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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3:06 (2026.02.08. 13:06)

중공군 38선 이북 밀어내고 육사 재창설 공헌 커... 아들, B-26폭격기 야간 공습 후 귀환 도중 피격

 
대한민국을 사랑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1951년 4월 11일 리지웨이 장군 후임으로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고, 국군 10개 사단을 20개로 증강하고,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의 교육 훈련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해 4년제 육사를 재창설하고 교육사령부, 육군대학 등을 창설했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1951년 4월 11일 리지웨이 장군 후임으로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고, 국군 10개 사단을 20개로 증강하고,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의 교육 훈련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해 4년제 육사를 재창설하고 교육사령부, 육군대학 등을 창설했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사진:국가기록원)
 
밴 플리트 장군의 외아들 제임스 A. 밴 플리트 2세(James Alward Van Fleet Jr. 1925~1952, 26세)는 1948년 6월 미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그리스 내전에 참전했다. 이후 규정상 해외 파견 근무를 안 해도 되지만, 아버지가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숙명적으로 가야 했다. 그는 한국전쟁에 지원해 B-26 전투기 조종사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간략하게 편지를 보냈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사진:위키피디아)
 
 
사랑하는 어머니!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 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부디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시고, 위급한 상황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국가로부터 소집된 저와 함께 행동하는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어머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제임스 올림
 
 
제임스 A. 밴 플리트 2세 중위는 1952년 3월 14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닷새 후 3월 19일 환갑을 맞이한 밴 플리트 장군에게 축하 인사를 드렸다. 그는 생신 잔치에서 아버지와 어깨동무를 한 채 축하 노래를 불러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렸다. 중위는 짧은 만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여 B-26 폭격기 야간 공습작전을 준비했다.
 
밴플리트 사령관과 아들(사진:James Van Fleet)
 
1952년 4월 4일 작전 비행은 4번째 비행으로 첫 단독 투입 비행이었다. 이날 임무는 압록강 남쪽 50마일 지점에 있는 선천군(宣川郡)에 대한 중공군 보급로 정찰과 폭격 임무였다. 미 공군 B-26 폭격기는 4월 4일 자정을 넘어 1시 5분에 승무원 존 맥칼리스터 중위와 기관병 랄프 펠프스 일병과 함께 출격했다. 중공군 보급로를 분쇄하는 교살작전 비행에 성공하고 평양 남쪽 상공을 비행하다 미군 폭격기를 향해 맹렬하게 내뿜는 북한 인민군 대공포에 맞아 북한 지역 순천(해주) 상공에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즉각 조종사 구출 작전에 돌입해 수색 작업을 진행했지만, 생존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오전 10시 30분, 밴 플리트 사령관에게 아들의 실종 소식이 전해졌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병력의 추가 전력 손실을 막기 위해 B-26 폭격기 조종사 구출 작전 및 수색 작업을 바로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실종된 제임스 A. 밴 플리트 2세 중위는 2년 뒤인 1954년 3월 31일 전사자로 공식 판정되어 해당 가족에게 통보되고 대위로 추서되었다. 한국 정부는 1952년 8월 25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고, 미국 정부는 퍼플 하트 훈장을 추서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각국 고위층의 아들들은 아이젠하워 장군, 밴 플리트 장군,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의 아들 샘 워커, 2차대전 전차군단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의 아들 등 이외에도 150명이 훨씬 넘었다. 중국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은 펑더화이 (彭德懷) 중공군 사령관 비서 겸 러시아 통역관으로 28세에 참전하여 평북 창성군에서 미군 비행기 공격으로 사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 존 아이젠하워(1922~2013) 소령은 낙동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준장 예편 후 군역사학자로 활동하며 백악관 안보 비서, 벨기에 대사(1969~1971) 등을 지내며 군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공군작전사령부는 2012년 6월 12일 오산 공군기지에서 한미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한 강운데 제임스 A. 밴 플리트 2세 대위 흉상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제임스 A. 밴 플리트 2세 대위 흉상 제막식(사진:연합뉴스)
 
2020년 9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주최한 ‘한국전쟁 역사’ 온라인 화상 세미나에는 밴 플리트 부자 후손과 인천상륙작전 당시 상륙군을 지휘한 에드워드 알몬드 미국 10군단장, 장진호 전투의 영웅 에드워드 스미스 미국 해병 1사단장, 흥남 철수 작전의 주역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 대령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참석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외손자 조 맥크리스천 주니어는 “외삼촌 제임스 밴 플리트 2세는 북한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다가 6개월 뒤 중국 인민군에 넘겨졌다. 중국은 적군 사령관의 아들을 포로로 잡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제임스 A. 밴 플리트 2세의 군 인식표를 공개 전시했다. 그는 중국에서 다시 옛 소련으로 이송돼 강제수용소인 시베리아 ‘굴락’에 수용됐다. 이것은 미국 육군 정보국 참모차장을 지냈던 자신의 아버지가 직접 확인한 정보이다.”라고 증언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는 어릴 적에 아주 평범했다. 학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 않았고 고등학교도 남보다 1년 늦게 들어갔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해 삼수 끝에 미 육사에 입학했다. 동기생보다 4살이나 많았다. 소령 진급도 늦었고 소령에서 중령으로 승진하기까지 10년도 넘게 걸렸다. 그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항상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리더는 뒤에서 밀지 않는다. 앞에서 이끌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하들을 존중해 의견을 모으고 소통하려고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41년 52살 나이에 처음 장군으로 승진했다. 그해 탁월한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조지 마샬(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 육군참모총장(元帥)은 여러 장군을 유심히 관찰하여 아이젠하워 장군을 1942년 유럽 원정 미군사령관 중장에 임명했다. 당시 경쟁률이 366대 1이었다. 그는 3년 만에 빠른 속도로 승진해 1943년에는 대장이 되고 1944년에 미군 원수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원수(사진:국가기록원)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원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30년에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인 50세에 대장 승진을 했다. 이때 아이젠하워는 무명의 소령이었고 16년 만에 중령 진급을 하였다.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참모였으며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군사고문단장을 맡을 때 아이젠하워는 연설문 담당 부관이었다. 아이젠하워는 4년을 맥아더 밑에서 근무하며 필리핀에서 군사고문단장의 부관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항공기 조종면허를 취득했다. 이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군 전력의 필요성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 중령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하여 군에 승진을 요청해 대령으로 늦게 승진했다. 그는 1941년, 52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되었다. 맥아더가 39세에 장군이 된 것에 비하면 무려 13년이나 늦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위대한 전략가로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시키며 유엔군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했다. 이때 중공군이 개입하여 한국전쟁은 연일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만주 폭격과 대만군의 중국 본토 상륙을 주장하며 미 행정부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에 1945년 8월 원자탄을 일본에 투하하여 일본제국의 항복을 받았던 해리 S. 트루만(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은 소련의 참전과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우려해 고민끝에 참모들의 조언의 따라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원수를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유럽 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영국 육군 총잠모장 앨번브록(Alan Francis Brooke, 1st Viscount Alanbrooke, 1883~1963) 장군이 맡도록 내정되어 있었으나 1943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처칠 수상과의 회동에서 담판에 성공하여 연합군 사령관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였다.
 
영국 육군 총잠모장 앨번브록 장군(사진:위키백과)
 
아이젠하워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1943.12.24 ~ 1945.7.14)은 북아프리카에서는 횃불 작전을, 1944년 6월 6일에는 육해공의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병참 지원 전략은 물론 지형과 조수, 기후 등의 복잡한 변수까지 치밀하게 고려해야 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200만 명의 군인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승리하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부드러운 미소와 단호한 원칙과 타고난 유머 감각과 친밀감으로 여러 나라의 군대를 통합하고 작전을 무리 없이 성공했다. 단기간에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매력과 위기가 다가오고 상황이 급변하면 그 상황을 단순화시켜 빠르게 정리하는 초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사진:위키백과)
 
아이젠하워는 1945년 제16대 육군참모총장 (1945.11.19~1948.2.6)을 지내고 1948년에는 제13대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1948.6.7~1953.1.19)을 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다시 군복을 입었다. 그는 자신의 군 경험을 토대로 전략을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조언했다. 1951년에는 초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1951.4.2~1952.5.30)을 역임하였다. 이후 공화당 후보가 되어 ‘당장 한국으로 가겠다!’라는 공약을 내걸어 11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환영 꽃전차(사진:국가기록원)
 
미국 제34대 대통령 당선자는 자신의 선거운동 기간 내걸었던 공약을 실천하려고 극비리에 수행 기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있는 미국 장군이 방한 소식을 알려주어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를 환영하는 꽃 전차를 서울 거리에서 운행하게 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1952년 12월 2일 저녁 7시 57분, 영하 12도의 찬 바람이 부는 수원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당선자는 뉴욕을 출발하여 하와이, 미드웨이, 웨이크, 유황도 등을 거쳐 17,300㎞를 날아온 것이다. 갈색 털 코트 차림의 당선자는 브래들리 합참의장, 국방장관 내정자 윌슨(Charles E. Willson) 등과 함께 얼어붙은 시골길을 달려 서울 대학로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 자리에 주둔한 미 8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일본 도쿄에서 온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밴플리트 주한 미 8군 사령관의 영접을 받은 당선자는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시카고 한 호텔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아버지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절대 적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말라. 만약 네가 잡히면 나는 대통령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라고 무겁게 말을 했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미 3사단 일선 대대장으로 복무하다 급히 연락을 받고 아버지를 잠시 만났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부대를 오래 비우면 안 된다.”라고 아들의 귀대를 재촉했다고 옆에서 있었던 클라크 장군이 회고록에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미국 제34대 대통령 당선자와 아들(사진:중앙일보)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전쟁 전선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듬해인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뇌출혈로 죽자, 1951년 6월부터 논의되어 끌어온 휴전 회담의 재개를 제의하여 일부 포로를 교환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면서 휴전 협상을 지연시켰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밴 플리트 유엔군 총사령관은 1953년 초 한국전쟁 판세를 파악해 전쟁이 두 달이면 끝날 것으로 분석하고 한국 정부에 알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역하는 밴 플리트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1953년 1월 28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3월에 전역하였다. 최근 동아일보는 장군이 재임시 메모한 ‘육군 사령관 메모(Army Commander Memo)’를 입수하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전달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마침내 휴전하자, 동아시아 냉전 전략과 각국의 군사원조 규모를 재검토하기 위해 미 육사 동기인 밴 플리트 장군을 1954년 4월 단장으로 하는 군사원조특별사절단(the Van Fleet Mission)을 동아시아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에 파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극동 군사원조 특별사절단 단장으로 밴 플리트 장군을 지목한 것은 1954년 4월 26일 시작된 제네바 회담을 앞두고 회담에 반대하며 한국군의 증강을 강하게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고, 극동의 군사원조프로그램(Military Assistance Program, MAP)을 조사 점검하는 정치적, 실용적 차원을 모두 고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군사원조특별사절단의 구성은 맥닐 국방부 차관보(총괄, 국방부 예산 담당), 워렌(William C. Warren) 콜럼비아대학 법대 학장, 왓킨슨(Ralph J. Watkins) 뉴욕 경영정보회사(Dun & Bradstreet, Inc.) 경제연구소장정책(정치 군사분석 자문), 왈츠(Welcome P. Waltz) 대령(군사훈련 및 학교 자문), 퍼거슨 공군 준장, 드가브레 육군 대령, 쥬리카 2세 해군 대령, 맥도날드 해군 대령, 맥코넬 중령(야전훈련/군사학교 담당), 스틸웰 대령(사절단 행정 책임자), 슈메이커 중령(사절단 행정 부책임자), 매튜스 소령(야전훈련/군사학교 등 담당) 등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은 1954년 5월 6일 한국에 도착하여 이 대통령과 회담하고, 9일에는 손원일 국방부 장관 등과 회담하고 10일에는 광주 보병학교, 훈련소를 방문했다. 11일에는 제2군단을 시찰하고 제1군 사령부를 방문했다. 사절단은 12일 타이완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과 회담하고 16일에는 대구를 방문하고, 18일에는 진해 육해군훈련센터를 시찰했다. 사절단은 한국 4회, 일본 2회, 타이완 3회, 필리핀 1회, 오키나와 1회, 괌 1회, 하와이를 1회 방문하며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밴 플리트 단장은 1954년 6월 3일 임시보고서를 제출하고 이승만 대통령과는 6차례 회담하며 한국 육군을 30개 사단으로 증강하기로 합의하였다. 1954년 7월 24일 자 미 국무부 극동국의 파렐만-요스트 비망록에 따르면, 밴 플리트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맥스 레러는 국방부가 20개 사단 규모의 한국군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원조하는데 드는 연간 원조 총액으로 약 7억 5천만 달러를 상정했다. 이는 기존의 육군 64만 5,300명을 약 80만 명 수준까지 증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구 수준과 유사했다.
 
이승만 대통령 미국방문 기념연설(사진:정부기록사진집, 1954.7.28.)
 
미국 군사원조특별사절단은 종합보고서를 작성하여 1954년 9월 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대 시절에 힘든 상황을 많이 겪어 1955년에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1956년에는 크론병(Crohn's disease)으로 인한 장이 막혀 대수술을 받았다. 이때 미국 백악관에 비서실장 제도와 국가안보 보좌관, 참모 조직을 만들고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1956년에 대통령이 직무 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를 대비해 부통령에게 대통령의 권한과 지위를 승계하는 절차, 대통령의 권한, 직무 불능 상태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브라우넬 헌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1957년에는 뇌졸중이 터져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지만 이를 극복하고 재선에 성공해 미국인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아이크’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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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