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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6:15 (2026.02.08. 16:15)

국악중흥 헌신한 음악 사랑 등을 다룬 음악극 공연 주인공... 지실초당 짓고 명인 초빙해 후학양성 힘써

 
국립국악원 음악극 〈박석기를 생각하다〉
국립국악원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지 않고 국악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악 중흥을 위해 헌신한 박석기 선생의 음악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젊은 세대들에게 예술적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음악극을 기획하여 〈박석기를 생각하다〉 음악극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정기공연으로 결정하고 2015년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 위에 올렸다.
국립국악원 음악극 〈박석기를 생각하다〉
 
 
국립국악원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지 않고 국악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악 중흥을 위해 헌신한 박석기 선생의 음악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젊은 세대들에게 예술적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음악극을 기획하여 〈박석기를 생각하다〉 음악극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정기공연으로 결정하고 2015년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 위에 올렸다. 공연은 박석기의 일대기를 거문고 연주와 판소리를 중심으로 민속극단 예술감독 안숙선 명창이 한 편의 음악극으로 재구성해 6장으로 표현하고. 박석기 역에는 왕기철 명창, 가객(歌客) 역에 이주은, 박동실 역에 허정승(남도극악원), 뺑덕이 역에 유미리 심청가 이수자가 맡았다.
 
박석기 역-왕기철 명창(사진:국립국악원)
 
왕기철 명창은 정읍에서 태어나 가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6세에 박귀희 명창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가야금 병창과 소리를 배워 한양대 국악과에 입학했지만, 너무 가난해 등록금을 만들기 위해 길거리에서 온갖 장사를 하였다, 밤에 장사하며 학업이 안돼 용기를 내어 은사를 찾아가 장학금을 부탁해 2학년부터는 장학금을 받고 소리꾼으로 성장했다. 1985년 국악과를 졸업한 후 1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1999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정권진(심청가), 김소희(춘향가), 조상현(춘향가, 심청가), 한농선(흥보가), 김경숙(적벽가), 왕기창(흥보가) 등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두루 사사했다. 2001년 제2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부문에서 장원하고 2002년 KBS 국악대상 판소리 부문 대상을 받아 명창 소리를 듣게 되었다. 국립창극단에서 14년간 창극 〈춘향전〉의 이몽룡,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비롯하여 흥보, 별주부 역 등을 맡았다,
 
필자는 임진왜란 후 일본에 끌려간 아내를 찾아 나서는 조선통신사 이경식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창극 〈제비〉에서 이경식 역을 맡은 왕기철 명창에 정말 반했다. 왕 명창은 2013년에 교사로 복귀하고 교장직에 도전하여 2017년 9월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이 학교는 은사 박귀희 선생이 전 재산을 내놓아 설립한 학교이다. 왕 교장은 은사의 마음을 헤아려 더욱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1920년대 말 고향에 돌아온 박석기은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회의를 느꼈지만,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지곡리 지실마을에 초당을 짓고 명인을 초빙했다.
 
박석기는 지실 초당에서 박동실 명창을 판소리 사범으로 초빙하여 사라져 가는 전통 음악 전승을 꾀하며 민족음악의 예술가들을 배출하고자 젊은 예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 모인 사람이 공기남(孔基南, 1917~1971, 拉北) 김소희(金素姬), 한애순(韓愛順), 김녹주(金綠珠), 박귀희, 박송희, 박후성, 임춘앵, 임유앵, 한승호 등 신진 소리꾼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하며 판소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힘써 도왔다.
 
〈박석기를 생각하다〉 안숙선 예술감독(사진:국립국악원)
 
박석기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거문고를 배워 즐겨 연주하였는데,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는 백낙준(白樂俊, 1884~1933)을 거문고 독선생으로 모시고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이 박석기의 명성을 듣고 지실마을을 찾아왔다. 어린 한갑득(韓甲得, 1919~1987)은 1931년부터 7년간 스승에게 풍류 음악 ‘영산회상’과 가곡, 산조를 배워 거문고산조 한갑득류파를 이루었다. 박동실이 판소리를 가르치고 거문고 사범은 박석기가 맡았다. 편재준을 위해서 따로 선생을 초빙하였다. 박동실은 1938년에 조상선(趙相鮮), 한주환, 김여란, 김소희(金素姬), 임소향(林素香), 임춘앵 등과 함께 화랑창극단을 만들었다. 창립 공연은 1939년 광주극장에서 <춘향전>으로 막을 올리고 서울에 진출하여 <팔담춘몽(八潭春夢)>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 등을 하여 인기가 좋았다.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만주까지 가서 공연하였다. 창극 공연 때는 거문고 산조를 연주하였다.
 
〈박석기를 생각하다〉(사진:국립국악원)
 
박석기는 1941년 10월에 침체 중인 화랑창극단을 인수하여 최남선, 정노식, 이보상, 서민호, 김양수 등 5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예인들과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지방공연을 마친 후 11월 5~6일 동양극장에서 혁신 제1회 공연으로 이서구 작 <망부석>(2막)을 상연하였다. 당시 화랑창극단 단원은 조상선, 김관우, 임소향, 김순희, 조남홍 등이었다. 1942년 3월 17~19일에는 부민관에서 <항우와 우미인>을 상연하였는데, 연출 전창근, 가사 임화, 작극 이운방, 장치 김일영이고, 출연자로는 김소희, 조소옥, 임소향, 한애순, 조상선 등 50여 명이었다.
 
1942년 화랑창극단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압력으로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와 병합하여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을 결성하였다. 이 극단의 지도는 박석기, 허순구 두 사람이 맡고 최남선, 정노식(鄭魯湜), 이보상, 이광수 등이 극본, 고증, 가사를 맡았고, 무대미술은 김은호, 허백련, 박승무, 배운성이 후원하고 의상에는 유자후(柳子厚)가 후원한 최고의 진용이었다.
 
〈박석기를 생각하다〉(사진:국립국악원)
 
조선창극단 단원도 성악연구회의 주류가 참가하고 전래의 판소리 다섯 마당과 〈배비장전〉, 〈장화홍련전〉, 「〈유충렬전〉 등 고대소설 각색극과 각색사극(脚色史劇) 〈마의태자〉, 「〈황진이〉, 〈백제의 낙화암〉, 〈재봉춘(再逢春)〉, 〈빈부〉, 〈항우(項羽)와 우미인(虞美人)〉, 〈논개〉 등 신작 창극도 여러 편 공연하였다. 이 밖에도 〈춘향전〉, 〈심청전〉, 〈흥부·놀부〉, 〈보은표(報恩瓢)〉 등을 공연하였다. 하루는 일본 경찰이 찾아와 〈심청가〉 공연에서 일부 내용이 일본 천황가를 모독했다는 죄로 구류처분을 받고 고문까지 당했다.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은 전국 주요 도시와 농어촌까지 순회 공연하며 唱(창)의 묘미를 실컷 느끼게 해 주었다. 극단은 1948년 「왕자 호동」 공연을 끝으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서봉(曙峯) 허순구(1903~1978)는 1927년 진주 최초로 문성당 백화점을 설립한 기업가로 처남이 삼성 이병철 회장이다. 허순구는 1948년 이병철과 삼성상회를 창립했다.
 
〈박석기를 생각하다〉(사진:국립국악원)
 
허순구와 박석기는 국악 부흥의 후원자일 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자였다. 허순구는 이순 무렵부터 기업활동을 접고 금호강 절경에 금호정을 짓고 1954년부터 1970년까지 16년간 정경태(가곡, 시조), 신쾌동(거문고, 병창), 전추산(단소), 한주환(대금), 한갑득(거문고), 한일섭(새납), 임석윤 (거문고), 송영석(판소리), 홍정택(판소리)과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박영복(장구), 봉해룡(단소), 김종희(해금) 등과 교유했다. 서봉은 시조창, 거문고, 단소, 양금, 가야금에 조예가 깊었다.
 
전북도립국악원 복원 음반(사진:전북도립국악원)
 
2013년 서봉의 장손 허동수(GS칼텍스 명예회장)는 〈서봉 국악보〉, 거문고, 양금, 유성기 음반 등 37점의 유품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했다. 이 악보는 세상에 처음 등장해 전문가들은 무척 흥분했다. 1990년 초반 허순구 선생은 릴테이프 녹음자료를 전북도립국악원에 기증했다. 교육학예실 조세훈 실장은 국악원 개원 30주년을 맞이하여 녹음자료 복각 작업을 하여 음반으로 제작하고, 곽승기 국악원장은 2016년 10월 24일 후손 허병천 선생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서봉 국악보〉를 한윤석, 허병천, 정성미, 양은지, 김순진, 강헤진 등이 연구했다.
 
제4회 전조선야구대회 1923년 우승(사진:휘문고)
 
박석기의 친형 박석윤은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재학 당시 야구 선수 투수로 출중한 재능을 보여 도쿄 유학생 반도야구단 주장 자격으로 조선을 세 차례 방문했다.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의 평의원이며, 박열이 소속한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黑友會)에도 관여하고, 사회주의자 친구들과 교유하기도 했다. 1922년 3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중앙체육단 소속으로 뛰었다. 12월 8일에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Pacific Coast League)를 초청하기 위해 이원용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협상하여 방한 경기를 이끌었다. 최남선의 여동생인 최기득(崔己得)과 결혼하고, 휘문고 감독으로 취임해 일본 고교야구 본선 진출을 이뤄내 8강에 올랐다.
 
휘문고보 박석윤 감독과 간송 전형필 선수(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박석윤은 1930년 9월 30일에 조선 야구 심판협회가 창설하여 위원으로도 참여했고, 1946년에 조선야구협회 창립 고문으로 참가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 조선총독부와 연을 맺고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직책을 맡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부사장으로 언론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서로의 독립을 위해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 만주국에서 1931년 9월 민생단(民生團) 설립을 주도하고 1932년 2월 15일에 룽징공회당에서 창립대회를 했다.
 
박석윤은 자위단을 조직키로 하고 지도자 양성기관도 마련하였다. 당시 일본제국 관동군 수뇌부에서는 “우리가 고작 간도를 먹으러 만주를 점령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주를 점령해야 한다. 그런데 간도 자치를 떠드는 저 치들을 그대로 두면 중국인들의 반감이 만만치 않는다.”라며 박석윤에게 해산명령을 내려 1932년 7월 해체했다. 이후 행적을 보면 만주국 외교관이 되어 1939년 2월 만주국 주폴란드 총영사로 재직했다. 만주국 훈 4위 경운장(景雲章)을 받고,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까지 올랐다. 그는 한때 만주국에서 최근우의 독립운동 활동을 묵인하기도 했다. 광복 직전 조선총독부 고위관료인 최하영을 통해 행정권 인수자로 추천되었다.
 
1946년 3월에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평양 인근의 양덕온천으로 갔다가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는 건강을 이유로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7년 2월 24일 평양 인민교화소에 다시 구류되었고, 4월 19일 북한 최고재판소에 친일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1948년 1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박석윤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했지만, 민족반역자로 규정되어 기각당했다. 1948년 6월 9일에 사형이 확정되어 1950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일성은 박석윤 친일 공작원이 만주에서 행한 민생당 활동으로 박해(迫害)를 심하게 받아 오랜 세월 이를 갈고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지실 초당이 우리 민족의 음악을 교육한 국악 교육 전승지로서 의미가 있는데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가장 이유는 판소리를 가르친 박동실 명창이 한국전쟁 당시 자진해서 월북하였기 때문이다. 박동실은 해방 직후 <열사가>와 <해방가>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해방의 기쁨을 자축하였다. <열사가>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다 순국한 열사들의 영웅적이고 숭고한 희생을 담고 있다. <열사가>에는 <이준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가 있다. 이 작품들은 서로 연결되는 작품이고, <유관순 열사가>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명창 박동실기념비(사진:담양뉴스)
 
박동실 명창은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기쁨과 새나라를 건설하여 세계가 손을 잡고 잘살아보자는 희망을 노래한 <해방가>도 작곡하였다. 박동실은 1950년 6월 24일에 부산의 동래극장에서 상연한 국극협단의 <탄야곡>을 작곡하고 도창을 맡았으나 얼마 후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붉은 완장을 차고 연기부장으로 활보하다가 9월 28일 서울 수복 직전에 안기옥을 따라 조상선, 공기남, 임소향 등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 공훈배우(1957년), 인민배우(1961년)가 되었다. 그동안 이념상의 문제로 박동실 명창의 천부적인 예술 재능이 주목되지 못해 담양의 소리가 깃든 지실 초당은 소외된 문화유산이 되었고 스승에게 배웠던 제자들도 사승(師承) 관계를 세상에 떳떳하게 밝힐 수가 없었다. 1981년에 연좌제가 폐지되고 나서부터 박동실이 전승한 판소리는 온전히 전승되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연구도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박석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것은 그는 명실상부한 국악 부흥의 후원자라는 것이다. 국채웅의 우송당과 지실 초당은 담양의 문화 공간으로서 풍류방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박석기는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전통 음악인 양성에 몰두했다. 한국국악원을 설립하기 위해 오당(悟堂) 함화진(咸和鎭, 1884~1948)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국립국악원 정기공연(사진:국립국악원)
 
국악인 함화진은 세습 궁중음악 집안에서 태어나 증조부 함윤옥(咸潤玉), 할아버지 함제홍(咸濟弘), 아버지 함재운(咸在韻)이 거문고의 대가로 평생을 국악을 위해 살며 1932년 이왕직아악부 제5대 아악사장(雅樂師長)을 역임했다. 1935년에 편경(扁磬)과 편종(編鐘)을 제작하고, 1936년 일본제국 음악계 시찰, 1937년 중국고악시찰 등 국악 재건에 공이 컸다. 1945년 9월 29일 국악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1월 9일 국악원을 창설해 창립기념으로 12월 2일에 대춘향전 공연을 개최했다. 1947년에 《朝鮮音樂通論》을 저술했다.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정혜정 선생이 ‘지실 초당’ 연구를 하여 2021년 실천민속학연구 제41호에 발표했다. 김석배(국립금오공과대학교) 명예교수는 2024년 〈담양지역의 판소리 문화자산〉 논문을 통해 담양(潭陽) 지역에 훌륭한 예인들 배출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박석기 선생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정옥경 선생의 〈담양 지실 박석기의 국악 학당 연구〉, 중앙대 김수현 교수의 〈함화진의 저술서 연구-《朝鮮音樂通論》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악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악을 전공한 여러 교수님의 연구 논문과 자료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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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