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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9:03 (2026.02.08. 19:03)

고종 즉위 40년 칭경예식 위해 기생과 광대 모아 연습한 관청...23년 동경에서 대중계몽 및 신극운동 목표 동호회 결성표 문화

 
협률사와 토월회
협률사(協律社)의 역사와 공연에 관한 내용은 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1890~1957) 선생의 증언과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배연형 소장의 〈근대 劇場 寫眞 자료 연구(1)〉 논문, 한국연극사를 전공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우수진 교수가 저술한 《한국 근대 연극의 형성》 책을 통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협률사와 토월회
 
 
협률사(協律社)의 역사와 공연에 관한 내용은 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1890~1957) 선생의 증언과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배연형 소장의 〈근대 劇場 寫眞 자료 연구(1)〉 논문, 한국연극사를 전공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우수진 교수가 저술한 《한국 근대 연극의 형성》 책을 통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관청 협률사(協律社)는 고종의 어극(御極) 40년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경성에서 기생, 재인, 광대 등을 모아 열심히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칭경예식이 연기되면서 이제까지 연습이 소용이 없어져 대신하여 협률사에서 1902년 12월 2일부터 ‘소춘대유희’ 작품을 공연하게 되었다. 공연은 저녁 여섯 시에 시작하여 밤 열한 시에 마쳤는데, 풍악을 갖추고, 광대의 판소리, 잡가, 탈춤패의 탈춤, 무동패의 무동놀이, 남사당의 땅재주, 쌍줄타기, 기생의 춤 등이 선보였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2021.10.29.)(사진:국립정동극장)
 
협률사(協律社)의 〈소춘대유희〉 공연은 서양식 극장에 우리 전통 연희물이 처음 올려진 공연이었다. 한국 공연예술의 시작점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경성은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오락 유흥문화가 활성화되고 민간인의 다양한 욕구가 팽배해져 협률사에서 1903년 말까지 공연이 계속되었다. 협률사는 궁중 내의 연희 무대를 민간 지역의 정기공연 시대를 열었지만, 민중 여론이 나빠져 1906년 협률사를 혁파했다. 1907년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 전용 건물로 사용하였다. 관인구락부가 남대문으로 이전해 이인직이 1908년 7월 원각사(圓覺社)로 재조직했다.
 
협률사 공연사진 추정 사진(사진:조선풍속)
 
필자는 어릴 때 광화문 당주동에서 살았다. 덕수초등학교에서 오후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시민회관, 협률사(원각사)터, 새문안교회, 구세군 본영, 구 러시아 공사관, 덕수궁 석조전, 정동길, 국제극장, 중앙청, 동아일보, 중부소방서, 남대문시장, 반도호텔, 수송동 경찰기마대, 종각 등에서 놀았다. 1960년대에는 경찰 기마대원이 아침과 저녁에 말을 타고 광화문과 중앙청 주변을 산책했다. 그때는 말이 산책하다 도로에 말똥을 싸고 지나가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1946년 종로구 수송동에서 창설된 서울경찰기마대는 77년간 국가수반 의전, 집회 통제, 올림픽 축제 지원 등 많은 업무를 수행하다 1972년 성수동으로 이전하여 운영했다. 그런데 2023년 11월에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졸속으로 행정관리 인력 감축이 발표되고 말은 공매 처분되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기마대가 2024년 2월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지고 관련 자료는 경찰박물관에 보관되었다.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사진:서울지방경찰청)
 
대한민국 경찰기마대 폐지는 조선왕조의 궁궐과 말의 전통과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울에 5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과 종묘가 분명히 있는데, 기마대 말이 없는 것은 우리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고대국가의 근본 상징이었던 기마대는 외국 관광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복원해야만 한다.
 
안녕 경찰기마대(사진:국립경찰박물관)
 
1907년에 한성에는 연흥사(演興社), 광무대(光武臺), 단성사, 장안사(長安社) 등 여러 극장이 생겨나 지방의 있던 예인들이 모두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연흥사(演興社)는 1907년 11월에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戯樓)를 건축했다. 위치는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로 추정되며, 창극을 하던 연흥사는 동쪽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2층 건물로 1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다.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로 구분하고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였지만, 1915년에 문을 닫았다.
 
명원관 지배인 황원균(黃源均)은 일본과 미국에 유학했던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상해로 건너가려는 것을 염탐해 경찰에 밀고하였다. 이강은 1919년 11월 10일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평양역에서 대동단(大同團) 전협(全協)과 함께 안동현역으로 갔는데 11월 11일 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 사건으로 대동단(大同團) 단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황원균의 밀고 덕분에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으로 승진한 치바 료(千葉了, 1884~1963)는 밀고한 보상으로 황원균에게 극장 신설 허가를 내주고, 요코하마 동양생명보험에서 자금을 융통하도록 지원했다. 치바 료는 1923년 2월 일본에 돌아가 1924년 3월 미에현 지사로 취임한다. 황원균은 극장 건설에 5만 원, 장비 등 합쳐 총 14만 원을 들여 1922년 11월 6일 인사동 연흥사(演興社) 자리에 800명을 수용하는 3층 건물을 지어 영화상설관 조선극장을 건설했다. 새로 건축된 극장은 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옥상에 고급 레스토랑 시설을 마련했다.
 
조선극장 낙성 광고(사진:매일신보. 1922.11.3)
 
조선극장 개관공연으로 이동백의 독창, 만파회의 〈장발장〉, 권번 기생 공연, 서양영화가 상영되었다. 황원균은 일본 영화사와 특약을 맺고 영화를 도입했으나, 채권자 야자와(矢澤)가 개관 3개월이 지나자 원금 상황을 자꾸 독촉했다. 이에 황원균은 야자와에게 극장 소유권을 넘긴다. 야자와는 조선극장을 동경에 있는 부동산 회사인 도쿄건물회상에 매각하여 빠르게 자금을 회수한다. 조선극장은 소유자가 계속 바뀌다가 1936년 6월 방화로 사라졌다. 조선극장은 단성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서양영화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조선에 신극(新劇) 운동이 처음 시작된 장소이다.
 
1923년 5월 동경에서 박승희(朴勝喜), 김복진(金復鎭), 김기진(金基鎭), 이서구(李瑞求), 박승목(朴勝木), 김을한(金乙漢), 이제창(李濟昶) 등이 모여 문학동호회 모임을 하다 여름방학에 대중 계몽과 신극 운동을 목표로 ‘현실(土地)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月, 달)을 좇는다.’라는 뜻으로 토월회(土月會)를 결성했다. 유학생들은 조선에 귀국하여 극에 출연할 여배우 이월화(李月華, 1904~1933), 이혜경(李惠卿), 이정수(李貞守) 등 3명을 확보하고 연습을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배우인 이월화는 본명이 정숙(貞淑)으로 서울 출신이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다니다가 신파극단 신극좌(新劇座) 여배우로 등단하였다. 1922년 윤백남(尹白南)이 이끌던 민중극단에 가입하여 윤백남이 예명으로 月華라고 지어준 이름으로 각광을 받았다. 〈月下의 맹세〉, 〈海의 悲曲〉 등에 출연하다 1923년 토월회가 등장하자 토월회 주연 여배우로 발탁되어 쇼(Shaw, G.B.)의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어라 거짓말했나?>에서 여주인공 오로라 역을 하였다.
 
토월회 공연 기념사진(사진:궁인창)
 
창립 공연은 1923년 조선극장에서 7월 4일부터 5일간 박승희 창작극 <길식(吉植)>과 유진 필롯(Eugene Pillot)의 <기갈>(Hunger),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곰>(the Bear), 버나드 쇼(Bernard Shaw)의 번역극을 공연했다.
 
토월회는 조선의 빈약한 공연 여건 속에서 효용성이 가장 높은 작품을 선택하고 조선총독부의 검열 및 근대극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극단의 전문성 역량을 보여주었다. 당시 무대장치와 인물 조화가 뛰어나고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가 돋보여 지식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배우들은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을 주관적으로 묘사하고, 현실의 부조리를 감정적으로 제시하는 등 표현주의적 요소를 강조했다. 연극 〈부활〉에서 카츄사 역을 맡은 이월화와 네프류도프 역의 안석주가 큰 인기를 끌었다.
 
CJ토월극장(사진:예술의 전당)
 
1993년 개관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은 신극 운동단체 토월회(土月會)의 순수 공연예술의 기본 정신을 이어받아 명칭이 확정되었다. 예술의전당은 CJ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을 후원받아 토월극장을 671석에서 1030석 규모로 늘리는 리모델링을 하기로 계약하면서 극장 이름을 가칭 ‘CJ씨어터’로 하는 안을 발표해 연극계와 시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2012년 12월 재개관할 때 새 이름 ‘CJ토월극장’으로 탄생하였다.
 
박승희는 비록 흥행에 실패하여 많은 빚이 생겼지만, 신입회원을 받아들여 2차 공연을 구상했다. 무대미술에 이승만(李承萬), 원우전(元雨田), 윤상렬(尹相烈)을 보강하고, 배우 안석주(安碩柱), 이백수(李白水), 이소연(李素然)과 신인 김해일(金海一), 조천성(趙天星), 최성해(崔星海) 등을 기용하였다. 작품은 대중성을 띤 마이어 푀르스터(Meyer-F○rster,W.) 작 <알트 하이델베르크>, 톨스토이(Tolstoi,L.N.)작 <부활>, 스트린드베리(Strindberg,J.A.) 작 <채귀(債鬼)>와 제1회 때 평이 좋았던 쇼 작품 중 여주인공의 이름 <오로라> 등 4편으로 정했다. 9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고 빚을 모두 청산했다.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사진:위키트리)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5분 간격으로 3번 7.9의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이 발생하여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고 부상자 10만 3,733여 명, 피난민 약 190만 명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일본 제국은 계엄령이 선포했다. 그러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본 관헌과 자경단은 무고한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자 등을 학살해 조선인이 6,661명이나 희생되었다. 당시 토월회의 유학생들은 일본에 돌아갈 수 없어 경성에 계속 머물렀다. 박승희는 극단을 통해 대중 계몽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다.
 
관동대지진(사진:위키백과)
 
한성준은 1908년 원각사 무대와 광무대(光武臺)에 고수로 출연하며 명성을 얻어 경성에 정착하며 장악원의 명 고수가 되어 5년 동안 15차의 창방(唱榜: 콩쿠르)을 치렀으며 춤과 더불어 북장단을 완성하여 김창환(金昌煥), 박기홍(朴基洪),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정정렬(丁貞烈) 등 명창의 고수로 활약했다. 1908년 고종 앞에서 춤을 추어 종 9품 참봉 벼슬을 하사받아 후손이 보유한 교지에는 이름이 한춘석(韓春錫)이라고 적혀있다. 이 무렵 궁중무용을 접해 뒷날 태평무, 학무(鶴舞)를 만드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강선영의 태평무(사진:위키백과)
 
전통춤을 모두 섭렵한 한성준은 제자 강선영과 손녀 한영숙에게 태평무를 전수하고 무대에 올릴 때 강선영은 왕비 옷을 입히고, 한영숙은 국왕의 옷을 입힌 2인무 형태로 새로운 춤을 선보였다. 한성준은 1910년 송만갑이 주도하던 협률사가 폐지되자, 조선 권번에서 춤과 장단을 지도하며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기생들에게 전승되던 궁중정재와 기방무를 배웠다. 한성준은 1914년 봄에 원각사가 화재로 사라지자, 협률사(協律社), 연흥사(演興社) 단체에 참가해 지방에서 순회 공연하였다.
 
한성준의 神仙舞(사진;춤자료관 연낙재, 2011)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회장 성기숙)는 2014년 한성준 탄생 140주년을 기념하여 충남 홍성과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1회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을 창설했다. 서울 행사는 2014년 6월 12일부터 3일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최고의 춤꾼 이애주, 조흥동, 김매자, 국수호, 이현자, 이명자, 김정녀, 김숙자, 정승희, 채상목 등 원로, 중견, 젊은 무용가들이 모두 나서 공연을 하였고, 6월 13일에는 한성준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한성준 명인의 예술세계 조감’이란 기조 발제에 이어 제2섹션에서 이애주, 이진원, 이병옥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고 박영광, 손용규, 한룡길, 함순녀 교수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 9월에는 고향 홍성에서 행사가 개최되었다.
 
송대산대놀이(사진:안동국제탈춤축제 디지털 아카이브)
 
이병옥(1947~ ) 용인대학교 명예교수는 국가무형유산 제49호 송대산대놀이의 명예보유자로 50년 넘게 송파산대놀이의 복원과 전승에 일생을 바쳤다, 이 교수는 스승 정병호 교수를 만나 현장을 방문하며 전통춤 연구를 시작해 40여 권의 저서와 150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송파 지역이 1970년대 개발되면서 1973년 11월 11일 무형유산으로 지정되고, 석촌호수 옆에 서울놀이마당이 생겨 서울시민들은 송대산대놀이 및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송파도서관에 방문해 우리 국악에 관한 자료를 보다 ‘한국 연극사’를 전공한 우수진 교수의 2011년 판 《한국 근대연극의 형성》 책이 있어 대출하였다. 이 책은 2024년 11월에 개정판이 나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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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장안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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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