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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15세기 말~16세기 초, 모굴 칸국의 동진과 위소의 폐지
오이라트 에센의 세력의 정점은 1449년에 발생한 토목보(土木堡)의 변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에센의 권력이 정점을 거쳐 쇠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토목보의 원인, 경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으므로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몽골리아 초원 및 가욕관 이서지역까지 호령했던 에센이 1454년에 사망한 후, 그가 차지했던 몽골리아-중앙아시아 초원 일대는 다시 할거상황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에센 치하에서 팽창할 대로 팽창했던 오이라트의 세력은 그 내부가 여럿으로 나뉘어 병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뿐, 그 형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1459년에 하미로 남하하여 충순왕의 모친이자 에센의 누이인 눈다시리와 연합했던 에센의 동생 백도왕(伯都王)과 극실독왕(克失禿王),62) 비슷한 시기에 투르판에서 하미로 이주하여 눈다시리를 포로로 잡고 하미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벡 아르슬란(癿加思蘭)은 모두 오이라트 출신이다.63) 한편 1469년에 그를 하미에서 몰아낸 배역살합(拜亦撒哈) 역시 오이라트에서 왔는데, 그를 몽골리아에서 몰아낸 것은 에센의 아들 아스티무르(阿失帖木兒, 『라시드사』의 아마산지 타이시(Amāsānjī Tāyshī))이다.64)
『라시드사』의 기록에 따르면 아마산지 타이시는 자신의 두 아들, 이브라힘 왕(Ibrāhīm Ūng) 및 일야스 왕(Ilyās Ūng)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빚어 분리되었는데, 이때 18만 명이 두 아들과 동행했고 아마산지 타이시와는 30만이 동행하여 모굴리스탄 초원으로 향했다고 한다(Dughlat. 1996: 56). 『명실록』에는 아마산지 타이시의 두 아들로 추측되는 인물들에 관한 후속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1490년대에 하미 부근에서 야메크린(野乜克力) 부의 왕으로 살고 있었다.65) 그중에 이브라힘 왕은 『라시드사』 및 명의 여러 기록에 남아 있듯이 하투로 진출하였다가 다얀 칸에게 패배한 후 칭하이로 달아났으며, 이후 30년 가까이 칭하이 일대를 휩쓸어 명에 의해 ‘서해의 도적’, 혹은 ‘칭하이의 대추장’으로 불렸다.
이렇듯 아스티무르와 반목한 자녀들 외에, 그의 뒤를 이어 오이라트의 수령이 된 아들 쿠시(克失) 역시 하미 주변에 주둔했다. 더욱이 그의 시대에는 오이라트의 모든 수령들이 하미 주변에서 ‘머무르며 유목(屯牧)한다’는 기록이 등장했으며,66) 그와 그의 동생들은 하미를 넘어 관서 위소 일대에 영향력을 펼쳤다. 우선 쿠시 자신은 벡 아르슬란을 살해하고 타이시가 되어 다얀 칸 계열을 칸으로 옹립했던 오이라트의 이스마일 타이시와 연합하여 성화 22년(1486)에 과, 사주 공격을 시도했으나, 직후에 다얀칸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 후 오이라트 부는 쿠시의 동생 아사(阿沙)를 타이시로 세웠는데, 그의 동생인 알리쿠드(阿力古多)는 아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간쑤를 약탈했으며, 하미의 도독인 한신(罕愼)을 위협하여 화친을 맺고 중국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보다 한 세대 아래인 양한왕(飬罕王), 소열독(小列禿), 복육왕(卜六王) 역시 하미 부근에 자리하면서 관서 일대에 영향력을 펼치고 있음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몽골리아 초원 내에서 다얀칸이 성장하여 결국 몽골리아 초원을 통일함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던 에센이 사망한 후 오이라트의 여러 세력은 15세기 하반기 내내 줄지어 하미를 위시한 간쑤 새외 황야로 남하하였고, 점차 관서 위소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다 1480년대에 다얀 칸이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하면서 오이라트의 세력은 간쑤 새외 황야 및 중앙아시아로 완전히 축출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1480년대 후반에 모굴 칸국이 위구리스탄(Uyghuristan) 지배를 회복하면서, 전술한 유누스 칸의 아들 아흐마드(Aḥmad) 칸이 투르판을 거점으로 삼아 하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아들 만수르(Mansūr) 칸이 하미를 차지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관서 위소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굴 칸국의 동진과 오이라트 세력의 남하는 도미노처럼 여러 관서 위소에 압박을 가하여 결국 16세기 초에 모든 위소가 폐지되는 결말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 대해 각 위소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의 하미에 관해서는 기왕의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투르판의 하미 침입은 크게 두 차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473년 술탄 알리(魯檀阿力)의 단기 침입, 두 번째는 모굴 칸국의 아흐마드 칸과 그를 이은 만수르 칸의 장기 침입이다. 첫 번째 침입 때에는 당시 하미의 지도자인 눈다시리 및 명에서 파견된 사신이 투르판에 구금되었으며, 이에 명에서는 적근, 한동, 그리고 하미 주변에 자리한 메크리 부67) 등을 동원하여 진격했으나 큰 소득 없이 끝났고 오히려 술탄 알리가 기타 위소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다.68) 하미의 잔존 세력은 과거 사주위가 이용하기도 했던 돈황 근처의 고욕성으로 이주했다가 1482년에 투르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하미를 수복했는데, 1488년에 잔존 세력을 이끌던 충순왕 한신이 투르판을 수복한 모굴 군주 아흐마드 칸에 의해 살해되면서 다시 모굴 칸국에 점거되었다. 그 이후에도 아흐마드와 그의 뒤를 이은 만수르 칸 등이 하미를 공격했다가 명과의 조공무역을 위해 물러서는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가, 만수르 칸이 1513년에 충순왕 및 하미의 회회 도독 사이드 후세인(寫亦虎仙)과 연합하여 하미를 차지하였고, 이때 하미의 위구르 도독인 엔케볼라드(奄克孛剌)는 숙주로 달아나 명의 영내로 들어왔다. 이후 만수르 칸이 잠시 하미성 및 금인 등을 명에 돌려준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1524년부터 양자 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만수르 칸이 숙주와 감주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1529년에 명은 공식적으로 투르판의 조공을 허락하되 하미 점령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이에 하미는 회회 도독이 장악하여 투르판에 복속했고, 충순왕의 후손은 모굴 칸국의 강역인 악수성에 머물렀으며 그 외의 하미를 구성하던 여러 세력은 숙주로 이주했다. 1547년에 완성된 장우(张雨)의 『변정고』 「서강족구(西羌族口)」에 등장하는 숙주의 여러 거주 세력에 관한 기록에 하미위신합랄회(哈密衛新哈剌灰), 위구르, 하미위구합랄회(哈密衛舊哈剌灰) 등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하미에서 투항하여 숙주에 거주하게 된 이들이라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정덕 11년(1516)에 투항하였다고 한다(趙英, 2011: 245-248).
모굴 칸국은 이처럼 하미는 물론이고 관서의 다른 위소 및 숙주까지 공격했는데, 이때 관서 위소들은 하미처럼 모굴 칸국에 복속하지 않고 자신들의 원래 영역을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2장에서 사주위의 구성원들이 사주를 버리고 가욕관 동쪽의 감주 및 숙주로 이주했던 것처럼, 이들도 가욕관 동쪽으로의 이주를 선택했던 것이다. 우선 적근몽고의 경우 술탄 알리의 침입 당시에 명의 동원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파견하고 투르판의 선동 사신을 살해하는 등 명에 보다 적극적으로 복종했다. 또한 하미의 충순왕 한신이 하미성을 수복하는 것을 돕기도 했으나 메크리 부가 1483년에 이들을 공격하면서 적근의 세력은 대폭 축소되었다. 이후 투르판이 1513년에 하미를 차지한 후 적근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적근의 제 세력이 숙주의 남산으로 이주하여 성이 텅 비었다고 한다. 전술한 『변정고』에 등장하는 숙주 거주 종족 중에 ‘적근몽고위’와 ‘적근성’ 족이 옛 적근몽고위와 관계된 이들이라 볼 수 있다. ‘적근몽고위’족의 도독 쇄남속(鎖南束)은 『명사』에 등장하는 적근몽고위 추장의 후손이며, ‘적근성’은 적근에서 오이라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세웠던 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 외에도 몇몇 종족이 적근몽고위와 관련되어 있다.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에 따르면 적근 부락의 원 거주지는 적근 외에도 고욕(苦峪), 왕자장(王子庄), 선마성(扇馬城), 대초탄(大草灘) 등이었는데, 이 무리들이 황달자(黃達子)의 침입을 받아 숙주 남산의 묘래하천(卯來河泉)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나머지 이들도 정덕 8년에 회적(回賊)의 침입을 받고 투항하여 내주(來州) 내임현성(來臨縣城)의 사경보(四頃堡)나 금탑사(金塔寺) 등에 자리했다고 한다(嚴從簡, 2000: 467). 그런데 전술한 『변정고』에는 앞서 언급한 ‘고욕성’, ‘왕자장’, ‘선마성’, ‘대초탄’이라는 이름을 지닌 종족이 등장하며, ‘고욕성’과 ‘왕자장’을 비롯하여 ‘시성아(柴城兒)’, ‘천변(川邊)’까지 네 종족이 정덕 11년에 금탑사 및 임성(臨城) 연변의 상하점성(上下古城)에 자리했다고 한다. 또한 ‘선마성’ 족은 숙주 북부의 아와(鴉窝)지방, ‘대초탄’ 족은 사경보(四頃堡)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적근몽고위 출신으로 볼 수 있다.
한동위 역시 모굴 칸국에 맞서는 명의 동원 명령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이브라힘 왕이 칭하이로 유입되었던 16세기 초에 큰 타격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었고, 뒤이어 투르판의 세력이 숙주를 공격할 무렵 도지휘 지단(枝丹)의 부락이 감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변정고』에는 감주에 관한 기록은 없고, ‘한동’족이 도지휘 판단(板丹)이라는 인물의 지배하에 있다가 이브라힘의 공격을 받아 서녕 걸탑진(乞塔眞) 지방에 자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한동위의 일부인 한동좌위의 경우, 1516년에 투르판이 하미를 점령했을 때 그곳의 추장인 걸태(乞台)가 명으로 투항하여 숙주에 자리했으며, 그 부하인 테무게(帖木哥)와 토빠(土巴)는 투르판에 복속했다가 1528년 투르판과의 관계가 어긋나자 명에 복속했다. 『명사』에는 1511년에 걸태의 자리를 일고(日羔)가 계승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변정고』에서 사주도독 ‘일고랄(日羔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정덕 14년 전에 무리를 이끌고 숙주로 복속하여 숙주성의 관상(關厢)에 거주했다고 한다.69) 그 외에도 ‘테무게’ 족 및 ‘토빠’ 족은 가정 7년에 고태수어천호소번(高台守御千戶所番)의 백성산(白城山)에 자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수역주자록』의 기록에 따르면 한동위는 좌위와 우위로 나뉘어져 있으며, 좌위에는 걸태-일고로 이어지는 계보 외에도 다른 도독이 있는데, 그 도독의 이름은 파니(帕泥)이며, 두목 상복속(賞卜束)과 더불어 홍치 10년에 테무게, 토빠 등과의 갈등으로 인해 숙주 남산 황초패(黃草壩)로 이주하여 주둔했다고 한다. 한편 우위 도지휘도 2인인데, 그중에 하나는 총아(總牙)이며 정덕 12년에 숙주 북로지방에 자리했다가 훗날 남산 황초패로 이전했다. 또 다른 도지휘는 명사에 등장하는 지단과 동일인으로 볼 수 있는 판단(板丹)으로 정덕 7년에 이브라힘의 공격을 받아 남산 일대로 이주했으며 숙주성 동쪽의 나가만(羅家灣)에서 목축을 행했다고 한다(嚴從簡, 2000: 478). 그런데 이 기록을 고려하면서 『변정고』의 기록을 읽어 보면, 숙주에 거주하는 종족 중에 합랄독(哈剌禿)이라는 이름을 지닌 세 종족이 눈에 띤다. 이 세 종족의 두목의 이름은 각기 파니, 남합아(喃哈兒), 빈발라(賓哱囉)이며 각기 숙주 주변의 황초패산, 유림(楡林)산, 건파(乾垻)산에 거주하며 유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파니가 이끄는 ‘합랄독’ 종족은 한동좌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파니의 도독인 상복속의 이름은 『숙진지』의 ‘숙주에 자리한 10개의 부락’에 관한 기록 중에 등장하는데, 그중에 파사파이가(怕思怕爾加)족의 아버지가 상복속, 아들의 이름이 빈패라(賓孛羅)라 되어 있으므로 합랄독의 세 번째 두목 역시 한동좌위의 두목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사료에서 ‘남합아 족은 상복속의 동종이며, 이들이 각기 건파, 황초, 유림 세 산을 관리한다’고 되어있으므로 결과적으로 합랄독 족은 모두 한동좌위 출신이 된다. 『숙진지』의 기록에 따르면 합랄독은 한동좌위의 시조인 엄장의 아들 중에 하나이며, 그 외에도 ‘홍모아(紅帽兒)’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변정고』의 영창위번에 주둔한 이들에 관한 기록 중에 ‘홍모아’ 족이 존재하므로 이들 역시 한동좌위 출신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변정고』에 ‘사주족’이라는 이름으로 숙주에 자리한 이들의 두목이 ‘총아’이므로, 이들은 이름과는 달리 사주위가 아닌 한동위의 도지휘가 이끄는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동위가 사주위 폐지 후 한동안 사주위의 영역을 차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합해 보면 관서 4위중에 간쑤 지방에 자리했던 네 위소는 모굴 칸국의 공격을 받아 관동으로 대거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굴 칸국의 영향력은 이들 네 관서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남쪽에 위치한 샤릭위구르 역시 모굴 칸국의 압력의 여파를 강하게 받아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곡선위나 아단위는 2장에서 언급한 사신 살해 사건 직후에 몇 차례 명으로 사신을 파견했으나 1444년에 안정왕이 그들을 약탈한 후 명과의 사신 왕래가 단절되었다.70) 다만 곡선위의 그 이후 상황은, 투르판의 술탄 알리 시기부터 아흐마드, 만수르 칸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낸 곡선위 출신 인물에 관한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술탄 알리가 하미를 차지한 후 그곳에 주둔케 했던 그의 매부 아란(牙蘭)은 본래 곡선위의 추장 탈제(脫啼)의 동생이었는데, 이 인물에 대한 『수역주자록』의 기록을 보면 그가 8세이던 때에 곡선이 투르판과 서해 몽골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는 투르판으로 끌려갔다가 장성하여 투르판의 두목이 되어 술탄 알리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술탄 알리의 하미 공격에 가담하여 하미왕의 인신을 빼앗고 하미에 수년간 주둔했으며, 술탄 알리가 사망하고 아흐마드 칸, 만수르 칸 등 모굴 칸국의 칸들이 투르판과 그 일대를 차지한 후에도 줄곧 하미에 배치되어 있다가, 가정 7년에 만수르 칸과의 불화로 인해 주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형의 처남이었던 한동좌위의 테무게, 토빠와 더불어 숙주로 투항했다.71) 한편 그의 형인 탈제는 본족(本族)을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가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으므로 곡선위 중에는 명에 투항하지 않고 본토에 남아 있었던 이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란과 마찬가지로 투르판에서 활약한 곡선위 출신 중에 『고창관과』에 그 상주문이 수록된 우와이스왕(兀也思王)이 있다. 우와이스왕은 술탄 알리 사후 1481-7년 사이에 투르판을 차지한 인물인데, 이 인물이 곡선에서 수차례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우와이스 왕의 조부가 일찍이 명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 상황이 어려워져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는 내용을 담은 상주문도 있다.72) 그에 관한 몇몇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일생을 추측컨대 그는 곡선위 출신으로 투르판이 곡선위를 차지했을 때 아란과 마찬가지로 투르판으로 향했다가 결국에는 이밀 호자(也密力火者), 술탄 알리의 뒤를 이어 투르판을 차지했는데, 투르판을 차지하기 전에 명으로부터 후원을 얻기 위해 수차례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를 종합해 보면 곡선위는 전술한 다른 위소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투르판 지방 세력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영향권하에 들어갔는데, 지배층 중에 몇몇은 투르판의 지배층으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변정고』에서는 곡선위가 망했다는 기록 외에 다른 위소처럼 가욕관 동부로 이전하여 자리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이들의 대부분은 아란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관서 현지에 남았거나 서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한편 안정위는 투르판의 침입 당시에 명의 측에 서서 꾸준히 항전했다. 그 예로 『고창관가』에 수록된 화주(火州)의 천호 이스마일(亦思麻因)의 상주문에 의하면, 그는 본래 안정위 소관의 두목이었는데 변방에서 오랫동안 노력해 왔고, 특히 양의 해(羊儿年)에 투르판이 침략했을 때 맞섰다고 보고하였다.73) 그러나 16세기가 되면 안정위는 전술한 이브라힘의 공격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결국 1512년에 여타 위소처럼 관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동으로 이주했던 무리에 관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왕전이가(汪纒爾加)가 하주와 귀덕(歸德)으로 옮겨 가 거주했다가 가경 7년에 국사 및 여러 승려 무리들과 더불어 사당천(沙塘川)에 자리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嚴從簡, 2000: 469-470). 또한 『변정고』에는 안정위 출신과 관련하여 ‘강전이가(江纒爾加, 앞의 왕전이가와 동일인물로 보인다)’를 비롯한 승려 및 속인 20명이 서녕의 ‘사당천’ 지방에서 목축을 행하고 있다는 기록 밖에 없으므로, 명에 정착한 안정위 출신은 안정왕 및 국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셈이다. 한편 아단위 역시 황하뇌(黃河脑)에 자리하고 있으나 존멸(存滅)의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즉, 샤릭위구르의 대부분은 본토에 남았고 그중 일부는 모굴 칸국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안정왕과 국사 등 지배층 몇몇만 관동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74)
이처럼 본토에 남겨진 샤릭위구르의 운명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라시드사』에는 923년(1517년경) 봄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 샤릭위구르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굴 칸국의 사이드 칸(Sayyid Khān)이 샤릭위구르로 군대를 파견한 사건이다(Dughlat, 1996: 290). 『라시드사』는 샤릭위구르를 ‘키타이(Khiṭā)와 호탄 사이에 위치한 이교도 집단’이라 불렀으며 샤릭위구르에 대한 전투를 성전(聖戰)이라 칭하여 전투의 원인을 종교적으로 설명했으나 (Dughlat, 1996: 291), 이는 이슬람권의 역사서에서 비무슬림과의 전투를 묘사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관용어구일 뿐 실제로는 그 외의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 사이드 칸은 만수르 칸 및 악수에 자리했던 또 다른 형제인 바바착 술탄(Bābāchāq Sulṭān)과의 회견을 통해 톈산 남부 오아시스 도시의 북쪽 통로에 위치한 형제들과 평화관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평화는 『라시드사』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그려졌지만, 그 결과 사이드 칸의 영역인 야르칸트(Yārkand)-카쉬가르-호탄 등 알티샤흐르의 주변에서 그가 영토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방향은 동쪽과 남쪽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곳은 톈산 이남의 다른 오아시스 도시에 비해 기온이 높고 도시 주변에 초지가 부족하며 모래 바람이 강해 유목하기에 적합지 못한 곳이었다(Dughlat, 1996: 247). 그러나 이들이 이끄는 유목민들은 아직까지 모굴리스탄에서 살던 대로 유목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으므로, 이들에게는 초지가 상당히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 때 이들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유목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게다가 불과 수년 전에 명이 설치한 위소가 해체되고 지배층이 관동으로 이주했던 샤릭위구르의 옛 영역.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동쪽 연안은 모굴 칸국에게 있어 영역 확장을 위한 가장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사이드 칸이 샤릭위구르를 공격하기 바로 직전인 1516년의 『명실록』 기록을 보면 그의 형인 만수르 칸이 충순왕 술탄 바야지드(速檀拜牙卽)를 포로로 잡아 간 상황에서, 하미의 부중은 과거 안정왕이었던 천분(千奔)의 후손을 새로운 충순왕으로 삼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75) 전술했듯이 샤릭위구르의 대부분의 세력은 관동으로 이주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그중에는 옛 안정왕의 후손도 있었는데, 그가 하미 충순왕의 공석을 메울 대체자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수르 칸과 연합한 사이드 칸이 샤릭위구르를 공격한 것은 하미와 안정 세력의 연합을 저지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하미와 안정과 모굴 칸국 간의 갈등은 사실상 차가타이 후예들 간의 세력 쟁탈전이었다. 만수르 칸과 사이드 칸 형제는 모두 몽골제국의 후손이었으므로, 같은 차가타이 가문의 후손이기도 한 충순왕의 자리에 대해 간여할 명분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관서 일대에 위소가 설치되었을 때부터 모굴 칸국은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관서 위소의 상황에 간여하곤 했다. 15세기 초반 달단 카간인 굴리치가 하미 충순왕을 살해했을 때 당시의 모굴 칸인 샤미자한은 굴리치가 몽골 제국의 후예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했고, 15세기 후반에 한신이 충순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아흐마드 칸은 그가 옛 충순왕의 족인(族人)이 아니므로 왕이 될 수 없고, 자신이 등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신을 유인하여 살해했다.76) 이와 같은 모굴 칸의 인식을 보여 주는 증거로 만수르 칸이 적근몽고에게 보낸 칙령이 있는데, 그 칙령에서 만수르 칸은 스스로가 몽골 제국의 후손임을 강조하면서 적근의 복속을 요구했다(김호동, 1993: 135-6). 하미와 안정이 자리했던 칭하이성 서부 일대에는 이처럼 16세기 초까지도 몽골 제국의 후예들, 특히 차가타이 계열이 세력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결국 모굴 칸국이 이들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투르판에 자리한 모굴 칸국은 하미나 칭하이성 서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이상으로 동진하지는 못했으며, 그 너머의 간쑤·칭하이 전역은 전술한 오이라트 세력이 장악했다. 『라시드 사』에서 이브라힘 옹의 아들인 바부라이(Bābūlāy)가 일군의 무리와 함께 키타이로 향했다가 만수르 칸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은 오이라트와 모굴 칸 세력의 충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나(Dughlat. 1996: 58), 결국 16세기 초에 하투부터 간쑤 새외, 가욕관 서쪽을 돌아 칭하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은 몽골 세력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몽골 세력은 ‘청해 몽골’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모굴 칸국과 청해 몽골은 16세기 초반에 기존 관서 위소들의 영토 및 주민들을 나누어 소유했다. 물론 양자의 갈등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지만 대체로 양자를 가르는 경계선이 생겨났는데, 이는 현재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와 간쑤-칭하이성 사이의 경계선과 일치한다. 이 경계선은 곧 종교적 영향력의 경계선이기도 하여, 현재에도 신장위구르자치구에는 위구르계 무슬림들이, 간쑤-칭하이성에는 티베트계 주민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물론 16세기 이후로 몇몇 무슬림들이 티베트 문화권인 하서회랑이나 몽골, 심지어는 티베트 본토로 선교여행을 떠났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이는 점처럼 분산된 일부의 무슬림 공동체를 구축했을 뿐, 이전처럼 그 경계가 동쪽으로 확장되는 일은 없었다.77) 이러한 경계선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관서 위소들의 구성원은 위에서 보았듯이 각기 투르판과 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들의 선택 역시 종교와 상당부분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세기 상반기의 사주위를 시작으로 적근몽고위, 한동위, 한동좌위는 가욕관을 넘어 관동에 자리 잡은 반면, 비교적 이슬람 색채를 보이는 하미나 곡선위는 투르판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특히 하미가 모굴 칸국에 복속한 와중에도 위구르 도독은 명으로 달아났으며, 티베트의 지지를 얻었던 안정왕과 그의 국사 역시 명에 복속했다.
이렇게 16세기 초에 두 종교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해지면서, 그 이후에 이 일대에서 나타난 충돌과 갈등은 오롯이 종교적 측면으로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사이드 칸이 사망하기 직전인 1532년에 직접 참여했던 티베트 원정은, 보다 명확해진 종교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슬람권과 티베트 불교권 간 종교적 충돌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졌다.78) 즉, 여러 학자들은 이 사건을 ‘이슬람 측에서 티베트 불교인들을 무력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침공한 사건’이라 해석했다.79) 이 사건의 당사자이자 역사가인 하이다르(Mirza Muhammad Haydar)가 이 사건을 철저한 성전의 관점으로 기록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했다. 그의 저서인 『라시드사』은 만수르 칸의 키타이와 오이라트에 대한 공격 또한 ‘성전’으로 묘사했으며, 그 와중에 사망한 카타키 교단의 후예 타즈 앗 딘(Tāj al-Dīn)의 죽음은 순교로 기록되었다.
한편 관서 여러 세력의 정체성을 종교로 가늠하는 것은 비단 이슬람 사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무렵 변경 수신들의 상주문에는 투르판의 모굴 칸국을 회이(回夷)라고 지칭하는 기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519년에 발생한 황족 주신호(朱宸濠)의 반란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회이가 다가와 옆구리에 번승을 (끼고) 불러들여 (그들이) 뒤따랐다[至如回夷近在肘掖番僧召入隨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80) 그 외에도 모굴 칸국을 회(回), 회적(回賊)으로 표시하는 사료들이 많아, 이 당시 명에서도 종교를 기준으로 서북의 제 세력을 구분지어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 관서 일대에서 발생한 갈등을 오롯이 종교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해야 할까? 이 지역이 두 종교 세력권으로 나누어진 것은 앞서 살펴보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일대에서 발생한 모든 갈등을 종교 갈등이라고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비무슬림 이교도에 대한 공격을 성전으로 포장하는 것은 무슬림 역사서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관습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라시드사』에서 성전으로 명시하고 있는 만수르 칸의 동진 및 사이드 칸의 샤릭위구르 공격은, 전술했듯이 종교 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1532년 티베트 원정 역시 모굴 군대의 진격 경로가 티베트 교단이 집결해 있는 위짱 지역, 즉 ‘키타이와 티베트의 키블라’에 미치지 못한 채 서부지역에 한정되었던 데다,81) 이들이 진격 도중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카슈미르(Kashmīr), 누브라(Nūbrah), 발티(Bāltī), 마르율(Māryūl) 등이 당시에도 이미 이슬람권이었으므로 이 원정이 애초에 오롯한 비무슬림에 대한 성전으로 계획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들이 거쳤던 티베트 서부지역인 아리(阿里) 지방에는 이 당시 티베트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녔던 팍모두파(Phag mo gru pa)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별도의 왕국이 건설되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모굴 칸국의 실제 공격 목표는 중앙 티베트가 아닌 티베트 서부의 왕국들에 한정되었을 공산이 크다(Dughlat. 1996: 94). 이 지역이 중앙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적어도 수십 년 이후의 일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관서 위소들의 선택 역시, 단순히 종교적 요인만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즉, 티베트 불교도이기 때문에 티베트와 긴밀했던 명을 선택하고, 무슬림이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권인 모굴 칸국에 복속하는 식의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관서 위소 중에 다수는 원대에 티베트 본토 및 그 주변을 행정적·군사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임명된 종왕 및 관료들의 후손으로, 이들의 지배층은 몽골-투르크계였으나 피지배층 중에는 티베트 인들이 많았다.82) 또한 명에서는 관동의 몇몇 위소들, 즉 하주나 서녕, 조주(洮州)와 민주(岷州) 등을 행정 근거지로 삼아 관서 위소와 티베트로 향하는 물자를 통제했는데, 이 위소들에는 원대의 토번 선위사 출신인 하주위를 비롯한 티베트 인 관료들이 토관으로 임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인들이 관서 위소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관서 위소에는 수장이나 왕 외에 국사와 같은 고위 티베트 승려가 존재했고, 한동과 같이 승려의 초무를 받아 명의 위소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명은 티베트 불교가 이 일대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의 각 법왕 및 왕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함으로서 명이 티베트 불교에 호의적이라는 인상을 구축했으며, 승강사(僧綱司)와 같은 제도를 적용하여 각 위소의 고위 승려들에게 추장과 별도로 경제적 혜택을 부여했기 때문에 각 위소에서 승려의 입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관서 위소의 다수는 신앙심이 아니더라도 경제, 정치, 사회적 요인에 의해 명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관서 위소부터 시작하여 서역 일대에 걸쳐 분포해 있던 회회인들은 예부터 중국의 변경 도시에 열린 시장과 서부의 주요 무역 거점 도시에 열린 시장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주요 경제 활동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의 변경 도시에 다다를 동안 거쳐야 했던 모든 오아시스 도시들이 차례로 이슬람화되었고, 16세기 초에는 하미까지 모굴 칸국의 판도에 들어오면서 가욕관이서의 일정 규모를 가진 오아시스들은 모두 이슬람화되었다. 이때 이슬람은 대대로 이어져 온 그들의 생업을 공유하는 각 오아시스의 구성원들을 결속케 하는 구심점으로서, 단순한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17세기 초에 라호르(Lāhūr)에서 매년 중국으로 향하는 대상단에 합류하여 야르칸드를 거쳐 중국 숙주를 방문했던 선교사 베네딕트 괴즈(Benedict Goës)의 기록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여러 오아시스들은 명나라 황제에 대한 공물을 운반한다는 조공 사신단이라는 명목 하에 오아시스의 여러 상품들을 판매하기 위한 대상단을 꾸렸고, 각 오아시스의 지배자는 공동의 성공을 위해 이 대상단이 자신의 오아시스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증을 발급하면서 자신의 상인을 투입했다. 또한 도시의 유력자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투자하거나 대출해 주었고, 상인들은 여행이 끝난 후에 번 돈으로 투자금과 대출금을 갚으며 다음 여행을 준비했다. 이처럼 여러 오아시스가 조직적으로 꾸려 나가는 대상무역은 이슬람의 고유 율법과 문화, 그리고 같은 종교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교도로 보이는 괴즈가 대상단에 합류하자 많은 무슬림들은 그를 견제하고, 때로는 이슬람의 맹세를 강요하기도 하고, 종교 논쟁에 그를 초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개무역을 누대에 걸친 생업으로 삼는 회회인들이 이슬람권 국가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뿐 아니라 경제적 미래를 위해서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종교라는 요인은 단순히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과 열정만이 아니라, 그 종교를 기반으로 구축되는 경제·사회·문화·정치적인 요소를 아우르는 복합적 요인이었던 것이다.83)
62 英宗睿皇帝實錄, 天順三年/八月/一日. 63 英宗睿皇帝實錄, 天順三年/正月/二十四日; 펠리오에 의하면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벡 아르슬란이란 인물인데(宮脇淳子, 2000: 148), 『황금사』는 그를 오이라트인 베게르센 타이시라 명시했다. 64 Serruys(1977: 366); 아마산지 타이시는 에센 사후 모굴리스탄 초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므로, 에센 부카 칸이 일리발릭에서 축출되었을 때 각지로 흩어졌던 모굴 칸국의 구성 부족 중에 추라스, 바아린 등은 그에게 피신하기도 했다. 한편 1460년대 말에 유누스 칸이 아부사이드 미르자의 도움을 받아 모굴리스탄 초원으로 귀환하고자 했을 때에도 그 때문에 다시 타슈켄트로 달아나야 했다. 유누스 칸은 아마산지 타이시가 자신의 ‘기초의 유르트’로 귀환한 이슬람력 877년(1472~1473)에야 다시 모굴리스탄 초원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Dughlat. 1996: 61). 한편 『명실록』 및 『황금사』에 의하면 그는 1466년에 우량하이 태녕위의 모리해(毛里孩, 마울라카이 옹)와 대립관계에 있어 그를 하투에서 몰아내고자 했다(憲宗純皇帝實錄, 成化二年/九月/十三日). 그러나 1468년에 ‘부중의 난리’를 만났고, 본문에서 언급된 두 아들인 이브라힘 및 일야스 왕과 분리되어 모굴리스탄 초원 방향으로 서진했다가 위에 언급한 대로 1472-3년에 다시 오이라트의 원래 영역인 서몽골로 돌아간 듯하다. 다만 그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은 사라졌다가 1478년에 ‘이미 죽었다’라고만 언급된다. 65 명실록에 의하면 1492년에 하미의 야메크린 부 독복화태복(禿卜花台卜)의 ‘이웃 부족’(鄰部)으로 일야스왕(亦剌思王)과 이브라힘왕(亦不剌因王)이 두목, 평장, 지원 등과 함께 명 황제에게 상주를 올렸으며(孝宗敬皇帝實錄, 弘治五年/十月/十八日), 1495년에는 그 두 왕 및 멩케 왕(滿哥王)이 ‘야메크린 부의 수장’으로 등장한다(孝宗敬皇帝實錄, 弘治八年/六月/三日). 66 憲宗純皇帝實錄, 成化二十年/十月/十日. 67 이 부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Henry Serruy의 연구가 있는데, 이 부족을 원대의 여러 기록에서 등장하는 메르키트와 연결 짓는 기존의 연구를 부인하고 위구르 땅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베크린, 혹은 메크린 부와 연결 지었다. 제일 이른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에지나 지방에 거주했었는데, 15세기 후반에는 간쑤 경계에서, 이후에는 하미에서 발견되었다(Serruys, 1963: 438). 요컨대 메크리 부는 관서 일대를 여기저기 이동하던 토착 부족이었는데, 이후 하미에 자리했고 본문에서 등장한 이브라힘 왕에 예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8 憲宗純皇帝實錄, 成化十年/閏六月/二十二日. 69 그가 이끄는 부족의 이름이 ‘합랄회’인 점이 독특한데, 이에 관해 『수역주자록』에서는 일고랄 및 테무게, 토빠 등이 하미의 유민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嚴從簡, 2000: 477). 일고랄 본인은 한동 부락인인 엄장의 후손으로 한동인이기는 하나, 테무게나 토빠는 투르판의 명을 받아 하미에서 활약한 곡선위 출신의 아란과 인척관계였으므로 이들이 본래 하미의 유민 출신이었거나 적어도 하미에서 사주로 달아난 이들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70 英宗睿皇帝實錄, 正統九年/十一月/二十四日. 71 世宗肅皇帝實錄, 嘉靖七年/六月/二日; 『변정고』에는 그가 이끄는 ‘투르판’ 족이 사주에서 투항한 번이(番夷)를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사주에 주둔했던 한동좌위의 일고랄에게 맡겨졌으나, 『수역주자록』을 보면 그의 형인 탈제가 테무게의 누이와 결혼한 후 곡선위 인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무리들이 테무게에게 의지하여 사주에 머물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무리들은 본래 곡선 위의 잔존 세력으로 볼 수 있다(嚴從簡, 2000: 470). 72 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 經部·高昌館課(1988: 309). 73 曾文芳(2002: 33); 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 經部·高昌館課(1988: 316). 74 『변정고』의 기록을 보면 하미, 한동위, 적근몽고위, 한동좌위에 속했던 여러 집단들의 수는 적게는 몇 백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른다. 예를 들어 하미 출신의 하미위구합랄회는 252명, 위구르는 300명, 하미위신합랄회는 778명이므로 전체가 1000명 정도가 되는데 하미의 경우 전 인구가 이주한 것이 아니며 다른 위소의 이주자들은 몇 천 단위를 헤아린다. 이에 비하면 안정위의 이주자는 20명이며, 아단위나 곡선위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張雨, 2011: 245-250). 다만 이 기록은 16세기 상반기까지의 기록이며, 이후에 그 이후에도 이주했을 가능성은 있다. 예를 들면 청대의 샤릭위구르 현황에 대한 佐口透의 연구에서는 청대 감주 부근에 자리했던 서랄고이(西喇古爾)의 황번인(黃番人)과 흑번인(黑番人)에 관한 몇몇 사료를 제시하고 있는데, ‘西喇古爾’라는 단어 자체가 ‘시라 위구르(Sira Uygur)’ 즉 황색 위구르에 해당하며, 그중에서도 황번인은 원조의 지파(支庶)로 명 말에 감주 남산으로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샤릭위구르가 16세기 후반기에서 17세기 상반기에 감주로 이주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탕구트(唐烏忒)족이었던 흑번과는 달리 달단 족이며 원의 지파인 황번은 안정위와 그 휘하의 이들이었을 것이다. 1696년에 이들의 수가 6,079명에 달했다. 75 武宗毅皇帝實錄, 正德十一年/五月/十日; 하미위 충순왕과 안정위 안정왕의 계승 문제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1490년 무렵 하미의 충순왕의 자리가 비었을 때 명에서는 옛 안정왕의 조카이자 옛 충순왕 토토의 질손이었던 섬파(陝巴)를 충순왕으로 세웠는데, 안정왕 천분은 자신의 동생 작아가가 충순왕이 되는 것을 추천했으나 명에 의해 거부되었다. 일찍부터 충순왕 계보에 속하는 남성이 부족했던 하미에서 안정왕의 후손을 초빙하려 했던 것은, 같은 차가타이 칸의 후예이고 명의 위소인데다 가까운 곳에 자리했던 안정왕의 후손이 그들의 군주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76 殊域周咨錄, 土魯蕃, 弘治元年條; 明史紀事本末, 興復哈密, 弘治元年條; 明史·哈密衛傳. 77 이슬람권의 시대구분에 따르면 16세기 초는 중간시기(Middle Period, 10~15세기)와 근세(Early Modern, 16~18세기)를 가르는 시점이다. 고전시대(Classic)에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던 이슬람권 영역은, 약간의 둔화는 있었으나 중간시기에도 여전히 확장세를 이어 나갔다. 중국과 접하는 동쪽 경계를 예로 들면, 몽골 시대 직전까지는 러시아령 중앙아시아에도 불교 사원이 있었고 14세기 후반에는 위구리스탄에 수많은 불교도들이 존재했으나 15세기에 걸쳐 그들이 동쪽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78 모굴 칸국의 군대는 1532년 7월경(이슬람력 938년 둘 히자 월), 현재 파키스탄 북동부에 해당하는 발티스탄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격하다가 카슈미르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칸에게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으므로 그는 야르칸트로 되돌아갔고, 대신 미르자 하이다르로 하여금 ‘우르상(Ūrsang)’으로 향하게 했다. 이후 미르자 하이다르는 4개월에 걸쳐 티베트 서부 아리지구를 횡단했으나,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그의 주군 사이드 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라시드 칸이 본인의 친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티베트에서 철수했다. 『라시드사』는 티베트가 기왕의 이슬람권 지리서에 언급된 적이 없었음을 지적하며 티베트의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그 영역을 발루르 서쪽이자 칸젠푸(샨시성) 하주(河州) 살라르의 동쪽, 카슈가르의 남쪽이라 비정했다. 이는 현재의 시짱티베트 자치구뿐 아니라 칭하이성과 쓰촨성 동부를 아우르는 광의의 티베트 문화권에 해당한다. 79 우선 조셉 플레쳐는 1976년 자신의 논문에서 16세기에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일대에서 활약한 호자 이스학 왈리의 생전에 유목민을 대상으로 하는 무슬림 선교사들의 최대 적은 티베트에서 수입된 불교였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자콘(Zarcone)은 1995년 자신의 논문 “Sufism from Central Asia among the Tibetan in the 16-17th Centuries”에서 낙시반디 수피교단의 추종자인 사이드 칸과 무함마드 하이다르 미르자가 종교적인 열정과 교단 특유의 선교에 적극적인 교리적 특징에 의거하여 티베트 인들을 개종시키고자 침공한 것으로 보았다. 즉 16~18세기에 이슬람과 티베트 불교가 영향력의 경계선에서 갈등을 빚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좀 더 이론화한 엘베스콕(Elverskoq)은 2010년 그의 저서 Buddhism and Islam on the Silk Road에서 불교와 이슬람의 상호 관계를 초기부터 청대에까지 통사적으로 살펴보았는데, 4장에서 그는 몽골제국 시기까지 접촉은 있었지만 충돌은 일으키지 않았던 양 종교가 점차 충돌을 빚었음을 설명하면서, 그 원인을 이슬람의 팽창의 정지 및 그 영역의 정치적 파편화, 불교와의 대치 및 그 가운데에서 생겨난 지하드(Jihad)의 이론에 돌리고 있다. 그런데 그 이슬람-불교의 대립이 바로 15세기, 우와이스 칸이 정치친화적인 교파인 낙쉬반디 교단을 신봉하고, 에센 칸이 불교도가 되었을 때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16세기 초에 티무르조의 멸망과 더불어 사파비의 시아화로 인해 모굴 칸국의 낙쉬반디 교단이 동쪽에 집중했을 때 티벳에 대한 성전이라는 표어가 수면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학자들이 16세기 이후 이슬람과 티베트 불교가 세력의 경계선에서 일종의 갈등을 겪었다고 본 반면, 론 셀라(Ron Sela)는 2012년 그의 논문에서 반대의 의견을 표했다. 론 셀라는 플레쳐의 의견을 검토하고자 당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사료들을 검토하며 16~18세기 사이 티베트 불교에 관한 무슬림들의 인식을 살펴보았는데, 그 사료 속에 양자의 실제적인 충돌에 관한 증거를 찾기 어려우며, 이슬람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관심은 예부터 이어져 오는 관습적인 수사에 그칠 뿐이라고 설명했다. 80 武宗毅皇帝實錄, 正德十四年/十月/三日. 81 『라시드사』의 저자는 호탄과 힌두 도시들 사이에 위치한 ‘티베트의 영역’에 라다크(Ardaq), 구게(Ghūghe), 스피티(Aspitī) 등이 있다고 하였다(Dughlat. 1996: 355). 또한 저자는 실제 티베트 원정을 진행했으므로 자신이 거쳤던 지명을 나열했는데 발티부터 라브시카르(Rābshkār), 마르율(Mārīyūl), 파두크(Padūq), 쿨레(Kūle), 루두바르스(Rūdūbārs), 준케(Jūnke), 마스카브(Maskāb), 지르수(Jīrsū), 칸카르(Kānkār)까지였다고 한다. 그중에 위의 세 지명, 라다크와 구게, 스피티는 현재에도 볼 수 있는 지명으로 당시에 왕국을 이루고 있던 대 영역이었다. 스타인(R. A. Stein)의 1981년 지도를 보면 라다크 레 지역과 네팔의 돌포(Dolpo) 지역 사이에 마르율이 위치해 있고, 그 동남쪽이 구게 왕국이며 마르율보다 좀 더 인도 쪽으로, 지금의 심라 지역이 스피티라고 한다. 이 지역은 대체로 카일라스 산 서북쪽에 해당하는 아리 지구이다. 한편 그 뒤에 나열된 지명의 경우 마르율 보다 동쪽에 위치하므로 아리지구를 벗어나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르카쩌 시, 즉 시가체(짱) 지역에 포함될 것이나, 그 지명이 생소하여 하이다르가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하이다르는 자신이 거쳐 간 곳을 설명한 후 ASKBRQ와 방갈라(Banghāla)를 언급하며 두 지역 사이가 대략 24일의 경로이며, 우르상(Ūrsang)은 ASKBRQ의 동쪽에, 그리고 방갈라는 남쪽에 위치하는데 우르상은 티베트와 키타이의 키블라이며 거대한 사원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라싸를 의미하는 것이며 ‘방갈라’는 방글라데시 혹은 그 서쪽의 벵갈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이다르는 자신이 우르상을 목표로 4개월을 나아갔으나 도중에 귀환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략 아리 지구에서 멈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82 이에 관해서는 『숙진지』의 숙주 남산에 거주하는 10개 부락에 관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내용인 즉슨, 이 부락들이 영락제 시기 몽고, 한동 등 위 출신으로 정덕연간에 숙주로 귀부했는데, 이들의 말하는 언어가 북변의 제번과 다르며, 민머리[光頭]와 늘어뜨린 머리[垂髻]를 가지고 있어 모두 서번이라 여겼다고 한다. 83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에 반하는 선택을 행한 하나의 사례가 하미의 합랄회 무리이다. 앞서 보았듯이 합랄회는 무슬림 집단이나, 하미가 투르판의 공세에 휩싸여 있을 때 명에 귀부했다. 이즈음 그들은 수차례 명으로부터 식량과 여러 물자를 제공받았고, 결국 그 수장인 바지르미시(拜迭力迷失)는 그 이전에 수차례 하미의 회회 도독인 사이드 후세인과 함께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에 귀부했다(孝宗敬皇帝實錄, 弘治十三年/十二月/十三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