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지식놀이터
지식자료
지식자료 구독
구독 내역
게시판
게시판
작업요청
최근 작업 현황
지식창고
지식창고 개설 현황
자료실
사용자메뉴얼
about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3:29 (2026.02.08. 13:29)

중공군에 의해 서울 함락직전 전쟁고아 및 직원 1천여명을 공군수송기로 제주도 수송 주역

 
대한민국 공군의 대부 - 딘 헤스 대령
한국전쟁에 참전한 딘 헤스 소령(Dean E. Hess, 1917~2015)은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창설된 미군 바운트 원(Bout One) 부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1950년 12월 중공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서울에 남아있던 950명의 전쟁고아와 80명의 고아원 직원을 공군 수송기로 제주도로 수송한 ‘유모차 공수작전(Operation Kiddy Car)’의 주인공이다. 그는 한국 공군 조종사 24명을 양성하고, 총 250회 전투 출격에 나선 한국전쟁 영웅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대부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대부 - 딘 헤스 대령
 
 
한국전쟁에 참전한 딘 헤스 소령(Dean E. Hess, 1917~2015)은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창설된 미군 바운트 원(Bout One) 부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1950년 12월 중공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서울에 남아있던 950명의 전쟁고아와 80명의 고아원 직원을 공군 수송기로 제주도로 수송한 ‘유모차 공수작전(Operation Kiddy Car)’의 주인공이다. 그는 한국 공군 조종사 24명을 양성하고, 총 250회 전투 출격에 나선 한국전쟁 영웅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대부이다.
 
딘 헤스 소령(사진:《Battle Hymn》)
 
딘 헤스는 오하이오주의 북서부 지역 마리에타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아홉 살 소년 딘 헤스는 1927년 찰스 린드버그의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어린 헤스는 근처 비행장에서 짧은 비행에 필요한 2달러를 벌기 위해 잔디를 깎고 신문을 배달했다. 파이퍼 컵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느끼는 짜릿함에 놀란 그는 착륙 후 항공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곳 목사님이 독실한 16세 소년에게 예배 설교를 맡아 달라고 부탁해 헤스는 설교가 서툴렀지만, 설교를 담당했다. 이후 목회자로서의 길을 걷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하이오주 매리에타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에 가는 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어 주유소에서 일주일 내내 일했다. 동료가 딘을 여동생 메리 로렌츠에게 소개해 두 사람은 금방 사랑에 빠졌다.
 
청년은 마침내 86달러를 모아 메리에타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학은 그에게 놀라운 보너스를 제공했다. 바로 연방 정부 보조 조종사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딘 헤스는 교관의 지도를 받으며 비행장에서 다시 활공할 수 있었다. 딘 헤스는 빚을 갚고 메리 로렌츠와의 미래를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클리블랜드에서 공장 일자리를 구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과 성직자로서의 그의 삶의 사명은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1941년 6월 졸업하고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그리스도교 교단(Christ Church)에서 목사(Pastor)로 임명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헤스는 비행이 널리 흩어져 있던 교회들로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교회들의 신도들은 그를 설교자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임대한 경비행기를 조종하며 오하이오의 교회들을 방문하는 순회 비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하노버 교회 저녁 예배에서 교구민들에게 오랫동안 다시 설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젊은이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입대하는 시기에, 그는 군목으로서의 복무 연기를 받아들일 수 없어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했다.
 
헤스는 앨라배마주 도선에 있는 네이피어 비행장에서 고등 훈련을 수료했고, 그곳에서 장교 임관식 직후 메리와 결혼했다. 그의 타고난 비행 실력 덕분에 그는 네이피어에서 2년 동안 비행 교관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장교들이 그가 안수받은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군목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젊은 조종사 아내들에게 남편이 훈련 중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말해야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이 하와이 진주만 오아후 섬의 미국 해군기지를 공격해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헤스는 위험한 임무에 지원해 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 제9공군에 배치되어 D-Day 이후 독일 국방군을 독일로 몰아넣는 미 육군 사단들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는 생나지에에 있는 비행대대 비행선이 자신이 한 번도 조종해 본 적이 없는 P-47D 전투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는 경험이 많은 조종사들에게 질문하고, 견고하고 중무장한 썬더볼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찾아본 끝에, 추가 훈련을 위해 영국으로 송환하려는 것을 막아냈다.
 
곧 헤스는 독일 지상군을 공격하는 노련한 조종사 대열에 합류해 P-47 썬더볼트를 조종하며 총 63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한 번은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 도시를 폭격하다 합당한 목표물을 찾지 못해 선회했다. 그러다 기차 2대를 발견하고 폭탄 2발을 투여했다, 그런데 폭탄 1발이 기차를 지나 인근에 있는 7층 건물을 맞춰 크게 폭발음이 났다. 몇 주가 지나서 딘 헤스는 짚차를 타고 점령된 도시를 둘러보던 중 폭탄이 폭발한 7층 건물이 ‘고아원’이란 사실을 알게 놀랐다. 건물에 있던 많은 고아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했다.
 
그는 무너진 건물을 올려다보며 “폭탄이 떨어진 검은 구멍에서 눈을 떼려 애썼지만, 그 검은 구멍은 마치 악의에 찬 눈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다. 목사 시절에 그는 교인들에게 살인은 큰 죄라고 말했는데, 자신이 그 일에 매우 능숙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정규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헤스는 사병들을 위한 예배를 보고 나중에는 동료 장교들을 위한 예배를 진행해 어떤 병사들은 그를 ‘비행 목사’라고 불렀다.
 
1945년 봄, 연합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자 헤스는 태평양으로의 재배치를 기다리기 위해 수훈 비행 십자훈장을 받고 오하이오로 돌아갔다. 일본제국의 항복으로 그는 민간인으로 돌아갈 수 있어 공부를 계속하려고 가족과 함께 아테네에 있는 오하이오 대학교로 유학을 해 1947년 6월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로 옮겨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는데, 지도교수는 헤스에게 국가적 지도자를 한 명 골라 그에 대한 논문을 하나 쓰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이에 헤스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Korea‘를 선택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골랐다. 이때만 해도 헤스가 이승만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딘 헤스는 1948년 7월 현역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1950년 봄, 30대 중반 나이에 소령 계급을 받아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가족과 작별하고 일본으로 파병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딘 헤스 소령은 미 공군이 대한민국 공군의 F-51 전투기 훈련과 조종사 양성을 위해 창설한 바우트 원 프로젝트(Bout One Project)의 지휘관으로 1950년 7월 2일 한국 파견 명령을 받았다. 당시 대한민국 공군에는 북한의 전투기와 교전할 만한 비행기가 없었다. 조종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낡은 복엽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 지상에서 수류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전부였다.
 
F-51 무스탕 제18번기(사진:공군)
 
작전명 Bout One에 따라 미 공군은 대한민국 공군에 공군 조종 교관과 F-51 머스탱 10대를 제공했다. 7월 4일 일본 기지에서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장비를 빌리고 보급품을 실어 C-47을 타고 대구 기지에 내렸다. 딘 헤스 소령의 비행기 F-51D 18호기 머스탱이 기지에 도착하고 나서 딘 헤스는 정비기장 최원문 예비역 대령에게 종이쪽지 ‘I Fly By Faith’를 건네주며 번역을 부탁하고 엔진 덮개 좌측 표면에 써달라고 요청해 정비 기장은 영등포 간판집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지로 불러 작업했다.
 
제18번기 동체의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글귀는 헤스 소령의 좌우명으로 “신념으로 하늘을 난다,”라는 라틴어 문구 'Per Fidem Volo(영문: By Faith I Fly, I Fly By Faith)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딘 헤스 소령이 귀국한 후에 F-51D 18호기는 김두만 대위가 조종했다. 현재 이 문구는 대한민국 공군의 모토가 되었고, 용산 전쟁기념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최신 전투기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나라 공군조종사는 딘 헤스 소령의 지휘를 받던 제6146 비행대의 조종사들로부터 F-51 머스탱 조종술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을 받은 조종사 중 24명은 작전에 참여할 수 있어 전투 비행에 나섰다. 한국 공군 훈련 부대에 자원한 10명의 미국인 조종사 장교 중 7명이 한국전쟁 첫해에 전사했다.
 
조종사 양성 교육하는 딘 헤스 소령(사진:공군)
 
미국 교관들은 단순히 고문 역할만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헤스 소령은 영어를 할 수 없는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습에 동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해 상부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독일 고아원 건물 폭발 사건은 그의 기억 속에서 그를 항상 괴롭혔다.
 
헤스가 대구에 도착한 지 불과 7일 후, 한 망루에서 북한군의 대규모 호송대가 육군 병력이 점유하고 있는 산길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항공 지원이 시급히 필요했고, 주일 미 공군부대는 혹독한 기상 조건을 뚫고 제때 지원에 나설 수 없었다.
 
폭우가 넓은 지역을 적시자, 헤스와 자원병 팀버레이크 중위는 폭탄, 로켓, 기관총탄을 실은 F-51을 타고 이륙했다. 그들은 곧 좁은 산길을 따라 미 제25보병사단을 파괴하려는 북한군 기갑사단을 발견했다. 헤스는 팀버레이크 중위에게 호송대 후방을 공격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은 선두 차량을 폭격하여 교통을 마비시켰다. 헤스는 "폭탄 구덩이를 만들고 양 끝에 있는 차량을 파괴하여 적을 제압했다.
 
날씨가 좋아지자 조종사들은 원을 그리며 지원군을 기다렸다. 한국군이 대구에서 도착하고, 이어서 일본에서 공군 F-80, F-82, B-26이 도착한 후에야 두 조종사는 대구로 돌아와 호송대에 대한 두 차례의 추가 공격을 위해 연료를 보급하고 재장전했다. 헤스 소령이 기지로 향할 무렵, 호송대는 연기가 자욱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공군은 “트럭 117대, T-34 전차 38대, 반궤도차 7대가 파괴되고 수많은 적군이 전사했다.”라고 보고했다. 제5공군 얼 E. 파트리지 사령관은 이 작전을 "전쟁의 전환점"이라고 묘사했다.
 
적군이 한반도를 따라 계속 진격해 오자, 헤스의 공군부대는 부산 방어선이 좁아지는 진해로 이동했다. 헤스와 동료들은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헤스 소령은 하루에 무려 여섯 대의 F-51을 조종하여 침략군에게 기총소사와 폭격을 가한 후, 새로 무장한 전투기를 위해 기지로 복귀했다. 헤스는 단독 작전으로 고립된 18명의 미군 정찰대가 아군 진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총을 난사하며 수차례 급강하하며 병사들이 안전하게 싸울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이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헤스가 남쪽으로 전쟁 지역을 향해 이동하는 공산군을 조준하던 중, 연락 조종사가 주요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한 무리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안개가 낀 날씨 때문에 헤스는 그들이 적군이라는 것을 확인받았다. 시속 300마일(약 480km) 이상의 속도로 급강하하며, 그는 짧은 사격을 한 번 한 후 길가 도랑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여성과 아이들을 발견했다. “저들은 피난민이다.”라고 조종사에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 대한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지만, 너무 늦었다. 이때 기억은 이후 한국전쟁에서 전쟁고아와 아이들을 구하는 동기로 작용했다.
 
F-51 전투기 탑승한 딘 헤스 소령(사진:공군)
 
1950년 9월, 유엔군은 주도권을 되찾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중국 국경으로 북한군을 추격했다. 한국에서 전세가 역전되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국의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언하고, 군인들에게 크리스마스에는 귀국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중국군은 1950년 10월 19일 국경을 넘어 11월에 파괴적인 공습을 감행하며 공격해 왔다. 딘 헤스 소령은 국경 근처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기습 작전을 지휘하여 30분 만에 침공 차량 40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공허한 승리였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사진:재한유엔기념공원)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12만 명의 대병력이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에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약 2주간 동안 유엔군 부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 1만 5천여 명의 해병대원들은 영하 30도 이하의 혹한 속에서 군 병력과 장비 손실을 최소화하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126km를 철수하며 치열하게 교전했다.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막대한 전투 손실을 당해 군사작전이 불가능하여 3개월에 걸쳐 부대 정비하러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사진:1st Marine Division)
 
영하 30도 이하의 살인적인 추위와 폭설은 유엔군의 최신 장비를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많은 군인이 동상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유담리, 하가요리, 고토리를 잇는 도로를 따라 험난한 퇴각로를 개척하며 밤마다 중공군과 교전하며 중공군을 물리쳤다. 당시 중공군은 야간에 나팔과 피리를 불며 인해전술을 펼쳤지만, 유엔군 참전 군인들은 극심한 심리적 공포 속에서 어려움을 잘 이겨냈다. 유엔군은 38도선 부근으로 후퇴하여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급변하는 전선은 민간인들이 탈출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폐허 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맸다. 헤스 소령의 부대를 포함한 연합군 부대는 누더기 옷을 입은 전쟁고아들에게 음식과 생활용품을 나눠주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