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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영광 홍농면 우포촌 異樣船 문정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후 조선에서 13년 동안 체류하다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해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록한 《하멜표류기》를 남겼다. 이 책에는 조선 동해안의 고래가 풍부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프랑스 작가 도빌(Contant d’Orville)은 1770~1771년 발간한 《세계의 다양한 민족의 역사(Histoire des différents peuples du monde)》에서 하멜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 반도(Mer de Corée)는 북동쪽에 대양(현재 East Sea)을 접하고 있고, 고래가 풍부해 포경선이 고래를 많이 잡는다.”라고 하였다. 이 기술 내용은 당시 유럽인들이 조선 근해의 풍부한 포경 자원에 대한 높은 관심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네덜란드 포경선 북극고래 포획(사진;위키백과)
정인철 부산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의 독도 발견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1840년대 프랑스 포경선의 동해 진출을 연구해 발표했다. 프랑스 라루스(Pierre Larousse) 사전의 1868년 판에는 “조선인은 청어와 고래잡이에 능한 어부들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1672년 상송의 지도(사진:푸른길)
정 교수는 2015년에 《한반도, 서양 고지도로 만나다》를 저술했다. 그는 “1561년 이전 서양 고지도에서 한반도는 구별해 낼 수 없거나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등장한다. 한반도를 반도로 그린 최초의 서양 고지도는 1561년 포르투갈의 유명한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벨류(Bartolomeu Dias, 1450 ~ 1500)가 그린 해도이다. 그가 제작한 지도의 한반도 남단에는 ‘PVTVRVS’라고 표기돼 있다. 저자는 이를 ‘끝’이라는 의미의 ‘PUNTUS’로 봤다.”라고 말했다. 1797년 조선 동해안을 항해한 윌리엄 브로톤(William Broughton) 함장은 1804년 출간한 저서 《북태평양 여행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에서 한반도 동해 지역에 서식하는 고래의 종류와 수에 대해 상술했다.
브로톤 북태평양 여행기(사진:Project Gutenberg Australia)
프랑스 포경선들은 배의 노후화와 잦은 좌초 사고 등으로 점차 선단 숫자가 줄어들었다. 1851년 한 해에 4척의 배가 좌초되었다. 1856년에는 16척의 포경선이 있었으나, 1857년에 무려 11척의 배가 좌초되었다. 당시 프랑스 포경선의 수리 항구는 태평양 하와이에 위치해 포경선의 문제가 생기면 이동하는데 거리가 멀어 문제가 되었다. 고래 어장과 수리 항구가 멀어 경미한 고장이 발생해도 적절하게 수리를 하지 못해 선원들의 고생이 많았다.
1550년의 비변사계회도(備邊司契會圖)(사진:위키백과)
조선왕조 문헌 기록 《비변사등록》과 《일성록》 27책 辛亥(1851년) 음력 3월 11(양력 4월 12일)일 기사를 읽어보면 당시 서양의 이양선이 조선 연안을 항해하면서 불쑥 육지에 정박한 것을 조선 관리가 그 사정을 자세히 알아본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비변사등록》에는 이양선의 출현과 대응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여러 날 바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맑은 날씨에 갑자기 태풍이 발생하여 강한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높았다. 오후가 되면서 초속 15~19m의 강풍이 발생해 배들은 급히 인근 섬과 육지로 피항해 정박했다. 《비변사등록》에 기록된 배는 고군산군도 및 주변 해역을 항해하다 인근 육지로 항해하여 잠시 묘박하였다. 이양선이 잠시 정박한 곳은 전라도 영광군 홍농읍(舊 홍농면) 바닷가로 한빛원자력본부가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영광 앞바다(사진:한국관광공사)
전라감사 이유원이 비변사(備邊司)에 올린 글을 통해 당시 연안 방어와 군사적인 대응을 엿볼 수 있었다. 비변사는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직후 국경 및 변방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임시 군사회의 기구(비변사)로 출발했다.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상설 기구화되었고,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흡수해 당상관들이 모여 국방뿐만 아니라 재정, 인사 등 핵심 정무를 처리하는 최고 권력 기구로 격상되어 심의를 거쳐 국왕에게 보고하는 엄중한 절차를 밟았다. 이 기구는 문무 재상(당상관)이 합의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합의제 기구의 성격을 가졌으며, 조선 중·후기 국방·외교·행정 등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 의결 기구이다.
국보 제152호 《비변사등록》(사진:국가유산청)
국보 제152호 《비변사등록》은 조선 중기 이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결기관인 비변사에서 처리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과 함께 《조선왕조실록》보다 앞서는 기본적인 역사자료로 1년 1책으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나, 기록할 사안이 많을 때는 2책 또는 3책으로 작성하였다. 현재 임진왜란 전의 《비변사등록》 초기 기록물은 모두 사라지고, 광해군 9년(1617)∼고종 29년(1892) 사이의 《비변사등록》은 273책으로 남아있다. 비변사는 고종 2년(1865)에 폐지되었다. 《비변사등록》에는 상당수가 유실되어 빠진 분량이 있다. 이 책에는 책 순서의 표시가 없고 다만 간지(干支)만으로 등록연도를 표기하고 있어 전체의 책 분량과 빠진 부분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어 당시 상황을 다른 사료와 비교를 통해 추정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사진:우리문화신문)
【원문】 全羅監司 李裕元以靈光牛浦漂到異樣船順風發去不得問情馳啓狀啓以爲今月初四日巳時量到付地方官靈光郡守 金德根主鎭將法聖僉使 李命瑞聯報內本郡弘農面牛浦村後洋漂到異國船問情稍俟風定浪息擧行之由已爲馳報而三月初一日卯時量郡守 僉使同入船住處則落船高約可爲六七丈故構木作梯艱辛攀登船中人物爲先計數則共爲三十俱是男人而貌樣異常眼睛人人皆碧頭髮髧髧無辮鬚髯禿短而紫黃者居多頭着毯帽紫黑靑白不一其色衣制則襦短袴長不甚寬闊貼着肥膚而或紅黑或袷單俱是氈毯之屬所結團樞非玉非石莫辨其名足之所穿如襪如靴貼革其底仍爲踏行矣一竝招引左右列立書問以何國人緣何到此則其中一人操筆答之而如梵書如篆字乃是我國人創覩之字畵故更以我國未識此文之意書示則其所書答又如前旣不通言語又不知文字問情一款今不可議到故第竢右水虞候及譯學之來到而看審其船體則頭尾俱高中腹圓滿以均量尺尺量則長二十五把廣七把高八把外面自本板抵中層水所沈之際皆以銅鐵遍裹多用小釘片片連幅而間間磨破自裹銅以上塗靑塗白層層各異帆竹則三箇直立船上一箇橫臥船頭從船六隻狀如梭子載在船上長或爲二把或爲三把廣各爲一把船體之圖畵什物之摘奸待問情官來到同爲擧行計料大抵言之人樣船制與文字俱不知何國之人而其所書示筆跡爲先摸寫上使禁雜人看護等節各別申飭同日酉時量到付該郡守 僉使聯報內初二日丑時量東風方起潮水亦漲則彼船中忽有搖動之聲故申飭看護船隻使之圍住防守頃刻之間收碇擧帆順風逐水向西離發其勢甚急其疾如飛實非我國船人所可禁止只爲觀望則直向西海大洋之外眼力窮盡更不得瞭望郡守 僉使各自還官緣由竝以馳報云問情譯學初不趁期來到嚴棍懲礪計料瞭望等節關飭沿海邑鎭。
영광 대신등대(사진:영광군)
【번역】 영광 홍농면 우포촌 앞바다 이양선 표도 보고
이유원 장계(狀啓)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51년 이번 달(3월) 초4일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무렵, 지방관인 영광군수 김덕근과 주진장(主鎭將)인 법성첨사 이명서가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본 군의 홍농면 우포촌 뒷바다에 이국 선박이 떠내려왔기에 문정(問情, 사정을 물음)하려 했으나, 우선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쉬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겠다는 사유를 이미 급히 보고한 바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초1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 무렵, 군수와 첨사가 함께 배가 머무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배의 높이가 대략 6~7장(丈)이나 되어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간신히 올라갔습니다. 배 안의 사람 수를 먼저 세어보니 모두 30명이었으며 모두 남자였습니다. 선원들의 모습이 기이하여 눈동자는 사람마다 모두 푸른색이고,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졌으나 땋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짧고 듬성듬성하며 자줏빛이 섞인 노란색인 자가 많았습니다. 머리에는 털모자를 썼는데 보라, 검정, 푸른색, 흰색 등 그 색깔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옷 제도는 저고리(유)는 짧고 바지(고)는 길며 그리 넓지 않아 몸에 딱 붙어 있었는데, 붉거나 검은색 혹은 겹옷이나 홑옷으로 모두 모직물(전담) 종류였습니다. 맺은 단추는 옥도 아니고 돌도 아니어서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발에 신은 것은 버선 같기도 하고 가죽신 같기도 한데, 가죽을 바닥에 붙여 그대로 밟고 다녔습니다. 그들을 한꺼번에 불러 좌우로 줄 세우고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라고 글로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이 붓을 잡고 대답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글자가 梵書(산스크리트어) 같기도 하고 전자(篆字) 같기도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보는 글자였습니다. 다시 “우리나라에서는 이 글자를 전혀 알지 못한다.”라는 뜻을 써서 보여주니, 다시 써서 답한 것도 전과 같았습니다. 이미 말도 통하지 않고 문자도 알 수 없어 사정을 묻는 일(問情)은 지금 논할 수 없었습니다.
전라우수영의 우후(虞候)와 역학(譯學, 통역관)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 선체를 살펴보니, 머리와 꼬리가 모두 높고 중간 배 부분은 둥글고 풍만했습니다. 자로 재어보니 길이는 25파(把), 너비는 7파, 높이는 8파였습니다. 배 바깥쪽은 밑판부터 중간층 물에 잠기는 부분까지 모두 구리와 철로 빈틈없이 둘러싸고 작은 못을 많이 써서 조각조각 이어 붙였는데, 간간이 마모되어 깨진 곳도 있었습니다. 구리로 두른 윗부분은 푸른색과 흰색을 칠했는데 층층이 달랐습니다. 돛대는 3개가 배 위에 직립해 있고 1개는 뱃머리에 가로로 누워 있었습니다. 딸린 작은 배(종선) 6척은 북(梭子) 모양 같았는데 큰 배 위에 실려 있었으며, 길이는 2파(把: 10자(尺)가 1파) 혹은 3파이고 너비는 각 1파였습니다. 선체의 그림과 집물(什物, 도구들)의 조사 내역은 문정관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거행할 계획입니다. 대저 말하자면, 사람의 모양과 배의 제도 및 글자가 모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써서 보여준 필적은 우선 베껴 써서 올립니다.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감시하는 등의 절차는 각별이 단속하였습니다.
같은 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해당 군수와 첨사가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초2일 축시(丑時, 오전 1시~3시) 무렵, 동풍이 막 불고 조수도 차오르자 저 배 안에서 갑자기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에 감시하는 배에게 명하여 포위하고 방어하게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닻을 거두고 돛을 올려 바람을 타고 물길을 쫓아 서쪽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기세가 매우 급하고 빠르기가 날아가는 듯하여 진실로 우리나라 배나 사람이 금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는데, 곧장 서해 대양 밖으로 나가버려 눈의 힘이 다하도록 더는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수와 첨사가 각자 관청으로 돌아온 연유를 아울러 급히 보고한다고 하였습니다. 기한 내에 도착하지 못한 문정 역학(通譯官)은 엄하게 곤장을 쳐서 징계할 계획이며, 망을 보는 등의 절차를 연해안의 읍과 진에 공문으로 지시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大淸과의 외교 관련 문서를 제자 이청과 공동으로 작업하며 갈래별로 정리하여 22년 만에 1821년(순조 21)에 26권 10책 《事大考例》을 완성했다. 다산은 그중에 〈海防考〉을 따로 두어 표류민과 표류선 처리에 관한 내용을 시대별로 상세하게 적었다. 《牧民心書》에는 지방관이 표류선을 문정(問情)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 5조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지방관은 이에 근거하여 표류선이 오면 그대로 시행했다. 다산은 〈漂船問情〉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왕조의 표류선 처리에 관한 지침서를 남겼다.
《여유당전서》(사진:김삼웅)
국문학자 정민 교수는 다산 연구 논문을 통해 다산의 기록 속에 등장하는 21건 표착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분석하였다. “중국 사람이 조선 경계에 표류해 오면 지방관은 먼저 해당 감영에 치보(馳報: 보고)하고, 상황을 보고 받은 해당 감영은 즉시 역학(譯學: 역관)을 파견하여 문정(問情)하게 한다. 배가 온전하여 수로로 돌아가기를 원하면 바람을 기다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약 배가 파손되어 육로로 가야 할 것 같으면 비국(備局: 비변사)의 초기(草記)로 서울에서 문정관을 차송하게 해서 자세히 보고한 다음 차원(差員)이 안동(眼同, 입회)해서 데려가는데, 양서(兩西)에 표박한 경우는 곧장 의주로 차송하고, 삼남에 표류했을 때는 경성으로 데려온다. 이후 낭청이 문정해서 원적지로 데려다준다. 다만 이때 산해관 안쪽의 사람은 북경으로 인계하고, 바깥사람은 봉성에 인계하고 돌아온다. 만약 사행(使行)과 만나면 그대로 넘겨주지만, 실제로는 처음에는 표류민을 북경까지 데려다주다가 차츰 간소화하여 봉성에 인계하고 돌아왔다.”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표류선이 한번 발생하면 인근의 여러 섬이 결단이 나서 표류선이 다가오면 섬 주민들이 칼을 뽑아 이들을 달아나게 만든 적도 있고 아예 모른 척 한 적도 있었다.
1819년 6월 일본 사쓰마 번(薩摩 藩) 대관 표착 당시 비인태수의 행렬도(사진:AI TIMES)
1851년 4월 2일(양력) 아침, 서해상에는 짙은 먹구름과 함께 강력한 북풍이 몰아치며 하늘이 어두워지고 거센 파도가 포경선을 몰아쳤다. 그날 오후, 배는 작은 섬 근처의 모래톱에 잠시 좌초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선원들은 재빨리 수습해 배를 빼낼 수 있었다. 어둠이 빠르게 깔리고 폭풍이 더욱 거세지자, 선장은 아침이 되면 날씨가 나아지기를 바라며 선원들에게 닻을 내리라고 긴급 명령했다. 하지만 날씨는 나아지지 않았고 더 나빠졌다. 새벽 3시경, 갑판 당직자가 선장에게 거센 조류와 풍랑으로 모래 속의 박혀있던 닻이 뽑혀 배가 섬의 바위투성이 해안으로 밀려 표류하고 있다고 긴급하게 보고했다. 선원들이 일어나 빠르게 움직였지만, 포경선은 밀물에 떠밀려 날카로운 바위에 강하게 부딪혀 결국 파괴되었다.
나주목 비금도 해역(사진:韓网)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전라도 영광 홍농면 우포촌에 들어온 이양선 한 척이 다음날 나주목 비금도 해역에서 표착했다.”라고 이양선을 기록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