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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2.08. 12:45 (2026.02.08. 12:45)

4.19혁명 직후 공석 중 한국해양대 학장 수락...조정환 외교부장관, 평화주권 '평화선' 제안

 
선각자 윤상송의 교육철학- 1
윤상송은 미국 국제협조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지원으로 1957년 10월부터 1958년 2월까지 약 6개월간 미국의 항만행정기관과 아메리칸 프레지던트 라인(APL, American President Line) 등을 시찰하며 해운행정과 해운경영 실태를 배웠다.
선각자 윤상송의 교육철학- 1
 
 
윤상송은 미국 국제협조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지원으로 1957년 10월부터 1958년 2월까지 약 6개월간 미국의 항만행정기관과 아메리칸 프레지던트 라인(APL, American President Line) 등을 시찰하며 해운행정과 해운경영 실태를 배웠다.
 
그는 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교육의 필요성과 부족함을 느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행정대학원은 행정학을 연구하고, 응용력을 발휘하는 고급공무원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9년 1월 13일 설립하였다. 윤상송은 1년을 수료하고 석사 논문을 준비하였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이에 젊은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항거를 시작해 전국적으로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였다.
 
1960년 4.19혁명기록물(사진:유네스코한국위원회)
 
小滄(소창) 신성모(申性模, 1891~1960) 한국해양대학 학장은 1956년 11월 28일에 학장에 취임하여 4년간 대학 일에 전념하다 4.19 혁명 직후인 5월 29일 별세하였다.
 
신성모 학장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07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야간반에 입학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8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와 안희제의 지도를 받으며 항일독립투쟁에 참여했다. 그는 조선 해군 창설의 꿈을 안고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신규식 선생의 학비 지원을 받아 우쏭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 現 상하이 해사대학) 항해과에 들어가 1년간 배운 뒤 학교장의 추천으로 남경해군사관학교에 편입학하였다. 중국군 해군 소위에 임명되어 중국해군본부에서 해군 원수 사젠빙(薩鎭氷) 사령관의 전속부관 장교로 근무하고, 무선전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우쏭, 총밍다오 군사시설 무선통신국에서 근무했다, 1919년에 베이징에 안착해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했다.
 
1920년 12월에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이던 백산상회에 독립자금 전달 사건으로 안동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23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킹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King Edward VII Nautical College: 現 런던 메트로폴리탄대학교)을 졸업해 1등 항해사 자격을 얻었다. 1930년부터는 영국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의 선장이 되었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에게 임정군사위원직을 특별 임명하였다. 1947년 고향 친구 이극로(1893~1978)에 의해 경향신문에 ‘항해대왕’으로 소개되고, 1948년 8월 초 동아일보에 ‘한국이 낳은 바다의 거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광복 이후 허정 교통부 장관의 추천으로 1948년 11월 2일에 배편으로 환국하였다. 신성모는 런던 유학으로 영어에 능통해 정부 요직에 발탁되었다. 1951년 제5대 주일본 수석 공사로 근무하고 1952년 8월에 귀국해 11월에 신설된 해사위원회 위원장, 12월에는 대한조선공사 사장에 취임하고, 내무부와 국방장관을 지내고 1956년 11월에 제8대 해양대학 학장이 되었다.
 
신성모 학장은 부임 이후 급식을 개선하고, 교육제도 개혁과 연습선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는 정부와 대한해운공사를 설득하여 김천호(金泉號, 3,304t) 인수하여 실습선으로 개조공사가 진행되었다. 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는 1934년 일본 하리마 조선소에서 화물선으로 건조된 후 2차 대전에 참전해 연합국의 어뢰 공격을 받아 선수 접합 수리를 받았다, 이 배는 부산에서 군수품을 하역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 연안에 정박했던 모든 일본 선박은 한국의 소유라고 못 박아 金泉號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1947년 대일선박 반환청구로 우리나라에 돌아와 화물선으로 운항하다 미군정청 포고령 30호에 따라 일본에서 귀국하는 동포를 싣고 한국 해역에 있다가 소유권이 한국으로 이관되어 대한해운공사에서 김천호로 활동하였다.
 
한국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사진:한국해양대학교)
 
신성모 학장은 해군예비원령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당시 해양대학생들은 재학 4년 동안 해군예비역으로서 군사훈련을 이수하고 있었지만, 현행법이 없어서 해군예비역으로 임관되지 못하고 군에 징집되는 것 외에는 병역을 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 취업도 할 수 없었다. 해군예비원령 법령은 해운, 수산계 대학 학생들이 재학 중 해군 군사훈련을 이수하고 해양대학 졸업생들이 법적으로 해군 예비역 신분을 인정받아 상선 사관으로 승선 근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신 학장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해군예비원령의 제정을 추진하여 해군예비원령은 1958년 10월 7일에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신성모 학장이 개인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해양대학 10기, 11기, 12기생들이 소급하여 임관될 수 있었고 그 뒤에 7.8, 및 9기생들도 소급하여 임관되었다.
 
군산에서 공부하던 조선해양대학 학생들은 한국전쟁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산(釜山)으로 피란하여 실습선 단양호(丹陽號)에서 수업을 계속하다가 1953년 10월 5일 6.25 당시 교통고등학교가 임시교사로 사용하던 부산시 거제동에 있는 철도 관사촌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2년여 생활하는 동안 해양대학 6기, 7기가 졸업하고 신축부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당시 황부길(黃富吉) 학장과 이시형(李時亨) 부학장, 孫兌鉉 교수 등이 부산 각처를 탐사했다. 이후 부산 영도구 동삼동 618번지 2만여 평의 학교 부지를 1954년 2월 구하게 되었다.
 
1953년 운크라 원조 조인식(콜터 UNKRA 단장과 백두진 국무총리)(사진:국가기록원)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약칭 UNKRA)은 한국의 경제 재건과 복구를 위해 1950년 12월 1일 창설되어 1958년 6월 30일까지 활동하며 총 1억 2,208만 4천 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한 유엔 기구이다. 운크라는 산업, 교통, 통신 시설 복구, 흙벽돌 재건주택 단지 조성, 의료, 발전 시설 및 송배전선 부흥, 교육 시설, 교과서 인쇄 공장 건립 등 교육 재건 지원건설 등을 지원했다. 1960년 초등학교 자연교과서 맨 뒷장을 펼쳐보면 “이 책은 유네스코와 운크라에서 인쇄기계의 기증을 받아 설치된 대한문교서적주석회사 인쇄공장에서 박은 것이다. 문교부 장관” 이란 글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해양대학 신축에 들어가는 예산을 취소하고 해군사관학교와 해양대학을 합칠 생각을 하였다. 이 대통령은 7번의 지시를 내려보냈지만, 유엔한국재건단 컬터 단장이 “UNKRA 예산은 군사 목적으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다. 만약 한국 정부 뜻대로 사용된다면 대한 원조가 줄어들 수 있다.”라고 이 대통령에게 관련 조항을 자세히 설명했다.
 
국립중앙의료원 개원식(1958.10.2.)(사진:서울기록원)
 
해양대학 학생들의 힘으로 건물 진입 도로공사가 끝나고 1954년 8월에는 교사, 기숙사, 연구실, 도서관 등의 본격적인 건물 신축공사가 착공되어 1955년 10월 초에 건물이 완공되었다. UNKRA 원조 35만 불로 세워진 최신식 현대 건물이었다. 이제 해양대학은 진해교사에서 나온 후 오랜만에 본 교사를 가진 당당한 학교가 되었다. 1955년 11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한 UNKRA 단장인 컬터(John B. Coulter, 1891~1983) 장군과 각부장관 해군 장성 등 고위 관계관들의 임석하에 성대한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한국전쟁 낙동강 전투의 영웅인 Coulter 장군은 1952년 전역한 후 1953년에 UNKRA의 수장이 되어 1958년까지 한국의 학교, 병원, 도로, 주택 재건과 산업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1955년에 AID 자금을 지원받아 충주의 비료공장을 착공하고, 1957년에 인천판유리공장을 준공했다. 한국 정부는 1959년 10월 15일 용산기지 인근인 이태원 로터리에 Coulter 장군의 공적비와 동상 3m(기단 3.6m)을 건립하였다. 이후 남산 3호 터널 공사로 인해 1977년 7월 7일 어린이대공원으로 동상을 이전하였다. 그는 1960년대에 한국문화자유재단의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전쟁 미국 참전용사들을 기리고 미국과 한국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했다. 1983년 3월 91세로 별세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전신(사진:한국해운신문)
 
이런 아픈 역사를 가진 한국해양대학 교수들은 돌아가신 신성모 학장 후임으로 여러 사람을 추천하다 윤상송을 최고 적임자로 판단했다. 당시 윤상송은 서울대 행정대학원 대학원생으로 논문을 준비 중이라 대학 측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거절하였다. 국립대학 총학장 선임은 해당 대학 교수회의가 결정하여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이 되어 있었다. 한국해양대학은 전체 교수회의에서 학장 후보자의 승낙 의사와 관계없이 학장 후보를 선정하여 대학 실무자는 윤상송 선생댁을 다시 방문하여 학교 상황을 설명했다. 대학은 4.19혁명 직후라 학장 자리를 공석으로 오래 놔둘 수가 없어 연일 조마조마했던 시기였다. 학장 후보자 윤상송은 3가지 조건을 내걸고 해양대학 동창회의 간부들과 서울에서 만났다. 학장 후보자는 “앞으로 해양대학은 보결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학교 예산 확보 투쟁에 동창회가 적극 앞장을 서며, 학생의 통제에 동창회가 협조한다.”라는 조건을 설명했다. 해양대학 동창회는 윤상송 학장 후보자의 제안을 수락했다.
 
1960년 8월에 한국해양대학 9대 학장(기간:1960.08.14.~~1962.06.07)에 취임한 윤상송은 학교 발전과 제자들의 미래상을 곰곰이 생각하며 해양대학 실습선을 하와이로 보낼 결심을 하고 구상에 착수했다. 윤 학장은 1952년 1월 18일 대통령 이승만이 선포한 평화선을 생각하며 한국해양대학 학생들이 더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연안 항해가 아닌 원양 실습이 꼭 필요하고 최소한 태평양 하와이까지 보내고 싶었다. 해방 후 동해 평화선 제정은 일본에 유학했던 월해(月海) 지철근(池鐵根)이 상공부 수산국장을 지내며 외교관 김동조와 협력하며 문안 작성을 주도했다. 1952년 1월 18일 대통령 이승만은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선포했다.
 
연구자는 2024년 4월 30일 일본 시마네현청 별관 2층 죽도(竹島) 자료실을 방문했을 때 자료실에서 동해 이승만 라인(평화선) 관련 자료를 보았다.
 
동해 평화선 구상자 지철근, 김동조(사진;궁인창)
 
대한민국의 「해양주권선언」에서 ‘평화선(平和線)’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1953년 1월 28일 조정환(曺正煥, 1892~1967) 외무부 차관이 부산의 영국대사에게 보낸 서간에서부터 유래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 정설이다.
 
曺正煥은 1892년 전라도 여천군 율촌면 조화리에서 태어났다. 숭일학교는 배유지(유진 벨, Eugene Bell) 선교사가 1908년에 고종황제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고 광주 양림동에 1909년 학교 건물을 착공해 1910년 여름에 3층 건물을 완성했다. 건물 완공 후 변요한(존 프레스톤, John Fairman Preston, 1875~1975)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조정환은 숭일(崇一)학교 보통과를 1911년 6월 제1회로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했다. 변요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1915년 켄터키 주립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를 마치고 1918년 미국 켄터키주 비리야대학 역사정치과를 졸업(석사)한 뒤에 1922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정환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곧장 조선으로 돌아와 변요한 선교사가 건립한 순천 매산학교(梅山學校)에서 부교장를 지냈다.
 
서대문형무소(사진: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그는 1924년에는 이화여전에서 강사로 일하며 인재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전남 벌교에서 월파 서민호가 세운 남선무역(南鮮貿易株式會社)에 관여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접촉하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이를 수상히 여긴 일경은 친미파란 구실로 조정환을 체포해 재판받고 7년간의 옥고 끝에 8.15 광복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수형생활을 오래 한 조정환은 1945년 미군정청 기획처 고문을 거쳐 1946년 주일외무관장에 임명되어 3년간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9년 외무부 차관에 임명되어 재일동포 인권 문제, 대일외교 등을 국회에 보고했다. 1950년 3월 30일에는 한미군사협정의 주요 목적과 협정의 내용을 국회에서 설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요청했다. 1951년 7월 외무부 차관(2대)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1952년 10월 다시 외무부 차관(5대)이 되었다. 조 외무차관은 1952년 11월 6일 국회에 출석하여 국회의원들에게 외교관 교육 시스템 강화와 평화선을 비롯한 외교 문제, 경제 원조 등의 외교 담론을 이야기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한국전쟁은 종결되었다. 휴전협정 제4조 60항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어 효력을 가진 뒤 3개월 내에 고위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권고하였다. 1954년 2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 외상회의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관련국 간의 회의를 제네바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 정치회의가 개최되어 조정환 외무차관은 변영태 외무장관과 함께 참석하여 실무를 담당하였다. 제네바회의는 50여 일간의 논쟁 끝에 1954년 6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1954년 제네바회담(사진;궁인창)
 
조정환은 외무장관서리(재직 기간: 1955.7.29~1956.12.31)를 거쳐 제4대 외무부 장관(재직 기간: 1956.12.31.~1959.12.21)에 취임하였다. 1957년 2월 4일 외무부 장관으로 국회에 출석하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가입 이유와 국제수로기구(IHO)의 가입 필요성을 설명하고 1956년 체결한 한미우호통상조약의 의의를 말했다. 4월 23일 국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의 대한민국 가입을 허락해 달라고 연설했다. 유엔총회 한국 대표 등을 역임하다 1967년 사망했다. 정부는 197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고인에게 대한민국 1등 수교훈장 광화장(光化章, Gwangwha Medal)을 수여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둘째 딸 조은선은 1970년대 미국에 이주하였다. 그녀는 나이가 89歲가 되어 2013년에 딸 박봉희(65歲)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외손녀는 어머니의 가족 이야기를 듣고 1970년 8월 16자 한국일보 신문을 보다 외할아버지 ‘조정환’ 이름을 발견해 무척 기쁘고 놀랐다.
 
한국일보 신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을 맞이하여 130여 명에게 각종 훈장과 포상을 수여했다.”라고 보도했다. 외손녀는 90세 고령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훈장을 전해드리고 싶어 미국에서 안전행전부에 훈장 재교부 탄원서를 제출했다. 훈장은 종로에 있는 제작소에서 제작되었지만, 보내주지 않았다. 외손녀는 힘들게 고국을 방문하여 훈장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절차가 힘들고 너무나 어려웠다. 그녀는 조씨 문중, 종교계, 외교부, 안전행전부 등 여러 관공서를 두루 방문했지만, 문전박대만 당해 다시 탄원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수교훈장을 외교 행낭을 통해 미국 휴스턴 총영사관에 보냈다. 수교훈장은 2014년 3.1절 댈러스한인회에서 주최한 기념식에서 딸인 조은선(90歲)에게 전달하였다. 모녀가 할아버지의 훈장을 찾아 나선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300일 만의 기적이었다. 2014년 3월 20일 자 한국일보에 "미국서 한국일보 챙겨 본 게 행운" 44년 만에 찾은 할아버지 훈장으로 기사화되었다. 조정환 외무부 장관은 한국 외교의 산증인으로 ‘한일회담 미국무부 문서’를 통해 그의 뛰어난 행적을 엿볼 수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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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