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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40 (2026.03.05. 17:32)

조선시대 9 (인 ~ 정)

 
•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중종 27) ~ 1575(선조 8)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영의정 연원(連源)의 손녀이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의 딸이다.
• 임시철(林蓍喆) 1740(영조 16) ~ 1805(순조 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성중(聖仲)이다.
• 임용상(林龍相) 1877(고종 14) ~ 1958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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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9 (인 ~ 정)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중종 27) ~ 1575(선조 8)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영의정 연원(連源)의 손녀이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의 딸이다. 1545년(명종 즉위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51년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4세로 일찍 죽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1569년(선조 2)에 존호(尊號) 의성(懿聖)이 진상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창경궁에서 44세를 일기로 죽었다. 휘호는 선열(宣烈), 능은 강릉(康陵)이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시철(林蓍喆)  1740(영조 16) ~ 1805(순조 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성중(聖仲)이다. 세양(世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규(象奎)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행호조정랑(通訓大夫行戶曹正郞) 지호(志浩)이며, 어머니는 한사검(韓師儉)의 딸이다. 박사해(朴師海)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771년(영조 47)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며, 1782년(정조 6) 이후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783년(정조 7)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내고, 1797년(정조 21)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는데, 상경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왕의 인문(印文: 인장)이 없는 서찰만을 보고 방호(防護)의 중책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799년(정조 23) 진위부사(陳慰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다시 그 이듬해에 세폐 겸 사은부사(歲幣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3년(순조 3)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에 대한 존호를 가상하기 위해 설치한 상호도감제도(上號都監提調)로 활동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승진되었다가 곧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1805년(순조 5) 대왕대비가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 활약하고 오위(五衛)의 대호군(大護軍)에 재임 중 죽었다. 1811년(순조 11)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간헌(簡憲)이다.
[참고]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文科榜目》, 《淸選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용상(林龍相)  1877(고종 14) ~ 1958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이다. 아버지는 효수(孝洙)이다. 청송군 현서면 수락동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온후하고 담력이 컸으며 매우 총명하였다. 일찍이 민응용 문하에서 배워 8년 뒤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통감(通鑑)》, 《사기(史記)》에 통달하게 되었다. 병서에 취미가 있어 《삼국지(三國志)》 등을 즐겨 읽었다. 임용상은 애국심이 투철하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군내에 널리 알려졌다. 그 지방의 명망인사(名望人士) 조응식, 민응용, 이능협 등은 임용상을 주창하여 11월 8일 나라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효행의 표창을 받았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가산을 써서 국난을 호소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 이후 각 고을에서 모여든 50여 동지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임용상은 동해 창의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음해 5월 산남의진의 대장인 정용기가 대구 감옥에 갇히고 그 의병이 방황할 때 임용상이 그 진에 합세하였다. 도총장 김원서와 함께 교의를 맺고 부총장이 되어, 같은 해 8월에는 30여명의 동지를 이끌고 영덕 청련사를 근거지에서 의병을 훈련시켰다. 1907년(융희 1)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다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임용상은 정용기와 연락하여 산남의진이 동해방면에 도착할 때까지 동해지역을 확보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후 산남의진의 동해지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7월 산남의진이 동해방면으로 진격할 때 그는 본진을 응원하여 청하읍을 함락시키고, 부하를 정비하여 본진에 들어가 좌포장이 되어 청송, 영천, 신령 등 각 고을을 진격할 때에는 가는 곳마다 좌선봉이 되어 진두에서 적을 격파하며 전진하였다. 1907년 8월 자양에 침입한 적을 섬멸하고 서울을 향해 북상준비를 갖추기 위해 군수품을 모았다. 같은 해 9월 죽장 입암에서 야음을 이용한 적의 대부대의 침공을 받아 혈전을 벌여 대장단이 참패하였다. 그는 즉시 본진으로 돌아가 대장단의 장례를 치르고 남은 의병을 수습하였다. 그는 전 대장의 부친인 정한직을 맞아 본부대장으로 추대하고 다시 부서를 정하니, 그 역시 좌포장에 유임되어 각처의 신병을 모아 임시 훈련대장이 되었다. 신병을 이끌고 보현산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흥해와 청하읍을 점령하여 400여 자루의 엽총과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1908년(융희 2) 2월 정환직의 뒤를 이어 최세한을 제 3대 대장에 추대하니 산남의진의 작전방법을 고쳐서 산발적인 유격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임용상은 운문산 지역 대장에 추대되어 경주, 언양, 양산, 밀양, 영산, 창년 등지의 적을 격파하고 군수물자를 획득하였다. 같은 해 5월 임용상은 운문산으로 되돌아와 의진을 정비하였다. 그때 적의 수비대가 운문산 절 밑에까지 다가오자, 그는 부하를 복병시켜 일제히 총격을 가하여 적들을 막았다. 그는 의진을 이끌고 영산, 밀양, 창녕 등지로 이동하여 경남의장 이학노진과 연락하며 적을 무찔렀다. 같은 해 6월 그는 언양 장날 부하들을 농부로 가장시켜 언양읍의 적병 동태를 정탐한 뒤, 그날 밤 부하들로 하여금 적의 분견소 옆에 불을 놓게 하여 적병이 당황한 틈을 타서 집중사격을 가하여 적을 사살하고 분견소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의병을 수습하고 언양에서 밀양을 거쳐 경주, 영일을 경유하여 북상을 꾀하고 청하에 당도할 무렵 갑자기 나타난 적의 대부대를 만나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많은 적을 감당치 못하여 적에 붙잡혀 대구재판소에서 3년형을 언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1910년(융희 4) 4월 그는 각처의 동지를 다시 규합하여 보현산에서 유격대를 결단하고 또 다시 대장으로 추대되어 청송 동부의 서종락과 서부의 남석구 등과 행동을 같이하여 청송의 적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적의 많은 병력과 새로운 무기에 눌려, 결국 임용상은 안평전투에서 산남의진의 적에 붙잡혀 대구재판소에서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두 번째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임용상은 1920년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구로 와서 3·1운동 이래 의열단을 통해 군자금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1910년 4월에는 독립투사를 숨겨둔 협의로 다시 투옥되어 3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그러나 임용상은 일제에게 굽히지 않고 계속 지하운동을 추진하여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임용상은 국가발전에 이바지 하다가 1958년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용상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경북 선열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지를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정부기관과 각계 인사의 협찬과 아들 임병태(林炳台)의 효심과 정성으로, 대구의 대덕산 기슭에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임용상의 출생지인 현서면 수락리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참고] 《독립운동사》 1, 《山南義陣遺史》, 《대한독립운동약사》, 《獨立有功者功勳錄》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임태수(林泰洙)  1791(정조 15) ~ ?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노원(魯源)이다. 증조부는 정랑(正郞)을 지낸 정호(正浩), 할아버지는 한철(漢喆)이며 아버지는 진사(進士)를 지낸 성진(星鎭)이다. 어머니는 군수(郡守)를 지낸 정동현(鄭東顯)의 딸이고 진사(進士)를 지낸 이간(李暕)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31년(순조 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1848년(헌종 1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임태수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선정비가 현재 청송향교 옆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임희교(任希敎)  1719(숙종 45) ~ ?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유가(孺可)이다. 참판(參判) 윤원(胤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承旨) 수적(守迪)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 집이며, 어머니는 여성군(礪城郡) 이집(李楫)의 딸이다. 박필건(朴弼健)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50년(영조 26) 경오(庚午)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서(司書),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1762년(영조 38) 집의(執義)로 상소하여 대간의 주장을 수용할 것, 처벌받은 언관을 용서할 것, 대간으로 부적한 인물을 용서할 것, 비변사(備邊司) 회의를 자주 열 것, 국가재정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773년(영조 49) 부모 봉양을 위해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자원하였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와 집의(執義), 장령(掌令), 사간(司諫), 교리(校理), 헌납(獻納) 등을 지냈고, 1776년(영조 52) 집의로 향리에서 비루한 행동을 하는 지평(持平) 채위하(蔡緯夏)를 탄핵하여 조정의 분란을 야기하였다. 이후 승지(承旨)로 승진하여 공조참판(工曹參判)에 특채되고,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참고] 《英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경업(張慶業)  1544(중종 39) ~ 1619(광해군 11)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송백(宋伯). 호는 귤수(橘叟)이다. 아버지는 응양(應陽)이며, 형제로는 응선(應璇)이 있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다. 성리학을 탐구하였고 만년에는 역학에 몰두하였다. 신집(申楫), 이민성(李民宬)와 함께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의성 명덕리(明德里)를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절이 있다고 하여 선생이 사곡(寺谷)이라 칭했다고 한다. 선조 때 유일(遺逸)로 선성령(宣城令)을 제수 받았으나 노병(老病)을 칭탁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병조정랑(兵曹正郎)에 추증되었다.
[참고] 《惟一齋金彦璣門人錄》
 
장경우(張慶遇)  1581(선조 14) ~ 1656(효종 7)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晩晦)이다. 아버지는 내범(乃範)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진위장군(振威將軍) 운배(雲培)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10여세의 나이로 할머니를 모시고 금오산(金烏山)과 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란하였다. 1608년(선조 41) 난 후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학교의식」을 지어서 학교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듬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시행하는 식년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정구(鄭逑)가 반대파의 모해로 관직을 삭탈당하자 경상도내 유생들을 권유하여 함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2년(광해군 4) 어지러워져가는 조야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저법육설(著法六說)》을 지어 시행하였고, 1621년(광해군 13) 이이첨(李爾瞻)의 행패가 심해지자 「청참이이첨소(請斬李爾瞻疏)」를 올려 이이첨을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는 인동의병장에 차정되기도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상에 3년간 시묘하였다. 《여헌문집》을 간행하고 《제선의절(祭先儀節)》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권장하였으며,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1654년(효종 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만회당집(晩晦堂集)》 4권이 있다. 뒤에 옥계사(玉溪祠)에 제향되었다. 《만회당집(晩晦堂集)》은 4권 2책, 목판본으로 1862년(철종 13)에 9대손 두현(斗鉉)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이종상(李鍾祥)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두현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두(卷頭)에 저자의 세계도(世系圖), 권1에 부(賦) 2수, 시(詩) 9수, 서(書) 8편, 서(序) 3편, 잡저(雜著) 4편, 제문(祭文) 6편, 묘지(墓誌) 1편이 실려 있고, 권2 ∼ 4는 부록(附錄)으로 저자의 연보(年譜), 행장(行狀), 제문(祭文) 11편, 뇌문(誄文) 1편, 만사(輓詞) 45수, 가장(家狀)·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화산강당상량문(花山講堂上樑文)·묘우상량문(廟宇上樑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序) 3편은 「선적서(善籍序)」·「악적서(惡籍序)」·「증형부원외랑신진보열도조경서(贈刑部員外郎申晉甫悅道朝京序)」이다. 이 「선적」과 「악적」은 1646년(인조 24)에 당시 향속(鄕俗)의 퇴락을 민망히 여겨 선악의 설을 지어 권징(勸懲)의 방편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선한 사람은 「선적」에, 악한 사람은 「악적」에 그 이름을 적었다. 또 잡저(雜著) 4편은 「만회당기(晩晦堂記)」·「법천설(法天說)」·「사문기문록(師門記聞錄)」·「봉선의절(奉先儀節)」 등이다. 이 가운데 「법천설」은 군자는 하늘을 법으로 삼아서 궁극에는 하늘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하늘처럼 만물을 포용한다는 내용이다. 「사문기문록」은 1638년(인조 16)에 스승인 장현광(張顯光)의 언행을 비롯하여 그의 가르침 등을 기술한 것이다.
[참고] 《司馬榜目》, 《晩晦堂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무호(蔣武鎬)  1852(철종 3) ~ 1926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장무호는 이때 후방장(後防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그는 좌익장 권성하 등과 함께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장병철(蔣柄哲)  1883(고종 20) ~ 1969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우송(友松)이다. 귀래정(歸來亭) 팔국(八國)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한필(漢弼)이다. 가학을 전승하여 문사(文詞)가 맑고 영민하며, 기질이 넉넉하였다. 언론이 정중하고 후진들을 계도(啓導)하여 향당이 추중하였다. 저서로는 《우송집(友松集)》이 전한다.
[참고] 《嶠南誌》
 
장세필(張世弼)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국보(國輔)이다. 아버지는 기손(起孫)이다,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 17위로 급제하였다. 1534년(중종 29)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장승원(張承遠)  1852(철종 3) ~ ?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공유(公裕). 호는 운정(雲庭)이다. 아버지는 석룡(錫龍)이며 생부는 석구(錫龜)이다. 1885년(고종 22)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1899년(광무 3)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현재 청송읍 월막리에 있는 망미정(望美亭)은 장승원이 청송부사로 있으면서 세운 정자이다. 장승원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혜정불망비가 현재 청송향교 옆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장응선(張應旋)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중기(仲紀)이다. 증조부는 윤신(允愼)이며, 할아버지는 경원(敬原), 아버지는 석(錫)이다. 1531년(중종 26)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57년(명종 1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5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장처용(蔣處勇)  1447(세종 29) ~ 1521(중종 16)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이의(而義). 호는 심지(心智)이다. 문익공(文翊公) 성발(成發)의 현손이다. 1480년(성종 11)에 급제하여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의흥현감(義興縣監), 안동판관(安東判官)을 지내고, 온성부사(穩城府事), 경기절도사(京畿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스스로를 편안히 하였다.
[참고] 《朝鮮科宦譜》
 
장팔국(蔣八國)  1562(명종 17) ~ 1633(인조 11)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치군(致君).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아버지는 사정 인(樓)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현감(縣監) 준(濬)의 딸이다. 권호문(權好文)의 문인이다. 1600(선조 33)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고 경상도사(慶尙都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지낸 뒤 1612년(광해군 4) 이이첨(李爾瞻)에 의하여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었을 때는 이이첨을 찾아가 임금을 잘못 보필한 죄를 책망하였다고 한다. 그 뒤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도총부부총관(都總府副摠管),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내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병을 칭탁, 귀향하여 은둔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문사(文詞)에 뛰어나고 산술·병거(兵車)에도 널리 통하여 문무를 겸하였다. 저서로는 《귀래정유집(歸來亭遺集)》이 전한다.
[참고] 《歸來亭遺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한보(張漢輔)
본관은 울진(蔚珍). 자는 자방(子房). 호는 은계(銀溪)이다. 장령(張翎)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약관 미만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하여 문명을 떨쳤다. 신용과 명망이 두터워 주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해결책을 물어오고는 하였다. 1522년(중종 17)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배속되었다. 1529년(중종 24)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으나 어렸을 때 손가락을 다쳐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규정관(糾正官)의 임무를 사양하였다. 이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시강관(侍講官)에 특채되어 오대(烏帶)와 학창의(鶴灑衣) 등 도인과 같은 복장으로 항상 궁중에 머무르면서 왕과 어려움이 없이 시도 짓고 문답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고 불렀다. 벼슬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자 상소하여 사퇴할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이 그 재주를 아까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고향인 용궁현으로 돌아와 연못을 파고 축대를 쌓으며 손수 송죽(松竹)을 심고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제자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론하고 성리를 연구하면서 다시는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부하 직원에게 문장과 재화의 명성보다 효도와 공경을 우선 행하여 진실된 인간이 되도록 지도하였다.
[참고] 《嶠南誌》, 《嶺南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한탁(蔣漢倬)  1852(철종 3) ~ 1930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장한탁도 의진에 참여하여 송천지역 유림들의 모임인 도회소(道會所)에 파견되어 신임 관찰사에 관한 민정을 수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장현광(張顯光)  1554(명종 9) ~ 1637(인조 15)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肋)에게 배웠고, 18세 때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선조 24)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선조 27)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제릉참봉(齊陵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觀察使)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義禁府)에 잡혀갔다. 1595년(선조 2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報恩縣監), 거창현감(居昌縣監),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의성현령(義城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공조참의(工曹參議), 이조참의(吏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판(刑曹參判),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97년(선조 30)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류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류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선조 34)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2년(선조 35) 거창현감(居昌縣監), 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부임해 《주역(周易)》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선조 36)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義城縣令)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순천군수(順天郡守), 1605년(선조 38) 합천군수(陜川郡守), 1607년(선조 40)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성균관(成均館)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刑曹參判)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대사헌(大司憲), 부호군(副護軍), 1628년(인조 6) 이조참판(吏曹參判), 1630년(인조 8) 다시 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4년(인조 12)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우참찬(右參贊),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내려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巖山)에 들어간 지 반 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1657년(효종 8) 영의정(領議政)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만각요회(晩覺要會)》‧《역괘총설급구설(易卦總說及究說)》‧《우주설(宇宙說)》‧《태극설(太極說)》‧《도서발휘(圖書發揮)》‧《여헌집(旅軒集)》이 전한다.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은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요약, 총괄하여 만든 편첩(編帖)으로 모두 12장이다.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집(旅軒集)》은 원집 13권 7책, 속집 10권 5책, 모두 23권 12책으로 목판본이다. 몇 차례의 간행에 의해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있다. 1982년에 인동장씨 남산파종친회에서 원집·속집 23권과 연보(年譜) 3권, 성리설(性理說) 8권,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 1책 등 46권 30책을 상·하 2책으로 압축, 영인하였다. 원집은 권1·2에 사(詞) 1편, 부(賦) 5편, 시(詩) 83수, 소(疏) 27편, 권3·4는 소 9편, 서(書) 30편, 권5·6은 서 32편, 잡저(雜著) 10편, 권7·8은 잡저(雜著) 13편, 서(序) 4편, 권 9·10은 기(記) 7편, 발(跋) 13편, 논(論) 2편, 명(銘) 2편, 상량문(上樑文) 4편, 권11은 축문(祝文) 17편, 제문(祭文) 20편, 권12·13은 신도비명(神道碑銘) 1편, 묘갈명(墓碣銘) 14편, 묘지명(墓誌銘) 3편, 행장(行狀) 2편으로 구성되었다. 속집은 권1에 사(詞) 1편, 부 1편, 시 83수, 권2·3은 소 1편, 차 1편, 서(書) 73편, 장(狀) 2편, 축문(祝文) 4편, 제문(祭文) 27편, 뇌문(誄文)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권4 ∼ 8은 잡저(雜著) 44편, 비명(碑銘) 3편, 지명(誌銘) 1편, 묘갈명(墓碣銘) 4편, 음지(陰識) 1편, 행장(行狀) 2편, 권9·10은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 《玉山志》, 《宣祖實錄》, 《仁祖實錄》, 《旅軒集》, 《記言》, 《韓國儒學史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후완(蔣後琬)  1572(선조 5) ~ 1644(인조 22)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군좌(君佐). 호는 귀천(龜川)이다. 중추부사(中樞府使) 처용(處勇)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첨절제사(僉節制使) 용삼(龍三)이다. 임진왜란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전쟁에 공이 있어 옥강만호(玉江萬戶)에 제수되고 훈련원정(訓練院正)·문경현감(聞慶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부총관(副摠管)으로 울산 소모대장(召募大將)을 거쳐 정평부사(定平府使)로 나갔다가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고언백(高彦伯)의 아들에게 부인이 있음에도 다시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이유로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았다. 1618년(광해군 10)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동태를 감시하였으나 탐욕스럽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파직되어 동래에 귀양갔다가 뒤에 풀려나 복관, 도총부총관(都摠府摠管)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참고] 《明谷集》, 《癸亥靖社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응팔(全應八)  1878(고종 15) ~ 1971
고종의 측근에서 시위하던 정환직(鄭煥直)이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운동을 재개하라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아들 용기(鏞基)를 하향시켜 의진(義陣)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1906년(광무 10) 1월 경상북도 영천으로 하향하여 정순기(鄭純基)·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우재룡(禹在龍) 등과 더불어 경상북도 동대산(東大山)을 중심으로 6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봉기하고 삼남의진(三南義陣)을 구성하였으며, 이때 전응팔은 삼남의진에 가담, 활동하였다. 이들은 영덕·청하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정용기가 붙잡힘으로써 활동이 중지되었다. 그 뒤 정용기가 석방되자 1907년(융희 1) 4월 400여명의 의병이 재규합하여 동대산에서 다시 일어나 청하·청송·영천 등을 전전하면서 활동하다가 이해 9월 정용기가 입암리전투에서 전사한 뒤 전응팔은 정환직을 따라 잔존부대를 이끌고 흥해·영덕·청송·청하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해 정환직 등이 붙잡힘으로써 삼남의진은 무너졌고 전응팔도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山南倡義誌》, 《義兵運動史》, 《獨立有功者功勳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경조(鄭慶朝)  1813(순조 13) ~ ?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서(癸酉)이다. 할아버지는 대용(大容)이며, 아버지는 기숙(基夙)이다. 1840년(헌종 6)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어머니는 군수(郡守)를 지낸 조제명(趙濟明)의 딸이다. 부사(府使) 조제인(趙濟仁)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61년(철종 1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정계순(鄭啓淳)  1729(영조 5) ~ 1789(정조 1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옥여(沃汝)이다. 재악(載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선(任先)이고, 아버지는 석증(錫曾)이며, 어머니는 이성윤(李成允)의 딸이다. 1765년(영조 41)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을 거쳐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으로 재직중 1777년(정조 1)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풍천부사(豊川府使),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1785년(정조 9)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어서 초산부사(楚山府使), 청송군수(靑松郡守)를 역임하였다.
[참고]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經山集》
 
정도건(鄭道鍵)  1668(현종 9) ~ 1740(영조 16)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개중(開仲). 호는 천연대(天然臺)이다. 영방(榮邦)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수와(睡窩) 요성(堯性), 생부(生父)는 요천(堯天)이다. 과거 시험에 실패하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경학을 탐구해서 「대역호락음질욕잠(大易好樂吟窒慾箴)」을 지었다. 저서로는 《천연대유고(天然臺遺稿)》가 전한다.
[참고] 《天然臺遺稿》
 
정붕(鄭鵬)   1467(세조 13) ~ 1512(중종 7)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이다. 희언(希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由)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철견(鐵堅)이며, 석견(錫堅)의 조카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 17)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492년(성종 23)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 3위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副權知正字)가 되었다. 정자(正字)·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하여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校理)에 복직되어 상경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정승(政丞) 성희안(成希顔)의 건의에 따라 왕의 특지(特旨)로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洪景舟)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보고 낙향하자 1509년(중종 4)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죽었다. 정붕은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領議政)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칭찬하였다. 《안상도(案上圖)》를 지어 자경(自警)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송당(松堂) 박영(朴英)이 그의 문인이다.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봉향되었다. 청송부사 재임시의 일화로 어느 날 오랜 친구인 좌의정 성희안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청송 고을에는 응당 잣과 꿀이 많을 터이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고 난 선생은 태연한 자세로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기를 “잣은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찌 이것을 구할 수 있으리요?”라 하였다. 답장을 받아본 성희안은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사과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고금의 탐관오리에게 일침을 주는 동시에 관가에 벼슬하는 이로 하여금 길이 사표가 되고 귀감이 될 것이다.
[참고]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文科榜目》,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一善誌》, 《樊巖集》,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석범(鄭錫範)  1685(숙종 11) ~ ?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숙(師叔)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 시선(是先)이다. 형제로는 정석조(鄭錫祚), 정석년(鄭錫年), 정현(鄭賢)이 있다. 1721년(경종 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742년(영조 18)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5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정언굉(鄭彦宏)  1569(선조 2) ~ 1640(인조 1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여확(汝廓). 호는 서계(西溪)이다. 증조부는 한(漢), 할아버지는 윤성(允誠), 아버지는 승조(承祖)이며, 어머니는 함녕김씨(咸寧金氏)로 염(恬)의 딸이다. 이충량(李忠良)의 딸을 아내로 맞고, 형제로는 정언준(鄭彦寯)이 있다.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고, 1609년(광해군 1) 학록(學錄) 겸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 이듬해 학정(學正)·박사(博士)에 승진되었다. 다음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이어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체직된 뒤 곧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에 전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혼조(昏朝)의 기미가 있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고성군수(固城郡守)에 특채되어 그간 혼조로 인하여 퇴폐되었던 군정(郡政)을 일신하였다. 이듬해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향리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이 되어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문경의 조령(鳥嶺)에 도착하였으나,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군자감정(軍資監正) 겸 선공감정(繕工監正)에 배수하였다. 이듬해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가 1631년(인조 9) 예빈시정(禮賓寺正), 이듬해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에 각각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맹세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서계문집(西溪文集)》 2권이 있다. 《서계문집》은 시문집으로 2권 1책, 목판본이다. 1905년 후손 원동(源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김도화(金道和)·류도헌(柳道獻)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류필영(柳必永)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152수, 권2에 만사(輓詞) 42수, 서(書) 4편, 제문(祭文) 4편, 잠(箴) 1편,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 13편, 제문(祭文) 4편, 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기상이 수려하여 자연을 관조한 것이 많다. 「항해조천(航海朝天)은 인조 때 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송별한 시들 중에서 장원한 명시이다. 서(書)의 「여정산서원사림(與鼎山書院士林)」은 이황(李滉)을 폄훼(貶毁)한 정인홍(鄭仁弘)을 사림이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西溪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언섬(鄭彦暹)  1720(숙종 46) ~ ?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일진(日進)이다. 증조부는 유석(有錫), 할아버지는 진국(震國), 아버지는 창서(昌瑞), 어머니는 송유수(宋儒洙)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81년(정조 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정영방(鄭榮邦)  1577(선조 10) ~ 1650(효종 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다. 예천(醴泉) 우망리(憂忘里)에서 출생하였다. 고조인 정환(鄭渙)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가 되어 연산군 때에 직간(直諫)을 하다 쫓겨났다. 증조는 정윤기(鄭允奇)의 할아버지는 진사 정원충(鄭元忠)이다. 아버지는 식(湜)이며, 어머니는 안동인으로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형제로는 영후(榮後)가 있다. 정영방이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라서 종조(從祖)인 정건원(鄭元健)의 아들 정조(鄭澡)의 양자가 되었는데 양모(養母)는 진성이씨(眞城李氏)였다. 부인은 전주류씨(全州柳氏)인데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된 류복기(柳復起)의 딸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성심을 다해서 상례를 마쳤으며, 형인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에게는 우애와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다. 10리 거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맛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형에게 먼저 보냈고, 형이 병이 나면 근심하여 잠을 잘 때에도 옷의 띠를 풀지 않았다. 집안에 있어서 엄숙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지키고 간이함으로 뭇 사람을 다스렸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다. 자제가 종일토록 옆에서 모심에 장난스럽고 태만한 태도나 천박하고 지나친 말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음란한 소리, 화려한 색과 좋은 것만을 즐기는 일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일찍이 그에게 이르기를 “학문을 함에 있어서 이치를 궁구하고 사물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고 하늘의 뜻을 아는 것도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음이 없다. 그대의 역량과 식견을 볼 때 노력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공부의 당위성을 잊지도 말고 그렇다고 억지로 해서도 안 될 것이다.”고 했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주위에서 모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광해군의 정치에 실망하여 벼슬길에 나설 뜻을 버렸다. 벼슬에 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과거를 통한 공명심을 추구하다가 본심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본심을 회복할 길이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에 유혹되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이나 조카 중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이가 있으면 비록 엄하게 금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에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연당동(蓮塘洞) 자양산 기슭에 터를 잡고, 식구 모두를 옮겨와 살았다. 집 서쪽의 시냇가에 작은 연못을 파서 서석지(瑞石池)라 이름하고, 이 연못을 마주하여 집을 짓고 각각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으로 이름 붙였다. 한국 사대부가 3대 정원 중의 하나인 서석지는 자연 속의 소요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려 한 그의 정신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유유자적하게 맑은 연못의 이끼 낀 바위 사이를 거닐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곤 했으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치중하였다. 정영방의 손자가 1650년(효종 1)에 저술한 「임천산수기(林泉山水記)」의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한평생을 자연 속에 살면서 학문 시를 짓다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만년에 주자의 글을 즐겨 읽어 항상 책을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심한 병에 걸린 때가 아니면 반드시 반듯이 앉아서 용모를 바르게 하고 책을 읽었고 특히 역학에 밝았다. 또한 시문에 심취하여 우울한 마음으로 사물과 감응하여 마음이 일면 반드시 시로써 표현하였다. 지은 시문은 모두 뜻이 깊고 아취가 있었다. 1650년(효종 1) 봄에 선영 아랫동네인 송천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6월에 감기가 들어 7월 7일에 머리 감고 손톱 깎아줄 것을 명한 후 편안히 운명하였다. 이 때 나이가 74세였다. 안동부 동쪽에 있는 선어연(僊漁淵) 언덕에 장사지냈다. 완담서원(浣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악보(八樂譜)’라는 시와 문집 3권, 그리고 《암서만록(岩棲漫錄)》, 《석문집(石門集)》이 전한다. 《석문집(石門集)》은 전체 4권 및 부록(附錄)으로 구성된 3책의 목판본이다. 이 문집은 정영방이 죽은 뒤 170여 년 뒤인 1821년(순조 21)에 후손 정인욱(鄭仁勖) 등이 주선하여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정언충(鄭彦忠)·조술도(趙述道)의 서문(序文), 권말(卷末)에 정내주(鄭來周)·정필규(鄭必奎)·류심춘(柳尋春)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사(辭) 2편, 부(賦) 2편, 오언절구(五言絶句) 105수, 오언율시(五言律詩) 94수, 오언배율(五言排律) 5수, 권2에 오언고시(五言古詩) 23수, 육언(六言) 2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63수, 권3에 칠언율시(七言律詩) 88수, 칠언배율(七言排律) 16수, 칠언고시(七言古詩) 10수, 잡시(雜詩) 3수, 만사(挽詞) 40수, 권4에 소(疏) 2편, 서(書) 7편, 기(記) 2편, 제문(祭文) 9편, 지갈(誌碣) 2편, 행록(行錄)·유사(遺事)·잡저(雜著), 부록(附錄)으로 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가장(家狀)·제문(祭文)·만사(輓詞)·고유문(告由文)·봉안문(奉安文)·습유(拾遺)가 실려 있다. 시는 은퇴 후 진성(眞城)에서 지내면서 감회를 읊은 것이다. 류여일(柳汝一)·한유백(韓裕伯)·박순(朴淳) 등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여러 편 있다. 청절(淸絶)하고 격조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남극관(南克寬)도 그의 시에 대해 체기(體氣)가 고묘(高妙)하고 흥기(興寄)가 심원하다고 평가하였다. 시 가운데에서도 특히 오언절구에 뛰어났으며, 당체(唐體)를 본받았다. 소(疏)는 용궁(龍宮) 지방에서 광해군 때부터 규정보다 더 많이 징수되고 있는 전세(田稅)의 하중(下中) 등급의 세를 줄여달라고 요청한 것과, 영양(英陽)의 복현(復縣)을 요청한 것이다. 서(書)는 주로 스승인 정경세(鄭經世)에게 예설(禮說)에 관해 질의 응답하면서 올린 것이다. 사적은 주로 임진왜란 때 정영방 일족이 당했던 고난에 관한 기록이다.
[참고] 「墓碣銘」(權相一 撰), 《석문집(石門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영후(鄭榮後)  1569(선조 2) ~ 1641(인조 1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보(仁輔). 호는 매오(梅塢)이다. 증조인 정윤기(鄭允奇)는 생원을 지냈으며, 조부는 진사 정원충(鄭元忠)이다. 아버지는 식(湜)이며, 어머니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형제로는 정영방(鄭榮邦)이 있다. 김성일(金誠一)과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듬직하였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피난할 수 없어서 집 뒤 대동산에 숨었다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정영후는 자신의 고통을 잊고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땅에다 글씨를 써서, ‘늙으신 어머님의 생사가 걱정된다.’라고 하니 일본군의 장수도 정영후의 효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석방했다고 한다. 늙어서 별당 한 칸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어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스스로 ‘매오거사(梅塢居士)’라고 하였다. 동생 영방(榮邦)과 더불어 효도와 우애의 집이란 뜻으로 ‘효우당(孝友堂)’이란 현판을 걸고 그 뜻을 받들더니, 그 현판이 지금도 남아있어 형제간의 우애와 집안 식구들의 돈독함을 일깨우는 귀감이 되고 있다. 학봉 김성일·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집을 짓고 신정(新亭)이라 편액하였다. 정자는 용궁 남쪽 포내(浦內)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세거하는 곳이다. 효행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었고, 완담서원(浣潭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재감참봉(司宰監叅奉)으로 추천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매오일고(梅塢逸稿)》가 있다. 《매오일고(梅塢逸稿)》는 4권 2책, 목판본으로 1828년(순조 28) 5대손 우상(羽相)과 6대손 이희(理熙) 등이 유문을 수집하고 필규(必奎)의 편집을 거쳐, 1837(헌종 3) 7대손 인기(仁器)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류이좌(柳台佐)·정기선(鄭基善)의 서문(序文)이 있고, 권말(卷末)에 필규·인규 등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사(辭)·시(詩)·서(書)·제문(祭文)·잡저(雜著), 권2 ∼ 4는 부록(附錄)으로 묘갈명(墓碣銘)·지행록(志行錄)·가장(家狀)·완담향사봉안문(浣潭鄕祠奉安文)·제문(祭文)·만사(輓詞)·사우간찰(師友簡札)·붕우기증(朋友寄贈)·가정수창(家庭酬唱)·감모제영(感慕題詠)·습유(拾遺)·쌍절비명(雙節碑銘)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시는 정윤목(鄭允穆)·정영방(鄭榮邦)과 서로 돌려가며 지은 시로 각각 원운(原韻)을 실었으며, 정경세(鄭經世)·조정(趙靖)·전행(全升)·손흥지(孫興智)·정언굉(鄭彦宏) 등에 대한 만사가 들어 있다. 서 중 정경세에게 올린 글은 이장(移葬)한 후의 복제(服制)에 대한 단편적인 문목이며, 답서를 아울러 수록하였다. 계제(季弟)인 정영방에게 준 서한이 대부분인데, 단편적이기는 하나 학문적인 것과 시사에 관한 것이 들어 있다. 제문(祭文)에는 정경세와 신집(申楫)에 대한 것이 들어 있으며, 잡저(雜著)에는 저자가 임종 직전에 지은 「자명(自銘)」이 있다. 부록(附錄)의 「사우간찰」은 스승인 정경세에게 받은 서찰을 모은 것이며, 「붕우기증」은 당시의 교우들이 매오정(梅塢亭)에 대해 읊은 시를 모은 것이다.
[참고] 《梅塢逸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요성(鄭堯性)  1650(효종 1) ~ 1724(경종 4)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지(聖至). 호는 수와(睡窩)이다. 할아버지는 영방(榮邦)이며, 아버지는 제(焍)이고, 형은 요천(堯天)이다. 이재(李栽)‧김태중(金台重) 등과 교유하였다.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에 실패하자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시문을 능했으며 천문(天文)·산수(算數) 등에도 박학하였다. 저서로는 《수와유고(睡窩遺稿)》가 전한다.
[참고] 《睡窩遺稿》
 
정요천(鄭堯天)  1639(인조 17) ~ 1700(숙종 26)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이다. 할아버지는 인수(仁壽), 아버지는 제(悌)이며, 12살 때 백졸암(栢拙庵) 류직(柳㮨)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동생은 요성(堯性)이다. 홍만조(洪萬朝)‧이항(李恒)‧정시윤(丁時潤) 등과 교유하였다. 1660년(현종 1)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93년(숙종 19)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나 곧장 그만두었다. 필법이 정민(精敏)하고 아려(雅麗)해서 한 필체를 이루었다. 당시 사우(士友)가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칭송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유고(訥齋遺稿)》가 있다.
[참고] 「墓碣銘」(趙德鄰 撰),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訥齋遺稿》, 《두산백과사전》
 
정용기(鄭鏞基)  1862(철종 13) ~ 1907(융희 1)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이다. 의병장 환직(煥直)의 아들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각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였다. 1906년(광무 10) 아버지가 고종으로부터 항일거병의 뜻이 담긴 밀지를 받자 아버지에게 거병을 간청하였다. 그해 6월에 영덕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이지포(李芝圃) 등과 대구 등지에서 의병 600여명을 규합, 거병한 뒤 청송·의성·영덕·영해·영양·평해·울진·삼척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아버지가 일본경찰에 잡혔다는 전갈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경주로 가던 중 경주진위대에 잡혀 대구형무소에 체수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를 잡기 위한 일제의 간계였다. 고종은 그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칙령을 내려 곧 석방시켰다. 그 뒤 항일운동의 재기를 다짐하고 흩어진 의진을 재규합, 정비한 뒤 영덕의 신태호(申泰浩)와 합세하여 청송·영천·청하·신령 등지에서 일본헌병분파소 등을 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7년(융희 1) 10월 입암에서 전개된 영천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이한구·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일본군의 흉탄을 맞아 순절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騎驢隨筆》, 《독립운동사》 제1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권,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獨立有功者功勳錄》 제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운(鄭雲)   1574(선조 7) ~ 1595(선조 28)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운대(雲臺)이다. 현감(縣監)을 지낸 길(佶)의 6세손이다. 1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21세에 찰방(察訪)에 올랐고, 21세에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가 되었다. 부산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1595년(선조 28) 4월 24일 몰운대 전투에서 왜군과 필사의 의지로 치열한 백병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21세의 어린 나이에 순절하였다. 그 해 가을 조종악이 장군의 의관과 만서를 본가에 전하여 의관장을 치렀으며 선조(宣祖)께서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추서하고 몰운대에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두산백과사전》
 
정윤(鄭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부는 현감(縣監)을 지낸 효본(孝本)이며,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 지년(知年)이다. 아버지는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효항(孝恒)이다. 1525년(중종 20)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으며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참고] 《東國通鑑》, 《國朝文科榜目》
 
정의(鄭毅)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홍(子弘)이다. 증조부는 유(由), 할아버지는 현감(縣監) 철견(鐵堅), 아버지는 봉렬대부수청송도호부사(奉列大夫守靑松都護府使) 붕(鵬)이다. 청송에서 태어났으며 1525년(중종 20)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학문과 덕행으로 향당의 추중을 받았다.
[참고] 《司馬榜目》
 
정인귀(鄭仁貴)  1525(중종 20) ~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사현(士顯)이다. 아버지는 병조정랑(兵曹正郞) 서(犀)이다. 형제로는 정인수(鄭仁壽), 정인부(鄭仁富), 정인강(鄭仁康), 정인녕(鄭仁寧), 정인덕(鄭仁德), 정인우(鄭仁祐)가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고, 1561년(명종 16)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91년(선조 2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정인목(鄭仁睦)  1792(정조 16) ~ 1868(고종 5)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장(原章). 호는 석정(石汀)이다. 천연대(天然臺) 도건(道健)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윤희(潤熙), 생부(生父)는 진희(晉熙)이다. 처세함에 청렴하고 고상함에 몸가짐이 정성스럽고 엄하였다. 정영방(鄭榮邦)·정혼(鄭焜)·정요천(鄭堯天)·정요성(鄭堯性)·정도건(鄭道鍵)·정태래(鄭泰來) 여섯 명의 유문을 모아 《임장세고(林庄世稿)》 6권 2책을 그 아들 치관(歎寬)과 편집하였다.
[참고] 《林庄世稿》
 
정지웅(鄭之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현중(賢仲). 호는 월정(月亭)이다. 정절공(靖節公) 구(矩)의 후손이다.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청송 월정리(月亭里)에 복거(卜居)하여 월정(月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여기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鳥樹山南客 徘徊步月亭 魚樵餘有日 子規聽空庭”이라는 시가 전한다.
[참고] 《嶠南誌》, 《朝鮮寰輿勝覽》
 
정진도(鄭鎭燾)  1852(철종 3) ~ 1903(광무 7)
1896년(건양 1) 심성지(沈誠之)를 의병대장으로 청송의병(靑松義兵)이 결성되었을 때 여기에 참여하여 진무장(鎭撫將)에 선임되었다. 1896년(건양 1) 4월 청송의진이 이천(利川)의진과 의성의진(義城義陣)과 연합하여 관군을 상대로 벌였던 청송 감은리(甘隱里)전투에 중군장 김대락(金大洛), 소모장 심능장(沈能璋), 참모장 오세로(吳世魯) 등과 함께 6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참전하여 격전 끝에 승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韓末義兵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靑松의 香氣》,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찬관(鄭鑽寬)  1832(순조 32) ~ 1909(융희 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연(景淵). 호는 박은(樸隱)이다. 아버지는 동택(東宅)이며, 생부(生父)는 인목(仁睦)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저술로는 「자경십잠(自警十箴)」이 전한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참고] 《英陽郡誌》
 
정충달(鄭忠達)  1739(영조 15) ~ ?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여심(汝心)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회령진병마첨절제사(嘉善大夫會寧鎭兵馬僉節制使) 익량(益良)이다. 형제로는 정지달(鄭智達)이 있다. 1759년(영조 35)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769년(영조 4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정편(鄭遍)   1475(성종 6) ~ 1552(명종 7)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대수(大受)이다. 증조부는 사중(師中), 할아버지는 옥량(玉良)이고, 아버지는 생원 희길(熙吉)이며, 어머니는 김유경(金惟慶)의 딸이다. 김억근(金億斤)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성품이 정직하고 심지가 깊어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학문을 깊이 연마하였으나, 연산군의 횡포에 반대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사림에게 기회가 부여되면서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고, 1519년(중종 14)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호조좌랑(戶曹佐郞)·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옮겨 고성군수(固城郡守)·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냈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가 몰려나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면서 그에게도 핍박이 가하여져, 1535년(중종 30) 사간원(司諫院)에 의하여 탐폭하고 비리가 많다고 탄핵되어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군민들이 그의 파직을 애석해하였다는 데서 이것이 무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의 억울함이 밝혀져 다시 복직되었는데, 외직으로 청송부사(靑松府使)·서흥부사(瑞興府事)를 지내고, 내직으로 옮겨 1548년(명종 3)에는 73세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그 뒤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초계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참고]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현영(鄭顯英)  1828(순조 28) ~ ?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증조부는 진노(鎭魯), 할아버지는 홍수(鴻隨)이며 아버지는 은화(殷和), 어머니는 허구(許構)의 딸이다. 1866년(고종 3) 병인(丙寅)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81년(고종 18)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정환직(鄭煥直)  1843(헌종 9) ~ 1907(융희 1)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치우(致右).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암(東巖)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으며, 1894년(고종 31)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광무 3)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고, 1900년(광무 4) 도찰사(都察使)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파면하다가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하여 구금되었으며,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을 고수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광무 9)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를 보내며 구국거의(救國擧義)의 뜻을 전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용기(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에 진공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융희 1)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해 10월 7일 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적군의 총탄에 의하여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의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그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의병이 속출하게 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는 한편,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가 일본군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騎驢隨筆》, 《독립운동사》 제1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 《獨立有功者功勳錄》 제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효본(鄭孝本)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부는 인검(仁儉), 할아버지는 렴(濂), 아버지는 현감(縣監) 길(佶)이다. 형제로는 정효종(鄭孝終)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460년(세조 6) 경진(庚辰)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이르렀으며 청백리로 명성을 날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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