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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후원자 벽소 이영민(李榮珉)
국악 후원자인 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 1882∼1964)은 1935년 여름 한성준 무용공연회를 마치고 명인에게 「歌詞有法度長短為常個 君是天才子皆稱大皷王 韓成俊楽壇 碧笑李榮珉 。」 라는 시를 지어 칭송했다. “노래와 가사에 법도가 있고 길고 짧음이 항상 일정하다. 당신은 정말 천재입니다. 모두가 당신을 최고의 북 고수(鼓手)라고 존경합니다.” 벽소 이영민.
벽소 이영민(李榮珉) 초상
전남 순천시 상사면 응령리 금곡마을에서 부친 이세근(李世根)과 모친 정매곡(鄭梅谷)의 장남으로 태어난 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은 어릴 적 이름이 희수(熙守)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서당에서 한학(漢學)를 배우고 창암(倉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 선생의 서풍(書風)을 익혔다. 사립 순천승명학교에서는 국어를 배웠다. 18세(1900년)에 경성에 올라와 관립 교원양성소인 한성사범학교에 약 8개월간 재학했다. 고향 순천으로 돌아왔다. 야학을 개설하고 20세(1902년) 때 후학들을 위한 교육 운동과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일본제국은 1907년 러일 전쟁 후 의병 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보안법을 제정되어 집회 금지 및 안녕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경찰이 집회나 대중운동을 제한, 금지, 해산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5일에는 경무총감부령으로 〈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제정되어 옥외 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옥외에서의 설교, 학교 학생의 체육활동 등 모든 대중 집회를 경찰의 허가 없이 금지했다.
이영민은 1910년 황전면 출신의 지주인 박승휘(朴勝徽)와 함께 순천남학당(순천남초등학교)을 공립으로 인가받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교원으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탄압 정책이 점점 거세지자 이에 항의하여 교원을 사직하고 1917년에 상하이로 건너갔다.
몽양 여운형 선생(사진:나무위키)
상하이에서 3년간 망명 생활을 하며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오세창, 김규식 등과 교류하며 독립투쟁과 민족정기 보존 방안을 모색했다. 벽소 이영민은 몽양 여운형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일본제국으로부터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정기를 보존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온 이영민은 본격적인 사회 활동으로 야학을 시작하며 밤마다 한시를 창작했다.
이영민은 순천의 기업가인 우석(又石) 김종익(金鍾翊, 1886~1937)과 함께 조선 당대의 명창들을 순천 지역으로 초청해 공연회를 개최하며 판소리 창자 등 예술가들을 위한 후원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소리판 공연이 끝나면 명창을 순천 비너스사진관으로 모셔가 개인 사진을 찍었다. 사진 촬영은 1920년 송만갑(宋萬甲, 1865~1939) 명창을 시작으로 1948년 거문고 명인인 오학남(1900~1964)에 이르기까지 28년간이나 계속됐다. 이렇게 해서 명창 38명과 기악연주자, 고수 16명 등 모두 54명이 국악사에 남는 소중한 사진을 남게 되었다. 벽소는 시를 잘 지어 명창들의 소리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감상평을 한시로 표현해 사진에 넣었다.
명창 송만갑, 1920(사진:이영민)
1924년 42세 때 동아일보 순천지국 기자로 일하게 되고 청년회 활동과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횡포에 맞서 소작쟁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소작 총회에 참석하고, 순천농민연합회 등에 소속되어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순천, 광양농민회가 창립되는 현장에 참석해 소작농의 현실을 알리고 농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최근 1923년 《개벽》 4월호에 발표한 5언 18행의 시 ‘소작인의 눈물(小作淚)’가 발굴되어 화제가 되었다.
耕旱無全熟 가뭄이 들어 심은 것들 모두 익지 않았고 秋田靑草多 가을 밭엔 푸른 풀만 많더라. 地主猛如獸 지주는 사납기가 맹수와 같고 舍音毒似蛇 마름은 독하기가 뱀과 같더라. 終歲筋骨物 한 해 내내 몸을 부려 수확한 물건은 悉歸富人庫 모두 부자집 곳간으로 들어가네. 晨取霜裏薪 새벽부터 서리 속의 땔나무를 해오고 夜捆月邊履 밤에는 달빛에 짚신을 엮네. 母病無藥價 어머님 병환에 약값조차 없으니 彌月臥冷床 달이 비추는 찬 평상 위에 누워있을 뿐. 子女俱失學 자녀들은 모두 배울 때를 잃어버려 時逐鷄犢行 때때로 닭과 송아지만을 쫓아다니네. 全家無斗穀 온 집안에 곡식 한 말조차 없으니 菜粥難實腹 채소죽으로는 배를 채우기가 어렵더라. 鄰狐又奪耕 이웃의 여우는 또 심은 것을 빼앗아가니 入門妻子哭 문에 들어서자 처자식의 곡소리가 들리네. 安得好陽春 언제나 좋은 봄볕을 얻어 遍花天下木.두루 천하의 나무에 꽃을 피울 수 있으리.
1922년 12월부터 1923년 12월까지 《조선일보》의 〈사조(詞藻)〉에 ‘취산(醉山) 이영민’이란 이름으로 26수(24제)의 한시가 게재되었다. 《동아일보》의 〈금고시총(今古詩叢)〉에는 1924년 9월과 10월에 벽소(碧笑) 이영민이 창작한 한시(漢詩) 4수가 수록되어 있다. 벽소(碧笑)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지어 준 아호로 취산(醉山), 옥류정주인(玉流亭主人)을 함께 사용했다.
그는 순천 연학회(硏學會)를 창립해 임원으로 활동하고, 순천노동대회를 창립하고 노동자의 교육을 위해 노동 야학을 설립해 강사로 나섰다.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기사로 자주 작성해 일찍부터 경찰은 문제 인물로 주목하고 가택 수색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잡지를 발행하려고 설립한 ‘화화사(火花社)’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런 활동도 일본 경찰의 관찰대상이 됐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에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고 일제 식민통치 체제에 저항하는 조직과 집회를 강력하게 단속했다. 1927년에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진 후 전국적으로 관련 인사를 체포하면서 전개되었던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이듬해 2월 13일 경성 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죄목은 ‘청년운동을 선동하기 위한 순천의 조직 책임자’라는 것과 ‘대한독립 운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 혐의였다. 10개월을 복역하고 1928년 12월 28일 출소 후 감옥에서는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벽소 이영민 수형 기록(사진:KBS)
출소 이후에도 이영민은 한동안 순천농민조합의 위원으로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집이 없는 세입자들을 위해 ‘차가인(借家人) 동맹’을 결성해 임대료를 낮추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총동원법 등을 통해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며 조선인의 정치 집회, 교양 강연회, 연설회는 물론 종교 집회까지 사전에 철저히 통제했다. 이영민은 1932년 모종의 비밀결사 혐의로 체포되고 나서부터는 대외적인 사회 활동은 발견되지 않는다.
1940년 무렵 이영민은 서예가이자 문인으로 순천과 인근 지역의 문인 및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 활동을 펼쳤다. 서도전(書道展)에 입선했다는 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는 18세 때 당대 최고의 한학자였던 김광필 선생 문하에 들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 벽소체(碧笑體)를 개발했다. 이영민의 10곡 병풍에는 조선왕조의 절개 있는 선비 서거정, 원정 최수성, 사계 김장생, 송자대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퇴계 이황, 정암 조광조, 하서 김인후의 시 10수가 수록되어 있다.
순천대학교 국어교육과 김용찬 교수는 출옥 후 이 시기를 지역에서의 사회 활동에 제약을 크게 받게 되어 문화예술 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에 이영민은 김종익(金鍾翊) 등 지역의 우호적인 유지들과 함께 판소리 창자를 비롯한 예술인을 후원하며 문화 활동에 전념했다. 이영민은 조선의 국권이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암울한 식민지 상황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와 고향 순천에 대한 애정을 환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특히 사진을 찍어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전통 예술인들의 예술세계와 활동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작하였다.
이영민의 10곡 병풍(사진:듬배 고미술)
그는 문인으로서 한시 창작에 매진해 《벽소시고(碧笑詩稿)》 시집을 엮어냈는데, 120수가 넘는 한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청구악부초(靑邱樂府抄)〉에는 판소리 <춘향가>의 내용을 장편의 한시로 만든 <옥중화가(獄中花歌)>와 근대국악계 인물(近代國樂界人物)이라는 표제 아래 만났던 전통 예인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등 41명의 판소리 명창 등 음악인들을 소개하는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41명 판소리 명창
송만갑(창극조), 이동백(창극조), 김창룡(창극창), 정정렬(창극조), 이선유(창극), 한성준(명고), 정응민(창극조), 배설향(창극조), 이화중선(창극조), 박록주(창극조), 김초향(창극조), 김여란(창극조), 김연수(창극조), 임방울(창극조), 정원섭(명고), 백락준(금사), 이소향(가야금사), 조몽실(창극조), 김준섭(창극조), 박초월(창극조), 오태석(가야금사), 김종기(가야금사), 김소희(창극조), 박귀희(창극조), 김명옥(창극조), 정광수(창극조), 오비취(창극조), 신숙(창극조), 신쾌동(금사), 함동정월(창극조), 송영숙(창극), 조소옥(창극), 조금옥(창극), 이중선(창극), 박채련(창극), 조농옥(창극), 강산홍(금사(琴絲), 거문고 연구), 한갑득(창극), 김록주(창극), 한애순(창극), 안채화(창극조)
국악인들은 ‘비나스 사진관’(현재 순천 영진약국)에서 찍은 개인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다. 당시 촬영자는 사진관 조수인 김홍석이었다. 이영민의 조카 이정규가 52명의 사진에 간략한 해설과 한시 작품의 원문 및 번역문을 수록하여 엮었다, 이는 순천사진인쇄공사에서 찍은 《한국 국보급 국창・명창・명고・명금 사진시집》 은 3종 중 하나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 판소리 진흥회에서 54명의 사진과 한시, 그리고 해당 인물들의 인적 사항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펴낸 《한국 국악 인명록 : 관극(觀劇)・시(詩)・사(寫)》이다.
이태호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판소리 진흥회 대표는 벽소 이영민 선생에 관한 연구를 통해 많은 자료 수집을 하였다. 그가 찾은 귀중한 자료는 무형유산 판소리가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이태호 선생은 벽소 이영민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순천에서 독립투쟁 선봉에 선 인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8년 2월에 후손과 함께 이영민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국가보훈처에 신청했으나 서류 보완 요청으로 반려되었다. 12월에 공적심사 문서를 다시 보완해 제출했으나 광복 이후 행적 불분명으로 처리되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푸른 웃음소리(사진: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
국립순천대학교 박물관은 2025년 5월 29일부터 6월 27일까지 예술가이자 기록자인 벽소 이영민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기획전시 〈푸른 웃음소리〉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는 벽소 이영민이 남긴 국악인 초상사진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총 60점에 이르는 국악인 초상 사진과 전신사진 옆에 벽소가 직접 쓴 한시와 서예를 함께 구성한 연속적 포토몽타주 형식으로 구성했다. 6월 10일에는 강성호 학술 연구교수가 〈순천의 홍반장, 벽소 이영민을 만나다〉를 주제로 첫 번째 강연을 진행했고 6월 13일에는 박혜강 디렉터가 〈이영민의 국악인 초상사진 아카이브 읽기〉를 주제로 전시의 핵심 콘텐츠를 심화 해석하는 강연을 하였다.
판소리 순천가 〈삼삼오오〉 공연(2025.11.18.)(사진:KBS)
판소리에 관심이 많은 이영민은 전국 명창들에게 순천이 유서 깊은 고장임을 알리려고 1930년경에 순천의 산천과 유적 40여 곳을 소개하는 가사 〈순천가〉를 만들었다.
벽소 이영민은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이며, 순천을 사랑한 詩人으로 예술인을 후원한 선각자이다. 선생의 면모와 업적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아 재조명이 필요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