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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15세기 전반, 오이라트의 성장과 위소의 파열
전술했듯이 관서의 일곱 위소는 홍무제~영락제 재위초기의 서북 상황 및 명이 그들에게 제시한 여러 가지 혜택을 고려하여 동족에 칼끝을 겨누는 것을 선택했다. 홍무제 시기만 해도 몽골리아 초원에 자리한 여러 세력의 거점은 관서 위소와는 상당히 멀었고, 모굴 칸국의 세력은 약했다. 당시의 카안인 토구스 테무르 카안이 홍무제에 의해 크게 패배했던 곳은 현재 내몽골 자치구의 동쪽 끝에 위치한 부이르 호이며, 모굴 칸국은 티무르에 패배하여 본래의 근거지인 이식쿨(Īsīgh-Kūl)에서 베쉬발릭으로 밀려나 있었는데, 그들의 세력이 워낙 약화되어 있어서 관서 위소 전체가 베쉬발릭을 견제한다면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1404년에 티무르가 동몽골과 연대한 카안 울루스의 후예, 울제이 티무르를 동반하고 중국 원정에 나선 것은 관서 위소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티무르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모굴 칸국의 물자와 군대를 징발했고, 이 소식은 ‘모굴 칸국이 사마르칸트와 함께 중국을 공격하러 온다.’는 하미의 첩보를 통해 영락제에게 알려졌다.19)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사망했고 이후 4년에 걸친 지난한 계승분쟁이 발생했으므로 티무르의 자손들은 동방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이에 당시 모굴 칸국의 칸 샤미 자한은 2년 만에 입장을 바꾸어 명에게 티무르조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20)
그러나 영락제 시기가 되면 몽골리아의 세력은 홍무제 시기보다 훨씬 관서 위소에 가까워졌었다. 몽골리아 초원에서는 15세기 후반에 다얀 칸(達延 可汗)이 등장할 때까지 전역을 통일한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항상 내부에서 분열과 갈등이 존재했는데, 그중에 일부 세력은 몽골리아 내에서 세력을 상실했을 때 관서 위소가 위치한 가욕관 새외(塞外)~하미 북부에 펼쳐진 황야로 왕왕 남하하곤 했다.21) 예를 들면 15세기 초반에 동몽골이 홍무제에게 대대적으로 패하고 그 틈을 타 오이라트가 조금씩 세력을 펼치던 와중에, 정확한 계보를 알 수 없으나 몽골의 칸이라고 칭해지는 굴리치(鬼力赤)라는 인물이 하미의 북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인물의 계보에 관한 정보는 역사서마다 다르며, 오이라트에 적대적이었으나 동몽골 아미르들과도 완벽한 연대를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처럼 몽골리아 초원 동·서의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는 이 황야지대에 자리하며 하미의 내정에 간여하다가 결국 충순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분노한 모굴 칸국의 샤미 자한이 군대를 일으켜 굴리치를 공격했는데,22) 이것이 관서 위소를 둘러싼 몽골리아 세력과 모굴 칸국의 첫 번째 충돌인 셈이다. 이때 하미위는 충순왕의 살해를 명에 은폐함으로써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세력자인 굴리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굴리치가 다른 칸 후보를 추종하는 부중에 의해 살해된 후, 전술한 간쑤 새외 황야에는 여러 몽골 세력의 방문이 잇따랐다. 그중에 주목할 만한 인물은 훗날 북원의 타이송 칸(岱宗汗)이 되는 톡토부카(脫脫不花)다. 1409년 감숙총병관이었던 하복(何福)이 황제에게 상주하기를, 몽골의 톡토부카왕과 바투왕 휘하 여러 몽골 세력들이 제각기 소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에지나(亦集乃)에 멈추어 있다 하였다. 황제는 톡토부카가 기왕에 왔으나 계속 에지나에 멈추어 있으니 무언가 변고가 생겼을 수 있다고 보았다.23)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간쑤에서 도달한 소식에 따르면 그와 함께 항복 의사를 밝혔던 이들은 남하했으나, 톡토부카는 되돌아갔다고 한다. 황제는 “오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 좇지 않는다(來者不拒去者不追)”라고 하며 그에 대한 추격을 거두었다.24) 이후 그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오이라트의 마흐무드(馬哈木)가 보얀시리(本雅失里)를 살해하고 전국새를 얻었을 때, 명에게 요구한 사항 중에 하나가 톡토부카의 아들을 귀환케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1409년에 그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가 철회했을 때, 남하한 나머지 세력 중에 그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의 소식은 1432년 4월에 재차 등장하는데, 그가 20여 호와 더불어 명과 접촉했다가 포기했고, 현재 철문관 부근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황제는 다시금 “오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 좇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에 대한 추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20호와 함께 있는 이를 좇아서 잡아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것이었다.25) 그러나 그는 2년 후에 무리를 이끌고 마흐무드의 아들인 토곤 타이시에게 합류하여 타이송 칸으로 등극함으로써 토곤 세력에게 칭기즈 칸의 정통성을 담보해 주었을 뿐 아니라, 동몽골 아룩타이(阿魯台)의 처자·부속을 습격하고 그 가축을 약탈하는 등 몽골리아 초원 내 세력 다툼에서도 일익을 담당했다.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보면, 오이라트에서 에지나의 통로를 통해 남하했으며, 약 20년 후에 철문관(鐵門關)에 나타났다. 다만 이때의 철문은 지금 잘 알려져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그 철문관이 아니라, 량주(凉州, 현 우웨이 시) 동부에 위치한 관문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에지나에서 하투(河套)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이후의 여러 몽골 세력에서도 확인된다.
톡토부카와 일부 몽골 세력이 1409년에 남하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 전 해에 몽골리아 초원으로 나아가 동몽골의 아룩타이와 합류하여 칸이 되었던 보얀시리, 울제이 티무르(Uljay Tīmūr) 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몽골리아를 오랫동안 벗어나 있었던 울제이 티무르가 새로 칸이 되면서, 몽골리아 초원의 여러 세력들이 그에게 합류하기보다는 그의 영역을 벗어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미국의 학자 로빈슨(Robinson)은 1409년에 집중된 여러 몽골 집단의 투항(Submission)이 거의 3만 명에 이르렀음을 언급했다.26) 결국 보얀시리는 몽골리아로 돌아간 지 불과 3년 만인 1411년에 오이라트와 명의 협공으로 사망했으나, 영락제는 보얀시리의 죽음으로 인해 세력이 증대된 또 다른 몽골 세력을 가만 놓아 두지 않았다. 보얀시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이라트의 마흐무드는 그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가 영락제의 2차 막북 원정(1414)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1416년에 아룩타이와의 결전에서 패한 후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다시 아룩타이 세력의 부상을 야기했으며, 영락제는 1422년부터 3년간 아룩타이를 공격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다.
그러나 명이 1420년대에 세 차례 막북 원정의 목표를 아룩타이에 두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1420년대는 동몽골보다는 오이라트의 세력이 몽골리아와 그 주변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1422년 영락제의 3차 친정 당시 투항한 몽골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托懽)이 그 전 해에 아룩타이를 대파했었다고 한다. 물론 아룩타이는 1426년에 아다이 칸(阿台汗)을 옹립하며 오이라트와 끝까지 대립했으나, 1434년에 결국 토곤과 톡토부카의 잇단 공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런데 이러한 몽골리아 초원 내의 세력 변동은 곧바로 서북에 영향을 끼쳤다. 1420년대 중반부터 관서 위소 내에 이전에는 없었던 소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427년에 사주위는 명을 찾아 온 모굴 칸국 우와이스(歪思) 칸의 사신 및 사마르칸트의 사신을 별안간 약탈했다.27) 물론 이러한 행동은 한족 왕조에서 으레 그렇게 생각하듯 ‘야만인 이민족들의 일반적인 행태’일 수도 있지만, 사실 사주위가 창설된 후 20년 동안 명과 티무르조 간의 유례없이 잦은 사신 왕래가 있었음에도 이와 같은 약탈은 발생한 적이 없었다.
이때 위의 사주위 약탈 기록에 등장하는 ‘달적(韃賊)’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주위는 몽골계 수장을 지닌 위소이기는 하나, 명의 기록에서는 이제껏 이들을 달단(韃靼)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이 당시에 달단이라는 표현은 몽골리아 초원에 거주하는, 오이라트 이외의 세력, 즉 동몽골을 주로 지칭했다. 그런데 이 우와이스 칸 사신을 공격한 사주 세력을 지칭할 때 ‘사주위 달적’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또한 사마르칸트 사신을 약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사주위의 도지휘 차간부카(察罕不花)의 아들과 달적’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사주위의 몽골계 지배층은 ‘달적’과 별도로 언급되므로, ‘달적’이란 존재는 몽골리아 초원에서 남하한 후 사주위의 일부 세력과 연합하여 변경을 교란했던 세력이라 볼 수 있다.
상기 사건 이후 관서 위소에서는 사주위, 한동위, 적근몽고위의 일부 세력이 중국을 찾는 서역의 사신을 약탈하거나, 관서 일대를 순찰하는 중국인 관료를 약탈하거나, 중국 변경 관료와 내통하는 등 변경을 계속 교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움직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면 관서 7위 내의 일부 세력이 주둔지 일대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정도로 보일 수 있으나, 앞서 언급한 달적의 존재와 결부지어 보면 이는 몽골리아 초원에서 모종의 세력이 남하하여 그간 명과 우호관계를 맺어 왔던 관서 7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달적의 선동에 이끌려 약탈 및 분란에 동참했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명에게 일정한 관직을 받은 지배층이기는 하나 당시에 명이 각 위소를 총괄하도록 명령했던 인물이 아닌 이들이었다. 앞서 1427년에 달적과 함께 사마르칸트의 사신을 약탈했던 사주위 도지휘 차간부카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 바로 그 예이다. 사주위는 창설된 시점부터 1440년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곤즉래가 줄곧 총괄해 왔는데, 그는 명에게 서북의 정세를 염탐하여 보고하는 등 명의 서북 관리에 있어서 최측근 첨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주위 수장의 행보와는 반대로 달적과 교통하여 일대에 혼란을 야기하는 별도의 세력이 횡행했던 것이다.
달적은 사주위에만 머무르지 않고, 1430년대에는 적근몽고위와 한동위에도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한동위와 적근몽고위의 일부 지배층, 예를 들면 한동의 거아즉(可兒即), 고노파도마실가(苦奴把都麻失加), 반마사결(班麻思結) 및 적근몽고의 혁고자(革古者), 파도마(把都麻) 등이 체르첸(扯兒禅), 오이라트, 하미, 호탄(阿端), 헤라트에서 오는 사신을 약탈하거나 여타 위소를 침입하고, 심지어는 숙주까지 약탈을 시도했다. 반면 사주위의 추장 곤즉래나 적근몽고위의 추장 차왕실가(且旺失加)는 명의 명령을 받아 이들과 맞서 싸웠다. 이 달적의 실체는 1433년까지 사료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나, 1433년부터 달단 멩케부카(猛哥卜花)라는 인물이 하미나 사주를 약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28)
이와 관련하여 1435년 병부에서는 당시에 간쑤 새외 황야에 자리하면서 하서 회랑 및 관서 일대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세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간쑤 연변을 진수하는 양주 등 7위 지방은 서로 1800여리 떨어져 있어, 북로의 도적이 출몰하면 거의 비어 있는 상태이다. 양주의 동쪽과 철문관 바깥에는 도르지벡(朶兒只伯)이 있고, 진이(鎭夷)의 북쪽, 에지나로에는 아단지(阿端只)가, 숙주의 서쪽, 하주 변경 바깥에는 멩케부카(猛哥卜花)가 기회를 노리고 있어 변방의 우환이 되고 있다.29)
상기 기사를 통해 멩케부카를 포함하여 도르지벡과 아단지 등이 ‘북로의 도적’으로 간쑤 새외 황야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르지벡은 동몽골 아룩타이의 부장으로 1434년 토곤과 아룩타이의 전쟁에서 아룩타이가 패배한 이후 양주(涼州) 동부에 와서 하투 서부 및 간쑤 변경 일대를 약탈한 것이 명의 기록에 보이고 있다. 한편 멩케부카는 1423년 영락제가 막북을 원정하던 시기에 아룩타이 진영에서 명에 투항했던 충용왕(忠勇王) 에센토곤(也先土干)의 동생인데, 그는 형과는 달리 명에 복속하지 않고 간쑤 새외 황야에 자리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들이 관서 위소의 몇몇 세력과 결탁하여 근 10년간 그 일대에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1437년의 기록에 따르면 아단지와 도르지벡이 파견한 이서(迤西)의 사신이 1달 사이에 두 차례 내조했는데, 명은 ‘너희가 아룩타이(和寧王) 사후에 처자와 함께 그곳에서 안녕히 있을 수 없어 변방을 공격’하였음을 이해하면서도, ‘수년간 번구가 되어 우리의 변경을 괴롭히니, 오이라트의 순녕왕(順寧王) 토곤과 관서 제위소가 너희를 토벌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너희가 귀부하였으니 편한 곳에서 유목을 행하라. 만일 문제를 일으키면 오이라트의 청에 따라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답했다.30) 그러나 그들이 실로 복속하여 소란이 잠잠해졌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2년 후에는 하미에서 발견되었다.
이 달적들이 1437년 이후에 하미로 퇴각한 사실은 적근몽고위의 수장 차왕실가가 멩케부카 및 토곤티무르(脫歡帖木兒)와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31) 이 토곤티무르는 『명실록』에는 ‘달단’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하미의 충의왕이다. 멩케부카는 명과 관서 위소 수장들의 반격으로 인해 하미로 퇴각하며 하미의 충의왕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또한 아단지 및 도르지벡 역시 이 시점에 하미로 향했는데, 이는 사주위의 도지휘동지 아치부카(阿赤卜花)가 주를 올려, 자신이 과거에 아단지 및 도르지벡에 의해 하미로 끌려갔는데, 그들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되돌아가고자 했으나 하미의 도독 피랄납(皮剌納)가 보내주지 않으며 오이라트와 서로 싸우고 있다고 보고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32)
이처럼 달적들이 하미로 향했던 사건은 결국 오이라트의 직접적인 하미 내정 간여로 이어졌다. 하미는 1420년대부터 오이라트와 혼인관계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1440년에 타이핑(太平)의 아들 네레쿠(捏列骨)와 샴스 웃 딘(陜西丁)이라는 장군이 하미를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바르쿨(把思闊)에 자리했었던 멩케부카가 하미로 와서 그들을 제압했다.33) 이 사건 직후 피랄납과 사만치(撒蠻赤) 등의 하미 도독이 멩케부카와 손을 잡고 충순왕을 살해하고자 했다가 발각되었다는 보고가 명에 전달되었다. 이 두 사건은 명에 약 한 달의 간격을 두고 보고되었는데, 그만큼 하미 내부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하미에는 충순왕 계열과 충의왕 계열이 존재하는데, 종가는 충순왕이지만 충순왕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명이 별도로 세운 것이 충의왕 계열이다. 당시에 충순왕인 다와다시리(倒瓦荅失里)는 오이라트 에센(也先)의 누이인 눈다시리(弩溫答失里)의 자녀였으므로, 위의 사건은 하미위의 도독 일부와 충의왕이 ‘달적’과 연합하여 오이라트를 배후에 둔 충순왕을 살해하고 하미를 장악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오이라트의 에센이 직접 간여하여34) 하미를 완전히 장악하고 더 나아가 여타 관서 7위에 영향을 발휘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 이후 멩케부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그와 함께 혼란을 야기했었던 반마사결이나 혁고자 등은 여전히 관서 위소 내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443년 무렵에는 관서 7위의 각 수장들에게 이들보다는 오이라트의 약탈과 침공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에센은 하미를 장악한 후, 하미의 장악에 있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던 혼인정책을 사주와 적근몽고에게 강요했다.35) 이에 대해 명은 처음에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나 1443년에 에센이 하미, 적근, 사주 등을 침략하고, 간쑤 새외 황야에서 몽골리아로 향하는 통로였던 에지나에 적구(賊寇)가 출몰했으며, 에센이 관서 7위의 추장에게 관직을 주면서 대동과 영하로 진출할 것으로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심각성을 느끼고는 여러 위소에 사신을 보내어 오이라트에게 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사주와 적근 등의 위소 세력들은 저항보다는 안전한 곳으로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 오이라트가 하미를 장악하고 다른 위소로 영향력을 펼칠 때, 위소의 일부 세력, 특히 명이 세운 추장이 아니었던 이들은 멩케부카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오이라트와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446년에 반마사결이 오이라트의 에센에게 봉사한다는 첩보가 하주위를 통해 명에게 보고되었다.37) 그는 본래 한동위 출신이나, 부친인 엄장(奄章)의 시기부터 한동위의 여타 세력과 화목하지 못해 사주 근처로 도망하여 살았던 인물이었다.38) 또한 사주위의 추장인 곤즉래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남가(喃哥)가 명에 의해 사주위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동생 쇄남분(鎖南奔)도 오이라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그들에게서 왕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39) 이러한 움직임을 크게 불안해했던 명은 이제껏 사주에서 수차례 관동으로의 이주를 요청했을 때마다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1446년에는 사주위에게 서녕의 사찰인 소발화사(小鉢和寺) 옆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다. 사주위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그중에 일부는 오이라트로 달아나거나 한동위로 달아났으므로 명은 나머지 세력을 압박하여 감주 남산 아래 농목지로 데려왔다.40) 이로서 관서 위소 중에 사주위가 처음으로 명맥을 다하게되었다.
이처럼 위소의 일부 세력 중에 명이 세운 각 위소의 대표 추장이 아닌 이들이 멩케부카나 오이라트의 에센 등과 연합했던 이유는, 이 방법만이 그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동아줄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명이 위소를 설치하고 인신 등을 지급하여 경제적인 특혜를 제공할 때, 그 수혜를 독점하는 것은 명이 임명한 추장이었다. 그러나 명 외에 새로운 권력이 이 일대에 등장하자, 추장 이외의 세력들이 이들을 이용하여 관서 7위의 헤게모니를 제 것으로 삼기 위해 기회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전술한 네 위소보다 남쪽에 위치하여 몽골리아 제 세력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을 것처럼 보이는 샤릭위구르 위소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공교롭게도 샤릭위구르에서는 전술한 시점보다 이른 1424년에서 1432년 사이에 명과 외국의 사신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전술한 사주위의 약탈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어 명의 군대가 이들을 직접 토벌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전말을 통해 샤릭위구르 위소의 상황을 전술한 네 위소의 상황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전술했듯이 샤릭위구르에는 3개의 위소, 4개의 부가 있지만 대표적인 두 세력은 안정왕과 곡선위의 수장이었다. 샤릭위구르 위소가 재개설된 후, 샤릭위구르는 바투(把禿)라는 토번 장군의 공격을 한차례 더 받았는데, 이때 하산(哈三)을 비롯하여 산즉사(散即思), 삼즉(三即) 등 안정위의 지휘들이 안정위와 곡선위를 분리해 달라고 요구하여 1406년에 곡선위가 분리되었고 전술한 삼즉이 곡선위의 지휘사, 산즉사가 부지휘사로 임명되었다.41) 그리고 두 위소는 각자 첫 위치보다 조금 동쪽인 칭하이성 방향, 즉 안정위의 경우에는 고아정(苦兒丁), 곡선위의 경우에는 약왕회(藥王淮)라는 곳으로 치소를 옮겼다. 그렇다면 안정위와 곡선위의 분리가 왜 토번 장수의 공격에 대한 해결책이 되었을까. 『명실록』에서 기록한 그들의 요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과거에 안정과 곡선 두 위소가 설치되었다가 도르제빠의 공격으로 인해 곡선위가 안정위의 거주지인 아진의 땅[阿真之地]으로 병입되었는데, 여전히 바투의 공격으로 안녕을 되찾을 수 없으니 다시 곡선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옮기기를 청했다고 한다.42 )이는 샤릭위구르의 곡선위와 안정위가 한 목지에 자리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러한 공존 상황은 토번 장군의 침입까지도 야기하는데, 이때 위소의 분리를 요청한 이들이 곡선부 소속인 것으로 보아 토번 장군의 표적은 주로 곡선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측이 갈라진 후 1413년에 옛 안정왕의 후손이 돌아와 안정왕으로 복위되었는데, 그는 복위 전에 영장(靈藏)에 거주했다고 알려져 있다.43) 이곳은 명대 찬선왕(贊善王)으로 임명된 티베트 승려의 봉지로, 찬선왕이 어떤 교단에 속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명에 의해 왕에 임명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지녔음에는 분명하다. 이 안정왕은 과거 곡선위의 지휘에 의해 살해된 부얀티무르의 손자로, 부얀티무르가 살해되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을 피해 티베트로 피신하여 특정 교단의 비호 아래에 살다가, 복위가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명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복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전술한 토번의 공격과 연결지어 보면, 안정왕을 비롯한 안정위는 티베트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곡선위는 그렇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곡선위는 이름 그대로 서역 오아시스 도시 중에 하나인 쿠차에서 유입된 이들이 주축이 된 세력으로, 티베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안정위와는 사뭇 다른 성격을 지닌 세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정왕이 곡선위 지휘에게 살해된 이후 곡선위 출신의 삼즉과 산즉사가 샤릭위구르 전체를 장악하자 안정왕을 지지하는 티베트 측에서 샤릭위구르를 공격했던 것이고, 곡선위 측에서는 양측이 분리되는 것만이 티베트 세력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긴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있은 후 샤릭위구르는 약 10년 동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24년 무렵 전술한 사신 약탈 및 살해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정황은 대략 이와 같다. 1424년 영락제가 중관(中官) 교래희(喬來喜), 등성(鄧誠)을 위짱(烏斯藏)의 사신으로 보냈고,44) 그들은 가는 도중에 지금의 칭하이성 남서쪽에 흐르는 필력술강(畢力术江)에 머물렀다.45) 이때 안정의 지휘 하산46)의 손자인 셍게(散哥)와 곡선 지휘인 산즉사 등이 사신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패물 등을 빼앗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하필 영락-홍희제의 교체시기에 발생하여, 홍희제는 즉위한 직후 섬서의 도지휘 이영(李英)에게 칙서를 내려 서녕 및 주변 서번의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추격하도록 했다. 이들은 쿤룬산맥 너머 서쪽 아령활(雅令闊)이라는 지역에서 안정위의 세력을 만나 격퇴했고, 곡선은 더 먼 곳으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47) 명에서는 1426년에 안정위와 곡선위를 효유하여 원래의 생업으로 돌아가게 했고, 2년 후에는 재차 고명을 주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정황을 확인하기 어렵다. 우선 명이 티베트에 법왕 및 왕의 작위를 사여할 때나 보시 예물을 파견할 때, 주로 환관을 파견하여 외조(外朝)의 정식 체계 바깥에서 왕래했다. 그리하여 1424년 당시에도 환관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위짱 및 네팔(尼八剌)로 파견되었으며 위짱에서 온 티베트의 사신도 동행한 상태였다.48) 한편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전술한 안정위의 지휘 하산의 손자 셍게와 곡선위의 지휘 산즉사였는데, 하산과 산즉사는 앞서 살펴보았던 안정왕의 공위시기에 함께 샤릭위구르를 이끌던 이들이었다. 다만 이 사신 살해 사건에 샤릭위구르의 모든 이들이 가담한 것은 아니어서 안정왕은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정으로 나아가 청죄하면서도 사신을 공격한 악의 우두머리(首惡)는 곡선위의 산즉사와 안정위의 하산투메드(哈昝土滅禿)라 지목했으며,49) 안정위 및 곡선위에 속한 일부 부락 역시 명이 파견한 군대 측에 서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50)
1427년에 홍희제는 서녕위의 동지(同知)를 이용하여 멀리 달아난 산즉사를 초무하였고, 4만 2,000여 장(帳)이 본업으로 복귀하였다. 이때의 기록에 따르면 산즉사는 윗빠(烏思巴)라는 인물과 서로 원수여서 적을 살해하다가 조정의 사신을 마주쳤고, 그들까지 약탈하다가 사신을 살해한 것이라고 했다.51) 안타깝게도 윗빠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명실록』 영락 4년에 서번에서 도달한 여러 부족 세력 중에 향장족(香藏簇)의 두목 윗빠라는 인물이 한 차례 등장하므로, 그가 어느 지역에 거주했는지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티베트 부족장 중에 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산즉사는 티베트 세력과 충돌을 빚었다가 티베트로 향하는 명의 사신까지 살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52)
이와 관련하여 잠시 곡선위의 종교적 색채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명대 사서는 안정왕의 사신이 내조(來朝)할 때 함께 사신을 파견하는 안정위의 국사(國師)에 대해서 꼬박꼬박 그 이름을 명기하고 있지만,53) 곡선위에 관해서는 한 번도 국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곡선위는 상기 사건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명과의 사신 왕래 자체가 단절되었으므로 안정위에 비해서는 사신 파견의 사례가 많지 않다. 그러나 관서 7위 전체를 아울러 살펴보아도 곡선위는 유독 티베트 불교와의 접점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티베트 세력과의 갈등 사례만 두드러진다.54)
한편 명대에 완성된 『숙진화이지(肅鎭華夷志)』의 기록을 보면, 하미를 구성하는 3종 이민족(회회, 위구르, 합랄회) 중 하나인 합랄회(哈剌怀/灰)에 대해 “투르크 종족인 합랄회라는 이들은, 본래 안정왕 부의 예속인이며, 원의 몽골족 (중에) 무릇 회이(回夷)와 같은 풍속을 갖게 된 이들인데, 비록 머리를 자르고 터번을 쓰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회회의 씨족이라 여겼다.”라고 설명했다(杨富学, 2018: 9). 이 기록은 안정왕 휘하에 몽골계 무슬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안정왕은 티베트 교단의 보호를 받을 만큼 티베트 불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므로 상기 기록은 곡선위를 가리키는 내용으로 짐작된다.55)
종합해 보면 14세기에 하미나 돈황 및 샤릭위구르의 목지 등 지금의 간쑤-칭하이-신장위구르자치구 교계지역은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 문화권의 접점이었고 티베트 불교도들도 있지만 이슬람을 신봉하는 이들도 병존한 상태였다. 특히 같은 세력 내에도 다른 종교를 지닌 무리들이 공존하기도 했는데, 샤릭위구르 내에서도 티베트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어 내부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티베트로 피신하기도 했던 안정왕이 다스렸던 안정위는 대체로 티베트 불교문화권에 속하는 반면, 샤릭위구르 강역의 서쪽에 위치한 쿠차 출신으로 구성되었던 곡선위의 구성원들은 예부터 이슬람 문화에 노출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쿠차는 모굴 칸국의 이슬람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진 카타키 수피교단의 거점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시점에, 페르시아어 사료에 다시 한 번 샤릭위구르가 등장한다. 이 시기는 모굴 칸국의 우와이스 칸 시기인데, 그는 1418년 나크시 자한(Naqsh-Jahān)을 살해하고 등극했으며, 베쉬발릭을 떠나 모굴 칸국의 본래 근거지인 일리(Iīly)로 진출했다. 그러나 그는 동쪽으로는 한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오이라트의 타이핑, 서쪽으로는 칸의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였던 삼촌인 시르 무함마드(Shīr Muḥammad) 등 양쪽에서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이라트의 패권을 장악한 토곤이 1424년에 정적인 타이핑을 공격하자 타이핑의 잔존 세력은 간쑤 지역으로 달아났고, 1425년에는 티무르조의 울룩벡이 시르 무함마드를 격퇴하면서 그는 일리 유역을 되찾았다. 그런데 우와이스 칸이 시르 무함마드와 갈등을 빚을 무렵, 『라시드사(Tārīkh-i Rashīdī)』에 의하면 그는 ‘코사크(Quzzāq)’ 관습에 따라 롭, 카탁, 샤릭위구르 지역을 떠돌았다고 한다. 또한 그가 시르 무함마드 칸의 사후 재등극한 다음에도 매 해마다 타림, 롭, 카탁으로 낙타 사냥을 나섰고, 농경을 위해 투르판(土魯番)에 관개시설을 설치했다고 한다(Dughlat. 1996: 39). 실제로 『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투르판의 도독첨사 엔케르착(尹吉兒察)을 비롯하여 여러 투르판 지배층들이 우와이스에 의해 밀려나 명으로 귀부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즉, 우와이스는 그의 조부인 히즈르 호자와 마찬가지로 모굴리스탄 초원에서 세력을 상실했을 때, 세력을 보강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톈산 남로 오아시스 지대 동부, 샤릭위구르의 서쪽 끝을 찾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동·서 양방향의 위협이 사라져 모굴리스탄을 회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이 일대를 중요시했는데, 이는 그의 아들인 에센 부카(Īsān-Būghā) 칸이 투르판 출신 위구르계 아미르를 중용하다가 결국 모굴리스탄 초원 출신 아미르들의 반발로 인해 칸의 자리에서 잠시 축출된 사건과 이어진다.
비록 모굴 칸과 곡선위 수장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보여 주는 기록은 없으나, 적어도 모굴 칸이 이 시기에 샤릭위구르로 들어와 세력 회복을 위한 군사 징집(‘코사크’)에 힘썼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 모굴 칸이 의탁하기 가장 쉬운 부족은 샤릭위구르 중에서도 서쪽에 위치하고, 종교가 같은 곡선이었을 것이다. 샤릭위구르 내에서 안정왕에 비해 항상 2인자일 수밖에 없었던 곡선위는 그들을 둘러싼 기존 세력인 명이나 티베트가 아닌 새로운 세력, 모굴 칸국의 세력이 등장하자 이들을 등에 업고 기존 세력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1427년에 명의 초무를 받아 본업에 복귀했던 곡선위는, 이번에는 서역에서 돌아오는 중국 사신 및 서역의 공사 등을 수차례 약탈했다.56) 이에 황제는 1430년에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게 했고, 산즉사는 달아났으나 그의 도당인 톡토부카(答答不花)가 붙잡혀 명으로 송환되었다.57) 바로 다음 해에 산즉사는 명으로 사신을 보내어 속죄했는데, 명은 곡선위 및 아단위에게 옛 땅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이때 명이 곡선과 아단에게 되돌아가라 명한 옛 땅은 그들이 1406년부터 1424년까지 머무르고 있었던 칭하이성 서북 일대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가리키는 그 장소였다. 즉, 아단위의 지휘에게 ‘회회의 경계에 있는 아단의 옛 성’으로 되돌아가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곳이 아단위의 지휘 본인의 출생지인 첩리곡(帖兒谷)에서도 한 달거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실제 서역남로에 위치한 호탄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58) 이 명령에 따르면 곡선 역시 쿠차로 돌아가야 했다. 15세기 초반, 티무르의 손자 이스칸다르(Iskandar)가 모굴 칸국을 원정했을 때 쿠차와 호탄은 그의 공격 범위 중 가장 동쪽 끝에 해당했으므로, 명이 곡선과 아단을 옛 땅으로 돌아가라고 한 명령은 곧 명의 위소 범위이자 티베트문화권 바깥으로의 추방을 의미한다.
이에 아단위는 아단의 옛 성이 너무 머니 본래의 거주지로 되돌아가겠다고 청했고 이 청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아 양자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본래의 거주지’는 1406년 이전에 그들이 머무르던 아진천 일대에 해당한다. 1474년에 투르판의 지방군주였던 술탄 알리가 하미를 공격할 때의 기록에 따르면, “한동위가 서쪽으로 체르첸 및 곡선위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안정과 접해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59) 체르첸은 서역남로의 동안(東岸)에 위치해 있고, 한동위는 칭하이성 서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이때 곡선위의 위치는 원말부터 1406년까지 자리했던 롭-카탁 부근, 지금의 간쑤-신장성 경계의 뤄창현 일대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곡선위가 공격한 ‘서역’사신이 당시 명의 이서 세력 중에 어느 곳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곡선이 모굴 칸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고려하여 당시 모굴 칸국의 상황을 고려해 보도록 한다. 15세기 초반에 모굴 칸은 주로 모굴리스탄 초원 및 사막 북로의 몇몇 도시에 자리했고, 모굴 칸국의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두글라트 부는 사막 남로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에 그들의 유르트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우와이스 칸의 즉위 무렵 티무르조의 미르자 울룩벡(Mīrzā Ūlugh-big)이 사막 남로의 오아시스 도시 중에 가장 서쪽에 위치한 카쉬가르를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두글라트 부 내에서 칸 후보를 두고 벌어진 갈등의 여파이다. 두글라트 부의 수장이자 6명의 칸을 세웠던 후다이다드는 자신의 손자인 사이드 알리(Sayyid ’Alī)와 서로 다른 칸 후보를 내세우며 대립했는데, 결국 사이드 알리가 선택한 우와이스 칸이 시르 무함마드 칸을 내쫓고 칸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에 후다이다드가 티무르조로 나아가 미르자 울룩벡을 끌어들여 세력을 되찾고자 했고, 결국 미르자 울룩벡이 군대를 파견하여 카쉬가르를 차지했다. 그는 처음에는 두글라트 부 아미르에게 통치를 맡겼으나 결국 티무르조의 소속 부족인 바룰라스(barlās) 부의 아미르가 이곳을 차지하여 근 40년 동안 지배했다.60) 그러므로 이 시기에 톈산 북부 일리발릭(亦力把里)에 있던 모굴 칸국과 미르자 울룩벡이 장악한 톈산 남부, 특히 카쉬가르 일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으며, 결국 1430~1431년 무렵 우와이스 칸은 티무르조의 미르자 울룩벡이 파견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온 몽골 제국의 후예 사툭칸(Sātūq Khān)에 의해 살해되었다.61) 이후 모굴 칸국 내에서는 우와이스 칸의 두 아들인 에센 부카와 유누스(Yūnus)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는데, 에센부카가 모굴 칸에 등극하자 유누스는 울룩벡에게 투항했다.
전술한 곡선위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그들이 마주쳤던 서역 사신은 주로 서역남로의 도시에서 파견했거나 그곳을 거쳐 이동한 사신이었을 것이며, 이들은 카쉬가르를 장악하고 있었던 울룩벡이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곡선위가 서역으로부터 오는 사신을 공격한 것은, 당시 모굴 칸국과 대립하고 있었던 티무르조 울룩벡 휘하의 사신을 공격한 정치적 행위라 볼 수 있다.
본래 샤릭위구르는 칭하이성의 서부와 서역 남로의 동남단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여타 관서 위소와는 달리 몽골보다는 티베트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다. 안정왕이 샤릭위구르의 혼란의 시기에 티베트에 의지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 15세기 전반에 모굴 칸국이라는 또 다른 세력의 영향력이 나타나자, 샤릭위구르의 패권을 차지하지 못한 곡선위 측에서 새로운 세력과의 접촉 및 연대를 통해 안정위를 능가하는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15세기 전반에 관서 위소들의 북·서에 위치한 몽골 세력들은 이전에 비해 한층 강력한 세력을 발휘했다. 이때 명의 임명을 받아 각 위소를 총괄해왔던 추장들은 여전히 명에 충성을 바쳤으나, 그 외에 다른 무리들은 새로 등장한 세력과 결탁하여 명과, 명이 임명한 추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접근해 온 세력 중에 최후의 승자는 에센 타이시의 오이라트였고, 그의 압력 하에 관서 7위중에 사주위가 최초로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15세기 후반, 특히 에센 타이시가 사망한 후에 관서 7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19 太宗文皇帝實錄, 永樂三年/二月/二十四日. 20 太宗文皇帝實錄, 永樂五年/四月/十三日. 21 이곳은 북원 시기의 에지나路-하미 북산- 베쉬발릭으로 이어지는 서북 새외, 가욕관 바깥의 황야지대이다. 이를 간쑤 새외 황야라 부르도록 하겠다. 22 太宗文皇帝實錄, 永樂三年/四月/十五日. 23 太宗文皇帝實錄, 永樂七年/七月/十七日; Robinson(2020: 103-104). 24 太宗文皇帝實錄, 永樂七年/八月/三日. 25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七年/四月/十五日. 26 Robinson(2020: 109); 로빈슨은 북원에서 이제껏 칸으로 섬겼던 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울제이 티무르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한다(Robinson, 2020: 107). 한편 본고에서는 1410년 전후에 서북을 통해 명으로 투항한 인물 중에 다음 칸이 된 톡토부카에 집중하여 서술했으나. 그 외에도 수많은 인물이 명으로 투항하여 명의 변경지대에 재배치되었고 일부는 명에 의해 발탁되어 사신이나 막북 원정 장군 등으로 활용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책 3장 참조. 27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二年/正月/二十七日. 28 宣宗章皇帝實錄, 宣德八年/七月/二十九日; 英宗睿皇帝實錄, 宣德十年/正月/十三日. 29 英宗睿皇帝實錄, 宣德十年/三月/八日. 30 英宗睿皇帝實錄, 正統二年/七月/九日; 英宗睿皇帝實錄, 正統二年/八月/十五日. 31 明史, 西域傳·赤斤蒙古衛;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元年/九月/三十日. 32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四年/十月/二十六日. 33 英宗睿皇帝實錄, 正統五年/八月/六日. 34 김호동(1993: 124-126); 눈다시리는 부친인 토곤에 의해 다와다시리의 부친 부다시리와 1421년에 혼인했는데, 이는 중국 서북지역으로의 팽창을 염두에 둔 토곤의 포석이라 할 수 있다. 35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八年/十月/十九日. 36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八年/十一月/十六日. 37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十一年/八月/二十六日. 38 明史, 西域傳·罕東左衛. 39 英宗睿皇帝實錄, 正統九年/十二月/十九日;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十一年/九月/十一日. 40 英宗睿皇帝實錄, 正統十一年/九月/十一日. 41 明史·西域傳. 42 太宗文皇帝實錄, 永樂四年/三月/十七日. 43 그가 머무른 영장은 명에 의해 1404년에 영장 관정국사(灌頂國師)로, 1407년에는 찬선왕으로 임명된 승려 최뻴겔젠(著思巴兒監藏)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최뻴겔젠이 어떤 교단에 속했고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체로 감자장족자치주(甘孜藏族自治州)에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黄玉生, 1995: 85). 44 두 환관은 일전에도 대승법왕으로 임명된 사캬파 라캉 계열에 각기 파견되었던 사례(1417, 1418)가 있기 때문에 이때에도 사캬파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5 지금의 칭하이성 위수시 치다현(治多縣)에 흐르는 강. 이 강은 안정왕이 머물렀던 영장 부근에 위치한다. 곡선위와 안정왕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곡선위가 안정왕을 후원했던 티베트계 부족세력들과 충돌했을 가능성도 있다. 46 이 인물의 이름은 이전 기록에는 哈三으로 되어 있었다. 47 宣宗章皇帝實錄, 洪熙元年/八月/二日. 48 仁宗昭皇帝實錄, 永樂二十二年/九月/二十八日. 49 宣宗章皇帝實錄, 洪熙元年/八月/六日; 하산투메드는 과거 산즉사, 삼즉과 더불어 샤릭위구르를 이끌던 하산에 비정할 수 있다. 50 예를 들면 1432년 황제에게 상주한 곡선 지휘 나나한(那那罕)은 과거 안정의 병사가 산즉사를 토벌할 때 자신의 두 딸과 네 아들 및 지휘 셍게를 비롯하여 몇몇 라마의 가속 500명을 노략했는데, 산즉사는 이미 사면을 받았으나 자신들의 가속은 돌아오지 못함을 고했다. 이에 황제는 안정왕 및 지휘 등에게 나나한은 무고한 자라고 하며 약탈한 이들을 되돌려 보내도록 했다(宣宗章皇帝實錄, 宣德七年/八月/十六日). 이를 통해 곡선위 내에서도 산즉사의 측에 서지 않은 지휘, 즉 부락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사』 「서역전」의 안정위 항목에는 안정위의 지휘 셍게가 명의 샤릭위구르 토벌 당시 한동위와 함께 동원되었는데, 한동위가 이를 어기고 오히려 셍게의 군대를 약탈했다고 한다. 이 셍게는 이후 안정왕과 더불어 안정위에서 세습지위를 유지했던 토관이다. 기록에 따르면 한동위는 원정에 가담한 후에도 곡선위가 두렵다는 이유로 서녕위 근처에 거주하다가 명에 의해 본토인 관서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 합잠과 산즉사의 사신 살해에 관한 관서 7위의 입장은 위소마다, 아니 위소 아래의 부락마다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안정의 지휘인 합잠의 손자가 안정왕보다는 곡선의 지휘인 산즉사와 함께 활동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51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二年/十一月/十七日. 52 太宗文皇帝實錄, 永樂四年/十一月/十四日. 53 기록에 등장하는 안정위 국사는 다음과 같다. 선덕 원년, 안정위의 선사(禪師) 상촉영점(賞觸領占)이 국사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고명과 은인을 받았다. 그는 선덕 5년과 정통 2년에도 다른 승려들과 함께 내조했는데, 정통 3년에는 안정국사가 노환에 걸려 그 제자 섭랄장복(攝剌藏卜)가 상주를 올려 계승을 요구했으나 명에서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정통 4년에는 상족영점이 직접 왔으나 정통 7년 등에는 그가 왕래했다는 기록은 없고 대신 안정왕의 사신을 통해 명에서 그에게 예물을 사여했다. 그 후 정통 9년에 안정왕이 국사 섭랄장복을 파견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 국사가 사망하고 그 제자가 국사의 자리를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국사는 정통 11년에도 조정에 왕래했으며, 천순 8년에는 하미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미의 사신이 안정의 상황에 관해 당시 서녕에 있던 안정의 관정국사인 섭랄장복에게 물어보는 기록도 있다., 한편 성화 16년에는 안정왕이 국사 도르지 린진(朵爾只領眞)을 파견하여 새로운 국사가 들어섰음을 알렸으며, 성화 19년, 홍치 3년에도 안정왕은 국사 도르지 린진을 파견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1426년 무렵부터 1490년까지 안정에는 세 명의 국사가 대를 이어 계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4 곡선위의 사신은 주로 다른 사신과 함께 왔으나, 유일하게 한 차례 단독으로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는데 그는 회회인 아흐마드 물라(哈麻滿剌)였다(太宗文皇帝實錄, 永樂七年/閏四月/十二日). 55 『고창관과(高昌館課)』나 『명실록』에서는 합랄회가 주로 지역명(地面)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명실록』의 홍치 4년 11월(1491) 기록에 따르면 합랄회는 하미위 주민들이 종종 피신해 있었던 고욕성 서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다(孝宗敬皇帝實錄, 弘治四年/十一月/二十四日). 『고창관과』에서는 합랄회 지역에서 보내온 3개의 상주문을 수록했는데 그 발신인은 각기 섬득극(陝得克), 마흐무드왕(馬哈木王), 에센부카왕(也先卜花王)이었다. 여기에서 에센부카왕은 동 사료에 수차례 등장하는 모굴칸국의 에센부카 칸(r.1431-2~1461-2)으로 추정되며, 마흐무드 왕은 에센부카 칸의 형인 유누스 칸의 맏아들, 마흐무드 칸으로 추정된다. 같은 사료에서 유누스가 스스로를 하미지역의 유누스 왕으로 표시하거나, 에센부카 본인이 일리발릭, 투르판, 합랄회 지역에서 각기 상주문을 보낸 적이 있었으므로 『고창관과』의 출신 기록과 본래의 활동 거점은 약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이 기록들을 본문의 『숙진화이지』기록과 조합해 보면, 본래 합랄회라는 지명이 존재했는데, 안정위가 약화되었을 무렵 안정왕 치하에 있는 몽골계 무슬림 부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자리했다가 그곳의 이름을 따서 ‘합랄회’로 불렸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56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五年/六月/十五日. 57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五年/十二月/二十七日. 58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七年/正月/二十九日. 59 憲宗純皇帝實錄, 成化十年/十月/七日. 60 티무르조의 사료에 의하면 후다이다드가 울룩벡에게 투항했던 시기는 822년 샤반월(1419. 8~9.)이며 실제 울룩벡의 어전으로 나아간 것은 823년 주마다 알 타니 월 25일(1420. 7. 6.)이다. 또한 후다이다드가 내세운 시르 무함마드 칸 역시 같은 해 라잡월에 울룩벡을 찾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티무르의 누케르가 카슈가르에 파견되어 있으므로, 이 시기에 카슈가르는 이미 간접적으로 티무르조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카슈가르에 울룩벡의 누케르가 파견되어 있었던 이유는 본래 안디잔에 있었던 티무르의 손자이자 우마르 셰이흐의 아들인 아미라크 아흐마드가 샤루흐에게 저항하여 모굴리스탄으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가 모굴리스탄으로 향한 것은 818년(1415) 이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샤루흐의 부름을 받고 819년경 후라산으로 가면서 자신의 누케르인 셰이흐 알리 타가이를 대리인으로 두었는데, 그가 울룩벡에게 복종하였으므로 울룩벡이 자신의 아미르들을 파견하여 그의 자리를 대체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와이스가 칸으로 등극하기 이전의 상황이다. 61 宣宗章皇帝實錄, 宣德七年/十月/十五日; 이 기록은 1432년의 기록이나, 우와이스의 왕모는 직전 해에도 우와이스 대신 사신을 파견한 바 있으며, 모든 일이 발생한 후에야 그 전말을 보고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1430~1431년 즈음에 발생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