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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7 (안 ~ 윤)
• 안종덕(安鍾悳) 1841(헌종 7) ~ ?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로(兌老). 호는 석하(石荷)이다. 할아버지는 효상(孝庠), 아버지는 정원(貞遠)이다. 1882년(고종 19)에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의 천거로 6품직에 올랐으며, 곧 어윤중(魚允中)이 중심이 되어 운영된 감생청(減省廳) 설치와 함께 창설 실무진의 한 사람인 사과(司果)직으로 활동했다. 1897년(광무 1)에 참령(參領)이 되었고, 1890(고종 27)년에 정3품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칙임관(勅任官) 4등, 이듬해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칙임관(勅任官) 4등이 되었다. 선조 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인 김용(金涌)에게 사시(賜諡)한 것과 같이 선무원종공신인 진주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에게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할 것을 품의하였다. 1902년(광무 6)에는 김일손(金馹孫)과 조헌(趙憲)에 관련된 인척과 문인을 예우하도록 건의하기도 하였다. 1904년(광무 8)에 시흥민란(始興民亂)과 직산광부란(稷山鑛夫亂)에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되어 사건처리에 힘썼다. 그리고 종2품으로서 전라남도순찰사(全羅南道巡察使)로 파견되었으며, 당시대에 있어서 국사 전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특히 국가재정사무를 탁지부에 통합하여 일원화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했다. [참고] 《高宗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양극선(梁克選) 1575(선조 8) ~ ?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군거(君擧)이다. 증조부는 천수(千壽), 할아버지는 경우(慶祐), 아버지는 여지(汝止)이다. 어머니는 정호지(鄭好智)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42년(인조 20)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어석정(魚錫定) 1731(영조 7) ~ 1793(정조 17)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정보(精甫) 또는 인지(鱗之). 호는 신암(愼菴)이다.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진익(震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윤(右尹) 사형(史衡)이고, 아버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유구(有龜)이며, 어머니는 김동열(金東說)의 딸이다. 심계(沈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당대 명망 있는 학자인 큰아버지 어유봉(魚有鳳)으로부터 수학하였다. 1761년(영조 37) 음보(蔭補)로 목릉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그 뒤 통천군수(通川郡守)를 거쳐, 1767년(영조 43) 창평군수(昌平郡守)로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68년(영조 44) 승지(承旨)가 되고, 1771년(영조 47)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그 뒤 병조참판(兵曹參判), 병조참의(兵曹參議), 부총관(副摠管), 도승지(都承旨), 병조(兵曹)와 호조(戶曹)의 참판(參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청송·장단·월성·천안·성천 등지의 부사(府使)와 평안병우후(平安兵虞候)를 역임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동지부사(同知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790년(정조 14)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재직 중 암행어사(暗行御史) 서영보(徐榮輔)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재기용되었다. 1792년(정조 16) 도총관(都摠管)에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어석정의 저서로는 《신암집(愼菴集)》 2권이 있다. 《신암집(愼菴集)》은 필사본으로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없어 편자 및 편년을 알 수 없다. 권두(卷頭)에 1793년(정조 17)에 쓴 저자의 약력을 밝힌 글이 실려 있으나 필자를 알 수 없다. 1·2책 모두 시로 각각 334수, 442수가 실려 있다. 오언율시·칠언율시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영물(詠物)보다는 서정시들이 많다. 오랜 기간에 걸친 지방관 생활이 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부임하는 도중의 여수·정경을 읊거나 명승지나 유적지·서원·절 등을 둘러보고 지은 것, 임지에서의 자신의 생활과 서울에 대한 그리움, 한가한 시간에 느끼는 우울한 심정 등을 읊은 것이 많다. 「남유록(南遊錄)」은 1768년(영조 44)에 운봉현감(雲峰縣監)으로 부임한 뒤 그곳에서의 자신의 생활, 날씨나 절기의 변화, 자연의 경관 등을 대상으로 지은 것이 많다. 특히, 「대우(對雨)」·「한중야우(閑中夜雨)」 등과 같이 비 올 때의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시가 많다. 제2책에는 ‘得(득)’자로 제목을 붙인 시가 100여 편 실려 있다. 이것으로 시체(詩體)에 대한 저자의 관심, 한자로 운(韻)을 정해 놓고 이에 다시 차운(次韻)하는 등, 시에 대한 저자의 열의를 살펴볼 수 있다. 끝 부분은 「연행록(燕行錄)」이라 하여, 1788년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의 여정을 읊은 시들을 따로 모아 놓았다. 고양·평산·안주·청석령(靑石嶺) 등을 거쳐 심양(瀋陽)에 들른 일, 안시성(安市城)·만리장성(萬里長城)·강녀묘(姜女墓)·이제묘(夷齊廟) 등을 보고 느낀 소감,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서의 감회 등을 주제로 하였다. 기행시는 나그네의 우수나 여정에서의 일화, 통과하는 지역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등을 시의 형식을 빌려 적은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견문한 세태나 생활상 등에 대한 표현은 없어 한유시인(閑遊詩人)의 한계를 보여 준다. [참고]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愼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엄석겸(嚴錫謙) 1807(순조 7) ~ ?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공익(公益)이다. 증조부는 판서(判書)를 지낸 숙(璹),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사면(思勉)이며, 아버지는 참판(參判)을 지낸 도(燾)이다. 생부는 엄규(嚴圭)이다. 어머니는 참판(參判)을 지낸 홍인호(洪仁浩)의 딸이고 아내는 승지(承旨)를 지낸 홍희조(洪羲祖)의 딸이다. 1860년(철종 1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를 지냈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 오극성(吳克成) 1559(명종 14) ~ 1616(광해군 8)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민수(敏壽)이다. 1594년(선조 27)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아우 오윤성(吳允成)과 함께 맹세하며 말하기를 “저 왜적들이 우리의 종묘와 사당을 불 질러 없애고 우리 선조들의 묘소를 파헤쳐 빼내니 우리들이 이 왜적들과 함께 모두 죽지 못한다면 당나라 안녹산(安綠山)의 난 때의 충신 과경(果卿) 형제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 하고 벽에 ‘보왜구(報倭寇: 왜구에 보복하리라)’라는 세 글자를 쓰고는 붓을 던지고서 떨쳐 일어나 함께 과거에 급제하고 무과에 힘썼는데 왕이 비로소 그 모습을 알아보고 선전관(宣傳官)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당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전주에 진을 치고 있었고, 관찰사(觀察使) 김왕(金旺)은 여러 병사들을 데리고서 진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해군을 거느리고 한산도(閑山島)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들끓어 도로가 두절되었다. 왕이 “누가 적군의 동정과 기밀을 탐색해 오겠는가?”하자 오극성이 영해(領海)의 요충지를 엿보러 가기를 자청했다. 그 후 위험을 겪었지만 한 달도 못되어 돌아와 임금께 상황을 아뢰었다. 임금께서 침전으로 불러 삼군(三軍)의 일을 모두 물으니 오극성이 조목조목 매우 상세히 아뢰어 왕이 특별히 명하여 술을 내리고 다음날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제수하였다. 1595년(선조 28)에 도총도사 겸 비변랑(都總都事兼備邊郞)으로 승진되었다. 또한 문사(文詞)를 잘 지었는데 비변사(備邊司)가 임금께 아뢰기 어려운 글 중에는 그가 작성한 것이 많았다. 다시 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가 들은 것을 급히 임금께 상소하여 알리니 상감이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1596(선조 29)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그는 난을 겪은 이후 윤리(倫理)가 거의 땅에 떨어짐을 우려하여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의 의(義)’로 착한 사람은 칭찬하고 악한 사람들은 벌하는 원칙에 따라 다스리니 얼마 안 되어 한 마을이 교화되었다. 또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재차 침입하자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진(陣)으로 가 접전을 벌여 2백여 명을 죽이고 19명 정도를 머리를 베어 얻었다. 또 1598년(선조 31)에 관찰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따라 천장(天將)을 수행하여 사천(泗川)으로 갔으며, 그 해 10월에는 아우 오윤성(吳允成)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의 막하(幕下)로 가 왜적을 대파하였다. 1600년(선조 33)에는 많은 공을 세워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고, 이듬해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되었다. 그 해 옥선대(玉仙臺) 아래 집을 짓고 ‘문월(問月)’이라고 편액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617년(광해군 9)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단양(丹陽)에 이르러 죽었다. 저서로는 《문월당선생문집(問月堂先生文集)》이 전하는데 이는 4권 2책으로, 권두(卷頭)에 류치명(柳致明)과 이돈우(李敦禹)가 쓴 서(序)가 있고, 그 뒤에 목록이 있다. 권1은 시(詩), 소(疏), 서(書), 기(記), 제문(祭文)이다. 시는 모두 9제(題)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창궐하는 것을 보고 읊은 「견인피란음시(見人避亂吟示)」를 필두로 정담(鄭湛), 변응정(邊應井), 신립(申砬) 등 왜란 때 전사한 인물들에 대해 강개하며 읊은 시들이 있으며, 자신의 당호인 문월당에 제(題)한 시도 있다. 1595년(선조 28)에 올린 군무(軍務)에 관한 소(疏)가 있고, 서(書)로는 세 아우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있다. 기(記)는 산승(山僧) 인람(仁鑒)의 죽립암(竹立庵)에 대해 1613년(광해군 5) 4월에 써 준 기문이 있고, 이순신(李舜臣)과 이대규(李大圭)에게 시집간 딸에 대한 것과 「사직단기우문(社稷壇祈雨文)」이라는 제문(祭文)이 있다. 권23은 잡저(雜著)로 《임진일기(壬辰日記)》와 「황간방유문(黃澗榜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4는 부록(附錄)이다.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등 9명의 만사(輓詞)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이 지은 묘표(墓表), 이한응(李漢膺))과 이휘영(李彙寧)이 지은 행장(行狀), 저자를 명고서원(明皐書院)에 봉안할 때의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이 실려 있다. 권말(卷末)에 홍희승(洪羲升)의 발(跋)이 있고, 「선무원종훈록전지(宣武原從勳錄傳旨)」와 「장악원계첩(掌樂院契帖)」이 별도의 부록(附錄)으로 첨부되어 있다. [참고] 《問月堂先生文集》,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 오기묵(吳基黙) 1793(정조 17) ~ ?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치온(稚溫)이다. 증조부는 현감(縣監)을 지낸 언구(彦耉), 할아버지는 태첨(泰詹)이며 아버지는 조산대부행현륭원참봉(朝散大夫行顯隆園參奉) 학수(學秀)이다. 어머니는 부사(府使) 김재화(金載華)의 딸이고, 아내는 이진원(李震遠)의 딸이다. 형제로는 긍묵(肯默)·정묵(正默)·병묵(秉默)이 있다. 1822(순조 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60년(철종 1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搢紳譜》
• 오세로(吳世魯) 1850(철종 1) ~ 1898(광무 2)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을 결성추진 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오세로는 이때 참모에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金大洛)과 오세로가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이후 그는 창의록인 적원일기(赤猿日記)를 저술하여 심성지의진의 활동상을 후세에 전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오승언(吳承彦)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여(聖汝). 호는 백탄(栢灘)이다. 수산(水山) 이성화(李性和)의 문인이다. 문사(文詞)가 박흡(博洽)하며 행의(行誼)가 순실(淳實)하였다. 저서로는 《백탄유고(栢灘遺稿)》 2권이 전한다. 이 시문집은 이병두(李炳斗)가 서문(序文)을 쓰고 김병숙(金秉淑)이 후서를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오승언의 시와 편지글이 다수 실려 있다. 시는 주로 자연의 경관을 읊거나 지인들과 교류한 화답시이고, 편지글은 지인들의 안부를 물으며 교유했던 내용이다. [참고] 《栢灘遺稿》
• 오여벌(吳汝橃) 1579(선조 12) ~ 1635(인조 13)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경허(景虛). 호는 경암(敬菴), 남악(南岳)이다. 아버지는 부윤 운(澐)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생원(生員) 사렴(士廉)의 딸이다. 큰아버지 진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 목서흠(睦叙欽), 홍호(洪鎬) 등과 교육하였다. 6세 무렵에 이미 글을 깨우쳐 책을 읽고 글씨를 쓸 수 있었던 신동이었다. 9세 때 큰아버지 오진(吳溍)의 후사가 된 오여벌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아버지를 따라 영천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오여벌은 생부 오운으로부터 ‘염근충신(廉謹忠信)’ 네 글자를 스스로를 다스리는 기본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학이 성취되었다. 1601년(선조 34) 신축(辛丑) 생원·진사(生員進士) 양시에 합격하였다.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오른 오여벌은 당시 임금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언관(言官)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던 홍문관원들의 잘못을 탄핵하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그 기개를 조정에 널리 떨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되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직장(直長)을 거쳐 1605년(선조 38)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고, 이듬해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서 국가문서의 찬술을 담당하는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게 되었다. 오여벌은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울산판관(蔚山判官), 예조좌랑(禮曹佐郞), 영천군수에 보임되었지만 잠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진휼종사관(賑恤從事官)으로 경상도와 강원도에 파견되어 흉년으로 고생하던 백성들을 위해 치적을 남겼다. 이후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청송부사(靑松府使), 연일군수(延日郡守) 등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선정을 베풀어, 그가 다른 임지로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거사비(去思碑)를 세울 정도였다. 이후 오여벌은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올랐지만, 1626년(인조 4)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영천으로 내려온 뒤, 산이동(山伊洞)에 자신의 서재인 경암초당(敬庵草堂)을 짓고서 강학과 저술활동에 전념하다 세상을 떠났다. 오여벌의 큰형인 오여은(吳汝檼) 역시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오운의 맏형이자 오여벌의 양부인 오진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내고 상주주씨(尙州周氏) 주세란(周世鸞)의 딸과 혼인하였다. 오여벌의 부인은 김성일의 후손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세마(洗馬) 김집(金潗)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여 백형의 2남 진사 김익황(金益熀)을 후사로 삼았다. 그는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여 《역괘도(易卦圖)》·《천지만물도(天地萬物圖)》·《음양오행도(陰陽五行圖)》를 저술하였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어서 《중국역대총론(中國歷代總論)》과 《동국역대기사(東國歷代紀事)》를 남겼다. 오여벌의 학문 가운데 가장 주목할 점은 그가 《주역》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집인 《경암선생문집(敬菴先生文集)》의 권3에 수록되어 있는 「역괘도(易卦圖)」·「천지만물도(天地萬物圖)」·「음양오행도(陰陽五行圖)」 등이 그 대표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도설(圖說)들은 천지 질서의 조화를 괘상(卦象)을 통해 풀이한 《주역》의 이치에 관하여 상세한 해석을 가하고 있는 저술로서, 17세기 초반 퇴계 학파의 역학사상(易學思想)을 대표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또한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 이후 공자(孔子)·맹자(孟子)·주자(朱子)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도통(道統)의 흐름을 설명한 「도통연원도(道統淵源圖)」 역시 당시 영남 지역 선비들의 도통관(道統觀)을 체계화한 의미를 지닌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경암집(敬菴集)》은 목판본으로 1934년 그의 후손 응철(應澈)·학성(學性)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卷頭)에 이만도(李晩燾)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권세연(權世淵)·김휘철(金輝轍)·송인옥(宋寅鈺)·조병규(趙昺奎) 등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사(辭) 2편, 시(詩) 17수, 서(書) 14편, 권2에 계(啓) 3편, 소 1편, 전(箋) 2편, 명 1편, 제문(祭文) 1편, 축문(祝文) 5편, 행장(行狀) 3편, 서(序) 1편, 잡저(雜著) 5편, 권3 ∼ 5에 잡저(雜著) 4편, 유묵(遺墨), 권6은 부록(附錄)으로 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만사(輓詞)·제문(祭文)·봉안문(奉安文)·유사(遺事)·증유(贈遺)·기(記)·상량문(上樑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仁祖實錄》, 《敬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 오운(吳澐) 1540(중종 35) ~ 1617(광해군 9)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 죽계(竹溪)이다. 의령현감(宜寧縣監) 석복(碩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의현감(全義縣監) 언의(彦毅)이고, 아버지는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부호군(副護軍) 관(瓘)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 정구(鄭逑)와 교유하였고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면서부터 재능이 특출하고 머리가 영리하여 뭇 아이들보다 뛰어났으며, 그것을 기특히 여긴 할아버지 승지공(承旨公) 오언의가 오운을 힘써 가르쳤다. 이른 나이에 문장을 이룬 그는 글씨에 힘이 넘쳤으며 그 명성이 날로 퍼져 동년배들의 큰 추앙을 받았다. 1561년(명종 16)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566년(명종 21) 병인(丙寅)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72년(선조 5) 호송관으로 뽑힌 그는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호송하였으며, 1576년(선조 9) 박사(博士)가 되었다. 이듬해 전적(典籍)과 호조좌랑(戶曹佐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그 해 겨울 명천현감(明川縣監)의 외직을 받았다. 내직으로 돌아온 그는 1580년(선조 13) 직강(直講)이 되었고, 가을에는 어명을 받아 황해도에서 말의 수를 조사하는 일을 하였다. 다음해 정선군수(旌善郡守)가 되었고, 2년 뒤에는 풍저창수(豊儲倉守) 및 충주목사겸춘추관편수관(忠州牧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다. 당시 목사(牧使)로 재직하면서 명쾌한 판결을 내리니 아전이 두려워하였으며 백성이 은혜롭게 여겨 도내의 모든 송사가 그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결단력을 발휘하여 1585년(선조 18) 겨울 오래도록 끌어온 결단하기 어려운 송사에 대해 판결을 내렸으나, 그 일로 관찰사(觀察使)에게 미움을 사 파직을 당하자 의령과 함안으로 퇴거하였다. 3년 뒤인 1588년(선조 21) 다시 조정의 부름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오른 뒤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평안도를 순수했고, 겨울에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다. 이듬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외직에 나가게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곧 의령으로 돌아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왕래하는 왜적을 막아냈던 곽재우(郭再祐)가 전투에 패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오운을 방문하였다. 이때 오운은 곽재우에게 의병의 거사를 권하면서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군수품과 전쟁에서 쓸 말을 모아 주었으며, 집의 종들 가운데 용맹하고 건장한 사람으로 6~70명을 뽑아 주었다. 또한 마을의 선비와 백성에게 권하여 각각 용맹스런 군사를 뽑도록 하고 곽재우를 지휘관으로 삼았으며, 병사를 모으는 일은 오운이 직접 관장하였다. 그 때 백령(白嶺)에서 모집한 의병이 전후 2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 부근의 전투와 현풍 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선조 26) 가을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인해 사직하고 선대가 살았던 영천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다시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합천군은 원수(元帥)를 비롯하여 많은 병사들이 머물면서 소란을 일으켜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오운은 그러한 상황을 잘 무마하여 고을을 안정시켰고, 이에 순찰사 서성(徐渻)이 그의 공을 기록한 계를 2~3번 올려 승진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대부분의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으나, 오운은 군을 떠나지 않고 병사와 장수를 모아 적군의 목을 베니 그 수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큰 상을 내리라는 장계를 올렸고, 그 결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한 그는 그해 겨울 명나라 장수 진제독(陳提督)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호남 지방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판결사(判決使)를 역임하고 1599년(선조 32) 가을 선산에 다시 장사지내는 일로 소를 올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을 당하여 조정에 올라가서 오위장에 배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영천으로 돌아왔다. 영천으로 돌아온 오운은 구천(龜川) 강가에 집을 지어 말년의 계책으로 삼았다. 그는 좌우에 도서를 두어 독서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주역(周易)》 및 주자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또한 손수 상소문과 차자(箚子)를 쓰면서 먹고 자는 일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나 피곤하다 여기지 않았으며, 동국의 여러 사서를 모아 7권의 책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동사찬요(東史簒要)》이다. 유생들은 그 책을 서로 다투어 보면서 기뻐하였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도 크게 감탄하면서 ‘사가(史家)의 뜻을 얻었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 임금께 드릴만하다고 하며 1권을 올리니, 선조는 ‘유림에게 모범이 된다.’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봄 선조의 장례에 참여하였으며, 그 해 7월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된 그가 병든 몸을 이끌고 소를 올리니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하는 말이 수백 자에 이르렀다. 그 내용인즉 “기강을 진작하고 군정을 엄하게 하며 백성의 힘을 펼치고 궁금을 엄히 하소서. 또한 사사로운데 치우치지 말며 간언을 받아들이소서.”라는 것이었다. 그의 우국충정에 감동한 광해군도 “소를 살펴보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갸륵하다. 마땅히 유념하여 의논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고는 승정원(承政院)에 전하기를 “이 상소 가운데 거행할 만한 일을 뽑아서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그 해 8월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자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감격하여 어명에 따라 부임하였다. 하지만 부임 후 평소 앓고 있던 위병이 심해진 까닭에 이듬해 2월 집으로 돌아왔다. 병이 더욱 심해진 오운은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617년(광해군 9) 3월 3일 결국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고 한다. 그해 6월 3일 영천군의 남쪽 첩석리에 장사지냈으며 사후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함께 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운은 모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오여은(吳汝檼)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고, 2남 오여벌(吳汝橃)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3남 오여영(吳汝煐)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며, 딸은 군수(郡守) 조형도(趙亨道)에게 출가하였다. 오운의 첫째 부인은 김해허씨(金海許氏) 생원(生員) 허사렴의 딸이며 진사 허찬(許瓚)의 손녀이다. 그녀는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깊었으며 언행은 사군자와 같았다고 한다. 오운이 죽은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의 묘에 부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竹牖文集)》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처음 간행된 것은 1606년(선조 39)이었다. 당시에는 7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후 개찬되어 1614년(광해군 6) 총 8권으로 간행·반포되었다. 이 책은 오운이 말년에 영천에 내려가 은거생활을 할 때 지은 것으로 단군 조선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담고 있다. 그는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사략(東國史略)》·《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천운절통(天運紹統)》·《동문선(東門選)》·《퇴계문집(退溪文集》·《남명문집(南冥文集)》·《죽계지(竹溪志)》·《동국명신행적(東國名臣行跡)》 등 총 21종의 책을 참고하여 《동사찬요(東史簒要)》를 저술하였다 하니 실로 그 양이 방대하다고 하겠다. [참고]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鶴少集》, 《龍蛇列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 오형근(吳衡根) 1874(고종 11) ~ ?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칠(璿七)이다. 아버지는 학영(學泳)이다. 1891년(고종 28)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891년(고종 28)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였다. 1896년(건양 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오형근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창덕선정비가 현재 청송향교 옆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司馬榜目》
• 우영조(禹永朝, 禹永祚) 1870(고종 7) ~ 1963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성장(聖章). 호는 방운(訪雲)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한 배선(拜善)의 11세손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년(광무 10) 5월에 정용기(鄭鏞基)가 영천(永川)에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조직, 항일의병항쟁을 개시하자, 김일언(金一彦)과 함께 진보(眞寶)지역의 소모(召募)책임을 맡아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뒤 의병대장 정용기가 관군에 의하여 체포되면서 의진이 해체되자 부득이 그도 한동안 잠적하여 있다가 1907년(융희 1) 8월 정용기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의진을 재구성할 때 다시 의진에 투신, 신성·청송·자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을 의병대장에 추대한 뒤 신령·의흥·안동·청송·청하 등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환직 역시 같은 해 12월 일본군에 잡혀 순국함으로써 의진이 큰 타격을 받게 되자, 다시 최세한(崔世翰)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서종락(徐鍾洛)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 뒤 1908년(융희 2) 2월 서주일(徐周一)의 휘하에 있으면서 이재원(李在元)과 박태래(朴泰來)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1910년(융희 4) 2월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大邱地方裁判所判決文》, 《독립운동사》 제1권, 《山南義陣遺史》, 《獨立有功者功勳錄》 제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 우재룡(禹在龍) 1884(고종 21) ~ 1955 본관은 단양(丹陽). 일명 경옥(景玉). 자는 이현(利見). 호는 백산(白山)이다. 1903년(광무 7)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참교(參校)로 근무하였다. 1906년(광무 10) 의병이 되기 위하여 탈영하고 영천의 정용기(鄭龍基)와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켜 그의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영일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 많은 혈전을 폈다. 정용기가 죽은 뒤에는 그를 계승한 그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 진영의 선봉장으로서 영일·경주·청송·영천·대구 근방에서 용맹을 떨쳤다. 1908년(융희 2) 무기조달관계로 대구에 잠입하였다가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1911년에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출옥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니, 이 조직은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남도·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발전하여 1910년대 독립운동의 가장 큰 규모의 국내조직이 되었다. 이때 국내와 국외의 연락책임을 맡아 국내에서는 광주·목포 등지에서 독립군연락기지건설과 군자금모금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만주에서는 안동에 상주하면서 대한광복회와 재만독립군기지인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 또는 신흥학교와의 연락, 그리고 국내로 보내는 무기조달과 격문발송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1917년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송달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광복회의 격문은 거의 그의 주선에 의하여 배포된 것이며, 또 1917년 11월에 처단된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과 1918년 1월에 처단된 아산의 도고면장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에 대한 암살투쟁과 무기공급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1918년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거의 파괴당하였으나, 그는 남아 있는 한훈(韓焄)·권영만(權寧萬)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조직회복에 주력하였다. 1920년 군산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무기징역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감형되어 1937년 풀려나왔다. 출옥 후에도 옥중병고가 계속되어 권영만 등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그 뒤 권영만·이관구(李觀求, 일명 海量)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여 독립운동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嶺南出身獨立運動略傳》, 《山南義陣遺史》, 「大韓光復會硏究」,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유언국(兪彦國) 1701(숙종 27) ~ ?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군필(君弼)이다. 증조부는 삼(槮), 할아버지는 명담(命聃), 아버지는 건기(健基)이며, 어머니는 이징해(李徵海)의 딸이다. 권익문(權益文)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형제로는 유언복(兪彦復)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였고 1735년(영조 11)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60년(영조 36)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반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유중익(兪仲翼)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국좌(國佐)이다. 증조부 현(顯)이며, 할아버지는 효통(孝通)이고, 아버지는 노신(臣老)이다. 어머니는 오완(吳浣)의 딸이다. 1509년(중종 4) 기사(己巳)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1534년(중종 29)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 유치홍(兪致弘) 1800(정조 24) ~ ?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도능(道能)이다. 증조부는 도정(都正)을 지낸 한준(漢雋), 할아버지는 회주(晦柱), 아버지는 돈환(敦煥), 생부는 인환(仁煥)이다. 어머니는 송언진(宋彦鎭)의 딸이고, 아내는 박준명(朴俊命)의 딸이다. 형제로는 치원(致遠)·치갑(致甲)·치설(致說)·치목(致穆)이 있다. 유길준(兪吉濬)의 할아버지이다. 1827년(순조 27) 정해(丁亥)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1850년(철종 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3년 동안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司馬榜目》
• 유하겸(兪夏謙) 1632(인조 10) ~ ?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수보(受甫), 중휘(仲撝)이다. 증조부는 대정(大禎), 할아버지는 시증(是曾)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극(極)이다. 어머니는 홍정(洪霆)의 딸이고, 성찬(成纘)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유하진(兪夏震), 유하복(兪夏復), 유하정(兪夏井), 유하승(兪夏升)이 있다. 1669년(현종 10)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고, 1672년(현종 13) 임자(壬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헌납(獻納),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조참의(禮曹參議),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선산부사(善山府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냈다. 1677년(숙종 3)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91년(숙종 17)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윤경진(尹景鎭) 1767(영조 43)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치행(穉行)이다. 증조부는 동설(東卨), 할아버지는 광택(光宅), 아버지는 공주진관병마절제도위(公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낸 미기(美基)이며, 어머니는 이돈중(李敦中)의 딸이다. 김재진(金在鎭)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04년(순조 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809(순조 9) 기사(己巳)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1820년(순조 20)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윤기열(尹基烈) 1878(고종 15) ~ 1917 본관은 파평(坡平). 일명 무건(武建)이다. 청송(靑松)에서 태어났으며 품성이 강직하고 힘이 세어 선사(善射)의 명성이 있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궐기함에 이에 호응하여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의병진의 구성을 준비할 때 지례·고령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이초장(二哨長)이 되어 의성·청송·진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산남의진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장들이 차례로 순국하자, 1908년(융희 2) 1월 후봉장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약 60명의 의병들과 장기읍을 공격하여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경찰을 사살한 뒤 분파소·세무서·우체소·경찰사택을 불태웠다. 1908년 일본군 모리이(森伊太郞)를 사살하고 군도를 노획하였으며, 산남의진이 각지로 분산된 뒤에는 계속 산중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독립운동사》제1권, 《山南義陣遺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 윤기일(尹夔一) 1801(순조 1)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경(舜卿)이다. 할아버지는 희후(羲厚),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예천군수(通訓大夫行醴泉郡守) 경의(景儀)이다. 어머니는 부사(府使) 이태원(李太源)의 딸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김면순(金勉淳)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43(헌종 9)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61년(철종 1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司馬榜目》
• 윤면승(尹勉升) 1720(숙종 46)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지(順之)이다. 증조부는 리(理), 할아버지는 창래(昌來),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명언(命彦)이며 어머니는 이상화(李相華)의 딸이다. 류신(柳紳)·유욱기(兪郁基)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형제로는 윤면경(尹勉敬)이 있다. 1759년(영조 35)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76년(영조 5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3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윤방(尹坊) 1718(숙종 44) ~ 1795(정조 19)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례(仲禮). 호는 순재(醇齋)이다. 증조는 심(深)이고, 할아버지는 휘정(彙貞)이며, 아버지는 광업(光業)이다. 광조(光祚)에게 입양되었다. 1751년(영조 27)에 신미(辛未)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을 역임한 뒤 1762년(영조 38)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64년(영조 40)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고,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다시 대사간(大司諫)에 임용되었으나 1771년(영조 47) 홍봉한(洪鳳漢)의 사건에 연루되어 삭탈 관직되었다. 1773년(영조 49) 다시 승지(承旨)로 복직되고 얼마 뒤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780년(정조 4)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그 뒤 1784년(정조 8)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이 되었으며, 1789년(정조 13)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1791년(정조 15)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일찍이 1779년(정조 3) 사은정사(謝恩正使)인 하은군(河恩君) 광을 따라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이 탁월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잘 처리하였고, 특히 외교적인 수단이 뛰어났다. [참고]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窮悟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빈(尹彬) 1686(숙종 12)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휘(德輝)이다. 증조부 정득(正得), 할아버지는 영(韺), 아버지는 필성(弼成)이며, 어머니는 류노(柳櫓)의 딸이다. 이문호(李文灝)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13년(숙종 39)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3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 윤삼업(尹三業, 尹殷道) 1875(고종 12) ~ 1953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그는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선임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윤삼업은 이와 같은 의진편성 당시 통인(通引)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동년 4월 2일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윤영선(尹永善) 1813(순조 13) ~ ?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효칙(孝則)이다. 증조부는 태동(台東), 할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종렬(鍾烈)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치대(致大)이다. 어머니는 교관(敎官)을 지낸 서유본(徐有本)의 딸이며 아내는 신태유(申泰有)의 딸이다. 1848년(헌종 14)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1873년(고종 10)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6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司馬榜目》
• 윤일규(尹日逵) 1767(영조 43)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승(子昇)이다. 증조부는 명훈(命勳), 할아버지는 숙(塾)이다. 생부는 희담(喜聃)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원석(元錫)에게 양자로 갔다. 어머니는 정운기(鄭運紀)의 딸이다. 형제로는 형규(亨逵)·운규(雲逵)가 있다. 1792년(정조 16)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1800년(정조 24) 경신(庚申)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17년(순조 17)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윤자영(尹滋瑛, 蘇野, 笑也, 丁一英) 1894(고종 31) ~ 1938 1919년 3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재학 중 학생만세운동 지도부의 일원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일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종로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곧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의 집행위원과 지방부 위원을 맡았고, 1920년 12월 창립총회에서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에는 서울청년회 조직에 참여 기관지인 「아성(我聲)」의 편집위원으로 많은 글을 투고하였으며 순회강연 활동 등을 펼쳤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였으며, 5월에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입당하고 기관지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 무렵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1922년 10월 러시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상해파 소속 마산지역 대표라는 직함으로 참가하였고, 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고 1923년 1월 그는 대표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었고, 코민테른에 의해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곧 상하이[上海]로 돌아왔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고려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지도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여 개조파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뒤 그는 잠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23년 6월에는 김지섭(金祉燮)의 투탄의거를 지원하였다. 이 사실이 드러나며 그는 일경의 추적을 받았으나, 1924년 4월 청년동맹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만주로 건너간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선전부 책임이 되었으나, 그 해 말 상해파와 화요파간의 분쟁과 관련하여 출당 조치를 당하였다. 1929년 3월 하순에는 돈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의 책임이 되었다. 1930년 10월 귀국하여 활동하던 그는 일경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유학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공산대학을 다니던 중 1938년 소련정부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島山安昌浩資料集》 제1집, 《청송의 독립운동사》,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 윤정린(尹廷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문옥(文玉). 호는 여와(藜窩)이다. 충우(忠祐)의 종현손(從玄孫)이다. 고재(顧齋) 이고(李槹)의 문인이다. 경종조(景宗朝)에 공주절제사(公州節制使)를 지냈으며 1728년(영조 4) 무신난에 죽산(竹山)에서 아들 호군(護軍) 이징(以徵)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순절하였다. 정종조(正宗朝)에서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되었으며 실제 기록이 있다. 류정호(柳廷鎬)가 행장(行狀)을 찬하였다. [참고] 《嶠南誌》
• 윤정우(尹楨禹) 1848(헌종 14) ~ 1903(광무 7)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윤정우는 우방장(右防將)에 선임되어 흥해(興海)에서 군사를 소모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1896년(건양 1)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윤제동(尹悌東) 1761(영조 37) ~ ?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도이(道而)이다. 증조부는 세겸(世謙), 할아버지는 옥(沃)이며, 아버지는 득우(得雨)이다. 어머니는 송창명(宋昌明)의 딸이며 이영목(李永穆)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83(정조 7)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785(정조 9) 을사(乙巳)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였다.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1802년(순조 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 윤추(尹推) 1632(인조 10) ~ 1707(숙종 33)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서(子恕). 호는 농은(農隱)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황(煌)이며,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다. 풍양조씨(豊陽趙氏) 군수(郡守) 조진양(趙進陽)의 딸과 결혼하여 윤자교(尹自敎)와 윤가교(尹可敎)를 낳았다. 둘째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유(李𣞗)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덕을 닦았다. 나이 30세에 병에 걸려 10년 동안 고생하다가, 1668년(현종 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출사하지 않고, 스스로 농은(農隱)이라는 호를 짓고 전야에 파묻혀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1년(숙종 7)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인 1687년(숙종 13) 선친이 무고를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1689년(숙종 15) 다시 석성현감(石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이 문묘에서 퇴출되자 곧 다시 벼슬을 버렸다. 1694년(숙종 20) 용담현감(龍潭縣令)에 제수되었다. 1695년(숙종 21) 청렴 근신한 수령으로 뽑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승진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96년(숙종 22)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06년(숙종 32)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공격(公格)으로 체직되었다. 1707년(숙종 33)에 죽리(竹里)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듬해 1월 25일 공주(公州) 남목동(南木洞) 향두산(鄕斗山)에 묻혔다. 저서로는 문집인 《농은유고(農隱遺稿)》가 전한다. 《농은유고(農隱遺稿)》는 6권 3책, 목판본으로 1818년(순조 18) 족현손인 형규(馨圭) 등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1은 시로 소상팔경(瀟湘八景) 등 146수, 권2는 시 108수, 소장(疏狀) 3편, 서(書) 17편, 권3은 서(書) 59편, 권4는 잡저(雜著)·잠(箴)·상량문(上樑文)·서(序)·기(記)·후(後)·제문(祭文)·묘표(墓表)·행장(行狀) 등을 모았고, 부록(附錄)으로 손자인 동수(東洙)가 지은 행장(行狀), 형 증(拯)이 지은 묘표와 유사(遺事), 또 동수가 지은 유사(遺事), 끝으로 형규의 발문(跋文)을 싣고, 별집 2권에 권1은 「청송재변록(靑松齋辨錄)」 상, 권2는 「청송재변록」 하인데 변무사기(辨誣私記)로 구성되어 있다. 「청송재변록」 상의 「북소옥소변(北疏沃疏辨)」은 아버지 선거(宣擧)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살아나온 일에 대하여 송시열(宋時烈) 등이 비방한 데 대하여 형인 증이 변호하였는데, 이를 다시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과 옥천서원(玉川書院)의 유생 등이 북소와 옥소로서 통박하고 나오자 그 내용을 구절구절 변명한 것이다. 「청송재변록」 하에 「송이문답변(宋李問答辨)」 등이 있는데, 그 내용은 송창규(宋昌奎)·이희조(李喜朝) 등이 아버지 선거를 비방한 데 대하여 변호하는 글과 소론의 거두인 형 증이 노론의 탄핵을 받은 사실을 변박하는 글이다. 이 「송이문답변」이나 「후동문답변(後洞問答辨)」 등은 송창규나 이희조가 송시열과 문답한 것이 아니라 송시열이 자작(自作)하여 문답한 것처럼 꾸몄다고 주장하였다. [참고] 《國朝人物考》, 《農隱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충우(尹忠祐) 1587(선조 20) ~ 1637(인조 15)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쌍령(雙領)이다. 파평윤씨 시조인 신달(辛達)의 26세손이다. 아버지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귀림(貴琳)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수형(權遂亨)의 딸이다. 윤충우는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여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15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능히 읽고 글짓기도 뛰어났다고 한다. 성년이 되어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대장부가 어찌 집안에서 글귀나 짓고 바둑이나 두며 소일하며 살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그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익히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하여 관군이 되었다. 그는 좌위에 소속되어 부사과(副司果)의 직책을 맡았다. 그 후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이 되어 일을 하다가, 1634(인조 12)에 퇴역하여 고향인 청송으로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윤충우는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사내대장부는 살아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죽어서는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무장을 갖추어 출전하였다. 며칠 뒤 그의 애마와 유서만이 돌아왔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적의 세력이 크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겠소. 비록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들 어찌 전쟁터에서 내 시체를 찾으리오. 이 글을 받아보는 날을 나의 제삿날로 정하시오. 아들이 눈앞에 선하오. 난리 중에도 모자가 헤어짐 없이 서로 의지하여 잘살기를 바랄 뿐이오.” 집안에서는 윤충우의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 묘는 애마 비룡의 묘지와 함께 청송군 청송읍 금곡 3리 산 10번지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808년(순조 8)에 조정에서 명을 내려, 고을의 부사(府使)로 하여금 윤충우의 충의정신(忠義精神)을 기리는 사당을 짓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부사는 마을 뒷산 기슭에 사당을 짓고 이름을 ‘상렬사’(尙烈祠)라고 하였다. 상렬사는 100여 년간 춘추로 제사를 지내다가, 일제시대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참고] 《嶠南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 윤현기(尹顯岐) 1813(순조 13)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치장(致章)이다. 증조부는 지탁(之鐸), 할아버지는 완(浣), 아버지는 만식(晩植)이며, 어머니는 이복연(李復淵)의 딸이다. 1843(헌종 9)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1869년(고종 6)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고, 재임 시 3년 동안 청송향교(靑松鄕校)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현기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현재 청송향교 옆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 윤효업(尹孝業) 1849(헌종 15) ~ 1901(광무 5)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윤효업은 이때 서기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1896년 4월 그는 좌익장 권성하 등과 함께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윤휘정(尹彙貞) 1676(숙종 2) ~ ?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길(彦吉)이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지경(知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鏶)이고, 아버지는 이조(吏曹)·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심(深)이며, 어머니는 송석복(宋錫福)의 딸이다. 민정매(閔挺梅)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윤휘승(尹彙升), 윤휘양(尹彙敭), 윤휘성(尹彙成), 윤휘증(尹彙增)이 있다. 1710년(숙종 36)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고, 1722년(경종 2) 통덕랑(通德郞)으로서 임인(壬寅)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내면서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관련된 소론 일파를 탄핵 논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문경현감(聞慶縣監)으로 있었는데, 며칠 동안 관아를 비우고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탄핵을 받고 압송되었으나 방면되었다. 1736년(영조 1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고, 그 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수찬(修撰)·교리(校理),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한 때 당직을 소홀히 하여 위원군수로 좌천되었으나 서용되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올랐다. [참고]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