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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33 (2026.03.05. 17:22)

조선시대 3 (남 ~ 민)

 
• 남계조(南繼曹)  1541(중종 36) ~ 1621(광해군 13)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운강(雲岡)이다.
• 남근(南瑾)   1707(숙종 33) ~ 1747(영조 23)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미옥(美玉). 호는 무안재(無安齋)이다.
• 남도주(南道周)  1737(영조 13) ~ 1791(정조 15)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견중(堅仲). 호는 영면재(詠面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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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 (남 ~ 민)
 
 
남계조(南繼曹)  1541(중종 36) ~ 1621(광해군 13)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운강(雲岡)이다. 할아버지는 찬(讚)으로 부사과(副司課)를 지냈으며, 아버지 근재(謹齋) 억령(億齡)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고려 공민왕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조익청(曺益淸)의 후손인 선비 조응규(曺應奎)의 딸이다. 남계조의 어머니는 성품이 엄숙하여 자녀들의 가정교육에 매우 근실하였다. 남계조는 그 가정교육을 받아 부모님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남계조는 어릴 때부터 모습이 빼어났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8살에 시를 지으니 아버지가 “우리집 문종(文種)이 끊어지지 않았다.”하고 크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1554년(명종 9) 13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엄숙하게 상례를 치러서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맏형인 남윤조(南胤曹)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의진(義陣)에 참가하자, 남계조는 모친을 모시고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에 피난했다. 그러나 남윤조가 화왕산 의진에서 전사하자 남계조는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함에 통곡하면서 초혼사(招魂辭)를 짓고, 형을 부친의 곁에 장사지냈다. 이 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형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忠誠)을 하고, 동생은 어버이를 효로 섬기어 가히 효와 충을 둘 다 온전하게 하였다.”고 집안 형제를 칭송했다. 또한 관찰사(觀察使) 김수(金晬)가 남계조를 충효가 뛰어나다고 천거하여, 통정대부 호군(通政大夫 護軍)에 제수되었다. 남계조는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도의로 사귀었다. 또 향당(鄕黨)에 머물러 향약(鄕約)을 만들어 행하였다. 학문과 행실이 빼어나서 수월(沙月) 조검(趙儉)과 사월(沙月) 조임(趙任) 등이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였다. 남계조의 스승인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는 특히 《주역》에 밝은 인물이었고, 남정방(南靖邦)은 경서에 해박한 학자였다. 남계조는 이들에게서 유학의 진수와 퇴계학의 정수를 이어받았다. 남계조는 후학들에게 늘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가르친 만큼, 항상 실천을 강조하였던 스승이었다. 1621년(광해군 13) 향년 80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청송군 안덕면 장전동 화지골에 있다. 현재 청송군 안덕면(安德面) 장전리(長田里)에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재실인 화지재(花池齋)가 남아있다. 남계조의 첫 부인은 성산이씨(星山李氏)로 이조판서 이여신(李汝信)의 후손인 이방준(李邦俊)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부드럽고 두뇌가 영리하여 부인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둘째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사인(金士仁)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참봉(參奉) 남우(南宇), 참봉(參奉) 남수(南邃), 참봉(參奉) 남관(南寬)과 남실(南實)이며, 딸은 권극형(權克亨)과 민계건(閔繼騫)에게 출가하였다.
[참고] 「雲岡南公墓碣銘」,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두산백과사전》
 
남근(南瑾)   1707(숙종 33) ~ 1747(영조 23)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미옥(美玉). 호는 무안재(無安齋)이다. 아버지는 매계(梅溪) 지훈(之熏)이다. 가학을 전수 받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절을 집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노년에는 청송 월매산 아래에 무안재(無安齋)를 짓고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고, 이 무안재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청송 문행(文行)」편에 그의 행적이 전하며 저서로는 《무안재집(無安齋集)》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남도주(南道周)  1737(영조 13) ~ 1791(정조 15)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견중(堅仲). 호는 영면재(詠面齋)이다. 할아버지는 유행(儒行) 지훈(之熏)이다. 자질이 영오(穎悟)하며 지조가 굳고 확실하여 일을 논함에 결단력이 있었으며, 이치를 확실히 분별하여 향당의 추중을 받았다. 문행(文行)이 있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청송 문행(文行)」편에 이름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남도천(南道天)  1746(영조 22) ~ 1795(정조 19)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대칙(大則). 호는 일성재(日省齋)이다. 겸와(謙窩) 수(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유행(儒行) 청송 월매산 아래 무안재(無安齋)를 짓고 학문을 강학하던 근(瑾)이다. 극난재(克難齋) 권제경(權濟敬), 면암(俛庵) 이우(李㙖)와 교유하였다. 저서로 《사서집록(四書輯錄)》과 유집(遺集)이 전한다. 문행(文行)이 있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청송 문행(文行)」편에 이름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남두희(南斗凞, 南斗熙) 1850(철종 1) ~ 1924
경북 청송(靑松)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 남두희도 의진 편성에 참여하여 우익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1896년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후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남병인(南秉仁)  1817(순조 17) ~ 1874(고종 1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언(彛彦). 호는 노산(老山)이다. 증조부는 부사과(副司課) 찬(讚),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근재(謹齋) 억령(億齡), 아버지는 계운(繼運)이며,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로 겸(兼)의 딸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이돈우(李敦宇)·류치엄(柳致儼)·김흥락(金興洛) 등과 교유하였다. 어려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히고 특히 문학과 행실 그리고 필법이 뛰어나 향리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저서로는 《노산문집(老山文集)》이 전한다. 《노산문집(老山文集)》은 2권 1책, 목활자본으로 1960년 후손 남도만(南道萬)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김정모(金正模)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남시환(南始煥)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87수, 서(書) 30편, 권2에 잡저(雜著) 10편, 명(銘) 2편, 제문(祭文) 4편, 뇌문(誄文) 1편, 부록(附錄)에 행장(行狀)·유사(遺事)·묘갈명(墓碣銘)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시상이 청아하며, 경물시가 많다. 이 중 「만월대시(滿月臺詩)」는 만월대를 보며 고려의 옛 모습을 회상하여 지은 시로 쓸쓸한 정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 「계정(溪亭)」·「박연폭(朴淵瀑)」 등의 시도 청수하다. 서(書)의 「상천재신선생서(上泉齋申先生書)」는 《중용(中庸)》 각편(各篇)을 비롯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주(註)에 대한 질의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을 문의한 것이다. 그밖에 잡저(雜著)의 「충서설(忠恕說)」과 변(辨)의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에서는 주로 퇴계학설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참고] 《老山文集》
 
남복수(南福洙, 南卜洙) 1880(고종 17) ~ 193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도(京都). 호는 청암(靑巗)이다. 겸와(謙窩) 남수(南邃)의 후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늑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인 정환직(鄭煥直)에게 항일의병운동의 재개를 종용하였다. 정환직은 황제의 뜻을 받들어 장남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조직할 것을 명하고 중앙에서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어릴 적 죽마고우인 이한구(李韓久), 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논하여 영남과 관동 일대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창단을 보게 되었다. 이에 남복수는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여 조달하는 등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한편 입암(立岩), 영천(永川) 등지의 전투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抗日義兵將列傳》, 《山南倡義誌》, 《山南義陣遺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남상현(南相鉉)  1861(철종 12) ~ 1942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儒林) 200여 명이 모여 의경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 남상현도 의진 편성에 참여하여 서기(書記)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후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남석광(南錫光)  1881(고종 18) ~ 1952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백(而伯)이다. 경재(敬齋) 천주(天柱)의 후손이다. 1906년(광무 10) 3월 정용기(鄭鏞基) 의병장(義兵將)이 산남의진(山南義陣) 창의시에 남석우(南錫佑)·남석인(南錫仁) 등과 같이 입진(入陣)하여 사력을 다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융희 1) 10월 7일 입암전투(立岩戰鬪)에 참전(參戰)하였으나 정용기 의병장을 비롯하여 중군장(中軍將), 참모장(參謀將) 등 많은 장졸이 일시에 순국(殉國)하자 절치부심하여 청송(靑松)으로 돌아와서 다시 서종락(徐鍾洛) 의병장(義兵將)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고와실(高臥室)에서 패전한 이후에 각지를 전전하며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倡義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남석구(南錫球)  1875(고종 12) ~ 191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응서(應瑞)이다. 경재(敬齋) 천주(天柱)의 후손이다. 평소에 기개가 남달랐고, 왜적의 침입에 대해 분개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에 가담하였다. 청송지역 소모(召募)의 임무를 맡고 귀향하여 수백 명을 소모하여 경주, 영덕 등 열읍(列邑)에서 전전(轉戰)하였다. 그러나 1907년(융희 1) 6월에 영양(英陽) 입암(立岩)에서 활약하던 도중 결국 왜적에게 사로잡혀 다른 의진(義陣)에 대해 추궁을 받았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단신(單身)으로 순국(殉國)하였다.
[참고] 《梅泉野錄》, 《獨立運動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남석술(南錫述)  1877(고종 14) ~ 1907(융희 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숙(敬叔)이며 이명(異名)은 경규(景圭)다. 경재(敬齋) 천주(天柱)의 후손이다. 1906년(광무 10) 4월 정용기(鄭鏞基),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이 중심이 되어 영천(永川)을 거점으로 하여 신령(新寧), 흥해(興海), 청하(淸河), 기계(杞溪), 죽장(竹長) 등지의 우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었다. 이에 남석술은 의병장 정용기의 휘하에 입대하여 의병을 소모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 영덕(盈德)을 공격하여 적장 4명을 사살하고 적의 병영을 방화하는 등 여러 차례 적과 교전하였다. 1907년(융희 1) 12월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자, 우재룡(禹在龍), 이세기(李世紀) 등이 흩어진 의병을 재정비하고 정용기의 부친인 정환직(鄭煥直)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영덕의 서암(西岩) 전투에서 적과 교전할 때 이 격전에 참여하였다가 전투 중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義陣遺史》, 《山南倡義誌》 下,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남석우(南錫佑)  1869(고종 6) ~ 1933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주로(周老)이다. 경재(敬齋) 천주(天柱)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담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의 인물에게 밀명을 내려 각처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신암(愼庵) 노응규(盧應奎)와 정환직(鄭煥直)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운동을 직·간접으로 조종하였다. 특히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鄭鏞基)는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1906년(광무 10) 정용기(鄭鏞基)가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하였을 때 남석우는 이세기(李世紀)와 더불어 정용기의 휘하에서 영양·봉화를 담당하여 청송약포장(靑松藥炮長)이 되었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병운동이 지역적 확산과 대중적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뒤에 우익장(右翼將)이 되어 분전(奮戰)하다가 왜적에게 잡히어 대구(大邱)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山南倡義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남석우(南錫祐)  1871(고종 8) ~ 1933
1906년(광무 10) 3월 정용기(鄭鏞基)가 의병을 일으키고자 지역별로 책임을 맡겨 창의계획을 추진할 때 영양(英陽)·봉화(奉化)지역을 맡아서 군기를 모집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종사(從事)로 임명되어 각 지방에 출전하여 활약하였다. 1907년(융희 1) 10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을 비롯하여 많은 장병이 순국하자 남석구(南錫球)와 재의거하여 청송(靑松) 지방에서 싸웠다. 그러나 사태가 불리하여 부득이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倡義誌》, 《독립운동사》 1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남석인(南錫仁, 南禹八) 1878(고종 15) ~ 1907(융희 1)
본관은 영양(英陽). 별명은 우팔(又八). 자는 우팔(禹八)이다. 경재(敬齋) 천주(天柱)의 후손이다. 남석인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으로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의 간섭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일본인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기 위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때 영천 사람인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을 중심으로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확정하고 있었다. 정용기 등은 국문으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민중들에게 돌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각계 각층으로 보내어 의병에 입대할 것을 권유하였다. 정용기 의진에는 이규필(李圭弼), 백남신(白南信), 정완성(鄭完成), 최기보(崔基輔), 최치환(崔致煥), 정진학(鄭鎭鶴), 정대하(丁大廈), 이창송(李蒼松) 등이 조직확대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각 지방별 모병 담당자가 구성되었다. 이때 남석인은 서종락(徐鍾洛), 남석구(南錫球), 임중호(林中虎), 심일지(沈一之)와 함께 청송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석인은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는데, 이미 정용기는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된 후였다. 다만 정용기의 사촌인 정사홍(鄭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거사준비를 하여 남석인은 정사홍과 경주 사람 이운경(李雲景)과 흥해 사람 정천여(鄭千汝) 그리고 청송 사람으로서 남석인의 육촌 되는 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1906년(광무 10) 음력 4월 12일 출전하였다. 무기로는 각기 화승총 25자루를 휴대하였을 따름이다.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에 도착하고 이어서 영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미 경주 사람 이한주(李漢主)가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절에 머물러 있었다. 본래 이한주는 정용기 의진의 중군이었으므로 합진할 것을 결정하고 부서를 다시 정하였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남석문은 좌익장, 정사홍은 우익장, 정천여는 소모장, 이한주는 중군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을 정비한 후 4월 26일에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그날 정오에 영덕 적암지(赤巖地)에 이르렀을 때 경주 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내습해 왔다. 역부족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옥동(玉洞)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일시 영천의 김성찬(金聖贊)의 집에서 두 달여 간 머물다가 8월 초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대구 경무청으로부터 풀려나게 된 정용기는 의거준비를 시작하였다. 1907년(융희 1) 5월 이들은 강원도 강릉에서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무기 등을 준비하였다. 기일이 다되자 정사홍이 남석인을 찾아와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석인은 군사 30명을 모집하여 영천 거동사(巨洞寺)에 머물면서 의병장 정용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남석인은 의진을 거느리고 청송·흥해 등지의 민가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6월 정사홍과 뜻이 맞지 않으므로 포군 20명만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가을까지 그곳에서 유진할 생각이었으나 일군이 눈치채면 불리할까 염려하여 영덕 입암(立岩)으로 가서 포병을 모집하고자 청하(淸河) 하옥계(下玉溪)에 주둔하였다. 6월 19일 적의 공격을 받고 은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20일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 결과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끝내 대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梅泉野錄》,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자료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남석태(南錫台)  1879(고종 16) ~ 196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순보(舜輔)이다. 매계(梅溪) 지훈(之熏)의 후손이다. 본성이 호방하고 의기로워 1906년(광무 10)부터 1907년(융희 1) 8월 사이에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자 소모의 임무를 맡아 청·장년 28명을 모집하고 총기 등을 수합하였다. 그리하여 청하(淸河)·영덕(盈德)·입암(立岩)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또한 서종락(徐鍾洛)과 의진을 재편성하고 고와전투(高臥戰鬪)에서 패전하여 이름을 바꾸어 은신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倡義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남승철(南升喆, 南昇喆) 1851(철종 2) ~ 1922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덕현(德玄). 호는 자음(紫陰)이다. 아버지는 희태(熙泰)이며, 생부(生父)는 희장(熙章)이다.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가하여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경북 청송과 흥해(興海)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남승철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시행되자, 그에 대한 반감이 더욱 높아졌다. 그때 1896년(건양 1) 정월 안동의진의 류시연(柳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와 군기고를 습격하였으며, 외지에서 「격문(檄文)」이 내도하여 거병을 촉구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청송의 유생들은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1896년 정월 29일 심성지(沈誠之)를 의병장에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 때 그도 이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2월 2일 청송의진의 참모와 서기 등 약간 명의 간부진을 선출할 때 그는 참모로 임명되었으며, 3일부터 인근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를 훈련하는데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는 일이었으니 이에 따라 5일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하여 군량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9일 참모진을 개선하였는데, 김대락(金大洛)으로 중군장을 삼고, 남두희(南斗凞)로 우익장을 삼았다. 10일 남승철(南升喆)은 사병도총에 선임되어 군사들의 훈련과 군율, 병사의 모집 등을 담당하였다. 이 때 청송의 각 곳에서 의병을 빙자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는 경내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진무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그는 3월 27일 선봉장 홍병태(洪秉泰)와 포정(砲丁) 4초(哨)를 거느리고 흥해(興海) 지방에 의병을 모집하러 가기도 하였다. 그 후 대구에서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일 심성지 의병장은 중군장 김대락에게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가서 청송 감은리(甘隱里)의 뒷산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먼저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래서 청송·의성·영천의 의병진이 연합하여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의병진은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적병 7,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날이 저물자 적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남승철은 의병진의 사병도총으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병과 교전하였다. 그 뒤 광무황제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져 심성지는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 《자음집(紫陰集)》 6권이 전한다. 《자음집(紫陰集)》은 석인본으로 1938년 남석한(南錫翰)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은 없다. 권1·2에 시(詩) 209수, 권3 ∼ 5에 서(書) 136편, 잡저(雜著) 1편, 권6에 서(序) 12편, 기(記) 6편, 발(跋) 1편, 상량문(上樑文) 2편, 고유문(告由文) 2편, 제문(祭文) 7편, 묘갈명(墓碣銘)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에는 산수(山水)를 읊은 것이 많은데, 특히 노장의 이상주의적 사상에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선루(六仙樓)」를 비롯하여 「수선(睡仙)」·「묵선(默仙)」·「취선(醉仙)」·「혜선(慧仙)」·「주선(籌仙)」·「법선(法仙)」 등의 6선을 각각 특징적으로 묘사한 시들은 그 수사적 표현과 용구(用句)가 모두 선가(仙家)의 전고(典故)에서 나온 것임을 볼 수 있다. 「수선」은 홍몽대계(鴻大大界)의 우주적 발상, 기화(琪花)·접무(蝶舞)의 선경에 무위자락(無爲自樂)함을 묘사하여 《장자(莊子)》 속의 의경(意境)을 연상시킨다. 「칠일옹(七一翁)」은 6선에 자기를 포함, 7선의 하나가 되고 싶은 희망을 나타내며 자기의 초라한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다. 「자음유거(紫陰幽居)」·「은계유어(銀溪遊魚)」·「독묘산(獨妙山)」 등은 모두 그의 고독한 심회를 은연중 함축하고 있다. 「자만(自挽)」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만시로 영락(零落) 생활 8년 동안 신선을 기다리며 살다가 마지막 인생을 청산한다는 내용이다. 서(書)는 존장에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으로, 김흥락(金興洛)·이만도(李晩燾) 등 유명 학자들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흥락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글씨를 극찬한 내용이 들어 있고, 「여유성엽서(與柳聖燁書)」에는 시에 대한 이론을 피력한 내용이 있어 주목을 끈다. 잡저(雜著)의 「삼신동심원록(三神洞尋源錄)」은 저자가 《신결(神訣)》이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삼신동이라는 신비의 세계를 찾아간 기행문으로서, 그 신비의 세계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서(序)는 대개 회음(會飮)·시사(詩社)·강학(講學) 등 동호인간에 사교나 학문의 교류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계(契)에 관하여 쓴 것이 대부분이다. 제문(祭文)에는 김흥락에 대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 《赤猿日記》, 《獨立有功者功勳錄》, 《紫陰集》,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승하(南昇夏, 南廷夏) 1872(고종 9) ~ 1907(융희 1)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우성(禹聖)이다. 성재(誠齋) 세주(世柱)의 후손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작전이 본격화 되어 가자 민족적 위기의식을 느낀 남승하는 의병의 결성을 도모하였다. 이때 시종관으로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영천(永川)으로 보내어 거사할 것을 도모케 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과 더불어 의진을 구성한 것이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산남의진은 영천을 중심으로 하여 신령(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영덕·영해·영일·장기·진보·청송·영양·봉화·예안·안동 등 영남의 상당 지역을 포괄하는 의진이었다. 그 계획에 의하여 청송 일대의 책임자로 책정된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이 청송에서 기치를 올렸다. 이에 남승하는 1906년(광무 10) 3월 의진에 입대하였다. 그 후 의진을 따라서 영해 방면으로 진출하여 신돌석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융희 1) 4월 청송지방에서 계속 의병을 모집하는 도중에 체포되어 청송군 화목(和睦)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義陣遺史》, 《山南倡義誌》下, 《獨立運動史》, 《獨立運動史資料集》,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남우(南宇)   1567(명종 22) ~ 1638(인조 16)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이원(而遠). 호는 둔재(遯齋)이다. 고조는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손(蓀)이며, 증조는 내금위부사과(內禁衛副司果) 찬(鑽)이다. 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억령(億齡)이며,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운강(雲岡) 계조(繼曹)이다. 어머니는 성산인(星山人) 이방준(李邦俊)의 딸이다. 구연(具淵)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장성해서는 동학들보다 학문이 뛰어났고 걸출한 기상과 넓은 학식이 있어 문사(文詞)를 잘 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계조(繼曹)는 조모를 모시고 청송으로 들어오고 백부(伯父) 윤조(胤曹)는 곽재우(郭再祐)의 의진(義陣)에 들어갔는데 그때 자신도 쫓아가고자 하였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갈 수 없었다. 뒤에 백부(伯父)가 순절(殉節)하자 달려가서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누구의 시신인지 분간할 수 없어 다만 백부(伯父)의 옷을 선산(先山)에 묻어 장례를 대신 하였고 아버지는 이 때문에 원통함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남우는 이러한 아버지를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봉양하였으며 아버지가 졸(卒)한 후에는 집 주변에 정사(精舍)를 짓고 ‘직방(直方)’이라 하고는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학문연구에 집중하였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 치욕을 접하고 은거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니 향당에서 ‘대명처사(大明處士)’라 칭하였다.
[참고] 《響山集》
 
남정철(南井喆, 南定喆) 1888(고종 25) ~ 1970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삼(極三). 성재(誠齋) 세주(世柱)의 후손이다. 1906년(광무 10)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고 영천(永川)으로 하향하여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자진 입대하여 종사(從事)로 임명받았다. 그는 주로 적의 형세를 수색하여 본진에 정보를 제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7년(융희 1) 8월 이후 의진이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자 전투에 참가하여서 입암(立岩)·동대산(東台山)·화장(花壯)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영덕(盈德)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는 청송(靑松)의진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倡義誌》, 《山南義陣遺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남지훈(南之熏)  1678(숙종 4) ~ 1756(영조 32)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태화(太和). 호는 매계(梅溪)이다. 운강(雲岡) 계조(繼曺)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반산(半山) 민주(旻柱)이다. 어릴 때부터 향학열이 대단하여 주야로 경전 읽기에 열중하였으며 만년에는 윤리를 중하게 여겨 향리 학도들과 문내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항상 윤리도덕을 강조하였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 또한 지극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난이 일어나자 청송 안덕면에 있는 송학서당(松鶴書堂)에서 조덕승(趙德昇)과 함께 장정들을 모아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모반사건을 진압하는데 헌신하였다. 승리 소식을 듣고 난 후에는 매계정(梅溪亭)을 지어 학문에 힘쓰며 노년을 보냈는데, 현재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에 매계정이 남아 있다. 매계정 옆에는 반월 같은 형체의 산이 둘러져 있으며, 정자 뒤에는 매화와 같은 형상의 능지가 이루어졌고,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 내려 절경을 이룬다. 그는 그의 부인과 회로하여 회혼례까지 지내니 영조 때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참고] 《英陽南氏世譜》
 
남한기(南漢紀)  1675(숙종 1) ~ 1748(영조 24)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국보(國寶). 호는 기옹(寄翁)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용익(龍翼), 아버지는 통정대부수경상도관찰사(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 정중(正重)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인환(李寅煥)의 딸이다. 청송심씨(靑松沈氏)를 아내로 맞았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이후에 경사(京師)에서 공부하였다. 1710년(숙종 36)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고 왕자의 사부(師傅) 등을 지내다가, 1712년(숙종 38) 현릉참봉(顯陵參奉)을 비롯하여 내직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형조좌랑(刑曹佐郞),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翼讚),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호조좌랑(戶曹佐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호조정랑(戶曹正郞),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등과 외직으로 영평현령(永平縣令), 김제군수(金堤郡守), 청풍부사(淸風府使), 정선군수(旌善郡守), 청송부사(靑松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使) 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인품이 단정하고 청렴하였으며 평소에 글을 좋아하였다. 저서로는 《기옹집(寄翁集)》이 있다. 《기옹집(寄翁集)》은 6권 3책으로 목판본이다. 1752년(영조 28) 아들 유용(有容)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는 없으며 권말(卷末)에 유용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 ∼ 3은 시(詩) 420수, 권4·5는 서(序)·기(記) 각 1편, 제문(祭文) 25편, 행장(行狀) 3편, 잡저(雜著) 5편, 권6은 부록(附錄)으로 제문(祭文)·행장(行狀)·유사(遺事) 각 1편과 손자 공보(公輔)의 성재영고(省齋零稿)로 시 28수, 찬(讚)·기(記)·서(序) 등 6편과 그의 행장(行狀)·묘표(墓表)가 있다. 시는 장편의 오언고시로 중국의 역사를 주나라부터 명나라까지 각 왕조의 창업과 쇠퇴를 엮은 것이 있으며,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읽고 기록된 인물들의 행적을 칠언절구로 지은 작품도 있다. 그 중에 「제해동명신록후(題海東名臣錄後)」는 명신록의 기록이 인물의 이력은 자세히 기술하였지만, 사실은 부족한 점이 있다는 소서(小序)를 쓰고 정몽주(鄭夢周)·황희(黃喜)·사육신(死六臣)·삼학사(三學士)·김장생(金長生)까지 63명의 사행을 지었다. 「전가사(田家詞)」 12수는 봄에 농사를 시작하여 추수가 끝날 때까지를, 「잠부사(蠶婦詞)」는 누에치기에서부터 고치를 관가에 낼 때까지를 단계적으로 8수로 지었고, 그 밖에 「목동사(牧童詞)」 6수, 「어부사(漁夫詞)」 9수가 있다.
[참고] 《寄翁集》, 《雷淵集》, 《朝鮮圖書解題》,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남희호(南熙毫)  1807(순조 7) ~ 1881(고종 18)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치함(致咸). 호는 명암(明巖)이다. 매계(梅溪) 지훈(之熏)의 5세손이며, 형제로는 희택(熙宅)이 있다. 얼굴이 단정하고 성품이 온아하며 학문에 성취함이 있었고 평소에 선조 남지훈(南之熏)이 남긴 청송 현동의 매계정(梅溪亭)에서 마을 젊은이들과 모여 강학하며 경의(經義)를 연구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류건(柳健)   1707(숙종 33) ~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이(子以)이다. 증조부는 장운(長運),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창진(昌晉)이며, 어머니는 이천재(李天哉)의 딸이다. 이기조(李箕朝)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733년(영조 9)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1743년(영조 19) 계해(癸亥)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62년(영조 38)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류교조(柳敎祚)  1812(순조 12) ~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명가(明可)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돈령부도정(通政大夫敦寧府都正) 심춘(尋春)이다. 김명호(金命昊)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류후조(柳厚祚)·류찬조(柳贊祚)가 있다. 1850(철종 1)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1877년(고종 1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4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司馬榜目》
 
류낙문(柳洛文)  1766(영조 42) ~ 1807(순조 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범(景範). 호는 방곡(方谷)이다. 기봉(岐峯) 복기(復起)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원(世源), 아버지는 태휴(泰休)이다.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의 문인이다. 부친상이 나고서는 그 묘아래 집을 짓고 벽에다 “수소형문 대월성경(守素衡門 對越聖經)”이라는 글씨를 써 붙이고는 세사에 뜻을 두지 않고 더욱 학문에만 전력했다. 오직 성리와 경학에 몰두면서 세속적인 저술에는 힘쓰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지은 것도 모두 없애 버려 지금 전하는 것은 그가 죽은 뒤 문생이나 친족들이 약간씩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모아 편집해놓은 것을 1822년(순조 22) 조카 치구(致球)가 간행한 것이다. 저서로는 �《방곡집(方谷集)》이 전한다. 《방곡집(方谷集)》은 4권 2책, 목판본이다. 권말(卷末)에 치구의 후지(後識)가 있고, 권1 ∼ 3에 시(詩) 23수, 서(書) 88편, 제문(祭文) 1편, 애사(哀詞) 1편, 잡저(雜著) 10편, 권4는 부록(附錄)으로 저자에 대한 만사(輓詞) 7수, 애사(哀詞) 2편, 제문(祭文) 4편, 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신조와 행적이 그러했던 만큼 이 책에서도 기(記)나 서(序), 기타 잡문(雜文) 등이 전혀 실려 있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서신인데, 그것 역시 스승과 친우·문도(門徒)들과 경전(經典) 및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토론하고 질의, 응답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잡저(雜著) 중 「대학강록(大學講錄)」은 스승인 유장원에게 《대학(大學)》의 의문처에 관해 질의하여 응답받은 내용들을 적은 것이다. 《대학(大學)》 전체에 걸쳐 의심나는 곳이면 비록 글자 하나라도 세밀하게 따졌고, 또 장(章)과 절(節)을 표시하여 참고에 용이하게 하였다. 「진수록(進修錄)」은 60여 조항의 격언을 수록한 것으로 짧은 글들이지만 학문과 수행에 요체가 되는 내용이 많다. 이 중에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문구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자 자신이 생애를 통하여 직접 체험하여 얻은 것들로서 보다 친근하고 절실한 내용들이다. 잡저(雜著)와 기문(記問)에도 학문을 논한 내용들이 많다.
[참고] 《方谷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류세무(柳世茂)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실(子實)이다. 아버지는 팽성(彭成)이며, 안인수(安麟壽)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 류세화(柳世華)가 있다. 1552년(명종 7)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3등으로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552년(명종 7)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79년(선조 1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류시연(柳時淵)  1873(고종 10) ~ 1914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시연(時然).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이다. 1882년(고종 19) 향리의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류연각(柳淵覺)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6년(건양 1) 안동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의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류선봉(柳先鋒)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안동의진이 해산한 뒤 영남지방으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진에 가담하였다. 1906년(광무 10)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列邑)의 의병대표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진보·영덕·평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융희 1) 한국군 강제해산 후 이강년(李康秊)이 격서를 보내와 함께 활약할 것을 요청하자, 군사 수 십 명을 거느리고 삼척방면으로 가서 이강년을 만났다. 이때 친일파 박두일(朴斗日)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십이령(蔚珍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하고 이어서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융희 2) 막하에 57명을 거느리고 의성 갈곡동에서 왜병을 습격하여 성과를 올리고 영양 북면에 잠복하였다. 1911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희(李象羲), 김동삼(金東三), 안창호(安昌浩)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남북만주일대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에 최적지임을 깨닫고 그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913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5월 영주 반구왜경소(盤邱倭警所)에 붙잡혀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14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每日申報》, 《독립운동사》 제1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3집,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류유(柳侑)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증조부는 청신(淸臣), 할아버지는 택(澤), 아버지는 무(務)이고, 어머니는 안익방(安翊邦)의 딸이다. 형제로는 류의(柳儀)가 있다. 1411년(태종 11)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1위로 합격하였다. 부사(副使)를 지냈으며, 1436년(세종 18) 청송군수(靑松郡守)로 부임해 4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류응목(柳膺睦)  1841(헌종 7) ~ 1921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수경(受卿). 호는 학산(鶴山)이다. 서애(西厓) 성룡(成龍)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조(政祚)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 내운(來雲)의 딸이다. 형제로는 희목(憙睦)이 있다. 1864년(고종 1)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고, 1879년(고종 16)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했다. 1890년(고종 27) 성균관에서 유학하여 월과와 고시에서 늘 우수한 문재를 보였으나 매번 세력가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자 과거를 단념하고 낙향, 청송 벽촌으로 이거(移居)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란이 일어나자 의병의 선봉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또,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국권침탈의 변을 당하자, 여러 고을에 창의를 외치는 격문을 돌려 왜적응징에 선봉으로 나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경술국치 후 비분강개하며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예설과 성리설 및 천문역법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가학연원록(家學淵源錄)》·《사례작의(四禮酌義)》·《학산집(鶴山集)》이 전한다. 류응목의 시문집인 《학산집(鶴山集)》은 12권 4책으로 목판본이다. 1977년 족증손 석우(奭佑)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석우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손자 수영(壽榮)의 후지가 실려 있다. 권1 ∼ 3에 부(賦) 2편, 시(詩) 393수, 소(疏) 1편, 권4에 서(書) 70편, 권5에 잡저(雜著) 35편, 권6에 서(序) 6편, 기(記) 21편, 권7에 지(識) 2편, 발(跋) 9편, 잠(箴) 1편, 명(銘) 4편, 송(頌) 2편, 논(論) 2편, 책(策) 1편, 상량문(上樑文) 5편, 권8에 고사(告辭) 3편, 애사(哀詞) 3편, 제문(祭文) 21편, 권9에 비명(碑銘) 1편, 묘갈명(墓碣銘) 6편, 묘지명(墓誌銘) 2편, 묘지 2편, 광기(壙記) 2편, 권10에 행장(行狀) 10편, 권11에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유사(遺事)·묘지명(墓誌銘) 각 1편, 만사(輓詞) 71수, 권12에 제문(祭文) 39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書)에는 학문·시사·예설 등에 관계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잡저 가운데 「심성정명의(心性情名義)」에서는 심(心)이 성정을 거느리며, 성(性)은 심의 체(體)인 동시에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것이고, 정(情)은 심의 용(用)인 동시에 감이수통(感而遂通)하다고 설명하였다. 또, 「심성정이기사칠전도(心性情理氣四七全圖)」는 심성정·이기·사단칠정 등을 배열해 상호관계를 도해(圖解)한 것인데, 성(性)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기(氣)는 저마다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수관견록의변(愁管見錄疑辨)」은 심(心)의 주재(主宰)에 대한 류성룡(柳成龍)과 이현일(李玄逸)의 견해를 상호 비교 논술한 뒤, 전자에 동조하는 견해를 피력한 내용이다. 「격열읍문(檄列邑文)」은 민비시해사건을 비롯한 일제의 만행과 폭압을 응징할 것을 외친 격문이다. 「일행전차도(日行煞次圖)」에서는 24절기에 관한 도면과, 태양과 지구가 주선(周旋)하는 이치를 논술하였다. 그 밖에 복제에 대한 논술로는 「심의제도(深衣制度)」·「치포관제도(緇布冠制度)」·「복건제도(幅巾制度)」·「대대제도(大帶制度)」 등이 있는데, 모두 고대 복식제도를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국난시종기사략(國亂始終記事略)」에서는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한말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의 왜적의 작폐와 만행으로 인한 수난사를 기록하여, 침탈기 지식인의 비분강개의 심회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참고] 「行狀」(權準羲 撰), 《嶠南誌》, 《司馬榜目》, 《鶴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류정호(柳廷鎬)  1837(헌종 3) ~ �1907(융희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직(元直). 호는 졸수재(拙修齋)이다. 아버지는 치검(致儉)이며, 어머니는 김규점(金逵漸)의 딸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의 요도(要道)를 얻었다. 1889년(고종 26) 청송 주방산사(周房山寺)에서 서석화(徐錫華)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과거(科擧)공부를 멀리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專心)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썼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사친(事親)에 정성과 대소제절(大小諸節)에 봉조함이 지극하였다. 후학지도에는 학행(學行) 실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곽종석(郭鐘錫)이 명(銘)에서 그의 덕행(德行)을 칭송하였다. 문집 16권 8책이 전한다.
[참고] 「行狀」(柳必永 撰), 「墓碣銘」(郭鍾錫 撰)
 
류지호(柳止鎬)  1825(순조 25) ~ �1904(광무 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좌(元佐). 호는 세산(洗山)이다. 아버지는 정재(定齋) 치명(致明)이다.� 1873년(고종 10)에 음보(蔭補)로 가감역(假監役)을 제수 받고,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릉령(貞陵令),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신창현감(新昌縣監)‧간성현감(杆城縣監), 연천군수(漣川郡守), 장기현감(長鬐縣監),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역임하였다. 1902년(광무 6) 중추원칙임관(中樞院勅任官)을 지냈다. 당시 안동의 최고원로로서 의병봉기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세산집(洗山集)》이 전한다.
[참고] 「行狀」(柳廷鎬 撰), 「墓碣銘」(郭鋾 撰), 《嶠南誌》, 《獨立運動史資料集》
 
류치구(柳致球)  1793(정조 17) ~ 1854(철종 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내봉(來鳳), 후일에 자를 고쳐서 명녕이라 하였다. 호는 소은(小隱)이다. 상문(相文)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두문(斗文)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류치구는 작은아버지인 낙문(洛文)에게 수학하여 막히는 것이 없었다. 그 뒤에 류건휴(柳建休)에게 청학(請學)의 글을 올렸다. 류치구는 1827년(순조 27) 정해(丁亥)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독학(篤學)하였다. 벼슬을 하지 않고 뒷산에 작은 당을 짓고 소은(小隱)이라는 현판을 달고 더욱 학문에 힘썼다. 후학들을 지도하던 방곡(方谷) 류낙문(柳洛文) 선생이 돌아가시자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선생과 더불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강회(講會)를 하고 학풍을 일으키니 향리에서 스승으로 추앙하였다. 1854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2세였다. 그는 천성이 과묵하고 언제나 가난하고 외롭고 위급한 자를 보면 온갖 수단을 써서 아낌없이 구제해 주었다. 문장이 간결하고 정아했으나 글짓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류치구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두 책을 숙독하여 독지만편(讀至萬遍 ; 만 번을 읽음)이라는 기록까지 보였다. 또한 그는 성리학자이면서 실천궁행(實踐躬行)하기에 진력을 다하였는데 선비의 학문이 이론에만 치우친 것을 개탄하고 실천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비록 이치를 깨우쳤다 하여도 실천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창하면서 선비의 학문은 지행합일(知行合一)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 류치구의 유고로 《소은집(小隱集)》 4권과 필사본 한문소설인 「천군실록(天君實錄)」이 전하고 있다. 《소은집》은 4권 2책, 목활자본으로 1885년(고종 22) 손자 연창(淵昌)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卷末)에 김흥락(金興洛)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69수, 서(書) 22편, 권2에 잡저(雜著) 1편, 서(序) 4편, 기(記) 6편, 지발(識跋) 10편, 권3에 뇌사(誄辭) 11편, 축문(祝文) 5편, 제문(祭文)·전(傳)·묘지명(墓誌銘)·묘표(墓表)·유사(遺事) 합 17편, 권4는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 8편, 뇌사(誄辭) 2편, 제문(祭文) 9편과 행장(行狀)·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송별임후(送別林侯)」는 떠나는 고을 수령의 치적을 찬양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타낸 것이다. 「자탄(自歎)」은 늙어서 눈과 귀가 어두워져 어지러운 세상사를 알지 못하니 차라리 낫다는 내용으로 늙음에 임해 세상을 풍자, 비판하고 있다. 서(書)의 「여사마소회중(與司馬所會中)」은 사마소에 보낸 서찰로 곡반(哭班: 국상 때 곡하는 벼슬아치의 반열)에서 서정(西庭)의 좌석 배치는 고규(古規)에서 유래된 것이나, 생원·진사의 정례(庭禮)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지적한 내용이다. 잡저의 「산와잡록(山窩雜錄)」은 저자가 성리학에 관한 문제를 비롯, 《대학》·《중용》 등의 경의(經義)에 관해 권이복(權以復)·류범휴(柳範休)·조우각(趙友慤)·신정주(申鼎周)·조희수(趙希洙) 등 여러 학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기의 「명당실소기(名堂室小記)」는 자신의 지기(志氣)가 혼탁해 물욕에 얽매이고 있음을 반성하며 선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거경(居敬)에 힘쓸 것을 다짐한 글이다.
[참고] 《小隱集》, 《天君小說硏究》, 《韓國擬人小說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모충이(牟沖伊)  1883(고종 20) ~ 1960
일명 준이(俊伊). 1906년(광무 10) 3월 산남의진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의 휘하로 입대하여 활약하였다. 1907년(융희 1) 10월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고 이어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정환직(鄭煥直)마저 순국하자 산남의진은 흩어져 각기 활약하게 되었다. 1908년(융희 2) 6월 박신재(朴新材)와 그밖에 수 명과 더불어 총검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경상북도 청하(淸河) 세목동장(細牧洞長)으로부터 20원을 군자금으로 모금하고, 그 후 귀가하여 있던 중 1908년 8월 3일에는 일본측의 밀정으로 활약하던 청하군의 소사(小事) 정말범(鄭末凡)을 살해하였다. 이 일이 적에게 적발되어 일수비대에 의해 영일군 관학산(冠鶴山)에서 체포되었다.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암살 및 강도혐의로 종신형을 언도받고, 9월 29일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 당하였다. 10월 20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12년 소위 칙령 제23호에 의하여 징역 12년형으로 감형 받았으며, 다시 1916년 소위 칙령 제104호에 의하여 징역 9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大邱地方裁判所判決文》, 《大邱控訴院判決文》, 《大審院判決文》, 《獨立有功者功勳錄》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민광표(閔光表)  1646(인조 24) ~ ?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시원(施遠). 호는 북계(北溪)이다. 명지재(明智齋) 추(樞)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호유(好裕)이다. 형제로는 광진(光震)·광중(光重)이 있다. 1673년(현종 14)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청송에서 출생했으며 의지가 굳건하고 기개가 높았다. 학문에만 심취하여 사람들과 교류는 많지 않았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민근효(閔根孝)  1550(명종 5) ~ 1630(인조 8)
본관은 여흥(驢興). 자는 순원(順源). 호는 구벽(扣璧)이다. 아버지는 명지재(明智齋) 추(樞)이며, 형제로는 당음(棠陰) 종효(宗孝)가 있다. 대암(大庵) 박성(朴惺)의 문하생으로 재기와 문장이 뛰어났고, 가훈을 이어받아 성망(聲望)이 있었으며 필법이 좋았다. 1570년(선조 3) 식년시(式年試) 생원에 1등으로 합격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부사(府使) 이영도(李泳道)가 청송에 부임하여 훈도(訓導)로 추대하였으며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향교(鄕校) 대성전(大成殿)과 동서재(東西齋)를 세웠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인재(認齋) 최현(崔睍),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등과 교유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민기혁(閔基爀)  1776(영조 52) ~ ?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휴언(休彦). 호는 비곡(肥谷)이다. 원유(元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복현(復賢)이며, 형제로는 종혁(宗爀)·정혁(楨爀)·장혁(章爀)이 있다. 1807년(순조 7)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문사(文辭)가 남다르고 공손하여 향중(鄕中)에서 추중(推重)을 받았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청송 「문행(文行)」편에 그의 행적이 전한다.
[참고] 《司馬榜目》, 《朝鮮寰輿勝覽》, 《두산백과사전》
 
민동호(閔東鎬)  1874(고종 11) ~ 1928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 민동호도 의진 편성에 참여하여 참모(參謀)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후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민보현(閔寶賢)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진(士珍). 호는 눌인재(訥仁齋)이다. 명지재(明智齋) 추(樞)의 7세손이며, 증조부는 광중(光重)이다. 타고난 자질이 단아(端雅)하고 문사(文詞)가 섬부(贍富)였으며 필법(筆法)이 겸선(兼善)하며 덕망이 있었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유림(儒林)에서 중망이 있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청송 「유행(儒行)」편에 행적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민성(閔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증조부는 위(偉)이며, 할아버지는 환(渙), 아버지는 효건(孝謇)이고, 류준(柳畯)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472년(성종 3) 임진(壬辰)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474년(성종 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치적이 있으며, 후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증직되었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嶠南誌》
 
민성대(閔成大)  1707(숙종 33) ~ ?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성(而聲). 호는 극복정(克復亭)이다. 만회(晩悔) 인유(仁裕)의 증손이다. 밀암(密庵)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벼슬은 승문원판관(承文院判官)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무신난에 창의(倡義)하여 반군을 토벌하였다. 민성대 사후 그 후생들이 그의 학문을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의미로 보고 호(號)를 극복(克復)으로 추존하였다. 현재 청송에는 민성대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극복정(克復亭)이 남아 있다.
[참고] 《嶠南誌》
 
민성호(閔晟鎬)  1836(헌종 2) ~ 1908(융희 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당(靑棠)이다. 인유(仁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치박(致博)이다. 1896년(건양 1)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협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영을 갖추었는데, 이때 민성호도 의진 편성에 참여하여 백의종사(白衣從事)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 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 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후 심성지 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陳)하였다.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민세경(閔世卿)  1466(세조 12) ~ 1530(중종 25)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방(邦彦). 호는 낙지헌(樂志軒)이다. 아버지는 여흥민씨 청송 입향조 흥(興)이다. 안동 천전의 의성김씨 입향조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이 그의 사위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인 조광조(趙光祖)·이자(李耔)·김안국(金安國)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였으며, 벼슬은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민세경의 부손(副孫) 명지재(明智齋) 추(樞)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와 교류하였으며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하음(河陰) 신집(申楫), 덕계(德溪) 이준성(李俊成) 등을 문하생으로 두고 도학으로 당세에 이름이 있었으니 당시 민세경의 학문적 경향과 가학의 성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 「金璡行狀」(金誠一 撰)
 
민세정(閔世貞)  1471(성종 2) ~ 1550(명종 5)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숙(正叔)이다. 증조부는 태종의 처남인 여성군(驪城君) 무질(無疾)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시(增廣試)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511년(중종 6) 효행으로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천거되었으며,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3등으로 합격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당시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음애(陰崖) 이자(李耔) 등과 함께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좌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이후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문학과 도덕이 백세(百世)에 사표(師表)가 되고, 충효가 지극하여 사림(士林)에서 사당(祠堂)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나라에서 금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효우(孝友)로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嶠南誌》, 《두산백과사전》
 
민영욱(閔泳昱)  1862(철종 13) ~ 192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은여(殷汝). 호는 계서(溪西)이다. 학행(學行) 추(樞)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매헌(梅軒) 진호(震鎬)이며, 청송에서 출생했다. 전원(田園) 류도헌(柳道巘)의 문인이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서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로, 남한조에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통을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내려 받았고, 민영욱은 김도화를 스승으로 섬겼다. 민영욱은 김도화의 문하에서 역학(易學)·사서(史書)와 성리서(性理書)를 익혀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온화한 성품과 섬부한 문장으로 후학을 장려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민인(閔寅)
본관은 영천(榮川)이다. 1417년(태종 17) 정유(丁酉)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17년(태종 17)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에 4위로 급제했다. 관직은 정언(正言), 청송부사(靑松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민인이 청송부사로 있을 때 쌓은 청하읍성은 안동, 봉화, 풍기, 영주 등지의 장정을 동원 받아, 돌로 새로 쌓았다고 한다. 또한 동래에 군수로 있을 때에 성을 축조했으며 의창(義倉)을 만들어 평상시에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저장한 곡식으로 빈민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즉, 의창은 농민 구제를 위해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3권을 보면 이행(李行)이 이에 대한 시를 지어 ‘나의 친구 민인(閔寅)이 일을 맡은 지가 두 해 남짓이나 애써서 백성을 진휼하고, 개연(槪然)히 의창(義倉)도 회복하였으며, 또 따라서 관사도 지어, 점차로 청당(廳堂)이 마련되었도다. 손님과 나그네 잠자리 편하고, 관리들도 주림을 면하였네. 예전부터 수령의 직분은, 이 밖에 다른 것은 없는 것일세.’라 하여 그의 치적을 드러내었다. 후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증직되었다.
[참고] 《國朝文科榜目》, 《新增東國輿地勝覽》
 
민인호(閔仁鎬)  1854(철종 5) ~ 1925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논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 민인호도 의진 편성에 참여하여 척후장(斥候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후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민종렬(閔鍾烈)  1735(영조 11) ~ ?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백겸(百兼)이며, 어머니는 이구(李絿)의 딸이다. 뒤에 종현(鍾顯)으로 개명하였다. 1756년(영조 32)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768년(영조 44)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이어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는 자신이 노론이던 당적(黨籍)을 우려하여 물러났으나 조상들의 관록과 음덕으로 무사하였다. 이어 교리(校理)·겸사복(兼司僕)·부수찬(副修撰)·필선(弼善)·응교(應敎)·승지(承旨) 등을 지내면서 영조의 어제(御製) 편집에 참여하였다. 1773년(영조 49)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다. 또한,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관여한 바도 있으며, 뒤에 관직이 이조판서(吏曹判書)·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에 이르렀다.
[참고] 《承政院日記》, 《英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종혁(閔宗爀)  1762(영조 38) ~ 1836(헌종 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조언(祖彦). 호는 죽소(竹巢)이다. 원유(元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복현(復賢)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경석(慶錫)의 딸이다. 형제로는 기혁(基爀), 영혁(永爀), 장혁(章爀)이 있다. 권이복(權以復)·조우각(趙友殼)·이재기(李在璣) 등과 교유하였다. 1797년(정조 21) 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1798년(정조 22)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해서는 별제(別製)와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인 전강(殿講)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벼슬에는 뜻이 없어 고향인 청송으로 내려가 송학서원(松鶴書院)에서 후진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타고난 태도가 준수하고 총기가 영특했으며 학문과 도덕이 두터워 인근에서 높이 받들었다. 저서로는 《죽소집(竹巢集)》이 전한다. 《죽소집(竹巢集)》은 2권 1책으로 목판본이다. 권두(卷頭)에 류도헌(柳道獻)의 서문(序文)이 있다. 권1·2에 시(詩) 106수, 만사(輓詞) 16수, 제문(祭文) 3편, 서(序)·기(記)·발(跋)·묘갈명(墓碣銘)·상량문(上樑文) 각 1편, 부록(附錄)으로 만사 2수, 제문(祭文) 2편, 뇌문(誄文)·행장(行狀)·유사(遺事)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의 「쌍광창수운(雙光唱酬韻)」은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친구인 군수(郡守) 이재기(李在璣), 지평(持平) 강운(姜橒) 등과 창수한 시이고, 「방백향산억구유(倣白香山憶舊遊)」는 조식(曺植)의 시를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뜻이 깊고 운치가 청아하다.
[참고] 《竹巢集》, 《司馬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종호(閔宗鎬)  1809(순조 9) ~ ?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상관(尙觀). 호는 성오(城塢)이다. 인유(仁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치경(致敬)이다. 청송에서 출생하였다. 재주가 뛰어나고 기개가 호탕하였으며 학문과 이치를 성실히 익혀 깊게 연구하였다. 1880년(고종 17) 증광시(增廣試) 진사에 합격하였다. 가정이 넉넉하여 곤궁한 자에게 많이 베풀었으며, 학문에도 성취가 있었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민종효(閔宗孝)  1547(명종 2) ~ 1585(선조 18)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행원(行源). 호는 당음(棠陰)이다. 아버지는 명지재(明智齋) 추(樞)이다. 퇴계의 고제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에 생원(生員)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기품과 행실이 훌륭했다. 박수일(朴守一)‧장현광(張顯光)‧최현(崔睍)‧정사진(鄭四震)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연마와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참고] 《司馬榜目》
 
민추(閔樞)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천극(天極). 호는 명지재(明智齋)이다. 청송으로 입향한 남은(南隱) 흥(興)의 증손(曾孫)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와 교류하였으며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하음(河陰) 신집(申楫), 덕계(德溪) 이준성(李俊成)이 그의 문하생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문인들을 보면, 조형도는 문신이자 무신으로 학문이 뛰어나 향시와 무과에 합격하였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신집은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주자학을 비롯하여 의약·복서(卜筮)·지리·천문 등에 능하였다. 이를 통해 민추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민추가 남긴 저서로는 「덕문정로(德門正路)」‧「안인의인론(安仁義仁論)」‧「강의록(講義錄)」‧「태극무극변(太極無極辯)」‧「이의변(利義辯)」‧「하락수(河洛數)」‧「함항설(咸恒設)」‧「건곤설(乾坤說)」‧「장천석허실구(障川石墟室臼)」‧「사례찬요(四禮簒要)」 등이 전한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민치긍(閔致兢)  1810(순조 10) ~ 1885(고종 2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근지(謹持). 호는 현암(玄嵒)이다. 할아버지는 복현(復賢), 아버지는 죽소(竹巢) 종혁(宗爀),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 제휴(濟休)의 딸이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버리고 위기지학에 전심하였다. 청송 보현산 아래에서 현암(玄嵒) 옛 집으로 이거하여 낙민제서(洛閩諸書: 程顥·程頤와 朱熹를 이르는 말로 性理學書를 가리킨다)를 종신토록 공부하였다. 저서로는 《현암집(玄嵒集)》 2권이 전한다. 《현암집(玄嵒集)》은 목활자본으로 서·발이 없어 편찬경위는 알 수 없다. 권두(卷頭)에 세계도와 목록이 있고, 권1에 시(詩) 48수, 서(書) 6편, 권2에 제문(祭文) 10편, 애사(哀詞) 1편, 잡저(雜著) 3편, 서(序) 2편, 기(記) 4편, 발(跋) 2편, 묘갈명(墓碣銘) 2편과, 부록(附錄)으로 묘갈명(墓碣銘)·행장(行狀)·유사(遺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산중생활의 묘사가 많고,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정감이나 계절의 느낌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서(書)에는 안부 외 시사(時事) 및 학술적 강론의 내용도 일부 들어 있다. 잡저(雜著)의 「부부설(夫婦說)」은 부부를 하늘과 땅에 견주어,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화육(化育)하듯 부부의 화합으로 가정을 화평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 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논한 것이다. 「계학도(戒學徒)」는 제자들을 경계한 글로,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의원과 약이 필요하듯, 학업의 성취를 위하여 스승의 경계를 귀담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였다. 「왕정기(王鼎記)」에는 고려 때 만들어진, 용량이 다섯 말에 무게가 80근이나 되는 타원형 솥이 500년이 지나도록 잘 보존되어온 일을 적었다. 「유대명동기(遊大明洞記)」는 문집 권2에 수록되어 있는데 계축년(1853년) 매우절(梅雨節)에 조경익(趙景益)과 함께 단서굴(丹書窟)을 유람하고 지은 것이다. 대명동을 유람했다고 한 것은 임진왜란 때에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 1531~1605)이 난리를 피해 이곳에 숨어살다가 명나라 황제가 원군을 보내주어 왜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대명일월(大明日月)’ 4글자를 새겼다는 전설이 있는데, 민치긍이 이 글씨를 보고 대명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서굴을 ‘대명굴(大明窟)’이라 고쳐 부르고, 밑에 있는 샛물을 ‘대명간(大明澗)’, 누대를 대명대(大明臺), 대아래의 작은 폭포를 ‘대명추(大明湫)’라 하고, 산 전체를 ‘대명동(大明洞)’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명나라에 대한 존숭심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 《玄嵒集》, 《朝鮮寰輿勝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후건(閔後騫)  1576(선조 9) ~ 1631(인조 9)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여수(汝叟). 호는 가산(可山)이다. 할아버지는 추(樞)이고, 아버지는 당음(棠陰) 종효(宗孝)이다. 천성이 온아하고 재기가 뛰어나서 어릴 때부터 시서(詩書)에 능통하였으며, 필법에는 더욱 능하였다.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청송 안덕면 성재리 산지봉 아래 가락곡에 가산정(可山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호를 가산(可山)이라 했는데 그 뜻은 평소 심신을 수양하면서 ‘은인 군자는 저 산과 같이 마음을 닦음에 저자거리에 있을 지라도 산을 대하는 듯 한 마음가짐으로 행실을 돈독히 해야 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수행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가산(可山)’이라 자호한 것이다
[참고] 《驪興閔氏世譜》
 
민흥(閔興)   1440(세종 22) ~ 1496(연산군 2)
본관 여흥(驪興). 자는 자기(子起). 호는 남은(南隱)이다. 문도공(文度公) 제(霽)의 증손이며 여흥민씨 청송 입향조이다. 여흥민씨는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민자건(閔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하여 불리워 진 가문인데 고려 때부터 명문 가문이었다. 민흥은 민칭도의 후손으로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고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있었다. 세간의 명리에 마음이 없어서 청송의 당저동으로 내려와 거처를 남은(南隱)이라 하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다.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둔생활로 일관했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이 행장을 쓰고 비문은 현손 민근효(閔根孝)가 썼으나 후에 외손 모계(慕溪) 김홍락(金鴻洛)이 비문을 써서 고쳐 세웠다. 사용(司勇)을 지냈다.
[참고] 《某溪集》, 《嶠南誌》, 《두산백과사전》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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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