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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을 기부한 우석 김종익
일제강점기 우리 음악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할 방안을 모색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식민지 안정화 정책으로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시도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柳條湖) 사건을 조작해 중국 동북 지역 만주(滿洲)를 침략해 점령하고 1932년 3월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통치했다. 조선에서의 통치 방식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일본제국은 만주를 병참기지로 삼고 노골적으로 식민지화하며,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국주의 팽창 정책을 강화했다.
1933년 5월 10일 여류명창 김초향(金楚香)의 발의로 국악인 송만갑(宋萬甲), 김창룡(金昌龍), 이동백(李東伯), 정정렬(丁貞烈), 한성준(韓成俊), 이화중선, 박록주, 김채련이 관훈동에 있던 김초향의 집에 모여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예술단체인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성악연구회는 쓸만한 회관이 없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명창 박녹주(사진:나무위키)
국악인들은 익선동에 사는 명창 박녹주(朴綠珠, 1905~1979)의 집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여류 명창 박녹주가 10여 년 전부터 국악인을 후하게 대접한 전라남도 순천의 독지가이며 깊은 인연이 있는 이영민 선생과 부호 김종익을 말했다. 며칠 후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 정광수 명창은 순천 벽소 선생 댁을 찾아갔는데 마침 우석 김종익 선생도 같이 있었다. 그들은 즐겁게 인사하고 어울려 대화를 나누었다. 우석이 “왜 이렇게 국악인들이 이곳에 모였느냐?”라고 말했다. 이때 이영민 선생이 나서 “일제가 식민통치를 강화하면서 법령으로 대중 집회를 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을 시행하여 예술인들이 희생물로 하던 일을 모두 잃고 순천에 모여 소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말을 처음 들은 기업가 김종익이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악인을 활용하고 돕는 민족운동이냐?”라고 반문했다. 이영민은 “한성에다 국악원 사무실을 마련하여 흩어져 있는 국악인들을 모두 결집하여 창극단을 조직하게 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게 하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정기가 바로 살아나고 그 움직임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자세하게 우석에게 설명했다.
기업가 김우석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조선성악연구회가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1만 원을 쾌척했다. 전남 순천을 방문해 생각지 않게 성금을 희사받은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은 한성으로 올라와 명창 박녹주에게 순천에서 있었던 전후 이야기를 전하고는 돈화문 앞에 익선동 157번지에 있는 대지 500평과 건물(200평)의 한옥을 매입했다. 이 이야기는 나주 출신 인간문화재 정광수(1909~2003)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에 판소리 자료를 모으고 채록하던 이태호 (사)유네스코 순천협회 대표에게 말해 알려졌다.
명창 박록주는 영남 출신으로 성공한 소리꾼이란 소리를 듣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소리를 음반 275면에 담아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박록주는 자신의 생애를 한국일보에 38회에 걸쳐 기고했다.
단가 박녹주(사진:국립음반박물관)
한량이며 박수무당이었던 박녹주의 아버지는 녹주가 12살 때 협률사 공연을 보고 감동해 딸을 박기홍의 문하에 들어가게 하여 소리를 배우게 하고는 딸이 벌어 온 돈으로 매일 술을 사 먹었다. 아버지는 녹주가 열네 살 때 대구의 앵무(鸚鵡)라는 행수기생에게 3년 동안 양딸로 맡기는 대신 200원을 받았다. 녹주가 15살 때에 이모(李某)라는 한량이 녹주의 기막힌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딱한 처지를 알고 200원 빚을 대신 갚아주어 녹주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파란만장한 삶은 살았던 명창은 해방 후에 여성국악동호회, 국극사, 판소리보존연구회 등을 결성하고 운영하면서 창극과 판소리 보존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오태석, 김세준, 박춘홍, 조농옥, 이용배 등 30여 명과 함께 방위대에 입대하여 군인 위문 공연을 하였다. 그녀는 공연과 음반으로 많은 재산을 벌었지만, 판소리에 아낌없이 다 써버려 말년에는 빈손이 되어 청빈하게 살다 외롭게 죽었지만, 인간문화재로 당당하게 소리판을 굳게 지켜내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명창 박녹주의 은퇴 공연은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롱부가(農夫歌) 송만갑(사진:국립음반박물관)
순천에서 태어난 우석 김종익(金鍾翊)은 어릴 때 한학을 배운 후 1909년에 서울에 진학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고 졸업했다.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1916년 졸업했다. 부친 김학모(金學模, 1861~1925)는 아들이 관계(官界)로 진출하기를 원했지만, 김종익은 조선의 미래가 교육과 식산(殖産)에 있다고 판단했다.
묵초 김학모(金學模) 61세 사진(사진:궁인창)
1925년 음력 6월 부친이 사망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대평농장(大坪農場)를 설립했다. 그는 전남육영회를 발족하고 1931년 12월경에 부친의 詩와 만사(輓詞)을 모은 유고집 《묵초시고, 墨樵詩稿》를 간행했다. 유고집 서문(序文)은 대한제국 학부대신을 지낸 海平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쓰고 발문(跋文)을 서예가인 송태회(宋泰會, 1872~1941)가 작성했다. 부친 김학모(金學模)는 1910년대 난초와 국화를 좋아하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난국사(蘭菊社) 모임에서 南坡 金孝燦, 김학순(金學詢), 金順坪, 金萬坪, 金奉珏하고 함께 활동했다.
1930년 초반에 조선제사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부호 반열에 올랐다. 그는 부친의 호를 딴 〈목초육영회〉라는 장학회를 설립해 불우한 학생을 돕고, 1933년 아들 김두수(金杜洙)가 태어나자 조선적십자사와 조선나병예방협회에 거액을 희사하였다.
1936년에 폐결핵에 걸린 딸 김평수(金平洙, 1923~1936)가 세상을 떠나 크게 상심했다. 평소 건강했던 사업가 김종익도 1937년 4월 26일(52세)에 급한 질환으로 경성제국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 5월 6일 오후에 운명했다. 그는 남은 가족들에게 “불우한 학도들에게 학비를 대줄 것, 순천농업학교를 갑종학교로 승격시킬 것, 순천 남녀고등학교를 세울 것”을 유언했다, 그의 죽음은 조선 경제계에 큰 타격이었다. 그는 서울역 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순천 해룡면 해창리 앵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기 재산의 반을 교육 사업에 기부하고 국악을 후원하는 등 사회 공익사업에 기부하도록 부탁해 친동생이 순천 39개 사회 공익 단체에 유산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는 1935년 국립순천대학교의 전신인 순천공립농업학교를 설립했다.
순천 죽도봉공원 우석 김종익(金鍾翊) 동상(사진:순천시)
1938년에는 한성 혜화동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개교하고 한센병의 예방과 치료에도 재산을 희사했다. 교육가 김종익이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고자 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둘째 딸이 결핵으로 사망해 여성을 치료할 여의사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를 거부했다. 당시 여의사가 없어 많은 여성이 질병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심한 고통을 받고 늦게 치료하다 죽는 일이 많았다.
여의사 길정희(1899~1990)는 1923년에 동경여의전을 졸업하고 귀국해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 Hall, 1865~1951)과 함께 근무하다가 1928년 4월 14일에 여의사 양성기관의 필요성을 논의하였다. 이후 두 번의 회의를 거쳐 1928년 5월 19일 16명이 모여 기성회 조직과 발기대회를 거쳐 9월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다.
로제타 홀은 1890년 26살에 조선을 방문해 최초의 여성병원 보고여관(保救女館)에서 의료 사역을 펼치며 이화학당 학생 5명에게 의료 교육을 처음 시작했다. 1년 후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조선에 와 3년간 함께 의료선교사 활동을 하다 1894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 한 달 후 세간을 모두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조수로 일하던 김정동(金點童)을 미국으로 데려가 지원을 해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 박에스더(1876~1910)를 탄생시켰다. 여의사 박에스더는 조선에 돌아와 평양에서 진료하다 1910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로제타 홀은 3년이 지나 1897년 11월 10일 조선을 다시 찾아와 평양에서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을 열고 점자법을 개발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다. 그녀는 동대문부인병원을 개설하고 조선의 교육기관 설립을 위해 힘썼다. 1909년 이 자리에 현대식 병원이 들어섰는데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박에스더 부부와 로제타 홀(사진:이화여대의료원)
감리교 선교사 로제타 홀은 1921년 제물포 지역에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인천 부인병원을 설립했다. 로제타 홀이 1932년에 정년을 맞아 은퇴하게 되어 강습소를 길정희와 김탁원(金鐸遠, 1898~1939) 부부에게 인계했다. 이때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고 관철동 14번지로 이전했다. 다음 해 홀 선교사가 미국에 돌아가자 미국 선교회는 지원금을 보내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자기의 재산을 내놓아 운영했다.
로제타 홀과 인천부인병원(사진:로제티홀기념관)
강습소는 정식 전문학교가 되지 못해 졸업해도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의사 자격 검정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강습소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해 인촌 김성수(金性沫: 1891~1955)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인촌은 순천의 부호인 김종익(金鍾翊: 1886~1937)을 소개했다. 김종익의 재정지원을 약속받고 1934년부터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 준비를 결성하던 중 김종익이 1937년 뜻밖의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어 모든 희망이 모두 사라졌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신축교사 상량식(사진:매일신보, 1938.9.28.)
김종익 처 박춘자(朴春子)는 남편의 유지에 따라 1938년 4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인수하여 재단법인 우석학원을 설립하고, 정식 4년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인가를 받았다. 1938년 5월에 경성의학전문학교의 병리학교실을 빌려 개교하였다. 당시 모집한 신입생은 60명이었다. 1948년에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1957년에 남녀공학의 수도의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1964년 국학대학(國學大學)을 인수 합병하여 우석(友石)대학교로 개편되고, 1971년 고려대학교로 합병되어 ‘고려대의대 부속 우석병원’으로 되었고, 1976년에 고려대의대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순천 죽도봉 공원은 순천 시민의 안락한 휴식처이다. 이 공원은 순천 출신 독립운동가 김동순의 아들로 태어난 향산 김계선(1911~1994) 선생이 194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해 죽도봉 공원부지를 매입해 1981년 순천시에 기부했다. 순천시는 공원을 조성하고 1975년에 팔마탑을 건립하고, 1977년 누정 燕子樓를 건립하고 보물로 지정된 승평부사 최석(崔碩)의 淸廉을 기리는 순천 八馬碑를 이전하였다. 과거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이 비서랑라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기증받은 말과 망아지를 모두 돌려보내 이후 나쁜 폐단이 모두 사라졌다. 1981년에는 강남정 정자를 건립해 순천시민의 날에 제막했다. 향산은 1981년 학교법인 영호 학원을 설립하고 강남여고를 설립했다. 그는 1994년에 운명해 순천시민의장 제1호로 장례를 치렀다. 2019년에 순천시민의 상 특별상을 받았다.
향산 김계선 동상(사진:순천독립신문)
일제강점기 당시 판소리를 후원한 호남권 인물로 박석기(전남 담양), 국채웅(담양), 보성군수를 지낸 성정수(순천), 김종익(순천), 서병규(전남 담양)와 전남 구례의 오경선이 대표적인 후원자이다. 순천 김종익이 후원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회관은 익선동(益善洞)에 있었다. 이 건물에 판소리 창자를 비롯하여 많은 음악인이 모여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자 조선총독부는 강한 회유와 탄압을 가해 1940년 끝내 해산하게 된다.
원래 익선동은 익동(翼洞)으로 불렸던 동네이다. 익(翼, 날개 익)과 선(蟬, 매미 선)은 곤충 매미의 날개를 뜻한다. 고대 왕조에서 관복을 입고 머리에 매미 모자 형태의 익선관(翼蟬冠)을 쓰고 정무를 본 것은 매미의 청렴을 본받아 좋은 정치를 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다.
익선관(翼蟬冠)(사진:沅汰)
3세기 말 서진(西晉)의 문인 육운(陸雲, 262~303)은 《한선부(寒蟬賦)》를 지어 영물(靈物) 매미를 지덕지충(至德至蟲)이라고 표현하며, 선비가 지닐 문청렴검신(文淸廉儉信)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頭上有緌則其文也 含氣飮露則其淸也 黍稷不享則其廉也 處不巢居則其儉也 應候守常則其信也
머리 위 갓끈 있으니 글을 깨쳤고 이슬을 먹고 사니 맑은 성품을 지녔고 곡식을 축내지 않으니 염치가 있고 거처할 집을 짓지 않으니 검소하고 오갈 때를 지키니 신의가 있다.
익선관은 정치가 혼란하던 시절에 통치자가 차가운 매미를 닮아 처신하기를 비유한 것이다. 매미는 이슬만 먹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청렴함이 있고, 자기 집을 짓지 않아 검소하며, 때를 알아 허물을 벗고 물러나는 신의가 있고, 학문에 뜻을 둔 선비와 비슷하고, 곡식을 해치지 않으니 염치(廉恥)가 있다고 했다. 임금은 절도를 가진 매미의 오덕(五德)을 경계 삼아 매미 날개를 위쪽으로, 신하들은 매미 날개를 아래로 하는 익선관을 나누어 썼다. 이는 관직에서 청백리 정신을 몸에 지니고 몸소 실천하도록 하는 선비정신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만원 지폐를 사용하는데, 그 돈에 익선관이 그려져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고대 풍류의 멋진 내용을 누가 알겠는가? 젊은이들은 종로 익선동을 떠 올리면 그저 술집이 많고, 볼거리, 먹거리, 구경거리가 많고, 외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지 명소로만 알고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