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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대(光武臺)와 전차
조선왕조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일본제국에 외교사절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했다.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가 사절 단원 76명을 인솔하여 일본제국을 방문하여 현대 문물을 두루 경험하고 《일동기유(日東記游)》에 기록했다. 그는 기차를 “바퀴 달린 쇠당나귀가 우레와 번개처럼 달린다.”라고 적었다. 수신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고종황제(高宗, 재위 1863~1907)는 한성에 전차 건설과 제물포 구간에 철도 기차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한성전기회사(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 황실은 초기에 독자적인 회사 설립을 구상하였지만, 러시아 등 외국의 방해를 염려했다. 대한제국 광무 2년(1898) 1월 김두승(金斗昇)과 李根培가 근대화 추진을 위해 전기 시설을 청원하는 형식을 택해 고종황제는 한성판윤 이채연의 중개와 주한 미국전권공사 허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의 추천으로 영국 태생의 미국 사업가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 1852~1925)과 접촉해 한성 지역의 전차, 전등, 전화 설비의 시설과 운영권을 주려고 했다.
사업가 콜브란은 콜로라도 중부철도회사(Midland Terminal Railway of Colorado)의 사장을 역임한 인물로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사업가 보스트윅(H.R. Bostwick, 寶時旭)과 함께 고종이 설립한 대한제국 최초의 전기회사 ‘한성전기(漢城電氣)’의 공사와 운영에 대한 도급사업을 맡기 위해 ‘콜브란-보스윅 회사(Collbran&Bostwick Company)’를 설립하고, 한성전기회사를 1898년 1월 26일 설립하였다. 콜브란과 보스트윅(Bostwick)은 동대문 밖 한성전기회사 전차고 안에 설치한 가설무대를 만들어 활동사진과 창극단의 주 무대로 사용했다. 활동사진은 전차 고객을 많이 유치하려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이곳을 ‘전기회사 활동사진소’로 불렀다.
한성전기 창립자와 협력자(콜브란, 고종황제, 보스트윅)(사진:한전 전기박물관)
고종황제는 미국과의 우호를 통해 청나라와 일본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1891년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J, R. Morse, 毛斯)와 한성~인천 제물포 간 철도 부설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여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하고 1896년 3월 29일에 제임스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주었다, 철도 공사의 진행 과정과 업자들의 활동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철도사》와 이수연 선생의 〈철도공사를 통해 본 대한제국기 청부업의 초기적 형태〉 논문을 통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기획과 토지 수용을 담당하고, 사업가 모스는 뉴욕과 일본을 오가며 자금을 마련하고 동업자 타운센드는 전체적인 사업관리를 하였다. 기술자 콜브란은 경성과 인천 간의 철도 부지를 측량하고 철로를 설계하고, 자재와 기계를 구매하고 공사 인부 350명을 모집했다. 1897년 3월 22일 인천 쇠뿔고개(현 동원역 인근)에서 경인선 기공식을 개최하고 공사에 들어갔지만, 일본이 악랄하게 조선 정치가 불안하다는 억지 소문을 퍼트려 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를 멈추고, 일본 자본가들은 자본 회수에 나서 모스는 극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경인철도 기공식(사진:인천시립박물관)
이후에도 일본제국의 노골적인 방해로 공사를 지속하지 못하자, 특허를 일본 측에 양도할 의사를 밝혀 1898년 5월 10일 부설권을 일본에 100만 불에 넘긴다. 이때는 철도의 하부구조인 노반공사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모스는 경인철도 공사가 아쉽지만, 더 버티지 못하고 10월에 일본제국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부설권을 넘겼다. 당시 기록을 보면 경인철도인수조합에 고용된 일본 건축기사가 콜브란이 정한 최급구배, 최소곡선, 궤조(軌條)의 크기, 심목의 크기 등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여 모스가 조합에서 탈퇴하고 공사는 일본 기사의 의견대로 추진되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2월에 공사를 재개하고 1899년 4월 8일 카지마구미(鹿島組)가 4공구 중 제1.2공구의 공사를 동시에 시작했다. 3공구는 6월에 시작하고, 4공구 및 한강 교량 건설은 1899년 9월 30일에 시작하여 1900년 7월 8일에 완성해 경인철도 남대문(서울역) 구간을 개통하고 12월 12일 경성정거장에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교량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와 벽돌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다.
1900년 한강 교량 건설(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이채연(李采淵, 1861~1900)은 1886년 진사시에 입격하여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 주사로 근무하며 이하영(李夏榮)과 함께 영어를 학습하고, 외아문에서 영어를 1년 정도 습득하였다. 고종 24(1887) 미국 주재 전권 대신의 파견을 앞두고 박정양의 번역관으로 임명되어 12월 10일 일본 나가사키〔長崎〕 항에서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주미공사 관원들은 각종 외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각종 기관을 돌아보고, 각국 공사, 외교관,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 클리블랜드 대통령 등을 만나 여러 가지를 경험하였다. 그는 1888년 4월 21일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1889년 1월 21일 워싱턴으로 돌아가 서리공사를 맡으면서(1890. 9. 2~1893. 6) 이계필(李啓弼)에게 미국 국무부에서 화폐 조사 과정의 시찰에 대한 비공식적 승인을 요청하고 1888년 1월 18일 박정양(朴定陽)이 임대 개설한 공사관 건물을 1891년 11월 28일에 단독으로 매입하였다. 이채연은 1896년부터 6번이나 한성판윤을 역임하며 치도(治道), 전차 부설, 위생 개선, 교육, 복지 등 근대화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898년 2월에 한성부재판소(漢城府裁判所) 수반판사(首班判事)를 겸임하고, 귀족원경(貴族院卿), 양지아문 부총재관(量地衙門副摠裁官)과 시종원경(侍從院卿)을 거쳐 1900년에는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에 임명되었다.
한성판윤 이채윤과 한성전기회사 기관사(사진:나무위키)
한성판윤 이채연이 사장이 되어 콜브란 측과 협의를 통해 한성부에 전차, 전등, 전화를 공급하였다. 한성전기는 전기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하여 75KW 규모의 동대문발전소를 건설해 1899년 완공했다. 이후 종로 네거리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에는 가로등이 환하게 켜졌다.
1899년 전차 모델(사진:H.R. Bostwick)
한성전기회사는 공사비 상당 부분을 사업가 콜브란 측에게 빌렸기 때문에 회사의 모든 재산 및 특허권을 콜브란에게 신탁하였고, 별도로 전기철도 운영 계약을 체결해 특별히 경영을 위임하였다.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9월에 전차 공사를 기공하여 1899년 8월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5리(8km)의 선로가 준공되었다.
전차 개통식 사진(사진:한전 전기박물관)
콜브란은 1900년 채무 상환 만기일을 연장해 주는 대가로 각종 이권을 확보해 경영 확장을 도모하였다. 송도(松都)까지 경편철도(輕便鐵道) 부설, 청량리선의 연장, 도로 건설, 수도 설비 부설에 대한 사업권을 따냈고, 황실 소요 물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으며 황실의 신임을 받아 은행 설립권까지 확보하자 일본제국과 황실 측근 세력들은 경계심을 가졌다. 개화파의 지도자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친미파들이 한성전기회사를 이용해 미국인에게 각종 이권을 넘겨주고 있다고 생각해 콜브란의 사업을 저지하며 한성전기회사를 장악하려 시도해 콜브란이 추진하던 사업은 도로 건설을 제외하고 모두 좌절되었다. 콜브란은 1902년 8월에 채무 상환 만기일이 돌아오자, 거액의 채무 상환을 대한제국에 요구하였고, 대한제국 정부는 무리한 요구라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제국이 차관을 제공하여 콜브란에 대한 채무를 청산하게 하고 한성전기회사를 차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때 이용익이 개입하여 한성전기회사를 압박하면서 사태는 점점 악화가 되었다. 회사 채무를 매개로 콜브란이 경영권과 소유권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한성전기회사는 1904년 7월 한미합자(韓美合資)의 ‘한미전기회사’로 명칭을 변경했다. 1909년 콜브란이 회사를 일본의 국책 회사인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에 매도하면서 광무대 건물을 차고로 사용하게 되어 1913년 5월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콜브란은 전화, 상수도 시설, 은행, 조폐소(coin mint), 영화관 등 다양한 사업에 투자했다. 콜로라도 맥주 재벌인 아돌프 쿠어스(Adolph Coors, 1847~1929)와 투자자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수익성이 높은 금과 구리 채굴 사업에 투자하고, 조선을 떠나 영국 런던에서 한가로운 삶을 누렸다.
H.R. Bostwick 외손녀 자료 기증식(사진:한국전력공사)
한국전력공사는 전기사(電氣史) 복원 사료를 찾기 위해 배재대 오진석 교수팀과 함께 미국에서 사료 조사를 하여 보스트윅 외손녀 윈데 새들러 씨 댁에서 각종 사료를 발굴했다. 미국에 사는 후손들은 2017년 5월 17일 외할아버지의 공문서와 고종황제 편지, 2,500장이 들은 사진첩, 시간표, 전차 요금표, 각종 신문기사 자료를 가져와서 나주시 한국전력공사 본사에서 기증식을 가졌다. 오진석 교수는 2021년 《한국 근현대 전력산업사》를 저술해 한국 전기 역사를 집대성했다.
경인철도는 일본 자본으로 경인선이 건설되기 시작해 1899년 9월 18일 33.2km(7개 역)의 경인철도 1차 구간이 개통되었다. 초기에는 하루 2회 왕복하고, 시간은 편도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한성에서 전차의 등장과 경인철도의 개통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경인철도 건설 현장(사진:한전 전기박물관)
조선왕조는 유럽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신비한 나라였다. 그동안 알려진 것이 별로 없어지질(地質)과 광산(鑛山)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아주 대단했다. 문헌 기록으로 살펴보면 1818년 대영제국 해군 라라(Lyra)호 함장 Basil Hall에 의한 항해 일지에 지질 구조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대영제국 해군의 Guppy 선장은 안전한 항해를 하기 위해 1881년 한반도의 남단 제주도(Quelpaert Island)와 남서해안 연안을 수로 측량하면서 섬들의 암석을 1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소개했다. 조선왕조는 외국과 수교통상을 하면서 개화를 도와줄 전문가를 찾다가 적임자로 독일인 묄렌돌르프를 소개받고 외교 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는 1883년 독일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산 개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1881년 일본제국 도쿄대학 교수로 초빙된 지질학자 카를 크리스티안 곳체(Carl C. Gottsche, 1855~1909) 교수에게 지질조사를 의뢰했다.
독일 지질학자 카를 크리스티안 곳체(사진:Yahoo)
곳체는 식물학자 칼 모리츠 곳체(1808~1892)의 아들로 1855년 독일 함부르크 교외의 알토나(Altona)에서 태어나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고 1878년 ‘아르헨티나 코르디예라(Argentine Cordillera)의 쥐라기 화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0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지방의 빙하퇴적층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획득한 후, 킬(Kiel) 대학 광물학과의 강사가 되었다. 1881년 일본제국 도쿄대학의 교수직을 제안받고 광물 지질학연구소 설립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는 1883년 10월에 조선왕조가 독일과 통상조약 체결할 때 처음 방한했다. 1884년 3월에 일본 대학의 계약을 마무리하고 1884년 4월 하순에 조선에 입국해 6월부터 총 138일 동안 조선 8도를 돌며 80개 도시를 방문하고 2,550km를 걸었다. 남부는 6월 11일 ~ 8월 15일, 북부는 9월 18일부터 11월 28일까지 시행했는데 사전 조사를 많이 하였다.
Gottsche, Geologische Skizze von Korea(사진:Gottsche)
그는 1884년 독일학회지 제36호에 조선의 캠브리아 지층의 발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1885년에 독일에 돌아가 함부르크 자연사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다. 1886년에 조선의 지질 개관을 베를린 프러시아 왕립학술원 제36호에 〈Geologische Skizze von Korea〉란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가 제작한 한반도 지질도는 오늘날 한국지질도 제작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조선에서 가져간 대동여지도를 함부르크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곳체는 1890년에 킬 대학교 광물 지질학과 교수가 되었다.
자연사박물관(사진:Tripadvisor)
대한지리학회지 제51권 제6호에는 손일 교수가 쓴 〈1884년 곳체(C. Gottsche)의 조선 기행과 그 지리적 의미〉 논문이 있어 당시 조선의 지리, 지질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 같은 때에 영국왕립광산학교의 William Gowland는 한성을 출발하여 문경을 거쳐 부산까지 답사하고 수집한 시료를 영국으로 가져갔다. 이 시료는 1891년 인도 지질연구소에서 근무하던 Thos H. Holland가 화강암, 편성암, 퇴적암 등의 분포와 특징에 대해 제4기 지질학회지 제47호에 개재하였다. 이토 야지로(伊藤弥次郞)는 1885년 일본 광업회지 제9호에 조선국 광산 개요를 발표하며 “금과 은은 전국에 82개 지역에서 산출되고, 은은 5개, 동은 18개, 은 40개, 납은 4개, 주석 3개, 수은 1개, 석탄 9개 지역에서 생산된다.”라고 적었다. 1881년부터 1884년까지 부산, 인천, 원산 3개 항구로부터 일본으로 수출된 금과 은의 양을 기록하였다.
청일전쟁 이후에 광산기사 니시와다(西和田久學)는 1896년부터 3년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를 답사하고 결과를 수시로 발표하였다. 일본제국의 지질학자들이 조선에 건너와 1903년에 조선의 지형개관을 동경대학 기요에 발표되었다. 일본제국은 한반도 광상조사를 1917년에 완료하고 도별로 구분하여 13권의 조선광산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1906년 뚝도정수장 취수관 매설(사진:서울아리수본부)
경성 상수도 건설사업은 1903년 12월 9일 고종황제가 콜브란과 보스트윅에게 상수도의 부설 및 경영에 관한 특별 허가를 내주면서 시작되었다. 한강에서 물을 시내로 끌어들이려고 커다란 취수관을 묻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특허권을 양도받은 대한수도회사는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06년 8월 초 뚝도정수장 취수관 매설공사에 착수하여 1908년 8월 준공하고 9월 1일부터 하루 1만 2천500㎥씩 급수를 시작했다.
종로 상수도 공사 현장(사진:서울아리수본부)
상수도 건설은 대한제국이 근대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전문가와 협력을 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대한수도회사는 1910년 직후 일본인 재벌회사로 넘어갔고, 상수도 경영권은 조선총독부, 경기도를 거쳐 1922년 3월 31일 경성부에 속하게 되었다. 상수도 시설은 3차에 걸쳐 확장되어 제1기(1919~1922)는 인천부가 경영하던 노량진정수장의 설비를 확충하고 한강에 송수관을 가설하여 경성부에도 급수하게 했다. 경성부의 인구증가로 이루어진 제2기(1929~1933)는 뚝도정수장 확장 공사를 하였다.
1961년 뚝도정수장 전경(사진:국가기록원)
제3기(1936~1939) 공사는 경성부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뚝도정수장 시설개량, 노량진정수장 확장, 구의정수장 신설을 계획하고 1939년까지 완공하려고 했으나,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부만 준공되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