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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36 (2026.03.05. 17:27)

조선시대 6 (심)

 
• 심강(沈鋼)   1514(중종 9) ~ 1567(명종 2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유(伯柔)이다.
• 심건(沈鍵)   1519(중종 14) ~ 1550(명종 5)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계(重啓)이다.
• 심결(沈決)   1419(세종 1) ~ 1470(성종 1)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통지(通之)이다.
...
<조선시대> 1 (강 ~ 권)
 
 
강복성(康復誠)  1550(명종 5) ~ 1634(인조 12)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이다. 증조부는 중진(仲珍), 아버지는 유선(惟善)이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2등(二等)으로 합격한 뒤, 참봉(參奉), 직장(直長), 찰방(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선조 28)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었으며, 곧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옮겼는데, 이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고양군수(高陽郡守)와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때에 시강(侍講)한 인연이 있다 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部承旨)를 거쳐 평산부사(平山府使), 전주부윤(全州府尹), 청송부사(靑松府使) 등의 외직에 보임된 뒤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제수받았다. 이때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군수를 제수받았으며, 곧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옮겼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고,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노쇠하여 향리인 선산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찍이 재행(才行)을 겸비하고 학술이 정심(精深)한 것으로 천거되었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을 받은 바도 있었다. 저서로는 《죽간집(竹磵集)》이 있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竹磵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석신(姜碩臣)  1639(인조 17) ~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위로(渭老)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호조정랑(行戶曹正郞) 전(琠)이며, 생부는 통덕랑(通德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욱(頊)이다. 형제로는 강석빈(姜碩賓)이 있다. 1654년(효종 5)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2등(二等)으로 합격하였다. 1701년(숙종 27)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강세구(姜世龜)  1632(인조 10) ~ 1703(숙종 29)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보(重寶).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다. 대사헌(大司憲) 첨(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학년(鶴年)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호(鎬)이며, 어머니는 윤지경(尹知敬)의 딸이다. 형제로는 강세봉(姜世鳳), 강세린(姜世麟)이 있다. 1660년(현종 1)에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76년(숙종 2) 강릉참봉(江陵參奉)에 기용되었으며, 1678년(숙종 4)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校理)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689년(숙종 15)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1692년(숙종 18)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693년(숙종 19)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이듬해 왕의 유행(遊幸)을 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698년(숙종 24)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1701년(숙종 27) 장희빈(張禧嬪)을 사사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홍원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복관되고, 회덕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참고] 《肅宗實錄》, 《國朝文科榜目》, 《星湖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식(姜植)   1648(인조 26) ~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고(子固)이다. 증조부는 홍중(弘重), 할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함흥진관병마절제도위(咸興鎭管兵馬節制都尉) 급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진보현감(通訓大夫行眞寶縣監) 석로(碩老)이며, 어머니는 성곡(成穀)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689년(숙종 15) 기사(己巳) 증광시(增廣試)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다. 1692년(숙종 18) 안음현감(安陰縣監), 1704년(숙종 30) 금정찰방(金井察訪), 1707년(숙종 33) 은율현감(殷栗縣監) 등의 관직을 거쳤다.
[참고] 《承政院日記》, 《司馬榜目》
 
강진선(姜進善)  ? ~ 1908(융희 2)
1907년(융희 1) 8월 안동 진위대(安東 鎭衛隊)에서 하사로 활약하다가 진위대가 해산되자 부하 200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안동(安東)·진보(眞寶)·청송(靑松)·의성(義城) 일대에서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 후 1908년(융희 2) 4월 24일 대구(大邱)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第1卷, 《獨立運動史資料集》 第3輯,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강홍중(姜弘重)  1577(선조 10) ~ 1642(인조 20)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도촌(道村)이다. 온(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필(士弼)이고, 아버지는 승지(承旨) 정(綎)이며, 어머니는 정응규(鄭應奎)의 딸이다. 형제로는 강홍량(姜弘亮)이 있고, 윤기정(尹起禎)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3년(선조 36)에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병조좌랑(兵曹佐郞), 통례(通禮)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이어 세자시강원정언(世子侍講院正言),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거쳐 장령(掌令), 필선(弼善)을 차례로 지냈다. 관직에 있으면서 정치수완이 뛰어나 많은 공적을 쌓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문사랑(問事郎)으로서 정치적 물의를 일으키던 대북파의 죄상을 다스렸다.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낸 뒤 회답부사(回答副使)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후에 승진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랐다. 이때 일본의 화포술(火砲術)을 전하여 군에 실용하도록 하였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연안부사(延安府使), 도총부총관(都總部總管)을 지냈다. 강원감사(江原監司)로 있을 때 1633년(인조 11)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영병(營兵)에 대하여 조총의 공급과 화약의 지급 등을 주청하여 실행하였고, 포수의 훈련 등에 열중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공평한 세의 부과에도 최선을 다했다. 1635년(인조 13) 명나라 도독의 협판사가 되어 활약하면서 명나라의 사정과 후금의 동정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청송부사(靑松府使),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참고]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典故大方》, 《東溟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휘옥(姜彙鈺)  1748(영조 24) ~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덕(爰德)이다. 증조부는 재주(載周), 할아버지는 문좌(文佐)이며, 아버지는 윤성(允成)이다. 어머니는 이규헌(李奎獻)의 딸이다. 1775(영조 51) 을미(乙未) 전시(殿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며 1810년(순조 10)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반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고경허(高景虛)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응실(應實). 호는 아계(丫溪)이다. 증조부는 태보(台輔), 할아버지는 계조(繼祖)이고, 아버지는 한형(漢衡)이며, 어머니는 신희연(申希演)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명성이 있었다. 1546년(명종 1) 유학으로서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명종 7)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 김주(金澍)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첩의 아들을 적자로 하였다 하여 탄핵하였다. 1554년(명종 9) 평안도감군어사(平安道監軍御史)로 나가 진상하는 데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부담을 들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1555년(명종 9) 헌납(獻納), 이듬해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557년(명종 12)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양사(兩司)로부터 성품이 어리석고 시비에 어둡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1565년(명종 20) 교리(校理), 사간(司諫)을 거쳐 이듬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집의(執義)가 되었다. 1571년(선조 4) 승지(承旨)가 되고, 1574년(선조 7)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그 지방의 폐단을 제거하고 그 지역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같은 해 전시(殿試)에서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1579년(선조 12)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현재 청송에 있는 수고정(秀孤亭)은 고경허가 청송부사로 있으면서 세운 정자이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응경(高應擎)  1524(중종 19) ~ ?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백량(伯樑)이다. 제주고씨 시조(始祖)인 을나(乙那)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석동(碩仝), 할아버지는 식업(識業), 아버지는 몽담(夢聃)이며, 어머니는 정세형(鄭世亨)의 딸이다. 형제로는 응진(應振), 응신(應辰), 응척(應陟), 응양(應陽), 응립(應立)이 있다. 1564년(명종 19)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으로 합격하고 벼슬은 훈도(訓導)를 지냈다. 형 응근(應根)과 동생 응섭(應涉)과 더불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두산백과사전》
 
고응척(高應陟)  1531(중종 26) ~ 1605(선조 3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명(叔明). 호는 두곡(杜谷) 또는 취병(翠屛)이다. 증조부는 석동(碩仝), 할아버지는 식업(識業), 아버지는 몽담(夢聃)이며, 어머니는 정세형(鄭世亨)의 딸이다.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에 처음으로 이거하여 개척하여 살았다. 김범(金範)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고향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여 《대학》과 《주자혹문(朱子或問)》 등을 읽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둘째형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기를 권하였으나, 성현의 글이 있는데 하필이면 한유의 문장을 배울 것이냐고 거절하였다. 여러 해 동안 《대학》을 탐독하였는데 심지어 식사까지 거르며 학문에 열중하여 마을사람들이 미친 사람처럼 여겼다. 1561년(명종 16)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이듬해 함흥교수로 부임하였다가, 1563년(명종 18) 사직한 뒤 시골에 묻혀 도학을 연마하였다. 또한, 《대학》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어 교훈시를 만들고, 사상을 시(詩)·부(賦)·가(歌)·곡(曲)으로 체계화하였다. 1595년(선조 28) 풍기군수(豊基郡守)에 이어 회덕현감(懷德縣監), 사성(司成) 등을 역임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1605년(선조 38)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하였다. 1702년(숙종 28)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두곡집》, 《대학개정장(大學改正章)》이 있으며, 시조작품에는 「도부(道賦)」, 「탄시(嘆詩)」, 「차기음(差鮫吟)」, 「두곡우음(杜谷偶吟)」, 「유감(有感)」, 「임인제야시(壬寅除夜詩)」 등이 있다.
[참고] 《宣祖實錄》, 《國朝文科榜目》, 《國朝人物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곽규(郭赳)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극정(克靜)이다. 증조부는 승화(承華)이고, 할아버지는 위(瑋)이며, 아버지는 통훈대부전행선산도호부사(通訓大夫前行善山都護府使) 지번(之藩)이다.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린(許磷)의 딸이며, 아내는 홍서린(洪瑞隣)의 딸이다. 형제로는 곽초(郭超)·곽월(郭越)·곽필(郭䟆)이 있다. 1546년(명종 1)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555년(명종 10)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72년(선조 5)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2년 동안 고을을 다스렸다.
[참고] 《嶠南誌》,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곽순(郭珣)   1502(연산군 8) ~ 1545(명종 즉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백유(伯瑜). 호는 경재(警齋)이다. 성기(成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원(孝元)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수녕(遂寧)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김철단(金哲端)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호조좌랑(戶曹佐郞), 진보현감(眞寶縣監), 기주관(記注官) 등을 거쳐, 1543년(중종 38) 서천군수(瑞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사예(司藝), 사성(司成),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는 장령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1545년(인종 1)에는 교리(校理)와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냈으며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소윤과 대윤 간의 세력투쟁이 첨예화하더니 마침내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심하자 관직을 포기하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입산하였으나 을사사화 때에 장살 당하였다. 1568년(선조 1)에 관직이 환수되고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乙巳傳聞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곽월(郭越)   1518(중종 13) ~ 1586(선조 19)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定齋)이다. 증조부는 승화(承華), 할아버지는 예안현감(禮安縣監) 위(瑋)이고, 아버지는 사성(司成) 지번(之藩)이며,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린(許磷)의 딸이다. 형제로는 곽규(郭赳)가 있다. 아들이 의병장 재우(再祐)이다. 1546년(명종 1)에 병오(丙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556년(명종 11) 병진(丙辰)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그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2년(선조 5)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지평(持平), 이듬해 장령(掌令), 그 이듬해 사간(司諫), 1576년(선조 9)에는 의주목사(義州牧使), 그 뒤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1578년(선조 1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81년(선조 14)에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다시 제수되었다. 1585년(선조 18)에 남원부사(南源府使)로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다. 그는 무재(武才)를 겸비하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큰일을 맡길만하다 여겼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아들 재우가 의령에서 일어나 왜구를 쳐서 큰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아버지의 기품을 닮았다고 하였다.
[참고]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文科榜目》, 《東溟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연영(具然英)  1864(고종 1) ~ 1907(융희 1)
호는 춘경(春景)이다. 1895년(고종 32) 12월 단발령이 내리자, 이듬해 1월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와 이천(利川)으로 내려가 기의(起義)하였다. 양근(楊根)·지평(砥平)으로 나가 3백 명을 모병하고, 안성의 의병장 민승천(閔承天)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가 쳐들어오자 1초(哨)군씩 백현(魄峴)에 매복하였다가 광주 장항(獐項) 장터부근까지 추격, 무기·군량 등을 노획하였다. 2월 13일 이현(梨峴)에서 적군 2백여 명의 습격을 받아 역전하였으나, 의진은 병력의 열세와 혹한으로 흩어졌다. 2월 25일 다시 이현을 중심으로 2천여 명의 연합의진이 재구성되자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의 주둔병으로 산성을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용전하였으나 박준영이 관군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어 함락당하였다. 다시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안동·의성·청송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이듬해 5월 26일 비봉산(飛鳳山) 일대에서 관군과 접전한 뒤 부하 30여명과 경기도로 이진(移陣)하였다. 그 뒤 생각을 바꾸어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또 상동교회의 전덕기(全德基)·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구국교육에도 종사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는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하며 구국종교활동을 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 1907년(융희 1) 정미칠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각처에서 성토회를 열고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정서(禎書)와 함께 총살당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韓國獨立運動史》,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자료집》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구음(具崟)   1614(광해군 6) ~ 1683(숙종 9)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명곡(明谷)이다. 증조부는 사민(思閔), 할아버지는 혜(寭), 아버지는 인지(仁至)이며, 어머니는 이안성(李安性)의 딸이다. 임경달(任慶達)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인이다. 1648년(인조 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1등(一等)으로 합격하고, 1652년(효종 3)에 참봉(參奉)으로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669년(현종 10)에 장령(掌令),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1673년(현종 14)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에 제수되어 1677년(숙종 3)까지 임기를 맡았다. 1678년(숙종 4)에 다시 장령(掌令)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고, 이듬해 사간(司諫), 승지(承旨)에 이어 1681년(숙종 7)에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지냈다. 저서로는 《명곡문집(明谷文集)》이 있다.
[참고] 《顯宗實錄》,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文科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극태(權克泰)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통경(通卿). 호는 남반(南畔)이며, 청송에서 거주했다. 아버지는 감곡(甘谷) 성기(聖器)이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제자이다. 천성이 밝고 순수하며 덕성이 남보다 뛰어났다.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며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하고 가학을 이었다. 포헌(逋軒) 권덕수(權德秀), 냉천(冷泉) 이유원(李猷遠)과 교유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안동진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공을 세웠다.
[참고] 《眠雲齋集》, 《朝鮮寰輿勝覽》
 
권덕수(權德秀)  1672(현종 13) ~ 1760(영조 3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재(潤哉). 호는 포헌(逋軒)이다. 아버지는 진원(震元)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로 종발(宗渤)의 딸이다. 열여섯 살부터 권두인(權斗寅)의 문하에 들어 글을 배웠다. 1690년(숙종 16) 향시에 합격하고,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려 했는데 족형 구소(鳩巢)가 시관(試官)이었으므로 피혐(避嫌)하여 단념하고 말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향중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고, 포로가 된 도적이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무함(誣陷)을 입었으나, 영조가 애매한 줄을 알고 관찰사(觀察使) 박문수(朴文秀)에게 타일러 무사하게 되었다. 1757년(영조 33)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사(中樞府使)에 제수되었다. 초년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지리·수학까지도 조예가 깊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오로지 주자학(朱子學)에 전념하였고,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평생의 지침서로 삼았다. 시집(詩集)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재(李栽)가 자신의 인품을 ‘담(淡)’이라고 지칭한 것을 수용하여 자신을 ‘담옹(淡翁)’이라 불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재의 말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시집에 ‘담타(淡唾)’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저서로 《몽구(蒙求)》와 《포헌집(逋軒集)》 5권을 남겼는데 1778년(정조 2)에 간행된 《포헌집》은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卷末)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발문(跋文)이 있다. 시와 만사(挽辭)를 담았고, 조정에 올린 상소와 친지와 벗들에게 보낸 편지글이 있는데 특히 밀암(密庵) 이재(李栽)와 학문에 관해 주고받은 서한이 보이며 외에도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등 명유(名儒)와의 편지가 있다. 잡저(雜著) 가운데 「황원일기(黃猿日記)」는 이인좌의 동생 능좌(能佐)가 하회(河回)지방에 들어왔던 3월 13일부터 난이 끝난 5월 14일까지의 일기로 이인좌의 난을 전후한 안동지역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제병곡인심도심설후(題屛谷人心道心說後)」와 「만록(漫錄)」은 많지 않은 그의 성리학설을 엿볼 수 있는 자료 중의 하나이므로 주목할 만하다. 「제병곡인심도심설후」에서는 조선 성리학의 큰 특징인 리(理)와 기(氣)에 관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면서 이재(李栽)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보충하여 사단‧칠정의 문제를 설명하였다. 「만록」에서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본문과 주자의 주석,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의 세세한 구절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의 이론,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의 내용에 대한 이재(李栽)의 《간보(刊補)》, 공부 방법에 대한 문제, 병곡(屛谷) 권구(權榘)의 학문 경향 등 다양한 내용을 자유롭게 기록하였다. 외에도 서(序)와 잠(箴), 상량문(上樑文)·축문(祝文)‧애사(哀詞)‧행장(行狀) 등이 있으며 말미에는 권덕수를 기리는 친지들의 만사(輓詞)와 대산 이상정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 잠(箴)에는 말과 마음과 소리와 얼굴빛에 관한 글을 실어 그의 평소 모습과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몽구(蒙求)》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글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위상, 교육의 절차, 독서 방법, 몸가짐, 마음 자세 등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 매보다 칭찬이 좋다고 하였고, 경전과 사서를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문장 연습을 해서 과거 시험에 대비하도록 지도했다. 사농공상의 직분 등을 소개하였고 성리학을 위주로 공부하라고 하였다.
[참고] 《逋軒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덕조(權德操)  1507(중종 2) ~ 1594(선조 2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귀암(歸巖)이다. 아버지는 한송(寒松) 응희(應禧)이다.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문인이다. 출사하여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제용감판서(濟用監判事)를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로는 출사를 단념하였다. 임진왜란 때 아들을 곽재우(郭再祐) 의병진에서 활약하게 주선하였다. 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재 진보면 광덕리에 있는 귀암정(龜巖亭)은 권덕조를 추모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이다.
[참고] 「墓碣銘」(柳致明 撰)
 
권두경(權斗經)  1654(효종 5) ~ 1725(영조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이다. 충정공(忠定公) 벌(橃)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석충(碩忠)이며, 아버지는 유(濡)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이다. 형제로는 권두위(權斗緯), 권두순(權斗純), 권두휘(權斗徽)가 있다. 권두경은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재주가 특이했다. 조금 성장해서는 경사(經史) 백가(百家)의 글을 읽었으며 글과 말이 조숙했다. 어른들에게 배우면서 질의하고 더욱 갈고 닦았으며, 옛사람은 어떻게 공부했는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학문을 갖추었다. 권두경은 처음에는 종가의 형님인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에게 배웠다. 후에 다시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나아가 더 수준 높은 학문을 배웠다. 의심스러운 부분을 질문하고 어려운 문제는 토론하면서 마음을 기울여 공부한 결과 여러 번 스승의 찬탄을 자아내게 했다. 갈암의 문하에 있으면서 갈암의 아들인 밀암(密菴) 이재(李栽) 등과 교유했는데, 이재와 권두경은 이후 평생의 도반이 되었다. 공사를 막론하고 모든 문제를 이재와 의논했으며, 특히 권두경이 《퇴계문인록》을 정리할 때 초고를 이재에게 보여주고 질정을 받기도 했다. 1679년(숙종 5) 식년시(式年試) 생원에 3등으로 합격하고, 1689년(숙종 15) 문학으로 천거, 1694년(숙종 20)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직장(直長),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권두경은 1700년(숙종 26)에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승진한 후 곧 이어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백성의 고통을 세심하게 살폈고, 효자와 열부에게는 상을 주었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향음주례는 매년 음력 10월에 현에서 길일을 택하여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예절이다. 현령이 주인이 되고, 연로하며 덕망이 있는 선비가 주빈이 되고, 일반 유생을 빈으로 하여 서로 모여 읍양하는 예절을 지키며 주연을 함께 하고 계를 고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영산현의 풍속은 크게 교화되었다. 1710년(숙종 36) 증광시(增廣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전라도사(全羅道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이변이 있자, 사직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서 논하였다. 1717년(숙종 43) 영남에서 1만여 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1721년(경종 1) 경종이 즉위하자 고산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귀향하였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문장이 뛰어나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였는데 특히 시에 능하여 추중을 받았다. 그는 눈썹이 아름답고 눈이 맑았으며 얼굴빛이 편안하고 따뜻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고 문중에 나아가서는 화목에 힘썼다. 다른이들과 교제함에 있어서 흔쾌하였고 조그마한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남의 불행을 보면 구휼에 심력을 기울였으며, 남의 좋은 점을 보면 그것을 배우고자 애썼다. 관직에 있을 때는 작은 문제에도 소홀하지 않았으며, 근면하고 민첩했다. 이처럼 그는 개인적 사귐에 있어서는 편안함과 소탈함을 위주로 했고, 공적인 업무에 있어서는 빈틈없고 세심하였다. 권두경의 부인은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김시온(金是榲)의 막내딸이었다. 부인은 부덕(婦德)을 갖추었고 종가를 잘 지켰다. 남편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내성현 가초마을에 안장되었다. 권두경은 김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권모(權謩)이고, 두 딸은 김희석(金喜錫)과 유성사(柳聖師)에게 시집갔다. 아들 권모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권정택(權正宅)과 권정용(權正容)이다. 저서로는 《창설재집(蒼雪齋集)》이 있다. 또한 퇴계 이황과 관련된 기초자료를 충실히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으니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황의 언행록과 이황의 문인록이다. 먼저 그가 이황의 언행을 수습하여 정리한 것이 《퇴계선생언행통록(退溪先生言行通錄)》이다. 그의 언행통록이 간행된 후 지역 사림들은 여러 가지 내용상의 문제점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을 수정하여 도산서원에서 간행한 것이 《퇴계선생언행록》이다. 언행록은 당시 제기된 문제점들을 수정하고 항목을 더욱 세분한 것이며, 도산서원에서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퇴계언행록 가운데 상징적 대표성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는 퇴계의 언행록과 문인록을 정리하는 일에서 언제나 개척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현재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는 권두경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묵재서당(默齋書堂)이 남아 있다.
[참고]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蒼雪齋集》,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권렴(權濂)   1701(숙종 27) ~ 1781(정조 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원(希元). 호는 후암(厚庵) 또는 초파(蕉皤)이다. 고려태사 행(幸)이 그의 시조(始祖)이다. 고려 말 그의 후손 명리(明利)가 안동에서 청송으로 이거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성시(聖時)이며 아버지는 후준(后準)이다.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적암(適庵) 태중(台重)의 딸이며 숭정처사(崇禎處士) 시온(是榲)의 증손녀이다. 청송 안덕현(安德縣) 명당리(明堂里)에서 태어났으며 만년에는 청송 마평(馬平)으로 이거하였다. 10세 때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학문이 날마다 진보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높이 칭찬하였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아버지가 편찮으시면, 밤마다 문 앞에 서서 북두칠성을 향해 기도하며 아버지의 쾌유를 빌었다고 하며, 아버지가 큰 종기병을 앓았을 때는 몸소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였다고 한다. 학문에 힘쓰고 덕성을 함양하는 것으로 일생의 업을 삼았고, 주변 선비들과 덕으로 교유하고 항상 신의를 중시하였기에 명망이 높았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울 때에는 시문(詩文)이 날로 나아져 남들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으며, 문자(文字)공부를 함에도 역시 질서가 있고 법도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퇴계는 우리나라의 선생이시다. 당시에 나서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만 지금 선생의 남긴 서적들은 후학의 본보기이다.”라고 하며 퇴계의 글을 읽고, 그 내용들을 분류한 다음 이것을 《대학(大學)》 조례(條例)에 의거해서 다시 뽑아 엮어 4책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권렴은 1729년(영조 5) 아버지의 명에 따라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시작했다. 권렴은 《소학》 중에서 의심나는 곳을 기록하여 밀암에게 문의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는 “《소학》은 일상에 비근한 공부여서 배우는 이들이 가장 힘써야 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소학 공부를 철저히 하여야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대해, 밀암은 “그대가 인륜을 밝히고 독실히 수양하는 것에 뜻을 두었으니, 요즘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와 같이 뿌리를 배양하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고 칭찬해주었다. 밀암은 항상 권렴에 대해 “학문이 단절되고 도의가 상실된 이 때, 언제나 뜻을 고상하게 하고 속되게 하지 않은 이가 권렴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46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는데 관 곁에서 옷을 입은 채 잠을 자면서 그 방을 비운 일이 없었으며, 삼년상을 마친 다음에 다시 삼년을 더하여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절실히 하였고, 제일(祭日)이 되면 초상 때 같이 애도함이 깊었다고 한다. 만년에 청송 마평촌(馬坪村)에 옮겨 살았는데 강 건너에 있는 부친의 묘를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그 마을을 모동(慕洞: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뜻의 마을 명칭)이라 이름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는 지나치게 공부에 힘쓰라고 하는 일이 없었으며, 다만 마음을 멋대로 하지 말게 하면서 《맹자》의 ‘잊지도 말고[勿忘] 조장하지도 말라[勿助]’라는 교훈을 하였고 또 “사람의 성취는 재주의 있고 없음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부를 오래도록 하는데 있으니 점차로 연마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세상 명리(名利)에 담박하였다. 맏형과 함께 소과(小科)에는 올랐으나 대과에는 오르지 못했다.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언행을 우러러 보며 주자의 행장(行狀) 및 「퇴계언행록」을 기록하여 엮고서 「고산록(高山錄)」이라 하여 출입할 때 항상 지니고 다녔으며, 「무이기(武夷記)」·「운곡잡영(雲谷雜詠)」·「도산기(陶山記)」·「도산잡영(陶山雜詠)」의 내용을 뽑아 엮어서 「삼산삼중(三上三中)」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사마천(司馬遷)의 율력(律曆), 제갈량(諸葛亮)의 진도(陳圖), 양휘(楊輝)의 수법(數法), 성의백문집(誠意伯文集)의 보천(步天) 등도 각각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이들을 두루 이해하고자 하였다. 만년에는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한 밤중에 일어나서 옷과 자세를 단정히 하고 앉아 《주역》을 엄숙하게 암송하였다. 좌우명으로 ‘말을 덜 하는 것으로 덕성을 기를 것, 출입을 간소히 하는 것으로 공부를 보충할 것, 살림을 간략히 하는 것으로 물건의 폐해를 없앨 것’ 등의 잠명(箴銘)을 써두고서 그 자신을 반성하였다. 집 뜰에는 소나무, 국화 등을 심고서 「사우열전(四友列傳)」을 지었다. 또 파초를 뜰아래 심고서 여러 아들에게 말하길 ‘이는 비가 자주 내릴 때면 6~7일 만에 한 마음으로 피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8~9일이 되어도 피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으니 새로워지고 새로워지지 아니함도 또한 기르는 바가 어떠한가에 달렸을 뿐이다.”고 하여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하길 당부하였다. 권렴은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와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였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과 산천을 유람하는 등 산수를 좋아하였으나 한가함을 틈타 즐기는 놀이 따위는 아니하였다. 유람을 통해 심성을 길렀던 흔적은 문집에 전하는 글을 통해 확인 해 볼 수 있다. 저서로는 《조수록(條修錄)》·《소학의목(小學疑目)》·《명성내외편(明誠內外篇)》·《후암집(厚庵集)》이 전한다. 《후암집》은 서이량(徐爾亮)이 판각(板刻)에 대한 발의를 하고 재종자(再從子)인 서속(徐涑)이 스승의 글들이 세간(世間)에 그대로 있는 것은 제자들의 책임이라 여기고, 문인들 30~40여 명과 뜻을 모아 1812년(순조 12)에 판각을 완성하니 권렴 사후 31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문집에는 시 260여 수가 있고 사(詞) 2편, 가(歌) 4편이 있다. 서간문과 함께 「무극이태극태극본무극설(無極而太極太極本無極說」·「창포설(菖蒲說)」·「절주자고주필어(節朱子告周弼語)」·「제아영주서초권말(題阿榮朱書抄卷末)」·「제자경편권말(題自警編卷末)」·「서명성집람권말(書明誠集覽卷末)」·「서력권수(書曆卷首)」·「서석갑(書碩匣)」·「서좌우(書座右)」·「금수일록(錦水日錄」·「신심록(新心錄)」·「옥계유록(玉溪遊錄)」 등을 비롯하여 서문(序文)과 기문(記文), 그리고 묘비명(墓碑銘)과 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으며 문집 말미에는 문집 간행 경위를 기술한 발(跋)이 붙어 있다. 그는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고 전념하여 당시 풍미하던 18세기의 실학적 학문풍토 속에서도 퇴계학을 면면히 계승·발전시킨 학자였다.
[참고] 《厚庵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권문거(權文擧)  1626(인조 4) ~ 1694(숙종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진(子眞). 호는 용암(龍巖)이다. 아버지는 송고(松皐) 욱(稶)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1662년(현종 3)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해 지극한 효심을 보였으며 경학(經學)에 전심(專心)하여 그 분야에 이름이 났다. 성품이 강직하여 이유 없는 녹(祿)을 받지 않았으며 국상(國喪)의 예(禮)가 틀리자 바로잡는 글을 올렸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과 교유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嶠南誌》, 《두산백과사전》
 
권병국(權丙國)  1853(철종 4) ~ 1930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初名)은 병제(秉濟). 자는 덕창(德昌). 호는 수은(隨隱)이다. 아버지는 외암(畏菴) 석장(錫璋)이다. 청송에서 출생했으며,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향리와 당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고종 때 교관(敎官)을 지냈으나 경술국치 이후 자취를 감추고 학산(鶴山)에서 소요하였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권보연(權普淵)  1874(고종 11) ~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택(聖澤)이다. 통사랑(通仕郞) 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성하(成夏)의 아들이다. 형제로 주연(柱淵)·성연(聖淵)이 있다. 청송에서 출생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권복규(權復奎)  1850(철종 1) ~ 19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장(景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향림(香林) 식(湜)의 증손이다.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경북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성지(沈誠之)의 진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도모하고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복규는 이와 같은 의진편성의 논의과정에서부터 진용편성에 이르는 실무를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有功者功勳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권상중(權相中)  1882(고종 19) ~ 1929
본관은 안동(安東). 본명은 상중(尙中). 아명은 석출(石出). 자는 윤집(閏集)이다. 아버지는 복규(福奎).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인하여 일본에 의한 국권침탈이 자행되자 의병장 김소라의 의병부대에 들어 항일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1906년(광무 10)에는 경상북도 영천군 신촌면 정각동의 전투에서 의병장이 전사한 후 새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융희 1) 정미칠조약 체결 후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의병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그는 의병부대를 보다 강화시킬 필요를 느끼고 고향인 청송일대를 중심으로 모병 및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1908년(융희 2) 의병장 임용상(林龍相)의진과 합류하고, 동지 서주일(徐周一) 등 수 십 명을 이끌고 군자금모금을 위한 활동을 폈다. 그해 청송군 현서면 감음(甘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9년(융희 3) 11월 25일 임용상·송남면(宋南面)과 함께 청송군 현남면 약곡동에 출동하여 윤덕동(尹德洞) 집에 들어가 그의 좌고부(左股部)에 자상을 입히고 약간의 군자금을 탈취하였다. 그 뒤 청송군 안덕면 일대에서 적과 접전 중 붙잡혔으나 수비병 2명을 죽이고 도피, 은신하였다. 그러나 1910년(융희 4)에 붙잡혀 7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그에 불복하여 대구공소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1913년 1월 14일 칙령 제23호에 의하여 징역 5년으로 감형되어 나머지 옥고를 치른 뒤 1915년 출옥하였다. 그 뒤 병고에 시달리다 청송에서 죽었다. 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大邱地方裁判所刑事部判決文》, 《大邱控訴院刑事部判決文》,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권석장(權錫璋)  1813(순조 13) ~ 1885(고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서(周瑞). 호는 외암(畏菴)이다. 문거(文擧)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도(海度)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鑛山金氏) 서구(敍九)의 딸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35년(헌종 1) 향시에 합격했으나 예부의 지색(枳塞: 어떤 사정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함)을 당하자 “선비가 할 일은 벼슬에 있지 않다.” 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권태시(權泰時)의 남경대(攬景臺)와 홍여하(洪汝河)의 몽학대(夢鶴臺)를 중수하는 데 참여하였고, 김대진(金岱鎭)·신필흠(申弼欽)·류치유(柳致遊)와 함께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교정하였으며, 이수영(李秀榮)과 함께 이유원(李猷遠)의 문집 간행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고을사람들의 추대로 김주교(金周敎)가 창설한 낙육재(樂育齋)에서 30여 년 동안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고, 《심경》·《근사록》·《주서절요》 등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다.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심성설」·「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이 대표적인 명저로서, 「이기호발설」은 주자와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그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저서로는 《외암집(畏菴集)》 4권 2책이 전한다. 《외암집(畏菴集)》은 아들 병국(炳國)이 수집한 것을 1934년에 손자 중억(重億)이 간행하였고, 권두에 김도화(金道和)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 류연구(柳淵龜)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2에 시(詩) 68수, 서(書) 35편, 잡저(雜著) 9편, 서(序) 5편, 권3·4에 기(記) 6편, 발(跋) 4편, 잠(箴) 1편, 상량문(上樑文) 4편, 축문(祝文) 1편, 제문(祭文) 16편, 애사(哀詞) 4편, 유사(遺事) 4편, 부록(附錄)으로 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가장(家狀)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雜著) 중 삼정(三政)문제에 관하여 올린 「대삼정책(對三政策)」에서는, “우리나라가 전부(田賦)는 옛법을 따르지 않고 군적(軍籍)은 교련을 실시하지 않으며 환곡은 혼잡하여 팔도의 폐단을 이루고 있으니, 검소한 생활습성을 익히고 사치하는 풍조를 없애며 인과 덕을 베풀어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으면 삼정의 폐단은 자연적으로 개혁될 것”이라 하였다.
[참고] 《畏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권석화(權錫華)  1855(고종 22) ~ 191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주경(周卿)이다. 아버지는 치규(致奎)이다. 박상범(朴尙範)·신상익(申相翼) 등과 교유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효도를 다하고 일을 처리함에 면밀하니 여러 벗들이 경외하였다. 1911년 청송 진보에 있는 봉람서원(鳳覽書院)에서 유생들의 주도로 권태시(權泰時)의 시문집인 《산택재집(山澤齋集)》을 간행할 때 중추역할을 하였다.
[참고] 《英陽郡誌》
 
권석회(權錫晦)  1789(정조 13) ~ 1851(철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근(穉根). 호는 역파(櫟坡)이다. 문거(文擧)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극시(克始), 아버지는 지도(之度)이다. 청송에서 태어났다. 인재(仁齋) 이해성(李海星)·귀수(龜峀) 류약문(柳約文)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주자향당(朱子鄕黨)》·《역파집(櫟坡集)》이 전한다. 《역파집(櫟坡集)》은 4권 2책, 석인본으로 1937년 아들 병성(丙星)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권연하(權璉夏)·김도화(金道和)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류연구(柳淵龜)·이승규(李承奎)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2는 시(詩) 100수, 만사(輓詞) 31수, 부(賦) 1편, 서(書) 13편, 권3·4는 서(序) 2편, 기(記) 4편, 잠(箴) 1편, 상량문(上樑文) 2편, 제문(祭文) 6편, 잡저(雜著) 3편, 유사(遺事) 2편,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詞) 4수, 제문(祭文) 7편, 애사(哀詞)·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유사(遺事) 각 1편, 기(記) 2편, 상량문(上樑文)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운율이 청고하고 시편마다 강개함이 나타나 있다. 「송경회고(松京懷古)」·「만월대(滿月臺)」·「선죽교(善竹橋)」 등은 충신과 열사들의 혼을 추모하고 흥망의 무상을 읊은 것이고, 「역파음(櫟坡吟)」·「원조음(元朝吟)」·「제야음(除夜吟)」 등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자탄한 시이다. 「경모록(景慕錄)」은 주희(朱熹)의 학문적 공적을 찬양하고 그 사상을 간추려서 조정(朝政)·제가(齊家)·충군(忠君)·접대·의복·음식 등 17개항으로 정리해놓은 것이다. 「남신대(楠神對)」는 일상사와 신명 및 학문에 관한 사항들을 문답형식으로 기술해 놓은 것이다. 부의 「서정부(西征賦)」는 평양에 가서 서경(西京)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그 감회를 기록한 것으로, 안동부(安東府)에서 삼태사묘(三太師廟)를 배알하고 선조의 위업을 추모하면서 삼태사가 고려의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토벌하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도 수신의 조목을 기술한 「자경잠(自警箴)」 등이 있다.
[참고] 《櫟坡集》, 《朝鮮寰輿勝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성하(權成夏)  1852(철종 3) ~ 19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언(泰彦)이다. 1895년(고종 32) 통사랑(通仕郞)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에 올랐다. 1896년(건양 1) 2월 심성지(沈誠之)를 의병대장으로 청송 의진이 결성될 당시 여기에 참여하여 우익장(右翼將)에 선임되었다. 4월 장무호(蔣武鎬)·조광규(趙光奎) 등과 함께 포군을 이끌고 영덕으로 출진하였다. 이어 4월 청송 의진이 지역에 따라 분진(分陣)될 때 부내 방면의 책임을 담당하였다.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참고] 《獨立運動史》, 《韓末義兵日記》, 《赤猿日記》
 
권수승(權秀升)  1862(철종 13) ~ 19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선(士選). 호는 일암(一庵)이다. 할아버지는 석장(錫璋)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자질이 순수하고, 경사에 두루 통달하였다. 경전의 요체를 글로 지어 스승에게 올리니 스승이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일암(一庵)’이라 편액할 것을 명하고, ‘퇴도병명(退陶屛銘)’ 한 부를 하사하였다. 소당(韶堂) 허용(許鏞)·동산(東山) 이중균(李中均)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일암집(一庵集)》 4권이 전한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권순(權淳)   1699(숙종 25) ~ 1738(영조 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화(汝和). 호는 국헌(菊軒)이다. 아버지는 후준(后準)이며, 어머니는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의 딸이다. 형제로는 권윤(權潤), 권숙(權淑), 권심(權沈), 권해(權海), 권식(權湜)이 있다. 김태중(金台重)의 문인이다. 1729년(영조 5)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학식과 덕망으로 향당의 추중을 받아 동생 렴(濂)과 함께 ‘청송쌍학(靑松雙鶴)’이라 불렸다.
[참고] 《司馬榜目》, 《朝鮮寰輿勝覽》
 
권식(權湜)   1735(영조 11) ~ 1769(영조 4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청지(淸之). 호는 향림(香林)이다. 아버지는 일신당(日新堂) 후준(后準)이며, 어머니는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의 딸이다. 형제로는 권윤(權潤), 권숙(權淑), 권심(權沈), 권해(權海), 권순(權淳)이 있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의 문인이다. 청송에서 출생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상명(詳明)하고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졌으나 35세의 나이로 단명(短命)하였다.
[참고] 《厚庵集》
 
권영만(權寧萬)  1877(고종 14) ~ 195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거(舜擧). 호는 각헌(覺軒)이다. 할아버지는 수명(秀明)이다. 일찍이 1907년(광무 1)의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꾸준히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대구(大邱)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그는 1915년 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濟安)·김한종(金漢鍾)·엄정섭(嚴正燮)·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조직한 혁명단체였다. 동회는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이 추진되었다. 그는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경북 경주(慶州)에서 영덕·영일 방면의 우편차를 습격, 일제가 수탈한 세금 8천 7백 원을 탈취하여 대한광복회의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비밀활동을 수행하던 중 1918년 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일경에 체포되자, 그는 한훈(韓焄)·우재룡 등과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만주로 탈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인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방면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해 가며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의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귀국한 그는 1919년 음력 8 ∼ 9월경 우재룡·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과 안종운(安鍾雲)의 집에 모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논산군(論山郡)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으며 권영만은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그 후 이들은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2월 동지인 장응규(張應圭)를 상해에 파견하였다.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받고 귀국하여 동년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沈永澤)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권영만도 이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獨立運動史》, 《獨立運動史資料集》, 《韓國獨立運動史》, 《韓國獨立史》,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두산백과사전》
 
권용익(權龍翼)  1824(순조 24) ~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운(致雲)이다. 문거(文擧)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석탁(錫鐸)이다. 청송에서 출생했다. 1846년(헌종 12)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학문에 일찍 성취함이 있었고, 평생토록 경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참고] 《司馬榜目》
 
권유현(權有鉉)  1876(고종 13) ~ ?
류시연(柳時淵)·정해일(鄭海日)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안동(安東)·풍기(豊基)·순흥(順興)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류시연은 경북 안동(安東) 출신으로 일찍이 을미의병에 참여하여 권세연(權世淵) 의병장의 부하로서 활동하였고, 1905년(광무 9) 이후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동북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제에 막대한 타격을 준 의병장이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광무 8)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광무 9)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융희 1)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권유현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 류시연의진에 투신하여 동지 100여 명과 함께 50여 정의 총기를 휴대하고 경북 안동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음력 12월 17일 같은 군 임남면에서 일본 순사 16명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9년(융희 3) 음력 정월 초순에는 정해일의진에 들어가 동료 의병 30여 명과 함께 총 16정, 칼 1자루를 휴대하고 경북 풍기군과 순흥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음력 2월경 순흥군 북면(北面)에서 헌병보조원과 교전하는 등 지속적으로 반일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9년(융희 3) 5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 7월 6일 대구공소원에서 각각 징역 5년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대심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1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권이복(權以復)  1740(영조 16) ~ 1819(순조 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무회(無悔). 호는 만주(晩洲)이다. 할아버지는 후준(后準), 아버지는 생원(生員) 염(濂)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이상(履相)의 딸이다. 청송군 안덕리(安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부친의 훈계를 따라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였다. 경서를 널리 탐독(耽讀)하였고 과거 공부에도 관심을 두어 1777년(정조 1)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4년 뒤 부친의 병환 때문에 향리로 돌아와 몸소 탕약을 달이며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지탱하지 못할 듯이 하였다. 공부의 의문점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서신으로 질의하였으며 신망 받는 학자들의 글을 두루 구하여 공부의 방편으로 삼았다. 부친을 모신 묘지(墓地)가 적합한 땅이 아니라고 염려하다가 1819년(순조 19) 가을에 이장(移葬) 한 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11월 19일에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그는 성품이 안정되고 고요하며 지조가 있었고 규율로써 자신을 단속하였으며 한 고을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평소 서궤(書几)를 정돈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경전을 암송하거나 깊이 생각하고 혹은 눈을 감고 무릎을 거두고 고요히 앉아 집안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산림 속에 있기를 좋아하였다. 경(敬)을 학문의 관건으로 생각하여 하루 종일 고요히 앉아 심사숙고하였으며, “사람이 수양하지 않으면 사물의 기미를 관찰할 수 없고 추구하지 않으면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는 음양오행·병가·산수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달통하였다. 문집을 보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올린 글 중 상례(喪禮)·제례(祭禮)·사단(四端)·명덕(明德)·이기설(理氣說) 등에 대한 논설이 많다. 그 밖에 인심(人心)·도심(道心)·이기(理氣) 등의 항목에 관한 논설이 실린 「기사록(起思錄)」이 있는데 그가 평소 천하의 의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독서하는 여가에 자기 생각을 수시로 적어서 하나의 학설을 대비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다. 이(理)와 기(氣)는 성인과 범인의 구별이 없고 양기를 잘하면 천지의 기가 존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도 리(理)는 귀하고 기(氣)는 천하다는 학자들의 일상적인 발언에 대해 기(氣)가 결코 천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기(氣)의 죄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때문에 그의 서신에는 양기(養氣)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정조의 구언에 따라 「만언소(萬言疎)」를 올려 치국의 원리를 주달한 적이 있으며 문집의 발문(跋文)에서는 그가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적에 「성학시종소(聖學始終疏)」를 지어 임금께 올리려 하였으나 분수에 지나치다고 판단하여 그만 두었다. 그러나 의리의 심오함과 경륜의 풍부함이 사실은 이 글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만약 이것을 임금께 올렸더라면 임금의 치세를 빛나게 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으니 그의 경륜(經綸)이 엿보인다. 저서로는 「성학시종소(聖學始終疏)」·《만주집(晩洲集)》이 전한다.
[참고] 《司馬榜目》, 《晩洲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이숙(權以肅)  1725(영조 1) ~ 1787(정조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국(支國). 호는 현암(弦庵)이다. 할아버지는 후준(后準), 아버지는 국헌(菊軒) 순(淳)이다. 청송군 안덕리(安德里)에서 태어났다. 이상정(李象靖)‧권렴(權濂)의 문인이다. 이종수(李宗洙)·김종덕(金宗德) 등과 교유하였다. 1765년(선조 41) 여강서원(廬江書院) 강회에 김낙행(金樂行)·이상진(李象辰)·김정한(金正漢)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참고] 《艮巖遺稿》
 
권준(權晙)
본관은 안동(安東). 자가 경인(景寅)이고 호가 송만(松巒)이며, 고려 초 태사공 행(幸)의 22세손이다. 아버지 덕조(德操)는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그는 숙부인 권벌(權橃)에게 학문을 배웠다. 처음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의 관직에 오르고 그 다음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와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하지만 《근사록(近思錄)》을 보고 결심한 바가 있어,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진보현으로 이사하여 귀암정(龜巖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부친인 권덕조는 88세의 나이로 향수 하였는데 권준은 아들로써 항상 공경하고 외경하는 마음으로 효성을 다해 섬겼다. 또한 형제간에도 우애가 두터워서, 늘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에 잠을 자며 가까이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곽재우 장군의 의진에 참가하여 화왕산성을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당시 훌륭한 전략을 세워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전란이 끝난 후 임금이 공신들에게 포상할 때 권준은 오히려 은거하여 자취를 감추고, 마치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같이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응위(申應渭)의 딸이다. 그는 아들이 없어 조카 신지선(申止善)을 입적하였는데 훗날 신지선은 효행이 뛰어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참고] 《嶠南誌》,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권창업(權昌業)  1600(선조 33) ~ 1663(현종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이다.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지낸 지(誌)의 아들이며 중부(仲父) 극에게 입양되었다. 생가(生家)의 대가 끊어지자 다시 생가로 돌아와 중부와 생부(生父)를 똑같이 봉양하였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언필(朴彦弼)의 딸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제자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아버지 권지(權誌)가 청송 진보 문해촌으로 옮겨 살면서 그도 여기에서 우거하게 되었는데 안동과 영양, 봉화 등지를 오가다 중년 이후 다시 진보로 돌아왔다. 그는 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인 혼천의(渾天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를 체득하였고 박호(朴豪), 선암(仙巖) 이엄(李儼)과는 조석(朝夕)으로 만나 시(詩)로써 풍류를 즐겼다. 효종 때에 재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왕명에 그 지역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추천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참고] 《國朝人物考》, 《嶠南誌》, 《안동 금계마을》, 《두산백과사전》
 
권춘란(權春蘭)  1539(중종 34) ~ 1617(광해군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행(幸)의 24세손으로 태어났으며 고조는 구서(九叙)이고, 증조부는 자관(自關), 할아버지는 모(模)이다.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석충(錫忠)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형제로는 권춘계(權春桂), 권춘백(權春栢), 권춘영(權春英)이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고결한 인품을 숭상했다. 어려서부터 문자를 익숙히 이해할 정도로 특이한 자질을 가져 사람들이 기특한 아이라고 칭찬하였다. 또 그는 용모도 뛰어나 주위 사람들은 자라서 그의 재주가 크게 빛날 것으로 기대했다. 어려서부터 성숙함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에도 예의로 대하고 태만하게 대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혹시 업신여기는 행동이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를 꾸짖어 “네가 어려서부터 하는 행동이 이와 같다면 자라서 하는 행동들은 볼 것도 없을 것이다.”하고 절교하여 다시 함께 놀지 않았다. 권춘란은 구봉령(具鳳齡)·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류성룡(柳成龍)·정구(鄭逑)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그 당시 도학자들이 추구한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공부)을 주로 하면서도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등 구류백가(九流百家)의 서적을 섭렵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주역(周易)에 능통했다. 1560년(명종 15)에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三等)으로 합격하고, 1573년(선조 6)에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학록(學錄)을 거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1595년(선조 28) 정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3월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 5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으며, 6월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그 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다. 1599년(선조 32)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선조 34)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1606년(선조 39)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영천군수(永川郡守),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초야에서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스승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친 부모를 대하듯이 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결국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백담문집(栢潭文集)》의 완성을 보았다. 지금은 현존하고 있지 않지만 사액서원인 주계서원(周溪書院)의 건립은 권춘란의 노력의 결과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진정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킨 제자라 할 수 있겠다. 권춘란은 후사가 없어 동생의 아들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을 양자로 삼았다. 태일 역시 어릴 때부터 비범하여 구봉령(具鳳齡; 1526~1586)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사위가 되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권춘란의 직계손은 생활이 어려워 고향 안동을 떠나 영양군 청기면 기포동으로 옮겨갔다. 저서로는 《진학도(進學圖)》·《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회곡집(晦谷集)》 등이 있다. 그 중 《회곡집(晦谷集)》은 권춘란의 시문집으로 1845년(헌종 11) 후손 권엽(權曄)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김굉(金㙆), 안복준(安復駿)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 엽의 발문(跋文)이 있고, 본집과 속집으로 나뉘어 있다. 본집 권1·2는 시(詩)·만사(輓詞) 146수, 소(疏) 1편, 서(書) 10편, 묘갈명(墓碣銘) 2편, 명(銘) 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속집 권1 ∼ 4는 도(圖) 2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중후하고 단아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백담정사잡영(栢潭精舍雜詠)」은 40수의 장편으로 주위의 경관을 잘 묘사했고, 「용주회암운곡시운(用朱晦菴雲谷詩韻)」은 주희(朱熹)의 시를 차운한 것으로 그 묘사가 그윽하고 아름다워 실제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또, 「차오천주인이덕홍선생십송청풍운(次榜川主人李德弘先生十松淸風韻)」에서는 이덕홍의 청고한 기상을 소나무의 청절에 비유해 잘 묘사하였다. 소 1편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필선(弼善)의 사직을 청하는 내용의 글이다. 과제 가운데 의(疑)는 천도·인도의 변화와 사시(四時) 운행의 조화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설명한 것이다. 책(策)은 유도(儒道)와 선정(善政)의 상관관계를 논설한 글이다. 유도의 근본 사상은 인(仁)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체용(體用)이라고 지적, 정치가 인의 체를 터득해 예(禮)의 용을 쓰게 되면 중화(中和)를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중화의 도는 곧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길이며 인간이 천도와 합치되는 길이므로, 중화가 이룩되면 선정은 쉽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속집에 수록된 도 가운데 「태극통체인사도(太極統體人事圖)」에서는, 태극은 천하 사물의 근본으로 성인만이 이 이치를 완전하게 하며 삼재(三才)의 도를 형성한다고 설명하였다. 「중용중화위육지도(中庸中和位育之圖)」에서는 성정(性情)과 체용에 대해,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에서는 인심과 도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 밖에 「소학내외편목도(小學內外篇目圖)」·「맹자부동심지도(孟子不動心之圖)」·「사성역학지도(四聖易學之圖)」 등이 실려 있다.
[참고] 《宣祖實錄》,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陶山及門諸賢》, 《嶺南人物考》, 《晦谷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탁수(權鐸洙)  1835(헌종 1) ~ 1909(융희 3)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는 등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권탁수는 경북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의병의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생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의병의 결성을 도모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그는 의진편성 당시 백의종사(白衣從事)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 해 4월 2일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청송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 ∼ 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청송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赤猿日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권태시(權泰時)  1635(인조 13) ~ 1719(숙종 4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이다. 고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권예(權輗; 1495 ~1549)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을 탄핵한 상소를 올리기도 한 인종 대의 명신이었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건지산 아래의 낙동강 언덕에 ‘낙강정(洛江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였다. 이황이 낙강정에 방문하여 읊은 시가 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輓詩)를 지은 것으로 볼 때 이황과 상당한 교유가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증조부는 재릉참봉(齋陵參奉)을 지낸 권안세(權安世)이고, 할아버지는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지낸 권지(權誌)이다. 아버지는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이다. 할아버지인 권지(權誌)부터 청송 진보에 살기 시작하여 아버지 또한 중년 이후부터 진보에 우거하였다. 권태시의 부친은 이황과 김성일의 학맥을 이은 장흥효(張興孝)에게 수학하여 벼슬이나 과거에 관심을 끊고 은거하며 학문과 강학에 힘썼다. 이러한 부친의 학문적인 면모는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권태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성격이 장난이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자신에게 엄격하고 세상일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태시는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단정하였고, 공부를 하면 뜻을 곧잘 이해하였다. 그는 선대의 별장이 있던 예안현 북쪽 강가에다가 ‘산택재(山澤齋)’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여 강학할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왕의 특명으로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라는 벼슬이 내려졌으니, 이는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천거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이듬해에는 회덕현감(懷德縣監)에 임명되었다. 본래 회덕에는 큰 성씨가 많았고, 풍습이 사나워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는 이 지방을 매우 훌륭하게 다스렸다. 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관리로서의 몸가짐을 담은 《거관요람(居官要覽)》을 지었는데, 이 책에는 그가 지난 5년여 간의 관직생활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바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여러 번 상소를 올려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홍여하(洪如何),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김학배(金學培), 이유장(李惟樟) 등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 교분을 맺고 서로 오가며 글 읽기에 힘썼다. 권태시는 예학에 자신의 학문적인 열정을 쏟았다. 그리하여 고금의 선현(先賢)들이 주를 낸 예(禮)에 관한 학설들을 모아서 분류하고, 이것을 《가례(家禮)》의 주석아래에 나누어 배열하여 《가례전주(家禮傳註)》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당시 그의 친구들이 간행을 권유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그는 책을 짓거나 벼슬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뜻을 두었다. 또한 평소에 공부를 함에 책상에는 《주자사절요》와 《근사록》과 같은 책 이외에는 다른 책이 없었을 정도로 예학에 심취하였다. 문집은 《산택재집(山澤齋集)》 2권 1책이 전한다. 이 《산택재집》의 서문(序文)은 김도화(金道和)가 썼고, 발문(跋文)은 김형모(金瀅模)가 썼다. 상권(上卷)은 사(辭)와 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사는 「의의초사(擬擬招辭)」라는 글이 1편, 시는 60여 편의 시와 50여 편의 만사(輓詞)가 뒤섞여 있다. 하권(下卷)은 12편의 편지와 1편의 잡저(雜著), 3편의 서문(序文), 2편의 기문(記文), 발문(跋文)·뇌(誄)·광기(壙記)·유사(遺事)가 각 1편, 9편의 제문(祭文)이 실려 있고, 18편의 만사와 2편의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포헌집만록(逋軒集謾錄)」이 부록(附錄)으로 실려 있다. 「의의초사(擬擬招辭)」에서 「의초사(擬招辭)」는 여대림(呂大臨)이 초나라 송옥(宋玉)의 「초혼부(招魂賦)」를 모방하여 지은 것인데, 권태시는 여대림의 「의초사」가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타고난 본성을 회복한다.”는 숨은 뜻을 우언(寓言)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도 그와 같은 글을 지어서 아침저녁으로 잠언(箴言)으로 삼기 위해 지었다고 하였다.
[참고] 《山澤齋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권효량(權孝良)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증조부는 언신(彦臣), 할아버지는 청송 안덕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갖고 있던 명리(明利)이며, 아버지는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낸 자용(自庸)이다. 어머니는 이후(李厚)의 딸이다. 생원에 합격한 후, 1438년(세종 20)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吏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홍문관중서사인(弘文館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하위지(河緯地)와 같이 석채례(釋菜禮)를 횡당(黌堂)에서 강론하더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병을 칭탁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후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朝鮮寰輿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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