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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이 창작한 노래 ‘순천가’
단가 〈순천가〉는 벽소 이영민이 43살 되던 1925년 무렵에 순천을 생각하며 가사를 쓰기 시작해 훗날 박향산(朴香山, 1925~2004) 명창이 곡을 붙인 판소리 단가(短歌)로 순천의 아름다운 경치와 유래가 깊은 유적을 노래하고 있다. 박향산 명창의 증언에 따르면 이영민의 아우 이영춘이 〈순천가〉의 곡을 얻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소년 명창이며 동편제를 잘하는 박봉술(朴奉述, 1922~1989)에게 곡을 부탁하려고 했으나, 박봉술이 한성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아 오랫동안 곡을 얻지 못해 할 수 없이 박향산 명창에게 부탁하여 곡을 붙였다고 한다.
순천가(歌) 공연 〈삼삼오오〉(사진:순천문화에술회관)
고려대 전경욱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박향산은 전남 구례군 용방면의 세습 에인 출신으로 본명은 박정례(朴貞禮)이고 판소리와 소리북에 능했던 박만조(朴萬祚, 1875~1952)의 손녀이자 명창 박봉래의 딸로 판소리를 잘했다. 박만조는 소리꾼은 아니지만, 지역에서 알아주는 고수였다. 그는 자식들을 명창으로 키우려고 새벽에 어린 아들을 깨워 박하사탕을 입에 물게 하고 〈춘향가〉, 〈수궁가〉, 〈흥부가〉를 가르쳤다. 아들 박봉래(朴奉來, 1900~1933), 박봉채(朴奉彩,1906~1946), 넷째 아들 박봉술(朴奉述, 1922~1989)은 모두 명창이 되었다. 박봉술은 19세에 임방울이 이끄는 동일창극단에 입단해 활동했다.
박씨 외가에는 명창 조몽실(曹夢實, 1900~1949), 조농옥(曺弄玉, 1920~1971), 조농월(曹弄月), 조영숙(曺英淑) 등의 국악인과 가야금병창 명인 오태석(吳太石, 1895~1953), 능주 씻김굿의 명인 조도화(曺桃花) 등이 있다. 박향산은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12세부터 숙부 박봉술을 12년간 사사했다. 박봉술은 원래 큰형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형이 일찍 죽어 21세 나이에 둘째 형 박봉채로부터 5년간 소리를 익혔다. 박봉술은 한성에 올라와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송만갑(宋萬甲, 1865~1939)에게 〈적벽가〉를 배워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박봉술(사진;민속원)
〈순천가〉는 본격적인 판소리는 아니고 일종의 단가이다. 일반적으로 명창들은 판소리를 하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먼저 虛頭가를 부른다. 이영민은 순천을 알리는 데 효과적일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궁리하다 판소리 앞에 부르는 단가를 생각하고 명창들에게 〈순천가〉를 제공하여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순천가〉는 중머리에서 시작해서 진양조를 거쳐 중중머리로 끝나는 곡조로 짜여 있다. 완전한 가사는 훗날 완성되었다.
순천시 항공사진(사진:순천시 사진기록보관난소)
중머리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호남 순천을 구경가자. 장대(長臺)에 봄이 오니 양유천만사(楊柳千萬絲)요 죽도봉(竹島峯)에 구름이 일어 만성명월(滿星明月)이 삼오야(三五夜)라.
동천(東川)을 건너 환선정(喚仙亭)을 당도하니 지당(池塘)에 백련화(白蓮花)는 맑은 향기 넘쳐 있고 유지(柳枝)에 앵앵(鶯鶯)한 꾀꼬리는 벗 부르는 소리로다. 중중(重重)한 녹음(綠陰) 중에 활을 쏘는 다수한 무사(武士)들은 애애동기(藹藹童妓) 더불고 백보천양(百步穿楊)을 다투더라.
이수(二水)를 건너 삼산(三山)을 당도하니 청천삭출(靑天削出) 삼각봉(三角峰)은 반공(半空)에 솟아 있고 구만리 맑은 물은 용당(龍堂)으로 돌아든다. 향림사(香林寺)를 당도하니 성시지척(城市咫尺)에 선경(仙境)이 完然하구나.
차산승지(此山勝地) 벽계성(碧溪城)은 과연 헛말이 아니로구나. 비봉산(飛鳳山) 저문 날에 법당의 종소리는 동구적막(洞口寂寞)을 깨뜨린다. 난봉산(蘭鳳山)에 올라 고려장군(高麗將軍) 박난봉(朴蘭鳳) 분묘(墳墓) 고적을 찾아보고 임청대(臨淸臺)에 올라 퇴계선생(退溪先生)의 필적(筆跡)과 한훤당(寒暄堂) 선생의 제위를 모신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찾아본 후 연자루(燕子樓)에 올라 사면풍광(四面風景)을 바라보니 반구정반 도화발(伴鷗亭畔 桃花發)이요 팔마비전(八馬碑前) 벽옥류(碧玉流)라. 손랑(孫郞)은 어디 가고 호호가인(好好佳人)은 제비가 되어 연연(軟娟)한 봄바람에 누상(樓上)에서 춤을 춘다. 아니리.....
용두포(龍頭浦)로 내려가니 용포어선(龍布漁船)들은 낙조(落照)를 가득 싣고 애내성(牟欠乃聲)을 부르더라.
팔마취타대(사진;순천문화에술회관)
진양조
신성포(新城浦)로 돌아드니 충무공사(忠武公祠)에 이르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정운(鄭運) 장군, 송희립(宋希立) 장군의 영정(影幀)에 참배(參拜)하고 별량(別良) 첨산(尖山)을 향하여 송천사(松川祠)에 이르러 임진충의(壬辰忠義) 청년장군(靑年將軍) 김대인(金大仁) 사적(史蹟)을 찾아본 후, 도선암(道詵菴)을 지나 안동(鴈洞)을 돌아드니 동천미우(東川微雨) 행화비(杏花飛)는 정처사(鄭處士)의 놀던데요. 오봉산하(五峰山下) 추차중(推此中)에 불재를 넘어 낙안(樂安)을 당도(當到)하니 임경업(林慶業) 장군 사당(祠堂)도 웅장(雄壯)쿠나. 청풍(淸風)은 백이산(伯夷山)이요 백운(白雲)은 금강암(金剛庵)이라. 만고충의(萬古忠義) 관성대제(關聖大帝)의 영정(影幀)에 참배하고,
순천 충무공사(사진:순천시)
중중머리
조계산상(曹溪山上)에 올라서서 선암사(仙岩寺) 풍경(風景)을 바라보니 만산구추(滿山九秋) 고운 단풍(丹楓)은 黃金世界를 이루었고, 法堂에 염불(念佛)소리 일신청정(一身淸淨) 욕고비(欲高飛)라. 승선교하(昇仙橋下) 맑은 물은 俗世를 따라 진세간(塵世間)으로 흘러간다. 굴기미를 넘어 송광사(松廣寺)에 당도하니 果然 동방승지(東邦勝地)의 조종(祖宗)이요 천고유명(千古有名)한 大寺刹이 分明하다. 국사전(國師殿)에 십육국사(十六國師)의 影幀과 불감(佛龕)이며 능견나사(能見難思) 등 고적예품(古蹟藝品)을 구경하고 육관정(六觀亭) 놀던 수석(水石) 사시유람객(四時遊覽客)이 끊일 새 바이없다. 俗世에 묵은 마음 간데없고 일신청정(一身淸淨) 새로워라. 천자암(天子庵)에 當到하니 일지요(一枝搖) 쌍향수(雙香樹)도 흔들어보고, 사중국보(寺中國寶) 제서(諸書)를 일일이 관람(觀覽)하니 果然 順天은 동방일대 명승지(東邦一大名勝地)됨을 알겠더라.
순천 선암사(사진;전라남도)
단가 〈순천가〉를 따라서 여러 번 반복하여 노래해 보니 가사가 머리에 속속 들어오고 이제까지 잘 알지 못했던 순천 유적을 다시 공부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단가는 형식적으로 4음보 율격의 연속체 율문으로 일종의 가창 가사이며 판소리에 앞서 목을 푸는 용도로 불리던 곡이다. 현재 보급된 〈순천가〉는 오기석(1911~1963), 장송죽(1919~1997), 염금향(1932~2010) 선생님의 전승을 바탕으로 최종민 교수가 일부 편곡한 형태이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교양과목으로 불교음악이 있어 최종민(1942~2015) 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젊은 교수는 정말 알기 쉽게 불교음악 범패와 우리 음악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국악 이론가로 아호가 풍강(豊江)이다. 풍강은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태어나 강(江)이란 글자를 가져오고 풍기(豐基)에서 성장해 만들어졌다. 교수님은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 이후 조선문화 말살 정책을 본격화하며 “조선어 사용 금지, 역사 교육 금지, 창씨개명 강요, 신사참배 및 궁성요배 강요, 내선일체 구호 아래 황국신민화 교육 및 동화정책 등을 시행했다고 강조하며 이는 조선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지우려는 극단적인 시도였다.”라고 말씀하셨다.
풍강 최종민 교수(사진:국악포털 아리랑)
2시간의 열정적인 강의하고 수업을 마칠 때면 불교음악 범패, 국악, 우리 고유의 음악 언어를 절대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강의가 끝나서도 학생들의 귀찮은 질문을 다 받아주셨다. 길에서 만나면 사근사근하고 알기 쉽게 국악을 가르쳐주셨다. 젊은 교수는 국악을 보급하기 위해 피곤할 줄 모르고 50여 년을 전국을 뛰어다니며 교육하고 방송 활동을 하셨다. 요즘도 50년 전 대학강의가 생각나면 ‘최종민의 국악세상’을 듣고 국악 칼럼을 읽는다. 최종민 교수 저서에 《한국전통음악의 미학사상》, 《한국의 민속음악》, 《민요 이렇게 가르치면 제 맛이 나요》, 《한국전통예술의 미의식》, 《방일영 국악상 10년》과 논문으로는 〈우리말과 음악의 소리 울림틀〉 연작 논문 5편, 〈현행 국악 개설서를 통해 본 분류방법론의 문제〉 등이 있다.
조선성악연구회, 1937년(사진:국악음반박물관)
벽소 이영민과 우석 김종익이 후원한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한 명인, 명창들을 보면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김연수(金演洙), 정광수(丁珖秀), 김준섭(金俊燮), 김초향, 박녹주, 김여란(金如蘭), 임소향(林少香), 김소희(金素姬), 박초월(朴初月) 등이었고, 김재선(金在先), 정원섭(丁元燮)과 같은 명고수(名鼓手)가 모였다. 강태홍(姜太弘), 박종기(朴鍾基), 한주환(韓周煥), 박상근(朴相根), 신쾌동(申快童), 정남희(丁南希) 등의 산조명인, 오태석(吳太石) 등 가야금병창 명인으로, 한성준, 박소군(朴素君)과 같은 무용명인(舞踊名人), 김연승(金演承)과 같은 경기 서도소리 명창 등이다. 많을 때는 130여 명에 이르는 남녀명창들이 참가하였다.
朝鮮聲樂硏究會 간판(사진:서울돈화문국악당)
당시 경성부 익선정 159번지에 있는 朝鮮聲樂硏究會 회관 건물에는 국악인들이 큰 자긍심을 가지라고 엄청나게 커다란 간판을 달았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총지휘는 이동백(1866~1949)이 맡았고, 창극(唱劇)의 작곡과 편곡은 정정렬이 맡고, 기획과 사무는 김연승이 맡았다.
명창 이동백은 충청도 서천(舒川)에서 태어나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가 죽어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성장했다. 벽소 이영민은 국창(國唱) 이동백의 공연을 마치고 칠언절구 시를 지어 사진을 남겼다.
명창 이동백(사진:이영민)
「天質聲量不可攀 春臺綠竹感君恩 廬山瀑㳍三千尺 飛落南原出道門. 寄 國唱 李東伯 歌壇 碧笑 李榮珉」
【번역】 하늘이 내려준 놀라운 성량은 너무 대단해 견줄 이 없고 대궐 안 춘당대 공연에서 풍악을 울리도록 한 임금님 은혜에 감사하고 춘향전 남원고을 암행어사 출두요 하는 소리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九江市에 있는 루산(廬山)폭포의 삼천 자 되는 세찬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와 같다.
칠언절구의 사죽(絲竹)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판소리 연구가 배연형 교수는 사죽(絲竹)의 絲는 현악기, 竹은 관악기로 통상 삼현육각이라고 알려주었다. 국문학자 이유기 교수는 “하늘이 내린 그 소리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네. 춘당대 잔치 때는 나랏님 은혜 입었지. 남원 고을 어사출도 대목 부를 때는 삼천 길 여산 폭포수가 날아 와 비오듯 쏟아졌네.”라는 해석을 해주고 사죽(絲竹)의 문헌 출전이 동진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작품 《蘭亨序》에 “「雖無絲竹管絃之盛」 (비록 성대한 음악은 없지만) 있다.”라고 알려주었다,
《蘭亭序(난정서)》 왕희지(사진;베이징 고궁박물원)
《蘭亭序(난정서)》 왕희지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契事也 영화 구년 계축년 늦은봄 초승(3월 3일)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계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였다.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많은 현인과 젊은이 나이가 많은 이가 모두가 모였다. 이곳엔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와 무성한 숲 그리고 대숲이 있다.
又有清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맑은 시냇물과 여울이 좌우를 띠처럼 서로 비치며 둘러싸고 있기도 하며, 시냇물을 끌어들여 술잔을 띄울 구부러진 물길을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둘러앉았다.
雖無絲竹管絃之盛一儒一詠 亦足以暢敍幽情(수무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비록 거문고나 피리 같은 음악이 있는 성대한 연회는 아닐지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그윽한 감정을 나누기에 충분하다......
동궐도(사진: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궁궐의 춘당대 위치를 보려고 동궐도(東闕圖)를 찾아보니 춘당대는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던 후원으로 이곳에서 각종 연회와 과거시험, 무예 연습과 시범이 행해졌다. 지도에 어수문(魚水門)이 있는데 이 문은 “국왕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라”라는 뜻과 “군신의 관계가 아주 친밀해야 한다.”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조선성악연구회 회관에는 사무실, 창악실(唱樂室)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어서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명창이 판소리를 전수하였다. 기악실을 마련해 박종기, 강태홍, 정남희 등 산조 명인들이 기악을 전수하였다. 이들은 판소리 다섯 바탕과 가극 춘향전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