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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남 박석기와 지실 초당
민족주의자 박석기(朴錫驥, 1899~1952)의 호는 효남(曉南)이고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그의 가문은 전남 담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향리로 오랜 기간 큰 부를 누렸다, 형 박석윤(朴錫胤, 1898~1950)과 함께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제국대학 불문학부를 졸업하고 선수로 활동했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 형이 친일주의자로 일관되게 행동한 것과 달리 박석기는 민족의식이 강하고 일찍이 예술에 뜻을 두고 있어 관직이나 사업을 하지 않았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324번지에 초당을 마련하여 전국에서 온 30여 명의 제자를 후원하고 양성하였다. 박석기는 호남 지역의 유명한 명창을 초청해 판소리 선생으로 영입했다. 담양의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을 비롯해 목포 오수암(吳壽岩), 담양 임옥돌(林玉突), 보성 정응민, 화순 박기채, 능주 조몽실 명창이 소리 시험을 거쳤다. 이때 박동실을 발탁한 것은 〈심청가〉에 뛰어나고 창극 활동에 적합한 무대 소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자 박석기(朴錫驥)(사진:국립국악원)
박동실은 제자들에게 국악 교육을 시작하고, 박석기는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을 초빙하여 극진히 모시며 산조를 학습했다. 박석기는 전남 화순에 사는 주덕석과 결혼하여 슬하에 박철원(朴哲源)을 두었고, 훗날 명창 김소희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딸 박윤초를 두었다. 전남대 정옥경 선생은 2018년 《남도민속연구》 제37호 〈담양 지실 박석기의 국악 학당 연구〉 논문 머리말에서 “지실 초당은 20세기 전반에 담양의 소리를 가르치고 전승하였던 국내 유일한 국악 학당으로 서편제 소리의 맥을 이은 전승지 장소이다.”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지실 초당(사진:정옥경)
담양 지실 초당은 조선왕조 중기의 문신 송강(松江) 정철(鄭澈, 蟄菴居士, 1536~1593)의 후손 척헌(惕軒) 정업(鄭樸, 1701~1747)이 18세기에 터를 잡고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정업의 자는 중보(仲父)이며 그의 부친은 소은(簫隱) 정민하(鄭敏河, 1671~1754)이다. 정민하는 정철의 6대손이다. 정업이 지실에 터를 잡은 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오다가 1914년에 땅이 팔려 최명좌(崔明佐)가 1927년까지 소유하고, 1928년에 정태규(鄭泰圭, 1908~1993)에게 이전되고 1930년에 박석기의 동생 박석흥(朴錫興, 1909~1943)에게 이전되었다.
지실 마을은 영일정씨의 집성촌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마을이다. 박석기가 말을 타고 지실 마을을 찾아와 마을 어귀에 말을 매어놓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나는 이곳에서 우리 국악을 가르칠 것입니다. 기생집이 아닌 우리 민족의 소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이니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하며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당시 지실 마을 사람들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박석기가 지실 초당에서 창을 가르친다는 것에 관해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정씨 문중의 간곡한 설득으로 허락해주어 초가 한 채를 짓고 전통예술을 가르쳤다.
그는 지실 초당과 200m 정도 떨어진 계당(溪堂)에서 지실마을에 기거하고 있던 역사학자이며 항일투사인 백당(白堂) 신태윤(申泰允, 1884~1961), 민족종교 지도자 김요관(金燿觀, 일명 金亨國), 정철의 후손인 정태면, 정운영, 김용선 등과 어울려 풍류를 즐겼다. 모인 사람은 모두 지실 초당에 후원하였다. 담양 지실 초당은 1964년에 함양박씨 문중의 박종대라는 사람이 지실 초당을 팔겠다는 연락을 영일정씨 척헌공파 종중에 해 종중은 선조의 유허지라고 여겨 벼 33섬을 주고 매입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에 의해 산사태가 나서 지실 초당이 완전히 부서졌고 담양군청의 지원과 종중의 후원으로 복원되었다. 2018년 9월 5일에 영일정씨 척헌공파 종중에서 지실 초당을 매개로 초당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연구자들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지실 초당에 가면 앞에는 무등산이 솟아있고,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맑은 창계가 흐르고 있다. 지실 초당 뒤에는 만수산이 솟아있고, 만수산에서 뻗어 나온 성산 자락이 초당을 안고 있다. 지실 초당 오른쪽에는 식영정, 부용당, 서하당이 자리하고 왼쪽으로는 은행나무가 즐비한 지실 마을과 소쇄원(瀟灑園)이 있다.
소쇄원 광풍각(光風閣)과 제월각(사진:낭만포토클럽)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15세에 정암 조광조(1482~1519) 문하에 들어가 공부해 17세에 과거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려 출사하지 못했다, 개혁을 표방하던 조광조가 37세에 대사헌으로 있다가 1519년 走肖爲王 누명을 쓰고 능주(和順)로 유배되자, 양산보는 통탄하고 당일 고향에 내려왔다. 한 달 후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스승이 절명하자 “개처럼 사느니 차라리 흙이 되겠소!”라고 친구에게 말하고 자연에 숨어 살기로 작정했다. 1530년에 무등산 북쪽 지곡리 창암촌에 아주 작은 대봉대(待鳳臺) 정자를 짓고 원림(園林)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산보 아버지의 호가 창암이다. 절친인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풍광을 48편의 시에 담았다.
양산보는 매일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몸을 수양하는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대학》과 《중용》을 읽으며 항상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했다. 그는 의복과 음식, 말과 행동이 비교적 절도에 맞았고 덕이 있는 군자처럼 고상했다. 소쇄원은 아들 양자징(梁子澂)과 손자 후대까지 3대 70년에 걸쳐 내려오면서 바위와 자연을 그대로 두고 물길을 작게 내고 담장을 둘렀다. 정유재란 때에 광풍각(光風閣: 비가 갠 후에 맑은 바람을 맞이하는 집), 제월각 등 가옥이 불에 타 손자 양천운이 중건하였다.
소쇄원은 1983년 7월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고, 2008년 5월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1990년 4월에서 9월까지 열린 오사카 국제정원박람회(Expo 1990 Osaka)에서 한국의 전통정원 소쇄원을 재현한 작품이 세계 78개국이 경연을 펼친 가운데 대상을 받았다. 이 정원은 꽃박람회 기념공원인 오사카 츠루미 녹지공원(Tsurumi Ryokuchi Park)에 한국 정원으로 보전되어 있다. 양산박의 아버지 양사원(梁泗源)이 1506년 입항한 이후 15대손 양재혁이 전통정원을 잘 지키고 있다.
성리학자 부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은 원림에 자주 놀러 와 주변 경관을 찬탄하며 ‘맑고 깨끗한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소쇄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쇄(瀟灑)의 문헌 출전은 중국 남조(480년) 덕장(德璋) 공치규(孔雉珪)가 쓴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있다. 난징의 종산 북산에 거주하던 주옹(周顒)이 산림에 은거하며 은자인 척하며 속으로는 매양 부귀영화를 탐했다.
은자의 명성이 높아져 황제의 청으로 벼슬을 살다가 옛날 살던 산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하자 북산의 산신령이 그가 거짓 은자(隱者)임을 비웃으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은거의 고고함을 팔아치운 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산으로 들어오는 것을 적극 막았다. 산신령의 엄함 명령이 떨어지자, 나뭇가지들은 주옹이 타고 오는 수레채를 골짜기 입구에서 끊어 버렸고, 간담이 뒤집힐 듯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며 소리 내어 비벼댔다. 풀들은 혼백이 도망갈 듯 성을 내고 주옹이 만약 숲에 들어오기만 하면 나뭇가지를 날려서 그의 수레바퀴를 부러뜨리려고 했다. 나무는 가지를 땅에 낮게 드리워 수레바퀴 자국으로 더러워진 길바닥을 깨끗하게 쓸어버리려 하였다. 산산령은 “부디 산신(山神)을 위하여 거짓 은자(隱者) 주옹을 사절하라!”라고 명했다.
지실마을 표석(사진:황호택)
정철 가문이 전라도 창평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정철의 큰아버지 유심이 남원 부사로 있을 때 할아버지의 묘를 창평 원동(현 고서면 원강리)에 썼기 때문이다. 정철의 고조부는 병조판서였고, 증조부는 금제 군수였다. 정철은 조선왕조 중종 31년(1536) 한양 청운동에서 아버지 유침, 어머니는 죽산 안팽수(安彭壽)의 딸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큰누이는 14세 때 1533년 당시 세자인 인종의 후궁으로 뽑혀 귀인(貴人)이 되었다. 둘째 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李瑜)의 부인이다. 이런 인연으로 정철은 대궐에 자주 출입할 수 있었고 나이가 같은 경원대군(慶源大君, 明宗)과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
1545년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계림군 외숙부인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부친 정유침(鄭惟沈)과 큰형 吏曹正郎 정자(鄭滋)도 사화에 연루되면서 아버지는 함경남도 정평(定平)과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형을 당했고, 큰형은 장형(杖刑, 곤장을 맞음)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세 나이에 길에서 죽었다. 갑자기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정철의 일가는 풍비박산(風飛雹散)되어 흩어졌다. 열네 살이던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귀향지에서 살았다, 6년 후 1551년(명종 6) 원자 탄생으로 사면령이 내려져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에 제수되었다. 정철의 가족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 원동에 모여 살았다.
정철이 이곳에서 송순(宋純, 1493~1582), 김윤제(金允悌, 1501~1572),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林億齡, 1496~1568)에게 시를 배웠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송익필(宋翼弼, 1534~1599).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 여러 유학자와 교류하며 친교를 맺었다.
정철은 17세에 문화유씨 유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했다. 1560년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고,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562년 27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시작으로 조정에 출사했지만, 부침을 거듭하여 1575년, 1579년, 1581년에 고향에 내려와 1~2년씩 머물렀다. 48세 때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1585년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 은거하며 죽록정(竹綠亭)이란 초막을 짓고 살았다. 정철은 죽록정에 머물면서 서하당 김성원이 있는 성산(星山) 마을 식영정을 오가며 〈思美人曲〉 〈續美人曲〉 〈성산별곡〉 등을 비롯한 많은 시가와 가사를 지었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 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닛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사미인곡 일부)
선조가 하사한 은잔(銀盞)(사진:kbs)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선조는 정철을 우의정으로 발탁하였다. 이때 정철은 서인의 영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인 이발(李潑), 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 유몽정(柳夢井), 최영경(崔永慶) 등을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 정언지(鄭彦智), 정개청(鄭介淸) 등이 귀양 가고, 노수신(盧守愼)은 파직당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올랐다.
56세 때에 왕세자를 책립하는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선조는 왕비의 소생인 원자(元子)가 없었고, 후궁 소생의 왕자만 있어 왕세자 책립에 어려움을 겪었다. 건저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정철(鄭澈)이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부제학 이성중(李誠中), 대사헌 이해수(李海壽)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 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정철은 이 건저문제를 동인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상의하고, 건저 주청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하기로 했으나, 이들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영의정 이산해는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김빈(金嬪)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결탁하여 왕의 뜻을 살피면서 음모를 꾸몄다. 이산해는 왕이 김빈의 소생 신성군(信誠君) 이후(李珝, 1579~1592)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김빈에게 정철이 건저(建儲)를 주청한 뒤 장차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 후궁 김빈이 선조에게 울면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자 왕은 아주 난처하고 노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정철은 경연에서 건저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광해군(李渾, 1575~1641)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든 것이다. 선조가 크게 화를 내자, 이산해, 유성룡 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선조는 정철에게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라고 크게 질책하였다. 정철은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되어 명천에 유배되고 진주, 강계로 이배되었다. 왕자 이후(李珝)는 선조의 총애를 입었으나 피난을 떠나 의주에서 13살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 정철은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선조를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압록강을 건너 파천할 것이 아니라 왜적이 아직 침입하지 않은 남쪽 전주 쪽으로 갈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공격 병풍(사진;위키백과)
선조는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주어 평양성을 탈환해 명 황제에게 사은해야 할 상황이 생기자, 정철을 사은사로 명에 파견했다. 한 신하가 정철이 황제에게 왜 적군이 조선에서 모두 물러나 철군했다는 거짓 문서를 올렸다고 모함했다. 정철은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항변했다. 연일 이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워 사직하고 가까운 강화도 송해면 숭뢰리 송정(松亭)포구 송정촌의 허름한 농가에 도착해, 한 달을 머물렀다. 전쟁 중이라 양식을 구할 수가 없었다. 먹을거리가 떨어져 1593년 12월 18일 추운 겨울날 정승은 58세로 굶어 죽었다. 송강 정철의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외로운 섬 나그네 신세 해조차 저무는데 남녘에선 아직도 왜적 물리치지 못했다네 천리 밖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오경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은 건가 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러 있기 어렵고 시름은 실오리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 원님이 보내온 진일주(眞一酒)에 힘입어 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 끼고 마신다오. (송강 정철 詩, 박영주 역)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시작해 흘러내린 물은 한없이 흘러 죽록정(竹綠亭) 앞에 도달해 이곳 사람들은 죽록천이라 불렀다. 무심한 세월에 정자는 무너지고 주춧돌과 잡초만 무성했다. 1770년에 송강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며 정자를 건립해 송강정(松江亭)이라 하고는 2개의 편액을 걸었다. 松江은 전남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강 이름으로, 정철은 힘든 고비마다 이 강을 찾아 마음을 다스렸다고 전해 온다.
송강정(松江亭)(사진;담양군)
송강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전면과 양쪽이 마루이고 가운데 칸에 방을 배치했으며 정면에는 송강정(松江亭), 측면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고 새긴 편액이 걸려있다. 정철의 후손들은 담양 일대에서 송강의 유적인 환벽당(環碧堂), 식영정 등을 지켜오다 16대손 정구선 씨가 2009년에 담양군 남면 지곡리 지실마을의 송강 고택 일대 4만㎡와 건물 3채를 ‘자연환경 국민신탁’에 기증했다. 기증한 토지에는 <성산별곡>의 무대였던 장원봉 자락 임야 3만 3000㎡와 정철 고택 터 2300㎡ 등이다. 고택 터에는 1616년 정철의 4남 홍명이 선친의 작품을 정리하려고 지은 사랑채 계당(溪堂)도 아직 남아 있다. 담양 월산면 만수동 계곡은 용흥사(龍興寺) 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송강 정철이 백일홍과 대나무를 관상하며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라고 노래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