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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장군과 제주 송당목장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장군의 우정은 장군이 군에서 전역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밴 플리트 장군은 고향인 플로리다에서 목장을 경영하다 한국의 제주도가 가축을 키우키에 적당하다고 생각되어 이 대통령에게 제주도 목장 건설을 제안했다. 1954년 12월 1일 이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제주도에 육우 생산을 위한 국립목장 설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농림부 축정국장 명재억(明在億)이 미국 CAC(민간원조사령부) 직원 3명과 함께 구좌읍 송당리, 표선면 녹산장터, 산천단 일대를 답사하였다.
길성운 제주도지사(사진:제주특별자치도)
길성운 제주도지사는 미국 CAC 조사단 일행을 안내하면서 “제주도는 천혜의 축산지역으로서 앞으로 정부의 지원만 있다면 얼마든지 축산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입지를 갖추고 있다.”라고 말했다. 제주축산 발전에 필요한 도립종축장 설치, 공동목장의 시설확대, 도축장 수리용 시멘트 지원, 제주도 가축시험소 정비강화, 진드기 구제사업, 국립종양장 설치 등 12개 항으로 된 건의문을 농림부 국장에게 전달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 원조 한미협정서 체결(사진:정부기록사진집)
밴 플리트 장군은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내한했다. 그는 매년 한국을 1~2회 방한하여 한국에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미국과 한국은 1955년 5월 31일에 한미협정서를 체결했다. 동년 9월 23일에 밴 플리트는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의 명예 이사장 자격으로 내한하여 육사 졸업식에 참석해 생도들을 축하했다. 동영상은 대한뉴스 제67호에 있다.
제주도 민정 시찰(사진:정부기록사진집, 1956.5.23)
이 대통령은 1956년 5월 23일 한·미재단 밴 플리트 이사장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하여 목장 후보지를 살펴보았다. 이후 농림부는 9월에 송당 민오름 지역을 목장 후보지로 결정했다. 제주도 목장 개발 사업은 불모지로 남아있던 제주도의 개발과 70만 명이 넘던 한국군의 급식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것을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밴 플리트 이사장은 1956년 5월 5일에 내한하여 구호주택 건설 상황 등을 시찰하고 5월 26일에 귀국했다.
1957년 1월 29일에는 제주도 축산개발 1차 년도 사업비 1억 5,000만 환이 국회를 통과했다. 미재단 밴 플리트 이사장은 미국의 수의사 스틴슨을 채용하고, 목장 건설은 육군공병단이 맡아 5개월 만에 7월 12일 300만 평의 국립제주도 송당목장을 만들었다. 밴 플리트 이사장은 1957년 3월 25일에 내한하여 제주도 개발 상황 등을 시찰했다.
그는 플로리다의 우량한 품종의 소를 제주도로 보내 대량 사육하자는 계획을 생각했다. 당시 플로리다의 현지 소 가격은 마리당 100달러 정도지만, 운송비가 300~400달러씩 들어 많은 소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1957년 8월 9일에 육우인 브라만 166두가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직접 수송돼 35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한 뒤 LST 2척에 나눠 성산포항으로 들어와 목장에 방목되었다.
《정부기록사진집》을 보면 1957년 10월 5일에 농림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이 송당목장을 시찰하는 사진이 있다. 송당목장은 1957년 11월 9일 국립제주목장으로 공포되었다. 12월에 제2차, 1958년 9월에 제3차 육우 도입이 있었다. 목장 시설로는 목장도로 15㎞와 목책 45㎞, 축사 105동, 관사 8동, 매설된 수도관만 해도 30리에 달했다.
제주도 송당목장(사진:정부기록사진집, 1957.10.5.)
한국을 사랑하던 밴 플리트 이사장은 1957년에 한미우호 협력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각종 지원을 계속했다. 제주 송당목장이 성숙단계로 진입할 무렵 4·19 혁명으로 목장은 심각한 공격에 직면했다. 장면 총리는 국립제주목장이 외래 목초를 이용한 초지 조성과 개량종 육용우인 브라만종, 면양인 아메리칸 메리노종(American Merino)을 도입했는데, 이를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실책으로 지목하고 폐쇄를 지시했다.
대통령 전용 특호관사(사진:제주특별자치도)
1962년 5월 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논란이 많은 제주도 송당목장 보고서를 사람을 시켜 조사하여 보고서를 읽었다. 보고서에는 안 좋은 내용이 있어 직접 목장을 시찰하려고 밴 플리트 이사장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했다. 송당목장은 국립으로 공무원들이 근무하였다. 목장장은 전 서울대 농업대학 학장이 맡았는데 관리가 아주 부실해 박 의장은 목장을 폐쇄하려다 밴 플리트 이사장의 조언을 듣고 1963년 1월에 민간에 매각되었다.
이후 밴 플리트 이사장은 울산 정유공장 건설을 위해 미국 측의 석유 기업 경영진들과 계속 접촉하여 한국 투자를 권유하고, 그리스 내전 당시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그리스 해운과 조선 분야의 사업가들에게 한국 조선 사업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 한국의 현대와 그리스의 선박왕 스타브로스 리바노스(Stavros Livanos)를 이어 준 가교가 바로 밴 플리트 이사장으로 그런 인연으로 그리스 해운 업체가 한국에 배를 발주하였다.
1965년 한미 수뇌회담 이후 미국은 한국에 1억 5천만 달러라는 큰 규모의 차관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였는데 밴 플리트 이사장의 노력이 일조했다.
현대 정 회장은 영국 바클레이 은행으로부터 4,300만 달러(약 510억 원)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국 은행 측은 현대의 조선 능력과 선박 건조 기술 수준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이에 정 회장은 1971년 9월 바클레이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텀 회장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때 정 회장은 지갑에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이며 한국의 선박 제조 역사를 설명했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있었는데, 산업화가 다른 나라보다 늦어져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이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한국은행권 오백원 지폐와 거북선(사진;궁인창)
이에 롱바텀 회장은 현대건설 등을 직접 둘러본 뒤 추천서를 써서 바클레이 은행에 건넸다. 바클레이 은행이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ECGD는 선박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서를 가지고 오면 차관을 승인하겠다고 통보했다. 정 회장은 선주를 찾아 나섰지만, 선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울산 미포만의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지도, 26만 t 유조선 도면 한 장이 전부였다.
현대중공업의 설립을 추진하던 정 회장은 조선소 부지인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과 설계도면만 가지고 그리스로 건너가 선주들을 만났다. 당시 오나시스의 처남이자 그리스의 주요 선주였던 조지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의 비전을 믿고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 2척을 발주해 ECGD의 승인을 받았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사진;현대중공업)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정 회장은 이날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工期) 내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라는 구상을 선부 및 내빈에게 밝혔다. 2년여 뒤인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애틀렌틱 배런호 명명식, 육영수 여사(사진;현대중공업)
이후 그리스 리바노스 가문은 현대중공업에 총 15척의 유조선을 추가 발주하는 등 한국 조선소와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현대중공업이 세계적인 조선사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미관계 증진을 위해 전력을 다했던 밴 플리트 이사장은 1992년 100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최근 국가기록원은 그이 생애를 다시 조명했다.
미국 워싱턴 D.C 알링턴 국립묘지 밴 플리트 장군 묘
2020년 10월 7일 BTS(방탄소년단, 김남준(RM), 김석진(진), 민윤기(SUGA), 정호석(제이홉), 박지민, 김태형(V), 전정국)가 코리아 소사이어티어로부터 밴 플리트 상을 수상했다. 김남준은 “글로벌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함께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깊은 이해와 연대를 구축해야 합니다.”라고 스피치를 하였다.
BTS Van Fleet Award(사진: BTS)
윤상송이 한국해양대학 학장일 때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국립대학의 통폐합 문제로 해양대학이 한때 존폐 위기에 처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문교 행정을 쇄신할 목적으로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을 종합대학교에 합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부산대학교에 지역 해양대학, 수산대학, 교육대학을 단과 대학으로 추진하려고 구상했다.
5.16 새벽 軍 쿠데타 發生(사진;동아일보)
해기사 출신으로서 평생 해운에 종사한 윤 학장은 한국해양대학을 부산대학교에 흡수시킨다는 것은 해양대학이 지닌 특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생각하고 한국 해운의 미래를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해양대학은 해기사를 국비로 양성하는 곳으로 학생을 모두 기숙사에 수용하고 있다. 해군의 예비사관후보생으로서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해 해양대학을 부산대학교에 흡수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문교부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수립한 정책이라는 점을 들며 난색을 표명했다. 이에 그는 학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직접 방문하여 교육담당자와 면담하며 한국 해운의 미래를 위해 큰 결단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합동회의를 거쳐 한국해양대학의 건의를 수용해 한국해양대학이 생존하여 오늘의 국립한국해양대학교로 발전했다.
국립한국해양대학교 전경(사진:국립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 반도호는 1973년까지 운항하며 생도들의 해외 실습에 활용되었다. 1973년 8월에 발생한 태풍으로 스크루를 정지하고 1974년 2월 15일에는 부두에 정박(Lay-up)하게 했다. 1975년 8월 26일에 3,491톤급의 한바다호가 진수하여 원양 실습 임무를 승계했다.
한국해양대학은 1978년 반도호를 해체하고 수리해 1980년에 동삼동 캠퍼스에 설치하고 기관실습장 겸 박물관으로 보존 활용하고 있다. 실습선 반도호로 시작된 국립한국해양대학교 해외 실습항해는 한국 해양교육의 중요한 이정표로 해기사 양성을 통해 국위 선양을 하고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