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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6 (심)
• 심강(沈鋼) 1514(중종 9) ~ 1567(명종 2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유(伯柔)이다.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충혜공(忠惠公) 연원(連源)이며, 어머니는 좌찬성(左贊成) 김당(金璫)의 딸이다. 명종의 장인이다. 1543년(중종 38)에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가 되었다. 명종(明宗)이 대군으로 있을 때에 큰딸이 명종과 혼인하여 1546년(명종 1)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오르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다. 1548년(명종 3)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고, 1563년(명종 18)에는 기대항(奇大恒)과 함께 권신 이량(李樑)의 세력을 제거하고 신진사류인 박순(朴淳) 등을 구하였다. 시호는 익효(翼孝)이다. [참고] 《國朝人物考》, 《中宗實錄》, 《明宗實錄》, 《嶠南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건(沈鍵) 1519(중종 14) ~ 1550(명종 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계(重啓)이다. 고조부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 증조부는 원(湲), 할아버지는 순문(順門), 아버지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봉원(逢源)이며, 어머니는 김현조(金顯祖)의 딸이다. 이연경(李延慶)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청송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친구 윤개(尹漑)의 사랑을 받아 그의 가숙(家塾)에서 배우며 자식처럼 자랐다. 1543년(중종 38)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여, 1548년(명종 3) 무신(戊申)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550년(명종 5) 충청도 지방에 어사(御使)로 나갔다가 병을 얻어 공주의 관사에서 죽었다. [참고]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결(沈決) 1419(세종 1) ~ 1470(성종 1)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통지(通之)이다. 증조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용(龍), 할아버지는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온(溫)이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아버지가 죄를 얻어 사형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비로소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에 서용되었고, 이어서 첨지돈령부사(僉知敦寧府使)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발탁되었고, 세조 즉위에 참여한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인순부윤(仁順府尹),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역임하고, 1461년(세조 7)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이어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고 관품이 종1품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순하고 단정하였다. 시호는 정이(靖夷)이다. [참고] 《世祖實錄》, 《成宗實錄》, 《韓國系行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경(沈憬) 1556(명종 11) ~ 1616(광해군 8)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오(仲悟)이다. 할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이며, 아버지는 증호조정랑(戶曹正郞) 지겸(智謙)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병조판서(兵曹判書) 충겸(忠謙) 밑에서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589년(선조 22) 이발(李潑) 형제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장사지낼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가 이에 연루되어 부령에 유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풀려나 면천으로 돌아와 경사(經史)를 연구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처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대북파들 사이에서 정인홍(鄭仁弘)을 추대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론을 성립하고자 획책하자, 대사헌(大司憲) 한찬남(韓纘男)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고 그 부당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가 하옥되어 경성에 안치되었다가 1년 만에 죽었다. [참고]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계징(沈繼徵) 1662(현종 3) ~ 1718(숙종 4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술(汝述)이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항(杭)이다. 경기도 고양(高陽) 중면(中面) 출신으로 1693년(숙종 19) 계유(癸酉)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무겸(武兼), 훈련판관(訓鍊判官)을 거쳐 중추부도사(中樞府都事)를 지냈다. [참고] 《承政院日記》
• 심관(沈鑧) 1708(숙종 34)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관(景寬)이다. 증조부는 수준(壽準), 할아버지는 유(瑜)이며, 아버지는 명열(命說)이다. 어머니는 백시경(白時慶)의 딸이다. 1746년(영조 22) 병인(丙寅)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774년(영조 50)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 심관지(沈灌之) 1834(순조 34) ~ 1899(광무 3) 1896년(건양 1) 경북 청송지역에서 참여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음력 1월 하순부터 3월 중순 청송의진이 편성될 때 권탁수(權鐸洙)·서효원(徐孝源)·이중성(李中性)·조성눌(趙性訥)·민성호(閔誠鎬) 등과 함께 종사원(從事員)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韓末義兵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광세(沈光世) 1577(선조 10) ~ 1624(인조 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현(德顯). 호는 휴옹(休翁)이다.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현손이며, 증조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 할아버지는 인겸(仁謙), 아버지는 현감(縣監) 엄(㤿)이고, 어머니는 좌찬성(左贊成)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형제로는 심희세(沈熙世)가 있다. 황신(黃愼)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01년(선조 34)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대교(待敎)에 승진하였고, 설서(設書)로 옮겨 무설(巫說)을 믿는 세자 광해군을 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로 물러났다. 1604년(선조 37) 전적(典籍)·감찰(監察)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해운판관(海運判官), 부안현감(扶安縣監) 등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 3) 정언(正言)에 이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나 파면되고, 이듬해 다시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지평(持平),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문학을 거쳐 교리(校理)로 있을 때 계축옥사(癸丑獄死)가 일어나자 무고를 입고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다시 교리(校理)에 임명되고,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 및 안변십책(安邊十策) 등을 건의하였으며, 응교(應敎)·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성묘하러 고향에 갔다가 피난한 왕의 행재소로 가던 중 부여에서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휴옹집(休翁集)》·《해동악부(海東樂府)》 등이 있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극명(沈克明) 1556(명종 11)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회(伯晦). 호는 취면(醉眠)이다.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의 현손으로, 증조부는 순도(順道), 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거원(巨源)이고, 아버지는 화(莞)이며, 어머니는 이출의 딸이다. 형제로는 심종명(沈宗明), 심언명(沈彦明)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583년(선조 16)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지낸 뒤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단천군수(端川郡守), 강화부사(江華府使), 해주목사(海州牧使), 의주부윤(義州府尹), 남원부사(南源府使), 중화부사(中和府使), 길주목사(吉州牧使), 회령부사(會寧府使) 등 주로 지방의 수령과 뒤에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그림·거문고·활쏘기·말타기 등에도 능하였다. 선조가 명하여 시·서·화 삼기(三奇)를 뽑을 때 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참고] 《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槿域書畵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금(沈錦) 1531(중종 26) ~ 1565(명종 2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미중(美仲)이다.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안인(安仁)이고, 할아버지는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낸 빈(濱)이고,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우참찬(左右參贊)과 판서(判書)를 역임한 광언(光彦)이다. 형제로는 심현(沈鉉), 심호(沈鎬), 심연(沈鍊)이 있다. 그는 품행이 단아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덕행과 학문이 뛰어났다. 또한 병가(兵家)의 학문에도 뛰어나서 문무를 겸전(兼全)하였다. 1555년(명종 10)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여러 내직을 거쳐 감찰(監察)이 되었다. 외직으로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나갔는데,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후에 양주(楊州)를 기반으로 명문거족을 이룬 심씨(沈氏) 가문의 번성은 주로 그의 직계비속에서 이루어졌다. 《청송세고(靑松世稿)》에 그의 사상적 표연함과 특출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시상(詩想)들이 남아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오남면 양지리에 있다. [참고] 《中宗實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심기원(沈器遠) ? ~ 1644(인조 2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수지(遂之). 아버지는 군수(郡守) 간(諫)이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문인이다. 유생으로 이귀(李貴) 등과 협력하여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특진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가 되어 난을 막았다. 1627년(인조 4) 정묘호란 때는 경기·충청·전라·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어 종사관(從事官) 이상급(李尙岌)·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세자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그 뒤 풍정연(豊呈宴)을 빨리 중지하고 분위사(奔慰使)를 보낼 것, 왕이 정전(正殿)에서 거처하는 것을 피할 것, 음악을 철폐할 것 등의 소를 올렸다. 1628년(인조 6)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1634년(인조 12)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승진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의 방어책임을 맡았고, 1642년(인조 20)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44년(인조 22) 좌의정(左議政)으로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지사(前知事) 이일원(李一元), 광주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 등과 모의하여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을 추대하려는 반란을 꾀하였다. 이 모의는 왕이 믿고 의지하는 장상(將相)을 먼저 없앤 뒤 거사하려고 잔치를 벌여 술이 취하게 한 뒤에 여러 재상들을 죽이려 한 것인데, 부하 황헌(黃瀗)·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에게 밀고함으로써 탄로되어 거사 전에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 《仁祖實錄》, 《國朝寶鑑》, 《燃藜室記述》, 《昭代紀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낙수(沈樂洙) 1739(영조 15) ~ 1799(정조 2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문(景文). 호는 일환재(一丸齋). 은파(恩坡)이다. 영의정(領議政) 지원(之源)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형운(亨雲), 어머니는 승지(承旨) 김고(金橰)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가정이 빈한하였으나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775년(영조 51) 문과신구제추전시(文科新舊製追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정조 초년에는 주로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심환지(沈煥之)를 김구주(金龜柱)의 당여로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고부재자관(告訃齎咨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90년(정조 14) 이후는 희천군수(熙川郡守), 제주목사(濟州牧使) 등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그의 언론이 과격하여 그를 아끼는 친구 서유린(徐有隣)의 뜻이었다고 한다. 1795년(정조 19)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파산(坡山)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그는 홍양호(洪良浩)·심이지(沈頤之)·홍낙순(洪樂舜)·이규경(李圭景)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심환지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그가 김구주와 함께 홍봉한(洪鳳漢)의 공격을 의리로 삼자 심환지와 결별하고 남·북당의 분열을 화의 근본이라 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심환지·김종수·유언호(兪彦鎬)를 맹렬히 공격함으로써 이른바 시파(時派) 언론의 선봉이 되었다. 이 때문에 신유사옥 때는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6년 후에 신원되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처가 홍봉한의 친우인 이사질(李思質)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그의 할머니의 할아버지인 최규서(崔奎瑞) 집안의 영향을 받아 탕평책을 적극 지지한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김창협(金昌協)의 문집을 보고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며 김양행(金亮行)·김원행(金元行)의 정치적 입장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인 권진응(權震應)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해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세도의 화근이라 보았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은파산고(恩坡散稿)》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시파의 입장에서 벽파(僻派)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전기를 남기고 있으며 그 본말의 기록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은파산고(恩坡散稿)》는 11권 9책 필사본으로 서문이나 발문(跋文)이 없어 출간된 경위나 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다. 권1에 부(賦) 1편, 가사(歌詞) 2편, 시(詩) 200수, 권2에 원론·태극도례(太極圖例)·태극도서(太極圖序)·삼교통변(三敎通辨) 각 1편, 책 3편, 경연강의(經筵講義), 권3에 소(疏) 22편, 차(箚) 1편, 장(狀) 7편, 교서(敎書) 6편, 불윤비답(不允批答) 1편, 응제제문(應製祭文) 7편, 전문 4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서(序) 9편, 기(記) 26편, 제발(題跋) 5편, 잠(箴) 2편, 찬 6편, 송(頌) 3편, 명(銘) 6편, 잡저(雜著) 17편, 잡지(雜誌) 11편, 권5에 지감록(志感錄) 4편, 수천지(守阡志) 5편, 묘지명(墓誌銘) 8편, 행장(行狀) 1편이 실려 있다. 또 권6에 술선지(述先志) 10편, 이후록(貽後錄) 5편, 제문(祭文) 23편, 애사(哀詞) 2편, 권7에 서(序) 53편, 혼서(婚書) 3편, 연행일승(燕行日乘), 권8에 열전(列傳) 2편, 권9에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연보(年譜), 권10·11에 정변록(定辨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사는 「사미인가(思美人歌)」·「사미감은가(思美感恩歌)」 등으로 유배중에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소는 사직에 관한 것이 많으며, 그 밖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올린 민사에 관한 소도 일부 들어 있다. 장은 천재로 인해 백성들이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부패한 관료들은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정치 체제의 모순과 지방 행정의 타락상을 비판한 글이다. 어록은 스승 권상하(權尙夏)의 언행을 기록한 「황강어록(黃江語錄)」이다. 「정변록」 또한 당쟁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로서, 춘추관에 재임할 때 직접 보고 들은 구체적인 사실들을 사서(史書)의 체재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참고] 《英祖實錄》, 《正祖實錄》, 《恩坡散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낙정(沈樂正) 1808(순조 8)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치돈(致敦)이다. 증조부는 사한(師漢), 할아버지는 찬진(纘鎭), 아버지는 윤영(允永)이며, 어머니는 이탁(李琢)의 딸이다. 한철인(韓喆人)의 딸과 박내함(朴來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68년(고종 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 심노숭(沈魯崇) 1762(영조 38) ~ 1837(헌종 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태등(泰登). 호는 몽산거사(夢山居士), 효전(孝田)이다. 할아버지는 형운(亨雲)이고, 아버지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역임한 통훈대부(通訓大夫) 낙수(樂洙)이다. 심낙수는 노론 시파로 벽파 공격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사질(李思質)의 차녀이고, 부인은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의술(李義述)의 딸이다. 형제로는 생원 심노암(沈魯巖)이 있다. 청송에서 출생했다. 심노숭은 1783 ∼ 1784년을 전후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1790년(정조 14)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몸이 몹시 허약하여 병에 시달렸으나 사대기서(四大奇書) 및 《서상기(西廂記)》 같은 중국 소설에도 탐닉하였고 부친의 임소를 왕래하면서 호색과 풍류를 일삼으면서 과거 공부와 시문 창작에 몰두하였다. 1797년(정조 21) 정민시(鄭民始)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801년(순조 1)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시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부친 심낙수는 관직이 추삭(追削)되었고, 심노숭도 ‘배치의리(背馳義理), 장해선류(戕害善類)’로 지목되어 1801년(순조 1) 2월에 경남 기장현(機張縣)으로 유배되었다. 1806년(순조 6)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승하를 시작으로 벽파정권이 무너지자 그도 해배되었다. 그는 이 6년의 유배기간 동안 38책의 《효전산고(孝田散稿)》를 지었다. 1809년(순조 9)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으나, 1811년(순조 11) 아우 상과 이듬해 모친상을 연달아 겪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학의 동반자였던 아우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어 이후 5년간 시작(詩作)을 폐하였다. 1815년(순조 15)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시작으로 논산현감(論山縣監), 천안군수(天安郡守), 광주판관(廣州判官), 임천군수(林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816년(순조 16) 논산현감으로 있을 때 연산현감(連山縣監)인 김려(金鑢)와 교유하면서 그의 야사 편찬에 크게 고무되어, 1821년(순조 21) 광주판관으로 있을 때 《대동패림(大東稗林)》의 편찬을 마쳤다. 그는 1825년(순조 25) 임천군수에서 파직된 후 파주에 우거하다 1837년(헌종 3) 1월 76세로 죽었다. 첫 번째 아내 이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으나 둘째 딸을 제외하고 모두 일찍 죽었고, 1792년(정조 16)에 아내마저 죽자, 1794년(정조 18)에 재취를 얻어 1811년(순조 11) 50세 때에 비로소 아들 심원신(沈遠愼)을 얻게 되었다. 심노숭은 홍지섭(洪志燮), 임이주(任履周), 서준보(徐俊輔), 강이천(姜彛天), 김조순(金祖淳), 김려(金鑢), 김노경(金魯敬), 김겸(金鎌), 김기서(金箕書), 강준흠(姜浚欽), 권비응(勸丕應), 김상휴(金相休), 조학은(趙學殷)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당시의 정치 실세인 노론이었으면서도 자당에 비판적 이야기를 서슴지 않았고 인조반정 후 계속된 벌열과 사림의 결탁, 정주학의 정치수단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였다. 심노숭은 《효전산고(孝田散稿)》, 《적선세가(積善世家)》를 지었으며 《단향연축(丹香聯軸)》, 《대동패림(大東稗林)》, 《지사록(志事錄)》, 《은파산고(恩坡散稿)》를 편찬하였고 《정변록(定辨錄)》을 산정(删定)하였다. 그의 문학론은 감정의 순화와 절제를 강조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표출을 제약하였던 성리학적 시문관에서 탈피하여 인간 개체의 다종다양하며 진실된 욕구와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을 시문의 본령으로 여겼다. 전범에 대한 지나친 추수(追隨)로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병폐를 보인 의고문(擬古文)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다소 속될지라도 진실성과 활기가 문학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그는 또한 시대적 금기인 패사소품을 비롯한 다양한 속문화(俗文化)들을 적극 옹호하면서 자신의 문학의 자양분으로 섭취하였다. 작가가 가지는 문학론이 반드시 그의 작품으로 전부 그대로 표출되는 것은 아닌데, 심노숭의 문학작품에서는 그 둘이 아주 밀착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참고] 《丹香聯軸》, 《司馬榜目》,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심노암(沈魯巖) 1766(영조 42)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태첨(泰詹). 호는 모전(茅田)이다. 영의정(領議政) 지원(之源)의 후손이고, 할아버지는 형운(亨雲), 아버지는 낙수(樂洙),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질(思質)의 딸이다. 형은 노숭(魯崇)이다. 형 노숭은 아내를 읽고 난 후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네 폭짜리 병풍을 만들어 평생 병풍을 마주하고 아내를 대하듯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아내를 생각하며 나무를 심는 등 아내의 죽음에 과도한 슬픔을 보였던 형에게 심노암은 형의 슬픔은 너무 과도한 것이라며 글쓰기를 줄이라고 권유하였다. 1795년(정조 19)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였다. 문장을 잘하였고 문집으로 《모전유고(茅田遺稿)》가 있다. [참고] 《朝鮮人名辭書》, 《茅田遺稿》, 《司馬榜目》
• 심능규(沈能奎) 1850(철종 1) ~ 1897(광무 1) 1896년(건양 1) 경북 청송지역에서 창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입진하여 음력 3월 17일 조성로(趙性魯)·조성원(趙性源)·민동호(閔東鎬)·조광규(趙光奎) 등과 함께 참모(參謀)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韓末義兵日記》
• 심능식(沈能栻) 1765(영조 41)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긍백(兢伯)이다. 증조부는 구현(龜賢), 할아버지는 도(鍍)이며, 아버지는 대지(大之)이다. 어머니는 조영직(趙榮稷)의 딸이다. 이제붕(李齊鵬)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01년(순조 1) 신유(辛酉)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1818년(순조 18)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3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文蔭譜》, 《國朝文科榜目》
• 심능장(沈能璋) 1855(철종 6) ~ 1903(광무 7)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심능장도 이때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척후장 및 소모장의 직임을 맡았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과 심능장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능찬(沈能璨) 1859(철종 10) ~ 1903(광무 7) 1896년(건양 1) 1월부터 4월 사이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심능찬은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1월 부친(父親)인 심성지(沈誠之) 의병장이 경북 청송에서 1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거의(擧義)하자 이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청송의진은 거의 후 동년 2월 조직을 갖추고, 4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7 ∼ 8명을 사살하는 등 경북 청송일대에서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감행하였다. 그는 의진의 군관(軍官)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동년 2월에는 남승철(南昇喆) 등과 함께 의병을 사칭하여 민폐를 끼치는 자들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단(沈檀) 1645(인조 23) ~ 1730(영조 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여(德輿). 호는 약현(藥峴), 추우당(追尤堂)이다. 청성백(靑城伯)의 후손이고, 평시령(平市令) 광면(光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예조참의(禮曹參議) 선도(善道)의 딸이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인 윤선도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662년(현종 3)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73년(현종 1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전적(典籍)을 거쳐, 1677년(숙종 3)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고 이조좌랑(吏曹佐郞), 숙녕현감(肅寧縣監), 교리(校理), 이조정랑(吏曹正郞), 검상(檢詳), 사인(舍人),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남인세력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쫓겨나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인하여 양덕에 유배되어 10년간 지내다가 1689년(숙종 15) 남인이 득세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풀려나 교리(校理), 부응교(副應敎), 수원부사(水源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유배생활의 경험을 백성편에서 진소(陳訴)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비(閔妃)가 쫓겨남에 박태보(朴泰輔) 등이 이를 반대하다가 참살을 당하자 비록 반대파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의 충성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 병조참판(兵曹參判), 도승지(都承旨),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는 장성현(長城縣)의 민전(民田)이 궁방전(宮房田)으로 빼앗기자 이를 상소하여 민전으로 환급시켰다. 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며, 이어서 대사간(大司諫)과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냈다. 1694년(숙종 20) 민비복위와 동시에 갑술옥사(甲戌獄事)를 통하여 남인세력이 모두 축출당할 때 파직당하고 이듬해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1699년(숙종 25)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으나 1701년(숙종 27) 민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자 그나마 명맥이 남아 있던 남인세력이 완전히 제거당할 때 같은 남인이던 민언량(閔彦良)의 무고를 입어 해남현에 유배되고, 1703년(숙종 29) 영해에 옮겼다가 1711년(숙종 34) 풀려났다. 그 뒤 1713년(숙종 39)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1720년(숙종 46)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에 이조판서(吏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면서 경종과 세제인 영조에게 우애하기를 항상 권장하였고, 당시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이 중심이 되어 환관 박상검(朴尙儉)을 매수하여 왕세제를 해치려 하였던 사건을 크게 비난한 바도 있다. 이어서 대사헌(大司憲),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세제우빈객(世弟右賓客)을 겸하면서 왕세제를 보도(輔導)하였다. 이어서 우참찬(右參贊),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영조 즉위 후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도총관(都摠管) 등을 역임하였으나 1728년(영조 4) 재집권한 노론의 탄핵으로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1729년(영조 5) 영조의 탕평책으로 풀려나 공조(工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급히 궁궐로 달려가서 안민(安民)하고 학리(虐吏)를 제거할 것, 제도(諸道)의 사조(私租)를 조사하여 군액(軍額)에 충당할 것, 주전(鑄錢)을 하지 말 것, 제궁가(諸宮家)와 각 관아가 침탈하는 법외사세(法外私稅)를 혁파할 것 등의 시무(時務)를 올렸다. 1730년(영조 6)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의 말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충신이라고 항상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시대가 당쟁이 심하던 때이고 남인이던 그의 외조부의 영향을 직접 받아 관직생활 57여 년 동안 당쟁의 파란을 많이 겪었다. [참고]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星湖文集》,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달원(沈達源) 1494(성종 25)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용(子容)이다. 증조부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 아버지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순문(順門)이며,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동생, 좌의정(左議政) 통원(通源)의 형이다. 금천현감(衿川縣監)을 지낸 형(泂)에게 입양되었고,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내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진 기원(器遠)의 4대조이다. 1517년(중종 12)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외방으로 귀양 갔다. 1522년(중종 17) 죄가 사면되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곧 체직되었다. 그 뒤 1530년(중종 25)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되었으나, 뇌물수수혐의로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한어(漢語), 이문(吏文)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해당 관청에서 강력히 추천하여 1533년(중종 28)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에 많은 공로를 세웠고, 이문 교육에 이바지하여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벼슬은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이르렀다. [참고] 《中宗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韓國系行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대(沈岱) 1546(명종 1) ~ 1592(선조 2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이다. 영의정(領議政) 온(溫)의 5대손이며, 미(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종(光宗)이고, 아버지는 경력(經歷) 의검(義儉)이며, 어머니는 우참찬(右參贊) 신광한(申光漢)의 딸이다. 최홍한(崔弘僩)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청송에서 출생했다. 유학(幼學)으로 1572년(선조 5) 임신(壬申)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정자(正字), 박사(博士), 수찬(修撰)을 지내고, 1584년(선조 17)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이때 동서의 붕당이 생기려 하자, 언관으로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으며, 이어서 사인(舍人),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으로서 근왕병 모집에 힘썼다. 그 공로로 왕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지(右部承旨)·좌부승지(左部承旨)를 지내며 승정원(承政院)에서 왕을 가까이에서 호종(扈從)하였다. 왜군의 기세가 심해지면서 선조를 호종하여,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수행하였다. 같은 해 9월 권징(權徵)의 후임으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서울 수복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도성민과 내응하며 삭녕(朔寧)에서 때를 기다리던 중 왜군의 야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왜군은 그의 수급(首級)을 참하여 서울 거리에 전시하였는데, 60일이 지나도 마치 산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 《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志》, 《韓國系行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대부(沈大孚) 1586(선조 19) ~ 1657(효종 8)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 범재(泛齋)이다. 할아버지는 영천군수(永川郡守) 의검(義儉),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대(岱)이며, 어머니는 전라감사(全羅監司) 최홍한(崔弘僩)의 딸이다. 형제로는 심대복(沈大復), 심대림(沈大臨), 심대이(沈大頤)가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1등(一等)으로 합격하여, 1623년(인조 1)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중림찰방(重林察訪)을 거쳐,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2년(인조 10)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고, 이듬해 관직에 있으면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사사(賜死)된 인성군(仁城君)의 세 아들이 절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것을 왕이 관용을 베풀어 방면하자 이에 찬성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반대파의 탄핵으로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좌천(左遷)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34년(인조 12)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는데,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여러 고을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자, 이들 대표와 횡포를 금하는 조약을 엄중히 체결하여 민폐방지에 공헌하였다. 뒤에 서로(西路)의 행정이 부패한 데 혐오를 느껴 한때 사직하였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이어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1638년(인조 16) 또다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삼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삼남도사(三南都事) 겸 진정사(賑政使)를 택정할 때 경상도사(慶尙都事)로 뽑혔으며, 이어서 수찬(修撰), 헌납(獻納),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다. 1643년(인조 21)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응교(應敎), 시강관(侍講官), 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죽자 유계(兪棨) 등과 조(祖)자의 묘호를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 갔다가 1657년(효종 8) 풀려났다. 이 해에 죽었는데, 사후 신원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참고]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돈(沈惇) 1569(선조 2) ~ 1646(인조 2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이다. 아버지는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이자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비)의 동생인 충익공호성공신2등(忠翼公扈聖功臣二等) 청림군(靑林君) 심충겸(沈忠謙)이다. 1593년(선조 26) 계사전주별시문과(癸巳全州別試文科)에 병과(丙科) 1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본명은 심열(沈悅)이었는데 1613년(광해군 5) 류영경(柳永慶)의 아들 류열(柳悅)이 계축옥사(癸丑獄死)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심돈(沈惇)으로 개명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유영경이 신원(伸寃)되자 복구명소(復舊名疏)를 내고 옛 이름을 되찾았다. 1614년(광해군 6) 안동부사(安東府使), 1615년(광해군 7) 경상감사(慶尙監司)를 거쳐 1616년(광해군 7) 선수도감제조(繕修都監提調)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시책문서사관(諡册文書寫官)으로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그해 또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고, 선수도감제조(繕修都監提調)로 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인경궁(仁慶宮) 공사를 맡아보아 초피(貂皮)와 모엄(帽掩) 1부씩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에는 보배진제주관(寶陪進題主官)으로 가자(加資)되었고, 1618년(광해군10) 정청(庭請)에 행동지(行同知)로서 참가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함경감사(咸鏡監司)가 되었는데, 이때 곰을 잡은 것까지 일일이 보고하여 양사(兩司)의 비난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는데, 세가명경(世家名卿)으로 시세에 아부하여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가 되었다고 비난하는 사론(士論)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하여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바꾸어 나갔다. 심돈은 인조정권에서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전후한 시기까지 상당기간 호조판서(戶曹判書)로 활동하면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청나라가 요구하는 공물 등을 마련하는데 수완을 발휘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등을 두루 거치고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지만 일생동안 폐모정청(廢母聽政)에 참여했던 전력의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사후 종증손(從曾孫) 조원기(趙遠期)가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임의백(任義佰)의 발문(跋文)을 받아 《남파집(南坡集)》을 간행하였다. 《남파집(南坡集)》을 살펴보면, 서문은 없고 권말에 임의백(任義伯)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詩) 183수, 권2에 소(疏) 32편, 권3·4에 차(箚) 77편, 권5에 전(箋) 4편, 서장(書狀) 12편, 권6은 계사(啓辭) 1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전반적으로 심오(深奧)전아(典雅)하면서 호방하고 활달한 작품이 많다. 소는 주로 사직에 관한 소로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지 못하고 묵종했으므로 그 책임을 느낀다는 것과 대간의 탄핵에 대한 것이다. 차 중 「호조판서시차(戶曹判書時箚)」에서는 은을 빌려 쓰고 갚아야 할 대금을 절용한 인삼으로 충당할 것, 가뭄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 청나라 사신의 대접을 절약하여 효과적으로 할 것, 대마도와 소 무역을 그만둘 것, 염철사(鹽鐵使)를 보내지 말 것 등을 건의하였다. 「여좌상연명차(與左相聯名箚)」에서는 청나라가 국혼을 요청해오면 곤란하니 사전에 인조의 계비를 책봉하여 가례(嘉禮)를 올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참고] 《光海君日記》, 《南坡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동구(沈東龜) 1594(선조 27) ~ 1660(현종 1)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문징(文徵). 호는 청봉(晴峰)이다. 개국공신 덕부(德符)의 후손이며, 첨정(僉正) 자(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牧使) 우정(友正)이고, 아버지는 판서(判書) 집(蓀)이며, 어머니는 직제학(直提學) 홍종록(洪宗綠)의 딸이다. 김수렴(金守廉)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15년(광해군 7)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당대의 문신 이호민(李好閔)과 오억령(吳億齡)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인조초 집의(執義)로 재직할 때 소북(小北) 남이공(南以恭)이 청서(淸西)의 영수인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려 하자 남이공의 부당함을 상소하고 사직하여 4년간 고향에 은거하였다. 1641년(인조 19) 교리(校理)로 등용되어 종부시정(宗簿寺正),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언관재임 때에는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절의를 지켰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1644년(인조 22) 사간(司諫)에 올랐다가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옥사에 친척으로 연루, 장흥에 유배되었다. 여러 신하들의 신원이 있었으나 십여 년간 금고상태로 있다가 효종 초에 석방, 현종 때 신원되었다. 시종 서인의 입장에 섰으나 언론활동은 공정하였다. 시문을 좋아하여 그의 저서로는 《청봉집(晴峰集)》이 전하고 있다. 《청봉집(晴峰集)》을 살펴보면, 6권 2책, 목판본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서문(序文)을 썼다. 권1 ∼ 4에 시(詩) 605수, 만사(輓詞) 40수, 권5·6에 시 54수, 표전(表箋) 6편, 비답(批答) 3편, 교서(敎書)·부(賦)·송(頌)·명(銘)·찬(贊)·설(說)·소서(小敍)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각체를 터득한 것으로 분량도 많지만 작품도 고대의 아름다운 풍운을 가지고 있어 수작이 많다. 표인 「의당이백사소견금란전표(擬唐李白謝召見金棄殿表)」는 이백이 양귀비가 부르자 사양한 사실을 적은 글로 선비의 꿋꿋한 기백을 나타냈다. 교서의 「교충청감사정태화서(敎忠淸監司鄭太和書)」는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지방장관의 막중한 책임을 설명하고 백성을 무휼(撫恤)하여 생업에 안정할 수 있도록 정치에 힘쓰라고 효유한 글이다. 부채를 칭송한 「선창송(扇唱頌)」, 거울의 명인 「강심경명(江心鏡銘)」이 있다. 또, 「유여매쟁춘설(柳與梅爭春說)」은 봄이 되면 버드나무와 매화나무가 봄기운을 받으려고 앞을 다툰다는 것으로, 어떤 시기를 만나면 사람들이 부귀영달에 앞을 다투는 것을 비유한 글이다. 이 밖에도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김류(金瑬)·최명길(崔鳴吉)·이홍주(李弘胄)의 사직소에 대한 비답 등이 있다. [참고] 《仁祖實錄》, 《孝宗實錄》, 《吾灘集》,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동신(沈東臣) 1824(순조 24)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경(士敬)이다. 증조부는 치(㴛), 할아버지는 영석(英錫), 아버지는 문(雯)이며, 어머니는 홍명주(洪命周)의 딸이다. 1850년(철종 1)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관직에 올랐다. 1863년(철종 14)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며, 이듬해 승정원(承政院)의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1878년(고종 15) 전라좌도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로 제수되어 전라좌도 지방수령들의 시정을 규찰하여 왕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1879년(고종 16)에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된 부산항에 인접한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임명되었으며, 1880년(고종 17) 조선과의 통상을 맺기 위하여 내항한 미국함대에 관한 동정을 일본을 통하여 연락받아 조정에 보고하는 일을 맡아 처리하기도 하였다. 1882년(고종 19) 우승지(右承旨)를 지냈으며, 같은 해 7월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재임 시에는 청나라와 연접한 대청도(大靑島)의 설진문제, 청나라 상인들의 무단 항해문제 등을 조정에 보고하여 처리하였으며, 자연재해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황해도 상황을 상세히 조정에 보고하고 그 진휼(賑恤)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1885년(고종 22) 의금부사(義禁府使)로 재임하면서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청나라로 잡혀간 대원군의 송환문제를 김홍집(金弘集)·심순택(沈舜澤)·심이택(沈履澤)·김병시(金炳始) 등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다. 1888년(고종 25)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참고] 《日省錄》,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國朝文科榜目》, 《高宗時代史》 1 ∼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득원(沈得元) 1644(인조 22) ~ 1710(숙종 3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선장(善長)이다. 할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 연(演)이며, 아버지는 통훈대부전행호조좌랑(通訓大夫前行戶曹佐郞) 서견(瑞肩)이다. 형제로는 심윤원(沈胤元), 심삼원(沈三元), 심덕원(沈德元), 심홍원(沈弘元)이 있다. 권대재(權大載)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60년(현종 1)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문학으로 명성이 알려져 많은 문사가 교제를 청하였다. 1689년(숙종 15)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 사서(司書), 정언(正言) 등을 역임한 후 면천군수(沔川郡守)로 나갔다. 이때에 큰 흉년이 들자 사재로 기민(飢民)을 많이 구제하여 칭송이 있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에 관련되어 파직, 고향에 돌아와 작은 집을 지어 산의당(散宜堂)이라 이름하고 유유자적하며 학문에 전심하였다. 1706년(숙종 32) 조정에서 장령(掌令), 필선(弼善)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심령(沈苓) 1513(중종 8) ~ 1547(명종 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천로(天老). 호는 우청(雨晴)이다. 증조부는 순로(順路), 할아버지는 간(幹), 아버지는 현감(縣監) 종원(宗元)이며, 어머니는 정호(鄭灝)의 딸이다. 김극핍(金克愊)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534년(중종 29) 갑오(甲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1539년(중종 34)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 그 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설서(設書)·사서(史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인종의 교육을 맡아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1544년(중종 39) 인종이 즉위하자 정언(正言)에 발탁되어 국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가 제시한 의견은 거의 채택될 정도였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반대하다가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옥중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참고]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文科榜目》, 《乙巳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만집(沈萬緝)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휴징(休徵)이다. 할아버지는 세훈(世勳)이다. 경전에 널리 통달하였고, 저서로는 《해동야화(海東野話)》‧《청기세고(靑己世稿)》‧《석병산기(石屛山記)》가 전한다. 이가당(二可堂) 조상변(趙相抃)‧후암(厚庵) 권렴(權濂)과 교유하였다. 군자시정(軍資寺正)에 추증되었다. [참고] 《嶠南誌》
• 심명세(沈命世) 1587(선조 20) ~ 1632(인조 1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용(德用)이다.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현손이고, 할아버지는 참판(參判) 의겸(義謙), 아버지는 현감(縣監) 엄(㤿)이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던 중,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어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졌다.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등을 역임하고 공신으로 책록된 다음, 통정대부(通政大夫) 겸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곧 가선(嘉善)의 품계에 올라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환도한 뒤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계되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호위대장(扈衛隊長)을 겸하였다. 그 뒤 세자빈의 가례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석방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호위대장으로 강화에 호종하고, 환도한 뒤 내섬시제조(內贍寺提調)를 겸하고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갔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민겸(沈敏謙)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윤(士允). 호는 두암(杜菴)이다. 선(璿)의 5대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풍(灃)의 증손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군량조달에 힘썼고, 특히 수원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왜군을 격퇴하는 데에 공을 세워 전란이 끝나자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인조를 호종(扈從)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동궁(東宮)을 호종하였다. 전라도 옥과의 구암사(龜巖祠), 나주의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참고] 《宣祖實錄》, 《仁祖實錄》, 《湖南三綱錄》, 《韓國系行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벌(沈橃) 1645(인조 23) ~ 1711(숙종 3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군섭(君涉)이다. 증조부는 참판(參判) 우승(友勝), 할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액(詻), 아버지는 광사(光泗)이며, 어머니는 민환(閔桓)의 딸이다. 송지명(宋之明)·황유중(黃有中)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심장(沈樟), 심백(沈栢), 심상(沈相), 심숙(沈橚), 심방(沈枋), 심탱(沈樘)이 있다. 청송에서 출생하였다. 1675년(숙종 1)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생원(生員) 3등으로 양시에 합격하여, 1675년(숙종 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며, 1677년(숙종 3) 2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그는 남인으로서 같은 해 6월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유배 직후에 전개된 고묘(告廟)에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예(禮)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인을 일망타진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1679년(숙종 5) 1월 부제학(副提學) 이당규(李堂揆)가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할 때 이한명(李漢命)·윤의제(尹義濟) 등 1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같은 해 6월 도당(都堂)에서 홍문록을 작성할 때에도 역시 포함되었다. 이후 정계에서의 두드러진 활약상은 보이지 않다가, 1689년(숙종 15)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정계에 다시 등장하였다. 같은 해 2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된 이후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부응교(副應敎) 및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승지(承旨)를 거쳐 1691년(숙종 17) 7월 충청도관찰사(忠靑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승지를 거쳐 9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1694년(숙종 20)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그도 대사헌(大司憲) 이규령(李奎齡), 사간(司諫) 박세준(朴世儁) 등의 탄핵에 의하여 극변(極邊)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숙종 23) 3월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참고] 《肅宗實錄》, 《國朝文科榜目》, 《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봉원(沈逢源) 1497(연산군 3) ~ 1574(선조 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희용(希容). 호는 효창노인(曉窓老人)이다. 증조부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 할아버지는 원(湲), 아버지는 사인(舍人) 순문(順門)이며, 어머니는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과 좌의정(左議政) 통원(通源)의 동생이다. 김현조(金顯祖)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어려서는 악동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겼으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공부에 힘써 20세에 성균관(成均館)에서 학문을 익혔다. 1537년(중종 32)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겸하였다. 이듬해 탁영시(擢英試)에 병과(丙科)로 발탁되어 사과(司果)에 제수되었고,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이 되어 경연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억울하게 처단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진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의 편에 서서 대윤(大尹)의 거두인 류관(柳灌)·류인숙(柳仁淑) 등을 탄핵, 숙청하였다. 이어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왕의 측근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였다. 그 뒤 예조참의(禮曹參議),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다가 노환으로 사임하였다. 음률(音律)·의술(醫術)·서법(書法)에도 밝았다. [참고]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봉휘(沈鳳輝) 1666(현종 7)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상(汝翔)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양주진관병마첨절제사(通訓大夫楊州鎭管兵馬僉節制使) 한주(漢柱)이다. 1710년(숙종 36)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음직(蔭職)으로 1717년(숙종 43)에 공조정랑(工曹正郞), 1719년(숙종 45)에 고성군수(高城郡守), 1726년(영조 2)에 청송부사(靑松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 심사정(沈師正) 1707(숙종 33) ~ 1769(영조 4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묵선(墨禪)이다. 증조부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지원(之源), 할아버지는 익창(益昌), 아버지는 포도를 잘 그렸던 정주(廷胄)이다. 포도와 인물을 잘 그렸던 정유승(鄭維升)의 외손자로 친가와 외가가 서화를 잘하였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畵業)에 정진하였다. 사직(司直)으로 있던 원경하(元景夏)의 상소문에 의하면 1748년(영조 24) 삼성진전(三聖眞殿)의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祏)·윤덕희(尹德義)와 함께 화사(畵事)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생을 그림에 몰두했던 만큼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가 다룬 화제(畵題)도 여러 방면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히 산수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산수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18세기 화단에서 유행하였던 진경산수(眞景山水) 쪽보다 전통적인 중국 화풍에 관심이 컸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이인상(李麟祥)·강세황(姜世晃) 등과 함께 당시 화단에 남종화풍을 유행시키고 뿌리내리게 한 주역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회화는 여러 후배 화가들을 자극하였고, 최북(崔北)·이방운(李昉運)·이인문(李寅文) 등은 그의 영향이 엿보이는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그가 정선(鄭歚)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나 정선의 화풍과는 달리하고 있다. 심사정의 회화경향은 그의 화첩에 적은 강세황의 제발문(題跋文)대로 중국 명나라 오파(吳派)의 비조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배워 피마준법(披麻皴法)을 사용하였고,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 등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대부벽준(大斧劈皴)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화풍의 수용도 엿보이며, 특히 그의 아호를 현재(玄齋)라 한 것은 명나라 말기의 남종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아호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선배들의 화법을 다양하게 섭렵하고 남·북종화풍을 모두 수용하여 대륙적 면모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중국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신위(申緯)는 심사정이 옛 것을 따랐지만 자운(自運)이 모자란다는 혹평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와 묵법으로 자신의 개성 있는 회화세계에 도달하였다. 「금강산경도(金剛山景圖)」·「한양근경도(漢陽近景圖)」 등의 작품 및 「명경대」·「만폭동」 등 금강산그림과 서울주변을 그린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가 전하는데 화법은 각이 진 먹선, 부벽준 등 자신의 필법이 강하게 눈에 띄어 동국진경다운 맛은 적다. 또 그의 도석인물화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구사되었고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로서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 등은 능숙한 화경(畵境)을 느끼게 한다. 사군자 역시 사의(寫意)에 치우치고 대담한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대한 강세황의 화평(畵評)에 의하면 화훼초충을 가장 잘 하였고 영모·산수 순으로 잘 그렸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부드럽고 밝은 채색의 화훼초충과 영모화들이 전한다. [참고] 《英祖實錄》, 《槿域書畵徵》, 《朝鮮古蹟圖譜》卷14, 《韓國書畵人名辭書》, 《韓國繪畵大觀》, 《韓國繪畵―韓國名畵近五百年展圖錄―》, 《韓國美術全集》12―繪畵―, 《우리나라의 옛 그림》, 《韓國繪畵―國立中央博物館所藏未公開繪畵特別展―》, 《韓國繪畵史》, 《韓國繪畵》, 《沈玄齋와 沈石田의 山水畵》, 《朝鮮王朝 後期 繪畵의 新動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사주(沈師周) 1631(인조 9) ~ 1697(숙종 2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성욱(聖郁). 호는 한송재(寒松齋)이다. 증조부는 영의정(領議政) 지원(之源),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상의원첨정(通訓大夫行尙衣院僉正) 정협(廷恊)이며, 생부는 정기(廷琦)이다. 효종(孝宗)의 외증손이다. 형제로는 심사상(沈師尙), 심사증(沈師曾), 심사수(沈師洙)가 있다. 청송에서 출생했다. 권상하(權尙夏)의 제자로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 1679년(숙종 5) 49세에 음보(蔭補)로 의릉참봉(懿陵參奉)이 된 뒤 1723년(경종 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했으며,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호조좌랑(戶曹佐郞),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영덕현령(靈德縣令),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郞), 함흥판관(咸興判官), 배천군수, 전주부사(全州府使)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일찍이 영덕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전심전력으로 주진(賙賑)하여 수많은 백성을 구휼하고, 향약을 실시하여 법을 준수하고 착한 것을 따르도록 하였으며, 함흥판관(咸興判官)으로 있을 때는 관개사업을 실시하여 황폐한 밭을 개간하는 데 힘썼다. [참고] 《司馬榜目》, 《英祖實錄》, 《醇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상각(沈相恪) 1896(건양 1) ~ 196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삼(敬三). 호는 성산(星山)이다. 아버지는 의택(義澤)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천은(川隱) 심능창(沈能昌)과 칠회당(七悔堂) 심동택(沈東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구소(九韶) 김병연(金秉淵)을 스승으로 모셔 오랫동안 배웠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총명하였다. 만년(晩年)에 학단(學壇)을 지어 후진을 양성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학에 공이 크고 향당(鄕黨)의 모범이 되었다. 편모 슬하에서 힘을 기울여 정성을 다하니 향중(鄕中)의 사림(士林)들이 효자라고 일컬었다. 저서로는 《성산집(星山集)》, 《예빈록(藝鬢錄)》, 《수역(袖易)》 등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 심상광(沈相光) 1886(고종 23) ~ 196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순화(舜華). 호는 송정(松庭)이다. 할아버지는 의선(宜善), 아버지는 호택(琥澤)이다. 온릉참봉(溫陵參奉)‧정릉참봉(貞陵參奉)을 역임하고, 학문이 뛰어나 도산서원(陶山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고산서원(高山書院)의 원장(院長)을 지냈다. 전교(典校) 재임 시 대성전위패(大成殿位牌)를 복주(復主)하였고, 모성계(慕聖契)를 조직하여 지방유림에 추중을 받았다.청 송의 지지인 「청기지(靑己誌)」를 간행할 때 주관하였다. [참고] 《鶴天集》
• 심상만(沈相萬) 1846(헌종 12) ~ ?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증조부는 상규(象奎), 할아버지는 정우(正愚), 아버지는 성택(星澤)이며, 희순(熙淳)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홍한주(洪翰周)의 딸이다. 1872년(고종 9) 임신(壬申)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이듬해에는 김홍집(金弘集)·김영철(金永哲)·이희원(李喜元) 등과 함께 권무직인 한권(翰圈)에 나아갔다. 1875년(고종 12) 부사과(副司果)가 되어 그해 4월 시행된 문과의 3소시관(三所試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876년(고종 13)에는 김홍집·이교하(李敎夏)·오익영(吳益泳) 등과 함께 본관록(本館錄)과 도당록(都堂錄)을 거친 다음 1879년(고종 16)에는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제수되었다. 1884년(고종 21) 11월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며, 1890년(고종 27)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랐다. 1894년(고종 31)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에는 관서지방에 속한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서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농민운동으로 인하여 수령직에서 파출(罷黜)되었다가 뒤에 복직되기도 하였다. 1897년(광무 1) 2월 비서승겸장례(祕書丞兼掌禮)가 되고, 그해 3월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이 되었으며, 이어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됨과 동시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친 뒤에는 태복사장(太僕司長)을 거쳐 경모궁제조(景慕宮提調)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영희전제조(永禧殿提調)에 임명되었다. 1901년(광무 5)에는 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가 되고, 1907년(융희 1)에는 다시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가 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장례원소경(掌隷院少卿)과 홍릉제조(洪陵提調)를 지냈다. [참고]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國朝文科榜目》, 《高宗時代史》1 ∼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상찬(沈相瓚) 1856(철종 7)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보경(寶卿)이다. 희택(僖澤)의 아들로 훈택(勛澤)에게 입양되었다. 1880년(고종 17) 경진(庚辰)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1884·1885년 민종식(閔宗植)·김영적(金永迪) 등과 함께 한권(翰圈) 및 직각권(直閣圈)의 권무직을 거쳤다. 그해 4월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다. 1886년(고종 23)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이 되었고, 같은 해 6월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이 되어 세자의 교육에 힘썼다. 1887년(고종 24) 다시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재임되었으며, 그 해 9월 이조정랑(吏曹正郞)에 나아갔다. 같은 해 11월 통례원(通禮院)의 상례(相禮)가 되고, 1890년(고종 27)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어 문명을 높였다. 1894년(고종 31) 2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고, 1897년(광무 1) 시강원부첨사(侍講院副詹事)를 거쳐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에 임명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 다시 중추원(中樞院) 1등 의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高宗時代史》2 ∼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상한(沈相漢) 1837(헌종 3)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운일(雲一)이다. 증조부는 능렬(能烈), 할아버지는 의진(宜晉), 생부는 통훈대부행문경현감(通訓大夫行聞慶縣監) 유택(有澤)이며 통정대부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 승택(承澤)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신재순(申在順)의 딸이다. 형제로는 심상은(沈相殷)이 있다. 1855년(철종 6)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였다. 1861년(철종 12)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그해 9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弘文館校理), 병조정랑(兵曹正郞),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 1863년(철종 14)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그해 12월 장악정(掌樂正)을 거쳐 1867년(고종 4)에는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의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가 되었으며, 1871년(고종 8)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과 승정원부승지(承政院副承旨)를 지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있던 해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고, 이듬해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같은 해 10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직전인 1884년(고종 21) 7월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1885년(고종 22) 4월 외직인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된 뒤 6월 순천부사(順天府使), 10월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99년(광무 3)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고, 이어 칙임관(勅任官) 4등에 올랐다. 1901년(광무 5) 분비서승(分祕書丞)이 되었으며, 1905년(광무 9) 봉상사장(奉常司長)과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사직서제조(社稷署提調)가 되었다. 이어 칙임관(勅任官) 3등에 올랐다. 다시 1909년(융희 2) 정2품의 품계를 받고 사직서전사(社稷署典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참고] 《高宗實錄》, 《純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文科榜目》, 《大韓帝國官員履歷書》, 《高宗時代史》 1 ∼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성지(沈誠之) 1831(순조 31) ~ 1904(광무 8) 본관은 청송(靑松). 자가 사행(士行). 호가 소류(小流)이다. 할아버지는 증형조참판(贈刑曹參判) 덕유(德洧), 아버지는 증동지의금부사(贈同知義禁府事) 겸 돈영부사(敦寧府使)에 추증된 심단이며, 어머니는 남평문씨(南平文氏) 남석구(南錫龜)의 딸이고 계모 강릉김씨(江陵金氏)는 김제창(金濟昌)의 딸이다. 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 조승욱(趙升煜)의 딸로,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심능박(沈能珀)이고, 차남은 심능찬(沈能璨)이다. 차남은 심성지의 내종형(內從兄) 심강지(沈岡之)의 후사를 이었다. 심성지가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차남 심능찬은 군관(軍官)으로 참여하였다. 심성지는 1831년(순조 31) 청송 논수리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할아버지인 둔산(遯山) 심덕유(沈德洧)가 항상 기특히 여겼다. 11세에 족형(族兄) 장입국(蔣入國)에게 글을 배웠는데,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고 명확하게 알아, 당송(唐宋) 대가들의 서적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들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유년 시절 기골이 준수하고 머리가 총명하였다. 1848년(헌종 14) 부친의 명으로 둔와(遯窩) 류양흠(柳養欽)의 문하에서 《중용(中庸)》을 배우다가 ‘소덕천류’(小德川流)의 구절에서 소류(小流) 두 글자를 따서 호로 삼았다. 거처하는 곳을 소류정사(小流精舍)라고 이름 짓고, 장횡거(張橫渠)의 《동서명(東西銘)》과 주자(朱子)의 《거가요훈(居家要訓)》을 자리 오른쪽에 게시하여 두고, 아침 저녁으로 보면서 반성의 자료로 삼았다. 1854년(철종 5) 족숙(族叔) 심용(沈鎔)과 함께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방문하고 《송자전서(宋子全書)》와 《언행록(言行錄)》 등을 읽었는데, 이후로부터 행동과 언어 등 일용사에 있어서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1859년(철종 10) 계모 김씨의 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친모상과 똑같이 하였으며, 3년상을 치른 후 문을 닫고 학문에 열중하였는데 비록 명절이라도 일절 문밖에 나가지 않고 온 종일 학문에 열중했다. 이 무렵 여러 번 과시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1883년(고종 20)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해서 상을 치렀고, 또 무덤 근처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88년(고종 25) 학행이 알려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고, 1894년(고종 31)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승진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개관시(蓋棺時)에는 그 직함을 쓰도록 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강행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건양 1) 정월 29일 6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향중(鄕中)의 추대로 청송의병장을 수임 받았다. 청송 감은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광무황제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향리로 돌아왔다. 의병진을 해산한 후 경사(經史)로 자오(自娛)하며 제자와 더불어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백록동규(白鹿洞規) 및 남전향약(藍田鄕約) 등을 강(講)하였다. 1904년(광무 8) 음력 11월 13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심성지의 일대기는 거의 대부분 독서와 강학으로 일평생을 보냈는데, 스스로의 학문에 정진하는 가운데에도 문하들과 함께 도를 강하고 학문을 논하며 교분을 돈돈히 유지하였다. 강론을 마치면 항상 단정히 앉아 깊이 침잠(沈潛)하며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심성지의 대표적인 유작(遺作)으로는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서술한 「강병론(强兵論)」과 군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을 읊은 시 「영야음(營夜吟)」 등이 있으며, 선조들의 유적(遺蹟)을 수집하여 《세록(世祿)》 2책을 지었다. 또 후손들이 정리하여 발간한 시문집 《소류집(小流集)》이 있다. 《소류집》은 후손 심의경(沈宜敬)과 심동택(沈東澤) 등이 유문을 수습․정리하고,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과 류응목(柳膺睦)에게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받아 만들었다. 모두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07년(융희 1)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권1에 시(詩) 44수, 서(書) 30편, 권2에 잡저(雜著) 18편, 권3에 서(序) 3편, 기(記) 3편, 발(跋) 3편, 명(銘) 1편, 잠(箴) 1편, 상량문(上樑文) 3편, 격문(檄文) 2편, 뇌사(誄辭) 3편, 제문(祭文) 7편, 유사(遺事) 3편, 행장(行狀) 1편, 권4는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제문(祭文)·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행장(行狀)·유사(遺事)·부소류정운(附小流亭韻) 등이 실려 있다. 시에는 만시(挽詩)가 17수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류정운(小流亭韻)」은 태평스러운 때를 만나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내는 생활을 만족해 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신관조(申觀朝)·조병필(趙秉弼)·유응목·이진학(李鎭學)·남조옥(南朝玉) 등과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서(書)는 스승인 유양흠·남효원(南孝源)·서찬규(徐贊奎)·조병호(趙秉鎬) 등에게 보낸 것들로서, 《대학(大學)》·《중용(中庸)》 등 경전을 비롯해 학문을 논한 것이 많다. 잡저(雜著) 가운데 「조순상경의차록(趙巡相敬義箚錄)」은 조병호와 문답한 내용으로서 《대학(大學)》 서문(序文)과 《중용(中庸)》 서문(序文)의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수옹문답(山水翁問答)」은 성학(性學)·윤월(閏月)·천지수(天地數)·인물(人物) 등 주로 성리학 내지 역학(易學)에 관한 내용을 논한 것이다. 이 밖에 조선을 중국과 비교하여 소화(小華)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변별한 「소화변(小華辨)」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19세기 말엽 재야 지식인의 화이관(華夷觀)을 엿볼 수 있다. [참고] 《小流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손(沈遜) 1430(세종 12) ~ 1486(성종 1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겸(汝謙). 호는 월헌(月軒)이다. 악은(岳隱) 원부(元符)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태산(太山)이다. 청송에서 출생했다. 세종 때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였으며 단종 때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되었다.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세조 때 관직을 버리고 월명대(月明臺)에 돌아왔다. 저서로는 《월헌문집(月軒文集)》 전한다. [참고] 《嶠南誌》
• 심순경(沈順徑) 1462(세조 8) ~ 1542(중종 3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준(司遵)이다. 할아버지는 세조 때의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진 회(澮)이고, 아버지는 원(湲)이며, 형은 심순문(沈順門)이다. 심한(沈瀚)의 양자가 되었다. 1492년(성종 23)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벼슬과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동래현령(東萊縣令), 훈련첨정(訓練僉正) 겸 내승(內乘),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절충장군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으로 승진했으나 그 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조부가 부관참시 당하자 연좌되어 투옥되었다. 1506년(중종 1) 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진성대군(晋城大君: 중종)을 호위하고, 연산군을 강화 교동까지 압송하였다. 그 공으로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2등(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二等)에 책록되고 경상우도절제사(慶尙右道節制使)를 거쳐 1508년(중종 3)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511년(중종 6)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1512년(중종 7)에는 전라도(全羅道)·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와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521년(중종 16) 성절사(聖節使), 1526년(중종 22) 하정사(賀正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후 1527년(중종 23)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겸 훈련원사(訓鍊院事)가 되었다. 사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참고] 《燕山君日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순문(沈順門) 1465(세조 11) ~ 1504(연산군 1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지(敬之)이다. 영의정(領議政) 온(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이고, 아버지는 내자판관(內資判官) 원(湲)이며, 어머니는 부사정(副司正) 이의구(李義坵)의 딸이다. 신영석(申永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연원(連源)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학업에 뜻을 두지 않고 방황하였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여 엄히 훈계하고 교육하니,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어 열심히 학문을 닦게 되었다. 1486년(성종 17)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박사(博士)에 승진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부수찬(副修撰), 정언(正言), 부교리(副敎理), 지평(持平)을 거쳐, 1503년(연산군 9) 장령(掌令)에 올랐다. 이때 국왕 의복의 장단을 지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고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개령현(開寧縣)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여 연산군의 폐정을 자주 지적하였다. 중종 때에 복관되었다. [참고]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액(沈詻) 1571(선조 4) ~ 1654(효종 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경(重卿). 호는 학계(鶴溪)이다. 통례(通禮) 달원(達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 전(全)이고, 아버지는 우준(友俊)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박세형(朴世炯)의 딸이다. 참판(參判) 우승(友勝)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 1596년(선조 29)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듬해에 설서(說書)·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598년(선조 31)에 경성부판관(京城府判官)에 이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644년(인조 22)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1647년(인조 25) 형조(刑曹)·예조(禮曹)·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다. 1652년(효종 3)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해 노병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서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상소하여 군주의 치국지도와 군덕(君德)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듬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고 선조의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식물(食物)을 하사받았다. 1655년(효종 6) 군덕 수행을 위한 십무자(十無字)의 소를 올려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시호는 의헌(懿憲)이다. [참고] 《宣祖實錄》,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文科榜目》, 《白軒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연원(沈連源) 1491(성종 22) ~ 1558(명종 1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이다.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원(湲)이고, 아버지는 사인(舍人) 순문(順門)이다. 어머니는 감찰(監察)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형제로는 심달원(沈達源)이 있다. 김당(金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16년(중종 11) 병자(丙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22년(중종 17)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감찰(監察)과 공조(工曹)·예조(禮曹)·이조(吏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1526년(중종 21)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531년(중종 26) 검상(檢詳),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쳐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에 뽑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1533년(중종 28) 의주부사(義州府使)에 올랐다. 1537년(중종 32)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2년 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참의(兵曹參議),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대사성(大司成), 이듬해 특진관(特進官), 형조참판(刑曹參判), 1543년(중종 38)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다음해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이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진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명종 2) 좌참찬(左參贊),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찬성(右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좌찬성(左贊成)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뒤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551년(명종 6) 다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일처리에 세밀하였으며,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에 밝아서 혹 남의 질문을 받으면 직접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막힘없이 응대하였다. 일찍이 그가 탐라목사(耽羅牧使)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살펴 지도를 그려두었는데, 1555년(명종 10) 남해변에 많은 해구(海寇)가 침입하였을 때, 가장 요충 지역이던 탐라가 당시 그가 그려둔 지도에 의거하여 대응책을 세워 막아내자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한다.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참고]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온(沈溫) ? ~ 1418(세종 즉위년)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이다. 할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용(龍)이고, 아버지는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이다. 고려 때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왕조 창업에 참여하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1408년(태종 8) 그의 딸이 충녕군(忠寧君)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1411년(태종 11) 풍해도관찰사(豊海道觀察使)가 되어 백성을 침탈하고 병기 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박영우(朴英祐)를 파직시키고,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는 관기 확립에 힘썼다. 1414년(태종 14)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에 의하여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 사업에 이바지하였고, 이어서 호조판서(戶曹判書), 좌군총제(左軍摠制),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를 역임하였는데,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행동에 연루되어 대간에 의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吏曹判書)·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의 동생 정(泟)이 병조판서(兵曹判書) 박습(朴習)과 같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左議政) 박은(朴訔)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죽음에 임하여 유언으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 당부하니, 오랫동안 지켜졌다. [참고]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名臣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우승(沈友勝) 1551(명종 6) ~ 1602(선조 3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진(士進). 호는 만사(晩沙)이다. 증조부는 동(洞), 할아버지는 달원(達源),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전(銓)이며, 어머니는 이한(李翰)의 딸이다. 형제로는 심우선(沈友善), 심우준(沈友俊), 심우순(沈友醇)이 있다. 안용(安容)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573년(선조 6)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580년(선조 13) 경진(庚辰)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갔다. 1586년(선조 19) 감찰(監察)이 된 뒤 예조좌랑(禮曹佐郞)·호조좌랑(戶曹佐郞)과 경상·경기 양도의 도사(都事)를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하는 도중에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고 돌아와 승지(承旨), 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가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때 서울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의 행패가 심해지자 이를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에게 항의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다 파직되었다. 1600년(선조 33)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겸하였다. 죽은 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으로 추록되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참고] 《宣祖實錄》, 《亂中雜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응락(沈應洛) 1578(선조 11) ~ 1635(인조 1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술(伯述)이다. 증조는 추당(秋塘) 필윤(弼倫), 할아버지는 도곡(道谷) 학령(鶴齡)이며, 부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도산전투에서 순절한 충의위(忠義衛) 청(淸)이다. 장사랑(將仕郞) 훈도(訓導)를 지내고,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도산전투에 참가하였다가 부친이 순절하자 시신을 거두어 돌아와 장사지냈다. 부친의 저서인 《벽절유고(碧節遺稿)》에 수록되어 있는 「임진일기(壬辰日記)」는 임진왜란 중 의병 등의 활동 및 경상도지역의 전투상황을 심응락이 기록한 것으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 《靑己世稿》
• 심응렴(沈應濂) 1582(선조 15) ~ 1652(효종 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술(仲述)이다. 고조는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낸 손(遜), 증조는 추당(秋塘) 필윤(弼倫)이다. 할아버지는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지낸 학령(鶴齡)이고, 아버지는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임금이 벽절(碧節)이라 호를 내렸고 1597년(선조 30) 도산성(島山城)의 싸움에서 순절(殉節)한 충의위(忠義衛) 청(淸)이다. 경서(經書)의 뜻을 힘써 연구하고 후학(後學)을 교도(敎導)하여 음보(蔭補)로 인조 때에 옥과훈도(玉果訓導)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친명(親命)으로 큰형 응락(應洛)과 더불어 처음으로 청송군 파천면 덕천(德川)에 들어와 조모를 잘 섬기니 향당(鄕黨)이 효(孝)로써 칭송(稱頌)하였다. [참고] 「十二世祖將士郞玉果訓導靑松沈公諱應濂墓碣銘竝書」
• 심의봉(沈宜鳳) 1875(고종 12) ~ 1927 1896년(건양 1) 2월 경북 청송지역에서 편성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입진하여 활동하였다. 신임 안동관찰사로 임명된 이남규(李南珪)가 현지에 부임하게 되자, 음력 2월 18일 안동의진으로 가 함창 태봉전투의 전황 등을 파악하여 이를 청송 본진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韓末義兵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의식(沈宜植) 1860(철종 11) ~ 1937 1896년(건양 1) 2월 경북 청송지역에서 창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입진하여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청송의병이 결성되던 초기 단계에는 김송진(金崧鎭)과 함께 2인이 서기를 맡았고, 5월 이후에는 오세로(吳世魯)와 서효격(徐孝格)이 보강되어 4인이 서기를 맡았다. 청송의진의 활동 전말을 정리한 《적원일기(赤猿日記)》 가운데 4월 28일조부터 5월 13일조까지를 기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韓末義兵日記》, 《韓末義兵日記 해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의철(沈宜喆) 1869(고종 6) ~ 193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팔(景八)이다. 만집(萬緝)의 5세손이다. 관직은 동명왕릉참봉(東明王陵參奉)을 지냈다.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심의철도 이때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부서외방장(府西外防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심의철은 수 십 명의 군사를 소모하여 의진 확장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獨立有功者功勳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의택(沈義澤) 1862(철종 12) ~ 1910(융희 4)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심의택은 의진 확장과정에서 서기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건양 1) 4월 심성지의진은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의화(沈宜華) 1840(헌종 6) ~ 1921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성삼(聖三). 목(穆)의 후손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심의화도 이때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장재도청(掌財都廳)에 선임되어 군자금 모집등의 역할을 맡았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정주(沈廷胄) 1678(숙종 4) ~ 1750(영조 2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명중(明仲). 호는 죽창(竹窓) 또는 청부(靑鳧)이다. 증조부는 영의정(領議政) 지원(之源), 아버지는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낸 익창(益昌)이다. 사정(師正)의 아버지이고 사간(司諫)을 지낸 선비화가 정유점(鄭維漸)의 사위이다. 아버지가 과거부정사건과 역모에 가담한 죄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혀 출사(出仕)하지 못하였다. 현존하는 유작은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담백하고 깔끔하게 처리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산수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포도그림들이다. 그의 포도그림은 조선 중기에 이 분야의 대가였던 황집중(黃執中)과 이계호(李繼祜)의 화풍을 계승하면서 짜임새 있는 구도 아래 짙고 옅은 먹을 조화롭게 구사하여 이룩된 것이다. 《송천필담(松泉筆談)》에 “당시 류덕장(柳德章)의 묵죽과 더불어 그의 묵포도(墨葡萄)가 세상을 휩쓸었다.”고 하였듯이, 조선시대 후기 포도그림의 대표적 화가로 평가된다. 대표작으로 「묵포도도」가 있다. [참고] 《槿域書畵徵》, 《韓國繪畵大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종(沈悰) 본관은 청송(靑松). 할아버지는 용(龍)이고,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좌의정(左議政) 덕부(德符)이며, 태조의 차녀 경선공주(慶善公主)의 남편이다. 1398년(태조 7) 8월에 청원군(靑原君)으로 봉하여졌다가 그해 다시 청원후(靑原侯)로 개봉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청원군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이방원(李芳遠)이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 여말구신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을 도와 난을 성공시킨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또한 동복형제 사이에 일어난 방간과 방원의 싸움인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기 때문에 무사하였다. 그러나 1416년(태종 16) 전주에 유배중인 방간과 은밀히 사통하면서 선물을 받은 것이 탄로나 벼슬이 깎이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 [참고] 《太祖實錄》, 《太宗實錄》, 《韓國姓氏大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종명(沈宗明) 1559(명종 14)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회(公晦)이다.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이다. 선조(宣祖) 때 해남현감(海南縣監)을 지냈고,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재직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이때 선조(宣祖)의 피난 시에 특명(特命)으로 경기도 파주의 임진강(臨津江)을 수호하는 독전독운사(督戰督運使)로 임명되어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참고] 《癸未謁聖文武科榜目》, 《靑松沈氏世譜》
• 심종침(沈宗忱) 1553(명종 8) ~ 1614(광해군 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성(士誠)이다.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광언(光彦), 아버지는 감찰(監察) 금(錦)이며, 어머니는 민희열(閔希說)의 딸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뒤에 음서로 사섬시참봉(司贍寺參奉)이 되었다. 이어 명나라 장군을 위한 접대도감낭청(接待都監郎廳)이 되었으며, 능력이 차츰 인정되어 6품직인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에 승진하였다. 이어 외직으로 나아가 은진현감(恩津縣監)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옮겼다가 병으로 돌아와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에 서용된 뒤 익위(翊衛)로 승진하였다. 계속하여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한 뒤 임천군수(林川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시 여산군수(驪山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돌아와 궁궐도감(宮闕都監)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숙천부사(肅川府使)에 승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외직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황주에서 지병으로 객사하였다. [참고]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지택(沈之澤) 1597(선조 30) ~ 1634(인조 1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고(子固). 호는 누암(陋菴)이다. 대사헌(大司憲) 호(鎬)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군수(郡守) 혁(𠋈)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공부를 더 하였다. 성품이 과묵하고 정중하였으며, 항상 죽립을 쓰고 다녔다.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평소에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수사(手寫)하고 이에 따라 행동을 근엄히 하였다. 인조반정 뒤 아버지의 권고로 문과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뒤 과거를 단념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익혔으며, 8법(八法)에 통달하였다. [참고] 《國朝人物考》, 《號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진택(沈瑨澤) 1868(고종 5) ~ 1933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그는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 해 4월 2일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산하였다. 심진택은 청송의진에서 안동의진과의 연락 등을 맡아 활약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 심천윤(沈天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고조는 고려조 때 현달하여 문임랑(文林郞), 위위시승(衛尉寺丞),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을 지내고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진 홍부(洪孚)이다. 증조부는 합문지후(閤門祗侯)을 역임하고 산음(山陰: 山淸)의 석답촌(石畓村)에 은거하며, 가정(稼亭) 이곡(李穀)․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은 연(淵)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조선조에 이르러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봉된 용(龍)이며, 부친은 고려조에 전이판서(典理判書)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순절한 악은(岳隱) 원부(元符)이다. 심천윤은 당시 여러 번 조정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은 그를 충효로 포상하고 영동정(令同正)에 임명했다. 심천윤의 생애와 관직생활, 부인의 성씨는 누차에 걸친 병화(兵禍)로 인해 기록이 소실되어 상세하지 않다. 다만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당숙이고, 세종의 국구(國舅) 심온(沈溫)과 태조의 부마 심종(沈悰)의 사촌이며, 심덕부(沈德符)의 조카이다. [참고] 《嶠南誌》, 《靑己世稿》
• 심청(沈淸) 1554(명종 9) ~ 1597(선조 3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천일(千一). 호는 벽절(碧節) 또는 구송정(九松亭)이다. 아버지는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지낸 학령(鶴齡)이며, 어머니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상(李祥)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상을 당한 이후로는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청송군 덕리 집 뒤에 벽절정(碧節亭)을 지어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형도(趙亨道) 및 그의 동생 동도(東道)와 함께 화강(和江)에 나아가 서사동맹(誓死同盟)을 한 후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운(調運)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594년(선조 27)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그의 전공을 상주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되었으며, 주사산(朱砂山)에서 적병을 대파하였다. 1596년(선조 29) 다시 청송의 의병장으로 대구 팔공산에 들어가 경상도 각처의 의병장과 부시동맹(賦詩同盟)을 맺고 전투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나, 이듬해 12월 도산(島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 때 나이 44세였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기고 호(號)를 벽절(碧節)이라 내려주었다. 그로 인하여 정자의 이름이 벽절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경적(經籍)에 깊이 통하고 천문·역수(曆數)와 성리학에 정통했다. 저서로 《벽절일고(碧節逸稿)》가 있는데, 《청기세고(靑己世稿)》에 합편되어 있다. 《벽절일고(碧節逸稿)》의 「화강맹서(和江盟書)」는 1592년(선조 25) 11월 1일 조형도(趙亨道), 조동도(趙東道) 등과 함께 화강(和江)에서 죽음으로 왜적을 물리치자고 맹세한 내용의 글이다. 또 「임진일기(壬辰日記)」 큰아들 심응낙(沈應洛)이 임진왜란 중 의병 등의 활동 및 경상도지역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참고] 《靑己世稿》, 《碧節逸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충겸(沈忠謙) 1545(인종 1) ~ 1594(선조 2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직(公直). 호는 사양당(四養堂)이다.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이대(李薱)의 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서인의 영수인 의겸(義謙)의 아우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 明宗妃)의 동생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72년(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으로 등용된 뒤 호조(戶曹)·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으나 일찍이 그의 형인 의겸에 의해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지 못한 동인 김효원(金孝元)이 이조(吏曹)의 중요한 정랑(正郞) 자리가 척신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반대를 제기함으로써 그 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서당쟁이 더욱 심하여졌다. 그 뒤 지평(持平)·교리(校理)를 거쳐 1578년(선조 11)에 헌납(獻納)이 되고 이어서 첨정(僉正), 사예(司藝),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하였다. 1582년(선조 15)에 춘천부사(春川府使), 1588년(선조 21)에 여주목사(驪州牧使), 호조참의(戶曹參議), 병조참지(兵曹參知)를, 1590년(선조 23)에 대사간(大司諫),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이듬해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가 되어 선조를 호종(扈從)하였고, 세자 호위의 명을 받아 왜적방비에 힘썼다. 1593년(선조 26)에 호조(戶曹)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군량미 조달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특진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좌찬성(左贊成),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림군(靑林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 《사양당집(四養堂集)》이 있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태산(沈太山) 1413(태종 13) ~ 1435(세종 1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고(子高). 호는 농천(弄泉)이다. 증조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원부(元符)이고, 할아버지는 천윤(天潤), 아버지는 석촌(石村) 효상(孝尙)이다. 본래 산청(山淸) 출신이나 1433년(세종 15) 안동(安東)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음해에 청송(靑松)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영민하여 일찍 일가를 이루었다. 18세에 문음(門蔭)으로 부사과(副司果)에 올랐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행동이 단정하고 엄격하여 항상 말을 삼가고 심사숙고하였다. 숙부인 참판공(參判公)이 사는 곳 근처에 살았는데, 마을 앞에 맑은 샘과 샘 근처의 평평하고 넓은 석대(石臺)에서 노닐며 농천(弄川)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방문하여 함께 지은 시가 있는데 불행히 불에 타 버렸다 한다. 매년 좋은 날과 때를 만나면 항상 뜻있는 이들과 함께 주왕산을 비롯한 안동의 명산을 두루 돌며 선조들이 남긴 흔적을 쫓아 추모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길 “선비는 산림(山林)의 흥취를 알고 난 후에야 속세에서 초탈할 수 있으리라.”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다른 일은 언급하지 않고 오직 선조들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걱정하니, 당시 사람들이 ‘하늘이 목숨을 연장시켜 주었다면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전란을 거치면서 남은 것이 오언율시와 오언절구 각 한 수가 유사(遺事)와 함께 《농천일고(弄泉逸稿)》에 전한다. [참고] 《靑己世稿》
• 심통원(沈通源) 1499(연산군 5) ~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勗齋)이다.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湲)이고, 아버지는 순문(順門)이며, 어머니는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영의정 연원(連源)의 동생이다. 덕림군(德林君) 이자(李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1519년(중종 14)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정유(丁酉) 별시(別試) 문과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고, 또한 1546년(명종 1)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부응교(副應敎)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直提學)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그 뒤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국방에도 관여하고 1548년(명종 3)에 우승지(右承旨)·좌승지(左承旨)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내고, 1550년(명종 5)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으며, 이어서 대사헌(大司憲),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같은 해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권력 남용과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삼사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 아부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필윤(沈弼倫) 1454(단종 2) ~ 1541(중종 3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열지(悅之). 호는 추당(秋塘)이다.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한 태산(太山)이며, 아버지는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낸 손(遜)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성품이 고매하였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곡하고 예를 행하는 것이 성인과 같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안으로는 노모(老母)를 모시고 밖으로는 손님을 접대함에 지극 정성으로 하였다. 동생과 종질(從姪)들이 모두 어려서 집안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자신 밖에 없어 글을 읽을 겨를이 없었지만 잠시도 경전과 사서를 떼어놓지 않았다. 저서로는 7언 절구시 「전가사(田家詞)」와 후손들에게 책을 읽고 보관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담은 「장서잠(藏書箴)」, 「유사(遺事)」를 실은 《추당일고(秋塘逸稿)》가 전한다. [참고] 《靑己世稿》
• 심학령(沈鶴齡) 1521(중종 16) ~ 1586(선조 1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연수(延壽). 호는 도곡(道谷)이다. 아버지는 필윤(弼倫)이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다. 1547년(명종 2) 독행(篤行)으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해 노수신(盧守愼)이 진도(珍島)에 유배되자 따라가서 수개월간 경의(經義)를 질문하고 돌아왔다. 저서로는 《도곡일고(道谷逸稿)》가 전한다. 청송 도치동에 심학령의 묘가 있다. [참고] 《嶠南誌》
• 심한(沈瀚) 1436(세종 18) ~ 1482(성종 13)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제옹(濟翁)이다.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온(溫)이고, 아버지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연지(金連枝)의 딸이다. 고모가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54년(단종 2) 문음으로 섭사정(攝司正)이 되었고 1459년(세조 5)에는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가 되었다. 그 뒤 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내자시정(內資寺正),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고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때 아버지도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5년(성종 6)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재직할 때 동부승지(同副承旨) 박시형(朴始亨)과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파직되었다가 같은 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복직되었다. 1476년(성종 7)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졌으며 1480년(성종 11)에는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었다. 시호는 이경(夷敬)이다. [참고] 《成宗實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호택(沈琥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계오(啓五). 호는 송소(松韶)이다. 손(遜)의 후손으로 범주(範周)의 증손이다. 석사(石舍) 류기호(柳基鎬)의 문인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밝았으며 문장이 정밀하고 간결하였다. 이기설(理氣說)을 연구하고 독실히 하여 《논어강의록(論語講義錄)》을 저술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를 지냈다. 현재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심호택이 살던 송소고택이 남아있다. 염재(恬齋) 류연구(柳淵龜)가 묘지명(墓誌銘)을 찬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 심확(沈鑊) 1605(선조 38) ~ 1681(숙종 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화(子和). 호는 금야(琴野)이다. 증조부는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지낸 학령(鶴齡), 할아버지는 청(淸)이다. 청송군 덕리에서 태어났다. 뜻이 곧고 행실이 독실하며 선대의 유훈을 복습(服習)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참고] 《嶠南誌》
• 심회(沈澮) 1418(태종 18) ~ 1493(성종 2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청보(淸甫)이다.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 용(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덕부(德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온(溫)이다. 어머니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세종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벼슬하기 시작하여 아버지 온은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랐으나, 1418년(태종 18)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태종을 비난한 사건에 관련되어 의주에서 체포되고, 이어 사사되었다. 이 때문에 세종 때에는 등용되지 못하다가 세종 말년에 아버지가 신원되자, 문종이 즉위한 뒤 음직(蔭職)으로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에 등용되었다. 이어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거쳐, 1454년(단종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고, 1457년(세조 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1458년(세조 4)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를 거쳐, 1459년(세조 5)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를 겸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1461년(세조 7)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1463년(세조 9)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고, 1466년(세조 12)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봉되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에 참여하고, 1473년(성종 4) 진충협보(盡忠夾輔)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성종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대소정사에 참여하였고, 1486년(성종 17)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의 모친인 윤비(尹妃)의 폐출사건에 동조하였다는 죄로 관직이 추탈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참고]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효상(沈孝尙)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석촌(石村)이다. 증조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봉된 용(龍), 할아버지는 고려 말 공양왕(恭讓王) 대에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순절(殉節)한 원부(元符)이다. 아버지는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천윤(天潤)이다. 심효상의 생몰년이나 관작(官爵), 덕행(德行), 사공(事功) 등은 전해지는 문헌이 없어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족보나 여러 읍지에 나오는 야사를 살펴보면, ‘공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임하여서는 매우 청렴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평소에 그는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경전과 사서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만 몰두하였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에도 가렴주구(苛斂誅求)에 힘쓰지 않고 오직 대의를 가지고 생활하였다. 동생 만우공(晩愚公)과는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저서로는 약간의 시와 4편의 명(銘), 그리고 행장(行狀)과 유사(遺事)가 담긴 《석촌일고(石村逸稿)》가 전한다. [참고] 《石村逸稿》
• 심흘(沈釳)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순(子純). 호는 효만(曉巒)이다. 할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청(淸)이다. 숙종 때에 성현찰방(省峴察訪)을 역임하였는데, 청정비(淸政碑)가 있다. 세교(世敎)가 해이해짐을 걱정하여 정덕조(鄭德祚), 조시민(趙時玟), 조시연(趙時衍)과 더불어 청송 부남에 병암서원(屛岩書院)을 창건하였다. [참고] 《嶠南誌》
• 심희수(沈喜壽) 1548(명종 3) ~ 1622(광해군 1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이다.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회(澮)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장령(掌令) 순문(順門), 할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봉원(逢源)이고, 아버지는 정자(正字) 건(鍵)이다. 어머니는 이연경(李延慶)의 딸이다. 노극신(盧克愼)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成均館)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선조 16)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89년(선조 22)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1년(선조 24)에는 응교(應敎)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고,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응접하니 그가 중국어를 잘하였기 때문이다. 이해 겨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선조 32)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고,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겸하고서 안으로는 사명(辭命)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접빈(接賓)에 힘썼다. 좌찬성(左贊成)·우찬성(右贊成)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6년(선조 39) 성균관(成均館)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는 불가함을 말하여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해 가을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입상(入相)하였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周易)》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광해군 12)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일송집(一松集)》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誌狀輯略》, 《燃藜室記述》,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