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극장의 탄생과 국악의 날
광무대(光武臺)는 1903년 동대문 전차 차고를 개조하여 활동사진관으로 시작하여 초창기에는 송만갑(宋萬甲), 박기홍(朴基洪), 이동백(李東伯), 김창환(金昌煥) 등 명창이 전속되어 창극을 하며 지방 순회공연을 병행했다.
1907년(융희 1) 5월 28일 저녁 8시에 첫 개장공연은 전통예술 위주 작품으로 공연하였다. 당시 출연진은 조선의 명인과 명창들로 줄타기의 김관보, 대금과 피리, 해금의 명인 장점보, 태평소의 방태진, 남도잡가의 조진영, 경서도창 재담의 달인 박춘재 등과 화성 재인청 출신의 김인호, 김관보, 제자 이동안이 있었다. 6월에는 낮에 경기와 서도의 선소리패인 뚝섬 놀량패와 소리패들이 공연하였고, 밤에는 서양의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은입사 기술로 장식된 煙具 일괄(사진:서울역사박물관)
광무대 극장과 활동사진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 입장료가 10전이었다. 극장은 대영제국, 미국, 프랑스제국의 담배를 선전하려는 상업적인 목적이 있어 외국 담뱃갑 포장지를 가져오면 무료로 입장시켰다. 1896년 제물포에 거주하던 프랑스 상인 가이야르 죈느(Gaillard Jeune)가 프랑스 양담배 바스토스(Bastos)를 100개비를 60센트에 판다고 광고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비싼 궐련의 등장으로 곰방대가 퇴조하기 시작하고 예쁜 곽에 질이 낮은 담배를 넣은 위조 제품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상인은 1897년경에 영국 담배 칼표(Sword)를 수입해 사람들에게 팔았다. 고종 황제와 고위 관리들은 1898년 20개비 포장에 은화 40센트로 상당히 비싼 미국산 궐련을 애호했다. 이 시기에 일본제국의 담배도 유입되어 경쟁하고 훗날 일본식 전매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담배는 17C 중반 이후 조선 사회를 대표하는 기호품이 되어 가격이 비싸고 건강에 해롭다는 우려하였지만, 가래나 배의 통증에 효과가 있다는 속설에 너도나도 호기심에 접하다 차츰 독특한 맛에 중독이 되었다.
곰방대(사진:로버트 네프)
박사형(朴士亨)은 《淸狂集》에 담배의 신기로운 효능을 칭송해 〈南草歌〉를 지었다.
“平生 病이 잇셔 온갓 풀을 다 맛보니 人蔘蒼朮 遠志菖蒲 香藥方의 엿거三年을 長服 七年病을 말긴숀야” “이 몸이 貧賤야 草野의 뭇쳐시니 藜藿羹을 못免되 葵藿忱은 혼자 잇셔 너 갓튼 마보니 獻芹誠이 보야날 졔 兩腋에 짓을 돗쳐 九天의 라 올나 閶闔門 드리달나 玉皇進上면 香案에 노아 보고 우리 東皇 賞給야 千千 萬萬歲를 거의 疾病 업사실그졔야 太平烟月에 壽民丹을 삼으리라”
당시 여성의 흡연은 여성의 육체적 심리적 고단함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신경미 선생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비흡연자이기 하지만 담배라는 물질이 조선 후기를 설명하는 하나의 지표라고 여겨 담배의 시대성과 무병장수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이들의 삶을 규명하려고 끝까지 파고들어 마침내 〈조선 후기 담배의 전래와 수용양상〉 논문을 제출하여 2023년 2월 박사가 되었다. 신 박사의 논문 여러 편을 읽었다.
《한국유성기음반문화사》(사진:배연형)
국악 민속 음악학자 배연형은 2005년에 발표한 〈근대극장 사진 자료 연구〉 논문에서 광무대를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극장이라고 주장했다. 배 교수는 “광무(光武)는 대한제국 고종의 연호로 1897년 8월 17일부터 1907년 8월 3일까지 사용했고, 1913년 6월 이후에는 황금정 4정목(을지로 4가) 黃金遊園 내 연기관(演技館)을 임대하여 전통 공연 예술극장으로서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라고 설명한다. 평론가 이주영 박사는 《한국연극학》 제48호에서 “광무대는 전통연희를 적극적으로 실내로 끌어들인 극장이다.”라고 말했다.
원로 연극학자 유민영은 2017년 9월에 발간한 《예술경영으로 본 劇場史論》 《한극 근대극장 변천사》 (1998. 태학사) 책에서 “광무대는 우리 고유의 전통연희를 보존하고 대중화한 중심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도 고집스럽게 전통 예술을 지켜낸 민족 정서의 보류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현대희곡을 전공한 서울시립대 백두산 교수는 〈식민지 조선의 상업, 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1920년대를 중심으로〉 논문에서 당시 한성의 발전상과 서민적 오락 형태, 박람회 문화 확산과정, 북촌 개발상, 서커스단 공연, 경성 시가지 정비사업, 광무대의 공연, 박춘재 외 ‘지깜깡이’ 공연 등을 자세히 분석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현대공연예술사를 전공해 문경연 교수는 “광무대에서는 판소리, 민속춤, 승무, 민요창, 창가(잡가), 탄금(가야금산조, 병창), 날탕패놀이, 무동패놀이, 재담 등의 전통연희와 활동사진이나 환등 등의 근대적 시각물로 구성되었고 관객들은 전통의 종합 연행물과 근대적 시각물에 동시적으로 노출되면서 근대적 시각성을 훈련받았다.”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서울 사람들은 처음에 이곳을 ‘활동사진소 내의 연극장’이라 부르다가 1907년 5월 30일 〈만세보〉 신문에 난 광고가 보고 광무대로 호칭했다.
단성사(1955)(사진:위키백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1908년(융희 2) 9월 6일에 전기철도회사로부터 광무대를 임대하여 전통연희 전용 극장으로 운영되었다. 박승필은 다른 극장들이 영화와 신파극을 공연하던 것과는 달리 전통적 판소리와 창극을 보호할 목적으로 주로 판소리, 창극, 고전무용 등을 공연하였지만, 서민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를 걱정해 극장을 휴관하기도 했다. 그는 시민위생을 위한 1907년(융희 1) 위생환등회, 1912년 조산부 양성을 위한 연주회 등 자선공연도 자주 열었다. 박승필은 1910년대 중반에는 활동사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단성사(團成社)를 인수하여 영화관으로 개관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는 신파극이나 신극 단체에도 대관하였다.
1910년 이후에 광무대는 일본와사(瓦肆) 전기회사의 소유로 귀속되어 회사가 사업 확장을 하면서 광무대 건물을 차고(車庫)로 사용하겠다고 요구하여 1913년 5월에 폐관되었다. 연희공간이 없어진 광무대의 신축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1913년 을지로 3가 근처에 있던 황금유원지 안의 일본인 소유 극장 연기관을 임대하여 다시 광무대라 칭하고 공연을 재개했다.
황금정으로 이전 후에는 공연이 더 다양해져 연극, 명창 판소리와 병창, 민요, 타령, 무땀놀이(舞童놀이 추정), 쌍승무, 한량무, 검무, 법고, 줄타기, 탈놀이, 씨름, 양금 등 전통음악과 춤 등을 공연했다. 박승필은 나운규 등에게 영화 제작비를 지원헸다. 그는 일본인 감독이 1923년 영화 〈춘향전〉을 제작해 성공하자 단성사 안에 영화촬영부를 별도로 두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했다. 광무대는 1925년부터 1년간 토월회(土月會)와 전용 대여 계약을 맺고 대관했다. 그러나 1926년 토월회가 파산하자, 광무대는 연극, 영화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대여했다. 한국영화사의 효시가 되었던 광무대 극장은 1930년 5월 2일 한 소년이 불을 내 전소되었다.
함께 읽는 헌법 제9조(사진: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헌법 가치의 확산과 헌법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이기 위해 SNS를 통해 국민에게 연중 기획으로 헌법 제1조부터 제130조까지 매주 헌법 조항을 읽고 그 뜻을 음미해 보면 어떨까요?”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 보존과 민족문화 발전을 위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많은 국악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2003년에 헌법재판소는 “민족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국가의 은혜적 시혜가 아니라 헌법상 의무이다.”라고 판시했다. 이에 힘입어 국악인들은 문화적 발전의 주체로서 전통을 보전, 계승, 육성, 진흥하고 문화재 보호 및 향유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각계각층에 호소했지만 장벽이 높았다. 17대의 국회에서 강혜숙(2007) 의원이 법적 근거를 마련할 목적으로 추진하고, 김을동(2009), 강동원(20123), 김두관(2017) 국회의원이 연속하여 국악 관련 지원법을 발의했으나 ‘회의 불계속’ 및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이 〈공연법〉과 〈문화재보호법〉과의 유사 및 중복 문제였다.
2020년 9월 1일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은 국악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악문화산업진흥법〉을 김영호, 김홍걸, 박찬대, 소병훈, 안호영, 양기대, 위성곤, 유정주, 이동섭, 이병훈, 임종성, 장경태, 전용기, 정정순, 조승래, 황운하 국회의원 16명과 함께 발의했다.
〈국악진흥법〉 발의 임오경 국회의원(사진:국회)
2017년 김교흥 국회 사무총장은 국악인을 비롯해 54개 국악단체협의회, 전문가들과 토론회를 개최하며 국악진흥과 법제화를 위해 노력하다 제21대 국회에 들어와 첫 제정법으로 37인과 함께 〈국악진흥법안〉을 발의했다.
〈국악진흥법안〉 발의 김교흥 국회의원(사진:국회)
대한민국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로 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임오경 국회의원은 “우리나라에 국어, 국기, 전통무예, 씨름, 문화재는 모두 고유의 법이 있지만, ‘국악법’만 없어 차별을 받고 있다.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국악의 세계화를 위해 국악을 위한 법안이 꼭 필요하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경복궁 근정전 세종조 회레연 공연(사진:문화체육관광부)
이후 국회에서의 논의가 지지부진해지자, 임오경 국회의원이 앞장서서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인 이영희(가야금), 신영희(판소리), 임응수(농악), 김세종 국악학자 등과 함께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후 공청회를 거쳐 3년 만에 국회 여야의 합의로 다른 법안과 병합하여 2023년 6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악진흥법〉을 통과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7개 조로 구성된 〈국악진흥법〉을 2024년 7월 26일부터 시행하여 전통공연예술이 문화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고 경계확장을 유도했다.
국악인 김준수, 유태평양(사진:문화체육관광부)
2025년 6월 5일은 첫 번째 ‘국악의 날’로 경복궁에서 기념식을 하였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광무대 전통상설공연’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예술가들의 전통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국악의 날은 세종대왕이 백성과 함께 음악을 즐기고 싶어 만든 악곡 〈與民樂〉이 탄생한 날로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6월 5일 을축 기사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박소영 초등학교 교사가 저술한 《우리가 몰랐던 우리 음악 이야기》(2018, 구름서재)를 읽으며 세종대왕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는지 알게 되었다. 책 첫째 마당 제목이 ‘조선 왕들 음악으로 백성과 통하다’이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 음악 이야기》(사진:교보문고)
국악 전문 음반사 악당이반(樂黨異般)의 김영일 대표는 1994년 국악인 채수정의 판소리 공연을 본 후 국악에 깊이 빠져 전국을 돌며 소리를 채록하고, 1,000여 개가 넘는 국악 음원을 제작했다.
2005년에 ‘음악을 즐기는 무리로 이롭게 모여서 나눈다’라는 뜻의 국악 전문 레이블 악당이반(樂黨異般) 설립하여 퓨어 레코딩(Pure Recording) 기법을 통해 국악기 고유의 소리와 명인들의 연주를 현장감 있게 담아내고 있다.
김영일 악당이반(樂黨異般) 대표(사진;樂黨異般)
樂黨異般은 국악인들을 촬영한 초상 사진전 <귀한 사람들>을 2013년에 개최하여 국악인의 혼과 정신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전신화(傳神畵) 기법을 사진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여창가곡〉을 5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경주 양동(良洞)마을 관가정(觀稼亭)에서 연주하고 녹음한 세계 최초의 SACD(Super Audio Compact Disc) 〈여창가곡-정가악회 풍류 3집〉 전통음악 음반은 제54회 ‘그래미 어워드’ 월드뮤직 부문과 서라운드 사운드 부문 수상 후보에 올라 국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경주 양동마을(사진;중앙일보)
음향 DSD(Direct Stream Digital) 녹음 방식은 CD의 64배에 이르는 고음질로 우조 이수대엽, 우조 두거, 우락 등 여창가곡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과 느림의 미학을 담았다. 정가악회는 이 음반을 통해 한국 전통 성악의 정수인 가곡을 깊이 있고 현대적인 고음질로 재해석하여 호평받았다.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觀稼亭)(사진;樂黨異般)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觀稼亭)은 조선왕조 중종 때 이조판서, 대사헌, 대사간을 역임한 청백리로 알려진 우재(禺齋) 손중돈(孫仲墩, 1463~1529)의 옛집으로 2010년 7월 31일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은 유네스코에 음악 및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2009), 가곡(2010) 줄타기, 택견(2011), 아리랑(2012), 노악(2014), 줄다리기(2015), 연등회(2020), 한국의 탈춤(2022) 등이 등재되어 외국인에게 보여줄 수준이 높은 영상물과 음반이 대단히 중요하다.
관가정(觀稼亭) 녹음(사진;樂黨異般)
김영일 악당이반(樂黨異般) 대표는 2015년 파주 출판도시에 전문 레코딩 스튜디오 파주(Studio Paju)를 건립해 사비로 국악 음반을 제작하고 한옥 공연장 건립과 청소년 국악도 악기 지원 등을 해 많은 국악 동호인들은 그를 국악 전도사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정가단 아리 녹음(사진;樂黨異般)
악당이반(樂黨異般) 파주 녹음실은 3,000평 대지에 4동의 건물과 대형 녹음실을 준비해 넓은 공간을 제공한다. 녹음실은 낭만과 어울림을 강조하며 장르의 구분 없이 모든 음악과 음악인, 영화인, 광고인 등에게 열려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