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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극동함대 세실 제독과 朝鮮 외연도
한국과 프랑스는 일찍부터 교류를 이어왔습니다. 조선을 방문했던 성직자, 학자, 외교관, 기술자, 여행자들이 남긴 여행기와 외교문서, 선교보고서, 논문 등이 이를 증명한다. 양국의 접촉은 종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831년 9월 9일,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 16세(1765~1846)는 조선대목구(朝鮮大牧區)를 설정하고, 브르기에르(Barthelemy Bruguiere, 1792~1835)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주교는 1829년 시암(방콕)에서 주교로 서품되고, 조선 선교를 위해 시암을 출발하여 3년이 지난 뒤에 중국 내륙을 거쳐 만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너무 엄격해 조선 입국이 어려워 계속 만주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1835년 10월 20일 馬架子(내몽골 赤峰市 송산구)의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
내몽골 赤峰市 송산구 성당(사진: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는 1836년 1월에 피에르 모방 신부를 시작으로, 1837년 로랑 앵베르(Imbert, L. M. J. 1796~1839) 주교와 자크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조선에 입국해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1839년(헌종 5년) 1월 기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그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평신도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이다. 그는 정약종의 아들이며 정약용의 조카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문이 몰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여 신앙을 버리지 않고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아홉 차례나 베이징을 왕래하며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교회 재건에 나섰다. 이후 조선대목구 설정을 이끌며 유방제 신부, 모방 신부 등을 영입하고, 한문 교리서를 번역하며 신자 교육에 힘썼다.
정하상은 체포되고 나서, 재상 이지연에게 천주교 신앙을 변호하는 국한문 혼용체로 된 《상재상서(上宰上書)》을 전달했다. 약 3,600자로 구성된 〈상재상서〉는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박해의 부당함을 알리는 글로 “천주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천주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천주교인들은 음란하거나 재물을 탐한 적이 없고 윤리적으로도 결백하다.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백성을 죽이는 것은 정말 가혹한 일이다.”라고 천주 신앙의 자유를 호소했다.
천진암 성지 정하상 묘(사진:가톡릭신문)
정하상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순교한 78위 성인들의 행적을 평신도 지도자인 현석문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신앙 증언록 《기해일기(己亥日記)》를 남겼다. 증언록에는 박해의 현장을 목격하거나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성실히 수집해 순교자들의 이름, 신분, 체포 과정, 고문 내용, 마지막 유언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기해일기》는 파리 외방전교회로 전달되어 한국 순교자들이 성인으로 시복, 시성되는 데 결정적인 증거 자료가 되었다. 당시 신부들은 조선 입국 후 짧은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신자에게 성사를 집행하며 교세를 확장하고,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사목 활동에 힘썼다.
앵베르 라우렌시오(범세형, Imbert) 주교는 43세로 신자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서신을 남기고 동료 신부들에게 자수를 권유하고 체포되었다. 모방 베드로(나 백다록, Maubant, 1803~1839) 신부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29년 5월 사제로 서품되어 3년 후 중국 泗川省 포교지로 파견되어 가던 중 조선의 초대 교구장을 만나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경기도, 충청도의 교우촌을 돌며 영세를 주고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생각하여 1839년 12월에 신학생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츠시꼬 사베리오 세 소년에게 라틴어를 가르친 뒤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샤스탕 야고보(Chastan, 1803~1839)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이들 세 명의 선교사는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한강 새남터에서 목을 베어 군문에 매다는 엄한 형벌을 받았다.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 반열에 올렸다.
프랑스 7월 혁명(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왕국은 루이 18세 사후 즉위한 샤를 10세가 부르봉 왕조의 전제 정치를 부활시키려고 망명 귀족 보상, 성직자 권한 강화 등 반동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언론의 자유 억압, 의회 해산, 선거권 제한 등을 담은 칙령을 7월 26일 발표하여 시민 계급의 거센 분노를 샀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샤를 10세의 전제 정치와 언론 탄압에 항의하여 7월 27일 민중 봉기를 시작하여 ‘영광의 3일 (Trois Glorieuses, 7월 혁명)’이라는 치열한 시위와 투쟁 끝에 부르봉 왕조의 군대를 물리쳐 샤를 10세가 축출되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1773~1850)가 왕으로 추대되어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 1839년 조선에 입국해 포교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기해박해가 발생하자, ‘7월 왕정’의 솔트(Soult) 내각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조선에 군함을 파견하여 응징하기로 결의하였다.
루이 필리프 1세(사진:위키백과)
조선왕조의 외교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 중 하나는 프랑스 해군의 장 바티스트 토마 메데 세실(Jean-Baptiste Thomas Medee Cecille, 瑟西爾, 瑟西耳, 1787~1873) 제독이다. 세실은 1787년 10월 16일 루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해군에 입대할 생각을 가졌다. 소년으로 상선에서 일하며 실무를 익힌 뒤 1804년에 마르세유에서 사관후보생으로 해군에 입대했다. 1816년 해군 중위, 1829년 프리깃함 함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1837년에 7월 1일에 프랑스 동부 브레스트 항을 출항해 대장정에 나섰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프랑스 포경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고 선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32문 함포를 장착한 3개의 돛대를 가진 코르벳함인 에루앙호(Héroïne)를 이끌고 대서양, 호주, 태즈메이니아, 남태평양을 항해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항해 중 식량과 삼나무 판자, 못, 철, 낚싯줄, 닻, 케이블을 포경선에 전달하고, 프린스 에드워드 제도와 인도양 남단의 크로제 제도(Crozet Islands)를 측량했다. 크로제 제도는 마다가스카르 남쪽, 남극 대륙에서 약 2,400km 떨어진 화산섬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섬에는 킹펭귄, 마카로니펭귄 등 수백만 마리의 바닷새와 코끼리바다물범이 서식하는 주요 생태 보호구역으로 거주민 없이 과학 기지(알프레드 포레 기지)만 운영되고 있다.
에루앙호 항해 루트(사진:위키백과)
에루앙호는 1838년 1월에 호주 남단 올버니 항에 정박하며 보급을 수행했다. 이어 세계에서 26번째로 큰 섬인 태즈메이니아 호바트(Hobart) 근처에서 정박하고, 2월 24일 시드니 항으로 항해했다. 4월 28일에는 뉴질랜드 북섬 베이오브 아일랜즈에 입항했다. 당시 근해에는 프랑스 포경선 13척이 조업하고 있어 포경선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하고 항구로 돌아왔다.
코르벳함(사진:위키백과)
세실 제독은 채텀 제도에서 프랑스 포경선 장 바르호(Jean Bart)의 선원들이 학살당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즉시 3척의 배를 동원해 1838년 10월 17일 채텀 제도 해상에 도착해 진상 파악에 나섰지만, 하나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고 6일 만에 돌아왔다. 이후 타이티를 항해할 때는 아주 극심한 폭풍우을 만나 아주 힘든 고난의 항해를 하였다. 이후 남미 발파라이소에 정박하고, 1839년 3월 중순 다시 출항하여 포클랜드 제도, 생트 카트린 섬을 경유하였다. 5월 9일부터 27일까지는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정박하며 정비를 하였다. 에루앙호는 1839년 7월 25일에 출발지였던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브레스트 항구에 입항했다.
브레스트 항구(사진:Visit France)
1841년, 세실 제독은 프랑스 극동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청나라 파견 임무를 받아 에리곤호(l’Érigone)에 승선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대영제국이 청나라와 제1차 중·영전쟁 주이었다. 사령관이 승선한 에리곤호는 1836년 9월 취역한 3등급 프랑스 군함으로 길이 약 49m, 폭 12.5m 크기에 포 46개 문을 무장한 소형 구축함으로 당시 최신형 군함이었다.
1841년 12월, 세실 제독은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벤자멩 브뤼에르(Benjamin Brueyre) 신부를 태우고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군함에는 청나라로 가는 라자로회 다갱, 프리바 신부도 함께 탑승했다. 1842년 2월 초순, 세실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리브와(Napoléon Libois) 신부에게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의 명으로 아돌프 필리베르 뒤부아 장시니(Adolphe Philibert Dubois de Jancigny) 전권대사를 보필하며 극동 조사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왕 헌종에게 프랑스와 교역하는 조건에서 통상조약을 맺고,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제안할 생각이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해로를 지배하기 위해 일본의 섬 하나를 점령하고 조계지를 조성해 극동 아시아와의 자유 무역을 프랑스가 독점할 계획을 추진하려고 한다. 조선과의 교섭을 목적으로 통역을 담당할 조선인 한 명을 통역인으로 구해달라.”라고 공식 요청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사진:위키백과)
마카오 교구장 선종 후 극동대표부장으로 임명된 리브와 신부는 조선 선교지에 대한 새로운 개척이 필요해 세실 제독에게 “조선 학생 한 명과 프랑스 선교사 한 명을 주겠다.”라고 말하고 김대건과 조제프 앙브르와즈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를 추천했다. 리브와 신부는 세실과 나눈 대화를 1842년 2월 12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에게 보냈다. 신학생 김대건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1842년 2월 15일 프리깃함 에리곤(Erigne)호에 올랐다. 그러나 세실 제독은 대영제국과의 분쟁을 염려해 조선과의 교섭 시도를 중단해 통역관으로 선발된 김대건의 조선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독은 본국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 유역을 탐사하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김대건은 1845년 페레올 주교 일행과 조선에 들어왔다가 조선의 소식을 상하이 신부에게 전하려고 1846년 어선을 타고 백령도 바다로 나갔다가 검문하는 포졸에게 잡혀 해주 관아로 이송되어 혹독힌 문초를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축복 유리화(새남터)(사진:가톨릭신문)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피에르 기욤 기조(François Pierre G. Guizot, 1787~1874)는 역사가, 정치가로 1830년 7월 혁명부터 1848년 루이 필리프 1세의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을 수립한 자유주의 사회주의 혁명인 2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1840년부터 7년간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47년 총리에 올라 아시아 식민지 개척을 구상했다. 그는 1843년 세실 제독에게 大越(베트남)에 함대를 파견하라고 명하고, 프랑스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필리핀 남서부 술루 해에 있는 바실란(Basilan) 섬을 점령하라고 지시하였다. 세실은 장관 명령에 따라 섬을 점령하였으나, 에스파냐가 Basilan 영유권을 주장해 실패로 끝났다. 세실 제독은 1844년에 해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외무장관 피에르 프랑수아 기욤 기조(사진:위키백과)
청나라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장바티스트 세실은 1846년 6월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洪州) 연안의 보령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1839년 기해사옥에서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 샤스탕(Chastan), 앵베르(Imbert) 사제를 처형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는 공식 서한을 조선왕조에 보내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때 조선 비변사는 항의문을 받으며 이 사건을 ‘조선영해 침범사건’으로 강하게 대응했다. 세실 사령관은 “기해박해와 관련해 조선 조정 입장을 이번에 들을 수 없을 테니, 내년에 전선(戰船)이 특별히 여기에 오거든 귀국에서 그때 회답해 달라. 이후에 우리나라의 사민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귀국은 반드시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물러났다.
충청도 홍주(洪州) 외연도(外煙島)(사진:보령시)
조선의 외연도를 떠난 세실 사령관은 일본과의 수교 교섭을 타진하기 위해서 일본 규슈 나가사키(長崎)로 항해하여 외항(外港)에 대기해 입항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막부의 강력한 쇄국 정책과 관리들의 입항 거부로 상륙에 실패했다.
나가사키(長崎)(사진:上野彦馬)
세실 사령관의 함대는 나가사키에서 물러난 뒤 규슈 연안의 지형과 방어 태세를 정탐하며 규슈 가고시마 남단으로 항해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