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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잔존세력의 후속 역사 소고(小考)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4.14. 19:52 (2026.04.14. 19:52)

II. 14세기 말~15세기 초, 관서 위소의 성립과 그 원인

 
차가타이의 손자로 쿠빌라이 칸의 지지를 얻어 차가타이 울루스를 차지했던 알구(Alghu)와 그의 계열은 차가타이 울루스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차가타이의 또 다른 후손인 바락(Barāq)과 그의 아들 두아(Duwā)가 차가타이 울루스를 통치했다.
II. 14세기 말~15세기 초, 관서 위소의 성립과 그 원인
 
차가타이의 손자로 쿠빌라이 칸의 지지를 얻어 차가타이 울루스를 차지했던 알구(Alghu)와 그의 계열은 차가타이 울루스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차가타이의 또 다른 후손인 바락(Barāq)과 그의 아들 두아(Duwā)가 차가타이 울루스를 통치했다. 두와와 그의 후손들은 모굴 칸국을 통해 18세기 초까지 국가의 명맥을 이어 나갔으나, 알구와 그 후손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그들의 울루스를 상실했다. 대신 알구의 아들인 추베이(出伯)는 그러한 원한관계를 이용한 쿠빌라이에 의해 차가타이 울루스와 접경한 지금의 신장위구르자치구 동부와 그 동쪽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는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의 ‘두 번째 차가타이 울루스’라는 대표적인 연구 및 추베이의 계보에 관한 몇몇 후속 연구에 따르면, 쿠빌라이가 사망한 직후 테무르 카안은 베쉬발릭(別失八里)에 북정도원수부(北庭都元帥府), 쿠차(曲先) 일대에 곡선타림도원수부(曲先塔林都元帥府)를 세웠고 이 모두를 추베이의 관할하에 두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호자가 두아의 손에 들어갔고, 두 도원수부는 불가피하게 해당 지역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이 도원수부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지만, 원말명초에 추베이의 작위를 지닌 종왕들이 베쉬발릭이나 쿠차의 동쪽에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추베이의 두 번째 작위였던 빈왕(豳王)의 작위를 지닌 이린진(亦憐眞)이라는 인물이 1380년 적근참(赤斤站)에서 명의 서정군에게 발견되었고,4) 추베이의 첫 번째 작위였던 위무서녕왕(威武西寧王)과 유사한 서녕왕(西寧王)이라는 작위를 가진 인물들이 1350년대에 돈황 막고굴에 흔적을 남겼으며, 원말에 위무왕(威武王)에서 숙왕(肅王)으로 이봉되었다는 후나시리(忽納失里)가 하미(哈密)를 차지하여 충순왕(忠順王)과 충의왕(忠義王)의 시조가 되었다.
 
상기의 종왕들이 추베이의 후예가 아닐까 하는 추측은 펠리오(Paul Pelliot)로 부터 시작되었다가, 스기야마의 치밀한 사료 분석을 통해 그 실상이 밝혀졌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티무르조(Timurid Dynasty)의 계보서인 『계보의 영광』에 수록된 추베이의 계보 안에서 빈왕가, 서녕왕가, 그리고 하미의 충순왕에 봉해진 위무왕 혹은 숙왕가의 계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杉山正明, 1982: 7-8). 추베이 후예 중에 종가라 할 수 있는 빈왕가의 경우, 추베이의 자녀들 중에 빈왕에 봉해진 이들이 『원사』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그 이름들이 모두 『계보의 영광』과 일치한다. 또한 『명사』에도 두 명의 빈왕이 나타나는데 첫 번째는 명의 서정군을 이끌던 복영(濮英)에 의해 1380년에 적근몽고참에서 사로잡혔던 이린진으로 그 역시 『계보의 영광』의 계보 말단에 등장한다. 그리고 11년 후인 1391년에 하미에서 잡혀 참수되었던 빈왕 베르케티무르(列儿怯帖木儿)는 계보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하미 왕가와 빈왕가가 모두 추베이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린진이 적근참에서 포획된 후에 그를 계승한 자손이 그보다 더 먼 하미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붙잡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서녕왕에 관한 기록은 막고굴에서 발견된 원대의 두 석각에 남아 있는데, 첫 번째 석각은 1348년에 세워진 『막고굴육자진언게』(莫高窟六字眞言碣)의 공덕주 명단이다. 이 명단에는 술래이만(速來蠻) 서녕왕 이하 그의 자손들로 보이는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편 1351년에 완성된 『중수황경사비』(重修皇慶寺記)에는 서녕왕 술래이만이 사망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의 아들 야간샤(牙罕沙)를 서녕왕으로 표기하였다(楊富學, 2018: 12). 그런데 이 두 석각에 등장하는 술래이만과 야간샤, 그리고 술래이만의 자손 및 왕자들의 이름이 『계보의 영광』에서 추베이의 아들 중에 부얄나타시(Būyālnātāsh) 항목에 보인다. 게다가 석각에는 보이지 않으나 『명사』에 등장하는 사주위(沙州衛)의 몽골왕자 아르카시린(阿魯哥失里, Ārkashīrin)의 이름이 술래이만의 손자로 등장하기도 한다.5)
 
한편 제일 관심을 모았던 하미 왕가의 초대 두 충순왕, 후나시리와 엔케티무르(安克帖木兒)의 이름 역시 추베이의 또 다른 자손의 후손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위무왕 및 숙왕 작위에 관한 자료는 빈왕이나 서녕왕의 사례처럼 원대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그 작위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1388년 부이르 호 전투에서 카안의 군대에 복무했고, 패배한 후에는 차가타이 울루스의 아미르였던 엥케투라(Inkātūrā)에게 차가타이 칸의 후예의 자격으로 칸의 자리에 초빙되었으며(김호동, 1989: 18), 모굴리스탄으로 가지 못하고 하미에 자리한 후에도 그곳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차가타이 가의 후예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들 종왕이 행정구역상으로 현재의 간쑤성에 자리하고 있었다면, 그보다 남쪽인 칭하이(靑海)성에는 샤릭위구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샤릭위구르는 중국 사료에서 전통적으로 황두회흘(黃頭回紇)이라 불렸던 위구르의 일파다. 위구르 제국이 몽골리아 초원에서 멸망하고 그 일부가 서쪽으로 이주했을 때 일부는 베쉬발릭으로 향하여 톈샨 위구르 혹은 코쵸 위구르를 세웠고, 일부는 감주(甘州) 지역에 감주 위구르를 세웠다. 톈샨 위구르는 9~10세기에 크게 성장했다가 카라키타이 및 몽골제국 시기에 종속국으로 전락했으나 14세기까지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으며, 감주 위구르는 1028년에 서하의 공격으로 인해 멸망했다. 그러나 이 감주 위구르의 일파가 여전히 그 일대에 남아 돈황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는데, 이들을 황두회흘이라 부른다(胡小鵬, 2005: 88-90). 이들의 위치는 송대부터 명대까지 크게 변하지는 않았으나,6) 다만 몽골제국 시기를 지나면서 이들을 부르는 칭호에 변화가 있었는데, 명대의 기록에는 이들이 ‘撒里畏兀兒’, 페르시아어 사료에는 ‘Shāriq Uyghur’라 되어 있다. 이는 노란색을 가리키는 투르크어 ‘Sari’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국 ‘황두회흘’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만 몽골제국 시기를 지나면서 현지 언어인 투르크어 칭호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佐口透, 1972: 192).
 
명이 원을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하였던 14세기 후반에, 샤릭위구르를 이끌었던 자는 원의 종왕이었던 부얀티무르(卜烟帖木兒)이다. 그는 1374년에 명의 초무에 응하여 복속했고 홍무제는 그에게 안정왕(安定王)이라는 작위를 주었다.7)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원대에 영왕(寧王)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었다. 첫 번째로 쿠빌라이의 8남 쾨쾨추(闊闊出)의 후예로 영왕이라는 작위를 이어받았다는 설과,두 번째로 차가타이계의 추베이의 후예로 서녕왕을 계승했는데 훗날 앞부분이 사라지고 영왕으로 남았다는 설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보의 영광』에 추베이와 관련된 계보가 밝혀지면서, 서녕왕 설은 설득력을 잃었다.8) 서녕왕의 계보 안에서는 부얀티무르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쾨쾨추의 계보는 『계보의 영광』에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안에서 부얀 티무르라는 이름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인물이 정확히 누구의 후예였고 누구에게서 이 칭호를 이어받았는지는 모호하나, 후대에까지 몽골제국, 특히 차가타이의 후예로 인정받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이 여러 왕가 외에도 중국 서북지역에는 몽골제국 시기에 배치된 세력들이 여럿 남아 있어 바람 잘 날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 네 종왕이 유독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명에서 가욕관(嘉峪關) 서쪽에 건설한 관서 7위 중 네 위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미위는 충순왕가와, 사주위는 서녕 왕가와, 적근몽고위는 빈왕가, 그리고 샤릭위구르의 안정위는 안정왕가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종왕들이 모두 관서 위소에 자리하며 위소의 업무에 간여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서녕왕이었던 아르카시린은 명에 투항한 후 사주에 남아 있지 않고 요동 지역의 대녕도사도지휘첨사(大寧都司都指揮僉事)에 임명되어 영락제의 막북 원정에서 활약했다. 실제 사주위를 통솔한 것은 1391년에 투항한 아르카시린보다 한참 후에 항복한 추장(酋長) 곤즉래(困卽來)9)라는 인물이며 그가 귀부한 1404년에서야 비로소 사주가 위소로 편성되었다. 또한 빈왕 이린진과 베르케티무르는 끝까지 명에 복속하지 않았으나, 1404년 몽골 옛 승상의 아들이라 칭하는 타르니(塔力尼)라는 인물이 카라탈(哈剌脫)10)에서 명조에 투항하자 적근몽고참에 그의 세력을 배치하고 천호소를 설치한 것이 적근몽고위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사주위와 적근몽고위는 원대에 해당 지역에 있었던 옛 종왕 대신 다른 몽골계 유목 수장을 배치하여 세운 위소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명의 ‘위소’라는 이름하에 가욕관 서부 일대에 배치되었던 것은 원대에 이곳에 추베이의 후예인 종왕들이 파견되어 있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원말명초에 카안 울루스가 몽골리아 초원으로 후퇴하여 북원을 건설하면서, 새로이 들어선 중원 왕조에게는 서부뿐 아니라 북부의 북원 또한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북원과의 접점은 가욕관 일대 외에도 만리장성의 여러 관문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15세기에 걸쳐 서부에 중심지를 둔 오이라트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가욕관은 북과 서의 적을 동시에 마주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그런데 사방의 몽골 세력을 막아내야 할 최전선의 번병으로 또 다른 몽골 세력을 둔 것은 한편으로는 상당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명을 향해 창끝을 돌려 외세의 앞잡이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들만큼 카안 울루스와 차가타이 울루스의 후예들에 맞서 자신의 독자적 세력을 세우기 바랐던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앞서 각 위소의 설치 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각 위소의 우두머리, 추장은 해당 지역의 옛 종왕이 아닌 다른 인물이거나, 혹은 종왕 출신이더라도 다소 계보가 모호한 편이다. 사주위 지휘 곤즉래의 출신성분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근몽고위의 지휘 타르니는 ‘자칭’ 승상이라고 일컫는 인물로 카라탈에서 왔다고 한다. 그가 귀부한 1404년에 카라탈은 모굴 칸국의 근거지였으므로, 그는 아마도 모굴리스탄 초원을 장악한 모굴 칸국의 휘하에 있던 일개 장군이었을 공산이 크다. 사실상 그는 모굴 칸국을 버리고 명의 위소의 반열에 있게 되면서 보다 독자적인 세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하미의 충순왕도 마찬가지로, 그는 본래 모굴리스탄 초원 카라탈에 자리했던 올쿠누트(Urkunūt) 부의 엥케투라에 의해 꼭두각시 칸으로 초빙되었다가 티무르의 공격으로 인해 올쿠누트부가 파괴되자 하미에 눌러앉은 경우다. 그의 기왕의 경험으로 볼 때, 몽골리아 초원을 떠돌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차가타이 계의 각축장에 뛰어들기보다는 동쪽으로 이주하는 것이 그 자신과 후손을 위해서는 훨씬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14세기 말~15세기 초 당시 위소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의 세력 판도를 고려했을 때, 이 위소들이 명과의 연합을 선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관서 위소의 초기 설립 과정을 보면 위소의 구성원들이 명과 북·서에 있는 여러 몽골 세력 사이에서 스스로의 향배를 두고 저울질하다가 명을 선택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사료에 비교적 자세히 드러나 있는 것은 샤릭위구르 세 위소의 상황이다. 샤릭위구르는 관서의 여타 위소보다 위치상으로는 명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부 및 최초 편성 시점은 타 위소에 비해 30년 가까이 빠르다. 즉 그들은 홍무제가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진격하여 원(元)을 몰아낸 지 10년도 되지 않은 1374년에 명에 귀부한 것이다. 홍무제는 샤릭위구르를 구성하는 네 부족인 아단(阿端), 아진(阿眞), 고선(苦先), 첩리(帖里)에 각기 동인(銅印)을 주었고,11) 다음해인 1375년에는 안정위와 아단위(阿端衛), 곡선위(曲先衛)를 편성했다.12) 이 3개의 위소 중에 안정위는 안정왕이 직접 통솔하고, 곡선, 아단에는 각기 지휘가 임명되었다.
 
즉 샤릭위구르 내에서 명에 인신을 받아 개별적으로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부족은 4개이고, 명의 허가를 받아 일정 이상의 군대를 소집하여 주둔지 근방을 수호하는 위소는 3개인 셈이다. 그중에 안정위는 몽골 종왕 출신인 안정왕 개인의 것이고 아단위와 곡선위는 별도의 지휘가 이끌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대의 ‘곡선타림대원수부’처럼 곡선과 타림은 이전부터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타림 부는 곡선 부에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정위의 영역이 ‘아진의 땅’이었다는 것으로 보아13) 샤릭위구르 출신이 아닌 몽골계 안정왕은 샤릭위구르의 네 부족 중에 주로 아진 부를 중핵 세력으로 삼고 그들의 목지에 안정위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단위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2장에서 언급할 1425년의 기록을 보면 아단위 지휘가 곡선위 지휘의 압력을 받아 출정하거나, 아단위 지휘가 곡선위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므로, 아단 부는 곡선 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한편, 그들의 압력을 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샤릭위구르의 세력 중에 양대 세력은 안정왕과 곡선위 지휘인 셈인데, 이는 샤릭위구르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안정왕이 복속했던 1370년대에 서북에 대한 명의 장악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전술한 관서의 여타 위소가 생기려면 30년을 기다려야 했고, 이들보다 훨씬 동쪽에 위치한 샨시(陝西)-칭하이성 경계의 서번(西番) 세력조차 명에 복속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1377년 서번의 토관이었던 도르제빠(朶兒只巴)의 침입으로 인해 샤릭위구르의 제 위소들은 파괴되고 인신을 상실했으며, 그 이후 10여년 간 명의 기록에서 샤릭위구르에 관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도르제빠의 반란은 티베트계 부족 내에서 발생한 갈등의 결과로, 그는 1376년에 티베트계의 한동부(罕東部)를 공격했는데, 원의 선위사(宣慰使) 출신 토관이었던 하주위(河州衛)의 지휘가 그에 맞서서 군대를 이끌고 칭하이 호 북산까지 그를 몰아냈다.14) 이에 서북쪽으로 달아나 사막으로 도망하던 도르제빠가 안정위를 공격하여 안정왕이 지니고 있던 명의 인신(印信)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물론 인신은 명에게 재차 요구하면 그만이겠지만, 당시에 도르제빠의 반란만이 샤릭위구르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도르제빠가 안정위를 지나기 전에 이미 곡선위의 지휘였던 샤라(沙剌)이 안정왕을 살해하고, 안정왕의 아들 판자시리(板咱失里)가 샤라를 살해하고, 샤라의 부장이 판자시리를 살해하는 서북판 ‘안사(安沙)의 난’이 발생한 상태였다.15) 또한 안정왕의 또 다른 아들인 살아지실가(撒兒只失加) 역시 그 형에게 살해되는 등 안정왕 가문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관한 모굴 칸국의 사료를 보면, 샤릭위구르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이 등장한다. 모굴 칸국의 3대 칸인 히즈르 호자 칸(khiżr Khwaja Khān)은, 젖먹이이던 1365년에 부친인 투글룩 티무르 칸(Tūghluq Timūr khān)이 사망하고 두글라트(Dūghlāt) 부의 카마르 앗 딘이 반란을 일으켜 모굴리스탄 초원을 장악했을 때 일족이 몰살되는 고통을 겪었다. 이때 두글라트 부 내에서 카마르 앗 딘(Qamar al-Dīn)의 정적이었던 후다이다드(Khudādād)가 홀로 살아남은 히즈르 호자를 빼돌려 자신의 영역인 카쉬가르(Kāshghar)에 12년간 두었다. 그 후 히즈르 호자는 카마르 앗 딘의 위협에 못 이겨 바닥샨, 호탄 등을 떠돌다가 샤릭위구르 및 롭-카탁(Lūb Katak)으로 달아나 이곳에서 재차 12년을 보냈으며, 이후 카마르 앗 딘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굴인들이 그를 소환하였고, 그는 칸의 자리에 올랐다(Dughlat. Tārīkh-i Rashīdī, 1995: 31). 물론 각 지역에서의 체류 기간이 12년이라는 비교적 관습적인 기간으로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투글룩 티무르의 사망이 1365년이고 히즈르 호자가 티무르조의 사서에 모굴칸국의 칸으로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1389년 티무르의 5차 모굴리스탄 원정 시기이므로, 단순한 계산으로도 히즈르 호자가 카쉬가르에서 샤릭위구르로 향했을 시점이 1377년 무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안정왕 가문이 하극상의 비극으로 처참히 파괴되었을 때 또 다른 황금씨족의 후예가 샤릭위구르 지역으로 들어와 12년간 머물렀던 것이다. 한편 안정왕의 유일한 생존 후손은 히즈르 호자와 같은 운명이 되어 티베트에서 오랜 방랑을 시작했다.
 
물론 히즈르 호자가 샤릭위구르 내의 분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샤릭위구르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관한 기록이 명과 티무르조, 모굴칸국의 기록에 모두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티무르가 수차례에 걸친 모굴리스탄 원정을 통해 카마르 앗 딘을 모굴리스탄에서 몰아낸 1389년 무렵, 모굴리스탄 남단의 율두즈(Yūldūz) 초원 일대에 슬며시 복귀해 있었다. 티무르의 군대가 5차 모굴리스탄 원정 당시에 그를 마주쳤을 때 공격을 거두고 평화 조약을 맺었던 것은, 그가 5차 원정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티무르의 5차 원정의 결과로 모굴리스탄 초원에 있던 여러 유목 부족 세력들이 제거된 틈을 타 히즈르 호자는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티무르가 이란 5년 원정(1392~1396)을 위해 마와라안나흐르(Māvarā' al-Nahr)를 비웠을 때는 역으로 사마르칸트(Samarqand)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미 자한(Shama’ Jahān)은 티무르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티무르가 샤미 자한을 돌려보내어 히즈르 호자의 딸 투칼 하눔(Tukal Khānum)에게 청혼함으로써 두 군주가 1397년 무렵부터 연합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듯 히즈르 호자가 옛 땅인 모굴리스탄 초원으로 귀환했다가 티무르 군에게 패배했을 무렵, 샤릭위구르는 다시금 명에 복속하여 명의 관서 위소로 재편성되었다. 이것은 샤릭위구르가 모굴 칸국의 정세를 면밀히 고려하여 내린 결정으로 볼 수 있다. 히즈르 호자가 아직 티무르에게 패배하기 전이었던 1392년 무렵, 명의 장군 송성(宋晟), 남옥(藍玉) 등이 하미 공격의 일환으로 서정을 행할 때, 아진천(阿眞川)에 머무르던 토인 수장인 사도(司徒) 하산(哈昝)은 명의 군대와 마주친 후 달아났었다. 그러나 3년 후인 1395년에는 샤릭위구르의 수장이 감주(甘州)에 파견되어 있던 숙왕 영(楧)에게 직접 나아가 복속을 표했고, 홍무제는 이듬해에 그들에게 진성(陳誠)을 파견하여 안정위를 재건했다.16) 이때는 히즈르 호자가 티무르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했던 1394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이다. 이는 서쪽의 상태를 관망하고 있던 샤릭위구르가, 티무르조에 복속할 만큼 약해진 모굴 칸과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선택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1393년 무렵 명은 섬서행도지휘사사(陝西行都指揮使司)의 치소를 장량(莊浪)에서 감주로 이전했고 홍무제의 아들인 숙왕을 이곳에 파견했다. 이는 가욕관 일대에 대한 명의 지배가 보다 확고해졌음을 시사한다. 명의 황제가 자리한 곳은 여전히 멀었지만, 변경의 수신은 관서의 위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했으므로 위소의 입장에서는 서부의 침입에 대해 다소간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명은 이들 위소 세력을 그야말로 ‘번병’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북쪽과 서쪽 세력에게 공격 받는 일이 있더라도 큰 도움을 주지 않았으나, 이러한 명의 생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수십 년 후의 일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욕관 서부에 자리한 몽골 세력들은 북쪽과 서쪽의 동족들 대신 명을 선택했던 것이다.
 
명은 동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위소가 되기를 청했던 이들을 회유하여 위소의 대열에서 빠져 나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우선 이들은 명이 충순왕과 안정왕, 그리고 지휘를 비롯한 여러 토관을 임명하는 것 외에는 명으로 부터 큰 내정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이 토관들 역시 대체로 세습제였는데, 대가 끊기거나 혹은 내부에 변고가 생겨 특정 토관이 문제를 일으키면 명에서 다른 토관을 임명하는 식으로 내정에 간여하는 일이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는 몇 가지 의무만 수행하면 명이 이들의 내정에 간여하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그 의무 역시 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당근이 수반된 의무였다. 예를 들면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야 하는 내조 의무의 경우, 조공무역이라는 경제적 장치로 토관들을 유인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위소 측에서 오히려 사신 파견에 열심이었다. 심지어 위소에서 자연재해 등으로 기아 등이 발생하면 명에 사신을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17) 또 다른 의무는 말을 조달하는 일이었는데, 그 대가로 차 혹은 비단을 지급하였으므로 이 역시 위소에게는 큰 이득이 되었다. 그들 스스로 차나 비단을 소모하거나 혹은 이서 지방과의 무역에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8) 한편 그들의 제일 큰 의무는 명이 서북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할 때 군사를 동원하거나 관서를 지나는 사신을 호송하는 일이었는데, 그때마다 명에서는 해당 업무를 담당한 지휘 및 여러 토관에게 은사를 내렸다. 사실상 그들의 친명적인 행위 모두에 경제적인 이득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그 이득에 이끌려 자신의 위치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렇듯 몽골 제국이 북쪽으로 퇴각하고 중원에 명이라는 새로운 한족 왕조가 들어섰을 때, 몽골제국 당시에 카안 울루스와 차가타이 울루스 사이에서 카안 울루스 측에 서 있던 차가타이 가 일원들은, 명이 들어선 후에는 한족 왕조인 명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들이 자리한 곳은 북·서쪽에 위치한 몽골과 명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었고, 이는 명의 서북 변경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 이 기묘한 관계는 명의 명운이 쇠락해 가던 16세기까지 이어졌는데, 다음 장에서는 15세기에 이들이 동족들의 남하 및 동진에 맞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4   太祖高皇帝實錄 洪武十三年/五月/十二日.
5   『원사』에는 술래이만을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이라 기록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술래이만 왕을, 훌레구 울루스의 아부사이드 칸 사후 칸의 자리에 올랐다가 살해된 술래이만 칸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혼데미르의 『전기들의 벗』에는 술래이만 칸을 훌레구의 아들 요시무트의 후손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341년에 살해되었으므로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비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6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샤릭위구르는 북쪽으로 과(瓜)·사주(현 돈황), 남쪽으로 티베트, 동쪽으로 한동위(현 칭하이 호 서북부), 서쪽으로 천가리(天可里, 현 신강 뤄창현(若羌縣) 철간리극향(鐵干里克鄕))을 아우르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錢伯泉, 2002: 21). 또한 14세기 중반 차가타이 울루스의 상황을 묘사한 페르시아 사료에 따르면, 샤릭위구르의 영역은 차가타이 울루스의 후예인 모굴 칸국의 울루스 벡 가문, 두글라트 부와 관계되어 등장한다. 두글라트 부의 선조는 차가타이 칸에게서 ‘망갈라이 수베’라는 영역을 사여 받았는데, 그 경계가 동쪽으로는 쿠차와 윤대, 서쪽으로는 페르가나의 끝, 북쪽으로는 이식쿨, 남쪽으로는 체르첸(Charchān)과 샤릭위구르였다는 것이다(Dughlat. 1996: 9). 체르첸은 서역남로 중에 호탄과 옌치 사이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이므로 샤릭위구르가 있는 곳 역시 서역남로의 동부 일대에 해당한다. 종합해 보면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바인궈렁 몽골자치주의 뤄창현 일대와 그 동쪽의 칭하이성 서북단이 원말명초에 샤릭위구르의 주거주지였을 것이다.
7   안정왕이라는 작위는 숙왕, 빈왕, 위무왕 등의 다른 작위에 비해 원대와 명대의 상황을 연결시킬만한 기록의 연결고리가 부재하다. 이 작위에 대한 원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황경 2년 3월(1313) 토곤(托懽)이라는 인물이 안정왕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지순 3년(1332)에는 안정왕으로 토곤의 아들, 도르지발(多爾济巴勒/朶兒只班)이라는 인물이 봉해졌다. 이 토곤은 태조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던 쿨겐(科爾戬)의 아들 코자(呼察)의 아들 우르다이(烏噜克岱)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두 사람은 본래 하간왕에 봉해졌고 그중에 우르다이는 지원 2년(1265)에 봉해졌다. 그런데 그 이후로 하간왕 작위에 관한 기록은 없고, 토곤과 그의 아들은 안정왕의 작위를 받았던 것이다(欽定續文獻通考, 卷 95). 이 기록을 집사와 비교해 보면, 칭기즈 칸의 둘째 부인인 메르키트 부의 쿨란 카툰에게서 낳은 아들 쿨겐의 아들 코자, 그 아들인 우르다이가 쿠빌라이를 모셨기 때문에 하간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우르다이의 아들 에부겐이 카이두와 연합을 모색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으므로, 하간왕의 계보가 이 사건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후예 중에 토곤이나 도르지발은 여전히 카안 울루스에 있다가 안정왕이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안정왕 계보는 칭기즈 칸의 서자 계보가 되는데, 문제는 『계보의 영광』을 보면 에부겐과 그의 아들, 그리고 우르다이의 다른 아들의 이름은 밝히고 있으나 토곤이나 도르지발에 해당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Unknown, Bibliotheque Nationales Persan 67: 41); 한편 중국의 연구자 호소붕(胡小鵬)은 『집사』의 기록을 이용하여 토곤이 차가타이 칸의 서자 모치예베의 후예 배답한(拜答寒)의 장자(원사에서는 형제)라고 보았는데, 『원사』에는 배답한과 토곤이 모두 쿨겐(闊列堅)의 항목 아래에 있지만 전술했듯이 『계보의 영광』이나 『집사』의 쿨겐 항목에 배답한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배답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치예베의 후예가 토곤의 부친인 배답한이라고 비정했다. 이 배답한은 13세기 후반에 추베이와 함께 서북에 주둔했던 종왕 중 하나였다(胡小鵬, 2005: 89). 그의 의견을 따른다면 안정왕 계보 역시 차가타이의 후예로 볼 수 있다.
8   Unknown, Bibliotheque Nationales Persan 67: 82-3; 흑수성에서 발견된 북원 선광(宣光)연간의 사료를 보면 도르지발이 여전히 안정왕이었다. 호소붕은 도르지발이 1370년대 어느 시점에 부얀 티무르로 대체되었다고 보았으나, 『계보의 영광』 중에 서녕왕, 위무왕, 빈왕의 계보에는 15세기 초반의 인물까지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안정왕의 계보에 해당하는 이들의 계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부얀티무르의 계보에 약간의 허수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9   이 글의 인명 중에는 한어뿐 아니라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페르시아어 인명이 섞여 있다. 그중에 아랍/페르시아어 인명은 원 발음에 따랐으며, 몽골어 역시 몽골어 전사 원칙을 고려하여 최대한 원 발음에 따랐다. 그러나 몇몇 티베트어 인명은 원어를 확인하기 어려워, 한자독음을 그대로 사용했다.
10   이 지명에 관해 일각에서는 부족이름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 근거는 명대에 작성된 『변정고(邊政考)』의 기록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숙주 남산에 자리한 부족 중에 합랄독(哈刺秃)이라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이 부족은 각기 몽골어와 투르크어 부락명을 지닌 두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래 안정위 출신이었다가 동천하여 숙주 남산에 거주했다고 한다(高啓安, 2005: 40-48). 그러나 이들을 안정위와 연결시키는 것은 거의 추측에 가까우며, 『변정고』 및 『숙진지(肅鎭志)』 등의 기록을 검토해 보아도 이 부족은 한동좌위를 세운 엄장과 관계된 서번계 부족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한동은 관서 7위 중에 티베트계 부족이기도 하다. 한편 『변정고』의 기록은 모든 위소들이 동천한 이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며, 적근몽고위와 관련된 『명실록』 영락 2년(1404) 기록에 등장하는 ‘합랄독(哈刺秃)’(『명사』에서는 ‘哈剌脫’)은 『변정고』의 기록과는 상관없이 세미레치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역어(華夷譯語)』의 「납문부마서(納門駙馬書)」에 등장하는 카라-델(Qala-del)에 관한 다음의 연구를 참조하시오(김호동, 1989: 23-24).
11   이 네 부족의 이름은 각기 특정 지명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아단은 호탄, 곡선은 쿠차 등 샤릭위구르 외부의 지명과 연결되어 있는데, 쿠차와 호탄의 이름을 가진 부족이 샤릭위구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대칸 울루스가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 사이에 차가타이 울루스의 연이은 진격으로 인해 현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에서 퇴각하면서 본래 쿠차와 호탄 출신이었던 일부의 무리가 동부로 이주했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한편 아진은 칭하이성신장 변경의 알툰 산(阿爾金山) 부근 목지, 첩리는 ‘타림’을 의미하는데, 타림이라는 지명은 타림분지, 혹은 타림 강 등의 자연 지명을 연상케 하나, 이 지명은 서역 북로 전체에 적용되므로 좀 더 특정한 영역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페르시아어·중국어 양측 사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우선 『명사』의 「서역전·곡선위」 서두를 보면 원대에는 곡선위가 자리했던 곳에 추베이가 이끌었던 ‘곡선타림도원수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도원수부는 본래 1295년 창설 당시 쿠차에 있었으나, 그 직후 차가타이 울루스의 두와가 동진하여 결국 카라호자를 차지했으므로, 후퇴하여 곡선위의 위치에 자리했던 것이다. 다만 곡선위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사료상 찾아볼 수 없으나, 근간에 신강 뤄창현 와석협(瓦石峡)에서 곡선타림도원수부의 군사문서가 다량 발견되었다(錢伯泉, 2002: 21). 그러므로 뤄창현 부근에 타림이라는 지명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티무르조의 역사서 『승전기』에는 모굴 칸국 3대 칸인 히즈르 호자가 1400년경 사망했을 때 두글라트부의 영지를 공격한 티무르의 손자 이스칸다르의 공격 경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카슈가르, 야르칸트, 우시, 악수, 쿠차(바이), 타림, 호탄을 거쳐 카슈가르로 되돌아온다. 이때 ‘타림’이라는 지명이 강이나 분지가 아닌 도시 명으로 등장하며, 그 위치는 쿠차와 호탄 사이에 위치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를 종합해 보면 타림은 서역 남로 오아시스 중 쿠차와 호탄보다 동쪽,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뤄창현 근방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12   일설에 의하면 곡선위는 이후 샤릭위구르의 기존 위소(안정, 아단)가 티베트 장군의 공격을 받아 위소가 파괴되어 명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설립되는 시점에 별도로 설치되었다고도 한다.
13   『明史』, 西域傳·曲先衛.
14   太祖高皇帝實錄, 洪武九年/八月/二十八日; 이후 한동 부는 관서 7위 중에 유일한 티베트계 위소인 한동위로 편성된다.
15   太祖高皇帝實錄, 洪武十年/四月/二十八日.
16   太祖高皇帝實錄, 洪武二十九年/三月/二十五日.
17   명과 위소와의 조공무역에 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있지만, 가장 고전적 연구이자 명의 전 시대를 아우르는 Serruys(1967)의 연구를 주로 참조했다.
18   명과 위소와의 차마무역에 관한 연구는 谷光隆(1972) 참조.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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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