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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32 (2026.03.05. 17:18)

조선시대 2 (금, 김)

 
• 금의(琴椅) 1489(성종 19) ~ 1551(명종 6)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중재(仲材)이다.
• 김근(金近) 1579(선조 12) ~ 1656(효종 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지(性之).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 김기수(金基洙) 1859(철종 10) ~ 1925 본관은 경주(慶州). 자 덕문(德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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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2 (금, 김)
 
 
금의(琴椅)   1489(성종 19) ~ 1551(명종 6)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중재(仲材)이다. 할아버지는 연(衍)이고, 아버지는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치담(致湛)이며, 어머니는 김담(金淡)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성균관(成均館), 예문관전적(藝文館典籍),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 등 청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늘 어머니의 병환을 염려하여 내직에 있기보다는 외직에 나가기를 원하여 울산부사(蔚山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역임하고,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이황(李滉)이 풍기에 있을 때 서로 왕래하며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참고]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근(金近)   1579(선조 12) ~ 1656(효종 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지(性之).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할아버지는 형윤(亨胤), 아버지는 군자감주(軍資監主) 안계(安繼)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중립(中立)의 딸이다. 그는 청송 진보 천현(泉峴)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열다섯이 되기도 전에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고, 독서를 할 때는 여러 줄을 한꺼번에 읽는 능력이 있었다. 또 한 번 읽은 것은 반드시 기억하여 큰 학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모든 일에 임해서는 확실한 태도로 처신했으며, 항상 겸손해서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하면서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다. 또한 평소 근엄해서 희롱조의 언행은 한 번도 듣지 못했고 성내(城內)에서 싸우는 곳이나 부귀와 권세의 문에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김용(金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류진(柳袗)과 정영방(鄭榮邦) 등과 교유하며 경전의 의미를 토론한 글이 수십 권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런 성취에 힘입어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유림노성(儒林老成)’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623년(인조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되었고, 1642년(인조 20)에 다시 식년시(式年試) 진사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그 뒤 초옥을 짓고 송(松)·죽(竹)·매(梅)·국(菊)·연(蓮)을 심고 ‘오우당(五友堂)’이라 호를 삼아 학문 연구에 힘쓰는 한편, 후학들을 모아 지도하였다. 중년 이후로 접어들면서 가정에 불우한 일이 빈번하였는데, 부인과 55세 때 사별하였고 네 아들 가운데 막내만을 제외하고 앞의 셋을 잇달아 잃는 우환을 겪은 일이 그것이다. 이런 비극을 연달아 당하자 “살아서는 내 자식이지만, 죽으면 내 자식이 아니다.”는 글귀를 벽에 붙여 놓고, 스스로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 아내는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낸 안동권씨 권위(權暐)의 딸이었고, 부인과의 슬하에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장남은 이장(爾章)이고, 둘째는 이상(爾相), 셋째는 이후(爾後), 넷째는 이성(爾聲)이다. 이 가운데 막내를 제외한 앞의 세 아들은 김근보다 앞서 죽었다. 딸들은 맏이가 조함일(趙咸一)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는 김수(金鐆)에게 시집을 갔으며, 셋째와 넷째는 각각 정기중(鄭基中)과 송시의(宋時毅)에게 시집을 갔다. 이밖에 서자로 이신(爾愼)이라는 아들과 딸 둘이 더 있었다. 사후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오우당집(五友堂集)》‧《사금록(沙金錄)》 등이 전한다. 《오우당집(五友堂集)》은 김근 사후 300여 년이 지난 뒤인 구한말에 간행된 관계로 생전에 그가 지은 저술들이 제대로 수합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난 뒤에 5대손인 회촌(檜寸)이라는 사람이 집안에 전해오던 유고와 주위에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필사본 3책으로 묶은 일이 있고, 그 뒤 다시 회촌의 조카인 귀와(龜窩) 김굉(金㙆)이 차례를 정리하고 서문(序文)을 붙여 간행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근의 증손인 구한말 의병대장 김도화(金道和)가 앞장서 문중의 힘을 모음으로써 비로소 목판본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문집의 내용 중 잡저(雜著)에 실려 있는 「자해(自解)」라는 글은 자식들이 앞서 죽는 등 중년 이후 겪은 연이은 가정사의 불행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53세 되던 해에 지은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자연의 이치일 뿐 억지로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정해진 명운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여 가정사의 슬픔을 달래고 있다. 또 「제사금록후(題沙金錄後)」라는 글은 김근이 평소 독서할 때 글 짓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구절들을 수시로 기록해 놓은 수십 편을 「사금록(沙金錄)」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지은 글인데, 유감스럽게도 정작 「사금록(沙金錄)」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부록(附錄)은 김근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挽詞)와 제문(祭文) 그리고 막내 상성이 쓴 「행록(行錄)」과 개곡(開谷) 이이송(李爾松)이 쓴 「묘지명(墓誌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쓴 「묘갈명(墓碣銘)」, 이종수(李宗洙)가 쓴 「귀와정사봉안문」, 이우(李堣)가 쓴 「추원사상량문(追遠祠上樑文)」 등이 들어 있고, 마지막으로 김흥락(金興洛)이 쓴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五友堂集》,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기수(金基洙)  1859(철종 10) ~ 1925
본관은 경주(慶州). 자 덕문(德文)이다. 1910년 국권피탈(國權被奪) 후 주권 회복을 위한 민중 계도에 솔선수범하였다. 기독교에 귀의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3월 26일에 화목(和睦)장터에서 조현욱(趙炫郁), 신태휴(申泰休) 등이 이끄는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같은 해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 《청송군사》,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두산백과사전》
 
김대규(金大圭)  1878(고종 15) ~ 1907(융희 1)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에 비분하여 의거하였다. 청송 주왕사(周王寺)와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이현규(李鉉圭)와 함께 경상도·강원도 지방의 의병 5백여 명을 모아 무술 훈련을 실시하고, 1906년(광무 10) 2월에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의 교동에 있는 자택에서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도포장(都砲將)으로 선임되었으며, 그해 4월 진보의 오루저수지에서 일본헌병 부토(武藤) 이하 1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5월에는 울진·죽변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11월에는 안동 임동면과 영양 입암면의 접경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적의 방화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金大圭義士傳》, 《독립운동사》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김대락(金大洛)  1851(철종 2) ~ 1905(광무 9)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학원(學源). 호는 만송(晩松)이다. 호암(壺岩) 만희(萬熙)의 증손이다.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김대락은 이와 같은 시기에 경북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생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의병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그는 처음 의진의 참모를 맡았으나 곧이어 전투편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같은 해 3월 20일 군사를 이끌고 광주(廣州)의진과 연계활동을 도모하는 등 군사활동에 나섰다. 이윽고 1896년 4월 2일 그가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이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참고] 《山南倡義誌》,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김로(金路)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석포(石圃)이다. 고려(高麗)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충신(忠臣) 광부(光富)이며, 부인은 청풍전씨(淸風全氏)이다.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도곡(道谷) 김한경(金漢卿)의 증조부가 된다. 불훤재(不諼齋) 신현(申賢)·이존오(李存吾)의 문인이다. 대사농(大司農)을 지냈고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옛 정을 잊지 못하여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갈천서원(葛川書院)에 배향되었고, 호조판서(戶曺判書)에 증직되었다.
[참고] 《義城金氏族譜》
 
김몽추(金夢鰍)  1578(선조 11) ~ 1634(인조 1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상(季祥). 호는 빙암(氷岩)이다. 도곡(道谷) 한경(漢卿)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유행(儒行) 응인(應仁)이다. 김몽추의 형인 월계(月溪) 김몽기(金夢麒)와 두헌(斗軒) 김몽룡(金夢龍)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정선번(鄭宣藩), 최인제(崔人濟)와 더불어 창의하여 양산(梁山), 경주(慶州), 청송(靑松) 등에서 군공이 있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김몽추는 기개가 크고 재주와 지혜가 통달하고 민첩하여 광해군 때 선전관(宣傳官)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에 무훈(武勳)을 떨침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옥포장(玉浦將)으로 대가(大駕)를 모시고 쫓음에 전선(戰船)을 심도(心都)에 거느리니 왕이 하교(下敎)하여 권고(勸告)를 포상하게 하였으며 공적이 실로 많았다. 벼슬은 목사(牧使)로 화의시(和議時)에 극간면쟁(極諫面諍)하니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오랑캐가 물러나자 복관(復官)되고 철거울[鐵鏡]을 하사받았으며, 훈판관(訓判官)에 제수(除授)되고 외직으로 황주목사(黃州牧使)에 올랐다.
[참고] 《義城金氏族譜》
 
김몽화(金夢和)  ? ~ 1636(인조 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보(良甫). 호는 대양(大洋)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주(宙), 아버지는 형조참판(刑曹參判) 세적(世勣)이며, 어머니는 교하노씨(交河盧氏) 노성민(盧聖敏)의 딸이다. 형제로는 목사(牧使)를 역임한 김기손(金麒孫)이 있다. 김몽화의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정철(金正喆)의 딸로, 슬하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지낸 송탄(松灘) 김한룡(金漢龍)과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에 추증된 김한옥(金漢玉)을 두었다. 1804년(순조 4) 순조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한 계하사목(啓下事目)에는 김몽화의 집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지금 경상도 청송에 사는 김덕형(金德衡) 등은 인조 때의 진무공신(振武功臣)이었던 김몽화의 자손들이다. 그의 선조는 공적이 높아 기린각(麒麟閣)에 그 공적이 소상히 기재되었다. 성왕(聖王)께서는 교지를 내리어, 그의 아들과 그 자손들도 세세로 수록하여 영세토록 용서하여 주시라 하셨다. 그 말씀은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에 아직도 나타나 있다. 그러니 지방관은 이 계하사목을 참고하여 그 집안을 받들어 살피라.” 이와 같이 김몽화의 집안은 조선시대 조정에서 대우를 받았던 명문세족이었다. 김몽화는 퇴계의 문인이자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김명원(金命元)에게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병법과 무술을 좋아하였지만 성리학적 소양도 깊은 인물이었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인조반정 때 김유(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과 같이 문천회맹(文川會盟)에서 논의하여 목숨을 걸고 일을 성공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 때에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沈器遠), 부원수(副元帥) 이서(李曙), 훈련대장(訓練大將) 신경진(申景禛) 등과 같이 안현(鞍峴)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이괄과 이수백(李守白) 등을 참살하였다. 그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훈(策勳)되고 녹권(錄券)을 하사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58세의 이미 노쇠한 몸이었으나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은 아직 간절하여, 늙은 몸으로 솔선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적진에 나아가 싸워 적의 머리 수백을 베었으나 아깝게도 적의 화살에 맞아 대동강(大同江)에서 전사하였다. 나라에서는 그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資憲大夫) 훈련원지사(訓鍊院知事)와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봉하고 그 증표로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하사하였다. 《문천회맹록(汶川會盟錄)》에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백석탄 계곡 언덕 위에 장군대가 있는데 김몽화의 아들인 김한룡이 순절한 김몽화의 갑옷과 투구를 이곳에 묻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 《嶺南人物考》,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김문희(金文熙)  1789(정조 13) ~ 1853(철종 4)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지(敬之). 호는 두암(斗巖)이다. 고려(高麗)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우룡(遇龍)이다. 화포(花圃) 권이충(權以忠)의 문인이다. 심학(心學)에 정진하였으며, 저서로는 《용학논맹수득록(庸學論孟隨得錄)》·《태극도설(太極圖說)》 등이 전한다.
[참고] 《廣瀨集》, 《朝鮮寰輿勝覽》
 
김삼락(金三樂)  1610(광해군 2) ~ ?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낙전(樂全)이다. 아버지는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 백일(百鎰)이며, 형제로는 김삼익(金三益), 김삼달(金三達)이 있다. 1633년(인조 11)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39년(인조 17) 기묘(己卯)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63년(현종 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김상길(金相吉)  1854(철종 5) ~ 1927
1896년(건양 1) 청송의진(靑松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정월 29일 청송지역 유생들이 의병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沈誠之)를 대장(大將)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中軍將), 남두희(南斗熙)를 우익장(右翊將),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김상길은 우익장에 임명되었고, 「창서사(唱誓詞)」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그 후 청송의진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참모(參謀)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韓末義兵日記》, 《乙未義兵期 靑松儒林의 義兵抗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김선영(金善英)  1605(선조 38) ~ ?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술이(述而)이다. 아버지는 극창(克昌)이며, 어머니는 이성림(李成霖)의 딸이다. 이상중(李尙重)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丙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63년(현종 1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김성달(金聲達)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증조부는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인 김한경(金漢卿)이며, 아버지는 해암(海庵) 세준(世俊)이고, 두와(杜窩) 성진(聲振)의 동생이다. 선조 때 판결사(判決事)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지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양(永陽)을 복성(復城)했다. 이로 인해 조방장(助防將)이 되었으며 후에 경주(慶州)에서 순절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김성원(金聲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오(季嗚)이다.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인 김한경(金漢卿)이 증조부이며, 아버지는 해암(海庵) 세준(世俊)이고, 두와(杜窩) 성진(聲振)의 동생이다. 봉사(奉事)의 관직으로 임란(壬亂)에 성달(聲達)과 재종질(再從姪) 몽기(夢麒)와 더불어 창의하여 영양(永陽)에 가서 좌격부장(左擊副將)이 되었으며 경주와 울산에서 큰 공을 세웠다. 나라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좌절도사(左節度使) 박진(朴晋)의 저지가 있어 병을 핑계 삼아 나아가지 않았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후손 상목(相穆)이 행록(行錄)을 찬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김성진(金聲振)  1558(명종 13) ~ 1634(인조 1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대명(大鳴). 호는 두와(杜窩)이다.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인 김한경(金漢卿)이 증조부이며,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김세준(金世俊)이다. 영특하고 총명하였다. 처음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면서 “독서란 올바른 사람이 되는 도리를 배우는 것이다. 사람의 도리 가운데에는 ‘효제(孝悌)’가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하고는 곧 집안의 가훈으로 삼아 조금의 소홀함도 없이 독실히 실천하였다. 장성해서는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두루 접하여 식견을 넓히고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어 하음(河陰) 신집(申楫)·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방호(方壺) 조준도(趙遵道) 등의 여러 유현(儒賢)들과 도의(道義)를 닦고 충효(忠孝)에 대하여 서로 권면하였다. 임진왜란 때 두 동생 성원(聲遠)·성달(聲達)에게 “우리들은 이 나라가 길러준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듯 위태로움을 만났거늘 숨어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려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는 충의(忠毅) 권응수(權應銖)의 의진(義陣)에 참여시키고 노모(老母)를 보호하였다. 평소에 수석(水石)을 좋아하여 용계(龍溪)에 침류정(枕流亭)을 짓고 서사(書史)로 마음을 다스리며 평생토록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옥같은 얼굴이 더욱 빛이 나고 행동에 중후함이 있어 보는 사람들이 ‘높은 소나무 같다.’고 하였다. 영특한 자질에 독실함이 더해져 식견은 젊어서부터 넓고 깊었으니, 그 행동은 향리(鄕里)의 규범이 되고 학문은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은 “한 집안에 충과 효가 함께 모였도다.”라고 하였다. 현재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에 그가 지은 침류정(枕流亭)이 남아있다.
[참고] 《拓菴先生文集》
 
김숭진(金崧鎭)  1850(철종 1) ~ 1919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가하여 서기(書記)로서 경북 청송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김숭진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더욱이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시행되자, 그것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1896년(건양 1) 정월에 안동의병진의 류시연(柳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와 군기고를 습격하였으며, 외지에서 격문(檄文)이 내도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청송의 유생들은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1896년 정월 29일 심성지를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이 때 그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동참하였다. 그리고 2월 2일 청송의진의 참모와 서기 등 지도부를 선임하였는데 그는 서기로 임명되어 3일부터 인근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를 훈련하는데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5일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하여 군자금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9일에 참모진을 구성하였는데, 김대락(金大洛)으로 중군장을 삼고, 남두희(南斗凞)로 우익장을 삼았다. 10일에는 참모 남승철(南升喆)을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삼았다. 그 후 대구에서 일본군이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일 심성지 의병장은 중군장 김대락에게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가서 청송 감은리(甘隱里)의 뒷산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래서 청송·의성·영천의 3의병진이 연합하여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의병진은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적병 7,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날이 저물자 적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그는 의병진의 서기로서 적병과 교전하여 뛰어난 전공이 그 뒤 청송의 의병진은 고종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져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김시보(金時保)  1658(효종 9) ~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경(士敬). 호는 모주(茅洲)이다. 증조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광현(光炫), 아버지는 성우(盛遇)이며 형제로는 시걸(時傑)이 있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1684년(숙종 10)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음서로 관직에 나가 공조좌랑(工曹佐郞), 간성 군수(杆城郡守), 무주부사(茂朱府使) 등을 거쳐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1721년(경종 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지만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세사(世事)에 관여하지 않았다. 충청도 홍주(洪州:지금의 홍성) 일대에 많은 논밭과 토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서울 북악산 기슭의 자하문(紫霞門) 가까이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풍류를 좋아하고 진경시(眞景詩)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모주집(茅州集)》이 전한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김씨(金氏)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명문가 사대부의 딸인 경주김씨는 1896년 의성군 금성면 구미에서 태어나 18세 때 청송군 현서면 도리에 사는 의성김씨 가문에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은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여 집을 나간 후 삯바느질과 품팔이로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살았다. 시아버지가 병들어 눕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꿀을 구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는데 김씨가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니 호랑이는 부인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길을 인도하여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극진히 봉양한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장사를 지낼 걱정을 하고 있는데, 집을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니 사람들은 김씨의 정성과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했다. 김씨가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이 그 뜻을 기려 비각을 세웠다. 현재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에 경주김씨효부각(慶州金氏孝婦閣)이 있다.
[참고] 《두산백과사전》
 
김용익(金龍瀷)  ? ~ 1728(영조 4)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중현(仲見). 호는 송고(松皐)이다. 경헌(敬軒) 석기(碩基)의 증손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판서(判書) 권엄(權儼)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송고집(松皐集)》·《구인편(求仁篇)》·《사칠록(四七錄)》·《상례(喪禮)》 등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김우굉(金宇宏)  1524(중종 19) ~ 1590(선조 2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이다. 종혁(從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도승지(贈都承旨) 치정(致精)이고, 아버지는 봉렬대부행예조정랑(奉列大夫行禮曹正郞)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청주곽씨(淸州郭氏)이다. 형제로는 김우홍(金宇弘), 김우용(金宇容), 김우옹(金宇顒)이 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명종 20)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그 뒤 주서(注書), 대교(待敎), 봉교(奉敎), 전적(典籍),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 정랑(正郞), 지제교(知製敎), 정언(正言), 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 1578년(선조 11)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兵曹參議)·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선조 15)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가 형조참의(刑曹參議),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使),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靑松府使), 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우옹(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만년에 봉화의 해저(海底)에 터전을 잡았는데 이후로 그의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특히 현손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의 후손들 가운데 현달한 이들이 많이 나왔다. 지금도 해저(속명 바래미)에 세거하는 의성김씨는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중 하나이다. 사후 상주 속수서원(凁水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우굉의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김득가(金得可)·김달가(金達可)이다. 딸은 유성귀(柳成龜)와 혼인하였다. 저서로 《개암문집(開巖文集)》이 있다. 《개암문집(開巖文集)》을 살펴보면, 《개암문집(開巖文集)》은 4권 2책, 목판본으로 1729년(영조 5) 그의 5세손인 여용(汝鎔)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卷頭)에 이광정(李光庭)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여용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시(詩) 17수, 부(賦) 7편, 권2는 소(疏) 6편, 차(箚) 1편, 계사(啓辭) 1편, 교서 2편, 권3은 서(書) 4편, 잡저(雜著) 3편, 발(跋) 1편, 제문(祭文) 2편, 묘문(墓文) 1편, 권4는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만사(輓詞)·제문(祭文)·봉안문(奉安文)·복향문(復享文)·남명사우록(南冥師友錄)·경산지(京山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작품 중 《서행일기(西行日記)》는 그의 강직한 선비로서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자료이다. 그는 당시 상소를 통해 사림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상소문의 상주과정에 있어서 그 명분과 찬술, 및 사림의 의견 수렴, 조정 관리들과의 연계와 규합과정, 체류 경비 조달과정, 전체 일정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일기 속에는 특히 서울에 있을 때 당시 좌랑(佐郞)이던 율곡 이이가 두 번이나 격려 차 그를 방문했다는 내용도 있다.
[참고]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石潭日記》, 《陶山及門諸賢錄》, 《開巖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응건(金應楗)  1808(순조 8) ~ 1885(고종 2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두(景斗). 호는 기암(棄嵒)이다. 석기(碩基)의 현손으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식견이 넓고 학문이 정밀하여 여러 차례 스승의 칭송을 받았다. 모친이 병이 들자 북두칠성에 자신의 몸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빌며 단지주혈(斷指注血)하였다. 저서로는 《기암집(棄嵒集)》 4권 2책이 전하는데, 이는 목활자본으로 1893년(고종 30) 저자의 제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종기(李種杞)의 서(序)가 있고, 발문(跋文)은 없다. 권1에 시(詩) 163수, 권2·3에 서(書) 53편, 잡저(雜著) 4편, 권4에 서(序) 2편, 애사(哀詞) 2편, 제문(祭文) 15편, 고유문(告由文) 2편, 상량문(上樑文) 1편,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 1편, 묘갈명(墓碣銘) 1편, 행록(行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자연경물이나 자신의 감정에 관한 것은 드물고, 대부분 학문적인 내용으로 도학자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서(書)는 학문하는 자세와 성리학에 관한 내용을 주고받은 것인데 특히, 그의 스승 유치명(柳致明)과 주고받은 서(書)는 《대학(大學)》에 관하여 조목조목 묻고, 이에 대한 답을 그 조항 아래에 적어 놓았다. 잡저(雜著) 중 「하도수기의(河圖數記疑)」는 팔괘(八卦)의 수를 논하면서 《주역(周易)》의 수(隨)·예(豫)·수(需)·비(否)·태(泰)·관(觀)·항(恒)·돈(遯) 등의 괘상(卦象)·괘사(卦辭)를 예로 인용하고, 주희(朱熹)와 소옹(邵雍)의 설을 원용하여 비교적 간명한 설명을 하였다.
[참고] 《棄嵒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응정(金應楨)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여간(汝幹). 호는 백음(栢陰)이다. 송고(松皐) 용익(龍瀷)의 아들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명수(明粹)하고 입지(立志)가 견독(堅篤)하여 가학(家學)을 잇고 학문을 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종 때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후손 상목(相穆)이 유사(遺事)를 찬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김정하(金鼎夏)  1608(선조 41) ~ ?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구용(九用)이다. 아버지는 신(信)이다. 형제로는 정주(鼎周)가 있다. 1650년(효종 1)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그 해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68년(현종 19)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5년 이상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김진구(金鎭球)  1875(고종 12) ~ ?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천응(天應). 호는 청암(靑岩)이다. 아버지는 재헌(在憲)이며, 형제로는 진성(鎭聲)이 있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문인이다. 고종 때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문사가 정밀하고 전고에 밝았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김진구(金鎭九, 金鎭方) 1854(철종 5) ~ 1914
1896년(건양 1)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儒林)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 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의진을 확장하던 같은 해 3월 김진구도 투신하여 현서 외방장(縣西外防將)에 선임되었다. 현서는 청송의 외곽지역으로 의성 및 신녕(新寧)과 인접해 적군 침입의 관문에 해당하므로 특별히 그를 이 지역의 외방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이윽고 1896년(건양 1)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義城金氏族譜》, 《赤猿日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진성(金鎭聲)
본관은 의성(擬聲). 자는 이진(而振). 호는 성오(城塢)이다.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한경(漢卿)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재헌(在憲)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총명하였으며, 효우(孝友)가 돈독하여 향당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학문에도 힘썼는데 특히 예학(禮學)을 깊이 하였다. 자손에게 《훈모서(訓謨書)》를 남겼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김진영(金震榮, 金海榮) 1876(고종 13) ~ 1921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중옥(重玉). 호는 벽초(碧樵)이다. 빙암(氷巖) 김몽추(金夢鰍)의 11세손이다. 1896년(건양 1) 창의시에 청송중군장(靑松中軍將)이 되어 국내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였고, 1907년(융희 1)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1896년(건양 1) 을미의병 당시 청송의진의 중군장을 역임한 부친 김대락(金大洛)의 기개를 이어받은 김진영은 국내 각처를 역방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광무 10) 경북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산남의진을 결성한 바 있는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융희 1) 4월 경북 북동산(北東山)에서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재조직하였다. 이때 김진영도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장영서장(將營書掌)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김진영도 입암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진이 흩어짐에 따라 은신하였다. 이후 그는 재기를 모색하며 전국 각지를 순방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山南倡義誌》, 《山南義陣遺史》, 《義城金氏世譜》, 《獨立運動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김진표(金震標)  1614(광해군 6) ~ 1671(현종 1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건중(建中). 호는 오애(迕涯)이다. 증영의정(贈領議政) 여물(汝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유이고, 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경징(慶徵)이며, 어머니는 박효성(朴孝誠)의 딸이다. 정백창(鄭百昌)의 딸과 윤경지(尹敬之)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633년(인조 11)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고, 1653년(효종 4) 계사(癸巳) 별시(別試)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그의 아버지는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로서 방어 실패의 책임으로 사형을 당했고, 어머니와 할머니 유씨는 정절을 위해 자결하는 비운을 겪었다. 1651년(효종 2) 빙고별검(氷庫別檢)과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등을 지내고, 1653년(효종 4)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 1654년(효종 5)에는 청풍군수(淸風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조정에서는 충청도 여러 고을에 화약을 만들어 바치게 함으로써 그 기술을 숙달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매입하여 바쳤다가 감사에게 적발되어 중도부처(中道付處: 죄가 가벼운 경우 귀양 가는 도중에 자신이 장소를 지정할 수 있는 형벌)되었다. 1656년(효종 7)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된 뒤, 무송·삼척·부평 등의 수령을 지냈고, 1658년(효종 9)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1671년(현종 12) 돈녕부도정(敦寧部都正)에 임명되었다가 곧 병으로 죽었다. 권세가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깊이 잠심하였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시문집을 남겼으나 현재 전하지는 않고 있다.
[참고]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國朝文科榜目》, 《芝村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초순(金初淳)  1776(영조 52) ~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경(太卿)이다.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수증(壽增)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교관(敎官)을 지낸 준행(峻行), 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이현(履顯)이며, 어머니는 이명휘(李命彙)의 딸이다.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이조승(李祖承)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04년(순조 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21년(순조 21)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치적이 있었다.
[참고] 《嶠南誌》, 《搢紳譜》
 
김취문(金就文)  1509(중종 4) ~ 1570(선조 3)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菴)이다. 아버지는 광좌(匡佐)이며, 어머니는 임무(林珷)의 딸이다. 이인부(李仁符)의 딸과 이이(李儞)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어려서부터 형 취성(就成)과 함께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그 학통을 이었고, 문장을 잘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1537년(중종 32) 정유(丁酉)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거쳐, 1541년(중종 36) 형조(刑曹)·예조(禮曹)의 좌랑(佐郞)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다. 1544년(중종 39)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 이듬해 수찬(修撰), 1547년(명종 2) 호조(戶曹)·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와 영천군수, 청송부사(靑松府使), 상주목사(尙州牧使),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1565년(명종 20) 사성(司成)과 집의(執義), 교리(校理), 호조참의(戶曹參議),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자주 외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외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을 침탈함이 전혀 없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또한 경세적(經世的)인 관심도 커서 지방 수령으로 전전할 때 시정(時政)에 대한 건의사항을 왕에게 주달한 것이 문집에 많이 남아 전한다. 처음 시호를 정간(貞簡)이라고 했다가 뒤에 문간(文簡)으로 바꾸었다. 저서로는 《구암집(久菴集)》이 남아 있다. 《구암집(久菴集)》을 살펴보면, 4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며 1791년(정조 15) 현손 몽의(夢儀)·몽화(夢華)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卷頭)에 정범조(丁範祖)와 김종수(金鍾秀)의 서와 권말(卷末)에 오재순(吳載純)과 최광벽(崔光璧)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 1·2에 시(詩) 12수, 소(疏) 2편, 차(箚) 1편, 계(啓) 8편, 서(書) 5편, 기(記) 1편, 설(說) 1편, 발(跋) 2편, 잡저(雜著) 4편, 논(論) 3편, 책(策) 1편, 묘갈(墓碣) 1편, 행장(行狀) 1편, 권3·4는 묘지(墓誌) 5편, 부록(附錄)으로 묘지 1편, 행장(行狀) 2편, 제현기술(諸賢記述) 13편, 사제문(賜祭文) 1편, 제문(祭文) 8편, 만사(輓詞) 33수, 봉안문(奉安文) 1편, 고유문(告由文) 1편, 선액사제문(宣額賜祭文)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시운이 청절하고 품격이 매우 높다. 「유관동(遊關東)」은 강원도 지방 산수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청정상례소(請正喪禮疏)」는 예의 제정과정에서 개설적인 조항만을 다루고 부분적인 세부사항의 규정이 없어 시행 과정에서 당시의 상황과 집례자의 의견에 따라 집행되어 본제에 오류가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오례(五禮) 중에서 상례는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획일성을 기하는 것이 풍속의 교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바로잡을 것을 건의하였다. 「헌부계(憲府啓)」는 1545년(인종 1)에 있었던 윤임(尹任)의 옥사,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의 옥, 1549년(명종 4)에 있었던 이홍윤(李洪胤)의 옥사에 연루된 무고한 사람들을 방면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치도책(治道策)」은 정치는 정도에 맞도록 해야 하는데 《대학(大學)》의 삼강령이 바로 치도라고 설명하면서, 정심·성의·수신·치국의 길이 치도이며, 치도는 군신이 합심하여 이루어지지만 임금이 솔선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이밖에도 오자서(伍子胥)의 충절을 논한 「오자서론(伍子胥論)」과 방외의 교재로 승려에게 도의 원리를 논한 「증금강승영응(贈金剛僧靈應)」이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형 취성(就成)의 유고가 실려 있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久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태진(金泰鎭)
경북 청송의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심성지 의진은 1896년(건양 1) 1월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儒林)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 김태진도 의진 편성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1896년(건양 1)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김한경(金漢卿)  1456(세조 2) ~ 1552(명종 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보(國寶). 호는 도곡(道谷)이다. 고려 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의성군 남파(南坡) 광부(光富)의 현손으로, 증조부는 사농경(司農卿)에 오른 석포(石圃) 로(路)이다. 조부 숙량(叔良)은 석포(石圃) 로(路)의 둘째 아들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당진감무(唐津監務)를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그리고 다시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아버지 김자중(金自中)은 김숙량의 셋째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과 오위(五衛)의 사직(司直)을 거쳐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건공장군(建功將軍)의 품계(品階)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동생들과 함께 창의하여 전공을 세운 김성진(金聲振; 1558~1634)은 김한경의 증손이다. 김한경은 어렸을 적부터 학문이 뛰어나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류순정(柳順汀) 등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공을 인정받아 1506년(중종 1)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훈록(勳錄)되었고,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반정을 성공시킨 뒤에 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훈록을 둘러싸고 파를 지어 싸우는 것을 보고 중앙정치에 염증을 느껴,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도리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도곡정(道谷亭)을 짓고 독서와 강론을 하며 평생을 조용히 지냈다. 그렇게 청송에 입향하여 자연과 함께 글과 함께 지내던 김한경은 1552년(명종 7)에 향년 9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추원당의 서편(추원당 대문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보면 무덤이 보인다) 산중턱에 묻혔다. 저서로는 《도곡실기(道谷實記)》가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김항(金沆)   1613(광해군 5) ~ 1691(숙종 1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수보(壽甫)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을 지낸 동와(東窩) 흥서(興瑞)이다. 품성이 순수하며 가학을 계승하여 사우(士友)가 추중(推重)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참고] 《義城金氏族譜》
 
김홍경(金洪慶)  1621(광해군 13) ~ 1691(숙종 17)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여(子餘)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헌납(獻納) 덕승(德承)이다. 형제로는 김홍명(金洪命), 김홍범(金洪範), 김홍복(金洪福)이 있다. 갑봉(甲峰)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의 아버지이다. 1651년(효종 2)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53년(효종 4) 빙고별검(氷庫別檢)을 거쳐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1681년(숙종 7) 진산군수(珍山郡守)로 있을 때 그 지방을 잘 다스려 포상을 받았으며, 1691년(숙종 17)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을 지냈다. 평소에 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윤휴(尹瓗)와 교유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참고] 《玉吾齋集》, 《朝鮮儒學史》, 《司馬榜目》
 
김홍미(金弘微)  1557(명종 12) ~ 1605(선조 38)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다. 예강(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윤검(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범(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류운룡(柳雲龍)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형제로는 김홍민(金弘敏)이 있다. 조식(曺植)과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김홍미는 7~8세가 되었을 때 단정하고 묵중하여 장난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글을 읽어서 대의를 깨우쳤으며 기억력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성주의 수령으로 있던 김극일이 시에 능하여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김홍미는 그에게 시를 배웠다. 김홍미는 한퇴지의 남산이라는 시를 배우고서 물러나 앉아 한 차례 읽었는데, 김극일이 시험 삼아 묻기를 “능히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김홍미는 그 자리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웠다고 한다. 김홍미는 자사(子史)와 제가(諸家)를 두루 통하여 환하게 알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특히 고금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이유와 인물의 충사(忠邪)와 현부(賢否)의 자취에 대해 밝게 알았다. 강연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옛 사실을 인용해 오늘날의 일을 증명하면서 자세하게 분변해 도를 같이 하고 일을 함께하는 규례를 다하였는데, 심지어 옛말을 인용할 적에는 잇달아 10여 줄을 줄줄 외우면서 증명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매번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면서 그때마다 대단하고 대단하다는 탄성을 연발하였다. 그 뒤에 경연 석상에서 말이 미치면 반드시 해박하다고 칭찬하였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저작(著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을 거쳐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1589년(선조 22)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도사(慶尙左道都事)가 되고, 이어 교리(校理) 겸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經筵官), 응교(應敎), 사간(司諫), 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左部承旨)·훈련도감제조(訓練都監提調)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선조 31)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선조 37)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버지인 후계 김범은 경북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고, 아들인 김홍민은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김홍미는 경북 상주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성극당문집(省克堂文集)》이 전한다. 《성극당문집(省克堂文集)》은 4권 2책으로 목판본이며 1933년에 후손 인식(仁植)·원철(元喆)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송준필(宋浚弼)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직원(直源)과 원철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에 부(賦) 8편, 시(詩) 81수, 소(疏) 2편, 기(記) 1편, 발(跋) 1편, 제문(祭文) 2편, 축문(祝文) 2편, 묘지명(墓誌銘) 1편, 행장(行狀) 4편, 권4는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 등이 실려 있다. 시(詩)는 유두(流頭)·중구일(重九日)과 같은 명절에 감회를 읊은 것과, 「존양성찰(存養省察)」처럼 수양의 중요성을 읊은 것, 그리고 술을 마시며 자연의 경관을 읊은 것 등 그 내용이 다양하다. 윤회보(尹晦甫)·이극효(李克孝)·황도광(黃道光), 스승인 류성룡(柳成龍) 등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도 있다. 계사(啓辭)는 대부분이 사직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서(書)는 대부분 당대의 명망가인 류성룡·정탁(鄭琢)·한준겸(韓浚謙) 등과 주고받은 것이 많다. 잡저의 「무극이자출어노자론(無極二字出於老子論)」은 ‘무극’이라는 말은 본래 노자가 하였다고 한 송나라의 유학자 육구연(陸九淵)의 설을 비판하고 정통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태극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또한, 「제승수변책(制勝守邊策)」은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남명 조식에 대한 제문도 있다. 한편 저자의 행장과 묘지명은 함께 학문을 연마한 이준(李埈)과 정경세(鄭經世)가 지었다.
[참고]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谿谷集》, 《德山師友淵源錄》, 《省克堂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김확(金確)   1620(광해군 12) ~ 1699(숙종 25)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한보(漢輔). 호는 송은(松隱)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개성유수(開城留守) 천일(千一)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형제로는 김린(金磷)이 있다. 김확의 배우자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인데, 그 슬하에 아들 김기량(金起良; 1656~1735)을 두었다. 김기량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김확은 유복하고 교양 있는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고 덕성을 수양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과 무리 지어 놀기보다는 책 읽고 사색하며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20세에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의 장인은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이효원(李孝元)이라는 학자였다. 이 덕분에 그는 결혼 후 장인에게 성리학의 이론과 실천을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다. 배움이 무르익을 무렵, 김확은 치국안민(治國安民)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고, 임금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화해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김확은 식솔들을 데리고 천안에서 남쪽으로 피난하여 청송(靑松) 대곡(大谷)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는 “주상께서 욕을 당하셨다면 그 신하는 죽는 것이 마땅한 의(義)이다.”라고 탄식하고는 죽을 마음으로 청송에 은거하였다. 대둔산 아래에 은거하며 백이(伯夷)처럼 베옷을 입고 고사리를 먹으며 지냈다. 작은 정자를 하나 건축하고 주변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으며 자신의 사는 모습을 소나무 숲 속에 감추겠다는 뜻에서, 정자의 이름을 ‘송은정’(松隱亭)이라 하고 자호(自號)도 ‘송은’이라 했다. 김확은 종일 책상 앞에서 글을 읽었고, 쉴 때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자연과 함께 휴식하였다. 이렇게 평생을 살다가 1699년(숙종 25) 80세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후손들은 김확을 중시조로 삼아 청송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후손들은 《송은공파세보(松隱公派家譜)》를 만들어 김확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김확은 특별히 남긴 저작이 없고, 다만 송은정의 기문(記文)이나 지인의 비문(碑文), 시문(詩文) 등의 유고가 남아 있었으나,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수해가 발생했을 때 모두 유실되었다고 한다.
[참고] 《嶠南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김효건(金孝建)  1752(영조 28) ~ 1815(순조 1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충백(忠伯)이다. 상현(尙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익환(益煥)이고, 아버지는 종범(宗範)이며, 어머니는 남응로(南膺老)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주서(注書)와 태천현감(泰川縣監)을 거쳐 좌부승지(左部承旨),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1801년(순조 1)부터 안주목사(安州牧使), 여주목사(驪州牧使),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고, 1812년(순조 12)에는 양주목사(楊州牧使)로서 원릉(元陵)의 보수에 공을 세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1813년(순조 13)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참고]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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