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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3:44 (2026.02.08. 13:35)

두 미군 장교, 고아 1천명을 제주 이송 계획 세워... 오키나와 발진 수송기 태워 가까스로 새 안식처 수용

 
유모차 공수작전(Operation Kiddy Car)
유엔군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했을 때 서울에 온 미 제5공군 군목 러셀 L. 블레이즈델 중령(Russell L. Blaisdell, 1910~2007)은 길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보고는 외면할 수 없어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이기붕 서울 시장을 찾아가 초등학교를 빌린 뒤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데려와 돌보았다.
유모차 공수작전(Operation Kiddy Car)
 
 
유엔군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했을 때 서울에 온 미 제5공군 군목 러셀 L. 블레이즈델 중령(Russell L. Blaisdell, 1910~2007)은 길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보고는 외면할 수 없어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이기붕 서울 시장을 찾아가 초등학교를 빌린 뒤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데려와 돌보았다.
 
12월 들어 공산군이 다시 서울을 공격할 조짐이 나타나자, 블레이즈델 군목은 딘 헤스 소령에게 고아원에 더 이상 아이들을 보내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그는 집 없는 소년 소녀들을 위한 새로운 안식처를 물색하려고 할 때 딘 헤스 소령이 한국 공군 조종사 가족들이 멀리 남쪽으로 피난한 제주도를 떠올리고 군목에게 이 섬을 제안했다. 헤스 소령은 “섬에 있는 버려진 농업학교에 많은 고아들을 임시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과 딘 헤스 소령 두 사람은 서둘러 고아들을 먼 섬으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지만, 확실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고심했다. 이때 블레이즈델 중령에게 안전한 배편을 마련해 주겠다는 미군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 트럭 한 대에 아이들을 실어 10여 차례씩이나 번갈아 태워 3일 만에 인천항에 모두 도착했다. 그러나 약속했던 한국 해군 LST는 100명도 채 탈 수 없는 낡고 작은 배로 아이들을 모두 제주로 데려다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부두에서 떨다가 8명이 독감과 백일해로 숨졌다.
 
절망에 빠진 블레이즈델 중령은 서울에서 미 제5공군 작전참모부 부관 터너 C. 로저스(Turner C. Rogers) 대령을 우연히 만나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로저스 대령은 마침 미국에서 출발해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지에 도착한 C-54 수송기 16대를 보낼 테니 이튿날 아침 8시까지 김포기지로 아이들을 데려오면 미군 수송기에 태워 제주도까지 보내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아이들을 모두 김포로 이동시키기는 쉽지가 않았다. 공군 수송부에 차량을 요청했으나 보내줄 차량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송기를 타려면 어떻게든지 김포까지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Operation Kiddy Car(사진:미국대사관)
 
1950년 12월 20일 새벽에 미군 해병대 트럭 14대가 시멘트 하역 작업을 위해 인천항에 나타났다. 군목은 해병대 트럭을 이용하려면 사전에 엄격한 신청 및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것을 미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상부의 명령이다.”라고 둘러대며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트럭에 아이들을 태워 김포공항까지 옮겨라.”라고 명령했다. 이에 해병대 트럭은 인천항 부두에서 미 공군 김포기지까지 여러 차례 오가며 약 1천 명의 전쟁고아를 이동시켰다.
 
12월 20일 아침 8시 트럭을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아이들과 군인들은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수송기가 오지 않아 절망에 빠져 조금씩 지쳐갔다. 2시간이나 넘겼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멀리서 C-54 수송기 16대 굉음이 하늘을 진동했다. 헤스 소령의 긴급 호소에 미 제5공군 파트리지(General Earle E. Partridge, 1900~1990, 4성 장군) 사령관이 바로 응답하여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C-54 스카이마스터(Skymasters) 15대를 급파했다. 수송기에서 내린 의사와 간호사들은 아이들을 치료해 빠르게 수송기에 태웠다.
 
왼쪽의 블레이즈델 중령과 딘 헤스 소령(사진:미국대사관)
 
전쟁의 포화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고아들은 공군 수송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이때 종군기자들은 기사를 작성하며 이 작전을 Operation Kiddy Car(유모차 공수작전)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이 제주에 도착하자 황온순 여사가 운영하는 한국보육원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아이들을 도왔다. 전쟁고아 후송 작전은 미국 국립공군박물관에 소개가 되었다.
 
군목 블레이즈델 중령과 딘 헤스 소령(사진:미국대사관)
 
전쟁고아 수송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해병대 트럭 무단 사용 건으로 군목 블레이즈델 중령은 군사재판에 회부가 되었다. 해병대 트럭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직권을 남용했다는 혐의였다. 재판장이 군법을 위반한 이유를 묻자 군목은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내 임무가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놓아두는 것이라면 곧바로 전역하겠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재판관은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참작해 군목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군목 블레이즈델 중령은 1951년 한국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 공군은 한국 공군 장교들에게 작전 임무를 이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5월 29일 딘 헤스 소령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한국 공군 조종사들은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가 소지했던 검을 헤스 소령에게 선물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제주 한국보육원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딘 헤스 소령(사진:공군)
 
딘 헤스 소령이 대구 공군기지로 전입하여 1일 3회 이상 출격하여 250여 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지만, 한 번도 다치지 않았다. 헤스 소령이 야간에 단독으로 출동했다 기지로 복귀하는데, 밑에 있는 활주로가 보이지 않아 착륙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 연료도 떨어져 잘못하면 인근 야산에 추락할 아찔한 상황이었다. 비행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최원문 정비기장은 항공기가 활주로 주변을 계속 맴도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다는 느낌에 활주로를 확인했다. 착륙 보조등 불빛이 없었다.
 
정비기장은 지상요원들에게 넝마, 담요 등 불에 잘 타는 물건들을 활주로 주변에 모아 놓고 항공유를 부어 등불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이 등불 덕분에 딘 헤스 소령은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했다. 조종사는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지상요원들에게 감사하다고 경례를 하였다. 활주로 착륙 보조등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다른 부대가 발전기를 가져가서 사용하고 제때 가져오지 않아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자기 임무를 다 마친 딘 헤스 소령은 1951년 6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딘 헤스 소령은 오하이오에서 휴가를 보낸 후, 텍사스 주재 제5공군 정보 장교로 복무를 시작했지만, 이곳에서도 가족들과 제주도 시설에 대한 지원과 서울에 새롭게 지어진 고아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계속했다. 그와 아내는 1956년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쓴 자서전 『Battle Hymn』을 쓰고 이를 바탕으로 록 허드슨(Hudson)과 안나 카피쉬가 주연한 1957년 영화에서 헤스 역을 맡은 동명의 영화저작권 수익금 전액 수천 달러를 한국보육원(원장 황온순)에 기부했다.
 
영화 Battle Hymn(사진:아마존)
 
이런 지극정성 봉사 활동으로 그는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전쟁고아를 위한 기금을 만들어 보육시설이 건립되도록 계속 지원했다. 헤스는 영화에서 F-51을 조종했고 기술 고문을 맡았다. 잔혹한 전쟁터에서 빛난 그의 인도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딘 헤스 소령은 1960년 아내와 함께 다섯 살쯤 된 전쟁고아 소녀를 입양하러 한국을 찾았다. 헤스 가족은 어린 소녀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마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녀는 영어를 잘 익혀 전형적인 미국 10대 소녀로 성장했다.
 
딘 헤스 소령 경무대 예방(사진:국가기록원)
 
그는 1961년도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1962년 1월 20일 시상했다. 딘 헤스 소령은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을 교육하고 육성하며 전투가 가능한 군대로 거듭나게 해 대한민국 공군의 대부라고 부른다. 그의 헌신은 오늘날 모든 조종사의 귀감이 되고 있어 1963년 1월 13일 대구 공군기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고향 오하이오주로 돌아온 헤스 소령은 라이트-패터슨 공군 기지에서 복무하다 1969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제대 후 그는 지역 고등학교에서 5년간 교사로 일했다. 그의 비행 헬멧과 한국에서 받은 훈장은 인근 미 공군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딘 헤스 대령은 메리 C. 로렌츠(Mary C. Lorentz, 1941~1996 )와 결혼해 마릴린 헤스(Marilyn Hess), 로렌스 헤스(Lawrence Hess), 에드워드 앨런 헤스(Edward Alan Hess), 로널드 헤스(Ronald Hess) 등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인은 1996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 딘 헤스 대령은 2015년 3월 2일 미국 오하이오주 자택에서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국방부는 고인의 장례식에 주미 국방무관인 신경수 육군 소장과 주미 공군무관인 김창훈 대령 등 한국 조문단을 파견해 신 소장이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의 조사를 대독하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딘 헤스 대령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헤스 대령이 F-51 전투기에 부착한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은 대한민국 조종사 모두에게 필승투혼의 정신으로 가슴 깊이 남아 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미국 딘 헤스 대령 장레식(사진:국방부)
 
대한민국 공군은 딘 헤스 대령 서거 2주기를 맞아 2017년 3월 9일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항공우주박물관 야외항공기전시장에 딘 헤스(Dean E. Hess) 대령의 공적기념비를 세웠다. 제막식에는 딘 헤스 대령의 장남 레리 헤스, 정경두 공군참모총장, 딘 헤스 대령과 함께 출격했던 김두만(金斗萬, 1927~ ) 전 공군참모총장, 이강화(1926~2018) 예비역 준장 등 한국전 참전 조종사, 토마스 버거슨 미7 공군사령관, 후원을 받았던 사람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공적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은 아주 간략하다.
 
 
6·25 전쟁 항공전 영웅
초창기 한국 공군의 대부
전쟁고아의 아버지
 
 
대한민국 공군은 제주도보훈청에 “공적기념비를 현충 시설로 지정해 줄 것.”을 공문으로 요청하여 제주도보훈청(청장 황승임)은 2017년 12월 12일 현충시설 제45-2-52호로 지정했다.
 
딘 헤스 대령의 공적기념비(사진:공군)
 
2024년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이하여 한국전쟁 당시 한국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구출한 군목 블레이즈델 대령의 공로와 선행을 인정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블레이즈델 대령은 1951년 한국을 떠나 일본과 리비아에서 근무하다 1964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며 2001년 방한해 황온순 여사와 고아들과 재회했다. 2007년에 별세하여 네바다주 볼더시티 재향군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9년 광주 충현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2017년 6월 22일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 추모식 및 국제학술포럼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되었다. 군목 블레이즈델 대령이 74년 만에 훈장을 받은 것은 광주광역시 사회복지법인 충현원 원장 유혜량 목사의 노력 때문이다.
 
딘 헤스 대령 10주기 추모행사(사진:제주도)
 
2025년 5월 22일 딘 헤스 대령의 유족 로렌스, 에드워드, 로날드 헤스 씨는 제주도에서 열린 10주기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5월 23일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은 유족을 환영하며, “딘 헤스 대령의 공로와 대한민국 아이들을 위한 헌신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의 인류애와 희생정신을 전쟁기념관 어린이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에 반영하여 미래세대에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용산 전쟁기념관 방문(사진:전쟁기념사업회)
 
에드워드 앨런 헤스는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셨고,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일생을 헌신하셨다.”라고 답했다. 유족은 전쟁기념관 1층에 있는 ‘이병형홀’에서 개최된 '2025년 한국 공군 초대 고문관 딘 헤스 대령을 기리는 토크콘서트'에 참석했다.
 
한국 공군 초대 고문관 딘 헤스 대령 추모 토크콘서트(사진:전쟁기념사업회)
 
이병형(李秉衡, 1926~2003) 장군은 함남 북청 출신으로 육사 4기로 임관해 한국전쟁에 참전해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130회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전술가, 군사전략가이다. 그는 보병 1사단장, 5군단장, 1967년에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하여 공군 벌컨포를 국산화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방위산업의 최초 발상을 실천하여 낙하산 국산화, 105mm 야포 개발 등 국방과학연구소(ADD)를 통해 무기 국산화에 주력했다. 합참본부장을 거쳐 제2야전군사령관(중장)을 마치고 전역했다.
 
용산 전쟁기념관(사진:전쟁기념사업회)
 
이병형 장군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전쟁기념관을 건립하고 초대 전쟁기념관 관장을 역임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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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