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지식놀이터
지식자료
지식자료 구독
구독 내역
게시판
게시판
작업요청
최근 작업 현황
지식창고
지식창고 개설 현황
자료실
사용자메뉴얼
about 지식놀이터

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42 (2026.03.05. 17:47)

조선시대 10 (조)

 
• 조광규(趙光奎) 1851(철종 2) ~ 1927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 조규락(趙奎洛) 1835(헌종 1) ~ 1909(융희 3) 자는 중서(中瑞)이다. 아버지는 용진(龍震)이다.
• 조규명(趙圭明) 1861(철종 12)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용하(龍河), 순화(舜和). 호는 일송(逸松)이다.
...
<조선시대> 10 (조)
 
 
조광규(趙光奎)  1851(철종 2) ~ 1927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광규는 이때 참모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그는 좌익장 권성하 등과 함께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규락(趙奎洛)  1835(헌종 1) ~ 1909(융희 3)
자는 중서(中瑞)이다. 아버지는 용진(龍震)이다.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규락은 이때 지휘사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규명(趙圭明)  1861(철종 12)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용하(龍河), 순화(舜和). 호는 일송(逸松)이다. 고조는 현규(顯奎), 증조는 기목(基穆), 할아버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석우(錫祐), 아버지는 통정대부금부도사(通政大夫禁府都事) 성욱(性旭)이며, 어머니는 평택임씨(平澤林氏) 순업(順業)의 딸이다.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문인이다. 벼슬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릴 때부터 학업에 전념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형님과 함께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친이 병들자 꿩고기를 원하였다. 즉시 산에 들어가 간곡히 빌자 산꿩이 앞에 와서 엎드리거늘 그것을 취하여 대접하여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은 부친의 약을 구해서 캄캄한 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범이 따라오면서 그를 호위하여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며 부모를 섬기는 효심에 하늘이 감동함으로써 생긴 것으로 여기고 칭찬하였다. 현재 청송군 현동면 창양리에 그의 효성을 기린 효자각이 있으며, 또한 그가 직접 지은 일송정(逸松亭)도 남아있다.
[참고] 《嶠南誌》
 
조규진(趙奎震)  1850(철종 1) ~ 1903(광무 7)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조규진도 이때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근백(趙根伯, 趙性逸, 趙勤伯) 1872(고종 9) ~ 1908(융희 2)
1906년(광무 10)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영양(英陽)·청송(靑松)·진보(眞寶)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을 벌였다. 그 뒤 이듬해 7월 입암(立岩) 전투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고 의진이 해산되자, 은둔하였으나 1908년(융희 2) 6월 20일 자택에서 일군에게 체포, 현장에서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倡義誌》, 《咸安趙氏大同譜》 第3篇,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기수(趙基壽)  1770(영조 46) ~ 1845(헌종 11)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대지(大之). 호는 면류재(面柳齋)이다. 아버지는 익섭(翼燮; 1745~1828)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온순하며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였다. 4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지만 애도함이 성인과 같았다고 한다.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귀와(龜窩) 김굉(金㙆)과 교유하였다. 조익섭(趙翼燮)·조기수(趙基壽)·조관호(趙觀祜)·조태호(趙泰祜)·조겸호(趙謙祜) 다섯 명의 유문을 모은 《현애세고(玄厓世稿)》 9권 4책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조기억(趙基億)  1773(영조 49)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내길(乃吉). 호는 불침헌(不寢軒)이다. 증조부는 경인(景仁), 할아버지는 생원(生員) 상언(相彦),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증엽(增燁)이고, 형제로는 기신(基信)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학문과 덕망으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司馬榜目》
 
조기영(趙基永)  1764(영조 40)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천휴(天休). 호는 현은(玄隱)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살았던 생육신 어계(漁溪) 려(旅)의 후손이다. 고조는 주부(主簿)를 지낸 방호(方壺) 준도(遵道), 증조는 참판(參判)을 지낸 경인(景仁),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가당(二可堂) 상변(相抃)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우섭(友(燮)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어려서 이상정(李象靖)․이주정(李周楨)의 기대를 받았고, 후에 귀와(龜窩) 김굉(金㙆)․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 되었다. 유현(儒賢) 김필희(金弼熙), 이병원(李秉遠), 류심춘(柳尋春), 정상진(鄭象晉) 등과 교유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영특한데다 일찍 배움을 시작하였으니 남보다 뛰어났다. 문리(文理)에 막힘이 있을 때면 책상을 마주 대하면서도 생각에 잠겨 책을 읽지 못하니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는다면 절로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라 하며 매우 기대가 컸다. 1827년(순조 27)에는 부친의 뜻으로 인해 사마시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어렸을 무렵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방문하였을 때 이상정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배우니 그를 매우 아껴면서 ‘앞으로 공부에 일찍 성취가 있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또 대계(大溪) 이주정(李周楨)이 시(詩)로써 그를 시험해 보고 칭찬하기를 “이 아이는 맑고 깨끗한 기상을 가졌다[灑落]”라고 하였고 종조부 지양(芝陽) 조상언(趙相彦)은 그를 아끼면서 “문호(門戶)의 앞날이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조부이 상변(相抃)이 일찍이 ‘誠’이라는 글자를 손수 써서 벽에 걸고는 그로 하여금 보고 의(義)를 생각하도록 훈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 방을 ‘일성재(一省齋)’라고 이름 지었다. 일찍이 호문삼로(湖門三老)라 불리는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 나아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귀와(龜窩) 김굉(金㙆)에게 궁금한 것을 질의(質疑)하였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청하여 배웠다. 공은 만년에 현포(玄圃)의 수석(水石)을 애호하였고 틈이 나면 사람들과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었다. 매월 초하루면 가묘(家廟)를 배알함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하루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참고] 《玄隱集》, 《司馬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기준(趙基濬)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군상(君祥). 호는 독소(篤所)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 종악(宗岳)의 후손으로 매헌(梅軒) 치용(致龍)의 5세손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효성스러우며 정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항상 사서(四書)를 연구하며, 특히 대학(大學) 중 ‘무자기(毋自欺)’에 대한 잠명(箴銘)을 써서 스스로 경계로 삼았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조능호(趙陵祜)  1852(철종 3) ~ 1925
자는 성여(聖汝). 호는 연잠(蓮岑)이다.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능호도 이때 종사에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과 함께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덕수(趙德洙)  1714(숙종 40) ~ ?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도원(道源)이다.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명익(明翼)의 아들로 조산대부내시교관(朝散大夫內侍敎官) 명두(明斗)의 양자로 갔다. 형제로는 조덕순(趙德洵)이 있다. 1744년(영조 20)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759년(영조 3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조독호(趙篤祜)  1843(헌종 9) ~ 1914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용(周用)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경방(景滂)의 현손이다. 17세 때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식견을 넓혔으며, 주자(朱子)·회재(晦齋)·퇴계(退溪)·대산(大山)의 서적을 가려 뽑아 《독서찬요(讀書讚要)》를 저작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부터 4월 사이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일제가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조독호는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1월 심성지(沈誠之) 의병장이 경북 청송에서 1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거의(擧義)하자 그는 이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청송의진은 1896년 거의 후 2월 조직을 갖추고, 4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7 ∼ 8명을 사살하는 등 경북 청송 일대에서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감행하였다. 그는 의진의 참모(參謀)로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동도(趙東道)  1578(선조 11) ~ 1668(현종 8)
본관은 함안(咸安). 자가 경망(景望). 호가 지악(芝嶽)이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증가선대부형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정언(庭彦), 아버지는 함안에서 청송 안덕으로 이거(移居)한 증자헌대부형조판서겸동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 지(址)이며,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이다. 조수도(趙守道), 조형도(趙亨道), 조순도(趙順道), 조준도(趙遵道)와 형제지간이며 누이 셋과 함께 서로 우애가 깊었다. 조동도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용모와 도량이 특출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한 번도 부형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관직에 올라 곡산훈도(谷山訓導)와 제용감부정(濟用監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해 둘째 형인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가 곽재우(郭再祐)의진(義陣)에 갈 때 분연히 말하기를 “큰형님(조수도)은 부모님을 모셔야 하니, 형님이 가시는 데 이 아우 또한 마땅히 따라가겠습니다.”고 하고는 함께 종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15세에 불과했다. 1596년(선조 29)에 귀가하여 부모를 뵙고 마을에서 의병을 모으니, 사람들이 그를 청송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9월 9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서 32명의 장수들과 함께 시를 지었는데, 이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를 닦을 때는 경망(조동도의 자)에게 의지하라(修道倚景望)’는 글을 얻었을 만큼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조동도는 향의장(鄕義將)이 되어 대구의장(大邱義將) 서재겸(徐再謙), 울산의장(蔚山義將) 윤홍명(尹弘鳴), 안동의장(安東義將) 류복기(柳復起), 밀양의장(密陽義將) 손기양(孫起陽), 영천의장(永川義將) 정세아(鄭世雅), 경주의장(慶州義將) 김응택(金應鐸) 등과 더불어 대구 팔공산(大邱八公山)에 모여 맹서(盟誓)하였다. 1599년(선조 32)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 공훈자들을 포상할 때, 그는 “신하의 도리를 다했을 뿐인데, 무슨 공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면서 수상을 거절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치른 뒤, 형들과 함께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양성하다 향년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현재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금대정사(金臺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 《嶠南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병국(趙炳國)  1883(고종 20) ~ 1955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성오(成五). 호는 해창(海濸)이다. 방호(方壺) 준도(遵道)의 후손이다. 1919년 3월 26일, 27일의 현서면 화목(縣西面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간절히 소망하던 차에,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으로부터 격문을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화목 장터에서 조현욱·신태휴(申泰烋)등과 함께 수백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이때 화목 경찰주재소에서 3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인물 2명을 체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 다시 말을 타고 수십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 장터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연도에 있던 군중이 시위대열에 합세하여 군중은 6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청송경찰서에서 조선인 경부(警部)와 3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같은 민족으로서 독립만세운동을 저지하는 매국노를 죽이라고 외치며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4명이 부상당한 채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5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高等警察要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병필(趙秉弼)  1835(헌종 1) ~ 1908(융희 2)
본관은 풍양(淵壤). 자는 성필(聖必). 호는 간산(幹山)이다. 증조부는 항진(恒鎭), 할아버지는 운함(雲咸), 아버지는 구영(龜永)이며, 어머니는 홍승연(洪升淵)의 딸이다. 형제로는 조병익(趙秉翊)이 있다. 1871년(고종 8) 수릉참봉(綏陵參奉)으로 황감제문과(黃柑製文科)의 병과(丙科)에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을 거쳐 다음해에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1874년(고종 11)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3월에는 황해도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임무도 맡았다. 1876년(고종 13)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왕의 근신으로 국정을 보필하였으며 이듬해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1883년(고종 20) 김옥균(金玉均)·복원규(卜元圭) 등과 함께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사후처리에 진력하였다. 이해 대사성(大司成)을 잠시 겸하였으나 5월 동래부 민란이 발생하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어 난의 진정에 힘썼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간(大司諫), 좌승지(左承旨),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을 거쳐 1892년(고종 29)까지 병조(兵曹)·이조(吏曹)·형조(刑曹)·공조(工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8월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진주관찰사(晋州觀察使)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도주하였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고 비서원승(煉書院丞), 장례원경(掌禮院卿), 궁내부특진관, 태의원경(太醫院卿),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시종원경(侍從院卿)을 거쳐 1902년(광무 6)에는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가 되었다. 1904년(광무 8)에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고, 1905년(광무 9)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 학부대신서리(學部大臣署理)로 임명되었다가 1907년(융희 1)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國朝文科榜目》, 《大韓帝國官人履歷書》, 《梅泉野錄》, 《陰晴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상변(趙相抃)  1714(숙종 40)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열경(悅卿). 호는 이가당(二可堂)이다. 준도(遵道)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경인(景仁), 형제로는 상우(相虞)·상현(相賢)·상언(相彦)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상정(李象靖)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고, 판서(判書) 홍의호(洪義浩)가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까닭으로 봉천(奉薦)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 받았다.
[참고] 《司馬榜目》
 
조상언(趙相彦)  1718(숙종 44)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미경(美卿). 호는 지양(芝陽)이다. 준도(遵道)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경인(景仁)이며, 형제로는 상로(相盧)·상조(相祚)·상현(相賢)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780년(정조 4) 식년시(式年試) 2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였다. 효성으로 이름이 났으며, 총명하고 영민하여 경사(經史)를 배우지 않아도 능히 통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조상적(趙相迪)  1721(경종 1)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혜길(惠吉). 호는 연수(淵水)이다. 어계(漁溪) 려(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가의대부(嘉義大夫) 경기(景沂)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진욱(震郁)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항상 학문에 힘썼으며, 대산 이상정(李象靖)이 그의 글을 보고 감탄하였다.
[참고] 「淵水齋趙公行狀」
 
조상진(趙相震)  1727(영조 3)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동보(東輔). 호는 옥정(玉井)이다. 준도(遵道)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경원(景源)이고, 형제로는 상하(相夏)·상신(相藎)이 있다. 1754년(영조 30)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조상변(趙相抃), 조상언(趙相彦)과 함께 태학에 들어가 경학(經學)을 강론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朝鮮寰輿勝覽》, 《두산백과사전》
 
조상태(趙相泰)  1704(숙종 30) ~ 1774(영조 50)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호(重皡). 호는 계암(溪巖)이다.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조열(趙悅)의 후손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 조려(趙旅)는 조상태의 10세조이다. 고조는 함일(咸一), 증조부는 중벽(重璧)이며, 할아버지는 은덕(隱德)으로 알려진 전(峑)이다. 아버지는 경렴(景濂)이며, 어머니는 월성손씨(月城孫氏) 손시표(孫是標)의 딸이다. 조상태는 청송(靑松) 안덕리(安德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세상에 이름을 날려 어버이께 효도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734년(영조 10)에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기 위해 시험장에 갔다가 혼탁한 행태들을 보고 시험을 단념하게 되었고, 이후 영양에 은거하였다. 조상태는 영양에 은거하여 농막을 짓고 살면서 삼십여 년 동안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삶은 오직 자제 및 마을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자신은 예를 익히고 경전을 외우는 것이었다. 한편, 농사짓고 글을 읽었으니 주경야독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러한 삶 속에서 봄에 돋아나는 꽃과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를 맞이하고 보낸 날들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으면, 간간이 높은 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를 읊고, 때로는 밤낮으로 하늘을 보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토로하였다. 조상태는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또한, 두 누이동생이 시집을 가서도 궁핍하게 살자 곡식을 주고 토지도 떼어주는 등 친족 가운데 생활이 곤궁하거나, 질병이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슬픈 일을 당하면 그의 근심을 대신한 듯하였고, 간혹 사람들이 축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즐거움을 함께하였다. 조상태는 만년에 청송에서 영양의 옥계리로 이거하여 자신을 성찰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또한 집 주변의 산수를 매우 사랑하여, 시로도 남겼다. 사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일고(溪巖逸稿)》 3권 1책이 전한다. 《계암일고(溪巖逸稿)》을 살펴보면 서문(序文)은 조헌기(趙獻基)가 썼다. 권1은 시(詩) 22수, 만사(輓詞) 10수, 편지글 12편, 제문(祭文) 7편, 서문(序文) 1편, 지(識) 4편이고, 권2는 부록(附錄)으로 조상태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 유사(遺事)가 수록되어 있다. 권3 역시 부록(附錄)으로 「부계암정제영(附溪巖亭題詠)」과 「계첩서(稧帖序)」, 「계암정기(溪巖亭記)」, 「계암정창건사적(溪巖亭創建事蹟)」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만포(晩圃) 조성락(趙性洛)이 1925년에 지은 「계암정기(溪巖亭記)」는 ‘먼저 정자를 짓는 목적을 나열하고, 조상태의 후손들이 자신에게 기문을 부탁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뒤에 자손들과 조상태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만일 선조의 유업을 일으키지 않고 선조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고 있다. 끝으로 계암(溪巖)의 경치를 서술하며 조상태의 가계에 대해 약술’하고 마치고 있다. 6세손 조용기(趙鏞夔)가 지은 「계암정창건사적(溪巖亭創建事蹟)」는 ‘조상태가 평상시 정자를 지을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시를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끝내 결행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이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후손들도 정자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1919년 6세손 조용기(趙鏞夔)와 7세손 조성제(趙聖濟) 등이 일을 계획하고 친족들의 힘을 모아 현재의 자리에 계암정을 세우게 되었다.”라고 계암정을 세우게 된 내력을 기술하였다.
[참고] 《溪巖逸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성규(趙誠奎)  1853(철종 4) ~ 1926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조성규는 이때 직임록(職任錄)을 작성하는 등 의진편성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성길(趙性吉)  1860(철종 11) ~ 1917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태초(太初). 호는 백운(白雲)이다. 신당(新堂) 수도(守道)의 후손이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그의 고향 청송에서도 김상종(金象鍾)을 중심으로 청송의진이 구성되었다. 이에 조성길은 청송의진에 입진하여 청송·영덕(盈德)·흥해(興海)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고종의 해산조직을 받들어 1896년(건양 1) 10월 의병을 해산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영천(永川)출신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고 거도적(擧道的)으로 모병활동을 전개하자 조성길은 서종락(徐鍾洛)·남석인(南錫仁)·남석우(南錫佑) 등과 함께 동 의진에 입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상중(喪中)이었으므로 부득이 입진하지는 못하고, 다만 청조문(請助文)을 각지에 발송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등, 간접적으로 의병활동에 협조하였다. 그 후 1907년(융희 1) 9월 입암(立岩)의 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고 11월 정용기에 이어 의병장이 된 정환직마저 적과 접전 중에 체포되어 순국하는 등 불행을 겪는 동안 끝까지 의진과 함께 활약하였다. 1983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저서로는 《백운유고(白雲遺稿)》가 전한다.
[참고] 《山南倡義誌》, 《獨立有功者功勳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성눌(趙性訥)  1835(헌종 1) ~ 1902(광무 6)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조성눌은 이때 백의종사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성락(趙性洛)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오(仲五). 호는 만포(晩圃)이다. 어계(漁溪) 여(旅)의 후손으로, 경해(景海)의 5세손이다. 뜻을 독실히 하고 학문에 힘써 문로(門路)가 준정(準正)하고 궁행독실(躬行篤實)하여 풍성(風聲)이 크게 떨쳤다. 특히 정주학(程朱學)과 퇴계학(退溪學)에 힘써 향당으로부터 추중을 받았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청송 「문행(文行)」편에 그의 행적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조성로(趙性魯)  1839(헌종 5) ~ 1908(융희 2)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성로도 이때 참모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성박(趙性璞)  1845(헌종 11) ~ 1904(광무 8)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형옥(荊玉)이다. 증섭(曾燮)의 증손이다. 기개가 당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조성박은 이때 부장(副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성태(趙性台)  1858(철종 9) ~ 1926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성태는 이때 서기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수도(趙守道)  ? ~ 1593(선조 26)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직(景直). 호는 신당(新堂)이다. 아버지는 증자헌대부형조판서겸동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 지(址)이며,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이다. 형제로는 조형도(趙亨道), 조순도(趙純道), 조준도(趙遵道), 조동도(趙東道)가 있으며 누이 세 명이 있다. 형제지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후손이 없어 막내 동생 지악(芝嶽) 조동도의 장자(長子) 조함수(趙咸遂)를 양자로 들였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다. 김언기는 조수도를 여러 번 크게 인정하여 “타고난 자질이 순수(純粹)하여 이미 학문(學問)을 성취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라고 평하였다. 조수도 역시 1592년(선조 25) 도산(陶山)으로 가는 길에 스승의 묘소를 찾아, “내 어린 시절 가야촌(佳野村)에서 선생님께 글을 배웠는데, 큰 재주와 경륜을 가지고 계셨으나 뜻을 펴지 못하시고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치셨다. 잠시 상념에 잠겨 주위를 배회하니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라고 짧은 소회를 남겼다. 이때 도산의 제현들과 더불어 청량산(淸凉山)에서 공부하였다. 김언기는 조수도의 총명함을 여러 번 크게 칭찬하면서, “조수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여 이미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매형인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가 예안(禮安)에 부임하였을 때는, 동생 조준도(趙遵道)와 함께 퇴계 이황을 사숙하며 공부하였다. 1581년(선조 14) 조지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상처에 피가 맺혀 큰 종기로 악화되었다. 상처에 어떤 약도 효과가 없자, 조수도는 밤에는 하늘에 기도하고 낮에는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지극한 효성으로 그 병을 치유하였다. 1588년(선조 21) 둘째 동생 조형도(趙亨道)와 함께 문경(聞慶)에 있던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를 방문하였다. 조종도는 그의 언사가 맑고 깨끗한 것을 보고는 “내헌(耐軒) 조연(趙淵)의 격조(格調)가 담겨 있으니, 우리 유가(儒家)의 시학(詩學)은 그대의 집에 있다.”고 칭찬하였다. 1590년(선조 23) 정여립(鄭汝立)의 무고(誣告) 때문에 조종도가 옥에 갇히게 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감히 조종도를 위문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직 조수도만이 홀로 분개하여 친척 조언도(趙彦道)와 함께 금부(禁府)에 찾아가 조종도를 위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조지의 명을 받들어 두 아우 조형도와 조동도를 곽재우 장군의 휘하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는 맏아들로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나랏일에 충성을 다하고 가문의 절의를 빛내라.”라고 당부하였다. 그 해 7월 함안에 가서 집안 사람 14인을 모두 데리고 피난 가서 일가(一家)를 보전하였다. 1593년(선조 26)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사후 통훈대부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임진년의 일을 기록한 《신당일록(新堂日錄)》이 있다. 《신당일록》은 1588년(선조 21) 1월 28일 동생과 함께 회시(會試)에 응시한 일부터 1592년(선조 25) 9월 28일 아이를 잃어버려 슬퍼하는 내용까지 5년간의 일기가 실려 있다. 날짜를 건너뛰며 기록하였고, 아버지를 모시고 친척을 방문한 일,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 간 일들을 주로 기록하였다. 동생과 과거를 보러가다가 동생이 병이 나서 급히 말을 구하여 태워 보낸 일이나, 왕복하는 길에 친척을 방문하여 문안드린 일, 선유들의 유적이나 누정을 찾아 조망한 일 등을 기록하였다. 임진난을 당하여 필자는 아버지가 부중에 나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는 데에 동행하며, 곽재우가 의병소를 창설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동생을 의병에 참가시키고 자신은 부모님을 모시고 피난간 일 등을 기술하였다. 부록(附錄)으로 「추모정상량문」과 「묘갈명(墓碣銘)」이 부기되어 있다. 현재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금대정사(金臺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 《惟一齋先生實記》,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순도(趙純道)  1573(선조 6) ~ 1653(효종 4)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일(景一). 호는 남포(南浦)이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가선대부형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정언(庭彦), 아버지는 증자헌대부형조판서겸동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 지(址)이며, 어머니는 습독(習讀)을 지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이다. 형제로는 조수도(趙守道), 조형도(趙亨道), 조준도(趙遵道), 조동도(趙東道)가 있고 누이 세 명이 있다. 형제지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부인은 선성이씨(宣城李氏)이다. 자식이 없어 조형도의 아들 조함철(趙咸哲)을 입양하였다. 조순도는 어릴 때부터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고 기량이 넓어 남을 이해하고 너그러이 용서할 줄 알았다. 또한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여 당시 마을의 귀감이 되었다. 조순도는 임진왜란 때 둘째형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1567~1637)가 의병을 이끌고 출전하자 자신도 함께 참전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조형도는 “나라가 위기를 당했을 때 충성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늙으신 부모님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나는 동생 조동도(趙東道)와 함께 출전하여 승리할 것이니 너는 부모님을 편안히 봉양하여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조순도는 눈물을 흘리며 출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 전장에 나간 의사들에게 글을 보내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후방에서 전략을 세워 보냈다. 조순도는 비록 후방에 있었지만 전장에 참여하여 지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사람들은 그를 ‘자리에 앉은 지휘관’(座元帥)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 때 마침 고향인 함안에서 집안 어른이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조묘(祖廟, 신주 또는 위패를 뜻함)가 악한들에게 욕을 당할까 걱정되어, 그는 함안에 가서 조려 이하 4대 선조의 신주를 잘 피신시켰다. 이에 아버지 조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행실이 뛰어나다 해서 부정(副正)에 제수되고 1624년(인조 2)에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626년(인조 4)에 지사(知事)에 제수되었다. 만년에는 남포고로(南浦古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참고] 《嶠南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시섭(趙始燮)  1716(숙종 42)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성신(聖臣). 호는 용수(聾叟)이다. 아버지는 상우(相虞)이고,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형제로는 사섭(師燮)·인섭(寅燮)·양섭(亮燮)이 있다. 어려서는 숙부인 지양(芝陽) 조상언(趙相彦)에게 배우고 커서는 후암(厚庵) 권렴(權濂)에게 사사하였다. 1759년(영조 35)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조시원(趙時瑗)  1627(인조 5)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옥(伯玉)이다. 할아버지는 통훈대부전행고성현령(通訓大夫前行固城縣令) 형도(亨道), 아버지는 생원(生員)에 합격한 함장(咸章), 생부는 함철(咸哲)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1663년(현종 4)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통덕랑(通德郞)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조시침(趙時琛)  1625(인조 3)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여옥(汝玉). 호는 사담헌(四談軒)이다. 할아버지는 순도(純道)이며,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郞) 함철(咸哲)이다. 형제로는 조시진(趙時珍), 조시원(趙時瑗), 조시현(趙時玹), 조시환(趙時瓛)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해 홀로 탄식하는 날이 많았는데, 한번은 정승(政丞)이 대청력(大淸曆)을 보내오니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는 “머리에는 숭정일월 엮었고, 뜰에는 요의 굵은 냉이가 피고 지니 이것으로써 만족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청(大淸)’ 두 글자를 평생 보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두산백과사전》
 
조연(趙淵)   1489(성종 20) ~ 1564(명종 19)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정경(靜卿). 호는 내헌(耐軒)이다. 할아버지는 려(旅),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영덕현령(通訓大夫行盈德縣令) 동호(銅虎)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증(李增)의 딸이다. 형제로는 조순(趙舜), 조창(趙昌), 조삼(趙參), 조적(趙積), 조발(趙發), 조건(趙騫)이 있다.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치당(曺致唐)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슬하에 후손이 없어, 조건(趙騫)의 막내아들 조정언(趙庭彦)을 양자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시(詩)를 잘 지었고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능통했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1510년(중종 5) 22세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운암(雲巖) 김연(金緣)과 함께 식년시(式年試) 3등으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머물며 과거에 응하였으나 운이 따르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림(士林)들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있었던 관계로,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처가인 청송 안덕에 잠시 우거(寓居)하였다. 이후 음보(蔭補)로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제수(除授)되었다. 1529년(중종 24)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으나, 왕릉의 소나무를 베고 기생집에 드나들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529년(중종 24) 10월에 무죄방면(無罪放免)된 후 다시 등용되어, 1534년(중종 29)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1537년(중종 32)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 은퇴하였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던 중 원벽(院壁)에 김안로를 풍자(諷刺)하는 시를 지어 붙이니, 뜻있는 선비들이 이를 보고 통쾌히 여겨 널리 퍼뜨렸다. 이 일로 김안로의 비위를 거슬러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못했다. 이후 고향 함안과 청송을 왕래 유람하면서 시를 짓고, 손자들의 학문증진에 진력하였다. 사후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로 증직되었다. 조연(趙淵)이 대자연의 풍치를 즐기면서, 함안현감(咸安縣監) 오언의(吳彦毅)와 진사(進士) 안택(安宅)과 더불어 화답한 시를 묶은 책이다. 황곡(篁谷) 이칭(李秤)과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가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써서 편찬하면서, 《내헌환향록(耐軒還鄕錄)》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종가(宗家)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연천(趙然天)  1797(정조 21) ~ ?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성칙(聖則)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 진화(晋和)이다. 형제로는 연대(然大)·연춘(然春)이 있다. 1827(순조 27) 정해(丁亥)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1853년(철종 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조익강(趙益剛)  1623(인조 1) ~ ?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중유(仲柔)이다. 증조부는 충수(忠秀), 할아버지는 정(挺), 아버지는 가의대부행충무위부사맹(嘉義大夫行忠武衛副司猛) 유항(有恒)이며, 생부는 통정대부지제교(通政大夫知製敎) 유도(有道)이다. 어머니는 이창후(李昌後)의 딸이며, 조정생(曹挺生)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조익구(趙益久)가 있다. 1657년(효종 8)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657년(숙종 1)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78년(숙종 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4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조임(趙琳)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원(伯瑗). 호는 신재(愼齋)이다. 증조부는 승숙(承肅)이며, 할아버지는 종례(從禮), 아버지는 계조(繼祖)이다. 오원동(吳元童)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조희문(趙希文)의 아버지이다. 1486년(성종 17)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6년(중종 3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4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조정만(趙正萬)  1656(효종 7) ~ 1739(영조 15)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이다. 아버지는 합천군수 경망(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류씨(晉州柳氏)로 식(寔)의 딸이다. 형제로는 조정우(趙正宇), 조정화(趙正華), 조정하(趙正夏)가 있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장원으로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숙종 20)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이어 공조(工曹)·호조(戶曹)의 낭관(郎官), 제용감(濟用監)·군자감(軍資監)의 판관(判官),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지냈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강서현령(江西縣令), 평양서윤(平壤庶尹), 광산현감(光山縣監), 안악군수(安岳郡守), 청송·성천의 부사(府使), 나주·능주·청주·양주·상주의 목사(牧使)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었고, 이어 영변으로 이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수원부사(水原府使),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호조참의(戶曹參議),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알인욕(閼人慾)·존천리(存天理)’의 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임금이 경청하고 호피(虎皮)를 특사하였다. 1735년(경종 15)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및 공조(工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있었고,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등과 친교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재집(寤齋集)》이 있다. 《오재집》은 4권 4책 필사본이다. 본래 장손 덕수(德洙)가 유고를 모아 편집해 놓은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이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卷末)에 현손 기진(基晉)이 쓴 후지(後識)가 있다. 권1·2에 시(詩) 524수, 권3에 소(疏) 12편, 헌의(獻議) 1편, 전장(箋狀) 4편, 서(書) 2편, 행장(行狀) 2편, 비명(碑銘) 1편, 묘지(墓誌) 1편, 제문(祭文) 8편, 애사(哀詞) 1편, 서(序) 1편, 기(記) 3편, 권4는 제발(題跋) 3편, 상량문(上樑文) 1편, 잡저(雜著) 2편, 부록(附錄)으로 사제문(賜祭文)·행장(行狀)·신도비명(神道碑銘)·묘지명(墓誌銘)·시장(諡狀)·묘표(墓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김창집(金昌集)·창협(昌協)·창즙(昌緝) 삼형제와 주고받은 것,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것, 국화·영산홍·석류 등 22종의 화훼를 연이어 읊은 것, 두보(杜甫)의 시에 차운한 것, 친지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이별을 슬퍼하여 지은 것 등이 있다. 소는 송시열(宋時烈)을 변무(辨誣)하기 위하여 지은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직소이다. 헌의는 조정에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과 중종의 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능인 온릉(溫陵)을 복위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글이다. 기에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 등이 있다. 발에는 저자 나이 68세인 1723년(경종 3)에 문집 《오재고》가 이루어지게 된 경위를 밝히기 위하여 쓴 「오재고자발(寤齋稿自跋)」이 있다. 부록(附錄)은 저자에 대한 기록으로 사제문은 영조가 지었고, 행장(行狀)·비명(碑銘) 등은 박필주(朴弼周)·김진상(金鎭商)·윤봉조(尹鳳朝) 등 당대의 문신이 지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에 있는 조정만(趙正萬)의 묘는 현재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평범한 형태의 묘로서, 묘 앞에 묘비 1기가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식 배치되어 있다. 묘에서 약 100여 m 떨어진 곳에 이의현(李宜顯)이 찬(撰)하고, 김진상(金鎭商)이 쓴 신도비가 있다.
[참고]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寤齋集》, 《인천시사 하권》, 《인천의 문화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종악(趙宗岳)  1574(선조 7) ~ 1641(인조 19)
본관은 함안(咸安). 자가 성준(成峻). 호가 송포(松浦)이다.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5대손이자 조지(趙址)의 조카이다. 할아버지는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증직된 정언(庭彦),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과 대포만호(大浦萬戶)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된 우(堣)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친에게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마땅히 나라위해 죽어야겠습니다.”라 하였는데,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작은아버지인 조지(趙址)에게 아뢰자 조지도 만류하였고, 사촌형 조형도(趙亨道) 역시 “아직 경험도 없고 나이도 적으니 전투를 쉽게 여기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래서 그는 몰래 화산(花山) 권응수(權應銖)의진에 달려가 의병이 되었다. 하지만 밤마다 반드시 집에 돌아가 어머니의 안부를 살폈다. 어느 날 밤 조종악이 법화령(法華嶺)에 이르렀을 때 큰 호랑이가 길을 막았다. 조종악이 호랑이에게 “나는 지금 어머니를 봉양하러 가는 것이다. 네가 나로 하여금 충효(忠孝)의 도를 다하지 못하게 할 것이냐.”고 하자, 호랑이가 곧 꼬리를 낮추고 사라져버렸다. 1605년(선조 33) 어머니가 병환이 심하여 진미(珍味)만 잡숫고 싶어 하자, 조종악은 약탕기(藥湯器)를 안고 울며 말하기를 “나는 무엇 때문에 탕제(湯劑)만으로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하려고 하는고?”라고 하였다. 마침 늑대가 노루를 몰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조종악은 노루를 잡아 어머니께 해드렸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감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1641년(인조 19) 우연히 병을 얻었을 때,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증자(曾子)께서는 몸에 상처 없이 온전히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효라고 하였다. 나는 죽령(竹嶺) 전투에서 손가락이 상하였으니 어찌 불효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그 효심을 드높였다. 법화령(法華嶺)에서 반란(叛亂)의 도적 수백 명이 군량을 탈취하려 하자, 조종악이 칼을 뽑아 꾸짖으니 모두 도망쳤다. 곧 청송에 가서 고을 사람들을 권유하여 800여 명이나 되는 병력과 군량 100여 석을 모았다. 이에 권응수가 “조종악이 나라를 위하는 충심은 저 태양까지 치솟았구나.”라고 칭찬하였다. 얼마 후 영천전투에 참전하여 영천성을 수복하였는데, 이 사실을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특명으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에 임명하였고, 선무원종이등훈권(宣武原從二等勳券)에 올려주었다. 1601년(선조 34)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경서(經書)의 문의(文義)를 익히고 토론하였다. 또 권응수와 함께 《심경(心經)》과 《좌전(左傳)》을 여러 날 동안 독파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조종악은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서궁으로 유폐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삼강(三綱)이 무너졌구나!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송포정(松浦亭)을 짓고 여생을 보내면서, 스스로 송포거사(松浦居士)라 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소사(號召使)로 의병을 총괄하던 장현광의 병영에 달려가 서류작성의 임무를 맡았다. 이에 장현광이 말하기를 “그대의 훌륭한 재주로 임란의병을 일으켰으니, 그 이름을 선무녹권에 실어 조씨 집안의 충정을 대대로 이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628년(인조 6)에는 별시위(別侍衛)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1631년(인조 9)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향년 67세로 서거하였다. 부인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경주김씨(慶州金氏) 김덕손(金德遜)의 딸이다. 슬하에 4남을 낳았는데, 조영목(趙英牧), 조영개(趙英凱), 조영파(趙英頗), 조영운(趙英運)이다.
[참고] 《松浦公實紀》,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준도(趙遵道)  1576(선조 9) ~ 1665(현종 6)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행(景行). 호는 방호(方壺)이다. 아버지는 판서(判書)에 추증된 지(址)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습독(習讀) 회(恢)의 딸이다. 재종숙인 개(介)에게 입양되었다. 조준도의 선대는 함안에서 세거하다가 예빈시별제(禮賓寺別提)를 지낸 조부 조정백(趙庭栢) 때에 청송부 안덕현으로 이거하였다. 조준도를 입양한 조개(趙介)는 자가 여방(汝方)으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조개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선산김씨(善山金氏) 김취문(金就文)의 딸과 찰방(察訪)을 지낸 상주주씨(尙州周氏) 주세란(周世鸞)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모두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증조부인 내헌(耐軒) 조연(趙淵)의 손자 중 조지(趙址)의 넷째 아들인 조준도를 입양하여 후사로 삼았다. 조준도는 어려서부터 지덕이 뛰어났으며, 큰형 조수도(趙守道)를 따라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修學)하였다. 김언기는 조준도의 재주와 기량을 소중히 여겼다. 또한 매형인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가 예안(禮安)에 부임하였을 때는 퇴계 이황을 사숙하며 공부하였다. 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양의 학문을 익히고 학우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둘째형 조형도(趙亨道)와 종형 조준남(趙俊男) 등 일가가 창의하여 의병으로 나갔으나, 조준도는 부모님을 봉양해야 했기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장현광과 정경세가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도내(道內)의 의병장을 모을 때, 고을사람들과 함께 창의하여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1629년(인조 7) 효행으로 선무랑(宣武郞)의 품계를 받은 데 이어,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조산대부의금부도사(朝散大夫義禁府都事), 이듬해 7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승진되었다. 1631년(인조 9) 2월에 정경세의 추천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가 곧 교체되어 8월에 청송으로 낙향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고을 선비들과 창의하여 문경(聞慶)으로 갔으나, 임금이 산성을 나와 굴욕의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하여 통곡한 뒤에 해산하였다. 1664년(현종 5)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어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향년 90세로 서거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선영 아래 풍수정(風樹亭)을 지어 늙도록 어버이를 사모하니, 이민성(李民晟)·이준(李埈) 등 고을선비들이 시를 지어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현재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방호정이 곧 이 정자이다. 저서로는 《방호집(方壺集)》이 있는데, 1845년(헌종 11)에 후손 조태호(趙泰祜)‚ 조용진(趙龍震) 등에 의해 목판본 5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 권두(卷頭)에 정종로(鄭宗魯)·강필효(姜必孝)의 서문(序文)과 저자의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여오봉등루유음(與梧峯登樓有吟)」 등 128수의 시(詩)가 실려 있으며, 권2에는 「여지주정후(與地主鄭侯)」 등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 편지는 1627년(인조 5) 청송부사(靑松府使) 정언굉(鄭彦宏)에게 보낸 것으로, 정묘호란 당시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면서 그 상황을 수령에게 전하고‚ 성과가 충분하지 않음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권3에는 「소회일록」(疏會日錄), 「정묘록(丁卯錄)」, 「류경일록(留京日錄)」 등 조준도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소회일록」은 이언적(李彦迪)을 문묘종사(文廟從祀)하는 일에 대해 기록한 것이고, 「정묘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의병활동에 대한 일기체 기록이다. 권4는 「제일록권후(題日錄卷後)」에 가장(家藏) 문서로서, 증조부 조동호(趙銅虎)의 일록을 발견하고 선조의 업적을 계승하는 것의 의의에 대해 서술하였다. 권5 부록(附錄)에는 조준도를 추모하는 14인의 만사(輓詞)와 행장(行狀), 제문(祭文),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유사(遺事)가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문집 간행의 의의를 서술한 류치호(柳致皜)의 발문(跋文)이 있다.
[참고] 《方壺集》,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지(趙址)   1541(중종 36) ~ 1599(선조 32)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극립(克立). 호는 망운(望雲)이다. 생육신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의 현손이며,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내헌(耐軒) 조연(趙淵)의 손자이고, 부사직(副司直) 조정언(趙庭彦)의 둘째 아들이다. 할아버지 조연(趙淵)은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아버지 조정언(趙庭彦)은 자가 사준(士俊)으로 1515년(중종 10)에 출생하여 부사직(副詞直)을 지내고, 사후 가선대부형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형제로는 조우(趙堣), 조역(趙墿), 조식(趙埴), 조탄(趙坦), 조방(趙垹)이 있다. 조지는 김언기(金彦璣),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였다. 어릴 때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넓은 기개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7세부터 할아버지 조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세 때 노장(老丈)을 모시고 ‘퇴계초당운일절(退溪草堂韻一絶)’을 차운하여 읊으니 좌우에서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眼界汜汜水兩涯, 戱有魚子躍金沙, 童年樂意渾相脗, 鷗上從容不蹴波). 어버이가 멀리 계시자 정자를 집 남쪽에 짓고 ‘망운(望雲)’이라 편액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내외상(內外喪)을 당하자 6년을 시묘하였고, 정구(鄭逑)가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있으면서 여막에 문상 올 때마다 안정(安丁)의 고사에 비유하여 칭찬하였다. 1562년(명종 17) 조연의 명으로 청송군 안덕면에 이주하였다. 안덕면은 고향인 함안과 거리가 300여리나 되는 곳이었지만, 조지는 매년 3월마다 고향에 어른을 찾아뵈며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였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단 한 번 여막을 벗어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때 함안군수로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도 매번 그를 찾아와 위로하고 효심을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의주(義州)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탄하며 출전할 뜻을 가졌으나, 이미 연로하여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아들 조형도(趙亨道)와 조동도(趙東道)를 곽재우(郭再祐)의 진영(陣營)에 보내면서 “국난을 당하여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의(義)를 실천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온힘을 다하여 나라를 지키라.”고 하였다. 또한 조지는 일찍부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김성일이 경상우도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로 있을 때 편지를 주고 받으며 나랏일을 걱정하고 교분을 깊이 쌓았다. 이때 김성일은 조지를 “참으로 의인(義人)이다.”라고 칭송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언기(金彦璣) 김부의(金富儀)와 더불어 방대정(方臺亭)과 송계정(松溪亭)에서 명리지학(名理之學)을 강론하고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575년(선조 8)에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의 밀성객사(密城客舍)에서 그의 아우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등 40여 인이 영남루(嶺南樓)에서 연유(燕遊)하였다. 조지는 평생 근검(勤儉)과 군자의 몸가짐을 가르쳤고, 충효와 학문을 가문의 업으로 삼으라고 강조하였다. 1599년(선조 32) 향년 58세로 서거하였다. 습독(習讀)을 지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조수도(趙守道), 조형도(趙亨道), 조순도(趙純道), 조준도(趙遵道), 조동도(趙東道)의 5형제와 딸 셋 등 팔남매를 두었다. 둘째아들 조형도는 백부 만호 조우에게 출계하였고, 넷째아들 조준도는 재종숙(再從叔) 조개(趙介)에게 출계하였다. 세 딸은 각각 신지제(申之悌), 장후완(張後琓), 이종가(李從可)와 결혼하였다. 조지는 사후 자헌대부형조판서겸동지의금부사(資憲大夫刑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고, 금대사(金臺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운일록(望雲日錄)》이 있다. 《망운일록(望雲日錄)》은 조지의 일기이다. 1568년(선조 1) 나이 27세에 처음으로 일록(日錄)을 쓰기 시작하여 1599년(선조 32)에 마쳤다. 무려 30여년의 기록이다. 모두 36책(冊)으로 일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재(記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 화재로 인하여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있는 금대정사(金臺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 《咸安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조함세(趙咸世)  1607(선조 39) ~ 1690(숙종 16)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현보(顯甫). 호는 오의헌(五宜軒)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전행고성현령(通訓大夫前行固城縣令) 형도(亨道)이다. 김세렴의 천거로 참봉(參奉)에 올랐으며,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심경(心經)을 깊이 연구하였고, 사림이 그를 높이 추대하였다. 어릴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풍비(風痹)로 수족을 못 쓰니 주야로 곁에서 지키며 의복과 소세(梳洗)를 몸소 대신하고, 병이 위중함에 단지(斷指) 진혈(進血)하여 회소(回甦)하였다. 부친이 난을 피해 다니다가 등창이 생겼는데 입으로 직접 빨아 병을 낫게 하였다. 상을 당하여 슬피 울면서 3년상을 마치니 머무른 곳에 오선헌(五宣軒)이 있으며 명석(名碩)들의 시가(詩歌)가 많다.
[참고] 《五宜軒趙公行狀》
 
조함영(趙咸英)  1590(선조 23)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택부(擇夫), 정부(挺夫). 호는 호촌(胡村)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전행고성현령(通訓大夫前行固城縣令) 형도(亨道)이다. 형제로는 조함첨(趙咸瞻), 조함장(趙咸章), 조함준(趙咸俊), 조함림(趙咸臨), 조함세(趙咸世)가 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부친이 의병에 참가하자 매일 밤 북두칠성에 절하고, 무사귀환을 기원하였으나, 부친이 질병으로 인해 죽으니 평생 북향하여 앉지 않아 청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는 절개를 보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심원록(尋源錄)》이 전한다.
[참고] 《司馬榜目》
 
조함일(趙咸一)  1596(선조 29) ~ 1682(숙종 8)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자유(子有). 호는 약계(藥溪)이다. 할아버지는 판서(判書)에 추증된 지(址), 아버지는 학행(學行) 준도(遵道)이다.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의 문인이다. 낙곡천석(樂谷泉石)의 승경(勝景)을 애호(愛好)하여 낙계(樂溪)라 자호하였다.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참고] 《남명학파관련인명록》
 
조함장(趙咸章)  1597(선조 30)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수부(晬夫)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전행고성현령(通訓大夫前行固城縣令) 형도(亨道)이다. 형제로는 조함영(趙咸英), 조함희(趙咸熙), 조함철(趙咸哲), 조함연(趙咸衍), 조함신(趙咸愼)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냈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참고] 《司馬榜目》
 
조현규(趙顯奎)  1874(고종 11) ~ 1958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순(德純). 호는 고암(古庵)이다. 방호(方壺) 준도(遵道)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만포(晩圃) 성락(性洛)이다.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1825~1912)에게서 수학하면서 영남사림의 경학과 성리학, 예학을 두루 배운 청송 지역의 학자이다. 8세 때 《소미사(少微史)》 1책을 3년간 읽었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평생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 주자와 퇴계의 서적을 궁구하고, 향리의 추중을 받았다. 저서로는 《고암집(古庵集)》이 전한다. 《고암집(古庵集)》은 조현규의 시와 편지글을 모아놓은 책으로, 총 2권 1책이다. 비교적 최근에 석인본으로 출간된 것으로 제1권에는 시가 실려 있고 제2권에는 조현규가 스승 김도화 및 동학들과 학문을 토론한 편지글이 실려 있다.
[참고] 《古庵集》
 
조현욱(趙炫郁)  1854(철종 5) ~ 1922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인오(仁五). 호는 목산(牧山)이다. 어계(漁溪) 여(旅)의 후손이다. 대구원대(大邱院垈)에서 성장하여 기질이 준엄하고 사상이 굳건하더니 경술국치(庚戌國耻)를 개탄하여 국난을 회복하고자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당저(棠底)에 은거하며 동지를 은밀히 규합하였다. 이때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생각하여 신태휴(申泰休), 조병국(趙炳國) 등과 연락을 취하고 한양에 있는 동지들과 약속한 뒤, 향리에 돌아와 수천 군중을 규합하여 안덕(安德)‧현서(縣西) 일대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정세를 살펴보니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와 연락이 두절되어 “살아있어도 죽은 것 같다.”라고 하면서 벽에 ‘멱시부연(覓尸釜淵)’하라고 쓰고는 수락리(水洛里) 부연(釜淵)에 투신(投身)하였는데, 이 때 시 한 구절을 지었으니, “五百年來禮儀國 一朝胡爲犬羊民”이라 하였다. 1945년에 조남규(趙南奎), 김만천(金萬千), 김봉조(金鳳祚), 조용학(趙鏞學) 등이 공의 절의를 찬양하여 순절비(殉節碑)를 수락리 부연암(釜淵岩) 위에 건립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高等警察要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조형도(趙亨道)  1567(명종 22) ~ 1637(인조 15)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대이(大而), 경달(景達). 호는 동계(東溪)로 자칭 청계도사(淸溪道士)라 하였다. 생육신 여(旅)의 5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지(址)의 아들로, 큰아버지 우(堣)에게 입양되었다. 조수도(趙守道), 조순도(趙純道), 조준도(趙遵道), 조동도(趙東道)와 형제지간이었고 누이도 셋이 있었는데, 형제지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부인은 고창오씨(高敞吳氏) 오운(吳澐)의 딸이며, 슬하에 조함영(趙咸英), 조함희(趙咸熙), 조함장(趙咸章), 조함철(趙咸哲), 조함연(趙咸衍), 조함세(趙咸世), 조함보(趙咸寶), 조함실(趙咸實), 조함인(趙咸寅)의 9형제와 김여탁(金如鐸)에 출가한 딸 등 10남매를 두었다. 이중 조함철과 조함실이 양자로 갔다. 1583년(선조 16) 청송 안덕에서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하고, 1587년(선조 20) 함안에서 정구(鄭逑)의 문하에 유학한 뒤 3년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의진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가 되었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겸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임명되었고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임명되었고, 1608년(선조 41)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召募將)으로 창원에 차송되었다. 1609년(광해군 1)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진주옥에 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가 싫어 낙향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9) 순찰사(巡察使) 윤훤(尹暄)이 수군의 분담을 개청하는 일로 불러 중군에 있게 되었고,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여 영천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이경기(李景祺) 일당을 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 14) 순변사(巡邊使) 류비(柳斐)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위장(衛將)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 때 군사를 모아 궐문을 호위한 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가 되어 학문을 진작시키고, 미납되어 온 세미(稅米) 2,800석을 감면받아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하였다. 1625년(인조 3)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하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護衛別將)으로 차송되었다. 1627년(인조 5) 청나라의 침략기미가 보이자 호소사(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 되었다가 별장이 되었다. 영장제(營將制)가 설치되자 진주영장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고 다시 상주영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괴산군수(槐山郡守)에 임명되어 소를 올려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부임하였다. 1629년(인조 7) 경주영장이 되어 3년간 재직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 8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못이겨 등창으로 죽었다.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고, 순조 때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도 기록되었다. 청송의 덕봉사(德峯祠)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조형도의 시문집인 《동계문집(東溪文集)》은 본집은 목록(目錄), 원집(原集) 5권 합 3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卷頭)에 류치명의 서와 전체 목록이 실려 있다. 권1~3은 1편의 부(賦)와 443편의 시(詩)이다. 「추야제북두부(秋夜祭北斗賦)」는 촉한(蜀漢)의 부흥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 조금 더 연장되기를 북두칠성에 기원하는 제갈량(諸葛亮)의 절절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다. 시는 신지제(申之悌), 오여벌(吳汝橃), 박력(朴櫟), 신여섭(申汝涉) 등에게 보낸 것, 소유정(小有亭), 하한정(夏寒亭), 쌍계정(雙溪亭), 망운정(望雲亭) 등에서 심경을 읊은 것 등과 북쪽 오랑캐에 대해 분격(憤激)한 마음에 지은 것 등이다. 권4는 소(疏), 서(書), 서(序), 기(記), 제문(祭文), 행장(行狀)이다. 「사괴산군수소(辭槐山郡守疏)」는 과분하게 괴산 군수직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임명해 달라는 내용이다. 11편의 편지는 시국에 관한 것과 안부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서와 기는 망운정과 화연당(和燕堂), 오선동(五仙洞)과 풍수당(風樹堂)에 대한 감회를 적은 내용이다. 제문(祭文)은 장인 오운(吳澐), 민추(閔樞), 매제 신지제(申之悌), 김종효(金宗孝), 이준성(李俊成), 권익(權翊), 조부모 개장, 숙부 조식(趙埴), 다섯째 아들 조함연(趙咸衍)에 대한 것이고, 행장(行狀)은 오운에 대한 것이다. 권5는 부록(附錄)으로 전식(全湜) 등이 지은 만사(輓詞) 57편과, 1845년에 이병하가 지은 행장(行狀), 신집(申楫)의 묘지명(墓誌銘), 방손 조기영의 유사(遺事), 류치호가 지은 「덕봉사봉안문(德峯祠奉安文)」,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십삼충록서(十三忠錄序)」이다. 권말(卷末)에 이종상(李鍾祥)과 7대손 조기록(趙基祿)이 지은 발(跋)이 실려 있다. 함안(咸安)으로부터 안덕(安德)에 옮겨온 후로 고향과 부모를 사모하여 지은 망운정(望雲亭)이 청송에 남아 있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東溪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두산백과사전》
 
조후룡(趙後龍)  1685(숙종 11) ~ ?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운길(雲吉). 호는 신재(新齋)이다. 할아버지는 시침(時琛)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금(嶔)이다. 형제로는 종익(宗益)·헌익(憲益)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735년(영조 11)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였다. 성품이 진실하고 순수하며 일찍이 시문에 능하였다. 행동거지가 검소하고 오직 충효와 의리를 후진들에게 가르쳤다.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두산백과사전》
 
조희진(趙希進)  1579(선조 12) ~ 1644(인조 22)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여숙(與叔). 호는 단포(丹圃)이다.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익(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좌랑(兵曹佐郞) 응공(應恭)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 원(瑗)이며, 후에 조린(趙璘)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좌참찬(左參贊) 이준민(李俊民)의 딸이고, 형은 참판(參判) 희일(希逸)이다. 유대이(兪大儞)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3등(三等)으로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전적(典籍),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거쳐 서산군수(瑞山郡守)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공조정랑(工曹正郞), 봉상시(奉常寺)·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 사옹원(司饔院), 사도시(司䆃寺), 군자감(軍資監), 장악원(掌樂院)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9월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재임 중에 66세를 일기로 관아에서 죽었다. 그는 성질이 엄중하고 소행이 확고하여 오직 일의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권력에 흔들리거나 남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사귈 바가 못 되는 사람들과는 아무리 권요귀현(權要貴顯)이라 할지라도 고개를 돌리고 상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대간을 모독하고 조정을 농간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형 희일이 옥사에 연좌되어 오지로 유배되자 사태가 매우 불측함을 알고 화를 모면할 궁리 끝에 대북파의 인물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여 7년 만에 드디어 형을 구제, 방환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서사(書史)를 즐기고 전분제자(典墳諸子: 삼황오제와 제자백과의 서)로부터 패사소설(稗史小說)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그 저작이 매우 많았으나 난리를 겪으면서 많이 유실되었다. 저서로는 《단보유고(丹圃遺稿)》가 있다.
[참고] 《光海君日記》,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소유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