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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 - 태평무
우리나라 춤 중에서 가장 기교적인 발짓춤으로 장단의 변화에 따라 겹걸음, 잔걸음, 무릎 들어 걷기, 뒤꿈치 찍어 들기 등 발 디딤새의 기교가 현란한 춤이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된 태평무(太平舞)이다. 이 춤은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춤으로 발 디딤 하나에도 노련함이 필요하며 기교적인 발놀림이 이 춤의 진정한 멋이다. 춤 동작 잔걸음은 허벅지를 붙인 상태에서 보복을 좁고 빠르게 걷는 걸음으로 백조가 물속에서 쉴 새 없이 헤엄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것처럼 춤꾼이 치맛자락 속에서 발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조급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름답게 춤사위를 보여준다. 무릎 들어 걷기는 무릎을 들면서 골반을 45도 정도 밖으로 열면서 한 발씩 뒤로 걷는다. 이때 양팔로 치맛자락을 살짝 집어 들어 상체와 하체를 같이 돌린다. 빠른 발놀림의 잔걸음으로 경쾌하게 흥을 이끌어가며, 무릎 들어 걷기로 우아하고 절제된 미를 보여준다.
〈불계공졸의 춤〉 ‘강선영류 태평무’(사진:궁인창)
지난해 2025년 12월 20일 오후 4시에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불계공졸의 춤’ 이순림 명인의 ‘강선영류 태평무’를 감상하고 집에 돌아와 10여 일 동안 국악한마당, 대학무용축제, 국가유산진흥원, 서울시무용단, 국립무용단, 2025 한예종전통예술원 신입생발표회 등 다양한 태평무 동영상을 시청하면서 춤의 손동작, 장단, 발디딤, 우아한 미소, 악기 소리에 정말 반했다.
고대의 태평무가 순박하고 혼자 춤을 춘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현대의 태평무는 화려하고 놀랄 정도로 많은 무용수가 등장해 태평성대를 찬양하고 춤이 세련되고 자신이 넘쳤다. 태평무를 감상할 때 화려한 색상의 궁중의상 무복이 아름다워 머리에 올린 가채와 장식구를 자세히 관찰한다.
궁중의상은 시기마다 조금씩 변화하는데, 공연에서 의상의 속바지와 속치마, 녹색 당의, 금박, 원삼, 활옷, 말(버선), 석(신), 손에 끼는 오방색 한삼, 족두리, 장식구, 패옥, 삼작(三作) 노리개의 산호, 비취, 호박, 꽂이, 비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조선왕조 왕과 왕비 복식(사진:국가유산청)
명나라 태조(洪武帝, 朱元璋) 고황제(高皇帝)는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호응해 1370년경 고려에 명나라 궁중복식을 전했다. 이는 원나라의 풍속을 조속히 폐지해 몽골식 복장을 없애려는 정치적인 발상으로 왕에게 면복과 원유관복을, 왕비에게는 적의를 보냈다. 이후 명나라의 의제(衣制)을 수용하였다.
평소 국립고궁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여 전시물을 관람하여 내용을 잘 알지만, 왕이 대례복을 입을 때 손에 쥐는 서옥(瑞玉) 대규(大圭)가 ‘천자로부터 받은 땅을 재고 다스린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규(圭)는 한자 토(土)를 두 번 겹친 글자다.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 이민주 연구원은 2014년에 왕실 복식 연구서를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이란 책으로 발간했다. 이 박사는 복식문화 연구 논문을 통해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가 입는 옷을 상세히 소개했다.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조선 왕의 공적인 옷은 세 가지로 위식이나 큰제사 또는 혼례 때는 최고 예복인 면복(冕服)을 입고 신하들을 돌볼 때는 원유관복(遠遊冠服), 정사를 볼 때는 시사복(視事服)을 입었다. 면복은 왕의 정복으로 검은색에 일, 월, 성신, 산, 용, 화충 등 9개의 무늬를 새겨 장복(章服: 무늬가 있는 검은 옷)이라고도 했다. 왕은 면복을 입을 때는 9류(旒, 구슬 꿴 술)가 달린 면류관(冕旒冠)을 썼다. 무게만 2kg인 면류관은 류를 달아 눈 밝음을 가리려 신중하고 악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청광충(靑纊充耳: 귀막이 구슬)을 달아 귀 밝음을 가렸다. 이는 임금 스스로 신중하게 처신하며 간신들의 간사한 말이나 아첨, 나쁜 말을 듣지 않도록 귀를 막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1403년 명나라 영락제가 사신 황엄(黃儼)을 시켜 조선의 태종에게 면복과 왕비의 복식 적의(翟衣)를 하사했다. 이때 받은 복식이 9류면, 9장복으로 속옷부터 겉옷까지 총 8단계의 옷을 입고 장신구를 매달았다. 면복의 용 무늬는 왕을 상징하고 산은 하늘로 올라가는 뜻이며, 이를 통해 최고 권력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꿩을 본뜬 화충 무늬는 덕이 있는 왕을 상징한다. 원유관복은 신하의 하례를 받을 때, 출궁할 때, 중궁과 세자빈을 책봉할 때, 향과 축문을 전할 때 착용한다. 시사복(視事服)은 용무늬가 그려진 곤룡포(袞龍袍)를 입었다. 시사복을 입을 때는 모자 익선관과 허리띠 옥대,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을 갖췄다.
영친왕비 적의(사진;국립고궁박물관)
왕비의 적의(翟衣)에는 140~160마리의 꿩을 수놓았다. 적의를 입을 때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체로 머리를 장식했다. 가체의 높이는 25cm나 돼 키가 더 헌칠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비녀는 길이가 32cm이고, 가체가 무거워 궁녀의 부축을 받아야 일어섰다. 왕비는 여행을 떠날 때는 노의(露衣)와 장삼(長衫), 원삼(圓衫) 등을 입었고 왕비는 가례 때 저고리 안에 받쳐 입는 속옷 삼아부터 가장 겉에 걸치는 적의까지 무려 12단계의 의상을 입었다.
이러한 왕실 복식은 단순히 입기 위한 물질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어 가는 문화적 산물로 그림 하나, 자수 한 점에도 조상들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소중한 보물이다.
조선왕조의 태평무는 한국 근대 전통춤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성준(韓成俊, 1874~1941)과 용인 출신으로 궁중 출입을 많이 한 김인호(金仁浩, 김복돌) 명인이 창안한 춤이다. 판소리 명창 이날치(1820~1892) 선생의 제자인 김인호는 화성재인청 출신으로 순종 앞에서 두꺼비 춤과 땅재주를 선보였다, 재인청의 예인들은 나례(儺禮)를 비롯 청나라 사신의 영접 행사, 과거급제 축하연인 문희연(聞喜宴), 정월 대보름 풍년 기원행사, 지방의 감사 부임 환영연 등 각종 관의 행사에 동원되어 다양한 종류의 공연예술을 담당하고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한양에 올라와 궁중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 제자 이동안(1906~1995)을 잘 가르쳤다. 14세 이동안이 스승 김인호를 만났을 때 나이가 이미 7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김인호 명인은 광무대 무대(1907~1931) 시절에 16세 이동안에게 우리 전통춤과 장단을 10년간에 걸쳐 모두 물려주었다. 김인호는 궁중정재와 승무, 검무, 입무, 살풀이춤, 태평무, 진죄춤, 성진무, 한량무, 승전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학무, 화랑무, 신로심불노, 회극무, 장고무, 기본무, 도살풀이, 남방무, 선인무, 팔박무, 장고무, 노장무, 소고무, 희극무, 아전무, 바라무, 나비춤, 장검무, 입춤 신선무, 오봉산무, 하인무, 춘앵무, 화선무, 포구락무, 떤화대무 등 많은 춤을 전수했다. 춤을 전수받은 이동안은 제자로 정경파를 키웠다. 춤꾼 김인호에 관련된 자료가 별로 없어 연구 논문이 적지만, 반드시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전통연희의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한성준은 충남 홍성골 홍주골(고도면 남하도리)의 가난한 농부 한천오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조는 청주한씨로 양반이었으나,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신분이 낮아졌다. 어린 한성준은 6~7세 때 조선 춤의 명인인 외할아버지 백운채(白雲彩)로부터 춤추기와 북 치기를 배워 8세에 북패를 잡았다. 9세가 되어서 줄을 타고 재주를 부렸고 14세 때(1887년)부터 3년간 홍성에서 광대로 유명한 서학조(徐學祖)에게 본격적으로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웠다.
한성준 명인(사진:궁인창)
2021년 10월에 공주시가 발행한 〈충청권 국악자원 복원 및 연구 용역〉 결과보고서에 의하면 서학조(徐學祖) 명인은 인천주전국 놀이에서 3시간 동안 춤을 춘 기록이 있고 당시 염불춤, 영산회상춤, 타령춤, 굿거리, 신선무, 화랑무, 학춤, 검무, 상자무 등을 춘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성준은 덕산골 수덕산의 박순조(朴順祚) 문하에서 20세가 넘도록 춤과 장단을 공부하였다. 21세(1894)가 되던 해에 동학혁명에 참여하였으나 부친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22세부터는 굿중패, 남사당의 놀이패, 당굿, 모래굿패 등에 참가하여 홍성과 서산, 태안에서 연행하는 각종 굿과 민속예능을 접하며 무속춤을 접했다. 1898년 두 번째 아내와 사별한 후 10여 년간 유랑생활을 하며 전국의 민속예능과 권번의 기방 예술을 접했다. 이 방랑 시기에 자신의 기량과 예술세계가 더욱 성장했다.
기린도와 탐화 노리개(사진:청와대)
1월 초 중국을 국빈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머리에 뿔이 나고 오색 빛깔 털을 지닌 전설 속의 동물인 기린(麒麟)과 천도복숭아, 모란꽃을 한 폭에 담은 그림을 선물했다. 민화전통문화재 제2호인 엄재권 작가의 작품 그림에 표현된 네 마리 기린 가족은 ‘자손 번창 기원’을 의미한다. 고대의 기린은 덕성이 있는 인자한 동물(仁獸)로, 태평성대를 상징하기 때문에 황제의 거처에 기린 조각이 많았다. 천도복숭아는 장수와 불로를 상징하고, 모란꽃은 부귀와 영화(榮華)를 상징한다. 펑리위안 여사 선물로는 58년간 칠보(七寶) 작업을 한 클로이 수(Cloi soo) 이수경 작가의 칠보 공예 작품과 화장품을 선물했다. 전통적으로 봄을 상징하는 나비는 입춘대길과 소원성취의 마음을 상징하며 꽃과 진주는 번영과 부귀의 의미를 담겨 있다. 칠보의 색상은 천년의 세월 변치 않는다고 한다. 작가는 꽃을 찾아 날갯짓하는 나비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화사한 색채로 섬세하게 제작했다.
이번 국빈방문 중에 특이한 문화행사가 있었다. 문화보국(文化報國)을 실천한 간송 전형필(1905~1962) 선생은 1933년 일본에서 경매를 통해 문화재 구입해 1938년 건물을 지으며 보화각 입구에 세워두었다. 이번 방문에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87년간 간송미술관을 지켰던 청나라 때 제작된 석사자 한 쌍(높이 1.9m, 무게 1.25톤)을 중국 국가문물국에 기증하기로 협약문서에 서명했다. 올해는 간송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간송 선생은 생전에 “사자상이 청나라 유물이니 언제가 고향 중국으로 보내주는 게 더 좋겠다.”라는 뜻을 밝혀 국립중앙박물관이 위임을 받아 사진첩을 전달하고 기증 업무를 대행했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사자상(사진: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태평무를 출 때 무복(舞服)이 간소하게 줄었다고 해도 옷은 상당히 무겁다. 우아한 웃음을 짓고 장단의 변화에 따라 현란한 춤을 춘다는 것은 대단한 춤 솜씨이다. 태평무를 구경하면서 한·중 두 나라의 번영과 문화협력과 우호증진이 강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태평성대를 기원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