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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34 (2026.03.05. 17:23)

조선시대 4 (박 ~ 송)

 
• 박규진(朴煃鎭)  1855(철종 6) ~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원여(元汝). 호는 창고(蒼皐)이다.
• 박규현(朴奎賢)  1793(정조 17) ~ ?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 박사한(朴師漢)  1677(숙종 3) ~ ?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계량(季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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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 (박 ~ 송)
 
 
박규진(朴煃鎭)  1855(철종 6) ~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원여(元汝). 호는 창고(蒼皐)이다. 청풍당(淸風堂) 영손(英孫)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야헌(野軒) 시한(時翰)이며, 울산(蔚山)에서 살았다. 그는 부친에게서 글을 배워 문사(文詞)가 일찍부터 성취되었으며, 김진룡(金震龍), 박시주(朴時澍), 박기진(朴箕鎭)과 함께 명망이 높았다. 당시 외세의 침략이 잦아지고 이에 호응하는 내적(內賊)이 있어 국가를 보전하기 어려운 조짐이 있었다. 그래서 은둔생활을 할 뜻으로 박시주와 함께 진보(眞寶)의 흥구(興邱)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매우 한적하여 현인이 은둔할 만한 곳으로 선산(善山)의 허훈(許薰)과 그의 아우 위(蔿) 및 영해(寧海)의 이수악(李壽岳), 안동(安東)의 김원식(金源植)이 이미 이곳에 임시거처를 마련하여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들과 더불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뒷날 그는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 나아가서 가르침을 얻었다. 족제(族弟) 상진(尙鎭)은 그의 문도로서 순국하였다. 유고로는 《창고집(蒼皐集)》 4권 2책이 있다.
[참고] 《蒼皐集》, 《拓菴先生文集附錄》
 
박규현(朴奎賢)  1793(정조 17) ~ ?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증조부는 순명(淳命), 할아버지는 성후(成垕)이며, 아버지는 수형(壽亨)이다. 어머니는 윤석복(尹錫復)의 딸이다. 1827(순조 27) 정해(丁亥)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859년(철종 10)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치적이 있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박사한(朴師漢)  1677(숙종 3) ~ ?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계량(季良)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全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선(銑)이다. 형제로는 박태한(朴泰漢), 박항한(朴恒漢)이 있다. 1714년(숙종 40) 갑오(甲午)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1등(一等)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1731년(영조 7)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청송부사로 있던 박사한의 치적을 기리는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운 청덕선정비가 현재 청송향교 옆에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박상범(朴尙範)  1855(철종 6) ~ 1913
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초명은 제원(悌源)이다. 문의공(文懿公) 항(恒)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진수(鎭壽)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기개와 도량이 청수하였다. 일찍이 말을 배우면서 능히 500여 자를 해독하였으며 8세에 문장을 지었다. 일찍이 백형 상덕(尙德)과 더불어 연구(聯句)로 부(賦)를 지었는데 ‘유한중견 월월무진(有閑中見月月無盡)’이라 하니 듣는 이마다 다 칭송했다. 1890년(고종 27) 경인(庚寅)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이 되어 공직에 있을 때 지론(持論)이 통명(通明)하여 왕으로부터 직분에 근면하고 학문과 지식을 출중하게 가르친다는 칭찬과 함께 여러 번 포상을 받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니, 병중에서도 소두(疏頭)로서 상소하여 반대하였다. 박상범의 유고(遺稿)를 살펴보면, 「행도한강(行到漢江)」·「매적(梅笛)」·「어부사(漁夫詞)」 등은 주위경관과 저자의 시감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疏)에는 일본과 수교를 반대하면서 일본의 간악한 행동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경계할 것을 주장한 「의척수신소(擬斥修信疏)」와 국방의 중요성을 진언한 「진계시의오조소(陳啓時宜五條疏)」 등이 있다. 이 밖에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시국의 형편과 국가의 장래를 논의한 「여곽면우(與郭冕宇)」와 시무에 대하여 건의한 「진소회소(陳所懷疏)」가 있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박성(朴惺)   1549(명종 4) ~ 1606(선조 39)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이다. 성림(成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監察) 순(純)이고, 아버지는 생원 사눌(思訥)이며, 어머니는 관찰사(觀察使) 김연(金緣)의 딸이다.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를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토사(招討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목(趙穆)과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에 들어갔다. 그 뒤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가 되었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전쟁 때는 명나라 군사를 접응하고 장정(壯丁)을 동원하여 군인에 충당하며 보급물자를 수송하고 병기를 수리하는 등 활동한 공적이 많았다. 뒤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잡자 벼슬을 사퇴하고, 청송(靑松)의 주왕산 아래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공조정랑(工曹正郞),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와 임천(林川)·영천(永川)·익산(益山) 등의 군수(郡守)·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청송부사(靑松府使) 등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심정기(誠心正己)의 학문이 아니면 읽지 않았다. 과거에 뜻을 버리고 공맹(孔孟)의 글을 읽었는데, 만년에 더욱 《논어(論語)》를 좋아하여 거처하는 집에 ‘학안재(學顔齋)’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동료(東寮)를 사물(四勿), 서료(西寮)를 박약(博約)이라 부르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이에게는 먼저 《소학》을 가르쳐서 사람이 되는 길을 깨닫게 하였다. 처음 정인홍(鄭仁弘)과 교유하여 사이가 좋았으나 정인홍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결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는데, 《남명집(南冥集)》의 발문(跋文)에서 이황(李滉)을 배척한 어구를 보고 “세상에 선정(先正)을 욕하는 군자를 본 일이 없다.”라 하고 절교하였다. 또한, 김성일의 참모가 되었을 때 적세가 사나워져서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보고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경상우도(慶尙右道)를 보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하려는가 하니, 김성일은 “봉강(封疆)의 책임을 맡은 신하는 봉강에서 죽을 뿐이다. 그대는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라.”라고 하였으나 끝내 떠나지 않았고, 김성일이 역질이 걸렸을 때 다른 막료들은 모두 피하였으나 그는 끝내 옆에서 간호하는 등 의리를 지켰다. 그의 교우는 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顒)·장현광(張顯光)·권호문(權好文) 등으로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저서로는 《대암집(大菴集)》이 있다. 《대암집(大菴集)》은 6권 4책으로 목판본이다. 1679년(숙종 5) 증손 세희(世熙)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卷頭)에 이원정(李元禎)의 서문(序文)이 있다. 권1에 시(詩) 130수, 권2에 제문(祭文) 10편, 잡저(雜著) 1편, 서(序) 1편, 통문(通文) 1편, 권3에 서(書) 64편, 묘지명(墓誌銘) 9편, 권4에 소(疏) 3편, 권5·6은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 1편, 만사 12수, 제문(祭文) 33편, 묘비명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 스승인 정구(鄭逑)를 비롯해 조목(趙穆)·조호익(曺好益) 등과 주고받은 서한은 주로 경전(經典)·훈고(訓鈐)에 대한 논술이 많다. 잡저(雜著)는 조식(曺植)과 이정(李楨)이 마을의 한 음부(淫婦)를 응징하려 했는데, 송사가 일어나자 이정이 처음과는 달리 음부를 옹호하였다. 이에 조식이 이정과 절교하였고, 조식의 문인 하항(河沆) 등이 유생들을 이끌고 가서 그 음부의 죄를 꾸짖어 쫓아낸 일에 대해 논평하고 있다. 통문 가운데 「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은 김성일(金誠一)의 막하(幕下)에 참모로 있을 때 대작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을 소집한 격문인데, 당시의 일이 소상하게 적혀 있어 의병을 일으켰던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소 가운데 「논시폐소(論時弊疏)」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난 해 선조에게 올린 소로, 명대의(明大義)·친정토(親征討)·용개과(勇改過)·휼민은(恤民隱)·택보부(擇保傅)·경대신(敬大臣)·선양장(選良將)·용현재(用賢才)·납간쟁(納諫諍)·정호오(正好惡)·포절의(褒節義)·숭염치(崇廉恥)·신상벌(信賞罰)·엄군법(嚴軍法)·확인서(擴仁恕)·생부비(省浮費) 등 당시의 폐해를 16조에 걸쳐 상세히 진술해 대책을 강구한 것으로, 모두 40장에 달하는 명문이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소(朴昭)   1347(충목왕 3) ~ 1426(세종 8)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할아버지는 문길(文吉)이며, 아버지는 함흥차사(咸興差使)로 유명한 박순(朴淳, ?~1402)이다.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전수받았다.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어 충신효제(忠信孝悌)를 좌표로 삼았다. 후에 사포리에서 초동면 검암리 모선동으로 이거하였는데, 이는 변춘당(卞春堂), 변춘정(卞春亭) 선생과 같은 마을에서 학문을 연마하기 위함이었다. 이곳에서 계(契)를 조직하여 춘추로 강회를 열어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를 요강으로 삼아 향풍(鄕風) 진흥에 힘썼는데, 이 계가 구령동안(龜令洞案)으로, 뒷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이 안에 의준하여 이름하기를 밀주향약(密州鄕約)이라 하였다. 태종 조에 생원에 합격하고 안음현감(安陰縣監) 재임 시에 백형 우당(憂堂) 융(融), 아당(啞堂) 조(調), 졸당(拙堂) 총(聰) 등과 함께 동헌에서 시를 읊고 화답하니 세인이 사우당(四友堂) 또는 사주당(四珠堂)이라 칭하였으며, 안음현감 때의 청백한 치적으로 안의읍 풍광루 부근에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가 세워졌다.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과 우당(憂堂)·인당(忍堂)·아당(啞堂)·졸당(拙堂), 즉 사당(四堂)의 학문과 선정과 청렴결백함이 지금도 회자(膾炙)되어 후인들의 삶에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1442년(세종 2)에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에 임명되었고, 1451년(문종 1)에는 봉상판사(奉常判事)에 제수(除授)되었다. 1454(단종 2)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그 이듬해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수기(朴遂基)
조선 영조 때 사람으로 10세의 나이에 양친을 여의고 일가의 양자로 갔으나 양부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난 후라 양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뒤에 양어머니마저 병들어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약을 구하여 돌아오니 웬일인지 집이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불길에 어느 누구도 병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뛰어들었으나 끝내 양어머니와 함께 타죽었다. 그 후 박씨 문중에서 1962년에 효행비와 비각을 세웠다. 은효각(隱孝閣)이 청송군 현서면 두현 2리에 있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박씨(朴氏)
본관은 밀양(密陽). 박씨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밀양박씨 상복(相福)의 딸로 17세에 평해황씨(平海黃氏)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시아버지가 병환으로 음식을 들지 못하자 자신의 젖을 짜서 목숨을 연명시킨 후 산속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시아버지의 병은 상엿집 대들보 밑의 큰 뱀을 잡아 봉양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자 그대로 하여 시아버지가 완쾌되었다. 뱀에 물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노인이 일러준 대로 남쪽 길가로 가보니, 이상한 풀이 있어 손에 붙였는데 홀연 상처가 완치되었다. 이웃 사람들이 박씨의 효성에 신이 감동했다 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상을 내리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현재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밀양박씨효부각(密陽朴氏孝婦閣)이 남아 있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박언필(朴彦弼)  1654(효종 5) ~ 1698(숙종 24)
본관은 춘천(春川). 자는 몽뢰(夢賚). 호는 도은(島隱)이다. 문의공(文懿公) 항(恒)의 후손이다. 벼슬은 첨지충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고 학문이 순정(純正)하였다. 명성과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사림에서 수계(修契)하고 후손들이 추모(追慕)하여 정자를 지었다. 저서로는 《초산대시계첩(招山臺詩楔帖)》이 전한다.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도(招仙島)의 기경(奇景)을 음미하여 자호(自號)를 도선(島仙)이라 했다.
[참고] 《英陽南氏世譜》
 
박연백(朴淵伯)  1869(고종 6) ~ 1909(융희 3)
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연백(淵白). 자는 응구(應九). 호는 암재(巖齋)이다. 광호(光鎬)의 아들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사방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규합, 공산(孔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광무 10) 7월 죽창과 나무막대기 등 낙후한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군과 접전하여 적 수 십 명을 도륙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의성·의흥·영천·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야간기습 및 화공의 수법으로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융희 1) 10월 영천 의병장 정관여(鄭寬汝)의진과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 입암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정관여가 전사하였다. 전세가 약화되어 후퇴하였으나 의병의 피해가 컸다. 그해 11월 25일 부하 100여명을 이끌고 일경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송정리와 의성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그러나 1908년(융희 2)에 이르러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의 전개로 효과적인 항일투쟁이 곤란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1909년(융희 3) 11월 이후 은둔생활을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독립운동사》 제1권,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제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박영산(朴榮山, 朴炳坤) 1887(고종 24) ~ 1931
수십 년 동안 향리에서 한학을 연구하다가 1909년(융희 3)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한족회(韓族會)에서 활동하였다. 한족회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한인자치기구이다. 이 단체에서는 재만동포들에 대한 자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보(三源堡) 시가에 본부인 중앙총부(中央總部)를 두고 그 최고 책임자로 이탁(李鐸)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서무사장 김종훈(金宗勳), 사판(査判)사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상무(商務)사장 김정제(金定濟),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내무사장 곽문(郭文), 검사감 최명수(崔明洙) 등을 두어 재만동포의 치안·재무·사법·행정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박영산이 활동한 한족회는 지방자치조직도 체계화하였다. 당시 한족회의 지방 조직은 유하현·통화현(通化縣)·흥경현(興京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임강현(臨江縣)·해룡현(海龍縣) 등지에 걸쳐 있었으며, 호수는 1만여 호에 달하였다. 이곳에 한족회에서는 동포 1천 호마다 1명의 천가장(千家長)을, 1백호마다 백가장(百家長)을,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씩을 두었다. 이러한 한족회의 자치조직은 1912년부터 조직되어 있었던 부민단(扶民團) 등의 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족회의 지방자치는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박영산은 군정서(軍政署)·정의부(正義府)·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11일 반석현(磐石縣)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제8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4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박이장(朴而章)  1547(명종 2) ~ 1622(광해군 14)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 또는 도천(道川)이다. 한하(漢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식(埴)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 양좌(良佐)이며, 어머니는 성산배씨(星山裵氏)로 별좌(別坐) 은(垠)의 딸이다. 형제로는 박이문(朴而文)이 있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는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으며, 1572년(선조 5) 사마시의 향시(鄕試)에, 이듬해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진사(進士) 1등으로 양시에 합격하였다. 1574년(선조 7)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 때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으로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1586년(선조 19) 병술(丙戌)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1591년(선조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 10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지제교(知製敎),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다음 해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직하였다. 1595년(선조 28) 이조정랑(吏曹正郞),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1599년(선조 32)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있을 때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 1601년(선조 34)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겸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동부승지(同副承旨),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당시 그는 류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탄핵하였다. 1603년(선조 36)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의 배척으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밀려났다가 이듬 해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그 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담집(龍潭集)》‧《정서절요(程書節要)》·《육경여해(六經蠡海)》가 전한다. 《용담집(龍潭集)》은 1901년 8대손 규환(奎煥)이 유문을 수집하여 간행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 1911년 9대손 윤현(允鉉)·인현(寅鉉)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정내석(鄭來錫)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 장석영(張錫英)과 후손 인현·윤현 등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부(賦) 4편, 시(詩) 101수, 권2에 시 165수, 권3에 교서(敎書) 1편, 소(疏) 2편, 차(箚) 2편, 계(啓) 5편, 연설(筵說) 3편, 책(策) 1편, 권4에 서(書) 11편, 서(序) 4편, 논(論) 3편, 제문(祭文) 3편, 행장(行狀) 1편, 권5 ∼ 7에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 증시(贈詩) 5수, 조천별장(朝天別章), 서(書), 만사(挽辭) 7편, 제문(祭文) 2편, 행장(行狀), 유사(遺事), 신도비명(神道碑銘), 묘지명(墓誌銘), 봉안문(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청증시상언(請贈諡上言), 부청시상언(復請諡上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1591년(선조 24)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에 갔다 오면서 여정과 감회를 읊은 시가 상당수 있다. 소에는 1594년(선조 27) 일본과 화의를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척호남백청화소(斥湖南伯請和疏)」, 광해군 때의 폐모론을 반박한 「만언소(萬言疏)」가 있다. 차는 사직하는 내용, 당시의 학풍을 비판하면서 성균관에 학제를 세울 것을 주장한 글 등이 있다. 책은 「의국책(醫國策)」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로잡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서(書)는 당대의 유명한 문신인 이원익(李元翼)·류영경(柳永慶)·정구(鄭逑)·남이공(南以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국정에 관한 내용이 많다. 서(序)에는 향음례에 관한 글이 있고, 논에는 상례에 대해 논한 글이 있다. 부록의 증시와 서는 노수신(盧守愼)·한준겸(韓浚謙)·정구(鄭逑) 등이 저자를 위해 지은 것들이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龍潭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제보(朴齊普)  1842(헌종 8) ~ ?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구(汝久)이다. 아버지는 현수(絢壽)이다. 1882(고종 19)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92년(고종 29)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박증수(朴曾壽)  1789(정조 13) ~ ?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희연(希延)이다. 증조부는 사임(師任), 할아버지는 난원(鸞源)이며 아버지는 상간(相簡)이다. 생부는 종직(宗稷)이다. 어머니는 권재(權縡)의 딸이고, 군수(郡守)를 지낸 이면충(李勉冲)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45년(헌종 1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3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박충국(朴忠國)
본관은 밀양(密陽). 아버지는 득춘(得春)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돈후하였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부모님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한 끼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병을 간호할 때는 잠도 자지 않았다. 엄동설한에 아버지가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여 박충국이 낚싯대를 들고 강가에 나갔는데, 강물은 모두 꽁꽁 얼어 낚시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충국은 애를 태우며 주자앉아 통곡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얼음이 깨지더니 물고기가 강 밖으로 뛰어나와서, 이것을 부모님에 요리해 드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박충국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 번은 부모님의 병환에 산꿩과 올빼미 기름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잡으러 다녔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올빼미가 스스로 집으로 날아 왔다. 박충국은 부친의 병간호를 하느라 너무 과로하여 때때로 기절하기도 했다. 부친이 박충국을 걱정하자, 박충국은 오히려 부친을 위로하며 말하길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저는 오직 자식된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효행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박충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91년(고종 28)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지금의 진보면 추현동에 효자각이 남아 있다.
[참고] 《永嘉孝行錄》, 《訂窩先生文集續集》, 《四孝子實錄》
 
배선한(裵善翰)  1883(고종 20) ~ 1961
1906년(광무 10)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침탈당하자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해 음력 3월 50여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다수의 무기를 빼앗았다.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융희 1) 부대를 재정비한 뒤 진보에서 기의하여 영양·평해·청송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1908년(융희 2) 6월 일본군에 잡혀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大邱地方裁判所 判決文》,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배연즙(裵淵楫)  1875(고종 12) ~ 1951
1905년(광무 9)에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이어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갔다. 배연즙은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이때 정용기(鄭鏞基)가 귀향하여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의진 구성을 진척시켜 가고 있었다. 정용기는 시종관으로 황제의 측근에서 종사하고 있던 정환직(鄭煥直)의 아들로서 부친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정요기 시켜 의거를 일으키게 하고 부친은 서울에서 지원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정용기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영남 일대의 크고 작은 모든 고을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대규모의 의진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영천·신녕·흥해·청하·기계·죽장·영덕·영해·영일·장기·진보·청송·영양·봉화·예안·안동·비안 등지를 포괄하는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배연즙은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박태종(朴泰宗)과 함께 비안(比安)·의성(宜城)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특히 의병을 소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곧 배연즙은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소모하여 무장시키고 정용기의 의진에 달려갔다. 1906년(광무 10)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깃발을 높이 들고 영천을 떠나 영해로 진출하여 신돌석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청하(淸河)로 진격하던 중 적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배연즙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산남의진유사》, 《독립운동사》 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배익신(裵益臣)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자겸(子謙)이다.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달성군(達城君) 운룡(雲龍)의 14세손이며, 한성부윤(漢城府尹) 저(著)의 장남(長男)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달천(達天)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후 1492년(성종 23) 임자(壬子)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 1위로 급제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編纂)하는 수찬관(修撰官)을 지냈으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역임(歷任)하는 동안 그의 청렴(淸廉)함이 널리 알려졌다. 1512년(중종 7)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5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슬하에는 진사(進士)를 지낸 장남(長男) 세령(世寧)과 사섬시(司贍寺) 별좌(別坐)를 지낸 차남(次男) 세량(世良)을 두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배희직(裵熙稷, 裵凞稷) 1868(고종 5) ~ 1942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때 배희직은 거액의 군자금을 의연(義捐)하여 의진편성을 도왔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이후 심성지의진은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백해운(白海運)  1804(순조 4) ~ 1879(광무 1)
본관은 대흥(大興). 자는 덕노(德老). 호는 지송헌(知松軒)이다. 증조부는 사익(思益), 할아버지는 태린(兌麟), 아버지는 거섬(居暹)이며, 어머니는 권태형(權泰衡)의 딸이다. 1831년(순조 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헌종(憲宗)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가 제수되었다. 그러나 붕당(朋黨)과 권간(權奸)을 싫어하여 영해(寧海)에서 청송(靑松) 이현(泥峴)으로 이거하여 종신토록 속세를 피하여 은둔하였다.
[참고] 《盈德郡誌》, 《國朝文科榜目》
 
변영청(邊永淸)  1516(중종 11) ~ 1580(선조 13)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개백(開伯). 호는 동호(東湖)이다. 영(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예(希乂)이고, 아버지는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광(廣)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철경(權哲經)의 딸이며, 형제로는 변용범(邊鎔範), 변석주(邊錫柱)가 있다. 변영청과 교유한 인물로는 류경심(柳景深), 장문보(張文輔), 노경린(盧景麟), 허충길(許忠吉), 이희검(李希儉), 심수경(沈守慶),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 권호문(權好文), 구봉령(具鳳齡) 등이 있다. 변영청은 이황의 문인으로 1546년(명종 1)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있으면서, “성학(聖學)을 밝히고, 언로(言路)를 넓히며, 기강을 세우고, 백성의 구실(세금, 부역 등)을 덜어야 한다.”고 상소하여 가납(嘉納)되었으며, 1551년(명종 6),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외척(外戚) 윤씨(尹氏) 등의 전횡(專橫)을 규탄하면서 권간(權奸)을 물리쳐야 한다는 격렬한 상소를 올림으로써 권신의 미움을 사 파직되어 귀향했다. 1553년(명종 8) 조정에서 낙척해 있는 선비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탁용하는데 천거되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복직되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옮겼다가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구해 의흥현감(義興縣監)에 부임했다. 의흥에서 어진 다스림으로 칭송이 있었으며 남원부사(南原府使)를 거쳐, 1557년(명종 12) 대구부사(大邱府使)에 부임했는데 이 때 경상도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함에 성력을 다했다. 1560년(명종 15)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옮겨, 매월 초하루마다 고을에서 수재를 뽑아 학업을 권장하는 한편, 부모 봉양을 잘하는 사람에겐 쌀과 고기를 지급하여 포상함으로써 면학(勉學)의 기풍과 효도를 장려하는 등 밝은 치적을 거두었다. 단아하면서 근엄한 성품으로 한결같이 청렴공직하여, 백성에게는 너그럽고 아전을 단속함에는 엄격했다. 1564년(명종 19), 임기를 채우고 청송을 떠날 때, 그 행차가 다만 말 한 필에 하인 한 사람 뿐이어서, 꼭 가난한 선비의 나들이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아전이나 백성들이 돈 3백 냥을 모아 바쳤으나 그는 굳이 물리치며 받지 않았다. 이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옮겼는데, 언론(言論)이 매양 이치에 맞으며, 논계(論啓)가 엄정하고 시원스러워, 임금이 좋은 말 한 필과 《의례(儀禮)》 한 질을 하사했다. 이윽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옮겼다가 1567년(명종 22), 노모(老母)를 위하여 사직하고 귀향하여 선비들과 도의를 강마하며 임천(林泉)에 소요자적(逍遙自適)했다. 1577년(선조 10),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퇴계 문하의 선배들과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1580년(선조 13)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저서로는 《동호문집(東湖文集)》이 전하며 이 문집은 그의 후손 정수(正銖) 등이 편집해 1860년(철종 11) 후손 주건(疇建)·용기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류치명(柳致明)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류후조(柳厚祚)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150여 수, 제문(祭文) 1편, 권2는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가장(家狀)·만사(輓詞)·반암유감(盤巖遺感)·병자계첩(丙子肋帖)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대부분이 시로서 주로 당시의 석학인 조목(趙穆)·류성룡(柳成龍)·조종도(趙宗道) 등의 시를 차운한 것이 많으며, 김극일(金克一)·박충원(朴忠元)·정인길(鄭仁吉)·구봉령(具鳳齡) 등 여러 저명인사들과 수창한 시가 상당수에 달한다. 또한 반구정(伴鷗亭)·광한루(廣寒樓)·영남루(嶺南樓) 등 정루를 소재로 한 서경시가 있고, 「문두견(聞杜鵑)」·「월야문적(月夜聞笛)」·「제유거(題幽居)」·「산거(山居)」·「탄국추(歎菊秋)」 등과 같이 은거 생활의 서정적 정취를 자아내는 작품도 있다. 시의 흐름이 담담하면서도 의사가 조리, 정연하고 골격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부록(附錄)의 「병자계첩」에는 1576년(선조 9) 당시의 동갑 계원이었던 수령급 관료와 학자 류경심(柳景深)·허충길(許忠吉)·심수경(沈守慶) 등 35명의 명단과 자·호·생년월일·계칙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또 발문(跋文)으로 계원들의 후손인 김응조(金應祖)·류덕조(柳德祚)·이현석(李玄錫)·홍여하(洪汝河) 등이 계첩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들어 있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東湖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 ~ 1488(성종 19)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익진(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미성(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김여회(金如晦)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趙須)·류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청송 주왕산의 대전사에 머물면서 수도를 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세종 29)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知製敎) 겸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세조 2) 집현전(集賢殿)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시문이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세조 3) 문과 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 우사간(右司諫)·지제교(知製敎)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세조 4)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工曹參議), 지제교(知製敎)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세조 6)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세조 1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세조 13) 형조판서(刑曹判書)로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균관지사(成均館知事)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성종 5)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左參贊)에 복배되었다. 1476년(성종 7)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 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했으며, 1477년(성종 8)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大提學)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성종 10)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성종 11)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성종 12)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1483년(성종 14)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되었다. 1485년(성종 16)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성종 17)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성종 18)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博士)가 되어 《논어》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했는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燃藜室記述》, 《海東雜錄》, 《大東奇聞》,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기윤(徐基潤)  1882(고종 19) ~ 1966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응초(應初). 호는 일산(一山)이다. 할아버지는 석간(石澗) 효원(孝源), 아버지는 석화(錫華)이다. 졸수재(拙修齋) 류정호(柳廷鎬)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經史) 및 제가(諸家)들의 서적을 두루 익혔다. 청송의 지지인 「청기지(靑己誌)」를 간행할 때 주관하였다. 저서로는 《일산집(一山集)》이 남아있다.
[참고] 《嶠南誌》
 
서문징(徐文徵)  1648(인조 26) ~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숙관(叔觀)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 정리(貞履)이다. 형제로는 서문상(徐文尙), 서문중(徐文重), 서문하(徐文夏), 서문유(徐文裕)가 있다. 1675년(숙종 1)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였다. 1702년(숙종 28)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4년 이상 고을을 다스렸다. 청송 월막리에 있는 찬경루(讚慶樓)를 중수하고 단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서봉(徐琫)   1598(선조 31) ~ 1663(현종 4)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덕윤(德潤). 호는 매헌(梅軒)이다. 송오(松塢) 윤(尹)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극명(克明)이다. 개호(開湖) 김시주(金是柱),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원계(猿溪) 류인배(柳仁培) 등과 함께 운천(雲川) 김용(金涌)에게 사사하였다. 1628년(인조 6) 예빈시참의(禮賓寺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고 의성에서 칩거하다가 만년에 고향인 청송으로 돌아갔다. 부인 아주신씨(鵝州申氏)와의 사이에 3남 5녀를 두었다. 문장에 능통하고 도량이 넓어 향리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사후에 현재 청송 부동면에 있는 덕양사(德陽祠)에 제향되었다.
[참고] 《禮賓寺參奉梅軒徐公行狀》
 
서석화(徐錫華)  1860(철종 11) ~ 1924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중온(仲蘊). 호는 청석(淸石)이다. 석간(石澗) 효원(孝源)의 아들이며, 청송 마평(馬坪)에 살았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유학의 규범에 뜻을 두고 경전과 《사기(史記)》 및 백가(百家)의 서적을 즐겨 읽었다. 주자서(朱子書), 퇴계학(退溪學)에 전심하면서 1889년(고종 26) 주방산사(周房山寺)에서 류정호(柳廷鎬)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친명(親命)으로 한성시(漢城試)에 뜻을 두었으나 난정(亂政)으로 단념하고 시문(詩文)과 저술에 힘썼다. 부친(父親)이 세운 부강서당(鳧江書堂)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고, 이상정(李象靖) 《약중편(約中篇)》, 김종덕(金宗德) 《성학정로(聖學正路)》, 류치명(柳致明) 《주서휘요(朱書彙要)》를 간행(刊行)하였다. 이승희(李承熙), 곽종석(郭鍾錫), 장석영(張錫英) 등과 서신을 왕래하였으며, 저서로는 《초학일용(初學日用)》·《성리설록(性理說錄)》·《경학류편(經學類編)》·《청석집(淸石集)》이 전한다.
[참고] 《淸石集》
 
서종락(徐鍾洛, 徐周一) 1874(고종 11) ~ 1940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주일(周一). 호는 성호(城湖)이다. 달성군(達城君) 진(晋)의 후손이다. 서종락은 경상북도 출신으로 을미의병 때에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산남의진은 고종황제의 시종관으로서 황제를 모시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아 의거할 것을 지시하여서 형성된 의진이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정하고 각 지방 대표를 임명하여 그들이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모으는 책임을 맡겼다. 이때 영천(永川)·신녕(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청송(靑松) 등 경북 북부지역이 그 대상지였다. 서종락은 남석구(南錫球)·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더불어 청송지구 소모 책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1906년(광무 10) 3월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구성된 의병진이 이루어지니 의병진의 칭호를 산남창의진이라 칭하고 진중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총 병력 2천 명이 넘자 북진을 계획하고 영덕의진의 신돌석(申乭石)의진과 손을 잡고 청하읍을 공격하였으며, 이어서 영천 자양(紫陽)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을 대파한 후 진로를 보현산맥으로 돌려 청송으로 향하였다. 이때 일군이 다시 침공해 와 신성(新城)에서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쌍방에 많은 부상자가 났으나 의병 부대는 이들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휴병하였다가 1907년(융희 1) 4월에 다시 거병하였으며, 8월 군대해산 이후 많은 해산 군인들이 들어와 의진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장영도소(將營都所)를 영일군 죽장면 매현리에 정하고 정예 의병 1백여 명을 이곳에 포진시켰다. 이 정보가 누설되어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하여 정용기·이한구·손영각·권규섭 등 주요 간부진이 모두 전사하였다. 그 후 정환직이 대장이 되어 9월부터 11월까지 청송·자양·신녕·의흥·영덕 등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나, 정환직이 접전 중 병을 얻어 병을 치료하다가 12월 11일 체포되었으며, 12월 11일 영천 남교(南郊)에서 순국하였다. 1908년(융희 2) 영덕의진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서종락은 남석구와 더불어 의진을 재구성하여 진의 동쪽은 서종락이 서쪽은 남석구가 맡아 활약하였다. 의진에는 최성집(崔成執)·이구옥(李舊玉)·이만파(李萬波) 등이 참여하였으며 각기 50명 내지 1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성(義城)·안덕(安德)·포항(浦項)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말 경주·영천·의흥·청송의 수비대 등 합동 토벌대를 맞이하여 고와실(高臥室) 전투에서 의진은 큰 피해를 입고 의병운동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獨立運動史資料集》, 《韓國獨立史》, 《山南義陣遺史》, 《韓國獨立運動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서창(徐昌)   1526(중종 26) ~ 1608(선조 41)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영숙(永叔). 호는 남산(南山)이다.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윤(尹)이며, 현(顯)의 동생이다. 수직(壽職)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고,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향리에서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모친상을 당하자 70세에 가까운 몸으로도 법도에 맞게 상을 치렀다. 민흥(閔興)․김성일(金誠一)․권춘란(權春蘭)․류중엄(柳仲淹)‧황응청(黃應淸)과 교유하였고, 현재 청송 부동면에 있는 덕양재(德陽齋)에 서윤, 서봉과 함께 제향되었다. 유고가 있으며 벗들과 함께한 기록인 「비학산동서록(飛鶴山同棲錄)」이 전한다.
[참고] 《邁埜集》
 
서활(徐活)   1761(영조 37) ~ 1838(헌종 4)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여(淸如). 호는 매야(邁埜)이다. 매헌(梅軒) 봉(琫)의 5세손이다. 후암(厚庵) 권렴(權濂)‧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문인이다. 관직에는 뜻이 없어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에 열중하였고, 만년에 매야정사(邁埜精舍)를 지어 후진교육에 힘썼다. 당대의 석학인 이야순(李野淳)·김청진(金淸進)·류범휴(柳範休)·이병운(李秉運)과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저서로는 《매야집(邁埜集)》 6권이 전한다. 《매야집(邁埜集)》은 목판본으로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없어 편자와 간행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권말(卷末)에 있는 이병운(李秉運)·류태명(柳台明) 등의 간기에 의하여 1850년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1 ∼ 4에 시(詩)·서(書)·서(序)·기(記), 권5에 발(跋)·뇌문(誄文)·제문(祭文)·묘지(墓誌)·행장(行狀), 권6에 유사(遺事),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제문(祭文)·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서정시와 차운시가 대부분이고, 고운사(孤雲寺)에서 스승인 김종덕(金宗德)의 문집을 교정하면서 동문인 이야순(李野淳)·김청진(金淸進)·신정주(申鼎周) 등과 수창한 시가 군데군데 보인다. 또한 김굉(金㙆)·이원상(李元祥)·이정규(李鼎揆)·김령(金坽)·이현일(李玄逸)·김성탁(金聖鐸) 등 당시 학문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에 대한 만사가 들어 있다. 서(書)는 권렴(權濂)·김종덕·류장원(柳長源)·권이복(權以復)·류범휴(柳範休)·김종발(金宗發)·이우·김굉·정필규(鄭必奎)·이원상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191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이 학문에 관한 내용이다. 이 가운데 류내봉(柳來鳳)에게 답한 글은 《중용(中庸)》에 대한 문목을 해답한 것이다. 잡저(雜著)의 「후암선생언행사차(厚庵先生言行私箚)」는 저자가 처음에 집지했던 권렴의 행적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다. 「초려문견록(草廬聞見錄)」은 김종덕의 문하에서 수업할 때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글이다. 「사문기(師門記)」는 김종덕과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심경(心經)》 서문(序文), 《심학도설(心學圖說)》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밖에 아들 원모(元模)가 관례한 날에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재가 된다고 지적하며 항상 오륜(五倫)을 마음에 두라는 내용으로 오륜의 각 제목마다 해설을 붙인 「성인설(成人說)」이 있다. 기(記)의 「매야당기(邁繆堂記)」는 정사(精舍)를 짓고 스승인 김종덕에게서 받은 호인 매야(邁繆)의 뜻을 해설해 기록한 글로 명문이다. 「유백운동기(遊白雲洞記)」는 순흥의 백운동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거행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구경하고 느낀 소감과 오고갈 때의 자연을 묘사한 글로 일기체로 되어 있다.
[참고] 《邁埜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회수(徐晦修)  1713(숙종 39) ~ 1792(정조 16)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근지(根之)이다. 증조부는 문상(文尙), 할아버지는 종태(宗泰), 아버지는 명순(命純)이며, 어머니는 이덕성(李德成)의 딸이다. 김태연(金泰衍)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음사(蔭仕)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신령현감(新寧縣監), 사재감직감(司宰監直長), 대흥군수(大興郡守) 등을 역임하고, 1772년(영조 48) 임진(壬辰) 기로정시(耆老庭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며, 병조(兵曹), 형조참의(刑曹參議),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정조 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고, 1790년(정조 14)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고, 2년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서효격(徐孝格)  1855(철종 6) ~ 1936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였는데 서효격은 서기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896년(건양 1) 4월 심성지의진은 영덕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효달(徐孝達)  1839(헌종 5) ~ 1904(광무 8)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서효달도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金大洛)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영덕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효신(徐孝信)  1848(헌종 14) ~ 1915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달오(達五). 호는 현연(玄淵)이다. 아버지는 영희(泳熙), 생부(生父)는 주희(周熙)이다. 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의 문인이다. 1896년 4월 2일 김대락(金大洛)이 이끄는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서효신을 청송의진의 소모장 명의로 예안의진에 파견하여 의진 결성상황을 탐문케 하였다. 이어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결성 이후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효원(徐孝源)  1839(헌종 5) ~ 1897(광무 1)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백순(百順). 호는 석간(石澗)이다. 증조부는 활(活), 할아버지는 윤모(允模), 아버지는 문희(汶熙)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밝았고 스승의 학설을 계승‧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였는데, 이때 서효원도 의진에 참여하여 백의종사로 선임되었다가 곧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896년(건양 1) 4월 심성지의진은 영덕의진을 지원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만년에 부강서당(鳧江書堂)을 지어 자질(子侄)의 후진교육에 주력하면서 김흥락(金興洛), 류치엄(柳致儼), 류정호(柳廷鎬) 등과 사칠론(四七論)에 대한 강론으로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저서로는 《석간집(石澗集)》 8권이 전한다.
[참고] 《石澗集》,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성근묵(成近默)  1784(정조 8) ~ 1852(철종 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성사(聖思). 호는 과재(果齋)이다. 성혼(成渾)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부여현감(夫餘縣監)·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한 정주(鼎柱)이다. 형제로는 성술묵(成述默)이 있다. 1809년(순조 9)에 기사(己巳)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838년(헌종 4)에 양근군수(楊根郡守) 재임시 이조(吏曹)로부터 재학(才學)이 뛰어난 인물로 추천을 받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1805년(순조 5)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발탁되었고, 1807년(순조 7)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승진하였다. 1831년(순조 31)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내고, 1852년(철종 3)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죽었다. 청렴·강직하기로 이름을 떨쳤으며 학문이 빼어났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과재집(果齋集)》이 있다. 《과재집(果齋集)》은 8권 4책, 활자본으로 되어있다. 1883년(고종 20) 그의 손자 두호(斗鎬)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말(卷末)에 편집자의 후기가 있다. 권두(卷頭)에 총목록이 있고, 각 권마다 목차가 따로 있다. 권1·2에 사(辭) 1수, 시(詩) 224수, 권3에 소계(疏啓)·수의(收議), 권4·5에 서(書)·잡저(雜著)·서(序)·기(記), 권6에 발(跋)·축고문(祝告文)·제문(祭文)·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 권7·8에 행장(行狀) 17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계의 「지방관전유후서계(地方官傳遺後書啓)」는 지방관들이 해야 할 시무(時務)와 농정(農政)·민폐(民弊)·부공(賦貢) 등 시행과 대책을 상세히 언급하여 상부에 보고한 것이며, 서(書)는 강필효(姜必孝)·이양연(李亮淵)·권희인(權希仁) 등과 같이 이학(理學)·사물(事物)·시사(時事)·예절 등에 관하여 문답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잡저 가운데 「소학재규(小學齋規)」는 《소학》을 배우는 아동들의 연령제한과 기타 행동규범에 관한 내용들이다. 「파산서원재규(坡山書院齋規)」·「가훈(家訓)」 등은 교육에 관한 강령과 조목으로, 교육사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동유록(東遊錄)」은 산천과 명승을 유람하며 쓴 기행문이다. 「무첨록(無需錄)」은 경계(警戒)가 되는 말들을 모아놓은 자경록(自警錄)이며, 「이학총람(理學總覽)」은 김용(金溶) 등이 만든 경전에 관한 요강(要綱)을 적어놓은 것으로, 당시 학문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참고] 《司馬榜目》, 《憲宗實錄》, 《哲宗實錄》, 《果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대업(成大業)  1540(중종 35) ~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형숙(亨叔)이다. 증조부는 삼석(三錫), 할아버지는 효손(孝孫), 아버지는 욱(勖)이며, 어머니는 이리손(李利孫)의 딸이다. 홍천수(洪天壽)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567년(명종 22)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했으며, 1582년(선조 15)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04년(선조 37)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성숙(成璹)   1647(인조 25) ~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수옥(壽玉)이다. 증조부는 이문(以文), 할아버지는 신구(信耉), 아버지는 후설(後卨), 생부는 후담(後聃)이다. 어머니는 이상검(李尙儉)의 딸이고, 이최만(李㝡晩)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83년(숙종 9) 계해(癸亥)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696년(숙종 22)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참의(參議),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성준구(成俊耉)  1574(선조 7) ~ 1633(인조 11)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이다. 증조부는 륜(倫), 할아버지는 효관(效寬), 아버지는 부제학(副提學) 이문(以文)이며, 어머니는 조흔(趙昕)의 딸이다. 신요(申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599년(선조 32)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 병조좌랑(兵曹佐郞),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교리(校理), 이조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부응교(副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의 배척으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이산(理山) 등지로 이배(移配)되어 1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뒤 관직에 다시 나가 청송부사(靑松府使), 재령군수(載寧郡守), 서천군수(瑞川郡守)를 역임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안에 우거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안산(安山)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어 선천부사(宣川府使)가 되어 양서(兩西)의 관향사(管餉使) 및 찬획사(贊劃使)를 겸하였다. 정묘호란 때 기근이 심하자 기민의 진휼에 힘써 공적을 쌓았으며, 백성들이 청천강가에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1631년(인조 9)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使)를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환(成瑍)   1655(효종 6) ~ 1734(영조 1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계휘(季輝). 호는 유촌(柳村)이다. 대사간(大司諫) 이문(以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 신구(信耉)이고, 아버지는 후주(後周)이며,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예빈시정(禮賓寺正) 기선(嗜善)의 딸이다. 형제로는 성진(成瑨), 성전(成瑱), 성관(成瓘)이 있다. 음직(蔭職)으로 통덕랑(通德郎)이 되었다. 1679년(숙종 5)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고, 1690년(숙종 16)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중앙관직으로는 병조(兵曹)·예조(禮曹)·형조(刑曹)의 원외랑(員外郞), 국자감사예(國子監司藝), 공조참의(工曹參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이어 외직으로는 단천(端川)·해미(海美)·흥해(興海)·청송(靑松)의 현감(縣監)과 호서·호남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1727년(영조 5)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주력하여 《성시중효행록(成侍中孝行錄)》과 《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를 편찬하였다. 그가 편찬한 《성시중효행록》은 2권 1책이다. 제1권에는 시중 성송국(成松國)의 효행 사실을, 제2권에는 시중의 자손인 성삼문(成三問) 등 7인의 행장(行狀)과 서원제향 등의 사실을 기재하였다. 그가 편찬한 《창녕성씨족보》는 종전의 족보를 보완하여 성씨의 노상(路上)·노하(路下) 양파를 합보(合譜)한 것으로 1709년(숙종 35) 중간하였다.
[참고] 《英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天海亭續集》, 《朝鮮圖書解題》, 《韓國圖書解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태조 4) ~ 1446(세종 28)
성은 심씨(沈氏).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덕부(德符),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온(溫)이며, 어머니는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 도(祹)와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이듬해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그러나 1432년(세종 14)에 중궁(中宮)에게 미칭(美稱)을 올리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여 그 해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청(泟)이 군국대사를 상왕(上王: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일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되었다. 1446년(세종 28) 52세로 죽자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다. 소헌왕후는 29년 동안 당시 여성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 겸양하고 인자·후덕하였으며 한 치의 사사로움이 없이 왕을 내조하는데 성심을 다하여 세종대왕이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치적을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 휘호는 선인제성(宣仁齊聖), 시호는 소헌(昭憲)이다.
[참고] 《太宗實錄》, 《世宗實錄》,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사성(孫士晟)  1396(태조 5) ~ 1477(성종 8)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할아버지는 현검(玄儉), 아버지는 등(登)이다. 권명리(權明利)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 청도군수(淸道郡守),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세종 때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있어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청송 문거재(文居齋)에서 손사성을 배향하고 있다. 손사성의 아들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손욱(孫旭)과 손소(孫昭)이다.
[참고] 《嶠南誌》, 《聖宗實錄》
 
손소(孫昭)   1433(세종 15) ~ 1484(성종 1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일장(日章)이다. 현검(玄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등(登)이고, 아버지는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사성(士晟)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명리(權明理)의 딸이다. 풍덕류씨(豊德柳氏)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安德)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형제로는 손욱(孫旭)이 있다. 1453년(단종 1) 계유(癸酉)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1459년(세조 5)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문예시(文藝試)에 장원하여 한 자급(資級) 특진되었다. 1464년(세조 10) 정월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 집현전(集賢殿)을 폐지하고 예문관(藝文館)이 대신하도록 했을 때 겸 예문관이 되었다가 11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형인 욱(旭)이 어사(御使)로서 함흥(咸興)에서 죽으니 임금이 평로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에게 명하여 일을 따르게 할 때 형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장례지내고 전쟁에서 이겨 정충출기(精忠出氣)하니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되었다. 왕명(王命)으로 초상을 훈부(勳府)에 숨겨 두게 하고 부본(副本)을 하사하여 세상에 전해지게 하고 땅, 밭, 산호, 갓끈, 옥, 연적과 상아도(象牙刀)를 하사하였다. 1469년(예종 1) 성주목사(星州牧使)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고 계천군(雞川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 11월 진주목사(晋州牧使)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나 왕이 특명으로 녹봉(祿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되 친자식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어서, 그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여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그의 노부(老父)를 봉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양민(襄敏)이다.
[참고]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槿域書畵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욱(孫旭)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현검(玄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등(登)이고, 아버지는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사성(士晟)이다. 어머니는 만취당(晩翠堂) 권명리(權明利)의 딸이다.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진 송재(松齋) 손소(孫昭)의 형이다. 청송 안덕(安德)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왕명을 받고 함흥에 이르러 적과 싸우다 패사(敗死)하였다. 그러나 그 부하와 수종(隨從) 모두가 적에게 항복한 자가 없어 조정이 명하여 시신을 진중에서 찾아 장사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벼슬은 장령(掌令), 형조정랑(刑曹正郞),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을 역임하였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송광벽(宋光璧)  1628(인조 6) ~ 1701(숙종 27)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문성(文星). 호는 응봉(鷹峯)이다. 증조부는 의(儀), 할아버지는 복원(福源), 아버지는 진사 상헌(尙憲)이며, 어머니는 선성김씨(宣城金氏)로 교수(敎授) 우인(友仁)의 딸이다. 형제로는 송광규(宋光奎), 송광심(宋光心), 송광정(宋光井), 송광참(宋光參), 송광진(宋光軫)이 있다. 작은아버지 남파(南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퇴도(退陶)의 학문에 힘썼다. 1657년(효종 8)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고, 1663년(현종 4)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 1669년(현종 10) 박사(博士)로 승진하였고, 다음해에 가주서(假注書), 1671년(현종 12) 정언(正言), 1673년(현종 14)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였고, 이조(吏曹)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거쳐 1675년(숙종 1)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그 뒤 장악원별제(掌樂院別提), 대구부사(大邱府使), 단천부사(端川府使) 등을 거쳐서 다시 악정(樂正)이 되었는데, 이때 시국이 소란하자 자청하여 영암재(靈巖宰)로 파견나갔다. 그 뒤 민비(閔妃)가 환가하고 박태보(朴泰輔)가 직언하다가 장살되는 등 어려운 때에 다시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청송부사(靑松府使)로 파견되었다.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재직 시에 흉년이 들자 녹봉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693년(숙종 19)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응봉유고(鷹峯遺稿)》가 있다.
[참고] 《鷹峯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징규(宋徵奎)  1668(현종 9) ~ ?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중문(仲文)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홍주진관병마절제도위(通訓大夫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 광순(光洵)이다. 형제로는 송징은(宋徵殷), 송징오(宋徵五), 송징휴(宋徵休)가 있다. 1689년(숙종 15) 기사(己巳)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722년(경종 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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