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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2:53 (2026.02.08. 12:53)

1961년 출항식 마치고 출발... 항해 중 냉장고 기능 상실로 부식 많이 손상으로 고사리 반찬만 먹어

 
한국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 하와이 방문
일본제국의 항복 이후 한반도 주변에는 ‘맥아더 라인각주(MacArthur Line)’이라는 일종의 해양 경계선이 있었다. 이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033호’에 의해 선포된 것으로, 일본의 어업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1952년에 접어들면서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국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 하와이 방문
 
 
일본제국의 항복 이후 한반도 주변에는 ‘맥아더 라인각주(MacArthur Line)’이라는 일종의 해양 경계선이 있었다. 이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033호’에 의해 선포된 것으로, 일본의 어업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1952년에 접어들면서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국 정부는 1952년 4월 2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년 9월 8일 체결)의 발효로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면 일본 어선이 대거 대한민국 해역을 침범할 것으로 예상해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사전 조치가 필요해 조치를 사전에 준비해 평화선을 설정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선포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 평화선은 1929년 일본이 제정한 ‘트롤 어업 금지 구역’을 기준으로 한반도 연안 70해리에서 150해리에 걸쳐 설정하였다.
 
일본은 독도가 평화선 내에 있다고 항의하며 평화선을 ‘이승만 라인’이라고 불렀다. 평화선은 우리 정부가 독도 근해의 해양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주권을 행사할 목적으로 선포하였다. 우방인 미국과 자유중국도 대한민국을 비난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 조치는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당시 한국의 어선 총톤수는 약 10만 톤이고 대부분 무동력선이었고 일본은 첨단 기선으로 총톤수가 200만 톤이 넘었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권고하자, 이 대통령은 해군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에게 평화선을 침범한 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고 명령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약 4,000명에 가까웠다.
 
동해 평화선 침범 일본 어선 체포(사진;궁인창)
 
윤상송 학장은 김천호 개조공사를 진행하면서 동창회 이준수(李俊秀), 박현규(朴鉉奎)에게 부탁하여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에게 선명 반도호와 휘호를 받았다, 실습선 반도호 수리에 들어가는 예산은 재무부 이한빈(李漢彬, 1926~2004) 예산국장과 특별회계 담당이었던 김학렬(金鶴烈, 1923~1972) 경제기획원 조정관의 협조가 컸다.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의 김학렬(사진:나무위키)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에 박태준 포철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이 나란히 서서 기공식 단추를 눌렀다. 우리나라 현대산업을 이끈 김학렬 장관은 아쉽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한국해양대학 실습선이 하와이로 출항하려면 미국의 원조 기관 유솜(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Republic of Korea)의 자금으로 수리해 USOM 킬렌(James S. Killen) 처장의 승인이 꼭 필요했다. USOM은 한국해양대학 실습선의 하와이 출항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배가 오래되고 낡아 사고가 날 위험성이 높다. 선원들의 항해술과 기술력이 조금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당시 하와이의 정치적인 요인도 있고, 한국 해운의 발전을 우려하는 일본 해운 측의 반대 로비도 작용했다. 실습선 출발이 상당히 지체되고 항해가 점점 어려워졌다.
 
반도호 실습선의 하와이 취항 예산은 1961년도 예산으로 확보되어 있어 연내에 출항시키지 못하면 예산이 국고로 모두 반환되도록 설계되어 한국해양대학 측은 하와이 항해 실습을 준비하면서 하루하루가 긴박했다. 윤상송 학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여러 기관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해 어렵게 USOM의 동의를 받았다.
 
한국해양대학 실습선 항해팀은 해양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해무청장을 지낸 황부길(黃富吉, 1905~1995) 고문을 반도호 연습감 및 선장으로 선정했다. 그는 최고 경력의 선장으로 추앙받았다. 여객으로 조선공사의 기술진, 문교부 담당관, 영화제작소 촬영기사 등을 모셨다. 당시 황부길 선장 임기는 1961년 12월 11일부터 1962년 5월 31일까지였다.
 
오당 황부길(사진;궁인창)
 
《바다에 남긴 자취 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 75년사》를 보면 1960년 1월 15일 반도호의 인수 이후 작업 일정과 역대 선장 및 기관장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수금은 1960년 9월 21일에 이창성 교수와 함께 갑판 및 기관 감독관으로 각각 임명되어 개조공사를 총지휘하고 명명식 이후 초대 선장으로 반도호 시운전을 담당해 배의 기관을 확인했다.
 
오당(悟堂) 황부길은 1905년 5월 25일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와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부터 대판상선회사 등에서 15여 년 승무하고 해방 후 1946년 11월에 조선우선(주) 선박부장 등을 역임하며 일본인들이 가져갔던 조선적(朝鮮籍)의 선박을 반환받았다. 1948년 11월 교통부 초대 해운국장에 임명되어 해군과 세관의 선원 사무와 항만관리업무를 인수하여 해운 행정을 일원화하였으며, LST형 9척과 FS형 10척을 도입하여 선복 확충과 항로개발, 해기사 양성과 항로표지시설 복구 등 최적의 해운정책을 수립하고 한국해운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대한해운공사법을 제정해 교통부에서 직영하던 부영선박과 적산(敵産)이었던 조선우선의 선박을 인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외항선사인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했다.
 
1952년 한국해양대학 학장(4대. 6대) 재임 시에는 11억 5천만 환과 국고와 UNKRA 자금 38만 불을 확보하여 교사를 신축했다. 그는 1952년 11월에 대한조선학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유조선(주) 사장 재임 중 1960년 06월 허정 과도정부의 해무청장으로 발탁되어 한국선급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64년 08월에 부산항 도선사, 1966년 04월에 한국해기사협회 회장(9대, 10대)에 취임했다. 그는 해기사로서 보기 드물게 선장은 물론 산·학·관에 걸쳐 다양한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각자 황부길은 1995년 11월 13일 91세로 영면하였다. 2011년 3월 3일 해기사 명예의 전당 선정위원회는 “황부길은 청빈한 공직자로서 대한민국의 해운 개척에 일생을 바쳐 후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음을 높이 평가했다.”라고 밝혔다. 2011년 5월 ‘바다의 날’에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윤보선 대통령 반도호 명명식 방문(사진:한국해양대학교)
 
1960년 12월 14일 영도 대한조선공사에서 개최된 반도호 명명식에 윤보선 대통령과 곽상훈(郭尙勳) 민의원 의장이 참석하였다. 이날 해양대학교 교정에서는 졸업생 230명에 대한 해군 예비역 장교 임관식 거행되어 대한뉴스 제294호에 소개되어 전국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윤상송 학장은 반도호 원양 실습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백상(百想) 장기영(張基榮, 1916~1977) 한국일보 사장을 방문하여 취재기자의 원양 실습 참여와 보도를 요청했다. 한국일보사는 도쿄대학 수학 학사를 거쳐 경북대학교 강사를 하다 1954년 6월 9일 한국일보가 창간할 때 입사한 서광운(徐光云) 기자를 선정했다.
 
해군 예비역 사관 임관식(사진;대한뉴스)
 
동경대는 초창기에 천문학과를 개설했으나 여러 해 동안 한 명의 입학생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 측은 이에 상관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꾸준히 전도유망한 교수와 시설을 확보해 나갔다. 서광운은 한국일보가 신문사 최초로 1958년 과학부를 만들었을 때 초대부장을 맡은 과학 전문기자였다. 부산 국제신문에서는 최계순 기자가 합류하고, 만화가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이 탑승했다.
 
만화가 신동헌(사진:궁인창)
 
만화가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서울대 공과대학 건축과 재학 중 학비 마련을 위해 충무로에서 휴가 나온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곳에서 코주부 김용환 선생을 만나 만화계에 뛰어들어 국내 주요 일간지 전속만화가로 활동하며 명랑만화, 시사만평 등을 연재하였다. 그는 1959년에 국내 최초의 CM송인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로 시작하는 ‘진로 파라다이스’ 광고와 애니메이션과 함께 선보여 1954년 0.5%에 지나지 않던 시장 점유율을 10년 만에 10.1%로 만들었다.
 
진로 창업주 장학엽(張學燁, 1903~1983)은 평남 용강군 지운면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고향에서는 원숭이가 복과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 1924년에 진로 소주의 상징을 원숭이로 정했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서는 원숭이가 교활하고 음흉한 동물이라고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 사람들이 싫어했다. 만화가는 창업주가 말한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하나 낳으라!”라는 덕담에 힌트를 얻어 1954년 소주 상징을 원숭이에서 두꺼비로 바꿨다.
 
신동헌(申東憲) 두꺼비 광고(사진;진로)
 
한국해양대학 하와이 항해 실습선 반도호는 1961년 12월 30일 출항식을 마치고 한국해양대학 14기 78명 생도를 실고 부산항 중앙부두를 출항했다. 반도호의 주요 승무원은 선장 황부길, 기관장 김홍두(기 2기, 극동선박), 1등 항해사 김수금, 1등 기관사 이창성, 2등 항해사 김기현, 2등 기관사 전대희, 3등 항해사 양시권, 3등 기관사 하주식, 통신장은 대한해운공사 부산지점 백영대 통신과장이 담당했다. 차석통신사에 임경옥, service 엔지니어 전효중이 기관 교관을 맡았다. 반도호는 항해 중 냉장고의 기능이 좋지 않아 부식이 많이 손상되어 마른 고사리로 만든 반찬을 먹었다.
 
1962년 1월 17일 태평양에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해 1월 28일까지 교포들과 주민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고 11일간 체류했다. 미국과 한국해양대학 사이에 친선 축구시합이 열렸는데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도 축구를 보러 왔다. 학생과 교수들은 2~3명씩 짝을 지어 1박 2일 홈스테이를 하였다, 한국해양대학 생도들이 민간 외교 사절로 활동한 내용은 대한뉴스 제350호(1962-02-03)로 홍보되었다.
 
성춘향(사진:한국영상자료원)
 
윤 학장은 하와이 교포를 위한 영화필름 성춘향(成春香)을 상영할 생각으로 신상옥 감독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신 감독은 오재경(吳在卿) 공보부 장관에게 부탁하라고 알려주어 외무부의 협조하에 영화필름을 외교행낭(外交行囊, diplomatic pouch)으로 발송했다.
 
당시 영화 성춘항(成春香)은 30대 배우 최은희가 주연해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 영화였다. 특히 대형 화면 칼라 시네마스코프 제작되어 영화관은 연일 초만원이었다. 영화는 하와이에서 상영하여 교포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이승만은 1913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32년간 하와이에서 교육, 종교,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 시위가 419 혁명으로 이어져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거처를 이화장으로 옮겼다.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85세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몇 주 쉬고 오는 게 좋지 않으냐는 측근의 건의를 받았다. 5월 24일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崔伯烈) 씨가 “대통령께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할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 전보를 받았다. 비서들은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은 하와이의 오중정(吳重政) 총영사에게 외교행낭 편으로 “이 박사님 부부가 3주가량 요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와전되어 5월 28일 저녁 동아일보에 망명설로 크게 보도되었다.
 
1960년 5월 29일 오전 8시 45분 이 박사님 부부는 가벼운 가방을 들고 외유(外遊)하러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김포공항에는 許政 내각수반과 李壽榮 외무차관 등이 나와 인사를 드렸다, 전세 비행기는 미국 하와이로 향했다.
 
315부정선거 시위(사진:경향신문)
 
1960년 5월 29일 오후 2시 30분 하와이에 도착하여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1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왔지만,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3주가 지나 귀국이 늦어지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보행이 불편해지고 노인성 질환으로 건강이 나빠져 트리플러(Tripler) 육군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1961년 4월 15일 잔등에 종기가 심해 입원하여 3주간 치료하고 5월 9일 퇴원했다.
 
한국일보 정태연(1933~2013) 특파원은 1961년 4월 30일 오전 9시 30분에 하와이 트리플러(Tripler) 육군병원 3층 16병동 388호실에서 이 대통령을 50분간 인터뷰하였다. 이때 취재한 내용은 한국일보 5월 7일 자에 <일요화제: 병상의 이승만 박사와 50분>이란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1962년 1월 한국해양대학 생도들을 만날 정도로 건강히 좋아졌지만, 외출하지 못했다.
 
1962년 11월경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박사가 고국에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정중히 모셔라.”라고 귀국을 추진해보라고 지시했다. 김종필은 호놀룰루 동쪽에 있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이틀 전 “서울로 간다.”라며 202호 병상에서 일어서다 넘어져 골절상을 입었다.
 
김종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말을 전하고 의장이 마련한 2만 불을 프란체스코 여사에게 전달했다. 일레인 존슨 병원장을 만나 환자 상태를 물으니 “지금 비행기를 타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다. 앞으로 상당 기간 병원에 누워 계셔야만 한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종필은 숙소로 돌아와 박 의장에게 이 대통령의 상황을 보고하자, 박 의장은 “그렇게 위독한가. 어쨌든 잘 모셔라. 내가 이 박사를 꼭 환국하게 해드리겠다고 전해라.”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6월 20일경 건강 상태가 안 좋아졌다. 양자 이인수가 급히 연락받고 7월 4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환자를 돌보았지만,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하와이 요양원에서 향년 90세로 서거했다. 7월 21일 오후 8시 30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려 700여 명의 교포가 모여 고인을 추모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영결 예배 후 영구는 진주만에 있는 히캄 공군기지(Hickam Air Force Base)로 향했다.
 
C-118 미군 의장대 특별기(사진:궁인창)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전장(戰場)을 다녔던 밴 플리트 전 미 8군 사령관이 고인의 마지막 길에 동행하기 위해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로 날아왔다.
 
서울로 향하는 C-118 미군 의장대 특별기는 7월 21일 밤 11시 출발하여 7월 23일 오후 3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5년 1개월 24일 만의 환국이었다.
 
김포공항 유해 운구(사진:궁인창)
 
김포공항에는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조상호, 홍종철, 박종규, 허정, 최덕신, 김정렬, 이후락, 밴 플리트 장군, 브라운 미 대사, 외교사절이 도열하여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를 영접했다. 21발의 조포가 발사되고 고인의 유해는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박치순 목사의 기도로 봉영식을 마쳤다.
 
태극기로 덮인 유해는 시청과 세종로를 거쳐 빈소인 이화장(梨花莊)에 가는 동안 거리의 많은 시민이 애도했다. 당시 영상기록은 대한뉴스 제529호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정부는 국민장을 결정했지만, 유가족은 가족장을 원해 이화장에서 사흘간 조문객을 맞이했다.
 
전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조문 행렬(사진;국가기록원)
 
7월 27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를 한 후, 서울특별시청 앞 광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대통령의 유해는 천천히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했다.
 
당시 수십만 시민이 시청 앞 광장에 나와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추모 인파 수십만이 장장 30리에 이어져 영구 행렬을 따랐다.”라고 보도했다. 오후 5시 45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전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영결식(사진;국가기록원)
 
전 유엔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고인이 편안하게 고국의 땅에 묻힐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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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