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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 권용이(權龍伊) 1903(광무 7) ~ 1972 1919년 3.1 독립선언 당시 20세의 약관으로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편항(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류연성(柳淵成)·류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류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류곡란(柳谷蘭) 등이 편항 장터의 동편에 있는 공동 타작장에 모여 거사 일시를 정하고, 각지 군중의 동원을 분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2시경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시위행진하였는데, 이때 경찰주재소에서 경찰 2명이 나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권총을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면서, 주재소 내에 있는 무기를 가지고 나와서 그곳 우물에 버렸다. 그 사이 2명의 경찰은 신덕리(新德里) 방면으로 도망가고, 1명의 일본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잡혀 구타당한 후 독립만세를 같이 외쳤다. 이어서 경찰 사택을 습격·파괴하고 오후 5시 시위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다시 건물을 파괴하고 비품과 서류를 파기하는 등 이튿날 새벽 3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를 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의 일제검속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3권, 《獨立運動史資料集》 5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김봉조(金鳳祚) 1907(융희 1) ~ 1983 자는 치욱(致勖). 호는 송강(松崗)이다. 경상북도 청송군의 화목공립보통학교와 대구계성중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 농과와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교편을 잡아 경상북도 내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 및 교장을 하다가 경상북도학무과장(慶尙北道學務課長)을 지냈다. 이후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제이대국회의원(第二代國會議員)·헌법위원(憲法委員)·중앙교육위원(中央敎育委員)·국회문교분과위원장(國會文敎分科委員長)을 역임하였으며 국민훈장무궁화장(國民勳章無窮花章)을 받았다. [참고] 《大韓民國建國十年紙》, 《寫眞으로 본 國會20年-附錄-歷代國會議員 總攬》, 《大韓民國人事錄》, 《두산백과사전》
• 김인환(金寅煥) 1919 ~ 1989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상의(相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남(申南)이다. 청송에서 출생하여 1938년 안동공립농림학교 농과를 졸업하고, 이어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부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일본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한 뒤 학도병에 끌려 입대하였다가 광복과 더불어 귀환하였다. 그 뒤 대구농업전문학교 교수를 시작으로 1957년까지 경북대학교 농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농사원(농촌진흥청 전신) 시험국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60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1962년 농촌진흥청의 발족과 함께 시험국장으로 1964년까지 근무하다가 농림부 농업생산국장으로 1967년까지 근무하였다. 그해 12월 농정차관보에 임명되어 1968년까지 근무하다가, 농촌진흥청장으로 옮겨 1980년까지 농업진흥사업에 힘썼다.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농촌진흥청장으로 재직하면서 벼의 육종사업에 역점을 두었는데, 특히 ‘통일벼’의 보급확대에 강한 의지를 발휘하여 미곡증산에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쌀의 자급자족의 숙원을 달성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녹색혁명이 촉진되었다. 또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국제미작연구소 이사,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사단법인 한국종묘협회 회장,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농촌진흥청 농진회장을 맡아 일하였다. 1960년과 1963년 홍조소성훈장, 1972년 황조근조훈장, 1975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참고] 《독립운동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 김재수(金在水) ? ~ 1919 1907년(융희 1) 10월 15일부터 동년 12월 5일 사이에 박연백(朴淵伯) 의병장 휘하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고 박연백 의진 30여명과 함께 경북 신녕군(新寧郡)·안동군(安東郡)·청송군(靑松郡) 일대에서 정진사(鄭進士)·권대방(權大房)·김명원(金明元)·김연전(金延前)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909년(융희 3) 1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종신징역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그해 3월 4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으로 형이 변경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동년 4월 8일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資料集》 별집 제1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남관(南寬) 1911 ~ 1990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35년 동경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하고, 이어서 2년간의 연구과정도 수료한 뒤 광복 직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그 시기에 동경의 문부성미술전(文部省美術展)·동광회전(東光會展)·국화회전(國畵會展) 등에 출품하였던 작품은 서정적 색감과 표현적 자율성의 인물화와 풍경화였다.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해서는 1947년 이쾌대(李快大)·이인성(李仁星)·이규상(李揆祥) 등과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9년까지 연례 회원작품전을 가지며 두드러진 역량을 내보였다.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지기도 하여 1949년 제1회 국전(國展)에서 일약 서양화부 추천작가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중 1952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에서 보게 되었던 제1회 일본국제미술전(일명, 도쿄비엔날레)과 파리의 살롱 드 메 동경전은 그 뒤의 남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954년의 프랑스행을 결행한 것은 그때의 충격적 자극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서울에서 개최된 도불기념전 작품은 동경에서의 신선한 충격을 반영한 추상적인 화면이 과반수였다. 파리에 가서는 추상적 표현의 심상주의 형태를 심화시키면서 독특한 작업을 구현시켰다. 그 내면적 순수형상은 6·25의 비극적 상황 체험에서 비롯된 정신적 표현의지의 상징성과 시간·공간 및 역사의 어떤 표상을 내재시킨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1958년부터는 파리의 살롱 드 메에 초대되었고, 1961년의 출품작 「동양의 풍경」은 프랑스정부가 사들여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 또, 1962년 작품 「허물어진 제단(祭壇)」은 파리시가 구입하여 현재 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리에서의 그러한 예술적 성공은 1966년 남프랑스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명제된 대작이 1등상에 오르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앞에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동양적 심성의 내면적 시각과 정신적 표현성의 은밀하고 매혹적인 색상분위기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그 세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읽을 수 없는 문자성 혹은 동양적 문자성의 화면창조 또는 콜라즈형상으로 추구되어 갔고, 나아가서 석기시대 유물 또는 고분출토의 청동유물을 연상시키는 조형형상과 사람의 해골에 연관된 「마스크」 연작이 이어졌다. 그 표현적 상념은 신비롭고 찬란한 표현미로 거듭 확대되었다. 1968년에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미술부문)과 1981년 문화훈장을 수상하였고, 1990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이 추서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역사의 흔적」(1963)·「센 강변」(1968), 호암미술관에 「대화·절규」 등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 《南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민춘기(閔春基) 1922 ~ ? 1939년 4월 일본 오사카로 도항하여 관서공학교(關西工學校)·경도성봉중학교(京都聖峰中學校)에 다니면서 경도한국인유민생회(京都韓國人留民生會)에 입회하여 선배들로부터 민족의식을 계몽받으면서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중견 지도자가 될 결심을 하였다. 그 후 1941년 6월 대판(大阪) 북구(北區)에서 신문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던 중, 동년 8월 대판공학교(大阪工學校)에 다니는 정규식(鄭圭植)이 신문배달원으로 고용되자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한국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상호 맹세하는 한편 《한국근대정치사》, 《삼민주의(三民主義)》 등 민족운동 관련서적을 탐독하면서 중국혁명의 대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이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한국의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15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으로 인해 1945년 10월 9일 형이 집행정지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박동렬(朴東烈) 1927 ~ ? 1943년 8월 경, 경북 안동의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회복연구단(大韓獨立恢復硏究團)의 단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방학 중에도 학생들을 강제로 근로동원에 참가시키는 등 전쟁준비에 광분하였다. 이때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대구 동촌비행장의 확장공사에 동원되었는데, 박동렬을 비롯한 안동농림학교의 제8·9·10회생들은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항일결사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결사 조직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공사에 동원되었던 일반인들까지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의 강도를 높여 갔다.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은 민족의식 고취에 머물지 않고,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안동시내의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의 습격 등을 투쟁 방침으로 삼았다. 박동렬 등은 기회를 엿보면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3월 10일 소위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추진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박동렬을 비롯한 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 《安東農林50年史》,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安東版獨立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신일선(申一仙) 1907(융희 1) ~ 1990 본명은 신삼순(申三順)이다. 동덕여자의숙(현 동덕여자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 오빠 창운(昌雲)의 적극적인 권유와 주선으로 조선예술가극단(朝鮮藝術歌劇團)에 입단하였다. 또한, 문수성(文守星) 극단에서 무대활동을 하던 중 1926년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아리랑」에 발탁되어 영진(나운규 분)의 누이동생 영희역에 출연하여 인기를 모았다. 같은 해 이경손(李慶孫)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에 출연하였고, 1927년 김수로(金壽魯) 감독의 「괴인의 정체」와 나운규 감독의 「들쥐」·「금붕어」 및 심훈(沈熏) 감독의 「먼동이 틀 때」에 출연하였다. 이무렵 호남갑부의 아들 양승환(梁承煥)과 혼인하였으나 7년만에 이혼하고, 1934년 안종화(安鍾和)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와 1935년 「은하수에 흐르는 정열」에 출연하였다. 1936년 재혼과 더불어 「아리랑」 제3편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하였다가, 1957년 김소동(金蘇東) 감독이 나운규20주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아리랑」에 단역으로 출연한 뒤 완전히 은막에서 은퇴하였다. 첫 혼인의 실패와 연기의 슬럼프 속에 오케레코드 서울지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본 대판(大阪)으로 건너가 「무너진 사랑탑」 등 10여곡을 취입하여 한때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경상북도 청송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2년 서울로 올라온 뒤 뇌졸중으로 죽었다. [참고] 《韓國映畵叢書》, 《韓國映畵發達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의환(沈宜煥) 1924 ~ 1979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924년 6월 18일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1953년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1954년 제6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상공부차관(商工部次官)과 APO(아시아 생산성 기구) 부의장 및 한국기계공업공단 비상임 이사를 지냈으며 총무처(總務處) 장관(長官) 재직 중 간암으로 별세했다. 국가에서는 홍조소성훈장(紅條素星勳章)과 녹조소성훈장(綠條素星勳章) 및 황조근정훈장(黃條勤政勳章)을 수여하고 또 근정훈장(勤政勳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재직 중 청백리로 알려졌으며 도량이 넓고 재간이 남이 따라 올 수 없는 장관으로 이름이 있었다. [참고] 《동아일보》
• 심훈(沈勳) 1929 ~ ? 1943년 8월 경, 경북 안동의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회복연구단(大韓獨立恢復硏究團)의 단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방학 중에도 학생들을 강제로 근로동원에 참가시키는 등 전쟁준비에 광분하였다. 이때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대구 동촌비행장의 확장공사에 동원되었는데, 심훈을 비롯한 안동농림학교의 제8·9·10회생들은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항일결사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결사 조직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공사에 동원되었던 일반인들까지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의 강도를 높여 갔다.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은 민족의식 고취에 머물지 않고,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안동시내의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의 습격 등을 투쟁 방침으로 삼았다. 심훈 등은 1945년 3월 10일 소위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추진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심훈을 비롯한 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 《安東農林學生抗日略傳》,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安東版獨立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왕평(王平) 1908(융희 2) ~ 1940 자는 광희(光熙). 본명은 이응호(李應浩)이다. 이동암의 장남으로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대중음악 작사가이다. 고학으로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 1기생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후에 일본의 포리돌 레코드사의 서울지사 초대 문예부장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황성옛터」, 「대한팔경」, 「고도의 정한」, 「비오는 포구」, 「비단장사 왕서방」, 「신아리랑」, 「신쾌지나 칭칭」 등이 있는데 모두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애환과 혼을 불러일으켰던 기념비적인 노래다. 특히 「대한팔경」, 「항구의 일야」는 조선인을 선동하는 노래라 하여 발표가 금지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 말기에는 성봉영화원에 들어가 영화 「나그네」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유랑극단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뇌일혈로 졸도하여 세상을 떠났다.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골에 묘소가 있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 윤성택(尹成澤) 1926 ~ 1957 1941년 6월 일본(日本) 경도부(京都府) 철희군(綴喜郡) 전변정(田邊町) 소재 도촌(島村) 토공반장내 한국인 토공으로 일하는 김경원(金京元)·김말도(金末度)·김석원(金碩元)·이상문(李相文) 등과 함께 한국인이 취직은 물론 모든 면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는데 이 악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국의 독립밖에는 없으므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위하여 활용하는데 대비하기로 하고 항일활동을 협의하였다. 1942년 6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전시하에 일본의 피폐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의 봉화를 올릴 것 등의 목표를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45년 9월 18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송국하였다. 동년 9월 27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이기순(李琦淳, 李明秀) 1918 ~ ?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재학중인 1941년 4월에 동지들과 함께 3인조 및 9인조의 독립결사대를 조직하고 항일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동포마을인 고려촌을 방문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동포유학생 및 사회 인사들을 대상으로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또한 일제의 식민정책인 징병제도 및 학병제 등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발각됨으로서 그는 1943년 8월에 동경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동년 11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소압(巢鴨)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런데 이때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적 질환을 앓게됨에 따라 1944년 10월에 가석방되었다. 그는 그때의 영향으로 현재까지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 「동경구치소 간수장 增山吉三郞의 차입영수증 3매(1943. 12. 20 / 1944. 4. 28 / 1944. 7. 26)」,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이오덕(李五德) 1925 ~ 2003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25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나, 1943년 영덕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초등 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1986년 스스로 교직을 그만둘 때까지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교감·교장을 지냈다. 1954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한 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와 수필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러나 등단하기 이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 《별들의 합창》(1966), 《탱자나무 울타리》(1969) 등의 동시집을 출간하였다. 1983년에는 교사들을 모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고, 퇴임 후에는 ‘우리말연구소’를 만들어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썼다. 특히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써 오던 어눌한 번역말투와 일본말투의 잔재를 걸러내고 우리말과 글을 다듬은 저서 《우리문장 바로쓰기》(1992)와 《우리글 바로쓰기》(전3권, 1995)는 이 분야의 명저로 꼽힌다. 또 교육현장에서 쓰는 ‘글짓기’라는 용어를 ‘글쓰기’로 고쳐 쓸 것을 주장하고, 어린이들이 쓰는 말과 글이 곧 훌륭한 문학이라는 믿음 아래 10여 권이 넘는 어린이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등 어린이 글쓰기 운동에도 열성을 쏟았다. 1965년에 출간한 첫 저서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 아동문학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1977) 외에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1984),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1993), 《우리말 바로쓰기》(1990), 《문학의 길 교육의 길》 등 5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權正生)을 발굴하였으며, 한국아동문학상(1976), 단재상(1988), 은관문화훈장(2002)을 받았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