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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4:33 (2026.02.08. 14:33)

무용수 최승희에게 40여 전통춤 지도... 태평무 후계자 한영숙과 강선영류 나눠 발전시켜

 
전통춤 명인 한성준
벽사(碧史) 한성준은 1907년 광무대 신축개관공연에 참여하고, 1926년 경성방송국 개국과 함께 왕성한 활동을 해 공연 기록이 많다. 그는 100개 종목에 달하는 전통춤을 집대성해 모두 무대양식으로 정착시켰다. 경성방송국에서 피리 시나위를 유성기 음반에 취입했다.
전통춤 명인 한성준
 
 
벽사(碧史) 한성준은 1907년 광무대 신축개관공연에 참여하고, 1926년 경성방송국 개국과 함께 왕성한 활동을 해 공연 기록이 많다. 그는 100개 종목에 달하는 전통춤을 집대성해 모두 무대양식으로 정착시켰다. 경성방송국에서 피리 시나위를 유성기 음반에 취입했다. 그는 50년 동안 이어 온 고수 생활을 정리하고 사라져 가는 조선 전통춤을 지키고 이를 널리 알리고 싶어 61세에 접어들어 이동백, 정정렬, 박록주와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음악과 춤을 정리하고 창작하며 제자들에게 교습했다.
 
1935년 여름 62세 나이에 부민관(府民館)에서 제자들과 ‘한성준무용공연회’ 작품발표회를 처음 가졌다. 음반 녹음하러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한창 촉망받는 무용수 최승희에게 3~4일간 40여 종의 춤을 지도했다. 1936년에는 세습무를 하던 모친 김씨가 사망했다. 1937년 12월에 전문적인 전수 교육기관을 구상하고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창립했다. 1938년부터 전통춤 공연과 교육에 열중하여 한성준이 춤을 창안한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 학춤, 한량무, 훈령무 등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세속화된 이미지를 바꾸고 예술작품 전통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한영숙, 강선영, 김천흥, 이동안 등 전통춤꾼이 배출됐다. 1939년 66세에 조선성악연구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한성준 무용공연회(사진:이애주문화재단)
 
한성준은 한성 부민관에서 ‘한성준 무용공연회’ 공연을 마친 후 순천 출신 국악 후원자 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 1882~1964)이 쓴 시 옆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歌詞有法度長短為常個 君是天才子皆稱大皷王 韓成俊楽壇 碧笑李榮珉 。」
 
【번역】
노래와 가사에 법도가 있고 길고 짧음이 항상 일정하다. 당신은 정말 천재야! 모두가 당신을 최고의 고수(鼓手)라고 부른다. 한성준 공연에 벽소 이영민이 글을 쓰다.
 
 
한성준은 1938년부터 전 조선 향토연예대회를 시작으로 남부 20개 도시를 방문해 공연했다. 67세 때 새로운 춤을 재구성하여 경성 부민관에서 제2회 공연을 하였다. 1940년 4월에 제자 2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의 첫 해외 공연을 하고 일본 여러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6월 19일 부민관에서 열린 ‘제1회 조선음악전’에서는 훈령무를 공연했다. 1940년 10월에는 황해도 개성, 장산곶을 거쳐 만주에서 강제노역 중인 노동자를 위한 위문 공연에 참가했다. 1941년 4월에 전통춤을 발굴하고 집대성한 공로로 《모던》 일본사가 제정한 ‘조선예술상’ 제2회 무용부문 상을 수상했다.
 
1998년 문화관광부의 9월 문화인물로 선정된 한성준
 
한성준은 조선의 춤을 이어받을 제자를 고르려고 수십 명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최승희(崔承喜, 1911~1969)와 근대 춤 선구자 조택원(趙澤元, 1907~1976), 한영숙(韓英淑, 1920~1989) 등을 두고 수십 번 고민하다 마침내 고른 이가 손녀 한영숙이다. 조택원은 최승희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하며 무용을 배워 1930~40년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 400여 회의 순회공연을 하며 조선의 춤을 세계에 알렸지만, 한성준이 생각하기에는 두 제자는 스승에게서 춤을 배워 자기가 얻고자 하는 춤을 개발해 가져갔다고 생각하며 전통춤 계승자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순수한 한영숙을 마음에 두었다.
 
한성준은 4월 15일 무용도장 경운정에 문하생들이 모두 모이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후계자로 20세의 한영숙을 세우고, 한영숙을 뒷받침할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69세로 고령이 되자 거동이 불편하고 병이 나 제자에게 모든 춤을 물려주고 1941년 고향 홍성으로 낙향하여 예산군 덕산면 복당리에서 요양하다 9월 3일 오전 5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이장하여 상촌리에 있다. 명인이 양성한 문도(門徒)는 40여 명에 달하나, 그 문장(門墻: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드나드는 스승의 문하(門下)를 가리킴)을 엿본 자는 강대홍(姜大弘) 이외 3~4명에 불과하며 조선 전통춤의 제자는 200여 명에 달한다. 명인의 주요 작품으로 「태평무」, 「학무」, 「신선무」, 「살풀이춤」, 「한량무」, 「사공무」, 「농악무」 등이 있다. 아끼는 제자로는 김천흥(金千興), 김보남(金寶男), 이강선(李剛仙), 장홍심(張紅心), 한영숙(韓英淑), 강선영(姜善泳), 이매방(李梅芳), 정인방(鄭寅芳), 진수방(陳壽芳), 김삼화(金三和) 등이 있다.
 
김유석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음학학과 한국음악학전공으로 〈한성준의 음악확동 연구〉로 2016년 8월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부록에는 한성준 선생의 개인사 연보,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에 함께 출연한 연주자 목록과 곡명, 시나위 선율이 채보되어 있다. 한성준(필률)은 연주할 때 방용현(대금), 김덕진(해금), 정정렬, 지용구(장고), 심상건과 많이 연주했고 총 154명의 연주자가 함께 방송했다. 명무 한성준의 예술세계와 춤에 관한 논문, 기사, 연재 글, 잡지, 유성기 음반, 음원 자료는 다양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영숙은 충남 천안 외가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어 외가를 떠나 홍성 본가에 갔다. 그곳에는 친할아버지, 할머니와 처음 보는 이복형제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부친 한희중의 후처였다. 다섯 살 영숙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병치레도 잦아 누워있는 날이 꽤 많았다. 할아버지가 북을 치면 할머니가 흥에 겨워할 때 장단을 처음으로 느꼈다. 병치레가 심해 12세 때 홍성 갈미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3세 살에 할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조선고전음악무용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교습을 받게 된다. 할아버지는 자상했지만 춤을 연습할 때는 매섭게 지도했다. 제대로 된 손동작을 나올 때까지 익히도록 날마다 연습을 시켰다. 장단을 이해하기 위해 해금, 가야금 등의 국악기도 배웠다. 17세였던 1937년 10월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한성준무용발표회’에서 승무, 학춤, 살풀이춤 등을 추며 첫 무대공연을 선보였는데, 춤을 잘 춘다고 호평을 받았다.
 
후계자 한영숙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조선무용연구회’를 ‘한영숙 고전무용연구소’로 바꿔 전통무용 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1963년에는 미국 30개 주 순회공연을 했다. 1955년에는 국악인 박초월이 국악 교육을 위해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세운 한국민속예술학원에서 무용 교사로의 활동을 시작했다. 춤을 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춤을 가르치는 것도 소홀하게 할 수 없어 1958년 11월 박헌봉, 박귀희, 김소희, 성금련 등과 ‘국악학원기성회’를 조직하고 1960년 3월 10일 문교부로부터 ‘국악예술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아 1960년 5월 12일 종로구 관훈동에 개교하였다. 학교설립자 겸 초대 교장은 박헌봉이었다. 학교는 더욱 발전하여 1973년 2월 28일 재단법인 국악학원 설립인가를 받아 박귀희가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학교는 발전하여 2008년 3월 1일 교명이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전환되었다. 제자들을 지도할 때면 “온몸의 뼈마디와 피가 섞일 정도는 돼야 춤을 췄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영숙은 무리한 강의와 공연으로 간경화증을 앓자, 앞으로 남은 생을 생각하고 재산을 처분해 국악학교에 기증하고 삶을 정리했다. 1966년 9월 춤 생활 35주년을 결산하는 발표회를 성금연의 가야금과 함께 공연했다. 1971년에는 무용극 ‘법열곡’을 발표했다. 1972년 일본 삿포로(札幌) 동계올림픽과 독일 뮌헨올림픽 민족예술단으로 참가해 한국의 춤을 선보였으며, 1975년에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일본 순회공연을 가졌다. 1969년 승무로, 1971년 학춤으로 국가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됐다. 1973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살풀이춤으로 한국 춤의 진수를 세계에 알렸다.
 
불교신문 어현경 기자는 벽사 한영숙을 회고해 기사를 작성하며 명인을 “무대 위에서 춤 삼매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라고 기록했다. 명인은 한국 민속무용의 기본이 승무라고 생각하고 매일 아침 승무로 훈련을 시작했다. 승무는 민속무용이면서 수행이라고 여기고 생각하고 환희심을 느낄 때까지 나만의 몸짓을 찾기 위해 연습을 거듭했다. 천재 시인 조지훈(趙芝薰, 조동탁, 1920~1968)의 승무(僧舞) 시를 연상하며 춤을 췄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 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 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한영숙의 승무(사진:국가유산청)
 
절세의 고수, 전설의 명무 한성준 명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태평무는 자연스럽게 제자에게 이어져 ‘강선영류’와 ‘한영숙류’로 나뉘게 되었다. 한영숙류의 춤이 국왕이 고고한 멋을 가지면서도 민첩하고 세밀한 발 디딤새를 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강선영류의 춤은 왕비가 춤을 추는 것을 상상하며 만들어 낸 춤으로 팔 사위가 우아하고 화려하다.
 
요즈음은 한성준의 초기 태평무에서 보여준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은 조금 축소되고, 화려하고 품위 있는 궁중 복색의 장중함과 굿 장단이 주는 경쾌함이 더 강조되었다. 처음에 독무로 추었던 태평무는 무대가 커지고 넓어져 이제는 여러 명이 추는 군무로 발전해 더 웅장하게 변화했다.
 
태평무 한영숙류는 남색 겉치마와 붉은색 안 치마에 옥색 당의를 입고, 강선영의 태평무는 치마에 당의를 입는 것은 같으나, 처음에 하얀 겉옷을 입고 추다가 작품 중간에 서서히 옷을 벗어 놓고 추는 것이 다르다. 한영숙류에서는 쪽진 머리를 하고 강선영류는 큰 머리 가채를 올린다. 양손으로 남색 겉치마를 살짝 들어 올릴 때, 붉은색 안치마와 하얀 버선발이 살짝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태평무의 상징이다.
 
예술성이 높고, 신명이 나는 태평무는 우리나라 문화콘텐츠 중 으뜸으로 국가행사에서 꼭 등장하는 춤이다. 생전에 강조한 초반 한삼춤의 유연한 곡선적 선형과 후반 이어진 원형의 발 디딤, 몰아가는 발짓의 역동성과 추는 이의 자유로운 즉흥적 신명과 멋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이 춤은 무용수의 정·중·동의 미적 형식을 가진 완벽한 춤이다. 한영숙은 승무와 학춤의 예능보유자로 살풀이, 태평무에도 능했다. 한영숙은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미국공연을 하며 우리나라 전통무용을 외국에 알리며 쉼 없이 한국 춤을 선보였다.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맨 마지막 순서로 살풀이춤을 공연하여 외국 선수들을 떠나보내는 장면이었다. 선생님은 올림픽 무대에서 춤을 추신 후 1년 후인 1989년 10월 7일 백학처럼 서쪽으로 떠나셨다.
 
한영숙의 제자로 학춤에 김응화, 승무에 박재희, 이향재, 이애주, 정재만, 정승희 이흥구가 있다. 제자들은 1990년 ‘한영숙 춤보존회’를 설립해 그의 춤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한편 매년 정기공연 및 추모공연을 진행한다.
 
한영숙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3대 벽사 정재만(1948~2014)은 한영숙의 승무 살풀이춤 전수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 6시에 10여 년간 연습했다. 그는 염불, 타령, 굿거리, 법고에 다시 굿거리로 이어지는 승무의 5과장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만큼의 법력을 쌓았다. “처음에 엎드려 시작하는 염불장단의 춤은 세상에 막 나온 어린아이를 나타내고, 타령장단에서는 활동적인 청년의 모습을, 굿거리장단은 황혼기에 접어든 인생을 나타낸 것 같다.”라고 춤 의미를 부여했다.
 
정재만은 1986년 ‘정재만남무단’을 운영하여 남자 무용수를 발굴하고 육성해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폐막식의 안무를 담당하고 2002년 월드컵 전야제 안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무용 총감독,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무용 총감독, 2005년 제16차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개폐회식 총괄 등을 맡아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는 춤 전성기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모든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2025년 5월 23일에는 한국문화의 집에서 〈한맥의 춤, 초월시공 (超越時空)〉 공연이 펼쳐졌다. 이 공연은 한국 전통춤의 깊은 정신과 맥을 오늘날까지 꿋꿋이 이어온 세대들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무대였다.
 
미래를 잇는 한맥의 춤-학춤(사진:한영숙춤보존회)
 
강선영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에서 1925년 태어났다. 관가 벼슬을 하던 조부 강경수(姜敬秀)는 당대 한성준, 이동백(李東佰), 정정렬(丁貞烈) 명인들과 사랑채에 어울려 음풍농월하던 친밀한 사이였다, 작은아버지 강병화(姜炳華)가 토월회 등 연극 단체를 조직, 전국을 유랑 생활하다 할아버지한테 매 맞고, 아버지 강병학(姜炳學)은 계집애를 신식 교육을 한다고 볼기까지 맞았다. 이런 엄한 가문의 강선영이 처음에 춤을 추겠다고 나서자 집안이 발칵 뒤집혀 진노한 할아버지는 평소 아끼던 며느리와 손녀를 내쫓아 버렸다. 소학교에서 꾸민 ‘구식 어머니, 신식 어머니’ 연극에 출연하며 한 달간 노래를 연습해도 잘 안 되는데, 선영이가 무용은 한 번 보기만 해도 척척 소화해 내자 선생님은 어머니께 “선영이는 앞으로 무용을 가르치는 게 좋겠어요.”라고 격려의 말을 했다. 어머니는 여러 날에 걸쳐 딸의 장래를 고민하며 무엇을 가르치면 좋을까 걱정했다. 선영의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나자 평택에서 전세방을 얻어 하숙생을 치며 아끼던 딸을 안성고등보통학교에 보냈다. 어머니는 13살 딸을 한성의 춤 명인으로 소문난 한성준 씨한테 보내 전통춤을 배우게 하였다.
 
경운동에 있던 음악무용연구소에는 선녀인지 나비인지 구분 못 할 정도로 춤을 잘 추는 이강선, 장홍심(張紅心, 장월순, 1914~1994), 한성준의 손녀인 한영숙(韓英淑)과 함께 숙식하며 15세 때 일본 공연을 했다.
 
장홍심은 함흥에서 살았는데, 씨름판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마음이 이끌려 조택원의 외할머니 70세의 배 씨 할머니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해 12살 때 함흥 권번에 입소하여 춤을 배웠다. 그녀는 21세에 한성준 문하에 들어와 2년간 입소하여 바라승무와 검무, 한량무, 포구락(抛毬樂), 선녀무를 배우고 잘 춰 많은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포구락은 중국 당나라에서 하던 궁중 공놀이가 宋을 거쳐 고려로 전래된 당악 정재로 《고려사》 권71에 연행 기록이 보인다. 포구문을 가운데 놓고 무용수들이 좌대와 우대로 편을 나누어 춤추며 차례로 나아가 공을 던진다. 공이 구멍 풍류안(風流眼)에 들어가면 상으로 꽃을 받고, 실패하면 얼굴에 먹점을 찍는(점묵, 點墨) 유희적 형식의 춤이다. 궁중의 태평성 대와 풍요, 길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희무이다.
 
포구락(抛毬樂)(사진:수원시)
 
명무 강선영은 1943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개최하며 무용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광복 후 '강선영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50~60년대에 <법열>, <초혼>, <장희빈> 등 다수의 창작 무용극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60년에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등 해외 공연을 통해 한국 춤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뮌헨올림픽 한국 민속예술단 지도위원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이끌었다.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고, 197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예총 회장, 국립무용단 단장 등을 역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무용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1998년에 고향 안성에 '강선영무용단'을 창단하고, 2013년에 춤 인생 80년을 기념하는 특별 공연 '명가 강선영 불멸의 춤'이 개최하고, 2016년 향년 91세 노환으로 별세했다.
 
명인은 100여 개 나라를 방문하여 우리 전통춤을 1,000여 회가 넘게 공연하며 제자들에게 “나는 옛날부터 예술가들이 무대에서 춤추다가 죽고 싶다는 말을 가장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무대가 아니더라도 내 기력이 쇠약하여 기진할 때까지 나는 항상 현장에 서 있고 싶다.”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신인 무용수를 발굴하기 위해 매년 ‘동아무용콩코르’를 개최하고 있는데, 2021년 제51회 대회에는 ‘강선영상’을 신설해 한국무용 전통부문 일반부 남자 및 여자 금상 수상자 중 본선 채점표 상 고득점자 1인에게 상금 150만 원 외에 부상을 별도로 수여하였다.
 
강선영 명인은 이현자, 이명자, 양성옥, 김근희, 박진희, 고선아, 이화숙, 임성옥, 유정숙, 양승미, 최영숙 등 많은 제자를 키웠다. 사단법인 강선영춤전승원은 스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24년 4월 1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明嘉 강선영 불멸의 춤〉 공연을 개최하였다.
 
강선영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 ‘불멸의 춤’(사진:강선영춤전승원)
 
태평무를 정의를 살펴보려고 국악사전을 펼쳐보니 “태평무는 나라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기원하는 재인(才人) 계통의 춤으로, 경기무악 장단과 발놀음의 기교가 돋보이는 춤이다. 태평무는 일제강점기 서울과 경기지역의 재인들이 집대성(集大成)하여 연행한 전통춤이다. 조선왕조 왕, 왕비, 문무백관의 배역을 설정하여 격조 있고 장중하며, 재액을 물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기무악(京畿巫樂)의 다채로운 장단을 활용한 발 놀음의 기교가 돋보이는 춤이다. 김인호(金仁浩, 1850?~ 1930?)와 한성준(韓成俊, 1874- 1941) 계통의 춤이 전승되고 가무악희(歌舞樂戲)가 융합된 줄타기, 탈놀이 등의 연행 원리가 녹아 있어 입체적이고 기법이 명확하다.”라고 풀이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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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