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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35 (2026.03.05. 17:25)

조선시대 5 (신)

 
• 신경선(申敬善)  1855(철종 6)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리(公理). 호는 경원(經園)이다.
• 신관조(申觀朝)  1827(순조 27)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용빈(用賓). 호는 열릉(冽陵)이다.
• 신광두(申光斗)  1620(광해군 12) ~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자첨(子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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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 (신)
 
 
신경선(申敬善)  1855(철종 6)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리(公理). 호는 경원(經園)이다. 상촌(象村) 흠(欽)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명현(明顯), 아버지는 열능(冽陵) 관조(觀朝)이다. 우조(羽朝)에게 양자로 갔다. 1890년(고종 27)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승지(承旨)를 지냈다. 대대로 청송에 살았으며 학문과 덕망이 있어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두산백과사전》
 
신관조(申觀朝)  1827(순조 27)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용빈(用賓). 호는 열릉(冽陵)이다. 상촌(象村) 흠(欽)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명현(明顯)이다. 형제로는 신우조(申羽朝)가 있다. 1865년(고종 2) 을축(乙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였다. 1894년(고종 31)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있으면서,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퇴관(退官)하여 청송에 살았다. 문학과 덕망이 고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당시 청송부사로 있던 신관조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영세불망비가 현재 청송향교 옆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신광두(申光斗)  1620(광해군 12) ~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자첨(子瞻)이다. 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 타(柁)이다. 형제로는 광철(光喆)·광석(光奭)·광복(光復)·광초(光楚)가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648년(인조 26)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태도가 단정하였다. 경서(經書)에 밝아 후진들을 가르쳤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신광리(申光履)  1727(영조 3)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수숙(綏叔)이다. 증조부는 구(銶), 할아버지는 사영(思永), 아버지는 통훈대부대구진관병마첨절제사(通訓大夫大丘鎭管兵馬僉節制使) 준(晙)이며, 어머니는 이경중(李慶重)의 딸이다. 형제로는 신광진(申光震), 신광복(申光復)이 있다. 이윤언(李胤彦)·민형수(閔亨洙)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50년(영조 26)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으로 합격하고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필선(弼善),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790년(정조 1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1796년(정조 20)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신도희(申道熙)  1834(순조 34)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학일(學一). 호는 농산(聾山)이다. 증조부는 병흠(秉欽), 할아버지는 명구(命求), 생부는 억(檍)이며, 백(栢)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딸이다. 1864년(고종 1)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 3)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1873년(고종 10)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877년(고종 14)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참고] 《高宗實錄》, 《國朝文科榜目》
 
신돌석(申乭石)  1878(고종 15) ~ 1908(융희 2)
본관은 평산(平山). 본명은 태호(泰浩). 자는 순경(舜卿). 이명은 돌석(乭錫)·태홍(泰洪)·태을(泰乙)·대호(大浩)로 ‘태백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렸다. 석주(錫柱)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영해지방은 1871년(고종 8)에 이필제(李弼濟)가 중심이 되어 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불태운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곳으로 봉건체제에 항거하는 기질이 강한 지방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반봉건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일제의 침략으로 강렬한 항일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건양 1)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의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재개되자 1906년(광무 10) 3월 13일 의병 100여명을 모아 그가 사는 마을에서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호를 내걸고 재차 기의하였다. 4월에 울진 장흥관(長興館)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의 병정들을 습복(慴伏)하게 하였다. 이어 삼척·강릉·양양·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또 그들의 전선가설을 방해하였다. 1907년(융희 1) 울진 매화당(梅花堂)에서 수동(壽洞)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모집,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원구(元邱)에 진을 쳤다. 이때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었는데 이를 공격하기 위하여 의병을 청부역(靑鳧驛)으로 진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민 3,000여명이 가세하자 주둔병은 영양의 주곡(注谷)으로 퇴각하였는데, 이를 추격하여 격전 끝에 물리쳤다. 이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흩어진 주민들을 위무하고,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어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청하(淸河)로부터 영덕의 조현(鳥峴)에 이르러 적과 싸워 이기고 소항(所項)을 지나 대동(大洞)에 이르렀다. 10월에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수동으로 돌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12월에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전국의 의병부대가 양주로 모여들었다. 이때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실천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호(鎭護)와 부서개편에서 신돌석부대는 제외되고 말았다.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대장은 양반·유생출신의 의병대장으로만 편성되고, 평민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을 비롯하여 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 등을 참여시키지 않아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부하 장병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로 되돌아와 1908년(융희 2) 1월에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2월에 영양읍에 진을 쳤다가, 3월에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쳐서 군세를 강화하여 춘양(春陽)·황지(黃池)·소봉동(小鳳洞)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4월에는 울진 도곡(道谷)에서 적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 7월에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희암(喜巖)에서 싸웠다. 10월에 안동 재산(才山)으로부터 영양 검정여점(黔丁旅店)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져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장병을 돌려보낸 후 눌곡(訥谷)의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하였는데, 이들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申將軍實記》, 《申義將傳》, 《독립운동사》 제1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3권, 《抗日義兵將列傳》, 《義兵抗爭史》, 《獨立有功者功勳錄》 제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신동호(申東鎬)  1842(헌종 8) ~ 1900(광무 4)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편성하였다. 신동호도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참모로서 의진좌목(義陣座目)을 만드는 등 조직의 골격을 갖추는데 기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신량(申湸)   1596(선조 29) ~ 1663(현종 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양지(埼之). 호는 호은(湖隱)이다. 가평군수(加平郡守) 여주(汝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벌(橃)이고, 아버지는 좌부승지(左部承旨) 응거(應渠)이며, 어머니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희문(希文)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조수륜(趙守倫)에게 학문을 닦고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고, 뒤에 우수운판관(右水運判官),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공조좌랑(工曹佐郞),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냈으며, 남포(藍浦)의 전사(田舍)에 우거하였다. 그 뒤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 금산군수(金山郡守),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으며, 1648년(인조 26) 태안군수(泰安郡守) 재직 시 남징문제(濫徵問題)로 사직하였다. 효종 때 군기시(軍器寺), 제용감(濟用監), 군자감(軍資監), 예빈시(禮賓寺)의 정(正)을 지냈다. 1654년(효종 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호은집(湖隱集)》이 있다.
[참고]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明齋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사영(申思永)  1670(현종 11) ~ 1736(영조 1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자구(子久). 호는 긍구재(肯構齋)이다. 유행(儒行) 벌(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생원(生員) 술(鉥)이며, 어머니는 조수한(趙壽漢)의 딸이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숙(李橚)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신사경(申思敬), 신사성(申思聖), 신사정(申思定)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교육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여 당숙인 죽오(竹塢) 해관(海觀)에게 배웠는데, 책을 받으면 글 뜻을 문득 깨우쳤고 스스로 힘쓸 곳을 알았다. 1699년(숙종 25) 기묘(己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선발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다. 1733년(영조 9)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있을 때 64세의 나이로 계축(癸丑)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해에 지평(持平), 1734년(영조 10) 장령(掌令)·헌납(獻納)·사간(司諫)을 지내고, 다음 해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공무를 집행할 때에는 거침없이 왕에게 직간하고, 사생활에서는 근검으로 일생을 지내 그 지조가 높았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신상익(申相翼)  1852(철종 3) ~ 1919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경보(敬輔). 호는 가천(可川)이다. 아버지는 종호(鍾浩)이다. 형제로는 신상의(申相儀)가 있다. 청송군 중평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 임오(壬午)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타고난 기품이 엄정하였으며 기량(器量)이 넓었다. 인간의 도리를 다한 후 학문을 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여 존경하였다. 1896년(건양 1) 주변 고을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진보향교에서 창의장 방산(舫山) 허훈(許薰)을 도와 창의하여 신상익은 부장으로 의진의 업무와 전략을 주도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청송의 독립운동사》
 
신언(申漹)   1530(중종 25) ~ 1598(선조 31)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언호(彦浩). 호는 고산(高山)이다.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권(眷)이며, 아버지는 물촌(勿村) 종위(從渭)로 효행지축산군사(孝行知丑山郡事)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기(朴琦)의 딸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진보 합강에서 출생했다. 삼읍(三邑)의 교수(敎授)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제수 받았으나 노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아들 지명(智男)에게 명하여 곽재우(郭再祐)에게 가서 군무를 돕게 하였다.
[참고] 《蘆洲集》, 《朝鮮寰輿勝覽》
 
신연(申演)   1534(중종 29) ~ 1595(선조 28)
본관은 영해(寧海). 자가 중호(仲浩). 호가 우헌(寓軒)이다.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권(眷)이며, 아버지는 물촌(勿村) 종위(從渭)로 효행지축산군사(孝行知丑山郡事)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기(朴琦)의 딸이다. 형제로는 신언(申漹)이 있다. 부인은 청송 안덕의 부호(富戶)인 전성이씨(全城李氏) 생원(生員) 이훈(李薰)의 무남독녀이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주부(主簿) 신경남(申慶男)이다. 신연은 진보 합강에서 출생하였다. 4, 5세에 조부와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8, 9세에 이미 《대학(大學)》과 《맹자(孟子)》를 읽고 15세 전에 《중용(中庸)》을 읽는 등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였다. 신연(申演)은 어려서부터 형 신언(申漹)과 함께 조부와 부친에게서 글을 배웠고 1551년(명종 5)에 22세 때 형과 함께 도산서당(陶山書堂)에 입문(入門)하였다. 이때 인척간(姻戚間)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다섯 아들과 함께 수개월간 퇴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퇴계는 신연 형제의 학문과 모범된 행실을 보고 극찬하였다. 신연이 퇴계를 처음 뵙고 입문한 뒤 혼자 용수사(龍壽寺)에 들어가 공부하자, 퇴계는 아들 이준(李寯)에게 신연과 같이 절에 들어가라고 권유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묘갈명(墓碣銘)에서 “인성(人性)이 바르고 남을 돕는 일에는 성의를 다할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가정도 잘 다스렸다. 일생동안 정직을 신조로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선행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등, 평생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삶을 사신 분”이라고 신연을 평가하였다. 1567년~1572년에는 조강이(調講肄) 습독관(習讀官)으로 서울에 있으면서 집정관(執政官)으로서 이명(李蓂)과 민기성(閔箕成) 등과 같이 훈육사업(訓育事業)에 집사(執事)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러던 중 부모님의 병환(病患)이 걱정되어 사임 후 고향에 돌아왔다. 곧이어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거상(居喪) 중에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하자, 성실한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르는 가운데 영양실조에서 오는 습병(濕病)이 생겼다. 이 병으로 보행이 어려워지자 지팡이에 의지하면서까지 반드시 제사에 참여하여 소홀함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굶주려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신연은 자기 재산을 털어 대문 밖에 가마솥 여러 개를 걸어놓고 식량이 다할 때까지 백성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렇게 재산을 아끼지 않고 기민구제(饑民救濟)에 나서 난민들에게 많은 시혜(施惠)를 베풀었다. 후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우헌유사(寓軒遺事)》가 전해진다.
[참고] 《嶠南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신영이(申永貳)  1856(철종 7) ~ 1917
별명은 낙선(洛先)이다. 1906년(광무 10) 3월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당시 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의 집사(執事)가 되었다. 그해 4월 신돌석과 함께 60여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영양일대에서 군자금 280냥을 모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양군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양총 2자루와 한총(韓銃) 8자루를 탈취하였다. 그 뒤 의병진을 정비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08년(융희 2) 9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大邱地方法院判決文》,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신예남(申禮男)  1557(명종 12) ~ 1592(선조 25)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문길(文吉)이다. 고려 개국공신 태사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23세손이다. 현(賢)의 10세손이며, 할아버지는 물촌(勿村) 종위(從渭)로 효행지축산군사(孝行知丑山郡事)이다. 아버지는 고산(高山) 언(漹), 삼촌은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추증된 연(演)이다. 여주민씨 민사건(閔思謇)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신예남은 어릴 적부터 용모가 출중하고 재질이 뛰어났다.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에게 수학하였다. 처음에는 박승임(朴承任)·황준량(黃俊良) 등에게서 배웠고, 나중에는 그들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직접 찾아가 퇴계학의 정맥을 직접 이어받게 되었다. 1529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예남은 진보에서 충청북도 청주 오창(梧倉)으로 옮겨 살았다. 왜군이 오창으로 진격하였을 때 신예남은 왜적에게 사로 잡혔는데 이때 그는 왜군의 온갖 협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키다가 자결하였다. 그의 모습을 본 왜적들도 감복하여 그를 ‘참된 의사’(眞義士)라고 추모하였다. 신예남의 부인 여흥민씨 또한 남편이 왜적에게 포로가 된 사실을 알고 왜적에게 뛰어들어 항거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선조(宣祖)가 포상(褒賞)하여 참판(參判)에 제수하였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과 청주(淸州) 《영해읍지(寧海邑誌)》에 이 사실이 기재되었다. 진보 서강사(西江祠)에 배향되었다.
[참고] 《黔澗集》, 《肅齋集》,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신의호(申義浩)  1839(헌종 5) ~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맹집(孟執). 호는 만산(晩山)이다. 할아버지는 치구(致龜), 아버지는 경흠(景欽)이며, 생부(生父)는 진흠(進欽)이다. 형제로는 신형호(申亨浩), 신응호(申膺浩)가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870년(고종 7)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문학으로 향당에서 칭송을 받았다.
[참고] 《司馬榜目》
 
신익한(申翊漢)  1838(헌종 4) ~ 1906(광무 10)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신익한은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종사(從事)로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신종위(申從渭)
본관은 평산(平山). 문정공(文正公) 현(賢)의 후손이다. 퇴계의 문도인 언(漹)과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추증된 연(演)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여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도(道)에서 효행안(孝行案)에 기록되고 축산군(丑山郡)의 지수(知守)였다가 벼슬을 일찍이 그만두고 늘그막에 통정대부효행지축산군사(通政大夫孝行知丑山郡事)에 올랐다. 후에 진보 서강사(西江祠)에 철향(腏享)되었다.
[참고] 《嶠南誌》, 《曉庵集》
 
신종호(申鍾浩)  1827(순조 27) ~ 1906(광무 10)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달원(達元). 호는 사은(泗隱)이다. 서벽정(棲碧亭) 치구(致龜)의 후손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신필흠(申弼欽)‧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김흥락(金興洛)·허훈(許薰)·신익호(申翼浩) 등과 교유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경학으로 칭송을 받았고, 저서로는 《사은집(泗隱集)》 4권이 전한다. 교리(校理) 이만규(李晩煃)가 묘갈명(墓碣銘)을 찬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신주백(申周伯)  1632(인조 10) ~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중경(重卿)이다. 아버지는 익(榏)이다. 형제로는 신주한(申周翰)이 있다. 1662년(현종 3)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읽음에 한번 보고 쉽게 암송하였으며 다방면에 학식과 견문이 넓어 인근에서 귀하게 여겨 받들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신지(申祉)   1424(세종 6) ~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독경(篤慶). 호는 풍호정(風乎亭)이다. 증조부는 덕청(德淸)으로, 공민왕 때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낸 인물이고, 할아버지는 예(藝)로 고려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아버지는 연남재(戀南齋) 영석(永錫)으로 교도관(敎導官)을 지냈다. 신지는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합강동(合江洞)에 이사하여 입향시조(入鄕始祖)가 되었다. 어머니는 감무(監務)를 지낸 원주이씨(原州李氏) 이조(李稠)의 딸이다. 신지는 어릴 적부터 풍채(風采)가 늠늠하고 재기가 비범하였다.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文集)과 시서(詩書)를 익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친척 및 인근 어른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조부를 따라 진보(眞寶)에 왔다가, 부친과 모친이 하루 사이에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상을 맞음에 성의를 다하여 예에 맞게 상을 치르고 3년 동안 피눈물로 시묘 살이를 하였다. 80세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당(祠堂)에 배읍(拜泣)하고 언제나 친히 술잔을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제전(祭田)을 많이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세조(世祖)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갈 뜻을 접고 초아에 묻혀 평소의 소신대로 살았다. 1463년(세조 9) 효행(孝行)과 청렴(淸廉)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학문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진보로 돌아와 합강(合江) 상류(上流)에 풍호정(風乎亭)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늙도록 서로 같이 즐겼으며, 여러 선비와 시와 술을 함께 나누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신지는 자손들에게 유계(遺戒)를 남겼다. 그 중에는, 과거를 위한 학문을 하지 말고 수양을 위한 학문을 할 것이며, 남에게 교활한 짓을 하지 말 것이며, 자기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단점만 책하지 말라는 등 매우 실천적인 항목이었다. 또 당시의 사대부들이 3대만 제사를 받들었으나, 신지는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설에 따라 4대 조상의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고조(高祖)까지 봉사(奉祀)하였다. 부인 오씨(吳氏)는 감사(監司) 오엄(吳儼)의 아들 현감(縣監) 오강(吳江)의 딸로, 정숙한 덕행(德行)이 있었다. 슬하에 아들 신창명(申昌命)을 두었는데, 그는 후에 군수(郡守)가 되었다. 신창명의 후손으로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신권(申眷)이 있고, 김성일(金誠一)의 조부인 김예범(金禮範)에게 출가(出嫁)한 딸이 있다. 사후 진보 서강사(西江祠)에 제향되었다. 현재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에 그가 지은 풍호정(風乎亭)이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嶺南人物考》, 《輿地圖書》,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신지남(申智男)  1559(명종 14) ~ 1635(인조 13)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명원(明遠). 호는 서봉(西峰)이다. 지(祉)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효행지축산군사(孝行知丑山郡事) 물촌(勿村) 종위(從渭), 아버지는 목사(牧使) 언(漹)이며, 형제로는 참판(參判) 예남(禮男)이 있다. 진보에서 태어났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으로 덕행과 절개가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맏형이 순절하자 비분한 나머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일찍이 퇴계서원(退溪書院)을 세우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규범을 따라 강회(講會)를 베풀며 많은 선비를 창도하였다. 사후에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증직받았다.
[참고] 《廣瀨集》, 《두산백과사전》
 
신진운(申晋運)  1849(헌종 15) ~ 192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시응(時應). 호는 만오(晩寤)이다. 아버지는 국준(國俊), 어머니는 인천채씨(仁川蔡氏) 사심(思沈)의 딸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총명하고,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종일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응대함이 자못 단정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선부군의 엄한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며, 문방구를 갖추지 못할 정도로 가세가 빈천하여 손수 방석을 짜면서도 잠시도 배움을 늦추지 않았다. 일찍이 율력(律曆)·상수(象數)·병농(兵農)·의약(醫藥) 등의 분야를 두루 섭렵하여 남공수(南公壽), 박영찬(朴英燦), 김광수(金光壽) 등은 그의 문학은 당대에 견줄만한 이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만년에 류치명(柳致明)을 찾아 수일동안 학문을 강론하고 의문을 교환하였으며, 수 차례 서한을 왕복하여 학문은 강마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만오유고(晩寤遺稿)》가 전한다.
[참고] 《晩寤遺稿》
 
신집(申楫)   1580(선조 13) ~ 1639(인조 17)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여섭(汝涉). 호는 하음(河陰)이다. 효행지축산군사(孝行知丑山郡事) 물촌(勿村) 종위(從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추증된 연(演)이며, 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경남(慶南)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다. 형제로는 신타(申柁), 신벌(申橃)이 있다. 김계(金繼)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조형도(趙亨道), 홍호(洪鎬) 등과 교유하였다. 신집은 어려서 총명하여 일찍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소학(小學)》과 《춘추(春秋)》를 독파했고, 9세에는 역사에 관한 시를 지어 세상의 치란득실(治亂得失)을 두루 서술하였다.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에게 수학하였다. 둘째 아우인 신타(申柁)와 이종형 정영방(鄭榮邦)과 더불어 공부를 하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되어 혼자 공부하면 고루하여 진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는 고응척(高應陟), 박성(朴惺)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후 율촌(栗村)으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옥성서당(玉成書堂)에 머물며 수업을 받았다. 이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찾아뵈었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에게도 자주 가르침을 받았다. 1604년(선조 37) 영남 유생들과 함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무고당한 것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선조는 상소를 보고 감격하여 직접 하답(下答)하고 특별히 전시(殿試)를 베풀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신집은 이때 급제하여 선발되었다. 1606년(선조 39)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한직인 전적(典籍)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에 저작랑(著作郞)을 제수 받았다. 1612년(광해군 4) 겨울에 전적(典籍)을 제수 받았으나,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獄事)와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물러나 함창(咸昌) 율리(栗里)에 은둔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모친상(母親喪)을 당했을 때 용궁(龍宮) 하풍(河豊)에서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구례현감(求禮縣監)에 제수되었고, 그 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원도사(江原道事)를 역임하였다. 정묘호란 때 북관(北關)에 가서 장만(張晩)과 정충신(鄭忠信)의 군영(軍營)에 군량을 조달하고, 이천(伊川)에서 흩어졌던 거주민을 피난시키고 위로하였다. 1628년(인조 6)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다가 겨울에는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겸직되었고, 영사원종(寧社原從) 일등 공훈이 내려졌다. 1630년(인조 8) 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나가 현의 많은 폐단을 시정하여 ‘백리 태고의 여러 고을에 모범을 보인 교훈’이라는 임금의 전지(傳旨)를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그는 의병을 규합하여 대항하려 하였으나 곧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한성서윤(漢城庶尹)을 제수 받고 곧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임명되었다. 1638년(인조 16) 성균사예(成均司藝)와 공주목사(公州牧使)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639년(인조 17) 사복시정(司僕侍正)이 되었다. 그 해 8월에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어 부임에 앞서 근친(勤親)하러 고향에 갔다가 9월 24일 향년 60세로 갑자기 서거하였다. 임종(臨終) 때 ‘국가에 조그만 은혜도 갚지 못하고, 부모님을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하였다. 상례(喪禮)와 복제(服制)에 관한 문목이 《우복집(愚伏集)》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하음집(河陰集)》 총9권 5책이 전한다. 저자의 유문(遺文)으로는 유고(遺稿)를 비롯하여 연람(燕覽), 공행록(公行錄), 잡술(雜述) 등과 아들 신광하(申光夏)가 지은 저자의 연보(年譜)가 남아 있다. 초간본은 남아있는 것이 적어 희귀하고, 1750년(영조 26) 7대손 신홍좌(申弘佐)가 중간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卷末)에 류치명(柳致明)과 신홍좌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 ∼ 4는 부(賦) 2편, 시(詩)·만사(輓詞) 709수, 소(疏) 1편, 권5는 서(書) 59편, 권6·7은 송(頌) 1편, 잡저(雜著) 9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영동염철전판불편장계(嶺東鹽鐵轉販不便狀啓)」에서는 영동지방은 길이 험하고 거리가 멀어서 소금과 철물을 판매함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여 운송수단을 강구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점마시진폐장(點馬時陳弊狀)」은 동래부사로서 역마와 군마를 사육하는 동래마장에서 말을 점고할 때 생기는 폐단을 지적하여 그 시정을 건의한 글이다. 「관향록(管餉錄)」은 1687년(숙종 13) 정묘호란 때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각 지방의 의병수, 군량의 수량 및 운반과정, 무기의 종류 등을 적고, 조정의 명령과 방백의 장계 등을 상세히 기재하였다.
[참고] 《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廣瀨集》, 《愚伏集》, 《尙州邑誌》, 《河陰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신치구(申致龜)  1777(정조 1) ~ 1851(철종 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낙문(洛文). 호는 서벽정(棲碧亭)이다. 참판(參判) 예남(禮男)의 8세손이며, 아버지는 숭열(崇烈),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중휴(重休)의 딸이다. 이우동(李宇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류휘문(柳徽文)·류치명(柳致明)·이병하(李秉夏) 등과 교유하였다. 위기(爲己)의 학문에 힘쓰면서 서벽정(棲碧亭)을 지어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현재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에 서벽고택(棲碧古宅)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서벽정유집(棲碧亭遺集)》이 전한다. 《서벽정유집(棲碧亭遺集)》은 석인본으로 1925년 현손 두희(斗熙)·상기(相箕)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김형모(金瀅模)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두희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23수, 서(書) 3편, 제문(祭文) 3편, 기(記) 2편, 발(跋) 1편, 권2는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 7수, 제문(祭文) 4편, 가장(家狀)·묘갈명(墓碣銘) 각 1편, 기(記) 3편, 서벽정시(棲碧亭詩) 82수, 중건기(重建記) 2편, 그 밖의 시 55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제재가 매우 다양하여 계절의 변화를 읊은 「원조(元朝)」와 「납설(臘雪)」, 여행 중 풍경의 변화를 읊은 「이평도중(梨坪途中)」, 학문을 권장한 「권학문(勸學文)」 등이 있고, 이 밖에 특이한 것으로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목가산(木假山)」과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석가산(石假山)」에서는 인간의 창조정신을 찬미하고 있다. 서 중 「여조학중(與趙學仲)」·「여이충립(與李忠立)」·「답유성백치명(答柳誠伯致明)」 등은 학자끼리 학문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것들이다. 「경서선고부군유계후(敬書先考府君遺戒後)」는 저자의 선친이 자손의 경계를 위해 남긴 10조목의 계사(戒詞)를 정리, 해설한 것이다.
[참고] 《棲碧亭遺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태휴(申泰休)  1870(고종 7) ~ 1931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담(景膽). 호는 회산(晦山)이다. 문정공(文貞公) 현(賢)의 후손이다. 1919년 3월 26일, 현서면(縣西面) 화목(和睦)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간절히 소망하던 차에,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으로부터 격문을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화목 장터에서 조현욱·조병국(趙炳國) 등과 함께 수 백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高等警察要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신필영(申弼永)  1806(순조 6) ~ ?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아버지는 치혁(致赫)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다. 문사와 효도로 이름이 나 향당의 추중을 받았다. 1835년(헌종 1) 을미(乙未)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신필호(申弼鎬)  1834(순조 34) ~ 1900(광무 4)
자는 은수(殷叟). 호는 만음(晩陰)이다.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신필호도 이때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백의종사(白衣從事)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신필흠(申弼欽)  1806(순조 6) ~ 1866(고종 3)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한(伯翰). 호는 천재(泉齋)이다. 둔파(遯坡) 지(祉)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치혁(致赫)이다.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의 문인이다. 청송에서 출생했다. 10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법도에 맞게 상을 치렀고, 한평생 경학에 침잠하여 유림의 중망을 받았다. 저서로는 《천재집(泉齋集)》 8권이 전한다. 《천재집(泉齋集)》은 목판본으로 1895년(고종 32) 문인 신종호(申鍾浩)·신익호(申翼浩)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권연하(權璉夏)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 허훈(許薰)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2에 시(詩) 332수, 권3·4에 서(書) 63편, 권5에 서(書) 9편, 잡저(雜著) 7편, 권6에 잡저(雜著) 4편, 서(序) 7편, 기(記) 9편, 권7에 발(跋) 6편, 명(銘) 1편, 상량문(上樑文) 5편, 축문(祝文) 4편, 뇌사(誄辭) 6편, 제문(祭文) 15편, 권8에 행록 3편, 광기(壙記) 2편,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제문(祭文)·행장(行狀)·묘갈(墓碣)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서는 대부분이 학문에 관한 문답인데, 「상호고와유선생(上好古窩柳先生)」·「답남이언(答南紛彦)」·「답이공선(答李公善)」의 문목(問目) 및 별지(別紙)는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있어서 특히 가치 있는 자료이다. 잡저(雜著) 역시 경학(經學)·성리학에 관한 글인데, 「대학서문보기궐략의변(大學序文補其闕略疑辨)」·「독정재격치설(讀定齋格致說)」·「독논어차록(讀論語箚錄)」·「맹자구방심장의의(孟子求放心章疑義)」·「심경강록차의(心經講錄箚疑)」·「예의차록(禮疑箚錄)」·「증남풍강관의변(曾南豊講官議辨)」·「오약산수록서변(吳藥山隨錄序辨)」·「의계설(義遽說)」 등이다. 또, 「대책(對策)」은 고을의 원을 대신하여 지은 삼정(三政)에 대한 대책문으로, 저자의 우국(憂國)·우민(憂民)의 근본사상을 살필 수 있다.
[참고] 《泉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해관(申海觀)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대원(大遠). 호는 송오(松塢)이다. 유행(儒行) 벌(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각(聖恪)이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의 문인이다. 1763년(영조 39) 계미(癸未)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였다. 청송 안덕면 복리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송오정(松塢亭)이라 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朝鮮寰輿勝覽》
 
신해망(申海望)  1747(영조 23) ~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명여(明汝). 호는 송려(松廬)이다. 벌(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렴(聖濂)이다. 동생은 해준(海準)이다. 청송에서 지내며 학문으로 향당의 추중을 받았고, 1795년(정조 19)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평소 학식이 뛰어나고 덕행이 고결하여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여 존경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신홍운(申弘運)  1809(순조 9) ~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치복(穉復)이다. 유행(儒行) 벌(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주(思周)이며, 형제로는 홍진(弘進)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825년(순조 25)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다. 급제한 지 60년 째 되던 해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서 필원(筆苑: 명필들의 이름을 모아서 적은 책)에 기록되었다.
[참고] 《司馬榜目》
 
신홍원(申弘遠)  1787(정조 11) ~ 1865(고종 2)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치형(穉亨). 호는 석주(石洲)이다. 하음(河陰) 집(輯)의 7세손이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사기(史記)》를 읽고 시작(詩作)에 능하였다. 류치명(柳致明)‧김대진(金岱鎭)‧이병하(李秉夏)‧이형수(李亨秀)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석주집(石洲集)》이 전한다. 《석주집(石洲集)》은 11권 5책, 석인본으로 1963년 증손인 상효(相孝)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1 ∼ 3에 부(賦) 2편, 시(詩) 381수, 권4·5는 소(疏) 1편, 정문(呈文) 5편, 서(書) 136편, 권6은 잡저(雜著) 29편, 잠(箴) 2편, 찬(贊) 2편, 명(銘) 7편, 권7·8은 서(序) 18편, 기(記) 21편, 지(識) 6편, 발(跋) 8편, 설(說) 5편, 권9·10은 고유문(告由文) 3편, 애사(哀詞) 10편, 뇌문(誄文) 6편, 제문(祭文) 18편, 묘지명(墓誌銘) 4편, 묘표(墓表) 3편, 광지(壙誌) 2편, 행장(行狀) 2편, 유사(遺事) 3편, 사략(事略) 1편, 권11은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유사(遺事)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雜著)의 「고금문평(古今文評)」은 중국의 고문(古文)으로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글을 시대 순으로 뽑아서 그 장단점을 설명하고 다른 글과 비교하면서 우열을 평론한 것이다. 설의 「숙흥야매설(夙興夜寐說)」에서는 천지의 동정(動靜)은 언제나 자·축(子丑)에서 시작하여 술·해(戌亥)에서 끝나기 때문에 그 날의 시작이 새벽에 있으니,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농사를 짓는 사람 모두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 날의 좋은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다고 하면서, 일찍 일어날 것을 강조했다. 「칠정잠(七情箴)」에서는 인(仁)·의(義)·예(禮)·지(智)는 성(性)이므로 원래 선(善)하고,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은 정(情)이 발하는 것이므로 절도에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또한 기질은 원래 청(淸)·탁(濁)·후(厚)·박(薄)의 다른 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자기가 증험해 본 결과 노(怒)와 욕(欲)을 제거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지적했다.
[참고] 《石洲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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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