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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의 인도차이나 침공
프랑스 제국과 베트남(越南)은 오랜 기간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역사는 가톨릭의 선교와 더불어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이에 맞선 越南 민중의 저항이 얽힌 복합적인 역사의 산물이다. 1843년, 세실 제독은 사형 선고를 받은 도미니크 르페브르(Dominique Lefèbvre, 1810~1865) 선교사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극동함대의 함선을 이끌고 越南에 도착해 투란(다낭) 포격 위협을 하였다. 르페브르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로 1834년 12월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35년 大南에 도착했다. 1839년에는 코친 교구의 보좌 사도 대리이자 이사우로폴리스 명의주교로 임명되고, 1841년 8월 1일 코친 교구의 에티엔 테오도르 쿠에노 주교에 의해 주교 서품식을 거행했다. 그는 두 번 투옥되고 1845년 풀려났지만, 제3대 티외찌 황제는 이를 빌미로 더 기독교인을 박해했다.
제4대 황제 투득(사진:위키피디아)
제4대 황제 투득(Tu Duc, 嗣德, 翼宗)은 36년(재임: 1847~1883)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선조의 유지를 지키려고 무척 노력했다. 프랑스 제국은 선교사의 박해를 핑계로 자주 군사 개입을 하였다. 황제는 재위 기간에 西歐와의 무역 및 외교 정책에 반대하며 쇄국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1847년 4월, 세실 사령관은 越南에 수감된 프랑스 선교사를 구출하려고 함선 두 척을 투란(다낭)에 파견하였다. 샤를 리골 드 제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1807~1873) 대령은 1827년 해군에 입대하여 3년 후 소위 계급을 달았다. 1841년 승진하여 극동으로 향하는 함선 빅토리외즈(Victorieuse) 호의 지휘를 맡았다. 1847년 투란 전투에서 라피에르 대령과 리골 드 제누이 대령은 越南 투란을 과도하게 공격하여 여러 척의 목선을 침몰시켜 1,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폴레옹 3세(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1808~1873)는 1851년 쿠데타로 프랑스 황제에 즉위한 후, 대영제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을 일으켰다. 또한 인도차이나를 프랑스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망 아래 1855년 10월에 샤를 드 몽티니를 제국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시암 왕국과 상업 조약을 협상하고, 越南의 가톨릭 박해 문제를 항의하며 응우옌 왕조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명령했다. 1856년 7월, 몽티니 대사는 시암 몽꿋 국왕이 있는 방콕에 도착하여 1856년 8월 프랑스-시암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몽티니는 시암에 두 달간 머문 후 1856년 9월 캄보디아로 향했으나, 여러 장애물과 시암의 개입으로 당시 수도인 우동에서 캄보디아의 앙즈엉 왕을 접견하는데, 실패했다. 캄폿에 머물면서 몽티니는 베트남에 코르벳함 두 척을 파견해 압박을 가했다.
越南이 프랑스의 외교 서한을 단호히 거부하자, 프랑스는 1856년 9월 다낭을 포격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몽티니 대사는 캄보디아와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越南으로 돌아가야 했다. 몽티니는 1857년 1월 다낭(투란)에 도착해 越南 황실과의 협상을 했지만, 실패로 끝나 越南을 경멸하며 군사 개입을 위협한 채 떠났다.
1856년 중반부터 1857년 초까지 몽티니가 시암, 캄보디아, 越南 등 동남아시아 3개국에 파견한 사절단은 이 지역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훗날 1860년대 프랑스의 코친차이나 정복과 프랑스-시암 간 캄보디아 영토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투란(다낭) 폭격(사진:위키백과)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 산후르호(San Jose Maria Diaz Sanjurjo, 1818~1857) 신부가 살해되었다. 디아스 산후르호 신부는 1818년 10월 25일 스페인 루고(Lugo) 지방 산타 에울랄리아 데 수에고스(Santa Eulalia de Suegos) 비고(Vigo) 마을의 소박한 농부 가정 호세 디아스와 호세파 산후르호 부부의 네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열 살 때 루고의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정부가 폐쇄하여 산티아고에 있는 데 콤포 스텔라 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1842년 9월 25일 수도 생활을 선택하고 도미니코회 입회했다. 1843년 9월 24일 오카냐(Ocaña)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복을 받고 서원을 했다.
도미니코회(사진-나무위키)
1844년 3월 23일 카디스에서 서품을 받고 필리핀으로 가기 전에 선교사 길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동료 수도사들과 마닐라로 가는 범선에 승선했다. 마닐라는 스페인 도미니코회 소속 로사리오 성모 관구 신부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대학 중 하나인 산토 토마스 데 아키노 대학교를 운영했다.
1844년 9월 14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여 산토 도밍고 수도원에 있는 동안 학업을 마치고 1년간 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소명은 선교 활동이어서 소망대로 越南 통킨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845년 9월 12일에 통킨(Bắc Kỳ, Đông Kinh, 北圻, 東京, Tonkin) 선교지에 도착하여 越南의 언어, 풍습, 전통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며 ‘득 타이 안(Đức Thầy A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처음에 룩투이에 있는 토착민 신학교에 배정되어 선교 활동을 시작했지만, 민중 봉기로 인해 그곳을 떠나야 했다.
산토 토마스 데 아키노 대학교(사진:위키백과)
그 후 까오싸로 옮겨 선교 활동을 계속하며 신학생을 위해 라틴어 문법책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교구의 필요를 돌보며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듣고, 세례, 혼인성사, 장례식 등을 거행했다. 디아스 산후르호 신부는 헌신과 아낌없는 마음으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나폴레옹 3세는 선교사들에 대한 越南의 박해를 응징하고, 해군 기지를 확보하여 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전쟁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1858년부터 越南 응우옌 왕조와 프랑스는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였다. 리고 드 주누이(Rigault de Genouilly)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은 1858년 9월 1일과 1859년 2월 17일에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하여 식민지화의 시동을 걸고 남부 越南의 요충지에서 응우옌 군대와 격전을 벌여 패퇴시켰다. 1861년에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뚜득 황제가 1862년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불평등 내용이 담겨있는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1.남부 越南의 비엔호아(Biên Hòa), 자딘(Gia Định), 딘 뜨엉(Định Tường) 3개의 성과 풀로 콘도로 섬을 프랑스에 할양한다.
2.越南은 프랑스와 스페인이에게 10년 동안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3.프랑스의 전함과 상선이 메콩강 및 지류를 자유 항해하는 것을 허용한다.
4.프랑스의 越南 내에서의 자유로운 가톨릭 포교 특권을 인정한다.
5.투라느 바라스 꽝옌 3개의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6.越南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구하도록 한다.
오스만 남작(사진:위키피디아)
나폴레옹 3세는 보르도에서 조르주외젠 오스만(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 남작의 업적에 매료되어 1853년 그를 센(Seine) 주지사로 임명하고, 파리 도시를 개방하고 통합하며 아름답게 가꾸는 임무를 맡겼다. 오스만 남작은 약 4만 채의 건물을 건설하고, 노후한 건물을 모두 철거해 교회를 제외한 중세 도시의 모습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제2 제국 시대 파리의 극적인 변화는 국내외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1870년까지 17년간 진행된 오스만 도지사의 사업은 일관된 도시 계획 수립, 공공 편의 시설 확충, 그리고 도시 고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오스만 남작은 파리 시내의 좁은 골목을 넓은 대로로 정비하고, 하수도 시설과 가스등을 설치하여 현대적인 관광 도시로 변모시켰다.
파리 개조 사업은 처음에 파리 시민들로부터 막대한 공사 비용 때문에 비난을 받았지만, 준공 이후 찬사를 받았다. 나폴레옹 3세는 철도망을 3,000km에서 16,000km로 대폭 확충하고, 금융 제도 은행을 확립하여 산업 발전을 주도했다. 그는 1859년 4월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지중해와 홍해 사이 164km를 뚫는 이집트 수에즈 운하 건설을 시작하여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여 해운업을 크게 성장시키고 산업화와 인프라 구축을 통해 프랑스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사진:위키피디아)
제4대 황제 뚜득은 1848년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고 신도들을 가혹하게 내몰았다. 당시 남암신학교에는 산후르호 신부와 알카자르 히 신부가 신학생을 돌보고 있었는데, 급히 그들을 내보내고 종교 예배품을 땅에 묻어 숨겨야 했다. 그는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집도 없고, 옷도, 책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썼다.
1850년 3월, 안(An) 주교는 越南 흥옌(Hưng Yên) 지역의 여러 본당을 순방하기 위해 방문했으나, 관리들의 추격으로 인해 방문 일정이 단축되었다.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저를 찾는 사람을 피해 종종 걸어가야 하고, 때로는 맨발로 걸어가야 하며, 무릎까지 차오르는 진흙을 헤치며 걸어야 했다.”라고 적었다. 주교는 사목 활동을 하다 말라리아에 걸려 까오싸(Cao Xá) 본당의 병상에 오랜 기간 누워 있어야 했다.
하노이 성 요셉 대성당(사진:VINPEARL)
1852년에 신부는 越南 중부 교구의 책임자가 되어 직접 선교를 담당하여 신자 수가 빠르게 증가해 교구의 세례 기록장에는 28,355명의 세례명이 추가되었다. 성부는 “이것은 선교사들이 악마의 온갖 계략에도 불구하고 어려움과 위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사도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참으로 고무적인 보상입니다.”라고 썼다. 1854년, 상황이 비교적 안정되자 안 주교는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보행자 거리에 있는 룩투이(Lục Thủy) 지역에서 ‘성 도미니코 축일’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축일에는 성직자, 사제, 수녀, 신학생, 2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참석했다. 안 주교는 교구 평의회를 소집하고 각 본당 간의 교리 교육 경연 대회를 개최했다.
2025 성 도미니코 축일(사진:탄빈 교구)
1855년, 레 두이 꾸와 까오 바 꾸앗이 황실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종교 박해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가톨릭 신자들의 반란 참여를 독려했지만, 주교가 정부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탓에 동참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지방 관리들은 기독교를 금지하는 왕의 칙령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았다. 디아스 산후르호 신부는 주교 직무를 수행하던 중에 점차 박해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고난을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 나갔다.
남딘 푸나이성당(사진:ivivu.com)
1857년 5월, 한 관리가 수도에서 남딘으로 향하던 도중에 그리스도인이자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남딘에 있는 주교가 서양 선교사이다.”라고 제보해 체포되어 약식 재판을 받고 두 달 간 투옥되었다.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주님의 포로가 된 이 죄인은 영광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에게 인사하고 작별을 고합니다. 이 족쇄와 사슬은 예수님께서 착용하신 선물이며 장식품입니다. 제 영혼은 기쁨으로 넘쳐흐르며, 제 피가 흘려 골고타에서 흘리신 구세주의 피와 합쳐져 제 모든 죄악을 정화하기를 기다립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성 호세 마리아 디아스 산후르호 신부(사진:루고 주 교구)
1857년 7월 20일, 사형 명령이 떨어져 처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기도 시간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여 大南에서 설교하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신도들에게 믿음을 굳건히 지키라고 당부했다. 주교는 남딘(Nam Định)에 있는 ‘일곱 멍에(Las Siete Yugadas)’ 처형장에 도착해 형리에게 30개의 은화를 건네며 “저를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내리쳐 주십시오. 첫째 매는 저를 창조하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大南으로 인도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두 번째는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저의 신자들이 목자의 본보기를 따라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돕는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주 예수님, 저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고 구원을 약속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위로를 찾도록 도와주소서! 주 예수님,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당신께서 언제나 저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아무리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응답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고, 제 삶의 매 순간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소서! 저희를 위해 구원해 주소서! 아멘.” 하고 기도했다.
越南 남딘 흥응아 성당(사진:Mytour)
주교가 기도를 마치고 묵주를 목에 걸자, 간수가 십자가 모양의 말뚝에 묶고, 사형 집행인은 주교의 요청대로 매를 세 번 내리쳤다. 주교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시신은 강에 버려졌다. 얼마 후 한 어부가 강에서 신부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주교의 머리는 오카냐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베트남 117위 성인(사진:정릉동 성당)
호세 마리아 디아스 산후르호 주교는 1951년 4월 29일에 시복되었고, 1988년 6월 19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베트남의 117위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순교자 중에는 96명의 越南人과 에스파냐 출신 수도회 선교사 11명, 10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분으로 보면 8명의 주교와 50명의 사제(유럽 13명, 越南 37명), 59명의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