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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수집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4.20. 00:37 (2026.04.20. 00:24)

龍湖 趙存性의 삶과 意識世界

 
靑丘永言(珍本)에 수록된 呼兒曲四調並詩 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龍湖 趙存性(1554~1628)에 관한 연구는 실상 미미한 형편이다.1) 이처럼 연구가 부진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핵심은 그의 문집이 부재했던 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知敦寧府事(인조 4)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생활을 거쳤으나, 시조 작품인 呼兒曲 이외의 시문이나 문집은 그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龍湖 趙存性의 삶과 意識世界
오선주*
 
<차 례>
1. 머리말
2. 당쟁의 파장과 개인적 기질
3. 전원에서의 삶과 의식세계
3.1 순응 자연적 생활
3.2 ‘오’의 공간과 삶 향유
4. 맺음말
 
 
1. 머리말
 
靑丘永言(珍本)에 수록된 呼兒曲四調並詩 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龍湖 趙存性(1554~1628)에 관한 연구는 실상 미미한 형편이다.1) 이처럼 연구가 부진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핵심은 그의 문집이 부재했던 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知敦寧府事(인조 4)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생활을 거쳤으나, 시조 작품인 呼兒曲 이외의 시문이나 문집은 그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근래에 權純會2)에 의해 조존성의 문집인 龍湖遺集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즉 楊山趙氏世稿3) 가운데 卷之二에 詩序, 漢詩 37題 46首, 呼兒曲四調, 疏, 祭文, 呈文, 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卷之三에 부록으로 李安訥․趙緯韓․李廷龜가 지은 挽章, 張維가 撰定한 行狀, 金尙憲이 찬정한 墓誌銘(幷序)과 神道碑銘(幷序), 申翊聖이 찬정한 墓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楊山趙氏世稿는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龍湖稿로 전해지고 있는데, 김상헌이 찬정한 묘지명을 참고하여 간략히 쓴 서문식의 글4)과 漢詩 8題 9首, 呼兒曲四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집의 발견은 조존성의 문학적 면모는 물론 16~17세기의 접점에 위치한 사대부들의 삶과 정치현실의 단면을 조명해 볼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주지하듯이, 이 시기는 전란이라는 역사적 격류에 이어서 정치적 주도권에 따른 당파들 사이의 쟁투가 점철되던 상황이었다. 특히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득세한 大北派들이 정권을 횡행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당쟁의 폐해가 극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존성 또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削奪官職, 放逐, 歸去來 등의 정치적 행로를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조존성과 그의 문학 작품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龍湖遺集에 수록된 詩文은 江華府史(1601)로 부임한 후, 즉 48세 이후에 쓴 원고만을 모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세계 전모를 살펴보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존성은 詩序 를 통해서 그 연유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중년에 사방에서 벼슬을 하며 세사에 마음을 두었는데, 혹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때때로 불평한 심기를 울린 것이 많았던’5) 만큼 많은 글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만 정치적 시련, 곧 ‘禍患이 창졸간에 닥쳐 상자에 넣어둔 평생의 글을 한꺼번에 불태워버리고’6)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현전하는 문집에는 우연히 서재에서 발견한 강화도 부임시의 초고 반절과 壬子年(1612)의 燕路日錄 약간 편, 그리고 癸丑獄事(1613) 이후 강호에서 노닐며 쓴 작품만이 수록되어 있다.7) 이에 ‘글을 열심히 읽은 탓으로 병에 걸려 거의 10년 동안을 신음할’8)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분량 면에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 청․중년기의 시문을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존성이 밝힌 언급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평생의 글을 소각시킬 정도로 그의 이념과 정치현실이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鳴不平者 多矣]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정치적 시련으로 야기된 번민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시를 짓고 있다[排悶強裁]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정치적 시련을 계기로 자신이 평소에 견지한 이념과 정치현실이 어긋남을 절감하고, “유가의 전통적 처세 방법의 하나이기도 한 ‘獨善其身’의 길을 택하는 것”9)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조존성 스스로는 ‘非所謂吟風詠月’이라 일컫지만 새로 쓴 시들은 자연에 최대한 근접하여 흥취에 젖은 가운데 그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 呼兒曲四調並詩 가 창작될 수 있었던 계기10)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고는 조존성의 정치적 시련의 구체적인 실상을 탐색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향리로 귀거래한 후의 삶과 그 속에서 형성되었을 의식세계에 대하여 시조와 한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전북대학교
1)  조존성에 관한 독립적인 논문은 송종관의 趙存性의 <呼兒曲>에 대하여 (尙州文化硏究 第3輯, 尙州文化硏究所, 1993) 한 편 뿐이다. 그 외에는 대부분 조선 중기의 시조 작가나 작품을 논하는 자리에서 단편적으로만 언급된 정도이다.
2)  權純會, 田家時調의 美的 特質과 史的 展開 樣相 , 고려대 박사논문, 2000, 38쪽.
3)  編者, 編年은 미상이며, 전체 編制는 다음과 같이 총 8명의 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卷之一 : 華山遺集(趙末生), 卷之二~三 : 龍湖遺集(趙存性), 卷之四 : 晩醒遺集(趙昌遠), 卷之五~六 : 藥泉遺集(趙啓遠), 卷之七 : 傭隱遺集(趙胤錫), 卷之八~十一 : 藏六堂遺集(趙龜錫), 卷之十二~十六 : 楓溪遺集(趙泰東), 卷之十七 : 禮賓寺正遺集(趙泰相)
4)  이 글의 끝부분 “得遺稿舊篋中 以若干篇 謹錄于左”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조존성의 문집이 언제 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문중에서 전해지던 그의 문집 중 일부 작품만 수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권말 楊山趙氏世稿跋 의 “歲舍丁亥至月下浣……泰東謹識”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일단 1707년(숙종 33)까지는 그의 문집이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5)  中年 遊宦四方 世事關情 或因憂愁鬱悒 有時鳴不平者 多矣( 詩序 , 龍湖遺集.)
6)  禍患迫於倉卒 平生文字 藏在篋中者 一擧而付之撚火( 詩序 , 龍湖遺集.)
7)  偶閱書箱 淂在江都時 草稿一半 曁壬子燕路日錄若干篇 合而書諸一冊 以爲後覽 續於流離顚沛之中 亦不無優遊水石之 日非所謂吟風詠月 而排悶強裁之者( 詩序 , 龍湖遺集.)
8)  因劬書得疾沈綿者 近十稔( 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敦寧府事兼知義禁府事趙公行狀, 龍湖遺集.)
9)  金興圭, 욕망과 형식의 詩學, 태학사, 1999, 157쪽.
10)  조존성과 신흠(1566~1628)은 동일하게 시조 한역시를 남기고 있다. 이들 둘은 계축옥사 때 함께 방축되었는데, 조존성의 셋째 아들 趙啓遠이 신흠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고, 신흠의 둘째 아들 申翊全이 조존성의 둘째 아들 趙昌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겹사돈의 관계를 맺었다.( 貞夫人李氏行狀 , 象村集 卷29 참조.) 이로 미루어 볼 때, 시조 향유의 측면에서 서로 긴밀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신흠은 放翁詩餘序 에서 시조를 짓게 된 이유를, “사물을 만나 읊을 만한 점이 있으면 馮夫의 무모함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병이 있어, 마음에 맞는 것이 있으면 문득 詩章을 이루었고, 그래도 남음이 있으면 우리말로 지어서 곡조를 붙이고 기록했다. (惟遇物諷詠則 有憑夫下車之病有所會心 輒形詩章而有餘 繼以方言而腔之而記之)”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조존성 또한 이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2. 당쟁의 파장과 개인적 기질
 
조존성이 겪은 몇 차례의 정치적 시련11) 중 가장 불우했던 시절은 계축옥사 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이 남다른 형세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당시의 과정을 온전히 재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료가 풍부하지는 않으나 여러 史的 기록에 의하면, 그가 방축된 죄목은 계축옥사 사건보다는 오히려 臨海君의 獄事(1608) 사건과 더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곧 시련의 발단은 계축옥사 1년 전, 冬至使의 上使로 燕京에 다녀온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아래의 기록에서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가) 광해 임자년(1612)에 琉球國 사람 馬喜富 등 8명이 표류하여 제주도에 이르자, 옷과 양식을 주고 동지사 조존성에게 맡겨서 압송하고 황제에게 연유를 아뢰게 했다. 이어 유구국에 자문을 보내 알렸다.12)
 
나) 탑전에서 양사 장관이 아뢰기를, “지난 해 동지사의 聞見事件을 보건대, 그 속에 중국 조정의 相公이 시를 지어 주면서 嚴․萬에 대한 일을 말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사신의 입장에서는 呈文하여 이를 해명했어야 마땅한데도 멍청하게 살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專對해야 할 책임을 수행치 못한 것으로서 지극히 잘못한 것입니다. 동지사 趙存性, 李成吉과 書狀官 權盡己 모두에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시의 내용을 보면 嚴․萬이 우리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조사를 공평하게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한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동방에 준 오동잎 결국 현실화되었는데, 율무는 예로부터 한나라 신하 그르쳤네.[東方桐葉竟成眞 薏苡從來誤漢臣]”란 구절이 있었다.)13)
 
 
먼저 가)의 기록은 조존성이 燕行에 오르게 된 경위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해야 할 것은 ‘황제에게 연유를 아뢰게 했다.’ 는 언급이다. 즉 단순히 표류해 온 사람을, 그것도 다름 아닌 중국으로 압송하게 된 구체적인 ‘연유’는 무엇인가?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조존성이 귀국한 직후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이 뒷받침해 준다. 이 상소문에서, “우리나라는 倭奴에 대하여 만세토록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의 관계가 있지, 조금이라도 交隣할 의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잘못되고 억울한 말이 중국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온 나라의 臣民이 차마 듣지 못할 바입니다.”14)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이때의 ‘연유’는 왜국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발생한 외교상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으로부터 왜국과 친밀하게 교류한다는 의심을 받자, 조정은 이 부분을 해명하기 위해 사신으로 조존성 일행을 파견하였고, 그 과정에서 때마침 표류해 온 유리국 사람을 그 본보기로 압송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조존성의 연행은 지극히 외교적인 차원의 사신행차였고, 그만큼 주요 임무는 왜국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임무와는 달리 조존성은 귀국 직후, 나)의 ‘見聞事件’ 내용이 불거지면서 역적의 수괴로 지목되어 의금부에 ‘압송’당하고 만다. 곧 중국 相公이 지어 준 시 가운데 嚴․萬에 관한 부분을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한순간에 사신으로서 ‘專對해야 할 책임’이 왜국과의 문제에서 嚴․萬의 일로 전환된 것이다.
 
이에 嚴․萬의 일과 관련된 사건의 전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관의 評과 중국 相公의 한시가 보여주듯이, 이 일은 뇌물수수와 관련이 깊어 흥미롭다. 더욱이 이 뇌물수수가 동방의 왕위 책봉 과정 속에서 행해진 폐단이라는 관점이 부각되고 있어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곧 相公의 한시 중에서, ‘오동잎’15)과 ‘율무’16)는 각각 왕위와 뇌물의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다. 이 의미를 감안하면, 한시의 내용은 ‘조선에 왕위를 봉해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사신인 嚴․萬이 뇌물을 받아 공평성을 잃었다.’는 정도로 풀이된다. 이때 ‘왕위 책봉’은 광해군의 왕위 인준을, ‘嚴․萬’은 遼東都司 嚴一魁와 自在州知州 萬愛民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 일의 실마리는 임해군의 옥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가 승하(1608)하자 조정에서는 李好閔, 吳億齡 일행 등을 중국에 파견하여 광해군을 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광해군이 長子가 아닌 次子라는 이유17)로 책봉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사신은 “장자인 임해군은 중풍으로 여막을 지키고 있고, 또한 왕위를 사양하였다.”18)라고 응대하였는데, 오히려 이 말이 화근을 초래하고 말았다. 중국은 “여막을 지키고 있다면 병중이 아닐 것이고, 다투지 않았다면 어찌 사양이 있으리오.”19)라고 반문하면서 더욱 의심을 품었다. 마침내 진위 여부를 직접 조사하기 위해 엄일괴, 만애민 두 差官을 파견하였고, 급기야는 임해군과 직접 面質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임해군은 병으로 미친 체하면서 진술하였는데, 문제는 이 진술이 北人들의 모략과 술수에 의한 강압 속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데 있다. 즉 북인의 압박을 받은 임해군은 그들이 미리 일러준 대로 진술하였으며, 특히 모반-왕위 다툼-과 관련한 부분은 자신의 노예들이 은밀히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둘러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차관은 이 말을 다 사실로 믿지 않고 미심쩍어 했으나, 타고난 성품이 탐욕스러워 수만 냥의 은을 받고는 평이하게 조사하고 돌아갔다.20) 이후 임해군은 화근을 없애고자 한 鄭仁弘․李爾瞻 등에 의해 喬桐島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상의 내용이 嚴․萬의 일과 연관된 사건의 전말인데, 중국 相公의 시는 바로 이때의 상황을 ‘오동잎’과 ‘율무’로 비유하여 풍자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일을 도모하고 집권세력이 된 북인으로서는 당연히 ‘놀라움을 금치 못’할 내용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이다. 결국 이 일을 은폐시키기 위해 ‘呈文하여 이를 해명’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조존성을 탄핵하고, 뒤이어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루시켜 방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존성이 귀국한 지 무려 3일 만에 국문을 시작하여21) 한 달 반 만에 파직시킨 사실은 북인이 얼마나 嚴․萬의 일을 은폐시키고자 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조존성은 왜 嚴․萬의 일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비록 단편적인 사건이지만 조존성의 성격이나 삶, 곧 개인적 기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보다 앞서 조존성이 正言이었을 당시, 광해군이 생모추존 의식을 거행하려 할 때 非禮임을 논한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관계22)로 비슷한 시기에 사간원에서 올린 글을 대신 살펴보기로 한다.
 
임금은 막중한 종묘를 이어 받았으니 의리상 사친을 돌아보아서는 안 되며, 후궁은 둘을 높이는 분수가 없으니 예의 규정을 어겨서도 안 됩니다. 중자의 사당 성풍의 수의는 춘추에서 매우 엄하게 비방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前古에 바꿀 수 없는 정한 理致입니다. …… 어버이를 높이는 도는 예에 합하는 것이 귀하고 名號를 높이는 것은 체제에 맞는 것이 합당한 것이니, 예에 어긋나는 거조는 誠孝에 결함이 될 것이고 분수에 넘치는 지위는 신명도 거북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새로 즉위하여 처음을 바로잡고 움직일 때마다 예법을 따라야 하는 이때에 어찌 마음 내키는 대로 거행하여 성덕에 누를 끼치려 하십니까. 삼가 성명께서는 인정과 예문을 참작하시어 예법을 따르소서.23)
 
위의 글은 임금이 행해야 할 도리를 강조하면서 생모추존의 불가함을 논하고 있다. 그 근거로 禮의 ‘바꿀 수 없는 정한 理致’를 내세우고 있다.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먼저 의리상 사친을 돌아보는 행위와 후궁둘을 높이는 의식은 예와 체제에 부합하지 않는, 이른바 춘추에서도 비난했듯이 列國의 잘못된 풍습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답습할 경우 예법이 무너지고 윤리가 혼탁해져 성인에게 죄를 얻음은 물론 임금 자신을 비하시키는 일이 됨을 곡진히 간언하고 있다. 끝으로 이를 면하는 방도는 ‘마음 내키는 대로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예법에 순히 행하는 것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글은 이른바 順理論에 입각하여 생모추존을 반대한 상소문이다.
 
조존성 또한 여기에 근접한 논지로 생모추존이 非禮임을 피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이 논지를 고려하며 앞의 嚴․萬의 일을 살펴보면, 이 역시 예법에 어긋난 경우에 해당한다. 그 근거의 하나는 공식적인 세자로 인준 받지 못한 次子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正道가 무너졌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차관과 신하가 소홀히 대처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뇌물수수라는 윤리적 부정행위를 배태했다는 점이다. 이렇다고 할 때 嚴․萬의 일은 어느 한사람이 아닌 모두의 잘못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과 중국 모두 예법에 어긋났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즉 중국 相公의 한시가 자국의 차관까지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듯이, 여기에는 서로를 비난하는 잘잘못의 판단이 끼어들 수 없고 오직 이치에 어긋난 사실만이 자리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과 판단이 해명을 하지 않은 하나의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行狀에 의하면, 조존성은 “마음가짐이 충실하고 꾸미는 일을 하지 않을 정도로 평소 정중한 자세를 견지한 채 말하는 일이 드물었고, 상례나 제례 모두 반드시 예법에 의거하여 행했음”24)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문집에는 程文 세 편25)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중국 禮部에 올린 글이다. 주된 내용은 관복을 개정하는 일과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焰焇와 硫黃 등을 청하는 것인데, 이 역시 예법에 의거하여 진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보건대, 조존성은 예법과 이치에 따라 행하고자 한 순리주의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존성의 정치적 시련은 결국 외적으로 때늦은 임해군의 옥사 사건의 파장에 휘말리면서 시작되었고, 연이어 벌어진 계축옥사 때 西人의 일원이라는 배경이 지엽적으로 작용하여 방축된 것으로 요약된다. 즉 당쟁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동시에 내적으로는 예법과 이치에 따르고자 한 개인적 기질이 당대의 정치현실과 화합하지 못함으로써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11)  조존성의 주요 정치적 시련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1591년, 당파를 조성한다는 권신들의 모함으로 파직(38세)
② 1597년, 파직(이유 미상, 44세)
③ 1598년, 하옥(이유 미상, 45세)
④ 1602년, 權貴의 뜻에 맞춰주지 않자 사주한 言官의 탄핵으로 파직(49세)
⑤ 1610년, 광해군이 생모추존 의식을 거행하려 할 때 非禮임을 논하다가 면직(57세)
⑥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방축(60세)
12)  光海壬子 琉球國人馬喜富等八名 漂到濟州 給衣糧 順付賀至使趙存性 押解奏聞 仍具咨琉球國知會( 西邊 , 燃藜室記述 別集 卷18.)
13)  증보판 CD-ROM 국역 조선왕조실록 제2집(1997), 광해 5년 5월 15일.
14)  앞의 CD-ROM, 광해 5년 3월 3일.
15)  成王이 叔虞와 장난을 하다가 오동나무 잎을 따 珪라고 한 뒤 숙우에게 주며 왕으로 봉해 주겠다고 하였다. 사관 佚이 이로 인하여 숙우를 왕으로 봉해줄 날을 청했는데, 성왕은 戱言이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관 일이 말하길, “천자는 희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을 하면 역사에 기록하고 예를 이루고 노래로 부릅니다.”하였다. 이에 마침내 숙우를 唐나라 왕으로 봉해 주었다.‘成王與叔虞戲 削桐葉為珪以與叔虞曰 以此封若 史佚因請擇日立叔虞 成王曰 吾與之戲耳 史佚曰 天子無戲言 言則史書之 禮成之 樂歌之 於是遂封叔虞於唐’( 晋世家 , 史記 卷 39.)
16)  馬援이 交阯에서 瘴氣를 이기려고 늘 율무[薏苡] 열매를 복용하였다. 남방의 율무는 열매가 커서 종자로 쓰려고 귀환할 때 수레에 가득 싣고 왔다. …… 그런데 마원이 죽자 그를 중상하는 자가 돌아올 때 수레에 싣고 온 것은 모두 진귀한 물품이었다고 참소하였다.‘援在交阯 常餌薏苡實 用能輕身省慾 以勝瘴氣 南方薏苡實大 援欲以為種 軍還載車……及卒後 有上書譖之者 以為前載還 皆明珠文犀’( 馬援傳 , 後漢書 卷24.)
17)  국왕 자리에 장자를 세우는 것은 만고의 강상이다. 너희 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라고 일컫는데, 어찌 자의대로 장자를 폐하고 차자를 세워서 스스로 어지럽고 망할 계제를 만드는가. ‘立國以長 乃萬古綱常 該國素稱 禮義之邦 豈可擅行廢立自階亂亡’( 奏請明朝 附嚴萬二査使之來 , 燃藜室記述 卷 19.)
18)  長子臨海君 風癱守在喪次 又曰 業已退讓( 奏請明朝 附嚴萬二査使之來 , 燃藜室記述 卷 19.)
19)  守喪則非病也 無爭 豈有讓德之語( 奏請明朝 附嚴萬二査使之來 , 燃藜室記述 卷19.)
20)  앞의 CD-ROM, 광해 즉위년 6월 20일 참조. 한편 燃藜室記述에서는 “이때 광해가 많은 은과 인삼으로 뇌물을 먹여서 무사하게 되었다.‘時光海 多以銀蔘 賂之 得無事’( 奏請明朝 附嚴萬二査使之來 )”라고 기록하고 있다.
21)  광해 5년 2월 30일에 연경에서 황제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고, 3월 3일에 사헌부의 탄핵으로 국문을 받았다.(앞의 CD-ROM 참조.)
22)  당시 正言 金大德이 密啓(광해 2년 3월 13일)한 점으로 미루어, 조존성 또한 밀계한 것으로 판단된다.
23)  앞의 CD-ROM, 광해 2년 3월 8일.
24)  立心忠實 不事矯飾 平居簡嚴寡言 …… 喪祭必以禮( 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敦寧府事兼知義禁府事趙公行狀 , 龍湖遺集.)
25)  赴燕時以改㝎冠服事呈禮部文 , 赴燕時以㷔焇加請事呈禮部文 , 再呈禮部文 .
 
 
 
3. 전원에서의 삶과 의식세계
방축된 직후 조존성은 龍湖의 亭舍에서 서적을 읽고 거문고와 바둑 완상으로 일관한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廢母論(1613)이 일어나자 湖西의 옛 집으로 내려가26) 재출사(1621)할 때까지 약 8년간 전원에서 삶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는 정치적 시련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若無事]’처럼 평온한 면모를 견지하고 있어 주목된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전원에서의 삶과 의식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3.1 순응 자연적 생활
고향으로 귀거래한 조존성은 이때의 심정을 아래와 같이 읊고 있다.
 
 
一出都門馬首西  한 번 도성문 나서서 말머리를 서쪽으로 잡아
十年今日返幽棲  십년 만인 오늘 그윽한 거처로 돌아왔네
門前童僕新顔面  문 앞의 어린 종들은 얼굴이 새로운데
洞裏烟花舊品題  골짜기의 안개꽃은 감상하던 그대로네
靑眼客來驚素鬢  반가운 객 와서 흰 수염에 놀라고
白衣人到爛黃鷄  白衣人이 이르자 누런 닭 사라지네
此身安處眞吾地  이 몸 편안한 곳이 진실로 나의 땅이니
春後移家任老妻  봄 지나면 이사는 늙은 아내에게 맡기리27)
 
 
위의 한시는 전원에서의 삶과 의식세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전개 형상은 방축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화자는 首聯에서 ‘도성문’과 ‘그윽한 거처’로 상징되는 정치현실과 전원 사이의 거리를 ‘십년’이라는 시간차로 술회하고 있는데, 이 시간적 간격은 宦路의 기간28)만큼 두 세계의 심리적 거리가 멂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적 인식 속에는 ‘오늘’에 존재하는 전원적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의도는 화자에게 포착된 세계와 조응 관계를 이루면서 선명하게 부각된다.
 
우선 頷․頸聯에서 느껴지는 기본 정서는 기쁨과 유대감이다. ‘십년’이라는 시간이 새로운 ‘어린 종들’과 화자의 외적 변모 등을 수반함은 당연한 것이다. 반면 고향에는 이 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존재하는 자연과 그 속에 깃든 조화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비록 일순간 ‘흰 수염’에 놀라지만 ‘누런 닭’을 안주삼아 벗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다정한 분위기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화자에게 포착된 세계는 의연함과 그 주위에 작용하는 평온함으로 가득하다. 어떤 경우든 이 세계는 ‘도성’의 功名이 미치지 않으며, 그 안에 사는 이로 하여금 物外의 공간에 도취케 한다.29) 곧 화자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흥기되는 정서를 尾聯처럼 ‘진실로 나의 땅’으로 표출하고, 봄이 지속되는 동안 그 한가로움에 몰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몸 편안한 곳’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고통스럽고 불안한 정치현실은 뒤로 하고, 대신에 ‘이사는 늙은 아내에게 맡’길 정도로 현재의 삶 혹은 그에 대한 지향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조존성이 추구하는 ‘이 몸 편안한’ 삶과 그 기반은 무엇인가? 아래의 작품에서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爲愛原泉混  용솟음치는 原泉을 사랑하여
新開竹下池  대나무 밑에 연못 새로 열었네
水深便貯養  물이 깊어 양분 저장하기 알맞고
源潔少磷緇  근원이 맑아 변화함이 적네
衰柳經霜脫  쇠잔한 버드나무 서리 벗어나고
殘荷遇雨欹  시든 연꽃 기다리던 비를 만나네
榮枯隨節序  피고 지는 것이 節序를 따르니
安得怨天時  어찌 天時를 원망하리오30)
 
아야 구럭망태 어두 西山에 날 늣거다
밤 지낸 고사리 마 아니 늘그리야
이 몸이 이 푸새 아니면 朝夕 어이 지내리[靑珍 112]
 
 
위의 한시는 일련의 ‘節序’, 곧 자연의 운행을 포괄적인 삶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대단히 사색적이며 대상에 대한 성찰에 바탕하고 있다. 즉 감각적 인식과 이성적 사유가 교감하고 있으며, 또한 시상 전개 속에는 귀거래의 과정이 우회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먼저 ‘연못 새로’ 여는 행위는 전원에 정착함을 시사한다. 이 정착은 ‘原泉을 사랑’한, 이른바 泉石膏肓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자연의 속성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 큰 몫을 하고 있다. 함련에서 형상화한 ‘水深’과 ‘源潔’에 해석의 무게를 싣는다면 이 의취는 좀더 뚜렷해진다. 주지하다시피 ‘原泉’은 생명력의 근원과 풍요로움이요, 세속에 전혀 물들지 않은 순수한 공간의 표상이다. 이러한 자연이 쇠잔한 ‘버드나무’와 ‘연꽃’에 역동적인 활기를 불어넣는 있는데, 이것은 정치현실의 ‘서리’로 인해 死灰 같은 정서31)의 화자에게도 생명력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이로 볼 때 화자가 정착한 전원은 단순한 고향을 넘어 심신적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화자의 자연 인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이 자아내는 생성과 소멸의 시간적 질서를 이성적으로 포착하여 삶의 자세로 수용하고 있다. 사물의 ‘榮枯’에 자신의 정치적 부침을 조응․반추하고 있는 미련의 발언이 곧 그것이다. 이로써 화자는 이 주어진 자연의 理法에 몸을 맡기듯이 時雨에 젖어든다. 자연의 모든 사물의 ‘榮枯’가 ‘節序’에 순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시련 또한 ‘天時’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화자의 정착에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의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순리주의적 기질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실제로 이러한 의식적 면모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데, 위의 시조가 대표적인 예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생활과 음식물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안분자족적 삶을 읊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좀 더 세심히 살펴보면, 이 삶 또한 자연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화자의 행위와 사유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장의 ‘구럭망태 어두’32)는 행위는 고사리를 캐러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이때 이 행위의 전개 속에는 자연의 시간적 흐름에 대한 감각적인 인식이 주요 틀로 작용하고 있다. 다름 아닌 ‘西山에 날’이 저물어가는 시간성에 대한 포착이 그 첫째요, 이 시간만큼 ‘밤 지낸 고사리’가 웃자랐을 거라는 판단이 둘째이다. 한편 종장의 ‘朝夕 어이 지내리’는 끼니를 걱정하는 언급인데, 이를 해결해 주는 음식물이 바로 ‘이 푸새’인 고사리이다. 이를 재언해 보면, 끼니 걱정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캐고자 하는 고사리는 새순이 아닌 이미 웃자란 상태의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불평․불만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비록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질박한 음식물이야말로 ‘이 몸’에 합당하다는 자족감으로 충만해 있다. 즉 자연의 흐름 속에서 주어진 상황과 자신의 삶을 함께 긍정․수용하고 있으며33) 이러한 의식이 자족감, 곧 ‘이 몸 편안한’ 삶의 한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존성은 귀거래 이후 전원을 지탱하는 자연의 이법에 따라 평온과 자족적 삶을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이법은 단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움직이는 사회의 시간과 질서로까지 소급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江上孤村少竝居  강가 외로운 촌락에서 함께한 생활 적었고
室如懸罄短籬踈  집은 매달린 경쇠 같고 짧은 울타리 엉성하네
生平不識離人恨  평생 동안 이별의 恨을 알지 못하니
饘粥雖窮樂有餘  粥은 비록 다하여도 즐거움은 남음이 있네34)
 
아야 粥朝飯 다오 南畝에 일 만해라
서루론 부를 눌 마조 자부려뇨
두어라 聖世躬畊도 亦君恩 이시니라[靑珍 114]
 
 
먼저 한시 또한 전반적으로 전원에서의 자족적 삶을 읊고 있다.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자. 起句는 벗이라 할 수 있는 ‘副使’와의 이별을 말함이요, 勝句는 零落한 화자의 생활과 모습을 말함이다. 곧 벗과의 이별, 그리고 이것으로 인한 감정을 집과 울타리의 형상에 비유하면서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이별의 슬픔이 매우 컸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轉․結句에서 ‘이별의 恨’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남은 ‘즐거움’이 있다와 같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서 轉句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을 표면적으로 풀이해 보면, ‘평생 동안 이별을 하지 않았다.’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풀이는 前句의 내용과 모순된다. 이에 전구의 내용 중 勝句에 포착된 화자의 시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앞서 살펴본 작품의 ‘榮枯隨節序’에 형상화된 이미지와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본다면, 轉句의 말은 사물이 ‘榮枯’를 반복하고 무엇보다 이를 ‘節序’의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화자 역시 벗과의 이별을 자연스럽게 수용․긍정함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에 내재된 이법을 인간과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별의 한을 알지 못함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곡진하게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대신에 함께 했던 생활만큼은 삶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고 있다.
 
한편 위의 시조에서는 일련의 평온한 삶이 근본적으로 임금의 은택에 기인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亦君恩’이라는 구절, 특히 ‘亦’의 의미가 시사하듯이, 화자는 전원에서의 ‘躬耕’이 임금의 은택임을 찬탄함과 동시에 그 연장선에서 이곳의 삶을 긍정하고 있다.
 
초장은 ‘南畝’의 밭을 갈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중장에서 화자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이 일에 익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같이 ‘부를’ 잡고 일해 줄 사람조차 없는 상태이다. 이와 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심을 끄는 것은 종장의 ‘두어라’에 내재된 심적 태도이다. 즉 몸소 밭을 갈겠다는 선언인데, 이는 ‘南畝에 일’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일을 혼자, 더욱이 ‘粥朝飯’만으로 하기에는 힘겨운 법이다. 따라서 ‘두어라’의 표현은 해야 할 일의 양에 얽매이기보다는 일 그 자체를 즐기겠다는 의지적 표명이다. 그리고 이를 ‘亦君恩’으로 진술함으로써 보다 확고히 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전원에서의 삶이 모두 ‘君恩’이라는 하나의 질서와 관계 속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귀거래 이후 조존성의 삶은 일차적으로 자연에 대한 세심한 성찰에서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즉 모든 사물이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듯이, 자신 또한 이 이치에 상응하는 일단의 모습들을 보인다. 아울러 이 자연의 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 그의 의식 또한 현재적 삶의 만족과 편안함으로 구현되고 있다.
 
 
3.2 ‘오 ’의 공간과 삶 향유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존성은 정치적 시련에도 불구하고 전원에서 순응 자연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곧 자신의 불행을 자연의 이치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편안한 삶을 즐기고자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강호에도 또한 근심이 있다’35)의 언급이 방증하듯이, 번민으로 가득 찬 면모를 표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귀거래 하기 이전36)에 먼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石田茅屋近江濤  石田의 초가집이 강 물결과 가까워
村老迎來氣象豪  촌로들을 호방한 기상으로 맞이하네
詩爲動人吟更苦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지은 시 읊으면 더욱 괴롭고
酒要忘世醉還號  세상 잊으려고 마신 술 취하니 도리어 부르짖네
羊腸世路君能脫  羊腸 같은 세상길을 그대는 벗어났으나
鷄筋浮名我未迯  계륵처럼 쓸모없는 명예를 나는 버리지 못했네
懸榻幾時方到屣  귀한 손님 어느 때에 신 끌고 이르러
一場聊復飮醇醪  애오라지 한바탕 다시 막걸리를 마시리오37)
 
 
위의 한시는 石田 成輅(1550~1615)의 시에 차운한 작품으로, 그와 화자 자신의 삶을 대비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성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마포의 西湖에서 평생을 보낸 은자38)로서, ‘호방한 기상’의 소유자이다. 화자가 그와 교유하는 이유도 이러한 사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 기상을 바탕으로 ‘羊腸 같은 세상길’, 곧 험난한 정치현실에서 벗어나 강물처럼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며, 취흥에는 세속적인 세상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반면에 화자는 ‘계륵처럼 쓸모없는 명예’와 그것에 수반되는 일련의 세속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이것으로부터 초월해보고자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괴로움에 휩싸여 한갓 취객의 광기로 표출될 뿐이다. 따라서 성로와의 지속적인 교유를 바라는 기대감 속에는 그의 삶에 대한 동경과 함께 ‘忘世’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해 있다.
 
이처럼 조존성은 평소에 성로의 자유로운 삶을 사모했음을 엿볼 수 있는데, 귀거래 이후에는 흡사 그의 삶과 자세를 사사받았다고 할 만큼 동일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아래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春蕪經雨日萋萋  봄 풀에 비 내려 날이 갈수록 무성하여
客在高樓望眼低  나그네 높은 누각에서 눈앞을 바라보네
晩來漁艇乘潮去  저녁 무렵 고깃배에 올라 조수를 타고 가니
驚起白鷗沙岸西  모래 언덕 서쪽의 흰 갈매기 놀라 깨네39)
 
아야 되롱삿갓 화 東澗에 비 지거다
기나긴 낙대에 미 업슨 낙시 야
져 고기 놀라지 마라 내 興계워 노라[靑珍 113]
 
 
위의 한시는 앞의 작품과는 달리 한없이 푸른 세계와 여유로운 정서로 가득하다. 화자가 포착한 세계는 봄이라는 계절이 가져오는 생기 넘치는 자연의 청정함이다. 여기에 걸맞게 내리는 봄비가 그 빛깔들의 생명력을 더해 준다. 따라서 이 맑고 선명한 세계를 ‘높은 누각’에서 굽어보는 화자의 고양된 정서적 상승은 다분히 성로의 ‘호방한 기상’에 근접해 있다 하겠다. 그러나 계속 살펴보면, 화자의 이 기상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높은 누각에서 내려온 화자는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겨 조수 위의 고깃배에 몸을 싣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화자는 조수를 비록한 주위의 세계와 인위적인 것 없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듯이 보인다. 그러나 ‘白鷗’가 놀라 깨어남으로써 이 조화는 온전하게 합일되지 못한다. 여기서 “白鷗는 그곳에 있던 존재이지만, 화자는 외부에서 그곳에 들어와 새로 참여하게 된 존재” 40)이다. 따라서 ‘白鷗’가 놀라 깨어남은 외부인인 화자를 아직 경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성로가 강가에 있던 존재, 곧 촌로들을 맞이하며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과 비교해서 아직 미숙한 단계이다. 이에 화자는 다시 합일의 상태를 추구하는데, 위의 시조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 묘사된 어부생활의 묘미는 ‘고기’를 낚는 데 있지 않고 전일하게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에 있다. 우선 중장의 ‘기나긴 낙대’, 특히 ‘기나긴’은 그 길이만큼 ‘東澗’의 멀고 깊은 곳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싶은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의도와는 달리 화자가 드리운 낚싯대는 다름 아닌 ‘미 업슨 낙시’이다. 고기를 낚아 챌 바늘이 없음은 종장의 ‘놀라지 마라’의 언급에서도 드러나듯이 고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말한다. 곧 욕심이 없는 無心의 상태이다.
 
그럼 화자가 낚싯대를 드리운 의도는 무엇인가? 바로 ‘興’ 자체이다. 다시 ‘놀라지 마라’의 언급을 재구성하자면, 이는 고기를 잡을 의도가 전혀 없으니 경계하지 말라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무심뿐만 아니라 친화의 의미까지를 내포한다. 즉 ‘기나긴 낙대’를 드리운 멀고 깊은 자연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고, 나아가 이 합일에서 고양되는 무위적 흥취를 즐기고자 함이다.
 
여기에 이르면 귀거래 이후 조존성의 삶 또한 성로의 그것과 그대로 일치한다 하겠다. 그럼 이제 이를 바탕으로 그의 번민, 그리고 해소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佯狂眞避世  미친 체하는 것은 진정 세상을 피함이니
江海得幽居  江海에 고요한 집을 얻었네
不仕還爲義  벼슬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義가 되니
非耕則可漁  밭 갈지 않으면 고기 잡을 만 하네
俗緣元少累  세속의 인연과는 본디 연루됨이 적어
塵念自相䟽  塵世를 생각하는 마음 절로 멀어지네
萬事衘盃外  술 마시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은
悠悠付太虛  한가로이 하늘에 맡기네41)
 
아야 쇼 며겨 내여 北郭에 새 술 먹쟈
大醉 얼굴을 빗쳬 시러 오니
어즈버 羲皇上人을 오 다시 보와다[靑珍 115]
 
 
무엇보다 위의 한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각이다. 먼저 수련에서 화자는 자신을 초나라의 狂人인 接輿에 비의하고, 그의 은자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화자가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주지하듯이 접여는 거짓 미친 체하며 세상을 피한 은자로서 孔子를 봉황에 비유, 기롱하면서 천하의 道가 쇠퇴했음을 지적42)했던 인물이다. 바로 이 접여를 자신과 동일시함은 곧 화자 또한 당면 현실을 도가 쇠퇴한 세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의식은 함련의 ‘不仕還爲義’라는 표현으로 집약․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이 기존 사대부의 이념적 기반인 “不仕無義”와 대조를 이루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에 둘 사이의 의미관계를 살피기 위해 잠시 論語의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가) 벼슬하지 않는 것은 義가 없으니, 長幼의 禮節을 폐할 수 없거늘 군신의 의를 어떻게 폐할 수 있겠는가? 자기 몸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여 大倫을 어지럽히는 짓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그 의를 행하는 것이니, 道가 행하여지지 못할 것은 이미 알고 계시다.(仕는 군신의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도가 행하여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폐할 수 없는 것이다.<朱子 註>)43)
 
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道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군자가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니, 그렇다면 위태한 나라에서 벼슬하는 자는 떠날 수 있는 義가 없다. 그러나 밖에 있을 경우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다. 亂邦이란 위태롭진 않아도 刑政과 紀綱이 문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을 깨끗이 하고 떠나는 것이다.<朱子 註>)44)
 
 
군자의 出과 處의 명분을 언급한 위의 두 글은 함부로 폐할 수 없는 군신간의 ‘義’를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먼저 가)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출처관이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질서인 ‘大倫’에 주목하여, ‘仕’로 상징되는 군신간의 의는 여타의 질서, 곧 長幼有序의 의와 함께 하나의 범주 안에 존재하므로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설령 도가 행해지지 않을지라도 벼슬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군자의 보편적 도리이다.
 
한편 나)는 정치․사회적 측면에서의 출처관이다. 일차적으로 ‘危邦’과 ‘亂邦’은 도가 없는 세계이므로 은거하는 것이 적절한 처세이다. 그러나 朱子의 지적처럼, 이 세계에서 벼슬살이 중인 자는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다. 바로 가)의 대륜, 곧 군신간의 의를 함부로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의리는 벼슬하지 않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서 문제는 시기상으로 ‘刑政과 紀綱이 문란한’ 때라는 데에 있다. 요컨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군신간의 의를 중시한 나머지, 지나치게 출사를 하다보면 그 혼란스러운 인정물태에 빠져 자신의 몸을 더럽히게 된다. 이때 몸을 더럽힌다함은 평소에 견지한 자신의 뜻을 굽히고 욕되게 하여 이른바 正道를 잃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언행의 떳떳함을 구하기란 어렵고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기 십상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옳은데, 비록 군신의 의는 저버리지만 정도를 잃고 ‘刑政과 紀綱’을 더욱 어지럽히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환언하자면 벼슬을 하지 않음이 일시적으로는 의를 저버리는 행위에 가깝지만 궁극적으로는 대륜의 당위성마저 폐함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不仕還爲義’는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는다 하겠다.
 
이로 보건대, 함련의 표현 속에는 당대 정치․사회의 도는 쇠퇴했다는 판단과 함께 그에 따른 처세가 자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刑政과 紀綱’이 무너진 정치현실에 대한 회의와 윤리적 의리가 일련의 번민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전원에서의 은거적 삶은 이 번민 해소를 위한 유가의 전통적인 방법인 셈이다. 즉 당시에 방축되었던 상황에 걸맞게 일차적으로 ‘몸을 깨끗이 하는’, 이른바 獨善其身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非耕則可漁’이다. 앞서 검토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밭 갈기는 君恩을, 고기 잡기는 無心을 각각 상징한다. 환언하자면 전자를 통해서 군신간의 의를 지키고, 후자를 통해서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평소에 계륵처럼 여겼던 ‘塵念’마저 떨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련의 ‘悠悠付太虛’라는 표현으로 의식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런데 이 또한 공교롭게도 앞 절에서 살펴본 ‘安得怨天時’와 동등의 의미적 표현이다. 결국 자신의 번민을 비롯한 주위 세속의 ‘萬事’를 무한한 우주 만물에 내재된 이법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신 술 마시는 것만큼은 굳건히 견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의 시조 작품에서 여실하게 부각되고 있다.
 
‘빗’ 속에서 ‘大醉 얼굴’로 소를 타고 오는 정경은 한 폭의 수묵화 마냥 여유롭고 평온하기 그지없다. 즉 자연 경치와 화자의 행위가 적절하게 형상화되면서 드높은 흥취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이 흥취는 ‘羲皇上人’과 결합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주지하듯이 ‘羲皇上人’은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인 伏羲氏 이전의 은자적 인물로서, 武陵桃源과 함께 이상적 공간과 인간상의 한 전범45)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물을 ‘오 다시 보와다’함은 현재 화자의 공간과 삶이 이상적인 세계에 근접해 있음을 표명한 득의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때의 표명이 과거로의 회귀나 이에 대한 지향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보아온 화자의 삶과 자세, 곧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고자 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표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오’의 공간과 삶을 최대한으로 향유하겠다는 고도로 고양된 의식이다. 그리고 술이 바로 이러한 의식의 몰입과 극대화를 흥기시키는 촉매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존성은 도가 쇠퇴한 정치현실과 그에 따른 시련으로 인한 번민을 해소하기 위해 유가의 전통적인 은자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즉 자연과의 조화로운 합일, 그리고 여기에서 야기되는 무위적 흥취를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최대한으로 향유하고 있다. 이로써 귀거래할 당시 ‘오늘’에 존재하는 전원적 삶을 추구하고자 한 그의 의식이 전일하게 수반되고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26)  已而釋黜 屛居龍湖亭舍 閱圖籍玩琴棋 夷然若無事者 及廢母論發 不欲在近郊 乃歸湖西舊庄( 墓誌銘 幷序 , 龍湖遺集.)
27)  鄕家 , 龍湖遺集.
28)  1602년 言官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1603년 成均館 司藝와 司成에 제수 된 이후, 계축옥사 때 방축되기까지 宦路의 기간이 10년이다.
29)  공명이 우리 모두를 핍박할 수 없고 / 좋은 일은 도리어 물외를 쫓아 만나네 // 영해의 달 높이 떠 천 이랑 희고 / 가을 산 단풍 물들어 온 기슭 붉네 ‘功名不與吾儕逼 勝事還従物外逢 瀛海月高千頃白 秋山楓老萬崖紅’( 送石泉安景容昶赴通川 , 龍湖遺集.)
30)  咏秋池 , 龍湖遺集.
31)  한 차례 비 삼십 일 내려 이 늙은이 병 / 예전부터의 심사가 불기 없는 재와 같네 ‘一雨三旬病此翁 向來心事死灰同’( 次一松台見寄韻 , 龍湖遺集.)
32)  ‘어두’는 ‘거두라’의 ‘ㄱ’ 탈락형으로 ‘거두어라’로 뜻풀이된다.(朴乙洙 編, 韓國時調大事典, 亞細亞文化社, 1992 참조.) 이 뜻풀이에 의하면, 시조의 내용은 광주리와 망태를 거두어들여 어떤 일을 끝내는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한역시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곧 “呼兒先問有無筐”과 같이 광주리가 있는지 없는지 그 여부를 물어보고 있으므로, 어떤 일을 준비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33)  “임천에서 명 다함은 진실로 내 일이고 / 강호에 거듭 노닒 또한 전생의 인연이네 ‘林泉畢命眞吾事 湖海重遊亦夙緣’( 次朴薪村汝龍見寄 , 龍湖遺集.)”라는 구절에서도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34)  宿農村戱呈副使 , 龍湖遺集.
35)  서울의 아는 자가 혹시 물어 보거든 / 강호에도 또한 근심이 있다고 말해주오 ‘洛中相識如相問 但道江湖亦有憂’( 川上餞權承旨雲卿 , 龍湖遺集.)
36)  가랑비 잦아들고 석양빛 띠어/ 관아 업무 마치고 앞 사립문 닫네‘小雨霏微帶夕暉公庭衙退掩前扉’( 次成石田見寄 其二, 龍湖遺集.)의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이 작품은 江華府使로 부임하고 있을 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37)  次成石田見寄 其一, 龍湖遺集.
38)  石田 成輅의 생애는 權純會의 田家時調의 美的 特質과 史的 展開 樣相 (고려대박사논문, 2000, 46~47쪽.)에 상술되어 있다.
39)  寄沈士敬 , 龍湖遺集.
40)  양희찬, 李賢輔 <漁父歌>에 담긴 두 現實에 대한 認識構造 , 時調學論叢 第19輯, 2003, 187쪽.
41)  訪成石田重任西湖新庄不遇 其二, 龍湖遺集.
42)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 不可諫 來者 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殆而( 微子 , 論語 第十八.)
43)  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潔其身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仕 所以行君臣之義 故 雖知道之不行 而不可廢 <朱子 註>)( 微子 , 論語 第十八.)
44)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君子見危授命 則仕危邦者 無可去之義在外則不入 可也 亂邦 未危而刑政紀綱紊矣 故 潔其身而去之<朱子 註>)( 泰伯 , 論語 第八.)
45)  성기옥, 士大夫 詩歌에 수용된 神仙모티프의 詩的 機能 , 국문학과 도교, 태학사, 1998, 22쪽.
 
 

 
4. 맺음말
 
용호 조존성은 16세기와 17세기의 접점에 위치했던 만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련을 체험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을 형성한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내․외적 상황들이었으며, 그의 의식은 이를 통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시문에 이러한 삶과 의식세계를 투영시켜 문집으로 남기고 있다. 본고는 이 점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이에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존성의 정치적 시련은 방축된 계축옥사보다는 앞선 시기인 임해군 옥사 사건과의 관계 속에서 발원하고 있다. 광해군의 왕위 책봉 당시의 문제점을 풍자한 중국의 한시에 대해 해명하지 않는 점이 시련의 주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존성 개인적으로 예법과 이치에 따르고자 한 기질이 당대의 정치현실과 화합하지 못함으로써 또한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귀거래 한 이후 조존성은 정치적 시련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강호자연을 지탱하는 이법에 대한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성찰이 큰 몫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이 자연의 흐름에 순응함을 깨닫고, 자신 또한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상응․수용하면서 현재적 삶의 만족과 편안함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식세계를 바탕으로 유가의 전통적 처세 방법의 하나이기도 한 ‘獨善其身’의 길을 걷고 있다. 즉 정도와 윤리가 쇠퇴한 정치현실과 그로 인한 번민을 해소함은 물론 ‘오늘’에 존재하는 전원과 이곳에서의 삶을 최대한으로 향유하고자 하는 정신적 흥취를 구가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조존성의 문학은 결국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견지한 순리주의적인 면모가 귀거래 이후 전원적 삶의 근저로 작용함은 물론 많은 영향을 발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는 조존성의 문학적 면모를 조명하기 위한 일차적인 검토에 불과하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세밀한 논의와 16~17세기의 문학적 변모 양상과의 대비적 고찰이 수반되어야 그의 문학적 전모와 특성이 온전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한 논의는 지면을 달리하여 진행하고자 한다.
 
 

 
■ 참고문헌
• 論語
• 史記
• 象村集
• 燃藜室記述
• 龍湖稿(楊山趙氏世稿,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龍湖遺集(楊山趙氏世稿, 규장각 소장본)
• 증보판 CD-ROM 국역 조선왕조실록 제2집, 서울시스템주식회사, 1997. 靑丘永言(珍書刊行會本)
• 後漢書
• 權純會, 田家時調의 美的 特質과 史的 展開 樣相 ,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2000.
• 金興圭, 욕망과 형식의 詩學, 태학사, 1999.
• 朴乙洙 編, 韓國時調大事典, 亞細亞文化社, 1992.
• 성기옥, 士大夫 詩歌에 수용된 神仙모티프의 詩的 機能 , 국문학과 도교, 태학사, 1998.
• 송종관, 趙存性의 <呼兒曲>에 대하여 , 尙州文化硏究 第3輯, 尙州文化硏究所, 1993.
• 신영명․우응순 외, 조선중기 시가와 자연, 태학사, 2002.
• 양희찬, 李賢輔 <漁父歌>에 담긴 두 現實에 대한 認識構造 , 時調學論叢 第19輯, 2003.
• 이상원, 17세기 시조사의 구도, 月印, 2000.
 
<투고일 : 2007. 6. 30. 심사일 : 2007. 7. 16. 심사완료일 : 2007. 8. 10.>
 

 
On the Life and Consciousness World of Yongho Cho Jon-seong
Oh, Sun-ju
 
This is a kind of essayistic paper that is designed to observe concrete facts in political trials of Cho Jon-seong, and then to illuminate his consciousness world. Though Cho Jon-seong and his Sijo work of Hoagok(呼兒曲) had put the main position in th
 
16th~17th century, we have treated fragmentarily the actual discussion of Cho Jon-seong and his Sijo woke only when we have looked at the stream of Sijo history in the 17th century. It is based on fact that is introduced no a collection of his works or poems other than some of his Sijo works. Fortunately a collection of his works has been found recently. However we can not meet Cho Jon-seong's early works because of most works of this collection have been written since he has suffered political trials.
 
Such being the case,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process o
 
his political trials and life of homecoming after his resignation from a government office. Consequently, I could identify that his attitude of submission to reason firmed in severe trials was based on life of submission to reason.
 
While we proceed considerably to discussion about nature of Sijo history in the 17th century or appreciation about the status of Sijo, it is seemed to make slow progress to discussion about Cho Jon-seong. However now that is discovered a collection of his works, Yonghoyujip(龍湖遺集), I think that a aspect of literature in the 16th ~17th century has to be done at this point.
 
Key word : Yonghoyujip, submission to reason, submission to nature, consciousnes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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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