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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1 (최 ~ 황)
• 최광태(崔光泰) 1744(영조 20) ~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룡(士龍)이다. 식(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주(命柱)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육(堉)이며, 어머니는 이경엽(李慶曄)의 딸이다. 1774년(영조 50)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였다. 1782년(정조 6) 성균관 재학시 정언(正言) 이유백(李有白)의 상소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789년(정조 13) 방면되었다. 이 해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입록되었으며, 1793년(정조 17) 제술시에 1등으로 직부 전시되어, 이듬해 갑인(甲寅)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01년(순조 1) 부호군(副護軍), 승지(承旨), 이듬해 영광군수(靈光郡守)·청송군수(靑松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司馬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산휘(崔山輝) 1585(선조 20) ~ 1637(인조 1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낙남(洛南)이다. 증좌승지(贈左承旨) 치운(致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참찬(贈左參贊) 심(深)이고, 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 현(睍)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창원부사(昌原府使) 복일(復一)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부친이 흉도 이인거(李仁居)를 사전에 조치하지 못했다는 혐의로 하옥됨에 선생이 상소하여 신구(伸救)에 힘썼다. 1628년(인조 6)에는 제천(堤川)에 귀양 가 있던 류효립(柳孝立)이 역모하고 있으며, 인성군(仁城君)도 관여하고 있다고 고변(告變)하였다. 그 공으로 영사공신(寧社功臣) 3등이 되어 평완군(平完君)에 봉해지고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전토 및 노비를 상사(賞賜)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재임 중 53세로 죽었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재예(才藝)가 숙성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저서로는 《낙남집(洛南集)》이 전한다. 이 문집은 2권 1책으로 목활자본으로 1926년 9대손 병헌(炳憲)의 편집을 거쳐, 병년(炳年)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말(卷末)에 병헌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부(賦)·시(詩)·서(書)·소(疏)·정문(呈文)·제문(祭文), 권2는 부록(附錄)으로 녹훈교서(錄勳敎書)·사제문(賜祭文)·묘지(墓誌)·묘갈명(墓碣銘)·함양비명(咸陽碑銘)·가장(家狀)·시장(諡狀)·연시고유문(延諡告由文)·만사(輓詞)·제문(祭文)·부청운군심명세원정(附靑雲君沈命世原情)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소의 「송부원소(頌父寃疏)」는 1627년(인조 5) 그의 아버지 현(晛)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자 억울한 누명임을 하소연하는 소이다. 「사훈소(辭勳疏)」는 1628년(인조 6) 류효립(柳孝立)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사공신(寧社功臣)이 되어 평완군(平完君)에 봉해짐을 사양한 소이다. 「청감청송군액소(請癎靑松軍額疏)」는 그가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군액(軍額)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는 폐단을 논하고, 군액을 감축하여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참고] 《淸選考》, 《艮翁集》, 《仁祖實錄》, 《洛南先生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세윤(崔世允) 1867(고종 4) ~ 1916 일명 세한(世翰). 자는 성집(成執·聖執). 호는 농고(農膏)이다. 농업과 교사생활을 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사건에 반대하여 1896년(건양 1) 의병 400여명을 규합, 안동의병장 김도화(金道和)의 의진에 들어가 아장(亞將)이 되어 좌익장으로 활약하다 해산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기의하여 영천의병장 정용기(鄭鏞基)와 합세하여 도찰사(都察使) 정환직(鄭換直)과 활약하였다. 1908년(융희 2) 정환직 사망 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청하·청송·영천·의성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나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단식투쟁 끝에 순사(殉死)하였다. 아들 산두(山斗) 역시 옥중에서 순사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大邱地方法院判決文》, 《嶺南出身獨立運動略傳》 제1권, 《韓國獨立史》,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3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최욱(崔煜) 1594(선조 27) ~ ?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여명(汝明)이다. 증조부는 세홍(世弘), 할아버지는 호(濩), 아버지는 충원(忠元)이며, 어머니는 홍익준(洪翼俊)의 딸이다. 이성남(李星男)·이원길(李元吉)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35년(인조 13) 을해(乙亥)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고, 1629년(인조 7) 기사(己巳)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44년(인조 2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4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최유연(崔有淵) 1587(선조 20) ~ ?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지(聖止), 성지(聖之) 또는 지숙(止叔). 호는 현암(玄巖), 현석(玄石)이다. 증조부는 경(瓊)이고, 할아버지는 여림(汝霖)이며, 아버지는 준(濬)이다. 어머니는 이원근(李元謹)의 딸이고, 부인은 정종명(鄭宗溟)의 딸이다. 1621년(광해군 13) 신유(辛酉)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1623년(인조 1) 계해(癸亥) 개시(改試) 문과에 갑과(甲科) 2등으로 급제하여 다음해 주서(注書)가 되고, 지평(持平)·부승지(副承旨)를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효심이 극진하여 1638년(인조 16) 모친의 병을 이유로 체직(遞職)을 청하였다. 1644년(인조 22) 도교(道敎) 부흥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소격서(昭格署)의 복치(復置)를 주장하여 사간원(司諫院)이 그의 삭탈관직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48년(인조 26)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학문이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현암유고(玄巖遺稿)》가 있다. 《현암유고(玄巖遺稿)》는 4권 1책으로 목판본이다. 1675년(숙종 1) 생질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맹주서(孟胄瑞)가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卷末)에 맹주서의 발문(跋文)이 있다. 이 발문(跋文)에는 저자의 저술이 상당히 많으나 그 가운데에서 시문(詩文) 약간만을 추려 간행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권1·2에 시(詩) 222수, 권3에 시 22수, 부(賦) 3편, 권4에 논(論) 2편, 설(說) 1편, 기(記) 7편, 명(銘) 1편, 전(傳) 1편, 별집(別集)에 시 6수, 서(序) 2편, 부(賦)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개 만년에 진주 악양(岳陽)에 퇴거한 후 소요자적(逍遙自適)을 읊조린 것으로, 옛 벗과 친지들을 생각해 지어준 시들도 간간이 보인다. 오언고시로는 양원(楊元)·양호(楊鎬)·송상현(宋象賢)·김여물·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이순신(李舜臣)·권필(權億) 등의 「팔애시(八哀詩)」를 지어 그들의 절조(節操)·용쟁(勇爭)·공덕(功德)들을 높이 찬양하면서 애석해 하였다. 또, 칠언고시 중 「만월대(滿月臺)」는 회고시(懷古詩)로서, 당시 흥성했던 고려의 왕궁 터가 황폐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그 처절함을 읊었다. 「별빈부(別貧賦)」에서는 스스로의 빈궁함을 노래하고 은근히 자기의 문장력을 자랑하였다. 이 글에서 옛 양웅(揚雄)의 「축빈부(逐貧賦)」와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은 문(文)으로써 희롱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양자운과 한유가 빈천함을 괴롭게 여겨서 「축빈부」와 「송궁문」을 지었다고 여긴다면 그들을 아는 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자(孔子)가 벼슬과 녹을 구하지 않고 도덕을 구했다는 말을 들어, 자기는 양자운과 한유와는 달리 직접 가난을 체험하면서 학문을 즐긴다고 하면서, 고관에서 물러난 자로서 자기의 청렴결백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응지구언진치안경제서천인상감설소(應旨求言進治安經濟書天人相感說疏)」는 왕의 명을 받아 「치안경제서」 27조항과 「천인상감설」 1편을 올리면서 쓴 것이다. 국정 운영에 대한 우국충정이 어린 직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玄巖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익봉(崔翼鳳) 1809(순조 9) ~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경(儀卿)이다. 할아버지는 문현(文顯)이며 아버지는 대영(大榮), 어머니는 참봉(參奉) 김재정(金載鼎)의 딸이다. 성재중(成載重)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64년(고종 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4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 최한후(崔漢候)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자방(子房). 호는 양성(養性), 규암(圭巖)이다. 증조부는 원지(元之), 할아버지는 자강(自江), 아버지는 선문(善問)이고, 어머니는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형제로는 최한충(崔漢忠)이 있고, 홍재(洪載)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469년(예종 1) 기축(己丑) 추장시(秋場試) 병과(丙科) 10위로 급제했다. 중앙의 주요관직을 거쳤으며, 알면서도 말하지 않아 사람들이 공경하면서도 꺼렸다. 만년에는 아버지가 연로하다 하여 외직으로 나갔다가, 도승지(都承旨)로 치사하였다. 관직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이극균(李克均)과 연루되어 형벌에 처해졌다. 율시(律詩)를 좋아하여 지은 것이 수천 여 수라 하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유실되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朝鮮人名辭書》, 《朝鮮王朝實錄》
• 하담(河澹)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할아버지는 윤(胤)이며, 아버지는 지백(之伯)이다. 하강지(河綱地)·하기지(河紀地)·하위지(河緯地)·하소지(河紹地)의 아버지이다. 1402년(태종 2)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429년(세종 11) 청송군사(靑松郡事)에 제수되었다. 세종의 명령으로 청송심씨(靑松沈氏) 시조인 심홍부(沈洪浮)의 묘아래 만세루(萬歲樓)를 건립하였고, 그 이후 찬경루(讚慶樓)와 청송군 객사의 일부인 운봉관(雲鳳館)을 창건하였다. 운봉관은 청송읍내를 동에서 서북으로 흘러가는 용점천을 마주 보며 찬경루 뒤쪽에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객사는 국왕과 왕실의 존엄함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러한 객사가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골짜기 마을 청송에 위치했다는 것은 당시 조정에서 청송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만세루는 현재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 한광근(韓光近) 1735(영조 11) ~ ?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계명(季明)이다. 성익(聖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배휴(配休)이고, 아버지는 사열(師說)이다. 형제로는 한광운(韓光運)이 있다.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한림소시(翰林召試)에 합격하여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국왕의 부름에 즉시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관동 연해에 충군(充軍)되었다가 대간의 구원으로 곧 풀려났다. 1770년(영조 46) 정언(正言)으로 대신의 잦은 교체와 예우를 하지 않는 점, 국왕 근신인의 뇌물 성행, 궁중 노비의 횡포, 국용의 탕감과 사치의 성행, 권세가의 토지 침탈, 수령의 불법 행위, 과거 급제자의 증가로 인한 분경(奔競)의 폐단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제거하여 국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고 사슴 가죽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교리(校理)·제학(提學)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홍문관의 인사기록)에 입록되었으나 입록시 홍문관원이 권점을 추가한 점이 밝혀져 제외되었다. 1780년(정조 4)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또한 부수찬(副修撰)으로 인재와 재용(財用)을 중시할 것, 수령의 신중한 선택, 광범위한 인재 수용, 국가 재용의 절감 등 시무 10조를 올렸다. 1788년(정조 12) 응교(應敎)로 죄인 처벌을 두고 대신과 갈등을 빚어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이후 청송부사(靑松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참고]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항(許恒) 1568(선조 1) ~ ?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구(仲久). 호는 고산(孤山)이다. 윤관(允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규(珪)이고, 아버지는 별좌(別坐) 사익(思益)이며, 어머니는 이력(李饑)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18년(광해군 10)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겪었다. 1620년(광해군12) 사서(司書)를 거쳐 문학(文學)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옥천군수(沃川郡守)로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한때 등극사(登極使) 권반(權盼)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었고, 이듬해 가례도감(家禮都監)의 상례(相禮)를 지내고 벼슬이 올라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직언으로 왕의 비위를 거슬러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좌천되었다. [참고]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大東野乘》, 《湖南三綱錄》, 《沃川郡先生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훈(許薰) 1836(헌종 2) ~ 1907(융희 1)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이다.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지금의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참찬(贈參贊) 조(祚)이다. 29세에 허전(許傳)의 집지문인(執贄門人)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었다. 또한 허훈은 류주목(柳疇睦: 정경세를 사숙하여 류성룡의 학통을 이음)의 학통을 이음으로써 류성룡 계통의 학통과 정구 계통의 학통을 모두 이어 종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허훈은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친일 성향의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단발령을 공포하자, 분개하여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 때 동생 위(蔿)가 창의할 때 토지 3천여 두락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義兵活動)에 적극 협조했으며 1896년에는(건양 1) 진보의병장(眞寶義兵將)으로 추대되어 안동‧영해‧영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의병(義兵) 군수(軍帥)인 허위(許蔿)의 손자들은 현재 모스크바와 타시켄트 등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허훈의 저서로는 《방산문집(舫山文集)》이 전한다. 《방산문집(舫山文集)》에 대해 살펴보면, 이 책은 23권 12책으로 목판본이며, 1910년에 맏아들 숙(廉)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卷末)에 노상직(盧相稷)·허채(許埰)가 쓴 발문(跋文)이 있다. 목록(目錄)이 따로 한 책으로 되어 있다. 권1 ∼ 5에 시(詩) 620여수, 권6에 시 85수, 소(疏) 2편, 서(書) 11편, 권7 ∼ 10에 서(書) 166편, 권11에 서(書) 38편, 잡저(雜著) 7편, 권12 ∼ 14에 잡저(雜著) 24편, 권15에 서(序) 41편, 권16에 서(序) 24편, 기(記) 15편, 권17에 기(記) 23편, 발(跋) 19편, 권18에 잠(箴)·명(銘)·송(頌)·찬(贊) 각 3편, 부(賦) 2편, 논(論), 상량문(上樑文) 8편, 축문(祝文) 12편, 제문(祭文) 8편, 권19에 제문(祭文) 11편, 애사(哀詞) 5편, 비명(碑銘) 6편, 구묘문(丘墓文) 5편, 권20에 구묘문 26편, 권21에 구묘문 18편, 행장(行狀) 4편, 권22에 행장(行狀) 12편, 전(傳) 2편, 권23은 부록(附錄)으로 묘갈명(墓碣銘)·가장(家狀) 등이 실려 있다. 시는 금오산(金烏山)·해인사 등 명승지를 유람하며 지은 것, 자연의 변화를 즐겨 지은 것 등이 있다. 소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위판(位板)을 다시 만들 것을 주장한 것, 이현일(李玄逸)의 관작과 시호를 복구해줄 것을 요청한 것 등이 있다. 서(書)는 스승인 허전·류주목 등에게 보낸 것이 여러 편 있고, 이진상(李震相) 등과 상례(喪禮)·복제(服制) 및 사단칠정(四端七情)·이기설(理氣說) 등 성리학을 논의한 것이 많다. 잡저에는 가야산(伽倻山)·주흘산(主屹山)·속리산(俗離山) 등과 백제의 유적을 돌아보고 지은 「서유록(西遊錄)」,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동유록(東遊錄)」, 주방산을 찾아가 지은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 등 기행문이 있다. 천문(天文)과 조수(潮水)의 관계에 대한 주희(朱熹)와 한원진(韓元震) 등의 이론을 검토한 「해조설(海潮說)」과, 복제·제례 등을 논한 「승중자처종복설(承重者妻從服說)」·「제찬진설도(祭饌陳設圖)」·「변이한주심의설(辨李寒洲深衣說)」 등이 있다. 사단칠정에 대한 주희(朱熹)·이이(李珥)·기대승(奇大升)·김창협(金昌協) 등 선학의 설을 검토하면서 이황의 설을 옹호한 「사칠관견(四七管見)」·「성호선생사칠신편중발변(星湖先生四七新編重跋辨)」 등이 있다. 「춘추기의(春秋記疑)」·「빈풍편례설(羚風編例說)」·「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선천도총론(先天圖總論)」 등은 《춘추》·《시경》·《주역》 등에 관한 논설이다. 「패수변패」·「수양산변(首陽山辨)」 등은 《당서(唐書)》·《두씨통전(杜氏通典)》 등의 서적을 인용해 지리의 고증을 시도한 글이다. 그 밖에 백성의 생활과 국가의 재정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인식해 쓴 「염설(鹽說)」, 총포·전차 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포설(茹說)」·「차설(車說)」 등이 있다. 서(序)는 《화은집(化隱集)》·《남강집(南岡集)》 등 친지의 문집이나 저술에 붙인 것, 친족간의 결속을 꾀하고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재물을 모아 만든 의장계(義莊契)·돈본계(敦本契) 등의 결성 경위를 밝힌 글 등이 있다. 기(記)는 금오산 등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 친지의 정자에 관한 기록 등이 있다. 발(跋)은 복성(復性: 복성설을 바탕으로 한 본성으로의 복귀)·신독(愼獨: 혼자 있으면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삼가함)·거가(居家)·독서 등 일상 생활에서 힘써야 할 점들을 권장하고 경계하기 위해 지은 「사잠(四箴)」이 있다. 논의 「공명자비관악론(孔明自比管樂論)」은 패도(覇道)를 한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보다 왕도(王道)의 의리를 추구한 공명(孔明)이 옳음을 지적해 의리의 중대함을 밝힌 글이다. [참고] 《舫山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수호(洪受浩) 1749(영조 25) ~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자현(子賢)이다. 증조부는 만선(萬選), 할아버지는 중구(重耉)며 아버지는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 정보(靖輔)이다. 어머니는 김시경(金始烱)의 딸이다. 형제로는 건호(建浩)·우호(禹浩)·광호(光浩)가 있다. 1777년(정조 1)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790년(정조 14)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1798년(정조 2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홍언철(洪彦喆) 1729(영조 5) ~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치명(稚明)이다. 증조부는 훤(藼), 할아버지는 주서(周敍), 아버지는 창진(昌震)이며, 어머니는 김상악(金相岳)의 딸이다. 형제로는 홍언혁(洪彦赫)이 있다. 이동응(李東應)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62년(영조 38)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에 합격하여, 1763년(영조 39) 계미(癸未)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95년(정조 19)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홍우신(洪祐信) 1795(정조 19) ~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중조(仲助)이다. 증조부는 낙정(樂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희영(喜榮)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명주(命周)이다. 어머니는 진사(進士) 최조(崔照)의 딸이다. 조수인(趙秀仁)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22(순조 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1854년(철종 5) 통훈대부(通訓大夫)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아들은 1882년(고종 19)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합격한 홍승직(洪承稷)이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司馬榜目》
• 홍의호(洪義浩) 1758(영조 34) ~ 1826(순조 2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중(養仲). 호는 담녕(澹寧)이다. 만기(萬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효(重孝)이고, 아버지는 가선대부행용양위부사직(嘉善大夫行龍驤衛副司直) 수보(秀輔)이며, 어머니는 박종윤(朴宗潤)의 딸이다. 대사헌(大司憲) 인호(仁浩)의 아우이다. 최광벽(崔光璧)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80년(정조 4)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784년(정조 8) 갑진(甲辰)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고 지평(持平)·집의(執義)·응교(應敎) 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 호조(戶曹)·예조(禮曹)·공조(工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1786년(정조 10) 교리(校理)로 있을 때 「진팔조이강소(陳八條二綱疏)」를 올려서 언로를 넓힐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경비를 절감할 것, 군사를 조련하여 유사시에 대비할 것, 법금을 엄격히 하여 기강을 세울 것, 상벌을 명백히 하여 권징을 보일 것 등을 진언하고, 1802년(순조 2)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선조심리판부(先朝審理判付)》 16권을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義州府尹),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는데, 영남유생 권재강(權載綱) 등의 진소(陳疏)사건과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예조(禮曹)·형조(刑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 등을 역임하면서 1815년(순조 15)과 1823년(순조 23) 두 차례에 걸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5년(순조 25)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저서로 《담녕집(澹寧集)》·《청구시지(靑丘詩誌)》가 있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참고]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주진(洪柱震) 1634(인조 12) ~ 1705(숙종 3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춘경(春卿). 호는 매사(梅沙)이다. 부사직(副司直) 수(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상(履祥)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진관병마동첨절제사(南原鎭管兵馬同僉節制使) 탁(鉞)이며, 어머니는 조안국(趙安國)의 딸이다. 형제로는 홍주천(洪柱天), 홍주삼(洪柱三)이 있다. 1654년(효종 5)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90년(숙종 16)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헌납(獻納), 승지(承旨), 정언(正言),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역임하였다. 1696년(숙종 2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그 뒤 1701년(숙종 27) 이현일(李玄逸)·심계량(沈季良)의 죄를 감하도록 상소하였다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참고] 《肅宗實錄》, 《國朝文科榜目》, 《司馬榜目》, 《豊山洪氏族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중구(洪重耉) 1686(숙종 12) ~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이다. 통훈대부행사헌부지평(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 만적(萬迪)의 아들로 통훈대부장악원정(通訓大夫掌樂院正) 만선(萬選)의 양자로 갔다. 형제로는 홍중오(洪重五), 홍중일(洪重一)이 있다. 1721년(경종 1) 신축(辛丑)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732년(영조 8)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5년간 재임하였으며 그의 선정을 기려 백성들이 1736년(영조 12)에 세운 선정애민비(善政愛民碑)가 청송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 홍직모(洪稷謨) 1770(영조 46) ~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백(庚寅)이다. 중기(重箕)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석보(錫輔), 할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상한(象漢)이다. 생부(生父)는 참판(參判)을 지낸 낙항(樂恒)이며 판서(判書)를 지낸 낙명(樂命)에게 양자로 갔다. 어머니는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이흡(李潝)의 딸이다. 승지(承旨)를 지낸 김기대(金基大)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26년(순조 26)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5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文蔭譜》
• 황경언(黃儆彦) 1765(영조 41) ~ ?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자경(子警)이다. 증조부는 린(鏻), 할아버지는 응인(應寅), 아버지는 서(遾)이며, 어머니는 박사순(朴師洵)의 딸이다. 여선복(呂善復)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07년(순조 7) 정묘(丁卯)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24년(순조 2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반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 황시(黃是) 1555(명종 10) ~ 1626(인조 4)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시지(是之). 호는 부훤당(負暄堂)이다. 고려 시대에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의 후손이며 본래 창원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시의 증조부 황희성(黃希聖) 때부터 풍기(豐基)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 사우(士祐)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행공조정랑(通訓大夫行工曹正郞) 응규(應奎)이며, 어머니는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이수려(李壽旅)의 딸이다. 형제로는 황고(黃杲), 황섬(黃暹)이 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글을 잘 지었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584년(선조 17) 갑신(甲申)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발령 대기 중 추천으로 주서(注書)가 되었고,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호조(戶曹)·예조(禮曹)·형조(刑曹)의 좌랑(佐郞), 예조(禮曹)·이조(吏曹)의 정랑(正郞), 세 번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재령군수(載寧郡守)로 나가게 되자 부임하지 않았으나 봉화(奉化)와 영천(榮川) 군수에 부임한 것은 어버이의 봉양을 위한 때문이었다. 사간원(司諫院)에 있을 때는 정언(正言)과 사간(司諫)을 지냈고 사헌부(司憲府)에 있을 때는 지평(持平)과 권의(權義)를 역임했다. 세자시강원(世子試講院)으로 옮겨서는 필선(弼善), 보덕(報德)이 되어 문학을 겸했으며 1598년(선조 31)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600년(선조 33) 내자시(內資寺) 정(正)에 제수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01년(선조 34)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고 뒤에 옥당(玉堂)에 들어가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를 지냈다. 1604년(선조 37) 직제학(直提學)으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전보되었다가 다시 승정윈(承政院)에 들어가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고 제조(提調)를 겸임했더니 승정원(承政院)에 말미를 청해서 고향에 돌아왔다. 거듭 홍문관(弘文館)과 사간원(司諫院), 국자감(國子監)의 장관에 추천되었고 장예원(掌隸院)의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다가 1608년(선조 41)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2) 천추사(千秋使)로서 연경(燕京)에 나아갈 때 요양(遼陽)에 도착하여 큰 천둥과 비와 무섭게 밀려오는 큰 파도를 만났는데 황시가 방물(方物)을 받들고 언덕에 올라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속으로 빌자 하늘이 흘연히 열리며 비가 개니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는 일화가 전한다. 1623년(인조 1) 조정에 나가서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제수받았으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직하고 돌아왔다. 1626년(인조 4) 병이 들어 돌아가시자 소백산 거먹골 곤향(坤向) 산등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평양조씨(平壤趙氏)이며 효릉참봉(孝陵參奉) 철명(哲命)의 따님이다. 후부인은 광주이씨(廣州李氏)이며 둔촌(遁村) 상공(相公) 집(集)의 후예이고 참판(參判)에 증직된 민병(民秉)의 딸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유정(有淨)으로 유정은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입명(立命)이고 사위는 박안명(朴安明), 심정신(沈挺信), 윤원기(尹元夔), 홍성원(洪聖元)이다. 차자는 유한(有漢)인데 유한은 2녀를 두었으니 사위는 심정의(沈挺義), 권희학(灌喜學)이다. 저서로 《조천록(朝天錄)》·《부훤당집(負暄堂集)》이 있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文科榜目》, 《貞窩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황윤중(黃允中) 1782(정조 6) ~ 1855(철종 6)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성집(聖執). 호는 운학(雲鶴)이다. 극일(克一)의 6세손이며, 만주(晩洲) 권이복(權以復)의 문인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문장을 넓게 접하고 시에 능하였다. 향리에 묻혀서 후진 양성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를 근심하였다. 저서로는 《운학집(雲鶴集)》이 전한다. 《운학집(雲鶴集)》은 2권 1책으로 목판본이며, 1907년 손자 경한(慶漢)·인한(麟漢)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신관조(申觀朝)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 조규락(趙奎洛)과 증손 상룡(相龍) 등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280수, 권2에 서(書)·잠(箴) 각 5편, 기(記)·설(說) 각 1편, 제문(祭文) 2편, 행록(行錄) 1편과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 11수, 뇌문(誄文) 1편, 제문(祭文) 3편, 유사(遺事)·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서당명(書堂銘)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 《雲鶴集》, 《朝鮮寰輿勝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황응중(黃膺中) 1559(명종 14) ~ ?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희안(希顔). 호는 담재(湛齋)이다. 아버지는 언방(彦邦)이다. 타고난 자질이 특출났으며, 힘이 절륜하고 재덕(才德)이 일찍이 드러났다.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속수오륜행실록(續修五倫行實錄)》에 기사가 등재되었고, 1583년(선조 16) 계미(癸未)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올랐으니 일이 「과방록(科榜錄)」에 실려 있다. [참고] 《癸未謁聖文武科榜目》
• 황응청(黃應淸) 1524(중종 19) ~ 1605(선조 38)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청지(淸之). 호는 대해(大海)이다. 아버지는 훈도(訓導) 황우(黃瑀)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참판(參判)에 오른 황여일(黃汝一)이 조카이고,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황중신(黃中信)이 손자다. 1552년(명종 7)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580년(선조 13) 별시(別試)에 응시했으나, 시험 문제가 좋지 않음을 보고 바로 과장을 나왔다. 1584년(선조 17) 천거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개성(開城) 연은문참봉(延恩門參奉)에 제수되었을 때는 박연폭포(朴淵瀑布)만 보고 바로 돌아와 버렸다. 1594년(선조 27)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 제수되었을 때 4가지 시폐를 개진하자, 왕이 가납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제수하였고, 진보현감(眞寶縣監) 시절 민심을 수습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5)‚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아계 이산해는, 평해(平海)로 귀양갔을 때 항상 왕래하며 문질(文質)하였으며, 공의 학문이 주정함에 탄복하였다. 문집으로 《대해집(大海集)》이 있다. 1671년(현종 12)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 《朝鮮人名辭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황치성(黃致誠) 1543(중종 38) ~ 1623(인조 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실(而實)이다. 형(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琦)이고, 아버지는 행목청전참봉(行穆淸殿參奉) 대용(大用)이며, 어머니는 정백붕(鄭百朋)의 딸이다. 형제로는 황치신(黃致信)이 있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으로 생원(生員)·진사(進士)에 합격하여, 1580년(선조 13) 경진(庚辰)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영광군수(靈光郡守)를 거쳐 이천부사(利川府使) 재직시 여러 작폐가 드러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를 거쳐, 다시 원주목사(原州牧使)·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으나 체차(遞差: 일정한 피죄로 관직이 교체됨) 파직되었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1604년(선조 37)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그 뒤 전적(典籍) 등을 거쳐, 광해군대에는 행사정(行司正)을 역임하고 폐모(廢母) 정청(政廳)에도 참여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황하흠(黃夏欽) 1862(철종 13) ~ 1910(융희 4) 본관은 평해(平海). 자가 효약(孝若). 호는 가은(稼隱)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 황재곤(黃載坤)이었다. 어머니는 은진송씨 송병섭(宋炳燮)의 딸로 항상 정숙하고 온화하였다. 황하흠의 형제는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로 황수하(黃秀河), 아래로 황순석(黃順錫)이 있었다. 황하흠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뿐 아니라 형제애도 깊었다. 형인 황수하가 집을 저당 잡히는 등 재산을 탕진하자 자기의 집을 팔아 형을 돕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황하흠은 어릴 때부터 골격이 장대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큰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성년이 된 어느 날 옛사람들이 자식된 도리를 다하고 부모를 잘 봉양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알려달라고 하였다. 황하흠은 산중에 살면서 벼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으며, 스스로 호를 가은(稼隱)이라고 지었다. 그는 가정의 규범을 세우고 마을의 풍속을 따랐으며 부모에게는 우울한 빛을 보이지 않고 자식들에게는 다정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오직 분수를 지키고 직분을 닦으면서 효행을 근본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여겼다. 현재 황하흠의 생활상을 담은 《가은유고집(稼隱遺槁集)》이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그의 효행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일화를 살펴보면 황하흠의 아버지 황재곤(黃載坤)이 병환으로 누워있을 때 환자의 대변이 달면 나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며 의원이 약을 조제할 때 참고하도록 아버지의 병환을 이야기하였고 아버지께 약을 바쳤다고 한다. 언제나 부모님의 식사와 거처를 살펴 불편함이 없게 하였고, 밥을 먹을 때는 먼저 입에 넣지 않았고 새 옷은 먼저 입지 않았다. 집에 베를 짜고 들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떡을 하면 한 번도 먼저 맛보는 일이 없었고, 이웃에서 들어온 음식과 친척들이 보내온 예물, 시장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은 반드시 부모님에게 먼저 갖다 드렸다. 황하흠의 효행은 지방 곳곳에 알려져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황하흠은 “모두 사람의 자식이라면 당연히 할 일인 것을 어찌 가히 관에 올려 명예를 구하리요.”라며 포창완의문을 거절하였고 생전까지 효행비각을 세우지 않았다. 황하흠 사후 1932년에 황하흠의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을 후손들이 새로이 받게 되었다. 후손들은 유계를 조직하여 청송 청운리에 정효각(旌孝閣) 세웠다. 그는 파평윤씨(坡平尹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황덕윤(黃悳潤)과 황도윤(黃道潤)이며, 장녀는 임영락(林永洛)에게 차녀는 임재현(林在賢)에게 출가시켰다. 황덕윤에게 4남 1녀가 있었으니, 아들은 황관모(黃觀模), 황복모(黃復模), 황간모(黃艮模), 황항모(黃恒模)이다. 또 황도윤에게 3남이 있었으니, 황동모(黃東模), 황서모(黃西模), 황남모(黃南模)이다. 《가은유고집(稼隱遺槁集)》은 황하흠의 효행을 기록한 유고집이다. 구성은 서론, 부록(附錄), 제문(祭文),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시(詩), 서간문(書簡文)으로 되어 있다. 서론은 완산(完山) 류동기(柳東夔)가 지은 것으로, 윤리와 기강이 땅에 떨어져 어지러운 세상에 모범이 된 황하흠을 잃어 슬프다는 내용의 글이다. 부록(附錄)은 교우들과 안부를 묻는 편지들과 황하흠의 죽음을 슬퍼하는 친구들의 편지글이다. 제문(祭文)은 친구들이 황하흠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것이다. 가장에는 형인 황수하(黃秀河)가 쓴 황하흠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집안 내력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행장(行狀)에는 황하흠의 효행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였다. 묘갈명(墓碣銘)에는 황하흠의 내역과 효행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으며 정효각을 지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시에는 자신의 생각하는 효제(孝悌), 충신(忠信), 지학(志學) 등에 대해 정리하고, 계절을 칠언시로 표현하였다. 서간문은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며 학문에 정진하지 못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편지글들이다. [참고] 《稼隱遺槁集》,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 황학(黃㶅) 1758(순조 34) ~ ?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학중(學中). 호는 만취동(晩翠洞)이다. 양무공(襄武公) 희석(希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석문(錫文)이다. 황학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장성하여 후암(厚菴) 권렴(權濂; 1701~1781)의 문하에서 과거시험 준비에 진력하다가, 시대에 맞지 않음을 알고 성리학(性理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1724~1797)에게서 《대학(大學)》과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그는 학문이란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깨닫고, 학문과 사변(思辨)에 힘쓰고 용모와 언변에 더욱 공부를 쌓았다. 그리하여 언어와 행동이 늘 질박하고 일치하였다. 그는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한 이래로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진했다. 황학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 《만취동일고》를 통해 대략 알 수 있다. 황학은 교우들과 《논어》의 여러 항목들에 대해 토론하였고, 퇴계의 이기설(理氣說)과 《대학(大學)》의 사상을 즐겨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벼슬길을 버리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한 학자였다. 어릴 때 매일 책만 읽은 황학에게 부친이 논에 가서 새를 쫓으라고 했더니, 황학은 책을 갖고 가서 논두렁에 앉아 해가 저물 때까지 책만 읽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부친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하여 이번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라고 시켰더니, 황학은 나무를 하게 되면 책을 읽을 수 없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만큼 황학은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성장한 후에도 학문에만 전념하여 벼슬에는 큰 뜻이 없었다. 그러한 그의 행적은 마을 멀리까지 알려져 청운리의 자랑이 되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 또한 ‘취동(翠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문에만 열중하고 있는 황학에게 현감이 지방 선비들의 시험을 주관해주고 관광을 즐기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황학은 “스스로 생각해보면 밝은 판단이 있을 것이다.”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고 마을에 서당을 지어 학문을 전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청운리에 진실로 높은 선비가 있다.’라는 칭송을 들었다. 황학이 남긴 문집 《만취동일고》에는 류숭(柳崧)이라는 사람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 대개 산수 속에서 살면서 살아가는 소박한 삶이나 학문 연마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는 유학자적 태도를 그리고 있다. 강가에서 살아가는 새들의 평화로운 모습과 한적한 강가 풍경을 그린 작품에서도 역시 욕심 없이 선비로써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황학의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만취동일고》는 황학(黃㶅)의 시문집으로 2권 1책, 목판본이고, 1883년(고종 20) 문하생 황경헌(黃景憲)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조성복(趙星復)의 서문(序文)이 있고 발문(跋文)은 없다. 권1에 시(詩) 20수, 서(書) 23편, 제문(祭文) 2편, 문 1편, 권2는 부록(附錄)으로 저자에 대한 만사(輓詞) 8수, 애사(哀詞) 8편, 제문(祭文) 2편, 행략(行略) 1편, 묘표(墓表)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시와 편지가 실려 있는데, 우선 자신의 유학적 삶의 태도를 그린 작품 「술회(述懷)」를 필두로, 어느 해 봄에 청송의 주왕산으로 여행갔을 때 폭포나 암자를 소재로 하여 산수의 풍경과 흥취를 노래한 기행시도 있다. 편지에는 스승인 천사 김종덕에게 자신의 안부와 학문적 성취를 알리는 것과 동학들과의 토론 서간이 실려 있다. 권2는 부록(附錄)으로, 권이충(權以充), 김청진(金淸進), 류두문(柳斗文) 등이 황학을 위해 작성한 만사와 제문(祭文)이 실려 있다. 끝으로 서활(徐活)이 쓴 행략(行略), 류범휴가 쓴 묘표(墓表)가 실려 있다. [참고] 《晩翠洞逸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