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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인물지 수록자료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3.05. 18:30 (2026.03.05. 16:53)

고려시대

 
• 권명리(權明利)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 김광부(金光富) ? ~ 1379(우왕 5) 본관은 의성(義城). 일명(一名) 광보(光輔). 호는 남파(南坡)이다.
• 신예(申藝)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덕(汝德). 초명은 자형(自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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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권명리(權明利)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고조부인 권절(權節)은 보승별장(保勝別將)이었고, 증조부인 권서(權瑞)는 검교별장(檢校別將)이었으며, 할아버지 권석화(權錫華)는 중훈대부(中訓大夫)였고, 아버지인 권언신(權彦臣)은 통직랑(通直郞)을 역임했다. 부인은 오천정씨(烏川鄭氏)이며 2남 5녀의 자식을 두었다. 장자인 권자용(權自庸)은 태종 때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고, 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교남지(嶠南誌)》에 이름이 올랐다. 차자인 권자성(權自誠)은 문종 때 승의부위(承義副尉)에 올랐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봉(錄奉)되었으며 다대포진(多大浦鎭) 만호(萬戶)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환연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이름이 올랐다. 권명리는 청송부에서 남쪽 50리에 있는 안덕에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탁월한 치산 이재로 노비 130여 구를 보유하는 등 재력이 막강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분재하여 부를 세습토록 하였는데 1443년(세종 25) 그가 자녀들에게 분재에 한 「허여문기(許與文記)」는 현재 경주손씨 손중돈(孫仲暾: 손사성의 손자)의 종손이 소장하고 있다. 권명리는 어릴 때부터 기개가 뛰어났고 정직하였다. 18세 때에 왜구를 피하여 산속에 피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처녀를 산 속에서 만나 잘 보호해주었다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처녀는 정승 집 딸이었다. 훗날 그 처녀의 부모가 권명리와 딸이 서로 사귀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권명리에게 혼인을 청하였다. 그러나 권명리는 그러한 사실이 절대 없었음을 하늘에 맹세하고 극구 사양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승 집에 장가드는 것을 경사로 여길 법하지만, 권명리는 이것이 양심에 거스르는 일이라 여겨 사양한 것이다. 세도가의 어려운 형편을 틈타 장가드는 것은 옳지 않으며 후세에도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참고] 《永嘉誌》
 
김광부(金光富)  ? ~ 1379(우왕 5)
본관은 의성(義城). 일명(一名) 광보(光輔). 호는 남파(南坡)이다. 의성군(義城君) 용비(龍庇)의 증손이며,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도곡(道谷) 김한경(金漢卿)의 고조부가 된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72년(공민왕 21)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이 되어 이를 격파하였다. 그 뒤 계림윤(鷄林尹)을 지냈다. 1379년(우왕 5)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 경남 산청)·거창(居昌)·야로(冶爐: 경남 합천)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사후 도동사(道洞祠)에 제향되었다.
[참고] 《高麗史》, 《高麗史節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예(申藝)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덕(汝德). 초명은 자형(自亨)이다. 아버지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낸 덕청(德淸)이며, 아들은 신영석(申永錫), 손자는 신지(申祉)이다. 고려 공민왕 때 순무재(純斌齋)라 사액(賜號)을 받았고, 병부중랑(兵部中郞)을 지냈다. 1372년(공민왕 21)에 홍륜(洪倫: 공민왕을 암살한 반역자)의 무리를 내치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가 과격하다 하여 파직되었다. 1375년(우왕 1) 이조참의(吏曹參議)‧직제학(直提學)을 제수 받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만년에는 청송 진보에 내려와 살았다.
[참고] 《純斌齋事實(申藝)》
 
심계년(沈繼年)  1368(공민왕 17) ~ 1434(세종 16)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둔재(遁齋)이다. 아버지는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이다. 1385년(우왕 11)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고, 조선 개국 후 태조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거부하고 내마마을에 은거하였다. 양계사(良溪祠)에 제향되었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심덕부(沈德符)  1328(충숙왕 15) ~ 1401(태종 1)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 또는 허당(虛堂)이다.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용(龍)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에 수원부(水原府)의 수령(首領)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寺)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 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密直司)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는데, 1380년(우왕 6) 산남도원수가 되어 진포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전승을 국가에 보고하니 우왕이 상을 후하게 주었다. 진포싸움에서 휘하에 도원수(都元帥) 나세(羅世)와 부원수(副元帥) 최무선(崔茂宣)과 함께 왜구 격퇴에 큰 성과를 거두어 왜적 300여 척과 왜구들을 불태우거나 참살하였다. 이는 최무선의 화약 제조로 1378년에 화기발사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痛放射軍)’이 편성되어 실전에 사용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화약을 전술에 응용한 최초의 무장이기도 하였다. 그 후 1385년(우왕 11)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북청(北靑)에 침략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동북면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요동출병 때에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李成桂)·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으로 공양왕에 의하여 충근양절협찬좌명공신(忠勤亮節協贊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 겸 판도평의사사영효사관사판상서사팔위상호군영경연사(判都評議使司領孝思觀事判尙瑞事八衛上護軍領經筵事)로 임명되었다. 그 후에 문하좌시중경기좌우도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1390년(공양왕 2)에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지고 중흥공신록권(中興功臣錄券)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말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하여 일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복직되고, 하정사(賀正使)인 왕세자 석(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李成桂)·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여졌다. 1397년(태조 6)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치사(致仕)하였다. 고려 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토벌에 업적을 남겼으니,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觀察使制)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복구하였으며, 절제사경력(節制使經歷)과 도사(都事)를 폐지하고 장무(掌務)·녹사(錄事)로 복구하게 하였다. 또한 새로 정한 감무(監務), 여러 역의 역승(驛丞), 여러 도의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 각 고을의 향(鄕)·사(社)·리(里) 등의 장(長)에 관한 법령 등을 폐지하도록 건의하였다. 이 밖에 여러 기관에서 조정의 허락을 받을 때에는 모두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하게 하고 육조에는 예속시키지 말게 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1394년에는 새 도성을 조성하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설치되어 수장 도감을 맡고 1년 내에 그 계획을 수행하였다. 그는 높은 벼슬을 하여 장수와 정승으로 20여 년을 보냈어도 축적한 재물이 없었고, 자제들에게는 “나라를 크게 일으키기 위해서는 항상 근면, 검소하라.”고 일렀다 하여 후세에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그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다섯째 아들인 온(溫)은 세종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여섯 째 아들인 종(淙)은 태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그에게서 이루어졌다. 처음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
[참고]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용(沈龍)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임랑(文林郞) 등을 지낸 청송심씨 시조인 홍부(洪孚)이며, 부친은 합문(閤門)을 역임한 안분당(安分堂) 연(淵)이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덕행(德行)과 문장이 있어 전리정랑(典理正郞)이 되었으나 사직(謝職)하고 조정에서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는 아들 안정공(安定公) 덕부(德符)가 귀하게 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하루는 인순왕후(仁順王后)가 꿈을 꾸고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에게 하교(下敎)하면서, “꿈 중에 나의 조부가 조(祧)를 원치 않는다.” 하고는 환봉(還封)을 시켜 그 후손에게 관직을 주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참고] 《嶠南誌》, 《靑己世稿》
 
심원부(沈元符)  1330(충숙왕 17) ~ ?
본관은 청송(靑松). 호가 악은(岳隱)이다.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용(龍)이다. 심원부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였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후 고려 말에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였다. 공양왕(1389~1392)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정2품 관직을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개국하자, 심원부는 고려의 충신으로 절의를 지킬 것을 결심하고 고모부인 예의판서(禮儀判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등 고려의 충신 70여 현과 함께 만수산 아래 두문동으로 입산하였다. 입산할 때 아들 3형제를 불러 놓고 ‘너희들은 나를 따르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선산을 수호하며 책을 읽고 농사를 지으며 남들의 부귀를 부러워하지 말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충효의 집안임을 잊지 말라.’라고 훈계하였다. 심원부는 두문동에서 죽었고,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알 수 없다. 공의 자손들은 유훈을 받들고 영남 청송으로 내려와서 초야에 묻혀 오로지 충효의 신념을 지키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임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의 증손 심덕부(沈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진봉되었던 덕에,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조선의 개국(開國)을 시작으로 청송심씨는 명문벌족(名門伐族)의 지위를 굳혀왔다. 심덕부는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이 때에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루었다. 세종(世宗)의 장인이었던 심온(沈溫)은 심덕부(沈德符)의 다섯째 아들이다. 심온의 장녀는 태종의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忠寧大君)과 가례를 올렸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중전(中殿: 昭憲王后)이 되었다. 심덕부의 후손들은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左議政)을 지내면서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동생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선조의 유훈을 지켰다. 그들은 대대손손 고향에 살며 서울과 벼슬을 멀리 했다. 현재 경북 청송군을 비롯해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심씨들은 거의 심원부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심덕부 집안을 가리켜 ‘서울집’이라 부른다.
[참고] 《高麗史》, 《高麗史節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홍부(沈弘孚)
본관은 청송(靑松). 청송심씨(靑松沈氏)의 시조이다. 심홍부(沈洪孚)로 쓰기도 한다.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 고려 시대 때 종구품 상 문관의 품계)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다. 국가에 공(功)이 있어 청기군(靑己君)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왜구토벌의 공훈을 세우고 위화도회군을 도운 덕부(德符)가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을 거쳐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청송(靑松=청성)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리 뒷산에 묘가 있고 제각(祭閣)으로 찬경루(讚慶樓)와 만세루(萬歲樓)가 있다.
[참고] 《嶠南誌》
 
왕립(王立)
진보(眞寶) 성주 홍술(洪術)의 아들이다. 922년(태조 5)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한 아버지 홍술의 명을 받아 923년(태조 6) 갑옷 30벌을 태조에게 바치고 원윤(元尹) 벼슬을 제수받았다. 홍술은 신라 말기 반독립적 상태에 있던 지방호족 중의 하나로, 당시 지방호족들이 고려왕조가 성립되자 고려왕조에 대하여 적대의식 또는 독립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려에 귀부하는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관직을 받아 쌍방 간의 호혜적인 관계를 성립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 《高麗史》, 《東國通鑑》, 《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석(李碩)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할아버지는 송주(松柱)이고, 아버지는 영찬(英贊)인데, 모두 호장(戶長)을 지냈다.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에 의하면,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고려 1364년(공민왕 13)에 봉상대부(奉常大夫)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였고, 그 덕분에 안조공신(安祖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석은 대략 충렬왕과 충선왕 때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석은 고려 말엽에 진보현(眞寶縣)의 관리로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 뒤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나라에 공을 세운 덕분에 이석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석은 천성이 매우 공손하고 근실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된 뒤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정진하고 수신에 힘쓸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인품이 겸손하고 학문이 깊은 선비로 정평이 났다. 그는 마을에 거처할 때 몸가짐이 매우 근실하였다. 그래서 고을 원님의 등청을 알리는 뿔피리(角聲) 소리를 들으면, 곧 당실 아래로 내려와서 꿇어앉고, 소리가 그친 뒤에야 다시 당실에 올랐다고 한다. 고을 원님이 이 소식을 듣고 미안하여 청기현(靑己縣)의 뿔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옮겨가서 살기를 권했다고 한다. 이석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첫 번째 부인은 호장이었던 김현(金玄)의 딸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이석의 묘소는 원래 진보현(眞寶縣) 남쪽 기곡산(岐谷山)에 있었고, 현재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호장공(戶長公) 이석의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는 기곡재사(岐谷齎舍)가 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이자수(李子脩)이고 차남은 이자방(李子芳)이다. 이자수는 충숙왕(忠肅王) 때 명서업(明書業,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는 과거)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 토벌에 공을 세우고 ‘나라를 편안하게 한 공신’이란 뜻의 ‘안사공신(安社功臣)’ 칭호를 받고 청송과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지며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올라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나라에 공을 세운 덕분에 이석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안동 풍산현 망천에 터를 잡았던 이석의 두 손자 이운구(李云具)와 이운후(李云侯) 대에서 진성이씨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운구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이운후는 부정(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운구의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차남 이양검(李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이양호(李養浩)가 유명했다. 이운후의 아들 이정(李禎)은 세종(世宗)때 최윤덕(崔潤德)을 도와 여진(女眞)을 토벌한 공으로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한산군수(漢山郡守)를 거쳐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이운후는 슬하에 아들 이우양(李遇陽), 이흥양(李興陽), 이계양(李繼陽)이 현달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이 중 셋째 이계양은 호가 노송정(老松亭)이었다. 그의 둘째 아들 이우(李堣)는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한 후 승지(承旨)로 있다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 4등공신(靖國功臣四等)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또한 1508년(중종 3)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 6형제 중 넷째인 이해(李瀣)는 사간(司諫), 정언(正言)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도승지(都承旨),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했고, 예서(隸書)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다. 그의 아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가문을 명문가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퇴계는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大儒學者)로 예조판서(禮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정주(程朱)의 성리학 체계를 집대성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사칠론(四七論)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진성이씨는 영남 최고로 일컬어진 학문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참고] 《嶠南誌》, 《眞城李氏世譜》,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이자수(李子脩)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석(碩)이다. 고려 충목왕조(忠穆王朝)에서 급제하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난리 때에 홍건적을 토벌하여 안두공신칭호(安杜功臣稱號)를 받았다. 그리고 청송·안동지역을 다스리는 송안군(松安君)에 봉(封)해지고, 관직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청송에서 안동에 옮겨 거주하고, 작산사(鵲山祠)에 향사(享祀)하였다. 이자수가 직접 지은 안동의 경류정(慶流亭)은 진성이씨(眞城李氏) 대종택(大宗宅)으로 아직도 안동의 온혜리에 남아 있다.
[참고] 《朝鮮寰輿勝覽》
 
조용(趙庸)   ? ~ 1424(세종 6)
본관은 진보(眞寶). 호는 송정(松亭). 초명은 중걸(仲傑)이다. 배천조씨(白川趙氏)의 시조 조지린(趙之遴)의 11세손으로, 진보조씨(眞寶趙氏)의 시조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고, 전교주부(典校注簿)와 삼사도사(三司都事)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즉위년에 시학(侍學), 1390년(공양왕 2) 정월에 전농시승(典農寺丞), 4월에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당(黨) 중에서 귀양 가지 않은 우현보(禹玄寶)·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경보(慶補) 등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게 하였다. 1392년 7월에 사예(司藝)로서 공양왕이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이성계(李成桂)와 동맹을 하겠다고 밝히고 조용에게 그 초안(草案)을 잡아 오라고 하여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초고(草稿)를 바쳤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병으로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사임하고 보주(甫州)에서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1398년(태조 7) 7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발탁되고, 9월에 우간의(右諫議)로서 이조전서(吏曹典書) 이첨(李詹), 전지선주사(前知善州事) 정이오(鄭以吾)와 함께 경사(經史)에 기재된 임금의 마음가짐과 정치에 관계되는 것만을 찬집하여 상절(詳節)을 만들어 바쳤다. 1401년(태종 1) 5월에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다음해 2월 대사성(大司成)으로서 생원시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7월에 좌사간(左司諫), 1403년(태종 3) 12월에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60인의 요청으로 검교한성윤겸성균대사성(檢校漢城尹兼成均大司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404년(태종 4) 12월 29일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취임한 뒤 다시 1409년(태종 9) 8월 10일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취임하였다. 1414년(태종 14) 8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으며, 다음해 정월에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태종 15) 12월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고, 1417년(태종 17) 5월에 다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다음해 정월에 우군도총제(右軍都總制)가 되었다. 1421년(세종 3) 검교(檢校),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제수 받고 전(田) 30결과 미두(米豆) 20석(石)을 하사받았고, 이듬해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로 치사(致仕)했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므로 배우려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세종은 경사(經史)를 읽다가 의심이 나는 곳이 있으면 그에게 물어 오게 했다. 그는 총명함이 뛰어나 문장을 보면 거의 기억했고 효성이 지극했다. 제자로는 조말생(趙末生)·윤상(尹祥)·배환(裵桓)·배강(裵杠) 같은 문인들이 있다. 1392년(태조 1년) 조선이 개국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 야주군(夜珠郡: 예천)에 은거(隱居)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진보군에 봉하였다. 그가 죽은 후 학문과 품행을 추모한 후손들이 예천에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여 그를 제향케 했으며, 그뒤 후손들이 배천에서 분관하여 진보를 본관으로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太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文科榜目》, 《海東雜錄》, 《大東奇聞》,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유인(曹由仁)
본관은 남평(南平). 증조부는 신의(臣義), 할아버지는 시우(時遇), 아버지는 부(孚)이다. 1390년(공양왕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며, 1396년(태조 5)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418년(태종 18) 청보군사(靑寶郡事; 靑寶는 청송의 옛 지명이다.)에 제수되었다.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사(府使)를 지냈다.
[참고] 《嶠南誌》, 《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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