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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9:42 (2026.02.08. 19:28)

(五鉉 대종사, 만해축전에서 춤 권유하며 화두 줘 ... 영혼이 깃든 춤’ 창안(創案)해 2001년 발표

 
춤꾼 이애주(李愛珠)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춤
강화도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전진(前秦)에서 온 아도화상(阿道, 我道, 阿頭)이 절을 창건해 진종사(眞宗寺)로 불렀다. 아도는 아두삼마(阿頭彡麽)에서 나온 말로 ‘아두’는 ‘빡빡 깎은 아이 머리’이며 ‘삼마’는 승려를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삼마를 사미로 본다. 일부 신진학자들은 삼마가 샤먼(Shaman)을 뜻하는 한자 표기라고 주장한다.
춤꾼 이애주(李愛珠)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춤
 
 
강화도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전진(前秦)에서 온 아도화상(阿道, 我道, 阿頭)이 절을 창건해 진종사(眞宗寺)로 불렀다. 아도는 아두삼마(阿頭彡麽)에서 나온 말로 ‘아두’는 ‘빡빡 깎은 아이 머리’이며 ‘삼마’는 승려를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삼마를 사미로 본다. 일부 신진학자들은 삼마가 샤먼(Shaman)을 뜻하는 한자 표기라고 주장한다.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高麗史》를 볼 때 요수(遼水) 북쪽에 있었고, 요수는 화주(和州) 압록(鴨綠)을 지나는 강으로 지금의 安民江(渾河)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고대 압록은 지금의 의주 압록이 아니었다. 화주 지역은 長嶺鎭, 唐文, 博平郡으로 발해가 융성할 때는 장령부(長嶺府)가 있었던 백두산 북쪽에 있는 광활한 땅이다.
 
【출전】 “和州本高句麗之地, 或稱長嶺鎭, 或稱唐文, 或稱博平郡, 高麗初, 爲和州.” (高麗史 卷58 志 卷第12地理 3 東界 和州)
 
【번역】 화주는 원래 고구려 영토의 일부였으며, 장령진, 당문, 박평군 등으로 불렸다. 고려 초기에 화주로 하였다. (고려사 58권 12장 지리 3장 동쪽 경계, 화주)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朝鮮金石總覽》에 “미추왕(味鄒王)의 딸 성국공주(成國公主)를 치유해 천경림(天境林)에 흥륜사를 건립하게 했다”라는 아도화상비(544) 내용이 있다.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는 원과 30년간 전쟁하고 1259년 화친한다. 고려왕조 제25대 충렬왕 비 정화궁주(貞和宮主)는 송나라에서 전해온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불서(佛書)와 옥등(玉燈)을 절에 시주하여 이후 전등사로 부르게 되었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이 태자 시절인 1260년에 혼인해 왕의 정비(正妃)가 되었다.
 
1274년 고려 원종이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카안과 혼인을 합의해 카안의 막내 딸인 ‘보르지긴 쿠투르칼라미시’ 황녀가 고려로 시집온다. 1년 후 황녀가 충선왕을 낳아 원나라 조정과 고려는 황녀의 직위를 두고 논의하게 되어 제국공주(齊國大長公主, 원성공주)로 부르고, 정화궁주는 제2비로 물러나 별궁에 머물렀다.
 
충렬왕은 1278년 부마(駙馬)의 인장을 하사받고, 1281년 ‘駙馬高麗國王’ 칭호를 받았다. 정화궁주는 1319년 죽을 때까지 고려왕조의 중흥을 부처님께 기원했는데, 해당 논문을 찾아보니 2022년 서울대 규장각에서 나온 황향주 박사의 〈원복속기 고려 왕실 編制의 재정립〉 논문이 있어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애주 한국전통춤회 〈승무〉(사진:이애주문화재단)
 
20여 년 전 강화 ‘전등사 해넘이 춤 공연’을 부탁하려고 서울대 이애주(李愛珠, 1947~2021) 교수님에게 9월 초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은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우리 춤을 보급하고 춤을 통해 中道를 실천하겠다는 마음과 불자들과 하나로 어우러져 춤을 추면서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자선 춤 공양을 실천했다. 사찰 순례 춤 공양 날짜를 여쭈었더니 12월 29일 춤 공양이 가능하다고 말씀했다. 공연 자료를 받으러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교수 연구실을 방문했다. 교수님은 대학원생 수업이 있으니 같이 연습실로 가자고 말씀해 춤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승무를 추는 3명의 대학원생의 키가 무척 커서 춤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키 기준이 있냐고 물었더니 “요즘 학생들은 키가 몹시 크다.”라고 말하며 웃으셨다. 연구실에서 한성준과 한영숙 선생님의 자료를 잔뜩 챙겨주어 나중에 반환한다고 하였더니 보관해 잘 사용하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께 “춤이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하였더니 “사람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움직이게 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먼저 몸놀림이 있고 난 후에 소리도 내고 말도 하고 글도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온몸을 놀리어 말을 하며 몸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총체적인 표현방법이 바로 춤이다. 춤이 행동이며 살아가는 자체이고 그 행동이 곧 춤입니다. 행동이 사회적, 역사적 실천이며 춤이 예술적 실천입니다.”라고 알기 조금 쉽게 풀어 설명했다. 당시 자선 춤 공양은 서울 진관사, 수원 용주사, 울산 자광사, 김천 직지사, 광주 관음사 등에서 펼쳤다.
 
강화도 전등사(사진:궁인창)
 
한 해의 마지막 토요일인 12월 29일 전등사 저녁 날씨는 아주 매서웠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 영하 15도로 떨어져 더 춥게 느껴졌다. 대웅전 앞마당에 드럼통을 여러 개 만들어 불을 지펴도 추워서 얼굴이 금방 얼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자 이 교수님은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대웅전에 들어가 합장하고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그리고 버선발로 나와 대웅전 마당을 크게 돌기 시작하며 제자들과 함께 알 듯 모를듯한 이상한 춤을 추었다. 제자들은 두꺼운 옷을 벗고 얇은 무용복으로 나타났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방에서 웅크리고 밖을 내다보던 전등사 신도 250여 명은 범종 타종 소리에 서둘러 대웅전 앞마당에 나와 이애주 교수의 동작을 흉내를 내며 1시간 동안 열심히 따라서 걷고 춤을 추며 원을 돌았다.
 
춤은 정말 신비했다. 독수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 같은 부드러운 춤으로 교수님은 고구려 춤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필자는 고구려 무용총에 나오는 춤사위로 생각했다. 신명 난 춤꾼은 온몸으로 고구려 춤을 추며 예술적 실천을 그대로 보여주어 전등사 신도들은 덩달아 신명이 났다. 춤 공연이 끝나고 따뜻한 방에 들어온 신도들은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얼굴은 감흥으로 환해져 있었다. 연신 떡국을 먹으며 이애주 교수님의 춤 동작과 춤 이야기를 하였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사진:궁인창)
 
다섯 살 때부터 춤을 시작한 이애주 어린이는 유치원 때부터 소질이 남달랐다. 어머니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을 1951년에 개원한 국립국악원 김보남(金寶男, 1912~1964) 명인에게 맡겼다. 이때 승무, 궁중정재, 춘앵무, 검무를 익혔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대한민국 문화공보부 주최 제7회 신인예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대학생 이애주의 춤 인생은 1969년 한영숙 선생의 첫 전수자로 들어가면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다.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한영숙 선생이 이애주 학생을 첫 제자로 뽑아 완판 승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1974년 6월 22~23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이애주 춤판>과 창작 춤 〈땅끝〉 4회 공연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를 다니며 한국 전통춤의 가치를 빛냈다. 그녀의 춤은 화려한 조명 밑에서 추는 춤이 아니라 어떤 곳이든 서슴없이 가서 땅바닥에서 맨발로, 버선발로 뛰어다니며 춤을 추어 사람들은 그녀의 춤이 너무나 좋다고 말했다.
 
창작 춤 〈땅끝〉(사진:이애주문화재단)
 
1987년 1월에 연세대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가 어수선했다. 대학생들이 몸에 시너를 붓고, 어떤 대학생은 구호를 외치고 옥상 건물에서 떨어졌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반정부 학생 시위가 벌어져 오후 5시쯤 경찰이 쏜 SY44 총류탄에 이한열(李韓烈, 1966~1987) 학생이 머리에 맞고 쓰러져 친구들이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이한열 군은 일어나지 못하고 7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21세 나이에 짧은 생을 마쳤다. 6월 10일 대학가는 물론 500만 명의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민항쟁을 시작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서울대생들은 선배인 이 교수를 찾아가 간절하게 춤을 부탁드렸다. 이 교수는 후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87년 6월 27일 민주화 대행진 출정식 때 무명옷을 입고 진혼굿을 펼쳤다, 춤의 힘은 정말 무서웠다. 행사장에 있었던 일들이 전국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민심이 크게 요동쳤다. 국민의 거센 저항운동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하여 군부 독재의 종식을 고했다. 시민들은 민주화를 되찾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한열 열사 한풀이 춤(1987.7.9.)(사진;중앙포토)
 
1987년 7월 9일 10만 명의 서울시민과 대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 국민장’이 연세대 본관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애주 교수는 영결식 운구 행렬을 이끌며 이한열 열사 망자의 원혼을 달래며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길을 닦는 흰 광목을 찢어냈다. 춤꾼 이애주가 최루탄이 마구 발사되었던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한풀이 춤을 출 때 많은 어머니가 오열했다. 광화문 거리 노제에서 시민들과 함께 망자의 넋을 달래주었다.
 
이애주 교수는 1992년 전수 조교를 거쳐 1996년 승무 보유자가 되었다. 춤꾼은 백령도, 울릉도, 독도, 제주도 백록담, 마라도, 백두산 천지, 만주 등지를 다니며 신명 나게 ‘터벌림’을 하였다. 민족사진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지낸 김영수(1946~2011) 사진가가 이애주 교수의 춤을 12년간 카메라에 담았다.
 
독도 넉살풀이(사진:한국전통춤회)
 
민족사진가협회는 김영수 사진가가 작고한 지 1년이 지난 2012년 5월에 《우리 땅 터벌림》 책을 출간했다. 이 교수는 춤의 본질과 생성원리를 찾기 위해 밤이 늦도록 고전을 뒤적이며 “사람이 생겨나면서부터 춤은 있었다. 사람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꽃과 나비가 만나고 흙과 나무가 숨을 쉬며 잎이 돋아 낙엽 지는 것도 모두 한판 춤이다. 우리가 무심히 걷는 한걸음이 춤에서는 百年, 千年의 역사가 되기도 하고, 좌우 양 날개를 벌려 너울거리고 어깨춤을 추는 것은 세상의 얽힌 매듭을 풀어내는 것이다. 즉 발놀림은 하늘을 논하는 것이고, 팔놀림은 땅을 논하는 것으로 사지를 움직거려 온몸으로 세상사를 함께 풀어내는 것이 춤이다.”라고 고백했다.
 
이애주 승무(사진:이애주문화재단)
 
2000년대 후반에는 大山 김석진(金碩鎭, 1928~2023) 옹에게 《주역》을 배우고 스승의 책 출간 기념식이 열린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2014년 1월 6일, 7일 이틀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아르코극장에서 공연하였다. 공연 제목이 《天命》이다. 춤꾼은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 춤이 60년을 한결같이 춤 속에서 살아 하늘에서 내린 천명이라고 생각했다. 天命은 《중용》 첫 문장에 나오는데, 하늘이 내린 본성이 바로 천명이다. 춤꾼은 “《주역》에도 춤추는 법이 나와요. 《易經· 繫辭》에 「고지무지이진신(鼓之舞之以盡神)」이라고 했어요. 발로 땅을 두드리고, 팔을 자유로이 흔들며 신명을 다하는 거죠. 춤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입니다.”라고 말했다. 실상 ‘鼓之舞之’ 이 성어는 언어적 격려 수단을 말할 뿐만 아니라, 북과 춤의 결합 표현 형식도 포함하고 있다. 정신적 힘을 상징하고 농경 문화형 춤의 시작을 상징한다. 제사 의식에서 북은 신을 소통하는 매개체로서 리듬을 통해 춤 동작을 규범화하며 점차 주술 의례의 핵심 기호로 발전했다.
 
《고구려 춤 연구, 2022》(사진:이애주문화재단)
 
춤꾼 이애주는 1974년 석사학위 논문 〈처용무에 관한 연구〉을 통해 우리 전통무용의 특질을 연구하고, 1999년 〈고구려 춤의 상징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춤 20개의 그림을 바탕으로 우리 춤의 기원을 연구했다. 1982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한영숙춤보존회 이사장,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역임했다.
 
전통무용의 전승과 발전에 헌신한 춤꾼은 춤추기 전에 천부경을 낭송했다. “천부경은 81자로 된 인류 최초의 경전이에요.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통해 하늘과 땅, 인간의 원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춤이란 것은 천부경에 나오는 천지인 원리를 담고 있는 동작으로 자연의 움직임, 삶의 몸짓 그 자체가 춤이죠. 승무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어 절하는 것이 첫 움직임으로, 춤은 사람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 자체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부터 최고의 정신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빼고 덜고 할 것 없이 완벽하게 정립되어 있는 춤이 바로 승무이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했다.
 
영원한 춤꾼 이애주 승무(사진:경기아트센타)
 
춤꾼 이애주는 승무에서 가장 중요한 동작을 첫 동작과 마지막 동작이라고 성명했다. “승무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상태에서 시작해 양팔을 서서히 움직이며 일어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절한다. 그리고 몰아치는 북소리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후 마지막 순간에도 공손히 합장한 다음 관객을 향해 다시 머리를 조아린다. 이 작은 동작은 우리 민족 최고의 춤사위이다.
 
승무의 첫 사위는 천지인(天地人)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땅에서 씨앗이 배아 되듯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가 움직거리듯 신성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이 춤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예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속을 비우는 몸짓이다. 그래야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춤은 절로 시작하고, 절로 끝난다. 춤은 단순한 것 같지만 삶의 회귀이며 우주 자연의 윤회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자연과 하나가 된다. 춤은 이웃에 대한 섬김이요, 받듦이요, 모심인 셈이다.”라고 말씀했다. 교수님은 대중 강연할 때 “우리 춤은 자연에서 나왔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춤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본성, 그 자체가 승무의 몸짓이죠. 가장 겸손한 춤으로 자신을 더욱 진솔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승무는 승복을 입고 추는 춤의 하나로,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흔히 무복(舞服) 때문에 중 춤이라고도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과는 전혀 다릅니다. 승무는 달고 어르고 맺고 푸는 선율의 섬세한 표현과 초월의 경지를 아우르는 춤사위의 오묘함이 조화된 춤으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고 승화시킨 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전 은빛반야회 백담사 참배(사진:궁인창, 2024년 10월 27일)
 
1977년 신흥사 주지가 된 조오현(曺五鉉, 1932~2018)은 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의 민족의식과 자유, 평등, 평화 사상을 선양하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거처를 백담사로 옮긴 후 1996년 同志를 규합하여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만들고 1997년 〈만해대상〉을 제정, 1999년 만해축전 개막, 2003년 만해마을을 설립했다. 2005년에 세계평화시인대회를 개최하고 2013년에 만해마을을 동국대학교에 기증해 만해축전을 동국대에서 주관하도록 하였다.
 
설악당(雪嶽堂) 무산(霧山) 五鉉(1932~2018) 대종사는 2001년 춤꾼 이애주 교수에게 만해축전에서 춤을 추도록 권유하며 수처작주(隨處作主) 화두를 주셨다. 춤꾼은 큰 스님이 주신 “어디서든지 진정한 주인이 되어라!”라는 깊은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당나라 선종 임제(臨濟) 의현선사(義玄禪師)의 게송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수처작주 춤〉이라는 ‘영혼이 깃든 춤’을 창안(創案)해 만해축전에서 발표했다.
 
백담사 무금선원(사진:궁인창)
 
조오현은 1958년에 입산하여 1968년 시조문학에 〈봄〉과 〈관음기〉가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선사가 백담사 무금선원에서 지은 〈내가 나를 바라보니〉 詩를 인용하면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가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무산 조오현〉
 
《승무의 미학》(사진:蓋馬書院)
 
《승무의 미학》은 이애주 교수가 채록한 스승 한영숙 춤 승무의 舞譜와 한성준으로부터 시작되어 한영숙에게 전수되고 이애주 선생에게 닿은 승무 형성의 역사와 더불어 승무 춤사위의 원리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쓴 논문을 모아 정리한 책으로 2022년 개마서원에서 출간했다. 이애주문화재단은 희대의 춤꾼으로 비천선인(飛天仙人)이 된 고인이 남긴 춤 사진을 제자들이 정리해 2025년 6월 이애주 춤 사진집 《천명》을 출간했다.
 
이애주 춤 사진집 《천명》(사진:개마서원)
 
영원한 춤꾼 이애주 교수의 전등사 인연과 승무를 추억하며, 서울大學校師大論業第3 9輯(1989. 12. 31)에 나오는 〈춤이란 무엇인가?〉 논문 및 많은 자료, 책들을 읽고 춤에 얽힌 많은 古人을 追慕한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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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