각주 지역은 11개 성과 도시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수만 년 전의 주먹도끼 등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신석기 고대인의 거주 흔적이 강변에서 발견되는 인류 문명의 보고이다. 특히 이곳은 청동기 고대 유물들이 대량 발굴되는 동선문화의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지이다. 기원전 7~1세기의 제례용이자 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고(銅鼓)와 무기, 농기구 등 수준 높은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에는 높이 35cm의 대형 청동북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북 옆면에는 정교한 문양이 있어 당시의 높은 기술력과 사회 구조를 보여준다.
 
홍강 주변 선사 유적지(사진:닌빈성 문화체육부)
 
동더우(Dong Dau) 문화 유적은 홍강 유역 청동기 시대의 초기 단계, 학자들은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와 석기, 청동기 등을 통해 당시의 경제적·사회적 삶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하노이에서 약 70km 떨어진 북부 도시 비엣찌(Viet Tri) 랑까(Lang Ca) 무덤 유적지는 청동기 시대의 동선문화 유물이 대거 밀집된 곳이다. 이 외에도 삼각주 닌빈(Ninh Binh) 등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청동북에 그려진 배 그림(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4대 투득 황제의 응우엔 왕조는 중부 후에(順化, Huế)를 수도로 삼았지만, 하노이는 고대 이래 방어상의 요충지라 프랑스 무기상 뒤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뒤퓌가 무기를 팔려는 대상이 청조에 반기를 든 윈난 平南國 지도자 두문수(杜文秀, 1823~1872)로 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이 너무나 강대해 청나라 조정에 조공하는 응우옌 왕조로서는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두문수는 농민 출신으로 1950년 이후 중국 정부에서 그를 높이 평가해 윈난성에 그를 기념하는 곳이 많이 건립되었다.
 
코친차이나 총독은 홍강 개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콩 원정에 참여한 적이 있는 프랑수아 가르니에 행정관을 1873년 통킹에 파견했다. 가르니에는 몇 주 만에 통킹의 수도 하노이와 홍강 삼각주에 있는 여러 城을 점령했지만, 류융푸(劉永福, 1837~1917)가 이끄는 흑기군에 의해 전사했다. 당시 흑기군은 태평천국의 난에 참가했던 비밀결사조직 천지회(天地會)의 잔당으로 大南과 윈난성(雲南省) 국경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응우옌 왕조 수도 후에(사진:위키백과)
 
류융푸(劉永福)는 한때 광서제독 풍자재(馮子材, Feng Zicai, 1818~1903)와 함께 프랑스군을 물리친 적도 있는 인물이다. 오아충(吳亞忠, 병음: Wu Yazhong. ? - 1869년)은 청나라 말기에 연릉국(延陵國)을 세운 좡족 출신의 반란군 지도자 오능운(吳凌雲)의 아들로 오아종(吳亞終. 吳阿終), 오충(吳忠), 오곤(吳鯤)으로도 불린다. 류융푸는 오아충을 따라 大南 중부 다낭으로 내려와 응우옌 왕조 황제의 승인을 얻어 정주했다. 1868년에 류융푸는 흥화성(興化省)의 보승(保勝, 라오까이(Lào Cai)성 바오탕현)에 근거지를 둔 하균창 세력을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보승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아 주변 토비를 평정했다. 당시 大南 북부 산지는 토비의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고, 류융푸는 대남에 뿌리를 내린 뒤에 독립 세력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침공을 막기 위해 류융푸에게 흑기군(黑旗軍)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류융푸(劉永福)(사진:위키백과)
 
1873년, 통킹(하노이)이 프란시스 가르니에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점령당했다. 황제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류융푸는 600명의 흑기군을 이끌고 가르니에를 토벌하고, 프랑스 점령군을 쫓아내 황제로부터 ‘삼선정제독’(三宣正提督)‘에 임명되고 ’일등의용남작(一等義勇男爵)‘의 칭호를 받았다. 1885년, 청불전쟁이 끝나자, 그는 선각자 장지동(張之洞, Zhāng Zhīdòng, 1837~1909)의 권유로 청에 귀국하며 흑기군을 해산했다. 장지동은 청나라 말기 정치가로 청나라 군대를 독일식 신식 군대로 재편성하고, 경한 철도를 부설하였다. 그는 유교적인 전통을 살리면서 근대화 정책을 취하려는 中體西用을 주장하며 탄광을 개발하고, 아시아 최초의 한양제철소, 방직 공장, 생사 공장 등을 창설하며 청나라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다.
 
호광총독 장지동(사진:위키백과)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 조정은 류융푸(劉永福)에게 흑기군을 결성하여 타이완을 방어할 것을 요청했다.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에 할양한 타이완에서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5월 15일 지방 민병대 사령관 丘風家가 대만 사신(仕紳: 권력과 재력을 가진 지식인, 사대부)들을 이끌고 대만 총독 탕징쑹(唐景崧)과 회담한 후 ‘臺灣 自主’ 독립 의지를 표명했다. 이어 5월 23일에는 대만민주국의 독립선언이 행해지고 5월 25일 독립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류융푸는 민주국 정부로부터 南部守備大將軍에 임명되어 일본제국 군대의 타이베이 침공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다.
 
대만민주국 성립(사진:新臺灣和平基金會)
 
대만민주국 총통 탕징쑹과 국방군사통령 구봉갑(丘逢甲)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11일 만에 비밀리에 샤먼으로 피신하였지만, 류융푸는 타이난에서 항전을 이어가며 대만민주국의 재흥(再興)을 노렸다. 류융푸는 민중으로부터 총통으로 취임을 부탁받았으나, 정중하게 이를 사양하고 총통 권한대행인 방변(幇弁)으로 5개월 동안 대만민주국 정부를 이끌었다. 류융푸는 무장으로도 뛰어났지만, 문학적 소양도 깊고 시문에 아주 능해 어려움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고 한시를 지어 마음을 다스렸다.
 
 
手握干戈護大淸 (수악간과호대청)
雄心不老志常靑 (웅심불로지상청)
 
손에 방패와 창을 쥐고 대청제국을 수호하니
웅대한 마음은 늙지 않고, 그 뜻은 항상 푸르구나
 
 
이 시는 장수가 무기를 들고 청나라를 지키며, 늙지 않는 웅대한 마음으로 영원히 푸른 뜻을 간직하겠다는 老將의 심정을 담은 시다.
 
대만민주국 국기(사진:위키백과)
 
류융푸는 대만민주국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타이난에 의회를 설치하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대만민주국 관보(지폐)’를 발행하며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하지만 군사적인 우위에 있던 일본군이 파상공세를 펴오고 지속적인 저항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청나라 장지동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1895년 10월 일본군이 타이난에 침공하자, 네덜란드 부대가 1634년에 건축한 안핑(安平) 젤란디아(Fort Zeelandia) 고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변장을 한 채 10월 19일 영국 상선 탈레스(SS Thales)에 승선하여 샤먼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일본 해군이 항해하는 상선을 나포하여 수색하고 류웅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영국 상선 함장이 공해상에서 선박 나포와 수색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임을 이유로 들어 강하게 거부하였다. 이 문제는 곧바로 외교 문제로 비화가 되었다. 1895년 10월 23일 주일 영국공사의 강력한 항의로 일본군은 류융푸의 샤먼 귀환을 허용했다.
 
안핑고성(사진:타이난여행국)
 
류융푸는 1902년 광둥성 석진총병(石鎮総兵)으로 임명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광둥민단총장(廣東民團總長)에 임명되어 전투에 출정했다. 1915년 일본이 위안스카이(袁世凱, Yuán Shìkǎi, 1859~1916) 정부에 21개 조항을 강요하며 국권을 침탈하려 할 때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투 참가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평생 무관과 군인으로서 헌신하며 국가에 위기 상황이 생기면 주저함이 없이 노구를 이끌고 분연히 앞장섰다.
 
名將 류융푸(劉永福)의 묘
 
류융푸는 1917년 1월에 광둥성 친저우부(Qīnzhōu, 흠주, 钦州) 친현 자택에서 72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오늘날 중국과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제국과 일본제국 군대에 맞서 싸운 그를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하며 그의 자택과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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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